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긴 몰라도, 정조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그의 별명은 필경 ‘이짱’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홈페이지는 연일 손님들로 북적거렸을 것이고, 팬클럽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짱 신드롬’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였을 거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는 가문 출중하고 학업성적 뛰어난데다 무술실력 또한 탁월한 '엄친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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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이쯤에서 우려되는 점이 딱 한 가지 있긴 하다.
그의 외모와 관련하여서다. 혹자는 그의 이름을
들을라치면, 먼저 안성기(영화 ‘영원한제국’)나
이서진(드라마 ‘이산’) 같은 준수한 용모부터
떠올릴 런지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접해온 그의 용모 또한 매우 준수한 편이었다.
마치 안성기와 이서진을 섞어놓은 얼굴형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교과서에 실린 어진(御眞)은 정조의
실제 모습을 담은 것이 아니다. 그건 1989년 제작된
이길범 화백의 상상도일 뿐이다.
워낙 학식이 뛰어났던 임금이었던지라 성군(聖君)의
이미지를 강조하다 보니 ‘곱상한’ 지금의 어진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실제 어진이라 믿어지는 조선시대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에 담겨있는 정조의 얼굴은 그동안 우리가
늘상 보아왔던 정조의 얼굴과 사뭇 다르다.
아니, 사뭇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전혀 딴판이다.
말하자면, 안성기나 이서진 쪽 보다 차라리
야인시대의 ‘무옥이’(개그맨 이혁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쪽에 더 가까운 외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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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KBS-TV는, 이 어진에서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며
「무인(武人) 정조대왕」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하기까지 하였다. 작위적인 느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니 그 또한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각설하고, 그 의 생김이 어떠하였든 조선 22대 왕 정조는 조선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임금 중 하나였음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그가 경연에서 날고 긴다는 대신들을 직접 가르쳤음을 증언하는 문헌이 적지 않을 뿐더러 활쏘기 실력이 신기에 가까웠다는
기록(어사고풍첩)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문(文)․무(武)에 두루 뛰어난 정조였지만, 그가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하기만 하였다. 조정을 접수한
노론세력의 노골적인 반대 속에서 온갖 위협과 고초를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손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다가는 자칫 연산군 때 처럼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참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노론세력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손이 비록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하였으되 그는 엄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게다가 사도세자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까지 목격한 당사자가 아니던가.
때문에 굳이 '삼종(세 임금)의 혈맥'을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세손이 아니라
경빈 박씨의 후손인 은전군이어야 한다는 것이 노론세력의 생각이었다. 나인시절 방애라고 불렸던 경빈 박씨가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 아들 은전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한 노론세력은 세손을 제거키로 하였다. 당시 세손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였으므로 이런 기회를 살려
속전속결로 끝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선두에 홍봉한․홍인한 형제와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서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장인이 사위를 제거하려 할 만큼 당론이 모든 것을 압도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세손의 편이었다. 세손의 어머니이자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가 세손의 제거를 결사적으로 막고
나섰던 것이다. 비록 권력유지를 위해 남편(사도세자)까지 버렸던 그녀였지만,
아들을 향한 모성애가 권력욕을 눌러버린 셈이었다. 이로 인해 딸 덕분에 정승자리까지 해먹었던 홍봉한은
잠시 주춤해졌지만, 홍인한은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홍인한은 세손의 작은 할아버지인 관계로 당초에는 세손 편에 섰었으나 탐욕이 많고 포학하다는 이유로
세손이 배척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당시 권세를 누리던 정후겸에게 붙으면서 세손의 ‘원수’가 된 인물이었다.
이로써 ‘이산 대리청정 반대투쟁위원회’는 홍인한과 정후겸의 ‘투톱체제’로 진용이 짜여지게 되었다.
홍인한은 장외(혹은 현장)투쟁을 담당하고, 정후겸이 지휘본부를 총괄하는 역할분담까지 그런대로 마무리지었다.
1775년 11월(영조 51년) 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영조가 대리청정의 뜻을 밝혔다.
"몸이 매우 안좋으니 공사를 펼치기가 어렵다. 내가 국사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알겠는가? 국사나 조사(조정의 일)를 제대로 알겠는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누가 해야 하는지를 알겠는가? 세손에게 전서하고 싶지만 어린 세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대신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좌의정 홍인한이 기다렸다는 듯 반대 주장을 피력하였다.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었다. ‘왜 필요 없는지’ 따위는 없었다.
이를테면 ‘내가 현정화라 하면 그냥 현정화‘란 논리였다.
그리고 1775년(영조 51년) 12월 노환이 깊어진 영조가 신하들 앞에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밝혔을 때는,
현장투쟁 담당답게 영조 앞에서 ‘깽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세손까지 지켜보는 자리에서였다.
「영조실록」은 당시의 어수선했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 이때 좌의정 홍인한이 승지의 앞을 가로막고 앉아서 승지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임금의 하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들을 수 없게 하였다.
어이그,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저걸 확…. 영조는 내심 울화통을 터뜨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으리라.
하지만 82세의 ‘파파할아버지’인 영조로서는 더 이상 옥사를 일으킬 기력이 없었다.
그 대신 영조는 세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세손에게 순감군(巡鑑軍)의 지휘권을 넙죽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도 홍인한 등의 이산 즉위 반대투쟁은 계속되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머리에 '결사반대' 글자
선명한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영조의 침소 앞에 거적데기 깔고 드러누워 영조의 출입자체를 원천봉쇄하는
극단적 투쟁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늙으면 고집도 세진다고, 영조 또한 대리청정의 고집을 쉬 꺾지 않았다.
당시 건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자신의 명운(命運)이 다했음을 노인 특유의 직감으로 느끼고 있던 영조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더욱이, 이미 옥쇄 등도 세손에게 넘긴 상태였으므로 기실 공식적인 발표만 남겨놓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한데 좌의정이라는 자가, 더욱이 세손의 외할아버지란 자가 제 손자놈이 임금되는 걸 막기 위해 허구헌 날
‘땡깡’이나 부리고 있으니…ㅉㅉ, 이래저래 영조의 시름은 깊어만 갈 따름이었다.
한편 ‘이반투위’ 지휘본부에서 이 모든 상황을 체크하고 있던 정후겸은 정공법만으론 세손을 제거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 썼던 변칙공격까지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세손이 민가에 돌아다니며 금주령 중에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한편,
세손의 시중을 드는 내관들을 꾀어 음탕한 놀이를 권하게 하는 방식 등으로 세손이 결코 왕재(王才)가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다행히 세손은 이 꾐에도 쉬 넘어가주질 않았다.
하지만, 단 한번 위기가 닥쳐온 적이 있었다. 세손이 당시 금기시 되었던 ‘시전요아편(詩傳蓼莪篇)을 읽다가
영조에게 걸릴 뻔 했던 것이다. 영조는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한 이후 시전요아편을 읽지 못하도록
특별 분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요아 편에는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자칫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은
세손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으니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할진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여도 다 할 수가 없구나」
(父兮生我 母兮鞠我 欲報深恩 昊天罔極) 같은 대목이 그것이었다.
한데, 세손이 바로 이 구절을 읽고 큰 슬픔에 젖어 눈물 콧물을 짓이길 즈음 이 장면을 목격한 내관이 쪼르르 영조에게 달려가
냉큼 고자질해버리고 말았다. 영조는 크게 노하여 대뜸 세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세손이 앉은 앞에서 내관에게 방금까지 세손이 보고 있던 책을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세손은 당황하였다. 급히 부름을 받고 오느라 시전 요아 편을 그대로 펼쳐둔 채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관이 가져온 시전에는 요아편 부분이 오려져 있었다.
이때 시전의 요아편을 잘라내 세손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 바로 홍국영이었다.
때마침 동궁에 들렀던 그가 급히 어전에 불려가는 세손의 행보를 이상히 여기고 세손의 방에 들어가 보니 시전요아편이
펼쳐져 있는지라 그 부분을 미리 칼로 오려내 두었던 것이다.
영조가 그 부분이 오려진 연유를 묻자 세손은 엉겁결에 그 책을 읽지 말라는 분부 때문에 그러하였노라고
대답함으로써 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게 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의 ‘존현각일기’에 홍인한과 정후겸 등 특권외척들이 자신이 어떤 공부와 대화를 하는지 항상 염탐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왕위계승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공세를 멈출 노론이었다면 이들을 애초에 노론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세손을 마치 ‘손안의 공기돌(手中之物)’ 정도로 여기며 이후로도 끊임없이 모함과 위협을 가해왔다.
-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마다 엿보고 탈취했으며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정조의 ‘존현각일기’ 중에서>
정적들이 끊임없이 감시하고 위협하는 이 시기 정조는 죽고 싶은 심경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노론들의 노골적인 반대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홍인한의 극렬한 반대는 점점 그 도를 더해 가기만 하였다.
영조나 세손에게 있어 홍인한은 그야말로 ‘웬수 중의 상웬수’ 같은 존재였으나 그를 따르는 무리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한숨만 푹푹 토해낼 뿐 달리 어쩔 도리도 없는 난감한 형국이었다.
이처럼 홍인한․정후겸 등 노론 외척당의 모함이 정도를 넘어 급기야 왕세손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질 즈음,
세손으로 하여금 그들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하는 '회심의 한방’이 터졌다.
스물일곱살의 소론계 공신 서명선이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의 전횡을 폭로하는 상소를 전격적으로 올렸던 것이다.
이 상소는 세손이 영조에게 직접 올리려고 계획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서명선이 정민시․홍국영과의 막후교섭을 통해
그 위험부담을 혼자 떠맡고 나섰던 것이다. 때는 1776년 1월하고도 하순이었다.
영조는 원임대신들과 양사 그리고 상소문의 장본인 서명선을 부른 후 서명선으로 하여금 직접 상소문을 읽도록 명하였다.
서명선은 하등의 망설임없이 상소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홍인한의 '삼불필지설'에 대하여 실랄히
비판하는 한편 영의정 한익모가 하였다는 '좌우는 걱정할 것 없다(산하들이 잘 하고 있으니 대리청정은 필요없다)'는
말에 대하여도 강도높은 비판을 가하였다.
서명선의 상소가 끝나자 영조는 대신들에게 상소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영조의 물음에 모호한 답변만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이에 흥분한 영조가 다시 한번 다그쳤으나
대신들은 '여론을 잘 알지 못해 대답을 못하겠다(김상복)'는 등 여전히 모호하게 말을 돌리며 시비 여부를 판정하지 않았다.
격분한 영조는 중추부영사 김상복과 판중추부사 이은, 김양택을 해임하고 대사헌은 삭직시켜버렸다.
그리고 한익모와 홍인한의 이름을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지우도록 명하였다.
‘앓던 이’ 홍인한이 조정에서 쏙 빠지자 대리청정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조는 1776년 1월 27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그 3일 뒤인 1월 30일 대리청정 의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 3개월 뒤 영조는 사망하였다.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에 세손이 왕위를 승계하는데 걸림돌이 될만한 것을
깨끗이 제거해주고 그렇게 떠나갔던 것이다. 미상불, 그즈음 세손은 노론 대신들의 파상공세에 내내 시달려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신의손’ 영조의 ‘철벽블로킹’으로 숱한 위기들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였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세손에게마저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명선의 상소 이후 소싯적부터의 ‘라이벌’ 정의겸이 심상운이라는 자로 하여금 서명선의 상소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사주하여 조정이 또 한번 불난 호떡집이 되긴 하였지만,
대세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 이야긴 이쯤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한 부사직이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 한 장이 정국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뒤바꿔 놓았고,
‘개혁군주’ 정조의 시대는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개막의 팡파레를 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직후 정조는 대신들 앞에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대신들은 경악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도자의 취임 일성은 새 정권의 국정운용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정은 아직 그 아버지를 제거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세력은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논리로 정조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은 무리였다.
때문에 정조가 임금으로 즉위한 것은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였던 것이다.
한데 그런 임금이 스스로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나섰으니 다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여 그가 초장부터 숙종처럼 ‘환국’를 통해 조정을 바둑판 뒤엎듯이 발칵 뒤집어 놓았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워낙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뒤끝이었거니와 당시 조정은 여전히 노론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미상불 섣불리 판엎기를 시도할 상황도 아니었다.
실제로 즉위년 8월 영남유생 이응원이 '영조 38년에 사대부도 아닌 일개 중인 나경언이 임금에게 상변서를 올린 것은
노론의 음모에 기인하는 것'이라며 관련자들의 척결을 요구하자, 이는 '어리석은 짓 아니면 미치광이 짓'이라며 오히려
이응원 부자를 '대역부도'로 처벌하기까지 하였다.
정조에게 있어서 아버지 문제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방정식' 혹은 '뜨거운 감자'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버지를 따르자니 할아버지가 울고, 할아버지를 따르자니 아버지가 우는, 그야말로 진퇴양란의 입장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즉위 초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하고 사당을 '경모궁'으로 높이는 숭모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시범케이스'로
자신을 축출하려 하였거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에 대하여는 역모죄 등을 적용하여 응분의
책임을 물었다. 이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여, 세자시절 사사건건 맞섰던 ‘이반투위’의 투톱 홍인한과 정후겸을 여산과 경원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하고
화완옹주를 사가로 내쫓았으며, 문 숙의의 착호를 삭탈하고 그 오라비 문성국을 사사하는 한편 그의 어미는
제주도로 보내 노비로 만들어버렸다.
대비인 정순왕후에 대하여는 직접 공격을 자제하였지만 2인자 홍국영을 앞세워 그 오빠 김귀주 일파를 모조리 숙청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척신들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정치판에 끼어든 환관들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다만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치죄를 요구하는 내외의 여론이 빗발쳤음에도 혜경궁 홍씨가 단식까지 하면서 극렬하게 반대하여
처벌에 어려움이 있었다.
영조 38년 사도세자를 죽인 후 극도로 비대해졌던 외척세력이 이런 정조의 배척으로 즉위 반년만에 일단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외척은 발본색원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었다.
여전히 궁중 깊숙한 곳에 ‘정순왕후’와 ‘혜경궁’이라는 외척의 뿌리는 건재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다.
또한 정조의 이 같은 조치는 그와 반대편에 서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아연 긴장케 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고 정조가 세손이었던 시절 그를 핍박하였던 이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로서는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결국 정조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1년에 있었던 3건의 반역사건이 그것이다.
이 3건의 반역사건은 공교롭게도 모두 홍계희의 가문에서 주도하였다. 홍계희는,
주지하다시피 ‘나경언의 상소 사건’을 배후조종한 인물이었다. 홍계희는 1771년 이미 사망하였지만
그 가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누구보다 불안하게 여기는 형편이었다.
이에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은 궁중에 암살단을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1777년(정조 즉위년) 7월 28일, 홍상범에게 포섭된 천민 출신 장사 전흥문과 궁궐 호위군관 강용휘를 선발대로
한 20여명의 암살단이 궁궐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궁중별감 강계창과 나인 월혜의 길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없이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존현각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하나씩 들어내는 순간, 때마침 독서 중이던 정조 -
그즈음 그는 신변에 대한 위협 때문에 밤에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 가
수상한 기척을 감지하고 호위내관들을 긴급 호출함으로써 암살단은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정조에 대한 이들의 암살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주범 홍상범과 홍대섭, 유배지에서 이를 배후조종한 홍상범의
아버지 홍술해․홍지해 형제, 그리고 홍상범의 4촌 승지 홍상간 등 등을 숙청시키면서 사건수사는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것이 끝은 아니었다. 궁궐 난입사건에 대한 수사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배당한 홍술해의 처(효임)가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을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효임의 의뢰를 받은 점방은 다섯 군데의 우물물을 받은 다음 홍술해 집과 홍국영 집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합하여
한 그릇을 만들고는 그 물을 홍술해의 우물에 부음으로써 홍국영의 기를 빼앗고자 하였다.
또한 붉은 모래로 정조와 홍국영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 화살을 꽂아 땅에 묻어버린 다음 홍국영의 집에
저주의 부적까지 만들어 붙였다. 이 저주사건 또한 얼마 뒤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검거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홍계희 가문의 모반사건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홍계희의 팔촌에 해당하는 홍계능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사실이 또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홍 씨 일문 등 주동자 23명이 처형되었고 은전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즉위 초에 있었던 3대 모반사건은 정조의 신변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전․현직 벼슬아치 뿐만 아니라 환관과 궁녀, 심지어는 임금을 보호하여야 할 호위군관까지
여기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에 최측근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국영은 숙위소에서 모든 정사를 결재하면서 정조의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홍국영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특권적 문벌가문 출신의 야심가 홍국영 - . 정조 즉위를 극력 반대한 노론세력에 맞서 기민한 판단과 대담한 행동으로
세손의 기반을 굳히고 그를 결국 즉위에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이 홍국영이었다.
정조는 이런 홍국영을 즉위 3일만인 3월 13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앉혔다. 정조의 명령으로 간행된 '명의록'에 의하면,
이 조치는 정조를 보호한 '의리의 주인'으로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내려진 것이라 하였다.「정조실록」에 ‘특별히
발탁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매우 이례적인 발탁임에 틀림없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후 그는 국왕의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 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조정의 모든 실권은 홍국영에게 있었고, 홍국영을 통하지 않고서는 임금을 만날 기회조차 봉쇄당하였다.
마치 서슬 퍼렀던 유신시절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모두 끌어안고 있었던 것과 같은 권세였다고나 할까.
정조시대 초기는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시대'였다. 그의 정치적 파워는 최규하 정권시절의
국보위원장 전두환을 능가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때 홍국영의 나이는 불과 서른살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렇듯 유례없는 수직상승의 벼락 출세가도를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었을까.
과거에 11등으로 급제하였다는 '그렇고 그런' 머리로 말이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가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그는 뼈대있는 '빵빵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는 선조임금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이었다.
정명공주는 광해군 때 비명에 간 영창대군의 친누나로 인목대비의 소생이었다.
홍주원의 가문은 왕실과 연혼관계를 맺으면서 오랫동안 서울을 근거로 뿌리를 내려온 대단한
문벌가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영조 대부터 권세를 누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홍국영에게 10촌 할아버지가 되었다. 정조와도 12촌 형제지간이었다.
요컨대 홍국영은 영조 재위 당시 영조․혜경궁 홍씨․정순왕후 등과 모두 인척관계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조가 홍국영을 특히 신임하여 수 년 동안 사관(史官)으로 옆에 두고 아주 귀여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홍국영이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예문관 사관(史官)과 세손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설서까지 겸하게 되었던 것은
우연이라거나 권모술수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든든한 가문 덕을 보았다 함이 보다 정확한 분석일 듯싶다.
다음으론, 시기적으로 적절한 때에 관직에 진출하였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좌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은 그가 출세가도를 질주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홍국영은 어느 날 위험에 빠진 정조를 구하고자 하늘 저편에서 홀연히 나타난 로봇태권V나 우주소년 아톰이
아니라 영조의 인사발령에 의하여 업무적으로 세손을 만나고 또 세손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면서 그의 환심까지 사게 된,
오늘날에도 - '가신' 혹은 '측근' 이라는 이름으로 -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출세의 길을 밟았을 뿐이었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정조와 나이도 비슷한데다 한번 궁에 들어오면 정조에게 세상의 모든 일을 꾸밈없이 전해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겨(마치 사내 대장부가 첩에게 미혹 당한 것과 같으시어) 더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분석도 전해진다. 혜경궁 홍씨의 분석이다.
아무튼, 홍국영은 조정을 쥐락펴락 하는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자신의 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조카’에게 왕위를 잇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례를 올린 지 1년이 채 못되어
동생인 원빈 홍씨가 훌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홍국영에게 큰 충격이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꿈이 무산되자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혜경궁 홍씨는 ‘제 누이 홀연히 죽으매 국영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누이의 내전 나인 여럿을 잡아다 칼을 빼들고 무수히 치며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고
「한중록」에 기록해놓고 있다.
홍국영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청명당계열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핍박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조를 직접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당시 효의왕후는 비록 아이는 낳지 못했어도
후덕한 인품으로 인해 조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왕비였다.
홍국영은 이런 왕비를 물증도 없이 핍박하였고 이는 내외의 큰 발발을 불러오게 되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 역시 정조 즉위 뒤 가문이 몰락한 배후에는 홍국영이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홍국영이 왕비까지 압박하자 거세게 반발하였다. 홍국영은 어느덧 왕대비, 혜경궁, 왕비를 비롯한
궁궐 내 모든 세력의 '공적 1호'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그는 여동생(원빈) 살아있을 적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여동생의 양자로 삼는 등
왕위계승권에까지 개입하려 한 전례도 있었다. 정조는 비로소 냉철한 시각으로 홍국영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것 같았던 그의 모습에 야심이 철철 넘치는 한 사내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결국 홍국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한데 홍국영이 정조에게 먼저 떠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자신이 구설에 오른 것이 누이를 후궁으로 들인 데 기인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를 승낙하였다. 홍국영은 조만간 정조가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정조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에게서 야심가로서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정조는 끝내 그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고,
홍국영은 마음의 울분을 이기지 못한 채 떠돌다가 정조 5년(1781년) 강릉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셋이었다. |
첫댓글 (^_^)"감사히"~잘 보고 갑니다.!!!
연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