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줄기에 정성을
진 연 숙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표현해 보라 한다. 즉석에서 현재 모습과 시, 공간을 표현해 보는 묘사 수업이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글 쓰는 일도 아직 미숙한데 이 자리에서 바로 느낌과 현상들을 묘사하라 하니. 이럴 땐 내 머릿속에 버튼만 꾹 누르면 음료 자판기처럼 글이 한편 뚝딱하고 나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빙긋이 실없는 웃음이 지어진다.
다시 집중해 본다. 테이블 위에 일반 종이컵보다 조금 큰 컵이 있다. 이름 모를 꽃송이들과 연초록, 진초록의 잎들이 그려져 있다. 오설록 겉 종이를 찢으니, 은박지가 티백을 감싸고 있다. 직사각형의 짙은 색 티백을 꺼낸다. 냄새를 맡으니 향긋한 귤 냄새가 코를 자극해 침이 고인다. 영귤 차 티백을 컵에 넣는다. 가늘고 긴 주둥이로 된 스테인리스 주전자를 손에 들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뜨거운 물을 컵에 붓다가 멈춘다. 순간이었으나 주전자 끝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몇 해 전 집 근처에 있는 찻집에서 다도를 배웠다. 절에 다니다 보니 가끔은 스님들이 녹차와 특이한 차들을 내주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받아 드는 자세와 마시는 예법을 몰라 어색스러웠다. 다도의 기본예절만이라도 배우고 익히고 더 나아가서는 차의 맛을 즐기고 싶었다.
첫날 다관과 받침대 등 다기 세트를 상에 받고 방석 위에 앉았다. 따뜻한 물을 다관에 부어 차를 우려서 찻잔에 따른다. “물을 따르는 일에만 집중하세요. 쭉 고르고 일정하게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차에 맛이 일정하게 배어나옵니다. 대접하는 잔들에 같은 맛과 온도를 전하여 함께 하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정성 어린 마음을 함께하는 이 시간이 그래서 다도입니다.”라는 원장님 안내 말이 신선하다. 첫 수업에 정성과 집중해야 하는 차 수업을 들으니, 우리가 사는 일상에 실천해야 하는 생활 덕목인 것 같았다.
차 맛은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떫은맛이 있다. 인간의 생과 닮았다 한다. 그 맛이 다 우려 나오도록 연습해 본다. 쭉 고르게 따르려 노력해 본다. 다관에 물을 넣고 오른손으로 잡고 뚜껑을 누르며 따라 본다. 작은 주둥이로 나오는 물줄기를 바라본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고 흔들린다. 심지어 어깨까지 힘이 들어가 뻐근하다. 이 작은 주전자를 움직이는데 온 팔에 힘이 다 들어간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한번 따라 보고 또 한 번 따라 본다. 손이 괜스레 덜덜거리고 물줄기는 휘청거린다. 힘이 많이 들어가 깊게 기울이니 굵은 물줄기가 휘리릭 한꺼번에 내려온다. 이번엔 조심히 따라 본다. 얇은 물이 힘없이 쪼르륵 물방울을 만들며 내려온다. 알맞게 따르는 일이 쉽지 않다. 강약 조절이 만만치 않다. 만만하게 보았던 물줄기에서 힘의 위력을 본다.
어느 때인가 내가 살아온 길에서도 힘을 잔뜩 주고 산적이 있다. 긴장하고 염려하고 욕심을 낸 일들이 많았다. 많은 상황이 처음이었고, 욕심과 급한 마음들 때문에 힘이 들었었다. 아들들에게는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좋아해서 시작한 글쓰기도 잘 쓰고 싶은 힘이 잔뜩 들어가 어려웠었다. 중년을 처음 맞이하니 노년을 지혜롭고 잘 살기 위해 긴장하니 또 힘이 들어갔었다.
차츰 계속되는 연습에 다관을 잡는 손도 자연스럽고 물을 따르는 각도도 자연스러워졌다. 적당한 기울임과 굵기로 물줄기에 공기가 생기지 않게 끝까지 찻잔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름다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맑고 부드러운 물줄기로 강약을 조절하고 마음으로 집중하니 다도 명상이라고 하는가 보다. 더불어 차를 눈으로 마시고 향으로 마시고 맛으로 마셨다.
다도를 배운 후에 우연히 작은 절에서 차를 우려 잔을 올리는 봉사를 하게 되었다. 지장 재일에 제사를 지낼 때 주전자에 차를 신도들이 들고 있는 잔에 따른다. 작은 종지만 한 스테인리스 잔이지만 찻물을 따르는 행위는 언제나 쪽 고르게 정성을 다해 따른다. ‘이 맑은 차를 드시는 영가님들은 극락왕생하십시오. 잔을 올리는 보살들은 행복하고 건강하십시오.” 모든 것은 내 손끝에서 정성으로 나와 남을 위한 수행이고 봉사여서 감사하다.
따뜻함이 사라진 영귤 티를 한입 가득 물어본다. 은은한 향기가 입안에 퍼진다. 머릿속이 상큼해진다. 찬장 한쪽 구석에 먼지 쓰고 앉아 있는 다기 세트를 다시 꺼내야겠다. 마음을 쪽 고르게 하는 찻물을 따라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