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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민족사 |
세계사 |
비고 |
1592 |
임진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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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 |
행주대첩.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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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 |
훈련도감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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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 |
이순신, 삭직, 백의종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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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 |
정유재란. 이순신 명량대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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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 |
이순신 전사 |
낭트 칙령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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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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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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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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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도막부 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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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 |
광해군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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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 |
<동의 보감>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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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 |
영창대군 강화도에 위리 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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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 |
일본으로부터 담배 들어옴 |
후금의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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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 |
인목대비 서궁에 유폐 |
독일, 30년 전쟁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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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 |
김류 등, 인조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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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 |
이괄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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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 |
남한산성 쌓고, 수어청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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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 |
정묘호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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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
병자호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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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 |
인조,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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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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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교도 혁명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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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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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멸망, 청의 중국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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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 |
청나라 러시아 정벌에 조선 조총병 징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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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 |
남인.서인 간의 예론(禮論)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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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9 |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결혼 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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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7 |
경상도 대동법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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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 |
상평통보 주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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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0 |
경신환국 : 남인 실각, 서인 정권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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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 |
기사환국 : 세자 책봉 문제 노론 실각, 남인 집권 |
영국 명예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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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 |
안용복 울릉도 독도 영토 확인 |
청, 러시아 네르친스크 조약 맺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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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 |
갑술옥사 : 노론 집권, 남인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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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 |
장희빈 사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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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 |
전국적으로 대동법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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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 |
일본에 통신사 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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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 |
백두산 정계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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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 |
경종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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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
탕평책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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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 |
이인좌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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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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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균역법 실시 |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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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 |
사도세자 뒤주 속에서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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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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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민약론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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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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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 증기기관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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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 |
서자를 등용하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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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 |
규장각설치 |
미국 독립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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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
홍국영에게 권력 집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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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 |
승려에게 장안입성 금함, 박지원 ‘열하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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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 |
이승훈, 카톨릭 서책 들여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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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 |
서학 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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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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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인권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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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 |
서양책 소장 금지, 신해통공 : 금난전권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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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 |
이긍익 ‘연려신기술’ : 태조-숙종까지 야사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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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 |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 오가작통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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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 |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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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 |
홍경래의 난(평안도 농민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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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 |
제주도 민란 |
빈 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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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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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7월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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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
기해사옥 일어남 |
1840 -> 아편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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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 |
김대건신부 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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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 |
외국선박(이양선) 출몰 비번 |
프랑스, 2월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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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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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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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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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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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
최제우 동학 창시 |
베이징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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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 |
김정호 ‘대동여지도’ 간행 |
미국, 남북 전쟁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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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
진주민란으로 삼남에도 민란 고종 즉위. 흥선대원군 이하응 정권 장악 |
링컨, 노예 해방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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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 |
동학교주 최제우 체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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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 |
경복궁 중건-당백전, 원납전 발행. 도성 문세 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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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
병인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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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
남연군묘 도굴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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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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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유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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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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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 개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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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운요호 사건 |
독일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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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 |
강화도 조약, 일본에 수신사 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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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 |
일본에 수신사 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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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 |
지석영이 종두법 시시 |
베를린 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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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
김홍집[사의조선책략]을 왕에게 바침. 최시형[동경대전]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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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
최시형 [용담유사]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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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
임오군란. 청군 흥선대원군 납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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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
한성순보 발간. 태극기를 국기로. 전환국 설치 |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삼국 동맹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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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이탈리아, 러시아와 수호조약 체결 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모자 일본으로 망명 |
청, 프랑스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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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한성조약-갑신정변 문제 처리 광혜원 설립 거문도 사건 배제학당 설립(최초의 근대식 중고등 교육기 |
톈진조약(청.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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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잘 들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재해석하기'라는 제목이 참신해서 좋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단순한 민란에서 혁명이 되기까지 역사적으로 점차 그 의미를 인정받은 사건입니다. 동학운동은 당시 국민의 90%를 차지했던 농민들이 주체가 되었던 근대성을 다분하게 내포한 운동이었습니다. 비록 자연발생적 운동이라는 한계가 있었고 지배층과 민중의 의식이 분리되어 외세의 간섭으로 실패하였지만 민중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개혁의식과 참여의식의 발로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으며 현재의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능동적, 개혁적인 의식으로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하며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코멘트, 훌륭합니다. 1) 극복해야하며 -> 극복해야 하며
국가는 민중의 뜻에 따라 흘러가야 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 동학농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조선 시대나 그 이전 시대, 그리고 현대에서도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국가의 전반적인 일을 돌보는 이는 관리, 정치인, 왕,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들 입니다.하지만 이들의 권력은 민중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민중의 뜻을 받들어야 하고 민중을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민중의 뜻을 저버리고 그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만 나아가려 한다면 동학농민운동과 같이 민중이 그 힘을 발휘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1) 민중의 뜻에 따라 흘러가야 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 -> 다수 국민의 뜻에 따라 흘러가야 함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 2) 권력자들 입니다.하지만 -> 집권층입니다. 하지만 3)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동학농민운동의 후기에는 그 성격이 반외세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는데, 주권을 침탈하고, 우리 땅에서 외세가 불합리한 이득을 취하려고 할 때도 민중들은 그 힘을 발휘하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중들은 바른 뜻을 가지고, 권력은 그들의 뜻에 따라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공동 삶에 대한 논의가 미흡하군요. 보완하세요. 4) 주권을 침탈하고, 우리 땅에서 외세가 -> 외세가 우리의 주권을 침탈하고 우리 땅에서 5) 발휘하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 발휘합니다. 6) 따라서 민중들은 -> 그러므로 일반 국민은 7) 권력은 그들의 -> 집권층은 그러한 다수 국민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발표스타일이 와닿았습니다. 특히 저에겐 정말 익숙한 말투가 반가웠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물론 그 이전 항일운동 또한 동학농민혁명에서 그 근원을 찾을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공동 삶의 원리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군요.(발끈!) 보완하기 바랍니다.
동학 농민운동은 단순히 탐관오리의 폭정에 백성들이 봉기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동학 농민운동의 결과 농민들의 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일부 지역에 설치되었고, 그 지역에 관해서는 세금을 감면해주거나 평소 농민들이 바라던 제도들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학 농민운동은 프랑스 혁명처럼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 사회를 뒤바꿀수도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동학 농민운동은 왜 프랑스 혁명과 같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던 걸까요?
저는 그 이유가 외세의 개입에 있다고 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고 느꼈던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일본에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일본은 동학교도들을 진압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려 했던 일본에 좋은 구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일을 해결하고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주성이 없다면 그 민족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북한과 남한의 통일문제도 어느샌가 당사자인 우리는 뒷전이 되고 강국들의 이권이 걸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자주성을 드높이는 것은 세계화 시대에서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을 해결하고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주성에 대한 강조는 의미있습니다만,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자주성을 가질 수 있느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습니다.
자주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애국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한다면 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해결하고 변화하려는 마음도 더불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어야하겠지요. 자국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다른 나라에 의존하려는 경향도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개인끼리 대화를 할 때도 어느 한 쪽만이 우위에 선 일방적인 자세로는 그 대화를 원만하게 지속하기 어려우며 곧 그 만남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 국가 또한 집권층의 힘만 가지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집권층과 다수 국민의 의사 소통, 힘의 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에 비추어 볼 때 동학 농민 혁명은 집권층의 학정에 대해 민중이 의사를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국민이 그 사회의 체제와 지배적인 사상에 대한 논의를 자유롭게 할
1) 지배 계층의 -> 집권층의 2) 지배 계급과 민중 -> 집권층과 다수 국민 3) 지배층의 -> 집권층의 4) 일반 민중이 -> 일반 국민이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반 국민 모두가 주체로서의 자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주체적인 개인들이 모여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코멘트, 좋아요. 5) 각 민중이 -> 일반 국민 모두가
모두 수정하였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교수님. ^^
염해윤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발표를 해주셨는데요.^^ 동학농민혁명은 물론 결과적인 측면만 놓고 보자면 실패였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의식의 성장과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들로 인해 핍박받았던 피지배층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혁명이기 때문이죠. 또한 이 혁명으로 인하여 당시의 지배층들은 위기의식을 느껴 개혁의 필요성을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된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농민들의 힘에서 나온 혁명이라는 점에서 의의 못지않은 한계점을 가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1) 실패를 하였지만 -> 실패였지만
수정했습니다.^^
사를 업으로 삼던 농민들은 당시의 대외 상황이나 혁명을 성공으로까지 이끌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게 될 때에는 그를 추진시킬 수 있는 “힘”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선 혁명이라 하더라도 지배층의 밑바탕과 지지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던 혁명이지만 실패로 연결되고 맙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의 집권층은 그저 자신들의 눈앞에 주어진 이익에만 급급하여 다수 국민의 의견은 적극 수용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에 집권층은 일반 국민을 위해 절대적으로 봉사하는 사회를 만들어야겠습니다.
2) 사를 주요 업으로 삼던 농민들은 당시의 대외상황이나 -> 농사를 업으로 삼던 농민들은 당시의 대외 상황이나 3) 제 아무리 많은 -> 제아무리 많은 4) 지배층들은 -> 집권층은 5) 피지배층의 -> 다수 국민의 6) 지배층와 피지배층이 함께 相生할 수 있는 시대를 -> 집권층은 일반 국민을 위해 절대적으로 봉사하는 사회를
문장이 굉장히 매끄러워졌네요. 수정했습니다.^^
역사는 집권층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또한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적극 대항하여 들고 일어섰던 혁명 의식을 본받아 우리도 생활에 있어서나, 학문에 있어서 우리의 비판 정신을 함양해야겠습니다. 발표하느라 수고하셨어요~
7) 어느 한 계급에 의해서만 -> 집권층에 의해서만 8) 농민들의 주체성을 -> 혁명 의식을 9) 주체성을 세울 수 있는 자세를 본받아야겠습니다. -> 비판 정신을 함양해야겠습니다.
수정했습니다.^^
어쩌면 힘이 없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남기는 의의와 파장은 실로 크고 값진 것이기 때문에 이 동학농민 운동 또한 실패했지만 결코 실패가 아닌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그들 배경의 일정 부분을 차지했지만 그것 역시 용기가 수반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았겠지요. 우리에게 깨어 있는 의식을 실천으로 옮길 줄 아는 용기의 정신이 흘렀기 때문에 훗날 민주화 운동도 일어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로부터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 역시 민주화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군요.) 우리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세대가 되
1) 일정부분을 -> 일정 부분을 2) 깨어진 의식을 -> 깨어 있는 의식을
기위해서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개선을 위한 용기와 실천력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학우들께서 지적해 주신 것처럼 집권층과 국민, 기득권세력과 비기득권세력 사이의 공감과 유대가 없을 경우의 결과가 양쪽 모두에게 치명적이라는 점, 민족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외세가 개입되게 된다는 점 등 예전에 발표되었던 내용에서 배운 공동 삶의 원리에 대해 재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
3) 지배층과 피지배층, -> 집권층과 국민, 4) 기득권과 비기득권 -> 기득권세력과 비기득권세력
교수님 댓글 2개 모두 수정하였습니다. ^^
발표 잘 들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대중적인 반봉건, 반외세적 혁명이었습니다. 민중의 의식이 성장하여 민중 스스로 실행한 주체적인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당시 농민들은 지배층의 수탈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생각해야 할 관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살기 위해 일으킨 절박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혁명 초기에 농민들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나름의 체제를 갖추는 등 독자적인 조직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세의 개입과 조정의 배신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정신과 노력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에게 민중의 각성과 현실 극복 의지를 보여줍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그 속에 잠식되어선 안 됩니다. 깨어있는 정신은 상황에 급급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주체적인 자세를 갖게 해줄 것입니다. 주체적이며 개혁적인 의식을 갖도록 노력하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키워야겠습니다.
코멘트, 좋군요.
동학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존 신분제도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앞서 배운 바 있는 실학이 대두되었고 백성들은 수동적인 평민상을 벗어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홍경래의 난, 농민봉기 등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이 이미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중들이 똘똘 뭉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 개인이 되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일을 ‘우리’라는 공동체가 되어 용기와 적극성을 극대화시켰고, 이는 1차 동학혁명의 성공에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1)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하기 -> 조선 시대 봉건 질서가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2) 너와 나 개인이 되면 -> 너와 나 같은 한 개인으로서는 3) 공동체가 되어 -> 공동체 의식으로 4) 극대화시켰고, 이는 1차 동학혁명의 성공에까지 -> 극대화시켜 1차 동학 혁명으로까지
인내천의 사상 아래서 재야의 양반계급과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타오르는 혁명 정신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록 외세 열강의 간섭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민중을 단합하는 이념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따로 두어 생각하면 별다른 힘이 없는 농민들과 사회 주변세력들이 서로 ‘합’하여 내는 시너지효과를 동학운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와 단합이란 이래서 중요한 것이겠지요.
코멘트 내용, 훌륭합니다.(짝짝~)
발표 잘 들었습니다. 반봉건, 반외세 의식을 가진 동학농민혁명은 근대로 가는 민중의 정신을 담고 있기에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외세의 간섭과 조정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커다란 물결로 인해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아직 깨닫지 못한 민중들 역시 그 물결에 휩쓸려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민중들의 깨달음은 근대의 정신이자 부패한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실패지만 실패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변화는 현대의 민주주의 정신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 역시 현실에 머물러 있는 정신이 아닌 항상 깨어있고 이상으로의 변화를 꿈꾸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