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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은 어떻게 생겼을까? Ⅲ-서울의 구조.한양도성
1. 서울의 구조
1912년에 측량하여 1914년 발생한 지적원도를 바탕으로 작성된 조선시대의 서울(한양) 복원지도이다. 조선한성부는 동서남북으로 산이 둘러써여 있으며 서고동저의 지형을 하고 있어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도시의 서북쪽에는 북악산을 뒷 배경으로 삼은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다. 주산인 북악산이 서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경복궁 역시 서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관념적으로 경복궁은 한성부의 정중앙으로 이런 관념에 맞춰 도시가 설게되어 있다.
경복궁 동서로 좌묘우사의 원직에 따라 서쪽에는 사직, 동쪽에는 종묘를 배치하였으며 광화문 앞으로는 관청가인 육조거리가 있다. 한성은 동서를 잇는 도로가 발달한 도시로 도성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이어진 종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로가 이어져 있다.
현재 서울의 위성지도이다.앞의 복원지도와 비교하여 도시의 큰 틀은 남아있지만 세부적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복원지도에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 바로 이어지는 도로가 없었다. 골목길로 가지 않는 이상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가려면 보신각을 거쳐 남대문로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1912년 광화문 사거리에 있었던 황토현을 깍아 태평로를 새로 개통함으로써 바로 연결이 된다. 과거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와 함께 새로 생긴 태평로를 합쳐 세종대로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세종로는 관청가가 있어 조선 정치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관청가 뿐만 아니라 문화시설, 대기업 사옥 등이 있어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더 의미가 확대되었다.
지도를 보면 세종대로를 중심으로 큼직한 빌딩이 자리하고 있어 과거의 길과 잘게 쪼개져 있던 필지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00년간 서울은 급속하게 발전했지만 그 만큼 과거의 흔적은 지워졌다.
남산타워에서 북쪽을 향해 촬영한 서울의 모습이다. 하얀 점선은 한양도성 라인을 추정해 그어본 것으로 옛 서울의 범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3면을 감싸고 있으며 그 뒤쪽으로는 울창한 북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현재 도성 안으로 는 많은 빌딩이 들어차 있다. 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빨간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옛 서울의 핵심도로로서 지금은 사라진 돈의문 밖으로는 중국으로 가는 의주로로 연결되었다. 높은 빌딩은 특히 청계천 남쪽에 밀집하고 있는데 북쪽으로는 문화재가 많이 분포하고 있기도 하고 또한 푸른 기와집이 있어 고도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산에서 보는 높은 빌딩에 뒷쪽의 시야를 가려 서울이 도로망이나 주요 시설물의 배치 등의 평면적인 형태가 잘 잡히지 않는다.
위의 사진은 1898년경의 사진으로 지금은 충무로 2가 부근 대략 남산 자락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앞으로는 초가집이 많이 보이는데 남산 일대는 주거환경이 그리 좋지 못 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남쪽 가까이에 산이 있어 채광이 좋지 못 했고 땅이 잘 마르지 않아 길이 자주 질퍽거리기 일쑤였디. 근처에는 질다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진고개가 있었다.
남산 아래에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청렴과 지조를 잃지 않은 남산골 샌님들이 살았는데 디들은 향상 나막신르 신고 다녀 딸각 딸각 소리가 났기 때문에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허생전의 허생이 대표적인 남산골 샌님이었다.
멀리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정전인 근정전이 보이고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는 창덕궁의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이 보인다. 두 궁궐 사이는 북촌으로 당시 고관대작들이 많이 살았다.
위의 사진은 앞의 사진의 촬영장소에서 서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는 서양식 건축물이 보이는데 이것은 독일공사관으로 1902년에 세워진 것이다. 지금은 회현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독일공사관은 원래 정동의 서울 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으나 1902년에 이 자리에 옮겼고 1906년에 다시 돈의문(서대문) 밖으로 옮겼다.
독일공사관 터는 남대문시장 동쪽인데 이것으로 촬영 위치를 추정해 보면 회현사거리 남쪽 안산 3호터널 가는 길 쯤에서 촬영된 것 같다. 왼쪽으로 숭례문이 보이고 그 아래는 선혜청으로 지금의 남대문시장이다. 안산과 인왕산 사이 아주 작게 독립문이 보인다.
독일공사관 윗쪽으로는 멀리 정동이 보이는데 언덕 위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느 경운궁(덕수궁) 중화전이있다. 사진의 중화전은 중층의 모습으로 1902년 세워져 1904년 화재를 겪어 불안 후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된다. 고로 위의 사진은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원구단의 황궁우가 보이고 멀리로는 광화문이 보인다.
고대 중국의 도성은 주나라 새대의 제도 중 기술분야를 기록한 '주례고공기'를 기본으로 하여 건설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도성은 4각형에 사방으로 9리며 각 면마다 3개의 성문을 두어 12개의 성문을 두고, 남북과 동서로 각각 9개의 도로를 두고 길의 폭을 정하는 등 도성의 외형과 기능에 대한 여러가지 규범을 정하고 있다.
중국의 도읍은 이런 규범을 바탕으로 사정에 따라 변용되어 건설되었다. 이런 도시계획의 원형이 가장 대표적으로 적용된 도시가 당이 장안성으로 당시 활발한 국제교류로 인해 주변국의 도시계획에 영향을주게 된다.
가장 충실하게 장안성을 보방한 도시가 발해의 상경성과 일본의 헤이조쿄로 사각형의 성을 쌓고 북쪽 중심부에는 궁성을 두었으며 그 앞으로는 남문까지 주작대로를 내고 동서로 도로를 내서 '†'자 도로를 기본축으로 삼아 조방제에 따라 격자형으로 도시를 구획하였다.
이런 구조는 마지막 왕조인 청의 부경성에도 적용된다. 청 북경성은 명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사각형의 내성을 쌓고 나중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남쪽에 외성을 쌓았다. 중심축에는 궁성인 자금성이 위치하며 그 앞으로 주작대로가 나있다.
조선의 한성도 '주례고공기'를 전범으로 삼아 건설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산이 많았고 또 외적의 방어에 산성이 중요시 되었으며 풍수리리사상도 도서의 건설에 중요하게 작용되었기 때문에 평지에 세워진 중국의도성과는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
궁성인 경복궁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주산인 북악산을 기준으로 위치를 잡았기 때문에 도시 서쪽에 치우쳐 있다. 궁성
앞으로 주작대로에 해당하는 육조거리를 냈지만 중간에 언덕으로 막혀 바로 남대문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동서도로인 종로는 완전한 직선이 아니며 동대문과 서대문이 대칭되는 위치에 있지않았다. 도로는 격자형으로 구획되어 있지 않고 비정형적이었다. 성곽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지형에 따라 쌓았기 때문에 구불구불하며 문의 위치도 정방향이 아닌 산과 산 사이에 위치하였다.
2. 한양도성 일주 -성곽의 역사와 숭례문
한양도성 걷기 안내도
서울의 산과 주요 시설 배치
서울 한양도성
서울 성곽은 시대가 다른 수 많은 석공과 부역 농민들의 쌓아 600년의 세월과 전란을 견디어낸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흥미롭게도 돌의 색갈과 쌓은 수법이 군데 군데 달르고, 어떤 곳은 네모지고 둥그스름한 돌을 오밀조밀하게 쌓았고 어떤 곳은 네모삐닥한 돌을 틈없이 견고하게 쌓았다.
그리고 윗 부분은 아랫부분이 돌 모양대로 그대로 쌓은것 같은데도 솜씨가 미묘하게 다르고, 확연히 표가 날 정도로 검거나 흰돌이 구별되고 섞여 있기도 하다. 아마도 쌓은 시기가 다르고 보수한 시기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사진은 울산 검단리 유적과 청동기시대의 마을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한 그림이다
중간사진은 백제 풍납토성과 전시관의 단면이고, 아래 사진은 고구려 오녀산성과 국내성이다
성곽은 간단히 말하면 적물 막을려고 만든 담장으로 나무든 흙이든, 돌이든 무엇으로 만들었건 간에 튼튼할 수록 좋은 것이고, 그래서 세계 어느 곳이든 많은 성곽이 있었다. 그것은 가진자와 가지려는 자의 싸움은 인간의 본능이고. 전쟁은 인류의 숙명이기 때문이다.인류의 개체 수가 작고 떠돌아 다니던 구석기 시대는 열매 따 먹고 짐승 잡아먹고 그랬기에 전쟁의 개념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정착과 농경이 이루어지며 사유재산 개념이 생기면서 갈등이 시작됬겠지만 비교적 평등한 사회였다.
허지만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농경의 잉여 농산물이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기름진 땅을 차지한 집단과 척박한 땅을 가진 집단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생기게 된것이다. 도랑을 파고 흙으로 뚝을 쌓고, 동나무로 이중 삼중의 목책으로 장벽을 만들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울타리는 그 집단의 방어막이자 경계선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성곽의 기원이자 국가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 이런 울타리중심의 띄엄 뛰엄 흩어진 촌락들이 점차 흡수되어 영역을 잠차 넓혀가는 과정에서 전쟁은 더욱 빈번해지고 성곽의 중요성이 성곽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다
작가 미상, <평양도>, 10폭병풍, 종이에 채색,
각폭 131 x 39cm, 전체 크기 131 X 390 cm, 조선후기 추정
일제강점기의 을밀대
성 안쪽에서 바라본 연광정과 대동문 옛사진과 (전)김홍도의 <연광정 연회도>
숭례문 구간
1930년경의 서울. 왼쪽으로는 숭례문이 보이고 남산 중산 중턱에는 1925년 완공된 조선신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숭례문
숭례문~소의문
남산쪽에서 본 숭례문과 정동 돈의문 방향
현재의 남산공원 아래 한양도성 성벽 위에서 본 서울의 모습이다.
한양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이 보인다. 숭례문에서 시계바늘 방향대로 성곽 위를 조금 걸어가면 서소문인 소의문이 나오며 정동의 배재학당, 이화학당, 프랑스공사관을 지나면 서대문인 돈의문이 나온다. 돈으문을 지나면 성곽이 본격적으로 험준해진 인왕산 능선을 휘감고 돌아 북소문인 창의문으로 이어진다.
소의문은 사소문의 하나로 광희문과 더불어 시신이 나가는 문이었다
소의문은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위치한 서소문으로 원래 이름은 소덕문이다.
원래는 돌로 된 문구멍만 있는 구조였는데 영조 때 문루를 세우고 소의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도성 동남쪽의 광희문과 함께 시신이 지나는 문이었고, 문 밖은 조선시대 사형장 중 하나였다. 백과사전에는 문루 구조가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이라 되어 있는데 사진상으로는 우진각지붕이다.
사진을관찰한 바로는 비율상 서댐문인 돈의문과 규모가 비슷하거나 소의문이 약간 더 컸던 것 같다. 문 밖으로는 좁은 길 양편으로 민가가 들러차 있다가 두번째 사진에서 보듯 북쪽편 민가는 철거되어 축대를 쌓았으며 나중에는 남쪽편 민가도 철거되고 소의문도 1914년 철거되었다. 현재 소의문터는 서소문로의 아스팔트로 덮혀있다
한양도성의 서쪽 성곽을 멀리서 바라본 모습
헐리기 전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사이의 성곽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양도성 성곽 대부분은 산악을끼고 돌아가는데 사진의 성곽은 얼마되지 않는 평지구간으로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 대부분 멸실된 상태다. 평지구간이지만 성곽을 인왕산과 이어지는낮은 구릉부분에 축조해 방어력을 높인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구릉부는 거의 평탄화되어 있다.
성곽들의 색 차이를 보아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보수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까만 부분은 태조와 세종 대에 축성되었으며 한얀 부분은 숙종과 순조 대의 것들로 깍고 쌓는 방식에서 시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성곽 안쪽은 현재의 정동이다.
돈의문~인왕산
첫번째 사진은 돈의문 남쪽 성곽 옆에서 본 모습이고, 두번째 사진은 북쪽 성곽 위에서 본 모습으로 멀리 남산이 보인다. 돈의문 양쪽으로는 성곽이 날개처럼 앞으로 펼쳐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을 공격하는 적들을 양쪽에서 공격하기 쉽도록 만든 구조이다.
그 동안 평지를 지나던 성곽은 돈의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한다. 세번째 사진은 현재의 강북삼성병원 뒷쪽으로 추정되는데 민가가 들어찬 부분은 현재의 종로구 평동,송월동 일대이며 성곽 안쪽에는 경희궁이 있었을 것이다.
멀리 보이는 인왕산을 향해 성곽이 진행되는데 산악 부분은 개발이되지 않았기 떄문에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마지막 사진은 인왕산 정상 부근의 곡장부분으로 북악산에도 곡장이 하나 더 있다.
인왕산은 한양도성 서쪽에 있는 산으로 풍수상 우 청룡에 해당한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형상의 바위들이 있다. 인왕산에서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은 도성 내에서 가장 수려한 곳으로 산 주변으로 권문세가의 집이나 별장이 위치해 있었고 곳곡에 명승지가 있어 서 려러 시인들과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도 인왕산 아래 살았는데 인왕산 주변을 배경으로 여거 작품을 남겼다. 첫번째 사진은 경회루에서 본 인왕산이고, 두번째는 겸재 정선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로 비 온 뒤의 인왕산의 모습을 잘 포착한 수작이다. 세번째는 인왕에서 바라본 모습이며 네번째는 겸재 정선의 필운상화로 인왕산 아래 필운대에서 꽃 구경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창의문~북악산~숙정문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 골짜기에는 북소문인 창의문이 위치한다. 창의문은 자하문이라고도 불려렸으며 고양. 양주가는 길과 연결된다. 풍수길적인 이유로 한때 폐쇄되었으나 중종때 다시 개방되었고 , 인조반정 당시에 반란군이 이 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다.
현재의 문루는 영조떄 세운 것인데 사소문중에 유일하게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문이다. 첫번째 그림은 겸재 정서의 '창의문도' 로 도성 안쪽에서 본 당시 창의문과 그 주변의 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 두번째 그림은 창의문으로 향하는 길의 모습으로 사진 정면 방향으로 쭉 내려가면 서촌과 경복궁 서쪽 담장 길과 연결된다. 창의문 바깥으로 과수원이 많았고 또 허균이 쓴 '도무내작'에는 두부가 유명했다고 적고 있다.
첫번째 사진은 백운동천에 놓여 있었던 신교의 모습이다. 신교동에 있었으며 창운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다리 난간 부재가 남아 있다. 백운동천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백운동 계곡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흘러내려와 지금은 청계천 광장에서 청계천과 합수했는데 현재는 복개되어 자하문로가 되었고,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창의문이 나온다.
두번째 사진은 창의문 밖에서 본 모습으로으로 성곽은 창의문을 지나 북악산을 감고 돌아 간다.북악산은 푸른 기와집 뒤에 뽀족하게 솟는 산으로 화강암이 희끗희끗하게 박혀있는모습으로 인해 백악산으로 불렸었다. 아래의 그림은 각각 엄치욱의 '백악산, 김득신의 '북악산'으로 옆에서 바라보아 이어지는 능선까지 표현되어 있다.
위이 사진은 1900년대 중반의 북악산 정상 부근의 성곽 모습이다. 한양도성은 조선 건국 후 처음 도성을 쌓을 때 구간별로 할당하여 쌓았다. 약 18Km가 넘는 도성은 600척(180m)씩 9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97구간으로 나뉘는데 A구간, B구간식으로 나누는 것 처럼 천자문 순서대로 '天. 地 ,---弔'를 붙여 나누었다. 북악산은 地과 弔구간이 있는 곳으로 성곽이 시작하는 곳이자 끝나는 곳이었다.
도성의 중심인 북악산 정상에 서서 서울을 내려다 보면 좌 청룡인 낙산과 우 백호인 인왕산, 안산인 남산으로 둘러싸여 경복궁과 세종로 축을 중심으로 배치된 서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겠지만 산 바로 아래 푸른 기와집이 있어 출입과 촬영이 자유롭지 않다. 근세의 돌장벽과 현대의 철장막이 나란히 서서 지금도 적들을 경계하고 있는 곳이다.
첫번째 와 두번째 사진은 북쪽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형이다. 두번째 사진부터 살펴보면 성곽은 인왕산을 넘어 골짜기에 있는 창의문을 지나 다시 북악산을 타고 올라 가 정상 부근을 지나 북동쪽을 향한다. 한양도성 북쪽 끝에 위치한 곡장을 정점으로 성곽은 다시 방향을 돌려 남동쪽을 향해 내려오고 숙정문을 지나 창덕궁 뒤에 있는 응봉을 지난다.
첫번째 사진을 보면 성곽은 성북동과 혜화동 쪽으로 내려오고 혜화문을 지나 다시 낙산을 타고 올라간다. 대략 북쪽의 성곽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세번째 사진은 북악산에서 본 경복궁와 세종로의 모습으로 이 라인이 서울의 중심축이다. 네번째 사진은 북쪽에서 바라본 한양도성의 입체도로 전체의 지형과 구조를 보여준다.
북악산 정상을 지나 성곽으로 따라 동쪽으로 가면 한양도성 최북단인 북악산 곡성이 나오고 좀더 가면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이 나온다. 현재의 숙정문은 사소문처럼 돌로 된 홍예 위에 우진각지붕의 단층 문루가 올려져 있지만 위의 조선 후기 지도에서 보듯 원래 문루가 없는 암문 형태였다.
두번째 사진은 독일인 선교사가 일제시대 초반에 촬영한 숙정문으로 역시 문루가 없다. 1976년에 세운 문루는 고증을 무시한 과도한 복원이라 할수 있다. 숙정문은 사대문 중 하나지만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나머지 삼대문과 달리 산간지에 위치해 거의 기능이 없었으며 풍수상의 이유로 폐쇄되어 가뭄이 들었을 때나 가끔 열렸을 뿐이다. 마지막 사진은 1980년 중반의 성곽 모습으로 지형상 숙정문을 지나 성북동 쪽으로 내려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혜화문 (1909~1927 사이 수집)성 베네딕도 상트 오일일넴 수도원 소장
혜화문은 도성 동북쪽에 위치한 동소문으로 양주, 포천방향의 동북지방으로 가는 교통로 상에 세워져 있었다. 원래 이름은 홍화문이었지만 창경궁을 새로 짓고 그 정문을 홍화문으로 이름 붙이면서 해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첫번째 그림은 겸재 정선이 그린 동소문으로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서축 홍예만 남아 있던 모습 그대로 그림에그려져 있다. 문루는 영조 때 다시 세웠으나 이후 방치되어 1928년에 허물어지고 1930년대 말에는 석축맞저 철거되어 언덕이 깎이고 도로가 놓여진다.
현재의 혜화문은 1994년 복원한 것인데 원래 위치도 아니고 현판의 고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등 충실한 복원이라 할 수 없다.
한양도성의 동쪽 산인 낙산은 낙타 등 모양을 닮아 낙타산 혹은 타락산이라고 불렸다. 높이 100m를 약간 넒는 낮고 완만한 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경치가 좋아 산책로로 애용되었다. 지금은 대학로 뒷산으로 벽화마을도 있고 성곽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데이트코스로 애용된다.
첫번째 사진은 낙산에서 북쪽을 바라본 모습이며 두번째는 남쪽을 바라본 모습으로 산 아래 평지에는 동대문인 흥인지문이 보인다. 세번째는 겸재 정선이 그린 '동문조도'로 가운데 아래에는 흥인지문, 왼쪽에는 낙산의 끝자락기, 오른쪽에는 오간수문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연못인 동지가,그 위로는 관우사당인 돔묘, 그 위쪽에 가장 놓이 솟은 봉우리는 용마산으로 흥인지문 바깥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흥인지문을 지나 오간수문을 지나면 남소문에 해당하는 광희문이 나오는데 첫번째, 두버째 사진은 각각 밖과 안에서 본 모습이다. 원래 남소문은 남산 자락 동쪽 고갯길 어드메 있엇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불길하다 하여 폐쇄된 후 광희문이 도성의 남소문 역할을 하였다. 도성의 남서쪽의 소의문과 함께 시신이 뻐져 나가는 문으로 시구문, 수구문으로도 불렸으며 문 바깥으로는 무당이 차린 신당(神堂)이 많았다고 한다.
신당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갑오개혁 때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 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떡복기를 파는 신당(辛堂)이 민집해 있다. 현재의 광희문은 문루가 허물어지고 석문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도로확장으로 남쪽으로 옮긴 후 문루를 복원한 것이다. 한성 8문 중 가장 규모가 작다.
3. 남산에서 본 서울
미국공사 대리였던 조지 클레이튼 포크 중위가 18894년~1885년 사이 남산에 올라 촬영한 서울 모습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188년 미국을 시작으로 1890년 중후반까지 주요 서양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당시는 아직 정동에 서양삭 공관이 갖추어지지 안았고 천주교 같은 외래종교가 공인받지 못한 상태로 서양 문물이 갓 들어오기 시작한 때다.
사진상으로는 서양 건축이 보이지 않고 기와집과 초가집만이 들어찬 전통적인 도시 원형 그대로의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①은 경복궁으로 광화문, 근정전, 경회루가 보이며, ②는 지금의 세종로인 육조거리다. 하얀 담장이 둘러진 ③은 중국사신의 접견했던 곳으로 쓰인 남별궁이다. ④는 숭례문에서 보신각까지 이어진 남대문로로 길 양옆으로는 시전행항이 이어져 있었다. 남재문로로 윗쪽에 하얀 테두리가 둘러진 장소는 위치상 안동별궁으로 보이는데 현재 풍문여고가 잇는 곳이다 . (사진 한국일보 : 남산에서내려다 본 근대화 직전의 서울 모습)
위의 사진은 1909년에서 1927년까지 동소문 일대에 있었던 백동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촬영하고 수집한 서울 사진을 모은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멘 수도원 소장 서울 사진'에 수록된 사진 중 하나로 백동수도원은 사진 오른쪽 위 화살표로 표시된 지점에 있었다. 사진은 남산 위에서 퐐영한 것으로 1898년 완공된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초기의 서울의 전경을 잘 보여준다.
멀리 숲으로 둘러싸인 창덕궁, 종묘가 보이며 아래에는 종로와 청계천의 가로 라인이, 명동성당 좌측으로 사제관이 우측으로 살트르성 바오로 수녀원 건물이 있다. 성당 뒷쪽으로는 일본식 가옥이 꽤 보이는데 당시 명동은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위의 사진은 선교사 사무엘 모펫이 촬영 혹은 수집한 사진 중 하나로 대략 지금의 서울역 근처에서 남산을 보고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성곽이 훼손되지 않고 쭉 이어져 있으며 왼쪽으로 렌즈를 돌리면 숭례문이 있었을 것이다. 남산은 도성 남쪽 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목멱산이라 불렀으며 조선 팔도에서 오는 봉수의 종점이었다.
1907년 숭례문 양쪽 성곽 철거를 시작으로 점차 한양도성 성곽의 훼손이 시작되었는데 남산의 성곽은 남산 중턱에 일본신사인 조선신궁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으로 훼손되어 성곽 하부가 참배로의 축대로 쓰이는 등 극히 일부만 남게 된다.
광복 후에는 신사가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되는데 현재는 일부 성곽이 복원되어 있고, 그 위로는 백범광장이나 안중근기념관 등이 있다. 일본의 신을 기리는 장소애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상반된 의미의 장소로 변한 현재의 모습은 역사의 뉴턴 제 3법칙을 생각하게 한다.
『남산의 아름다운 언덕이나 고색 창연한 궁궐 후원의 언덕에서 서울은 가장 멋있게 보인다. 매우 헐벗긴 했지만 여기 저기에 검은 소나무 그림자가 보이고, 산들이 사방을 에워사고 도시 곳곳에 그 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이 산들 사이에 길이 8Km, 너비 4.8Km나되는 분지가 있으며 이 분지에 약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깃들어 복닥거리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서울시는 그야말로 나즈막한 연갈색 초가지붕의 바다다. 나무 울창한 숲도, 광장도 없는 단조로운 풍경이다. 이 연갈색 바다 위에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을 단 문과 회색의 드높은 담장을 한 궁궐이 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다양한 전각들이 우아한 곡선의 지붕을 이고 모여있다.--- 』.
1894년 조선을 첫 방문했을 당시의 영국인 여행작가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사밸라 보드 비숍 여사의 서울에 대한 감상이다. 1896년 아관파천 후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단행하면서 서울을 근대적 도시로 외양을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이후 서울을 다시 방문한 비숍 여사는 급격하게 달라진 서울의 모습에 놀라며 첫 서울 방문의 부정적인 인상과는 꽤 상반된 모습을 모인다. 위의 사진은 1904년 현재의 남산공원 아래에서 본 서울의 전경으로 얼마 뒤 화재를 겪는 2층으로 된 경운궁(덕수궁) 중화전의 모습이 이채롭다.
[출처] 조선시대 서울은 어떻게 생겼을까? Ⅲ-서울의 구조.한양도성|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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