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141]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생애(生涯)의 현대적 고찰(考察 )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생애(生涯)의 현대적 고찰(考察)1)
- 이고위감(以古爲鑑) 교훈의 관점에서 - 정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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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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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 주요 활동기의 시대상황 3. 포은의 특징적 삶 1) 자성일가(自成一家)의 구현 2) 풍신연등(風迅鳶登)의 삶 4. 포은의 리더십과 추진력 1) 통섭형(統攝型) 리더십 2)개혁관료(改革官僚)로서의 추진력 5. 맺는말 |
【국문초록】
포은(圃隱)이란 한 역사적인 인물의 역사관, 세계관, 학문관 등 다양한 면모를 탐구하는 시도는 그동안 많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귀감(龜鑑)이 되는 사례로 발굴하는 작업은 아직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포은(圃隱) 선생의 생애(生涯)를 좀 더 입체적(立體的)인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만고 충신(萬古忠臣)이라는 그의 강렬한 아이콘에 가려진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는 포은(圃隱)이란 한 역사적 인물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이글은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포은 정신(圃隱情神)의 현대화(現代化)라는 관점에서 그로 상징되는 정신과 가치를 통해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고위감(以古爲鑑)의 교훈을 추출하기 위한 시도이다. 포은(圃隱)은 일생동안 누구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분야에서는 동방이학의 조종(東方理學之祖宗)으로, 정치‧행정 분야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재상(宰相)반열에 임명되는 등 관련 분야의 최고봉(最高峰) 오르는 이른바 자성일가(自成一家) 를 이룬 흔치 않은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생애 과정에서 보이는 극적이기까지 한, 소위 풍신연등(風迅鳶騰)과 같이 시련(試鍊)에도 좌절(挫折) 않았던 불굴(不屈)의 삶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모습이다. 특히, 관료로서도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 국가사직(國家社稷)과 백성들의 안위(安危)를 위하여 통섭적(統攝的)인 업무처리와 목숨까지 초개(草芥)처럼 버릴 수 있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의 개혁적인 자세로 국사에 임했던 선비였다. 필자는 이 같은 포은(圃隱)의 생애(生涯)를 통하여 그의 상징인 구국충정(救國忠情) 외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특히 일부 젊은 세대의 가치혼란 행태에 경종을 주는 교훈을 발굴하려 한 바, 즉,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부모찬스 등 무엇인가에 기대려는 나약(懦弱)함, 고난이 닥치면 극복하려 하기 앞서 쉽게 포기해버리는 허약(虛弱)함, 국가와 사회의 공공선(公共善)보다 개인의 이익에 먼저 관심을 두는 자기중심세태(自己中心 世態)에, 그리고 국가발전의 무한책무를 부여받은 정부관료(政府官僚)들에게도 교훈이 되는 소중한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조심스런 기대를 해 본다.
주제어:포은 정신(圃隱情神), 자성일가(自成一家), 풍신연등(風迅鳶騰)의 삶, 이고위감(以古爲鑑), 통섭적(統攝的) 개혁, 견위수명(見
논문투고일 2022. 10. 7 / 심사개시일 2022. 10. 11 / 게재확정일 2022. 10. 26 |
이글은 포은공파종인(宗人)을 위한 소양용 소식지(family news), 종보(제35호, 2022 가을호)에 게재된 내용(포은 정신의 현대화)을 젊은 세대를 위한 학술용 자료로 보완. 발전시킨것 임.
* 영일정씨포은공파 종약원 대의원, 교육학박사, 달가(포은)연구소 대표 <전> 대통령실 국장, 교육부 이사관, 미연방 동서문화연구소(East-West Center) APEC 고위급교육전문가, 한국외국어대학교초빙교수, 제22회 행정고시, 스탠퍼드대학원. 매사츄세츠대대학원 졸업 hanvoice7@gmail.com
1. 들어가는 말
포은학연구(圃隱學硏究)의 목적이 여럿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를 든다면, 역사적 인물로서 포은(圃隱)의 철학, 가치, 행동규범 등 귀감(龜鑑)이 될 만한 사례를 발굴하여 시대 상황에 맞게 잘 다듬은 형태로 오늘을 살아가는 후 세대에게 온전히 전승(傳承)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말기의 만고 충신(萬古忠臣)이면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로서 역사를 빛낸 인물로 널리 인식되어있다. 이렇게 알려진 외에도 그는 명 외교관(外交官)으로서, 병법 전문가(兵法專門家)로서, 정치. 재정‧경제‧보건복지‧사회‧교육 등 국정 전 분야에 걸친 개혁 관료(改革官僚)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더욱이, 그의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그는 24세의 나이로 과거 삼 장 연속의 장원으로 관직에 등장한 화려한 이력과는 다소 결이 다른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포은(圃隱)은 젊은 시절부터 자율독립심이 강해 명석한 두뇌의 힘으로 홀로 깨우쳐 당시 변혁기에 있던 주류 학문 세계의 최정점에 도달하는 자성일가(自成一家)를 이루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관직 출사 이후에도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냄으로써 소위 풍신연등(風迅鳶騰)의 삶을 구현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기도 하며, 평생을 쉬지 않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공부하는 소위 평생학습자(life-long learner)로서의 자세를 지닌 학자형 관료였다. 이론의 학습보다는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배움의 종점으로 여기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선비였다. 또한 창의적(創意的), 통섭적(統攝的)관점에서의 국정개혁을 통해 후기 고려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했고, 심지어 나라가 위태로울 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일념으로 국사에 매진하였고, 실제로 목숨을 던져 충의(忠義)를 실천했던 관료이기도 하였다.
태산고절(泰山高節), 정충대절(精忠大節)이란 큰 아이콘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의 면모에 새로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즉, 성리학의 대학자(大學者)로서, 걸출한 외교관(外交官)으로서, 문무를 겸전한 무장(武將)으로서, 시문학을 통한 소통대가(疏通大家)로서, 또한 국정 난맥을 척결하는 과단성과 추진력을 겸비한 개혁관료(改革官僚)로서의 모습과 그의 활동상에서 읽히는 삶을 관통하는 자성일가(自成一家)의 여정, 그리고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난관을 꿋꿋하게 극복하는 이른바 풍신연등(風迅鳶騰)의 삶의 행로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그의 인물됨은 이른바 몇 가지의 포은 정신(圃隱情神)으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과거지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본보기로 후 세대들에 전수해야 할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자립심의 발로인 自成一家, 불굴형 풍신연등(風迅鳶騰)의 삶, 통섭적 관점의 改革性, 님 향한 一片丹心 등인데, 이 글에서는 포은 정몽주가 상징하는 충신 상(忠臣像)이외의 비교적 일반인에게는 덜 알려지고 가치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후 세대들에게 귀감(龜鑑)이 될 수 있는 나머지 덕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주요 활동기의 시대 상황
1) 대략의 일대기
고려사(高麗史) 또는 함부림(咸傅霖, 1360~1410)이 편찬한 圃隱 先生 行狀에 기록된 그의 일대기의 대략은 아래와 같다.
정몽주(鄭夢周)의 본관은 영일현, 호는 포은(圃隱), 자는 달가(達可), 일성부원군 정운관과 변한국대부인인 영천 이 씨를 부모로 1337년(충숙왕 6년) 태어났다. 태어날 때 난초의 태몽을 꾼 뒤였다고 몽란(夢蘭)이라 불렀다가 자라면서 용을 꿈을 꾸고서 몽룡(夢龍)이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 관례를 치르고 나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부터 시를 지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19세 때 부친이 별세하였을 때 삼년상을 치르고 여묘(廬墓)살이를 함으로써, 당시로서는 100일 이내에 탈상을 하던 때라, 조정에서도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24세가 되던 1360년(공민왕 9년) 과거에서 삼 장 연속 장원을 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관료 경험을 쌓기 위해 20대에 한방신(韓方信)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 정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31세가 되던 해에 예문관 정랑으로 성균관 박사를 겸하면서 탁월한 성리학의 이해로,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으로부터 “정달가(鄭達可)의 논리는 좌우로 합당하지 않은 데가 없어 동방이학의 조종(東方理學之祖宗)으로 추대 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후 성균관 사예, 사성을 거쳐 39세가 되던 해에 이윽고 대사성(大司成) 자리에 올랐다. 포은(圃隱)이 대사성으로 재직 시 이인임을 비롯한 권신들이 공민왕 이래의 친명정책(親明政策)을 다시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회귀할 조짐을 보이자 鄭道傳, 李崇仁, 金九容 등 젊은 신진 관료 십 수 명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청물영원사소(請勿迎元使疏)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권세가들에 의해 이들은 모두 유배형(流配刑)에 처해졌고 포은도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 2년째인 41세가 되던 해 왜구의 출몰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사신으로 왜국에 파견할 적임자로 포은을 지목함에 따라 유배지에서 풀려나 왜국(倭國)으로 건너가 상대 책임자를 설득하여 피랍된 고려인을 대거 석방토록 하였다.
44세이던 1380년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운봉전투(雲峰戰鬪)에 참가해 왜구를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다. 48세 되던 1384년 명나라가 세공을 대폭 늘리고 사신을 유배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해결사신으로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할 때 포은이 임금(우왕)의 명을 선뜻 받아들여 명에 가서 양국 간의 갈등위기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돌아와서 왕으로부터 의대(衣帶)와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그 외에도 포은은 고려사회개혁(高麗社會改革)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으며 이는 그의 문인인 함부림이 편찬한 행장에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그 후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의 시도를 할 때 끝까지 항거하다가 1392년 4월 4일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에 의하여 순절(殉節)하였으며 이때 포은의 나이는 56세였다.
2) 포은이 활동했던 시대의 상황적 배경
포은이 24세 때인 공민왕 9년 1360년 과거 장원으로 출사를 한때를 전후로 고려왕조는 그야말로 대내외적으로 밀려오는 소위 삼각 파도(三角波濤)를 힘겹게 헤쳐 나가고 있는 시기이었다. 즉, 첫째, 北坊의 中國에서는 고려사회를 80여 년간 침탈하고 있던 중원의 지배자 몽골족의 원나라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한족의 후예 주원장(朱元璋) 세력 간의 대륙의 지배권 쟁탈전이 있었고 그 결과 주원장이 원을 만리장성 북쪽(북원)으로 패퇴시키고 1386년 새로운 명 왕조를 건설하게 되는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였다. 둘째, 남쪽의 日本 관련해서는 1350년 이후 고려왕조의 존망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진 왜구의 약탈행위로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로 당시 일본은 남북조 내란으로 분열된 상태라 일본국 중앙정부가 지역 왜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데 한계가 있는지라 군사적 해법 이외에 외교를 통한 문제해결에 더욱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셋째, 고려의 國內 事情은 공민왕 개혁 이후 국정 기조를 親命政策으로 하고 원을 배격하였으나, 공민왕의 사후 親元政策으로 회귀하는 권문세족 중심의 親元派와 중원의 지배권 동향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한 상황인식을 가지고 있던 포은 정몽주 등 신진사대부 중심의 親明派 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이외에도 북방의 여진족이나, 특히 중원의 홍건적 또한 고려조정에게는 골머리를 앓게 하는 존재였다. 이어서 우왕대의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둘러싼 국론 분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우왕 창왕에 대한 폐가입진(廢假立진) 논쟁, 공양왕의 등극과 개혁파와 역성혁명파의 갈등 등 어쩌면 한시도 평안한 날이 없을 정도로 정국이 혼란한 시기였다
[출처] 포은정신의 현대화 ② : 포은생애의 이고위감(以古爲鑑) 교훈|작성자 dalgapo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