어렸을 적 지나 가면서 참 이상한 모습이라고 느끼곤 했던 비양도. 자라면서 '어린 왕자'를 읽었는데, 그 책 서두에 중절모 옆 모습 같은 형상을 보고 여러 가지 사물 모양을 추측하는 대목에서, 그것은 남미 열대산의 '보아'뱀이 코끼리를 잡아 먹은(?) 형상이라는 글귀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곳에 가보았다. 그 전까지 비양도는 적어도 내 머리 속에는, 오른 쪽은 '보아'뱀 입 부분, 가운데가 코끼리가 들어있는 곳, 왼쪽은 꼬리인 그 이미지 그대로였다. 배를 타고 나오면서 다시 보았는데, 역시 그 모습이었다.
오늘도 역시 가보지 못했던 곳을 가는 데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소풍을 앞둔 어린이같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날씨는 구름이 짙게 깔리고 바람도 불어, 비가 한껏 내릴 것 같았다. 비양봉 산행이 1박 2일이라 참가 인원이 적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열 여섯 명이 참가했고 그 중에는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의 종주를 마치고 돌아온 서 국장도 끼어 있었다. 조그만 고깃배를 타고, 제법 파도가 있는 비양도 앞바다를 가로질러 갔는데, 우도의 도항선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배를 탄 지 10분 정도 지나서 섬에 다다랐다. 생각과 달리 포구에는 비릿내가 나지 않았다. 몇몇 동네 할머니들과 집 30여채가 눈에 보일 뿐이었다. 민박집에 도착했는데, 민박집 아줌마는 인심이 좋아보였고 집도 우리 일행이 쓰기에는 넉넉할 뿐만 아니라 아주 깨끗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는 어부, 아줌마는 해녀, 자식들은 제주시에서 생활하는, 요즘 어촌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주인 아저씨는 월남 파병 군인이어서, 마루벽 위에 훈장들이 여럿 걸려 있고, 집안 윗분들(아마도 돌아가신)의 사진들도 가지런히 붙어 있어서 이 집안의 가족애가 느껴졌다. 비양봉 산행을 위해서 가는 도중에 폐가가 여럿 보였다. 길가에는 유난히 폐그물이 많았다. 고기 잡이 생활에서 나온 폐그물을 소 또는 흑염소의 우리를 두르는 데 재활용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비양봉 산마루에 올랐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깊게 팬 굼부리가 두 개 있었다. 나무만 없다면 송악산 굼부리와 비슷했다.
나는 정상 가까이에서 일행의 선두에 섰는데 뱀이 스르륵 지나갔다. '뱀이다!' 내 외침에 뒷 일행이 주춤하였다. 내 수호신인 몽둥이를 지니고 있지 않아서 나는 매우 불안했다.
하얀색의 등대가 조금은 이국적이었다. 마치 누드 모델 '미야자와 리에'가 찍은 '산타페'풍의 냄새(?)가 비양도 정상과 어우러졌다. 섬 뒤의 해안선을 따라 바위섬들이 보이고 그 앞에는 큰 여를 형성했는데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 흰 포말을 만들어냈다. 2차 대전 말기에 이 근처에서 일본 함선이 귀향하다 미군 잠수함에 격침 당해서 500여명이 수장됐으며, 지금은 1년에 한 번 그 친지들이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그날 밤 동네 '할망'들로부터 들었는데, '큰 가재·족은 가재'는 오름 이름이 아니라, 이 여(큰 가재·작은 가재)를 일컫는 것이라고 한다. 섬의 반대쪽을 하산길로 택했다. 하산길 왼쪽에는 작은 굼부리가 있고 그 주변에 비양나무가 군데군데 서 있었다. 돌아오는 돌담길에 노란색의 고운 황근(갈잎좀나무. 초여름에 누런 꽃이 핌. 제주도에서 자람.)이 검은 돌담색과 대조를 이루며 피어 있었다.
저녁 시간에 배가 고팠는지 '물웨'로 만든 냉국에 밥 몇 공기가 그냥 없어졌고, 그 후에는 자연히 술마당이 이어졌다. 서 국장이 가지고 온 사천술부터 소주까지 술은 많았는데 안주가 문제였다. 가까스로 구한 '한치'로 술자리는 부산하였다. 일찍부터 술자리에 합석한 사람, 먼저 자는 사람, 자다가 술마당에 합류하는 사람 등 가지 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술이 좀 됐는지 한 사람 두 사람 방으로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주당들은 오랜만의 해후여서 그런지, 여러 얘기가 이어지면서 여름밤은 깊어만 갔다.
다음 날 아침 '멜국'으로 해장하고 다시 산행에 나섰는데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다. 다시 정상에 올라서야 어젯밤에 싸인 주독이, 흐르는 땀과 함께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뒤쪽 해안가로 하산하였다. 고만고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해안가에 도착하니 돌들이 쨍쨍 울렸다. 소리가 매우 맑았다. 조금 동쪽 해안으로 가니 울릉도 1경인 '코끼리바위'보다는 작지만 모양은 영낙없이 닮은 큰 바위가 서 있고, 그 옆에 시커먼 화산탄(직경 2미터 정도)이 있었는데, 지금도 표면이 식지 않은 듯 갈라진 틈들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4미터 정도의 '애기업은돌'을 봤다. 누군가 보호해야 할 것들이다. 이곳은 '화산박물관'으로 만들어 보존해야 될 지역이라는데…. 점심인 '오분재기' 죽을 끝으로 비양도 일정이 모두 끝났다. 올 때 탔던 그 고깃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다시 비양도를 돌아보니 그 모습이 영낙없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형상이었다.
1996년 7월13일 고경완
※ 보아(boa) : 몸은 비단구렁이보다 작지만 최대 몸 길이가 약 5미터에 이르는 큰 뱀. 남아메리카 열대 삼림에서 살며, 쥐 등을 잡아 먹음. 적갈색 바탕에 등면에는 15-20개의 큰 황갈색 마름모꼴 무늬가 있어 아름다움. 독이 없고 온순함. 이 뱀의 고기는 토착민의 식용이 되고 가죽은 가방, 지갑 등을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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