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 제8장 의법출생분의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
금년에 내가 원각경을 6백독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직독직해는 전체 경의 절반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금강경은 오늘 아침까지 230독을 마쳤다. 처음부터 직독직해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전후 문장의 문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요의경에 대한 범부의 한계가 아닌가 한다.
아래 인용문은 동진무제東晉武帝 제위시 후진後秦 사문 구마라집 삼장이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번역한[奉詔譯]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저본으로 삼고, 양나라 소명태자가 그 경문에 과목을 나누어 드날리며,[嘉其分目] 당나라 육조대감진공보각六祖大鑒眞空普覺 선사가 해의解義한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를 의거한 것이다.
1. 경문과 육조대사 해의解義
경문: “수보리야, 너의 뜻은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써서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의외로 많지 않겠느냐?”(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爲多不)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체성(福德性)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即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해의: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써서 보시하면 복덕을 얻음이 비록 많겠지만, 복덕의 체성에는 조금도 이익이 없다.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수행하고, 자성으로 하여금 모든 유취有取에 떨어지지 않게 하면, 이를 복덕의 체성이라 일컫는다.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곧 복덕성福德性이 아니고, 능심能心과 소심所心이 제멸되면, 이를 복덕성이라 일컫는다. 마음은 부처님의 교법을 의지하고, 행도 부처님의 원행과 같으면, 이를 복덕성이라 일컫는다. 부처님의 교법을 의지하지 않고, 부처님의 원행을 실제로 수행하지 않으면 바로 복덕성이 아니다.(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得福雖多 於性上一無利益 依摩訶般若波羅蜜多修行 令自性不墮諸有 是名福德性 心有能所 卽非福德性 能所心滅 是名福德性 心依佛敎 行同佛行 是名福德性 不依佛敎 不能踐履佛行 卽非福德性)
경문: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문 가운데 일부를 수지하거나 더 나아가 사구게 등에 이르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면, 그 복덕은 저 앞의 복덕보다 수승하니라.”(若復有人 於此經中受持 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해의: 십이부교十二部敎의 대의는 모두 사구게 안에 있다. 어떻게 그러한 줄을 아는가? 모든 경 가운데 찬탄하는 사구게가 곧 마하반야바라밀다이고, 마하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며, 삼세제불도 모두 이 경을 의지하고 수행해야 바야흐로 성불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 이르기를 “삼세제불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셨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스승을 좇아서 배우는 것을 수지受持의 수受라 하고, 뜻을 알고 수행하는 것을 수지의 지持라 한다. 스스로 알고 스스로 수행하는 것은 자리이고, 남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은 이타이니, 그 공덕이 광대하여 끝이 없다.(十二部敎大意 盡在四句之中 何以知其然 以諸經中 讚歎四句偈 卽是摩訶般若波羅蜜多 以摩訶般若爲諸佛母 三世諸佛 皆依此經修行 方得成佛 般若心經云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從師所學曰受 解義修行曰持 自解自行是自利 爲人演說是利他 功德廣大 無有邊際)
경문: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 제불과 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은 모두 이 경문을 좇아서 나왔느니라.”(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及諸佛 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해의: 이 경이란 이 한 권의 경문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불성을 드러내고자 함에 그 체성에서 묘용을 일으키면 미묘한 이익이 무궁하다. 반야란 곧 지혜이다. 지혜의 지智는 방편으로 공덕을 삼고. 지혜의 혜慧는 결단으로 묘용을 삼는 것이니, 바로 일체시중一切時中에 각조覺照하는 묘심妙心이 이러하다. 일체제불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각조하는 묘심 가운데서 생기하며, 이 때문에 “모두 이 경문을 좇아서 나왔느니라.”라고 한 것이다.(此經者 非指此一卷之文也 要顯佛性 從體起用 妙利無窮 般若者 卽智慧也 智以方便爲功 慧以決斷爲用 卽一切時中覺照心是 一切諸佛及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覺照中生 故云從此經出也)
경문: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니라.”(須菩提 所謂佛法者 即非佛法)
해의: 연설한 일체 문자나 장구章句는 표시와 같고 손가락과 같다. 표시나 손가락이란 것은 바로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경계이다. 표시를 의거하여 본물本物을 취하고, 손가락을 의지하여 달을 보는 것이니, 달은 손가락이 아니고, 표시는 본물이 아니다. 단지 경을 의지하여 법을 취하지만, 경은 법이 아니다. 경문은 곧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법은 바로 혜안이라야 볼 수 있다. 만일 혜안이 없는 이는 단지 그 경문만 볼 뿐이고, 그 법은 보지 못한다. 만일 법을 보지 못하면 곧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송경誦經해도 불도를 이루지 못한다.(所說一切文字章句 如標如指 標指者 是影響之義 依標取物 依指觀月 月不是指 標不是物 但依經取法 經不是法 經文卽肉眼可見 法卽慧眼能見 若無慧眼者 但見其文 不見其法 若不見法 卽不解佛意 不解佛意 則誦經不成佛道)
2. 금강경의 대의
이 일권一卷의 금강경 전문은 수보리 존자의 동일한 질문으로부터 전반부와 후반부가 펼쳐진다. 그 동일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와 선녀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응당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킵니까?”(2. 善現起請分: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17. 究竟無我分: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다른 점은 앞은 응운하주應云何住이고, 뒤는 운하응주云何應住이다. 그 뜻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마음에서 무엇을 항복시켜야 하는가?”
“아상과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다.”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
“수보리야, 보살의 무주상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사량할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가르쳐준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하느니라.”(須菩提 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但應如所教住)
바로 무주상보시이다. 금강경 전문은 곧바로 사상과 무주상보시의 해설서라 말해도 전혀 틀리지 않는다. 사상을 항복시키면 근본무명을 끊을 수 있고, 무주상보시로 십바라밀을 성취하면 구경각에 이를 수 있다. 보시바라밀을 성취하면 동시에 십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다. 다른 9개 바라밀도 또한 같다. 이와 같이 간단하게 금강경의 대의를 정의한다.
3. 조사선과 무
마곡사에 못 미쳐 구암리에 당도해서 혜봉 큰스님이 계신 곳을 물으니, 감나무 집을 가리켜 준다. 초가에 들어가니, 밑에 채에 당신이 계신 방을 하나 만들어놓고 사신다. 큰스님이 나오시자 절을 한자리 척 했다. 수좌 옷을 입었으니 수좌인 줄은 아실 터이다. 내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나를 척 쳐다보신다. 벌써 문답하기 전에 보면 안다. 나도 한번 쳐다보고는 합장하고 공경히 여쭈었다.
“제가 곡성 동리산 재를 넘어가다가 ‘담 너머 외 따오너라.’라는 말에 그만 무자 의지가 뒤집어 져서 바로 견성을 한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 좀 보아 주십시오.”
“그럼 물어 보시오.”
초면이지만 처음에는 큰스님도 경어를 쓰신다.
“천하에 노고추老古錐가 무자 반을 이르지 못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조주 스님의 무자 의지를 반만 일러 주십시오.”
반만 일러 달라는 것도 보통으로 못하는 소리이다. 염송이나 어록에도 반만 일러 달라는 말이 없다. 다는 요구하지 않고 반만 일러달라고 하니, 벌써 바로 본 분이라 얼른 듣는다. 키가 훤칠하게 큰 어른이 나를 척 바로 눈을 떠서 보신다. 답을 안 할 수가 없다.
“무無.”
아무 구애 없이 이르신다. 반만 일러 달라고 한 데 무라고 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벌써 거기에서 보지 못 했으면 죽는 빛이 얼굴에 떠오른다.
“반이 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감히 큰스님한테 옳게 일렀다 못 일렀다 인가하듯이 반을 못 일렀다고 하니, 참 주제 넘는 짓이지만, 그 때는 그래도 그렇게 했다. 반을 요구했는데, 왜 반을 일러주지 못하시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반을 일러라 해서 그렇게 일렀거니와, 다시 수좌한테 돌려 묻노니, 수좌가 무자 반만 한번 일러보오.”
반문反問을 척 하신다. 법두法頭를 나한테 돌려보낸다. 그런 반문이 얼른 나오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기 때문에 벌써 묻는 것이 척 반문을 쓴다. 거기에다 무슨 다른 소리를 할 것인가? 내가 합장을 하고 일렀다.
“무.”
내가 무라고 이르니, 혜봉 큰스님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고인의 말씀을 들어서 묻는다. 인제 뒷말이 더 무섭다.
“고인의 법문에 ‘거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어서 송곳을 세울 땅이 없더니, 금년 가난은 비로소 가난이라 송곳까지 없다.’라고 했다. 그러니 다른 고인이 점검을 하되, ‘사형이 여래선은 보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으니, 수좌는 어떻게 일러야 거기에 조사선이 되겠느냐?”
거년은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은 없었지만 송곳이라도 있었는데, 금년은 참으로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은 말할 것도 없지만 송곳도 없다. 그런 도리도 여래선밖에 안 되니, 조사선을 한마디 이르라고 묻는다. 선지식이 학자를 잡도리하는 걸 좀 보라. 그렇게 물을 때 어떻게 답을 하겠는가? 거기에서 용의 몸에 용대가리를 붙이기가 그렇게 어렵다. 공안을 바로 보지 못하면 도저히 못하는 법이다. 거기에 바로 붙어있지만, 그 놈을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저 죽는다.
큰스님이 학자한테 묻는 법이 기가 막히다. 어디에 다른 것을 물을 것도 없고 그 자리에서 묻는 것이 어떠한가? 혜봉 스님이 패철이나 차고 묏자리나 잡고 지내셨지만 참으로 큰 도인이다. 조사선을 묻는데, 내가 주저함이 없이 퍼떡 일렀다. 내 딴에는 아주 거침없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일렀다.
“마름 뿔이 뾰족해서 저와 같지를 않습니다.”(菱角尖尖不似他)
고인의 송구에 “마름 뿔은 뾰족해서 뾰족한 것이 송곳 같고, 연잎은 둥글어서 둥근 것이 거울 같다.”(菱角尖尖尖似錐 荷葉團團團似鏡)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때에 능각이 아무리 뾰족하지만 저와 같지가 않다고 썼다. 마름 뿔이 뾰족해서 저와 같지 않다고 이른 것이 말의 배에 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천하에 도무지 큰 죄를 지어서 무간지옥에 바로 갈 것이다. “반이 될 이치가 있습니까?” 인가하듯이 아니라고 한 것이 아주 건방져서 천하에 못 쓸 물건이다. 평생에 그 죄가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혜봉 스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다시 가서 뵙지 못하고, 나 혼자 돌아가신 영전에 깊이 참회했다.
“어떻게 일러야 조사선이 되겠는고?”
“무.”
그 때에 그 답이 나왔으면 끝나는 것이니, 혜봉 스님이 바로 파수공행把手共行을 할 것이다. 혜봉 스님을 찾아갔을 때 조사선을 용케 물었다. 패철을 차고 풍수 노릇을 했지만 묻는 법이 기가 막히다. 학 다리에는 학 다리를 이어야 하고, 오리 다리에는 오리 다리를 붙여야 할 것이다. 기다란 학 다리에다 짧은 오리 다리를 붙여 놓으면 쓰겠는가?
오늘 내가 이 놈 하나를 해주기 위해서 올라온 것이다. 무라고 하니 우습지만, 법로法路라는 것이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내가 이것 하나를 못 이른 것이 원통하다. 묻는 거기에 그대로 있는 답을 못하고, 내가 엉뚱한 답을 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꿀을 먹을 때 어떻게 했으면 살아가겠느냐?”
“달다.”
꿀을 받아먹는 놈이 달다고 이를 수가 있느냐? 달다가 그렇게 가깝고 쉬우니, 그보다 더 가까운 놈은 없지만, 보지를 못하니 이르지를 못한다. 천답 만답이 나왔지만, 달다는 한마디에 당대 선지식이 다 옳다고 한목 인가했다. 이상은 전강스님의 법문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4.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의 본의
동천에 뜨는 해도 봄과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그 풍광이 같지 않고, 중천에 떠있는 밤하늘의 달도 열대와 한대 지방은 그 호오가 서로 다르다. 이 때문에 조사선에 대한 정답도 또한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는 법이다.
나는 육조스님의 개종차경출에 대한 정의를 평가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나 개종차경출에 대한 정답도 이 문구가 금강경에 있을 때가 다르고, 원각경이나 화엄경 등에 있을 때도 또한 그 정답이 다르다. 이는 일체경의 첫머리에 똑같이 여시아문이 있지만, 금강경의 여시가 다르고, 법화경이나 열반경의 여시가 또한 같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바로 위에서 ‘금강경의 대의’와 ‘조사선과 무’라는 글을 쓴 이유는 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 경은 제명만 금강반야바라밀경일 뿐이고, 시종일관 관통하는 바라밀은 반야가 아니고 보시이다. 부처님은 이 금강경에서 오로지 보시바라밀만 말씀하셨을 뿐이고, 반야바라밀은 제13장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에서 “수보리여,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을 설하셨지만,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니라.”(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則非般若波羅蜜)라는 구절을 제외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개종차경출의 본의를 멀리서 찾을 것이 없다. 이 정답을 제8장에서 찾으면 곧 법시이고, 금강경 전체에서 찾으면 바로 무주상보시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이 경문 가운데 일부 또는 사구게를 수지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라.”
“수지하고 연설하는 바로 이곳이 일체 제불이 출현하는 곳이고, 또한 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생기하는 곳이다. 일체가 이 경문의 수지와 연설을 좇아서 나왔느니라.”
수지로 지혜를 구족하고, 연설로 자비를 구족하는 법이다.
육조대사(638~713)는 조백대사(635~730) 현수국사(643~712)와 동시대인이다. 우리나라 원효대사(617~686)와 의상조사( 625~702)도 시대가 엇비슷하다. 10년 20년 정도 전배이다. 이 다섯 분의 일대선지식 중에 품계로 보면, 육조스님의 차서는 어디일까? 아마도 대부분 1등이 아니면, 5등이라 말할 것이다. 1등일까? 아니면 5등일까? 남에게 묻지 마시라. 묻는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한다. 동전이나 한번 던져볼까? 나의 경계가 이러하다.
2022년 9월 10일 임인년 중추가절 74세 길상묘덕 씀
첫댓글 감사합니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