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
그분과 함께 살았던 베드로는 왜 그분을
모른다고 했을까?
고기를 잡던 베드로와, 뜻길을 간 베드로
여전히 불가사의한 인간의 길,
로마書
그때, 바울이 물었다
너희가 성전인 것을 아느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혈거인처럼
지하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캐터코움(Catacomb)에서
나는 울었다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불하라는 것은 같은 말이다
내가 성전이 된 적이 있었는가?
아무 준비없이 부모의 자리에
도달한 지금, 서둘러 집을
지어야 한다
낮은 곳에 와 계신 성전의 주인이
다시 묻는다. 아담아,
너는 무슨 이름을 붙이고 다녔느냐?
* Adam은 '이름을 지어주는 자'라는 뜻이 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던 행위는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그 강요되지 않은 습관은 의외로 강하다
1979년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서
바울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 분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 일에는
초연해 계심을 확신한다.
언제 바티칸 성당의 천지창조 명작 아래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셨다든지, 홀연히 UN총회 개막식에
현현하시어 메시지를 주셨다든지, 혹 꿈을
통하여라도 거기 모일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신성과 모성을 겸비하셨을 메시아의 어머니는
도처에 눈물의 흔적을 남기며 피곤한 양치기 자매들
에게 秘意를 전해주시더니 최근엔 한적한 성당에
다녀 가신다.
왜 하늘 쪽을 향한 모든 일들은 더디게 이루어지며
아직도 낮은 곳에서 役事하고 있는가?
2000년 전, 바울이 낙마한 그 지역쯤에 다시 당신을
드러내시어 같은 유일신을 모시고 분쟁하는 집안
싸움을 종식하여 주시기를 고대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인가? 五餠二魚의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신화가
그리운 나는 바울이 그러했듯이 음성을 듣기 전에
改心하지 못한다
첫댓글 동산, 어리석은 내 생각으론 말입니다.
그분은 음성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움성을 듣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있다면 천지만물에서 다 그분의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기적을 보아야 믿겠다는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저인 것 같습니다
(오늘 한여름의 초입에서, 세부섬에 살때 이런 저런 글을
원없이 썼던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믿음은 신의 선물이지만, 인간의 주관적 입장에서 볼때는 창조이고, 습관이고 동행이고 신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날 날으신 부모님은 내가 볼 수 없었지만 부모를 의심하는 자녀는 없으니까요
무형세계를 저는 믿습니다.... 좋은 말씀에 공감하며, 하루를 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