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머리 깎아주기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일은 자기 일이지만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그 일 중에는 어려움에 처하여 남에게 손 내밀어 돈을 빌리는 것도 그 중 하나지만, 자기가 나서 상(賞)을 받으려 하는 것도 해당한다. 지금은 세상이 예전과 달리 자기 PR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이 그것이다. 왠지 면구하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돈을 빌리는 일은 당장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된다.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지만 달리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을 받는 문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여전히 주저하고 앞에 나서지를 못하지만 그리 절박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함에도 바라는 바는 간절하기에 고소원(固所願)의 심정으로 애를 태운다.
누가 도와주면 좋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하는 수 없이 본인이 나서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 심정은 스스로 제 머리를 못 깎는 일이기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전전긍긍 한다. 그 절박함은 그 모가치가 누가 보나 자기에게 돌아올 확률이 높을 때나, 아니면 변수가 생겨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낌새가 보이기라도 하면 그 초조감은 배가가 된다.
내가 느닷없이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느냐하면 일전의 일이 생각나서이다. 전남의 원로 수필가 김학래(金鶴來) 선생의 부음을 들었는데 그분 생각을 하니 ‘ 아, 당신이 그예 돌아 가셨구나’ 하는 감회가 어렸던 것이다. 선생은 열악한 전남수필의 텃밭을 가꾸고 지켜온 분인데, 나하고도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한동안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문학상에 관한 것이다. 아니 그러겠는가. 그 일은 순전히 내가 자발적으로 서두른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 일을 잠깐 소개하면 그것은 내가 내 머리를 깎은 일이 아니라 순전히 ‘남의 머리 깎아주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7,8년 전이다. 나는 당돌하게도 어떤 문학상의 편중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비록 수필문단에서 지명도가 없고 영향력 이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짚을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명분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 수필문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의 하나로 해마다 원로 분 중에서 한두 분 수상을 하는 상이다.
그 상은 이미 5,6회를 지속해 왔으나 그간은 광주광역시를 비롯하여 전남과 전북에 거주하는 분은 한 분도 받지 못했었다. 그만큼 지역적으로 소외가 되고 있었다. 상을 만든 취지가 수필문학발전에 이바지 하고, 원로 분 중에서 수필을 지켜온 분을 발굴하여 주는 것인데, 그 취지에도 부응하지 못하고 편중이 된 것이었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특정 우수작품을 뽑아서 상을 주는 것이 아닌 터에, 지역안배를 무시한다면 전 회원이 뜻을 모아 주는 상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해서 건의를 했는데 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당시 이사장을 맡고 있던 지연희선생의 폭넓은 아량과 공감, 균형감각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추천한 분이 내정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일체 당사자에게 귀띔해 주지 않았다. 공치사 할 일도 아니거나와 내가 내린 결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상을 하고 나서 한참 후에 김 선생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해서 나는,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받으셔야지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에 은근히 기꺼웠다.
사실은 이에 앞서서 여차여차한 전차가 있었다. 지연희 회장께 전화하여 전라도 분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더니 했더니 수상자로부터 전화를 왔더냐고 물었다. 수상자가 속사정을 모르는 것 같아서 자기가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수상자가 내게 전화를 한 건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구구한 설명 없이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 건 아주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동안 한눈 팔지 않고 수필만을 붙들고 쓰다가 돌아가셨는데, 말년에 보람된 훈장 하나를 받은 셈이니 얼마나 뿌듯하고 잘된 것인가. 아마도 돌아가시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눈을 감지 않았을까 한다.
일전에는 또 다른 기분 좋은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한국수필에서 활동하는 분인데 역시 내가 머리 깎아 주기에 나선 덕에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고마움을 표하는 전화였다.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는 한 단체의 창립멤버이면서 회장까지 역임한 분인데 상복이 없어서 늘 후순위로 밀리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마저도 잊혀 질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 상황을 보면서 이번에도 나는 임원진을 적극 설득했다. 하지만 대기자가 많아 쉽지 않았다. 해서 일 년여를 기다린 끝에 해를 넘겨 성사를 시킨 것이다. 나는 일체 본인에게는 언질을 주지 않으면서 신간을 내도록 종용했다. 무엇보다도 수상조건이 최근 3년 이내 출간한 수필집이 있어야 함으로 그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번에도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격이 안 되거나 조건이 맞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도운 일이면 문제가 있겠지만, 소외된 분을 챙겨드리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자격과 조건이 되는데도 스스로 제 머리를 깎지 못한 사람. 그들을 위해 미력이나마 힘 써 준 일을 나는 더없는 보람으로 여긴다. 중매쟁이에겐 일이 잘못되면 뺨이 석대라는 말이 있지만, 이런 건 그런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저 말 품을 판 것에 지나지 않지만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 가능했기에 그 생각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비록 자신의 일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지만 남의 머리를 대신 깎아 주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 (2020)
첫댓글 남의 머리를 잘 깎아주셨네요. 수필문학의 균형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셨어요. 고인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남을 배려하고 돕는 일은 늘 훈훈한 감동을 줍니다.
그분이 금년 6월에 돌아가신 사실을 그곳 동인들이 쓴 작품집을 보고서 알았습니다. 한동안 적조하여 궁금했는데 그런일이 일어났더군요. 하지만 흐뭇한 마음을 안고 눈을 감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생각해도 그일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퇴고완료
비유가 적절하고 좋습니다. 선생님의 정의로움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선생님도 늘 간강 조심하세요.
그 일은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고마워하는 마음이 전화를 통해 여실히 전해졌습니다. 비유가 적절하다니 고맙습니다.
남의 머리 깍아주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이미용사 자격을 넉넉히 겆춰야 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머리깍아주는 실력을 인정하고 있어야 가능하지요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발사입니다 그러니 유명 이발사한테 머리를 한 이의 태가 반짝일 것은 자명하지요 후광효과라고 하겠어요 불감청고소원을 아루신 분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받으셨으니 선생님의 큰 보람입니다 그러나 세태는 몰인정하여 다들 제것 챙기기에먼 급급하지요 선생님의 남의 머리 깍아주기가 특별히 아름다운까닭입니다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일로 해서 아주 가까워졌는데, 한동안 소식이 없고 전화를 해도 안받아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만 생각했지요.
두분한테는 잘 한것 같고, 여수문협집부장 하면서 지금까지 시상하고 있는 한려문학상 후원자를 찾아나서 교섭해 성사시킨 일을 큰 보람으로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