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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고 지루하고, 재미도 없고, 눈도 아프고,
교종,선종,사산비명,사리,종교 이야기라 그냥 대충 쭉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자장율사께서 당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신라땅으로 돌아가고자 "중국 장안현의 종남산에 계시는 원향선사에게 머리를 조아려
"대사!~ 이제 돌아가야겠습니다! 인사를 드리니"신라땅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면 발해의 여러 나라가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자장이 신라로 귀국하여 이를 왕(선덕)에게 알리자 왕은 진흥왕께서 창건한 황룡사에 9층목탑을 만들도록 허락을 하셨고
645년 황룡사를 건립하여 이듬해 병오년에 황룡사 9층목탑을 완공한다.
이번 걸음은 지난날 걸었던 자장율사께서 가장 아끼셨던 사찰 태화사, 통도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을 찾아보며 그분의 걸음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데
자장율사께서 가장 애지중지하셨으나 고려 고종 25년 때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없는 곳, 흔적만 남아 있는 황룡사와 태화사
그리고 한국 삼보 사찰의 대표적이며 야산 제일의 계율종의 통도사까지 짧지 않은 길 따라 걸음 하며 흔적을 남긴다.
경주는 여러 번 찾았던 곳이라 늘 친근한 곳, 전날 큰 녀석이 살고 있는 경주에서 자고 이른 아침에 택시로 분황사로 출발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두 눈 부릅뜬 사자가 사방을 지키며 이른 아침에 찾아온 손님을 반긴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써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께서 주석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며
분(芬)이란 향기롭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황(皇)은 임금을 뜻하니 여인의 향기 즉 선덕여왕을 뜻한다.
선덕여왕 당시에 여자가 임금이 되니 불만을 품은 세력이 많아 여왕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세운 절이 아닌가 생각해 보며...
참고로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이름은 김 백정이며 어머니는 마야 부인이다.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렸던 마음과 여왕으로서 지키고자 했던 절실한 마음과 털끝 같은 희망을 탑 속에 고이 묻어 두어
천년의 시간을 보태어 만들어진 멋진 유산(遺産)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당차게 솟아 그 기운을 전한다
분황사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으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은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모전석탑에서 돌사리함이 발견된 사리 4과는 국립박물관에 보관하다가 최근 몇 해 전에 불국사 대웅전 뒤편
무설전에 보관하여 일반 참배객들에게 관람을 하고 있다.
바로 옆 황룡사로 가시죠
남산과 멀리 마석산이 보이는군요
오늘은 이곳 텅 빈 들판에서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절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빈 공간에 바람만 꽉 찬 모습의
백지 같은 공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황룡사터에서 걸음을 시작한다.
황룡사지
최고의 사찰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나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찰보다 더 유명한 황룡사
백두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강원도 태백시 삼수령이 자리하는 곳에서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잉태한 후 동해바다를 벗 삼은
산줄기 낙동정맥길 따라 꿈틀거리듯 흘러와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 삼강봉에서 방향을 크게 틀어, 경주로 향하는 형산강 우측의
산줄기를 만들어 놓고, 다시 토함산에서 경주의 낭산이 자리하는 곳으로 천년의 기운을 담아 그곳에 천년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 궁궐로 조성했으나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고쳐 지은곳이며 장육존상을 봉안하기 위해 금당을 지었고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 경복궁 근정정 보다 더 컸다고 한다) 선덕여왕 12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께서
신라의 위용을 보여 줄 수 있는 거대한 구층탑을 세워 외적의 침략을 막을 것을 건의하였고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646년 병오년) 9층 목탑을 건립하여 국가관리 사찰로 호국불교의 위상을 알린다.
황룡사 중금당의 장육상과 협시불(금동 장육삼존불상)이 주도한 자리
금당지와 멀리 소금강산과 명활산성
신라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하여 17년 만에
완성하고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고.
진흥왕 35년에 5미터가 넘는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었고 7년 뒤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킨 곳
황룡사 목탑지
9층 목탑지의 심초석안의 사리공(舍利孔)
9층 목탑은 자장율사께서 건립한 건물로서 신라 주위의 9개국을 상징하는데
9개국이 신라에 조공을 받치다 그런 뜻으로 만들었으니 나라는 다음과 같다
1층부터 본다면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거란, 여적, 예맥을 뜻하는데 맨날천날 싸우던 백제와 고구려가 없다.
아마도 싸움은 밥 먹듯 했지만 같은 민족이라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9층 목탑지에 자리하는 사리공
자장율사께서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 후 646년에 완성한 9층목탑에 부처님 사리 100과 중 일부를 봉안하셨으며
나머지는 울산의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 금강계단에 봉안하셨다
70년대 후반에 발굴과정에서 황룡사 사리 5과는출토되었으나 지금은 불국사 무설전에 보관 중이니 울산 태화사로 가는 길에
잠시 토함산 아래 불국사에 들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하고 가야겠다.
화려한 벚꽃의 계절에
가장 화려할 때 옷을 벗고 가을에 또 한 번 옷을 벗으므로 나무는 더 굵어지고 단단해진다.
가장 화려할 때 벗음의 미학 사람도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뭐든 내려놓을 때가 가장 아름다울 때가 아닌가 생각도 들고
반월성이 보이는군요
벚꽃 피는 계절이라 텅 빈 연꽃밭으로 지난해 올랐던 흔적만 보이고,
반월성
월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동서 길이 900m, 남북 길이 260m로써 신라의 중심지였으며
월성을 호위하는 산으로는 동쪽에는 명활산, 서쪽에 형산강 넘어 선도산(가운데 뾰족하게 보이는 곳), 남쪽으로는 남천 넘어 남산, 북쪽에는 형산강 아래 부분에 형산이 반월성을 보호하도록 성을 만들어 놓았다
월성 터는 원래 충신 회공(瓠公)의 거주지였으나 박혁거세 때 석탈해가 금성의 지리를 살펴본 뒤 이곳이 천년을 이어갈
명당터임을 알고 집을 빼앗아 후에 월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주는 황룡사던 궁궐이던 나라의 중요했던 부분은 텅 비어 있다.
읽어 보시고
경주 능지탑지
텅 빈 월성을 둘러보고 나와 남산 자락으로 걸음하며 몇 군데 찾아볼까 했으나 덕만 공주를 알현해야 할 것 같아
발길을 낭산으로 돌렸으며 가는 길에 능탑지를 찾아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10일 이내에 왕궁 바깥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다는데
실제로 탑에서 가까운 사천왕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어 문무왕을 화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낭산 일원을 알리는 글 읽어 보시고
낭산의 선덕여왕릉
낭산은 신라 천년을 이어온 진산이며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달인 백결선생이 살았고, 최치원 선생이 공부하시던 독서당과
사천왕사가 있다. 그리고 동쪽에는 토함산, 서쪽에는 선도산, 남쪽에는 남산 북쪽에는 금강산이 자리하는 곳으로 남산 다음으로
불교의 성스로운곳
여왕은 진평왕의 장녀로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안으로는 불만을 품은 세력이 가득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김춘추나 김유신 같은 인물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삼국유사에는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 낭산이다.
백두의 뜨거운 기운이 모두 뭉친 곳이 경주의 낭산이니 그러한 기운이 천년의 세월을 이어지게 한 것 같다.
마라톤 꿈나무들의 산실인 코로롱 구간 마라톤 행사가 열리는 날이라 잠시 구경할 겸 길 한편에 서있어 본다
고등학생들
첫 주자로써 최고의 실력자들이 먼저 기다리는 모습
중학생선수들
화이팅을 힘차게 외쳐주고
불국사로 들어와
너무 유명한곳이라 설명은 생략하고
불국사 대웅전
무설전(無說展)
불국사는 대웅전,극락전,비로전,관음전,무설전의 큰 5개의 전각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무설전은 경전을 강의하는곳인데 무설(無說) 즉 "말이 필요없다는곳이다."
말을 아껴며 살아야 할까?아니면 물처럼 어울리며 살아야될까?
의상대사께서도 이곳에서 강의를 하셨다고 하니 아마도 대중들을 모아 놓으시고
한마디 하셨을것 같다"나이들면 지갑만 열고 말은 적게 하라고..."
분황사 사리 4과, 황룡사 진신사리 5과 그리고 감은사지 사리 1과가 모셔져 있으니
불국사에 가신다면 꼭 무설전에 들러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하시기 바랍니다.
석가모니불을 상징하는 석가탑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불을 상징하여 만든 다보탑
60대 초반의 김해에서 오신 분들
오래전 고등학교때 검정 교복을 입고 이곳 불국사로 수학여행 오셨서 추억을 쌓으신듯
멋진 분들 한 장 담아 갈까요 하니
이렇게 웃으며 서 주셨고
불국사를 돌아보고 나와 최치원 선생께서 만드셨다는 사산비병(四山碑名)중 하나인 숭복사비명을 찾으러
외동읍 말방리 방향으로 걸음 하며 봄이 되어 따듯한 봄바람은 불지만 텅 빈 도로길은 차가운 바람이 많이 불어
몸이 움추려 든다.
외동읍 말방리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분과 이야기 나누다가
숭복사지 3층석탑
숭복사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지금은 절터 중앙에 동, 서로 쌍탑이 마주 보며 서있다.
지금의 원성왕릉(괘릉)에 있던곳에 곡사(鵠寺)를 이곳으로 옮겨와서 숭복사라 하였는데 최치원이 옮기게 된 배경과정을
"초월산 대숭복사비"에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초월산은 토함산의 줄기이며 모산은 지금의 조항산이라 봐야겠죠
그리고 최치원선생은 신라시대 6두품 출신으로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6년 만에 당나라 과거시험에
빈공과(외국인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에 장원급제를 한 인물이며,역작으로는 계원필경(중국에서 지신이 지은 시문(詩文)을
정리한 책)과신라에 귀국한 후 비석에 남긴 네 편의 글이죠 이를 사산비명(四山碑名)이라 부릅니다.
사산비명은 충남 보령의 성주산 아래 성주사지 대낭혜화탑, 경남하동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경북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이곳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명, 모두 왕명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신라불교에 있어
중요한 세분의 고승의 행적을 비문에 옮긴 것으로, 숭복사지비는 파손되어 다시 복원했으나 나머지 세 곳의 비명은 모두 우리나라 국보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사산비병의 사찰중 수양을 강조한 9산 선문(禪門) 해주 수미산,보령 성주산,문경 희양산,남원 실상산,장흥 가지산,
곡성 동리산,강릉 사굴산,창원 봉림산,영월 사자산문중 두곳이 포함되어있는데 보령의 성주사(무염 스님)와
문경 희양산(지선 스님)이 있지만 성주사는 오래전에 폐찰이되었고 희양산은 국내 최고의 아름다운 절집으로 1년에 단 한번
부처님 오신날만 개방하고 있다.
저도 보령의 성주사비명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언젠가 인근으로 가게되면 찾아봐겠습니다.
신라 초월산 대숭복사비
초월산 대숭복사 복원 비문
비명의 내용은
저짜있던 절을 이곳으로 옮기게 된 연유를 적은 것으로
오래전에 비문은 파손되어 없었으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의 글자를 집자(글자 하나하나 모아서 만든 것)하여 만들었다는 내용
텅 빈 공간에 복원한 탑만 외롭게 서있다.
최치원선생이 4곳의 사산비명 글을 썼지만 정과 망치로 글을 다듬으며 오타없이 파내려간 석공은 누군지 궁금해진다.
진짜 대단한 사람은 바로 글을 파내려간 석공이 아닐까?
하긴 고려때 만들어진 팔만 대장경의 전체글자 5천 2백만자중 오타가 158자라 했으니 글을 쓰거나 파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민족 아니겠나
대숭복사지터의 삼층탑이 보이고
이제 지루한 길을 따라 걸으며 신라에서 울산을 이어주던 관문성을 찾아갑니다.
관문성 고갯길
경주와 울산 경계를 따라 돌로 쌓은 성터의 흔적이 있으며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경주를 방어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때 3만 9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만든 12km의 성터로써
울산지역에서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 곳이다
자장율사께서도 월성에서 원고개를 지나 동천길 따라오다가 이길을 통해서 울산 태화지로 들어 가셨을걸로 생각이 드는데 ...
관문성이 자리하는 속심이 마을
참고하시고
관문을 내려와서 담은 사진
저짜 중턱에 성(城)이 보이죠
울산을 이루는 동천
우리나라 6대 광역시 중에서 가장 깨끗한 물을 자랑하는 울산시
광역시(廣域市)가 아니 강역시(江域市)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을듯한 울산.
울산을 지키는 변방의 산들로는 북쪽으로 묵장산, 서쪽에는 가지산, 남쪽에는 문수산,동쪽에는 무룡산이 지키고 있으며
울산 동쪽으로 흐르는 동천도 깨끗하지만 천고지 이상에서 내려오는 태화강 본류 역시 깨끗하니 복 받은 땅임에는 틀림없다
울산의 진산이 무룡산(舞龍山)이 지척이다.
울산을 지키는 삼룡(三龍)중 동쪽을 지키는 춤추는 푸른 용으로 기록된 청룡의 기운을 가진 곳
산자락의 기운이 한국의 대표기업인 연봉 1억의 현대 자동차로 향하고 있어 그 기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니
우리나라에서 일자리 찾기를 한다면 당연 최고의 기업이 아니겠나 생각이 든다.
울산 시내를 걸으며 태화사지 절터를 찾아가는 길에
해는 넘어갈 듯하고 배는 고프고
울산에 사시는 반달곰님과 보라 총무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오늘도 걸식하는 저에게 따뜻한 밥 한 끼 감사했습니다.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두 분은 집으로 가시고
태화강길을 걸어
울산의 자랑인 태화루
영남 3대(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누각으로써 소실된 지 400년 만에 복원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길)를 내면서 절반만 남은 터에 훗날 아파트가 생길 것 같았으나 울산의 s오일 회사에서 100억을 기부하여
지은 건물이다.
국산 금강 소나무는 너무 비싸 엄두도 못내고 캐나다에서 들여온 더글러스 소나무로 지은건물인데 하늘로 날아갈듯한 웅장한
모습과 베흘림기둥과 서까래 아래에는 용금소에 살고 있다는 전설에 따라 용을 그려넣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태화란 유래는 진덕여왕의 연호(국호)에서 찾을 수 있으며, 자장율사께서 창건한 태화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야간에 오래전에 사라진 절터를 찾는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이곳 인근 어딘가 가장 높은 곳이 아닐까 하여 태화동에 자리하는
주차장으로 가본다.
태화루 아래에는 용금소라는 곳이 있는데 황룡연이라고도 부르며 울산의 중앙을 지키는 황용이 산다고 전하는 곳
그리고 서쪽을 지키는 용으로는 태화강이 흐르는 선바위 아래 백룡담에 백룡이 살고 있다고 전한다.
6대 광역시중에서 가장 살사는 도시가 울산이던가? 용 세마리 정도는 지켜줘야 기본은 할것 같은데
제가 살고 있는 대구 서쪽에도 초야에 묻혀 때를 기다리는 와룡이 살긴하는데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서 있어 기운이 영 아닌듯 하지만 그래도 대구의 자랑 성서공단과 이현공단이 자리한다.
멋진 태화루의 화려한 불빛과 아른거리는 물결 위로 금방이라도 꿈틀거리며 작은 용이 머리를 내밀 것 같은 분이기
어느 날이던가 한겨울 어느 계곡의 하천길 걸으며 커다란 저수지 아래로부터 들려오던 굉음이 공포로 전해져 오던 게 생각난다.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불빛이 아른거리는 태화강 수면을 자장께서도 보셨을까
중구 태화동 태화시장 제2주차장
오래전에 사라진 자장율사께서 창건한 태화사가 있던 곳으로 태화루에서 멀리 않은 곳이며
조망이 좋아 이곳에 태화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태화사는 선덕여왕 말경에 통도사를 건립하고 이후 647년-649년 사이에 태화사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며
자장율사께서 가장 애지 중지하던 황룡사와 태화사였지만 오래전에 사라지고 흔적도 없다
태화시장 제2주차장을 만들기 전에 발굴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이고 당산나무와 산신각이 자리하는데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산이 지부장님 댁이 이 근처인데 제주도에 놀려 가시고 없으니 따뜻한 차 한잔은 내가 사서 마시며 가야 할 것 같다
명진천 옆 절골(반탕골)로 들어와
태화사의 부도골로 알려진 곳에 부도는 오래전에 사라져 없어졌고 현재는 관음사란 절이 자리한다.
태화사지 12 지상 사리함은 울산 박물관에 있으나 진신사리의 존재는 불투명한 상태
오대산 중대암의 사리 몇과는 이곳 태화지 탑에 있었던 것을 자장께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간이라 바람은 다소 차갑고 조용한 절집에 스님의 독경소리를 예상했으나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으니 발길을 돌려 다시 내려간다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어디 가서 잠이나 조금 자고 가야겠는데
어느 버스 승강장에 들어가 쪽잠이나 자고 가야겠다.
새벽 1시 무렵에 울산 과기대 앞을 지나
벚꽃은 만개했으나 밤바람은 차기만 하고
밤길에
울산시 청량읍 율리마을로 들어와 율리터널을 지나와서 본 울산의 관문격이며 기상로는 영남 알프스의 그 어떤 이름난 명산들
보다 더 대단한 문수산이 어렴풋하게 보이며, 불켜진곳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모시는 문수사다
문수보살하면 백두대간의 강원도 오대산이 떠오르는데
참고로 우리나라 4대 불교 성지로는 강원 오대산 (문수보살),강원도 연천의 보개산(지장보살),강원도 금강산(법기보살), 전남 장흥의 천관산 (천광보살)이 있다.
새벽 바람은 차갑게 불고 아직 축시 무렵(1시-3시)이라 새벽 예불은 아니기에 그냥 불을 켜두신듯 보인다.
조용한 삼동면 둔기리 시골마을을 지나
통도사 방향으로
이른 아침 보라 커피집에 들어가 몸도 녹일 겸 차 한잔하고 빵하나 사서 나온다.
영축산이 보이는 군요
교종의 중심 통도사
*교종은 교리나 경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선종은 수양을 중요시하죠
선종의 9 산선문은 앞에서 이야기했으니 5교종을 간략하게 적어본다면
영주 부석사의 의상의 화엄종, 경주 분황사의 원효의 법성종, 전주 경복사 보덕의 열반종, 김제 금산사 진표의 법상종, 이곳 자장율사 께서 창건하신 통도사 계율종이 있다
고산제일(高山第一) 월정사 높은 산에는 월정사 적멸보궁( 뇌사리)이 최고며
야산제일(野山第一) 통도사 통도사 적멸보궁(정골사리)이 최고라는 말로써
조선중기까지 통도사와 월정사 두 곳뿐이었으나 조선후기에 4대 보궁이라 하여 정암사와 법흥사가 있다가
70년대에 5대 적멸보궁이라 하여 설악산 봉정암이 뜬금없이 나타나 진신사리(뇌사리)의 대표 격으로 알려진다
아름답지만 힘든 오르막이 기다리는 바위산 설악산 봉정암에 3번 오르면 한 가지 소원을 이뤄 준다고 하여 나이 드신 할머니 분들도 구슬땀을 흘리며 찾으시는데 누가 그런 마케팅에 하여 성공한 건지...
봉정암에 탑에는 진짜 사리가 있을까?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들어간다면 통도사, 태화사, 황룡사, 월정사 같은 큰절이 있기 마련인데 설악산 높은 곳 작은 암자에 사리라...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며
법흥사의 부처님 사리를 모신곳으로 알려진 토굴은 자장께서 백골관 수행을 하셨던곳
태백산 정암사에도 사리를 모셨는데 임진왜란 당시에 사명대사께서 통도사의 사리를 나눠 봉안했다고 하셨는데
사자산 법흥사나 설악산 봉정암의 사리는 확실한것은 없으나 자장율사께서 다니시면서 놓고 간것으로 추정만 할뿐이다.
불보사찰 통도사
불보는 불교의 시작이며 끝이라 할 수 있는 곳
지심귀명례의 귀의처이며 선덕여왕 15년에 자장율사께서 부처님의 정골사리(머리뼈)를 모신곳이다.
오늘도 많은 불자님들께서 찾아 주셨고
1천7백 년 역사를 이어온 통도사 금강 계단
조선 중기까지 진신사리는 월정사와 통도사 두 곳뿐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통도사 사리가 왜구들의 눈을 피해 피난을 가면서
비슬산 용연사, 금강산 건봉사, 묘향산 보현사 용주봉 5층석탑에 부처님 진신사리 일부를 보관했다
그리고 고려말 때 공민왕이 피란도중 이곳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사리 일부를 가져다가 호서 제일 가람인 속리산 법주사 능인전
앞 사리탑에 모셔다 두었는데, 법주사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미륵불을 모시는 곳이라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덜 알려져 있는 곳
자장께서 646년 이곳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을 쫓아내려 했지만
죽어도 못 나가겠다는 아홉 용에게 흰 종이에 화(火) 자를 써서 도망가게 했는데
여덟 마리는 어디로 떠나고 그중에 눈먼 용 한 마리가" 어디 갈 때가 없으니 이곳에 살게 해 주면 절을 잘 지키게 해 주겠다"라고
해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바로 옆에 작은 구룡지라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살게 해 주었다고...
누군가 던져 놓은 100원짜리 동전이 용대신 가라앉아있다
부처님 사리를 모신 금강 계단
조선 중기(숙종) 을유년에 승려 성능이 중수하려고 탑을 허물었더니 탑안에 "승려 성능이 중수하리라"란 글이 적혀 있었고
비단 보자기로 머리빼를 싸서 은함에 담았는데 크기가 물동이만 했고 천년이 지났으나 비단보자기는 썩지않고 새것같이 그대로 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종찰의 하나인 통도사는 스님을 배출하는 불보 사찰로서 진신사리의 금강(석조) 계단에서 수계를 받는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나라 3대 금강(석조)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용연사 금강 계단, 금산사 방등계단이 있다.
황룡이 나타나서 만들었다는 경주 황룡사,황룡연위에 만들어 놓은 울산 태화사,구룡이 놀던곳에 만든 양산 통도사
아직 본적이 없는 용들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는듯 하니 3곳에서 놀던 용들은 어디서 다시 만났을지...
경주에서 양산까지 83km의 걸음을 108배로 마무리하고 집으로 가야 할 시간
그동안 진신사리길을 열어가며 불교에 대해서 많이 배웠기에
다음 갈 곳은 팔만대장경 이운 길이며 강화도에서 한강을 지나 월악산 아래 하늘재를 올라 낙동강길 따라 해인사까지 걸음해야 하는 500km의 길을 걸음 해본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에 정신줄 혼미하시겠지만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개인적인 생각으로 신라의 자랑거리인
황룡사 9층 탑을 현대에서 복원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군요.
목재로 9층탑을 만든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경주에서 울산을 거쳐 양산까지 긴 걸음 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의 긴 걸음도 응원합니다.
황룡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은 가끔 들리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구요 이유는!
아무도 본적이 없는 건물을 어떻게 복원할것인가?
그곳에 자리한 한 줌의 흙조차도 천년을 지켜온 흙인데 어디에 퍼다가 보관할것인가?
그 많은 소나무는 또 어디서 가져와 만들것인가?
그렇다고 케나다산 더글러스 소나무를 사용해서 복원한다면 그것도 말이 안되구요
글 감사드리구요 정맥길 이야기는 늘 잘보고 있답니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잠잘잤는데 ㅋㅋ
안자고 정독했습니다 .. ^^
댓글쓰면서 다 까먹 ㅋㅋ. 다음길 응원드립니다 힘!!
먼길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응원드리겠구요 저도 그무렵에 긴걸음 떠날것 같은데
서로가 몸조심하며 지나야겠죠
이케 타이핑해대도 손꾸락 마디 멀쩡해유?
읽긴 잘 읽습니다마는.
머리만 안 밀으신 스님 같어유.
대체 그 많은 지식이 워디서 쏟아지는 건지.
아참, 그거 돌에다 글자 새겨넣는 일 말유
그거 열에 열은 스님들이 허신규. ^^
우리 애 울산서 10년 사는 동안에 좀 가볼껄.
인제 포항으로 이사하니 다 글렀네유. ㅋ
ㅎㅎㅎ 그래도 하루만에 다 썼구요
절에 다니면서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두었더니 정리가 쉬웠습니다.
비석에 글을 세겨 넣은 분들이 스님들 이라니...
울산이나 포항 그리고 목포 같은 곳은 거대한 용이 바다를 통해서 대양으로 나가는 형국이라
울산이나 포항은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자제분이 포항에 계시니 꼭 한번 가보시기 바라겠구요
가끔 목소리나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병만 스님들이 참여/동원된 이유
1. 한자 한문에 밝아서 오탈자가 생기지 않는다.
2. 사찰을 통해 집단적인 노력 동원이 쉽다.
3. 내부적으로 질서와 규율이 잡혀있어서 작업에 체계화가 용이하다.
4. 돌을 비롯하여 재료를 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적다.
5. 사찰과 작업 공간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
6. 밥을 적게 먹고, 특별한 불만이 없다.
등등.
@팔개 밥을 적게 먹고, 특별한 불만이 없다 ㅎㅎㅎ
이 글이 가장 이상적인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종교에는 관심은 없으나
문화유산에는 관심이 많아 방장님 글로 큰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지리산 사진들 참 좋아서 지리에 가고 싶네요
남은 직장생활 보람되게 보내시구요
대충 그림만봐도 참 좋습니다.
태화루 차타고 지나며 많이 봤지만
이렇게보니 더 이쁩니다.
잘보고 갑니다.^^
^^ 열심히 읽어본다고 읽어는 봤는데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제가 불교 신자가 아니기에)
그래도 한번씩 되내어 보며 귀한 후기글 함께해 봤습니다.
신라의 불교...
그 시작과 끝에 위치하는 통도사...
방장님 글을 보며...
신라 불교에 대해서도 기회되면 조금은 깊게 공부해보면
재미있을거 같아집니다.
뭔가 재미없을 거 같은 것에 호기심이 생긴다는 사실이 신기하네요.
늘 뭔가 찾아 움직이는
방장님의 걸음길~ 응원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절 구경은 많이 다녀봤지만 사찰에 대한 지식도
없고 눈으로만 보고 느꼈는데 방장님 글을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관음사 절 아래 동부 아파트가
우리집인데 집나가면 개고생이라는데 하필
제주도 갔을때 오셔서 얼굴을 못봤네요
다음 발걸음은 초인적인 정신력이 필요한
거리인듯 싶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항상 방장님이 불교에 관한 산행을 많이하시면서 클럽의 무사안전
그리고 개개인을 기원하시면서 진행하시는 마음 감사 합니다.
항상 무탈하게 진행하시길 기원 합니다.
반달곰님 하고 보라총무님 뵈니 방갑네요....
어디를 가도 환영해주는 회원님들...
형님 인생을 잘사신듯..ㅎㅎㅎ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