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 자리한 "솔뫼"는 소나무 숲으로 덮인 산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內浦)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내포는 남으로는 광천의 오서산을, 서북으로는 덕산의 가야산을, 서로는 큰 바다를, 북으로는 경기도 해읍(海邑)과 아산만을 경계로 하면서 서해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평야지대이다. 내포의 한복판에는 삽교천이 흐르고 있다. 삽교천은 선사시대부터 바다를 통하여 건네지는 문화를 내륙으로 전하는 출입문의 구실을 하였다. 삽교천에 인접해 있는 솔뫼는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접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천주교 신앙이 전하여진 것은 육로를 통하여 전하여진 이승훈(1784년) 이전으로 추측되며, 또한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이곳 내포 출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신앙을 전하고 순교를 하는 굳은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솔뫼 출생의 대표적 순교자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다.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그 탄생지를 유적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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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탄생장소를 발굴, 복원하여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앙과 성덕을 가르치는 표지로 삼을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이 이 땅에서 태어나고 살았다는 것을 길이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우고, 피정의 집이 완공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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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며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가문이 정착한 것은 8대 선조 수완(守完, 1643∼1725)때부터 이다. 김대건은 이곳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때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대건이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1845년 입국한 김 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의 일이었다. 1859년 9월 24일 가경자, 1925년 7월 5일 복자품, 1984년 성인품에 올려졌다. 김 신부는 조선 최초의 방인 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학 유학자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고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항해한 최초의 서해 항로 개척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유품으로는 22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가 25세의 한창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1846년 9월 16일로부터 꼭 백년이 지났을 때인 1946년 6월 4일에 합덕(현재 구합덕)본당 백 문필 비리버 신부가 현재 복자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가 서 있는 땅 100평을 임대한 것이 솔뫼 성역화의 시작이었다. 솔뫼는 현재 당진군 소재이지만 김대건 신부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면천 소재였다. 약 100년 전에 오기선 신부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가 우리 고장에 있으므로, 이를 되살려 개척정신의 선구자였던 김대건 신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자"며 솔뫼 성역화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이곳 출신들인 여러 어르신들께 김신부가 어렸을 적 살았던 집터를 물어물어 현재 생가터 비가 서있는 자리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 후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솔뫼의 성지화가 본격화되었다. 그 후 1976년 10월 20일에 솔뫼 성역화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집터와 소나무가 우거진 뒷동산을 매입하여 본격적인 성역화를 시작하였다. 1983년 2월 26일에 솔뫼 피정의 집이 완공되었고, 초대 관장으로 김영교 베드로 신부가 부임했다. 솔뫼피정의 집이 완공되고 3개월이 지나서는 첫 숙박 피정을 실사했고, 1984년 11월 15일에는 제2대 관장으로 유흥식 나자로 신부가 부임했다. 1988년 8월 26일에는 제3대 관장으로 김정수 바르나바 신부가 부임했고, 1993년 8월 20일에는 제4대 관장으로 윤인규 라우렌시오 신부가 부임했다. 1996년 9월 20일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교구 신앙대회 및 김대건 신부 생가 복원 기공식을 가졌고, 1998년 2월 10일에는 제5대 관장이자 현 관장을 맡고있는 배승록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신부가 부임했다. 김 신부의 생가터는 1998년 7월 25일에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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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성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흰색철문과 그 안으로 펼쳐진 잘 정돈된 잔디밭인 것 같다. '천국으로 통하는 문'과 같은 이 흰색 철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왼편으로 김신부의 생가터 임을 나타내는 비가 보인다. 그 옛날 김대건 신부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 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1996년에 김신부의 순교 150주년을 맞아 김신부의 생가 복원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고, 현재 생가 고증을 위해 자료를 수집, 분석, 검토 중에 있다. 자료수집과 분석이 끝나는 대로 본격적인 건축을 위한 설계와 시공이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김신부의 생가터를 지나면 위치를 나타내는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십자가의 길'이 나오고, 좌회전하면 '김대건신부의 동상'이 나오며, 우회전하면 솔뫼 피정의 집이 자리한다. 좌회전해서 15m 쯤 소나무 길을 지나면 우뚝 서있는 김신부의 동상이 보인다. 솔뫼성지 피정의 집에서는 이런 김대건신부의 모습을 본 따 1년여의 작업 끝에 '김대건 신부 캐릭터'를 개발하였다. 캐릭터 제작은 김대건 신부를 좀더 가까이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의도에서였다. 김신부의 동상에서 다시 원위치로 내려와서 이번에는 십자가의 길로 향한다. 십자가의 길은 김신부가 태어난 이곳 솔뫼성지를 순례하면서 김신부가 걸어간 멀고도 먼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순교 성인들의 공덕과 고통도 함께 새기면서 걷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의 길에서 바로 옆에 위치한 3층 건물이 솔뫼피정의 집이다. 피정의 집은 지하1층, 지상 3층 구조 건물로 지하의 식당, 1층의 성당, 성물센터, 사무실이 있고 2층에는 대강의실이 위치한다. 그리고 2∼3층에는 116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자 숙소가 있다. 매년 이곳에서 피정(피세정념의 줄임말로 세상을 피해 고요히 생각하는 것 즉, 기도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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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에서 서울방면으로 150m 쯤 가면 당진 버스터미널이 있다. 당진에서 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합덕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당진 버스터미널에서 합덕행 버스를 타면 약 30분이 소요된다. 합덕에 도착해서 솔뫼성지행 시내버스를 타면 약 5분 후 솔뫼성지에 도착한다. 합덕 터미널에서 솔뫼성지까지는 시내버스를 이용해도 되지만 버스운행이 많지 않으므로 택시를 이용해도 기본료만으로 성지에 도착할 수 있다. 택시이용이 꺼려진다면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이므로 한적한 마을들을 구경하면서 산책하듯 걸어도 좋을 것이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서울방면 32번 국도를 타고 줄다리기로 유명한 기지시를 거쳐 거산리 3거리까지 가면 된다. 그 다음 거산리 3거리에서 합덕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거산리 3거리에서 10분 정도 달리면 길 양옆으로 버드나무가 늘어져있는 언덕이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서 처음 나오는 삼거리에서 합덕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해서 150m 쯤 들어가면 왼쪽으로 우강 방면 도로가 있다. 여기서 1.3km 쯤 가면 바로 솔뫼성지가 위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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