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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목차
로마는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국을 여러 구역으로 분할해 통치했다. 364년,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us I, 재위 364∼375)는 동생인 발렌스(Valens, 재위 364∼378)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1)라는 칭호를 주면서 로마의 동쪽 지역[하(下) 다뉴브 지방에서 페르시아 국경선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도록 했고, 자신은 일리리쿰, 이탈리아 및 갈리아2) 지방을 직접 통치했다.
375년, 아시아 내륙의 강력한 유목민인 훈(Hun)족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볼가(Volga) 강을 건넜다. 야만적 기마 집단인 훈족은 동고트족(Ostrogoths)이 거주하던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을 유린했고, 이들에게 쫓긴 서고트족(Visigoths)의 왕 아타나리크(Athanaric, ?∼381)는 주민들을 이끌고 다뉴브 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들어가, 동쪽 로마 황제 발렌스에게 트라키아(Thracia)로 이주해 살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원했다.
서고트족의 이동은, 제국의 변경 지역에서 일어났던 그 이전의 부분적이고 우발적인 이주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지만 발렌스는 이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단 다뉴브 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을 해제할 것과, 부모들의 충성의 담보로 어린이들을 따로 떼어 아시아의 여러 속주에 분산시킨다는 조건이 있었다. 당시 다뉴브 강을 건넌 서고트족 이주민은 남녀노소를 합쳐 100만 명(당시 서고트족 장병 수를 20만 명으로 추정)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처음에 발렌스는 서고트족의 이주를 오히려 반겼다. 속주민들이 징집을 면제받기 위해 매년 납부하는 거액의 황금으로 황실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거주지를 잃고 쫓겨 내려온 고트족들을 진정한 피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마치 전쟁의 포로처럼 하대했다. 로마인들은 당초의 약속과 달리 토지를 할당해 주지도 않았고 생활필수품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으며, 보잘것없는 식품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다. 서고트족은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일 잘하는 값비싼 노예를 넘겨주어야만 했다.
378년, 분노한 서고트족은 마침내 하드리아노폴리스(Hadrianopolis)에서 발렌스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로마군을 공격해 격퇴하고, 여세를 몰아 진격하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발칸반도를 마음껏 유린했다. 이러한 서고트족의 봉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황실 관리들의 부패였다. 트라키아로 이주할 때 모든 무기를 로마에 내주어야 했던 서고트족은 안전을 위해 무기를 가져야 한다며 무기를 휴대하는 대신 그들이 갖고 있는 재화와 여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로마의 황실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발렌스 황제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군대 3분의 2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군에 대승했던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에서보다 로마에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또 이 전투는 전쟁사상 보병에 대한 중장기병(重裝騎兵)의 첫 승리라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로마제국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해 자신감을 얻은 서고트족은 로마 영토 안으로 남하를 계속했다.
382년, 로마는 결국 다뉴브 강 남쪽에 정착한 서고트족에게 자치를 허용했고 그 전투원들은 로마 군단의 번병3)으로 편입되었지만 허울일 뿐이었다. 새로운 땅에 정착한 서고트인들은 곧바로 자신들이 로마와 훈족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로마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위협적인 북방의 훈족에게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고트족은 강력한 로마제국과 훈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공법을 택했다. 즉, 발칸반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의 국경 수비대라 할 수 있는 서고트족 번병들이 로마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군단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우두머리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는 로마의 영토가 짓밟히는 와중에도 종교 정책에만 매달렸다. 그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이교로 취급하면서 그 신전을 파괴하고 이교를 믿는 자들은 모든 도시에서 추방했으며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가 로마에 보다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자신의 유언으로써 로마제국을 동과 서로 분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열일곱 살의 아르카디우스(Arcadius, 재위 395∼408)에게 동로마를, 열 살의 호노리우스(Honorius, 재위 395∼423)에게 서로마를 분할해 주었다. 이번 분할은 과거에 로마제국이 원활한 통치를 위해 영토를 여러 개의 속지로 나누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제국 분리 이후 동로마와 서로마는 완전히 독립적인 제국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401년 12월, 훈족이 처음 유럽을 공격한 지 26년이 되던 해, 매서운 한파가 엄습해 라인 강이 얼었다. 알라리크(Alaric, 재위 395∼410) 왕 휘하의 반달족(게르만족) 약 1만 5000명은 라인 강을 건너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로 들어가 이탈리아의 포(Po) 강 유역의 평야로 진격했다. 당시 4만 명에 달하는 반달족이 로마의 상비군으로 있었는데 로마제국이 이들에 대한 급료와 보조금을 중단 혹은 삭감한 것이 반란의 이유였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던 장군도 반달족인 스틸리코(Flavius Stilicho, 365?∼408)였다. 스틸리코 장군은 402년 알라리크에 대항해 피에몬테 지방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해 말 베네토 지방에서 알라리크를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스틸리코는 자신의 동족인 반달족에게 일단 승리했지만 그들을 회유해 예전처럼 동맹군으로 묶어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알라리크에게 많은 공물을 주어 변방의 우려를 씻어야 한다고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했다. 당시 로마에서 알라리크에게 제시한 보조금은 황금 4000파운드였다.
알라리크가 잠잠해지자 호노리우스 황제는 서로마 수도를 로마에서 라벤나(Ravenna)로 옮기는데, 이 결정은 로마가 야만족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조처였다.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옮긴 후 야만족들에 대항해 이제까지 취했던 보조금 정책을 폐지하고 공격적으로 나선다. 그의 강경 노선은 처음에 성공을 거두었다. 406년 야만족 혼성군[반달족, 알란족(Alans), 동고트족 등]이 토스카나 지방에 침입했을 때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 훈족을 용병으로 고용해 이들을 격퇴한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볼 때 스틸리코는 로마인이 아니라 반달인인데다가 로마의 황족과 너무나 가까운 관계였다.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딸과 결혼했고 자신의 첫째 딸은 호노리우스 황제의 황후였고 둘째 딸 역시 그의 측실(側室)이었다. 여하튼 로마의 최고 군사 지휘관으로 로마를 위해 스틸리코가 제 몫을 다하고 있었지만 스틸리코의 위세에 겁을 먹고 있던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원로원 의원들이 스틸리코가 황제 자리를 찬탈할 수 있다고 참소했다. 그러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스틸리코는 라벤나에 있는 한 성당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잡혀서 참수당한다.
로마는 스틸리코를 제거하면 반달족과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로마의 기대와는 달리 알라리크가 408년에 직접 로마를 공격한다. 명분은 로마제국에서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황금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았고, 그들이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지역에 정착하게 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했다는 것이었다.
알라리크는 곧장 로마로 진격해서 마침내 로마 성벽 아래에 진을 쳤다. 알라리크가 대군을 교묘하게 배치하고 로마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한 열두 개의 문을 장악한 후 인근 지방과의 모든 교통을 차단하는 한편 로마의 생필품 공급로인 티베리스 강(지금의 테베레 강)을 봉쇄하자, 결국 로마는 알라리크에 굴복해 호노리우스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로 로마 시장인 아탈루스(Attalus)를 옹립했다. 알라리크에 의해 졸지에 로마 황제가 된 아탈루스는 로마의 성문을 활짝 열고 알라리크를 로마에 입성하게 한 후 서로마제국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와중에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로마로서는 도박에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얼마 후 라벤나에 머물고 있으면서 알라리크의 위협에 대항하던 호노리우스에게 낭보가 전해진다. 로마의 정예 군단이 라벤나 항구에 상륙했고, 아탈루스가 아프리카로 파견한 장병들이 호노리우스의 부하들에게 격파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이 반전되자 코미디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알라리크가 자신이 세운 꼭두각시 아탈루스에게 등을 돌리고 호노리우스를 다시 서로마의 황제로 복위시킨 것이다.
그러자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생각한 호노리우스가, 과거에 로마가 알라리크와 맺은 모든 협약은 영원히 폐지되었다고 선언한다. 호노리우스의 선언에 발끈한 알라리크는 410년에 군대를 이끌고 로마 성벽에 다시 나타났다. 로마는 알라리크에 맞서 결사적인 항전을 결의했으나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알라리크의 동족이 한밤중에 성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로마가 건국 이래 1163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완전히 점령된 것이다.
알라리크는 로마를 점령한 후 1차 때와는 달리 점령군으로서 다소 유머러스한 장면을 연출한다. 부하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용한 것이다. 알라리크의 약탈은 비교적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졌지만 로마가 약탈되었다는 것 자체가 대제국 로마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여건을 봤을 때 알라리크가 로마를 점령한 후 직접 통치할 수도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알라리크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왜 회피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3일간 마음껏 약탈한 후 철수했다.
알라리크가 사망하자 그의 의형제 아타울프(Athaulf, 재위 410∼415)가 반달족을 이끌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평화롭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역에 정착했다. 아타울프의 후계자는 현 프랑스 지역인 보르도, 푸아티에, 툴루즈 등 여러 도시를 포함한 아키텐 지방에 서고트족을 정착시켰으며 툴루즈는 6세기 초까지 서고트족의 수도였다. 한편 훈족에 의해 쫓겨났던 알란족은 피레네산맥으로부터 바다 쪽에 걸쳐 에브로 강의 계곡을 따라 정착하고, 다시 루시타니아(현재의 포르투갈)의 각지로 흩어졌다.
게르만족 중에서도 반달족의 이동은 가장 두드러지는데, 반달족은 에스파냐의 인근 지역을 정복하고 강력한 함대를 이용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서로마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화를 가진 속주 아프리카 점령이 시작된 것이다. 반달족은 439년에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으며, 지중해의 코르시카ㆍ시칠리아ㆍ사르데냐 섬도 점령했다.
브리타니아(영국)도 게르만족인 주트와 색슨이 점령했고, 5세기 중엽∼6세기 중엽에는 또 다른 게르만족인 앵글이 브리타니아에 근거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침입에 대응한 브리타니아인들의 저항도 완강해 유명한 아서왕의 영웅적인 전설이 나오게 된다. 여하튼 브리타니아를 포함해서 서유럽에는 각 지역에 정착한 민족들이 새로운 국경을 세웠는데, 그 국경은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후 게르만족과 훈족은 일진일퇴하면서 동ㆍ서로마제국을 공격하는데, 이 와중에 로마 시는 건설된 이래 처음으로 약탈당하기까지 한다. 특히 훈족의 아틸라(Attila, 406∼453)는 밀라노를 점령한 후 자신이 로마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배자인 아틸라가 결혼식 후 급사하면서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한 훈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후계 자리를 놓고 아틸라의 아들들과 그의 휘하에 있던 야만족이 싸우던 중 급부상한 사람은 아틸라의 심복 참모였던 오레스테스(Orestes)였다.
오레스테스는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고 475년에 그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재위 475∼476)에게 자의(紫衣)4)를 입힌다. 오레스테스의 전력을 잘 알고 있는 게르만족들은 그에게 이탈리아 땅의 3분의 1을 요구했다. 오레스테스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일부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장군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스키리족5) 출신의 오도아케르6)를 그들의 지도자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오레스테스는 파비아(Pavia), 플라켄티아7)로 달아났지만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된다. 문제는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에 대한 처분이었는데 오도아케르는 정세를 살핀 후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 그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스스로 퇴위하면 연금을 지급해 주며 조용히 살도록 허락하겠다고 제의했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476년에 서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동ㆍ서 고트족이 주력이 된 게르만족이 그들보다 훨씬 야만적인 훈족에게 근거지를 빼앗기고 로마제국 안으로 들어온 지 불과 몇십 년 만에, 지중해 전역과 구세계를 호령하던 권력과 문화의 거인,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멸망시켰던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부하들의 황제 칭호 제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황제가 아니라 왕(King)이라 칭했다. 그가 로마 황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동안 불운했던 로마 황제의 종말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인 서로마제국의 점령자로,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오히려 로마제국의 제도를 따르기도 했다.
4세기 초반만 해도 로마의 틀은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었다. 야만족들이 로마제국 국경 바깥쪽에서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고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로마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국경의 길이가 1만 6000킬로미터나 되었지만 60만 명에 이르는 상비군을 갖추고 있는 만큼 로마의 군사력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사실상 야만족의 침입으로 약간의 곤란에 처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감히 로마제국에 도전해 제국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제시되는 로마제국의 멸망 요인은 군사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경제적 취약성과 여러 도시의 쇠퇴, 인구 감소, 식민지 문화나 야만인 문화에의 동화, 그리스도교의 채택, 그리고 콘스탄티노플로의 천도 등의 모든 것이 고대 로마의 종말을 재촉한 원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제국이 노화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며, 강력한 제국을 운영하던 국가들 모두에게서 이 같은 쇠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한다.
서로마가 멸망한 때는 476년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메메드 2세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했으므로, 로마제국의 쇠망사는 멸망할 때까지 단절된 적이 없는 동로마사를 중심으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는 서로마가, 멸망하기 얼마 전에 권한을 동로마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즉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로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동ㆍ서로마로 분리되었지만 다시 통합 로마가 되었다는 뜻이다. 서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점령되었을 때 마지막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동로마의 황제인 제논(Zenon, 재위 474∼475, 476∼491)에게 공식적인 합병을 요청했고 제논은 이를 승낙했다.
정치적 합의에 따라 동로마가 공식적인 통합 로마제국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로마의 멸망 시점을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상정하는 것은, 동로마제국 스스로 서로마 지역에 대한 통치를 포기했고 현대사에 미친 영향도 동로마보다는 서로마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 영토에 자리 잡고 있던 동로마는 현지에서는 정복자로 간주되었고, 동로마제국의 신민은 피정복민인 그리스인들이었다. 7세기경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us II, 669∼711)를 끝으로 동로마에서 라틴어(로마의 언어)는 거의 소멸되고, 황실에서조차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동로마가 현지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음을 의미한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동로마는 로만가톨릭이 아닌 그리스정교회를 고수했다. 러시아를 포함하는 동구권에서 주로 신봉하는 그리스정교회는 서유럽의 로만가톨릭과 다른 길을 걸어 세계사에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아진다.8)
이 문제는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을 고민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대체로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해 저술했다. 제1기는 트라야누스(Trajanus, 재위 98∼117) 황제와 안토니누스(Antoninus, 재위 138∼161) 황제 시대로부터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의 야만족 등(기본적으로 훈족을 의미)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시기까지다. 제2기는 동로마제국의 영광을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재위 527∼565)로부터 아랍인의 소아시아 및 아프리카 정복과 800년의 서로마제국 부활, 즉 샤를마뉴(Charlemagne, 카를 대제, 재위 768∼814)의 등극까지다. 마지막으로 제3기는 서로마제국의 부활로부터 터키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공략 그리고 로마 황제 계보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의 약 6세기 반의 기간을 포함한다. 이 기간 동안 등장하는 십자군의 역사를 포함해 다룬다. 한마디로 100년에서 1500년에 이르는 서유럽의 역사와 서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동방의 역사를 총괄한다.
그러나 기번은 원래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구상하면서 서로마의 멸망을 위주로 생각했다.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 서문에서도 그는 제2기, 제3기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확약할 용기가 없다고 적었다. 그런데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 제1기, 즉 제1ㆍ2ㆍ3권에서 다룬 서로마 멸망사가 예상보다 큰 반향을 일으켜 소위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자 당연히 동로마를 포함한 전 로마사를 구성한 대업은 통속적으로 말한다면 거의 억지로 완성한 것이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주로 다룬 앞의 3권은 필력이 왕성해 마치 소설을 보는 것 같은 순발력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임에 반해, 뒤의 3권은 앞의 3권에 비해 긴 시간을 압축해 놓은 것은 물론 동로마 황제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흥미를 반감시켰을 뿐 아니라 필력도 떨어진다는 평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한 것은 서로마사와 동로마사를 편찬할 때 그의 집필 여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신흥 부르주아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난 기번은, 노동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한량이자 사교계에서 대접받는 주요 인물로 시종일관했다. 그러나 자금줄은 할아버지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아버지인 에드워드 2세가 쥐고 있었으므로 그는 돈에 관련한 모든 일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는 현명하게도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스위스에 체류할 때 사귄 약혼자 쉬잔과 파혼한 것도 아버지의 압력 때문이었다.9)
기번은 아버지가 보내 준 자금으로 유럽을 여행하면서 로마제국의 멸망사를 쓸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당대에 ≪로마제국 쇠망사≫와 같은 대작을 출간한다는 것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정 작가를 제외하면 스스로 출판 비용을 대야만 출간이 가능했는데 아버지에게 자신의 책을 출간하자고 설득할 재간은 없었던 기번은 출간을 계속 늦추었다.
1770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산, 즉 자신의 돈으로 그의 나이 39세였던 1776년에 서로마사를 다룬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을 출간했다. 이 책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 중 한 사람이 된다. 그는 많은 유산으로 부를 누렸고 책으로도 명성을 얻었으므로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독자들이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즉 서로마제국사 전체를 빨리 출간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그는 제1권을 출간한 지 5년 후인 1781년에야 제2ㆍ3권으로 서로마제국사를 완성했다.
제2ㆍ3권의 발간이 늦어진 것은, 그가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의 성공으로 당대의 한량들이 선호하는 하원의원에 당선된데다 무역식민위원회 위원으로 공직까지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직책들이 전적으로 한직(閑職)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적인 구속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제2ㆍ3권은 그가 그런대로 틈틈이 집필해 완성한 것이다.
제2ㆍ3권 역시 호평을 받아 그는 전 로마사, 즉 동로마사까지 완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문제는 서로마사를 집필할 때와는 여러 면에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공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그는 동로마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애착을 느끼지 않았다.10) 더욱이 부와 명예를 모두 갖고 있는 기번으로서는 별로 애착이 느껴지지도 않는 동로마사에 악착같이 전념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가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갑작스러운 영국 정치 상황 변화, 즉 그가 지지하던 노스(Frederick North) 경의 내각이 무너져 그는 졸지에 공직에서 물러나 실업자 아닌 실업자가 되었다. 공직에서 나왔다고 해 생활 문제를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는 오랜만에 남는 시간에, 유보했던 로마제국 쇠망사의 후속편 집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번은 서로마사 집필에서 보였던 애정과 정열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평가하는 학자들이 처음 서로마사와 후반 동로마사가 매우 큰 질적 차이를 보인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총 71장으로 나누어 서술했는데, 약 400년간의 서로마사를 38장으로 마무리했고 서로마가 멸망한 후 1000여 년의 동로마사를 33장으로 마무리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장점은 로마의 장구한 역사를 당대의 시대상과는 다소 다른 시각으로 집필했다는 것이다. 동시대인들은 역사의 주요 기능이 도덕적 교훈을 찾아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번은 엄청난 사료와 자신이 신봉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기번의 이런 집필 의도는 ≪로마제국 쇠망사≫에 대한 줄기찬 공격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뻔뻔스럽고 비정직한 공격을 자행하고 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보면 성직자들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듯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앞의 설명을 완곡하게 변명한다.
2) 갈리아(Gallia): 고대 유럽의 켈트인이 기원전 6세기부터 살던 지역으로, 현 프랑스 지역 등을 포함했던 지방.
3) 번병(confederates): 황제에게 봉사하는 군대.
6)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 훈족의 일파로 추정되는 스키타이족 출신.
7) 플라켄티아(Placentia): 오늘날 이탈리아의 피아첸차(Piacenza).
9)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김영진 역, 대광서림, 2007.
10) 기번의 동로마사가 다소 추상적인 서술로 일관된 것은, 기번이 원천적으로 동양적 황제를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11) ≪로마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황건 역, 까치, 1991.
16) 판노니아(Pannonia): 다뉴브 강 중류 우측의 헝가리 분지(盆地) 지역으로, 현재의 베오그라드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포함.
17) ≪로마 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즈 쓰네오,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2.
18) <키스트(KIST) 이종호 박사의 색다른 해석 “그리스ㆍ켈트 특유의 무늬 있어”>, 유석재, 조선일보, 2009.
20)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아침, 2007;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백산자료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