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479년)의 생존 시 제자들이 받아 적은 공자의 말과 공자의 사후 공자의 제자들의 말 및 기타 자료들의 첨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맹자(孟子) :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289년)의 주도 아래 그의 두 제자인 만장과 공손추가 참여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용(中庸) : 전통적으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공급(孔伋, 기원전 483년∼402년)이 지었다고 전해져 왔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대개 자사 및 그의 문하에서 지어지고 후대에 수정 보완되어 완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大學) : 전통적으로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 기원전 506년∼436년)가 지은 것으로 전승돼 왔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대개 공자가 찬술한 것을 증자가 정리하고 증자의 문인들이 해설을 붙인 것에 후대에 수정 보완하여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말과 본서의 3편 5장은 주희가 썼다.
삼경(三經)
시경(詩經) :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 한 시기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주(西周) 시기부터 동주(東周) 시기까지의 수세기에 걸쳐 다수의 시인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경(書經) : 중국(中國)의 요순(堯舜) 때로부터 주(周)나라 때까지의 덕치를 행한 문서를 공자(孔子)가 수집하여 수록한 책이다.
주역(周易) : 주(周)나라의 역(易)이란 뜻이며, 자연의 구성과 변화의 현상을 음양과 오행의 구별로서 해석하는 형이상학적 철학이론이다.
이상 저의 답변이었습니다.
추가로 사서삼경 언해에 대해 소개드리겠습니다.
《논어언해》 4권 4책, 《대학언해》 1책, 《중용언해》 1책, 《맹자언해》 14권 7책, 《시경언해》 20권 10책, 《서경언해》 5권 5책, 《주역언해》 9권 6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교 경전에 대한 번역사업은 이미 세종대에 집현전에서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되지만 그 성과가 간행되는 데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성종대 이후 진출한 사림파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하면서, 그들이 이해한 성리학의 이념을 사회에 고루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소학(小學)》을 비롯한 윤리서와 사서(史書) 등 유교 경전의 전파운동을 일으켰다.
유숭조(柳崇祖) ·이황(李滉) ·이이(李珥)에 의해 경전에 토를 붙이는 노력이 이어지고, 유희춘(柳希春)은 1574년(선조 7)에 사서와 오경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아 먼저 《대학》과 《논어》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이 바탕이 되어 경전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삼경 언해본에 앞서 사서 언해본이 먼저 이루어졌다. 1585년에 왕명에 의해 교정청(校正廳)이 설치되고 정구(鄭逑) ·최영경(崔永慶) ·한백겸(韓百謙) ·정개청(鄭介淸) ·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그 이듬해에 《소학》과 사서의 언해가 완료되었다. 1590년에 금속활자인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로 간행된 초간본은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이이도 언해작업에 전념하여 사서에 대한 ‘율곡언해(栗谷諺解)’를 완성하였는데, 교정청의 언해가 일반 독자의 이해를 위해 순수 국어를 많이 사용한 데 비해 율곡언해는 원뜻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원문의 한자를 많이 이용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비해 삼경은 언해가 늦어져 1585~1593년 교정청에서 행하여졌으며 간행도 임진왜란 후까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06년에 간행된 《주역언해》 초간본이 규장각에 있어 그때 삼경언해가 함께 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시경언해》는 표기상의 수정을 거쳐 1613년(광해군 5)에 간행된 훈련도감 목활자본이 확인될 뿐이며 《서경언해》는 그 시기의 것도 확인되지 않아 전체적인 간행상황을 단언할 수 없다. 이 책들은 그 후에 광해군대 ·인조대 ·순조대 ·철종대에 여러 차례 중간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많이 간행되었다
《大學》解題
mspress
《대학(大學)》은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목적과 정무(政務)의 근본을 서술한 경전이다. 본래 이것은《예기(禮記)》49편 가운데 제42편이었지만, 다른 편들과 달리 구체적인 사상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의를 끌어 왔었다. 유향(劉向)은《별록(別錄)》에서 이 책을 통론류(通論流)에 넣었는데, 이는《대학》이 유교를 개론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唐代) 이전에는 이 책이 단행본으로 간행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별로 중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한유(韓愈)는 <원도(原道)>에서《대학》의 경문(經文)을 인용하여 도교·불교를 배척하는 근거로 삼았다. 그는 <원도>에서 요(堯)·순(舜) 이후 공자(孔子)·맹자(孟子)에 이르는 유교의 전통을 논하였는데, 도교나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려 하면서도 천하를 도외시하고 천륜을 무너뜨린다고 비판하면서, 반면에《대학》역시 도교나 불교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 목표가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있는 데서 큰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사마광(司馬光)이 처음으로《예기》에서《대학』을 분리하여《대학광의(大學廣義)》를 저술하였다. 이어서 이정(二程:程顥·程이 형제)이《대학》을 초학자가 도덕을 배우기 위한 입문서라고 하면서《대학정본(大學定本)》을 짓고,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과 함께 사서라고 칭하였다
이어서 여대림(呂大臨)은 이에 근거하여《대학해(大學解)》를 지었다. 주희(朱熹)는《사서집주(四書集註)》의 하나로서《대학장구(大學章句)》를 지어 주석을 가하고, 소학(小學)에 대응한 대학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서 중 하나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작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데, 한대(漢代)의 정현(鄭玄)은《예기목록(禮記目錄)》에서 자사(子思)가《중용(中庸)》을 지었다고 밝혔을 뿐 《대학》의 작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규(賈逵)는 “자사가 송(宋)땅에 살면서 가학(家學)의 민멸을 우려하여《대학》을 지어 경(經)으로 하고,《중용》을 지어 위(緯)로 하였다”고 하였다. 주희는 경문의 ‘증자왈(曾子曰)’ 구(句)에 의거하여 증자와 그 문인들의 작으로 보았다.
명대(明代)의 진도영(陳道永)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유자(儒者)의 작으로 보았으며, 청대(淸代) 대진(戴震)의《대학보주(大學補注)》 및 왕중(汪中)의《대학평의(大學平議)》에서는 주희의 설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근세의 호적(胡適)·전목(錢穆) 등의 학자는《대학》·《중용》을 함께 작자 미상으로 보고 책의 성립 연대도 진(秦)·한(漢)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주희는《대학장구》를 지으면서《대학》의 본문에 착간(錯簡)과 오탈(誤脫)이 있다고 하여 순서를 고치고 경(經) 1장 205자, 전(傳) 10장 1,546자로 개정하였다. 이것은 착간으로 인정되는 부분은 고친 것이고, 전 제5장은 원문이 일탈된 것으로 단정하고 보충한 것이다. 또한 경은 공자의 말을 증자가 기록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의견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희가 보충한 것을 보망장(補亡章)이라고 하는데,《대학장구》서문과 함께 문장도 훌륭하고 주희의 사상과 학문이 명확하게 표출되어 있어 원(元)·명(明)·청(淸)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애독하였다.
또한 주희의《대학장구》가 유포되면서 공자·증자·자사·맹자·정호·정이로 이어지는 도통설(道統說)이 수립되었다. 본래《예기》에 수록된《대학》에는 정현의 주(注)와 공영달(孔潁達)의 소(疏)가 있었으며, 송대 위식(衛湜)의《예기집설(禮記集說)》에도 주가 달려 있다. 이것을 이른바 고주(古注)라고 하며, 주희가 개본하고 주해한 것을 신주(新注)라고 한다. 한편 주희의《대학장구》를 비판하면서 동괴(董槐) ·섭몽정(葉夢鼎)·정민정(程敏政)·설청(薛淸)·설제(薛濟)·최선(崔銑) 등의 학자는 새롭게 그들 나름대로 구본의 개정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종류가 10여 종에 달하였다.
특히 명대(明代)의 왕수인(王守仁)은《예기》에서《대학》을 표출하여《대학고본방주(大學古本旁注)》를 저술하였는데, 양명학자(陽明學者)들은 물론 고본을 믿으려는 청대 고증학자들도 주희의 개정본을 비판하였다. 예컨대 청대 송상봉(宋翔鳳)의《대학고의설(大學古義說)》및 이광지(李光地)의《대학고본설(大學古本說)》등은 모두 고본에 근거하여 주희의 입장을 공박한 것이다.
이 책은 강령(綱領)과 조목(條目)이 뚜렷이 서 있고 체계가 엄밀하여 의론체(議論體)로 엮어진《논어》·《맹자》와 다르고, 기언체(記言體)와 의론체가 뒤섞여 있는《중용》과도 다르다. 주희는《대학》교육의 목적을 삼강령(三綱領:明明德·新民·止於至善)에 두고, 이것을 달성하는 수양의 순서를 팔조목(八條目: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으로 제시하면서《시경(詩經)》·《서경(書經)》 등의 말을 인용하여 해설하였다. 이것은 실로 후세 유가의 기본 관념을 형성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거의 변동 없는 지침이 되었다. 이와 같이 사물에 대한 탐구 "格物"와 지극한 지혜의 얻음 "致知", 생각의 성실함 "誠意"과 마음을 바로함 "正 心"을 평천하로까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유교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념이다. 주희는 이를 요약하여 ‘궁리정심(窮理正心)하고 수기치인하는 도(道)’가 『대학』이라고 하였다.
한편 왕수인은 그 구체적인 해석에서 주희와 다르다. 예컨대 삼강령의 신민을 고본에 따라서 친민(親民)으로, 8조목의 격물에서도 주희가 '물(物)에 이르다'로 해석한 데 대하여, '물을 바로잡다'로 보았다. 그러나《대학》이 유가의 경전으로서 중요한 위치가 변동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희 이후의 여러 주석을 통하여 그 내용의 폭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책은 유교적인 실천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며 덕치주의(德治主義)의 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로 표리 관계에 있는《중용》이 천도(天道)를 논한 것이라면, 이 책은 인사(人事)를 논한 것이 특징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