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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10월 29일에 일어난 참사에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핼러윈데이 축제를 즐기고자 이태원에 나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156여명이 사망하고 또 151명이 부상을 입는 큰 사고였습니다. 국가가 정한 국민 애도 기간은 어제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의 애도가 그와 함께 끝난 것은 아닙니다.
국민합동분향소의 공식 명칭을 두고 혼선이 있었습니다.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가 정부에서 정한 공식 명칭이었습니다. 굳이 참사라는 표현 대신 사고라는 표현을 쓰자고 당국은 고집하였습니다. 그럴 만한 현실적이고 타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56명의 시민이 골목 길에서 한꺼번에 사망했습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참하고 참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사고라는 단어로는 그 비통한 유가족이나 일반 시민들의 정서를 담아낼 수가 었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참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날 사고를 당한 이들을 ‘희생자’가 아니라 사고로 인한 ‘사망자’로 부르는 것이 또한 당국의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희생’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혹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바치거나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니면, ‘집단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제단에 바치는 소나 돼지 같은 짐승’을 일러서 ‘희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전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뜻밖의 사고로 사망한 이들을 희생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논의는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는 언제부터인가 희생이란 단어에, “예기치 않은 재난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156명이나 되는 이들이 예기치 않은 재난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해서 그 분들을 희생자라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사망’이 진정한 ‘희생’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8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8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사람들은 탄식합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가 8년 전처럼 또 다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사고가 있기 전 당국의 조치나, 사고 발생 후 당국의 대처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의 그 희생에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정 기간 애도하고 아픈 기억을 흘려보내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다른 목적으로 이번 참사와 고귀한 생명들의 희생을 이용한다거나 적당히 덮어버리려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사고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원인도 규명하고 책임도 밝혀내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필요한 시스템이나 매뉴얼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 참사가 이렇게 우리들 개인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어떤 긍정적이고 새로운 변화로 승화될 때, 뜻밖의 참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희생은 진정한 희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고나 그로 인한 고통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형 참사의 경우, 그 사건은 언론에 집중 보도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충격을 받지만, 그러나 세상 곳곳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 소형 참사들이 날마다 무수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팀 켈러 목사가 쓴 두꺼운 책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원서 제목은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아픔과 고통을 통과하여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켈러 목사가 말한 대로, 고난으로 인하여 신앙의 길에서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 때문에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이도 있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과연 그 고난을 어떻게 통과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인생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팀 켈러 목사도 말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 함부로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찾아오고, 게다가 고난을 겪는 이들의 기질이나 영적인 상태 역시 모두가 다 서로 다른데, 내가 가지고 있는 단편의 지식이나 체험을 천편일률식으로, 혹은 만병통치식 처방으로 제시하려 한다면, 그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켈러는 이 책에서 성경에 나오는 고난을 몇 종류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로 인한 고난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충성스런 그의 장수 우리야를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습니다. 간음과 살인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사이에 태어난 아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비통함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찾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할 뿐이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거친 풍랑이 일고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 때, 요나는 이 위기가 전적으로 자신의 죄 때문인 것을 선원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그리고 배의 안전을 위하여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저지른 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자기 성찰입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10.29 참사에 대해서 정부 어느 기관도,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그 누구도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다른 부하 직원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정파 간에도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려 합니다. 물론, 이런 세상을 만든 것은 우리들이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빛과 소금의 사명이 교회에 있는데,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한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책임 또한 크다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할 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죄가 아니라 선하고 용감한 행동에서 비롯된 고난입니다. 바울이 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야 했습니까? 복음을 증거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진리이기에, 하나님이 전하라고 명령하신 복음이기에 전했을 뿐입니다. 예레미야가 왜 매를 맞고 시위대 뜰 웅덩이에 갇혀야 했습니까?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지도자들과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바울이나 예레미야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반성이나 회개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고통 속에서 감당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켈러 목사가 말한 대로 ‘용서’입니다. 물론 억울합니다. 복수하고 싶은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하지만, 복수는 결코 고통에 대한 해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 고통 가운데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하신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라고 하는 인물이 위대한 것은, 그가 평생 흑인인권을 위해 헌신한 것도 있지만, 권력의 자리에 오른 후 진실화해 위원회를 만들고 적폐청산을 추구하되, 복수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추구했다는 점입니다. 옳은 일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고난을 당했는데, 그 고난을 통과하여 용서와 화해라고 하는 더욱 성숙한 인격의 자리로 나간 것입니다.
셋째 유형의 고난은, 상실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인간의 유한함, 노화, 그리고 죽음 앞에 선 인생은 큰 슬픔과 상실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실의 고통은 누구에게도 닥치는 것입니다. 이번 참사의 희생자들 가운데 우리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군 복무중 휴가 나온 군인도 있고, 몸이 아픈 엄마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던 착한 딸도 있습니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친구들과 함께 놀러 나간 아들도 있습니다. 단지 축제를 즐기러 함께 나선 모녀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뜻밖의 사고나 질병, 혹은 자연재해를 만나서 갑작스레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화든, 질병이나 사고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물론. 이러한 상실을 마주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성과 회개가 요구되고, 용서와 화해도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슬픔을 마주하면서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켈러 목사는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바울은 권면하였습니다.
네 번째 고난의 유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입니다. 앞서 세 부류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고난입니다. 욥의 경우, 자식들은 몰살당했고 모든 재산은 순식간에 날아갔으며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욥은 그 재난의 자리에서 재를 무릅쓰고 앉아서, 먼저 자신에게 책망받을 만한 죄가 있는지 살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배워야할 교훈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욱 괴로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끝내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욥의 고난입니다. 그의 고난은 인간 편에서 본다면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욥의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의 마음을 전하기로 약속하고 먼 땅으로부터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욥을 만나자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7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아있었습니다. 욥의 그 비참한 고통을 보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욥이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비극과 참사에 관하여,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을 친구들 앞에서 토로하혔습니다..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을 기준으로 욥에게 충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에게 그런 말은 아무 위로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만 더하었습니다. 욥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원망하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절망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침묵만 하시던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찾아오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이치를 피조물인 인간이 어찌 다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욥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려 하고, 함부로 친구를 정죄하고 비난한 욥의 친구들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 친구들을 용서하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뜻밖의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나 재물을 잃거나 재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삶의 근거나 이유를 물질이나 명예같이 셰상에 속한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밖, 해골이라 불리는 언덕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제육시, 정오부터 갑자기 온 땅에 어둠이 임하더니, 제구시, 오후 세시까지 그 어둠은 계속되었습니다. 빛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밤과 낮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창조의 질서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일하는 시간인 낮에 빛이 환하게 비치고 안식의 시간인 밤에는 어둠이 온 세상을 감싸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한 낮의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이 어둠에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어두움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함께 하는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제구시가 되었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갑자기 혼신의 힘을 모아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고통스런 처형 방법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이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현실이 더욱 고통스러워,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후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서,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귀한 뜻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로 내어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받으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인 동시에 몸소 고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며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켈러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고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며 고통 속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되고,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의 땅 광야를 함께 건너셨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삶의 모든 의미와 용기를 상실한 채 광야에서 로뎀나무 그늘에 누워,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천사는 잠자는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깨어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 광야를 건너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소명을 받고, 엘리야는 다시 이스라엘의 역사 속으로 돌아와 마지막 사명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 예수님의 그 시간은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슬픔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속에 찾아오셔서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고통 속에서 쓰러진 우리를 찾아와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시며 새로운 삶의 의미와 힘을 더해 주십니다. 그 힘을 의지하여 엘리야는 광야를 건넜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소명을 받았습니다. 광야를 건너가게 하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슬픔 당한 모든 이들과, 삶의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