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장
사돈 남 말하기
다산(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학문하는 선비가 힘써야 할 세 가지 일에 대해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하게 서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학문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할 일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내가 왜 이 글에 다산의 편지 내용을 옮겨 쓰느냐 하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문학인이라면 이 말이 비껴가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기 걸음 못 걷는 어정잡이 시인과 수필가다. 나는 내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많이도 보았다. 이 세 가지 질책야말로 선방에 앉아 정신 흐트러지려는 수행승 어깨를 내려치는 죽비다.
여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있다. 평소 누군가에게 잘 대해주다가도 상대의 사소한 잘못 때문에 마음이 들죽 날 죽 한다면 그 사람 마음은 작은 돌멩이 하나에 파르르 떨리는 작은 물웅덩이 같은 가슴을 가진 사람이다. 하찮은 잘못 하나쯤은 상대가 제 마음으로 돌아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진짜 시인과 수필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내가 문인이 되어보니 안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았다. 너 나 없이 가슴이 조금, 조금만 더 크고 깊은 웅덩이가 될 수 없을까.
그동안 내가 본 것을 말하자면 사소한 일에 삐치고 별것 아닌 일에 팔뚝 걷어붙이는 사람, 그냥 웃고 넘길 일도 웃지 못하고 신경 곤두세우는 사람, 다른 사람 말은 듣지 못하는 사람, 나 아니면 안 되는 사람,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무슨 일이든 척하는 사람, 처음과 끝이 다른 사람, 말이 앞서는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 자랑하는 사람, 성격 난폭한 사람, 남 헐뜯는 사람, 거짓말 잘하는 사람, 약속 안 지키는 사람, 남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 남이 잘되는 골을 못 보는 사람,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픈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신의 없는 사람, 사돈 남 말 하는 사람, 하고 보니 많기도 많다. 모두 스무 가지가 넘는다. 모두 안 좋은 말이다. 쓰다 보니 대부분 거칠고 안 좋은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독한 소독약처럼 쓰리고 따갑기도 할 것이다. 몸에 좋은 약이 쓰듯 쓴 소리는 듣기 싫은 법이다. 그러나 꼭꼭 씹으며 천천히 읽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사돈 남 말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쓴 소리 대접하기
수필가인 나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자신이 문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쓴 소리를 너무 못 듣는다는 것이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인데도 당사자는 자존심상하는 소리로 듣는다. 대부분 시인과 수필가 아니면 또 다른 작가들이다. 문학회 합평회 때도 그렇고 문인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다 그렇다. 그러다 보니 이젠 어떤 자리에서도 상대가 마음 상하지 않게 듣기 좋은 말만 해야 할 것 같다. 정말 그러하다면 작가에게 쓴 소리 못하는 비평가가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것처럼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한다면 작가는 빈 들판에 홀로 선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굴에서 잠자고 있거나 조롱에 새처럼 주는 먹이나 먹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글감이 떠오르면 머뭇거리지 않고 쓰는 편이라 더러는 오해를 불러오는 일도 있다. 시간이 가며 자연스레 해소되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정말 난감해진다. 그로 인해 좋았던 사이가 멀어지거나 심하면 서로를 미워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쓴 소리도 많이 들었다. 속상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글도 아무것에도 걸리는 일 없이 내 맘대로 쓴다. 글쓰기가 즐겁다. 총명한 작가일수록 남의 쓴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평론가와 비평가가 하는 쓴 소리는 작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겨울잠 자던 곰이 동굴에서 나와 기지개 켜며 바깥세상을 맞이하듯, 조롱을 벗어난 새가 창공을 날아다니며 세상을 바라보듯, 그런 것이다.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는 그의 산문집 “서평을 대접하라”라는 글에서 “좋은 책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는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다. 그러나 이 성숙성은 저술가의 힘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이 나왔을 때 그것을 따지고 평가하고, 좋은 저술을 유통시킬 수 있는 사회적 수용 역량의 유무야말로 성숙한 문화의 토양이고 환경이다.” 라고 했다. 모든 작가가 새겨볼 말이다.
패거리 문화
나는 성질이 지랄 같은 데다 괴팍스러워 다른 사람에 비해 싫어하는 것이 많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요즘 말하는 패거리 문화다. 요즘 우리 정치판도 친윤 비윤, 친명, 비명, 으로 갈라져 그야말로 난리 법통이다. 싫어하기보다는 눈에 거슬린다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물고기나 새 동물처럼 같은 種끼리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거야 자연의 현상이라 그렇다 치자. 내가 보기 싫은 것은 사람이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일이다. 요즘 어느 단체나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만 해도 그렇다. 스포츠든 예술이든 취미생활이든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함께 하는 사람끼리 그 안에서 편을 가르는 일이다. 다른 분야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쓸 일이 없지만 내가 몸담은 문학계만은 그럴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 요즘 들어 제일 싫은 것이 같은 문인을 만나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늘 만나야 하는 사람이 문인이다. 나에겐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다.
이곳에 몸담은 후로 가장 보기 싫은 것이 겉으로는 표 나지 않게 끼리끼리 모이는 일이다. 시와 소설 수필의 장르별로 모이는 일이야 그렇다 쳐도 같은 장르에서도 마음 맞는 사람끼리 편이 갈린다. 예컨대 누구누구의 문하(門下)라든가 무슨 계파(系派)라든가 아니면 이쪽 라인, 저쪽 라인, 하는 것들이다. 거기에 대가연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그렇지만, 정말 보기 싫은 것은 그 앞에 줄 서는 사람들이다. 뭐라도 얻을 게 없나 싶어 그들 눈치 봐가며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 또한 역겹다. 우리 어릴 적에도 골목대장인 형을 믿고는 동네 앞을 지나가는 딴 동네 아이들에게 괜히 어깨에 힘주며 으스대기도 했다. 그러던 우리도 골목대장 없이 딴 다른 동네에 가서 기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에도 어쩌다 대장 눈 밖에 나면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대장 앞에선 죽은 듯 지내야 했다. 살다 보니 나이 든 지금도 생각해 보면 문학계란 곳이 어쩌면 이리도 내 어릴 적 놀던 때와 똑같을까 싶다. 하기야 그때는 순수하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을 멀다. 한마디로 냉정하고 살벌하기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다.
아내는 쌈쟁이
아내는 쌈 싸 먹는 걸 좋아한다. 내가 붙인 별명도 쌈쟁이다. 주로 상추쌈을 좋아하지만 고기든 뭐든 쌈을 싸서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싸 먹는다.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내의 예쁘고 작은 입이 저리도 큰 줄 몰랐다. 나는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좋다. 나는 입으로 가는 신경이 끊어져 입이 벌어지질 않아 그렇게는 못 먹어도 아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밥상 앞에 마주앉아 아내와 내가 밥 먹을 때는 둘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줄기가 다른 강물이 합쳐지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살다가 바다로 갈 것이다. 가서 구름이 되었다가 빗방울도 되고 때로는 눈이 되어 나리다가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시인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썼지만 수필가인 나는 아내를 생각하며 글로 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장 자신 있게 욀 수 있는 시는 김소월의 ‘가는 길’ 이다. 수술로 입이 안 돌아 갈 때도 이 시를 외며 병원 복도를 걸어 다녔다. 읽고 읽어도 너무 좋다. 그야말로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나는 이 시를 아내와 나를 생각하며 왼다.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줘깁니다.
앞강물, 뒤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내 아내
나는 가로 늦게 수필가로 살면서 아내이야기를 무던히도 많이 하는 편이다. 다른 사람은 시시콜콜 신상에 관한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를 꺼리는 쪽인데 나는 오히려 가감 없이 드러내는 쪽이다. 내가 왜 이렇게 아내 이야기를 줄기차게 하는가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살면서 내가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아 아내를 죽도록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동반자로서 너무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여기에 내 잘못을 일일이 다 널어놓지는 못하지만 하여간 셀 수도 없다. 양심 있는 수필가로서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바로 세울 차례다. 지금까지도 나를 위한 아내의 수고가 그칠 줄 모른다. 곁에서 지켜보면 나이 먹고 암에 걸려 사람 구실 못하는 나를 위해 하나부터 열 까지 아내의 뒷바라지가 눈물겹다. 내가 갚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글뿐이다. 만약 이것이라도 할 수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아마 나는 삶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나 스스로 목숨은 끊지 못했을 것이고 내게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하다. 오늘 아침에도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 앞에 앉아 아내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코끝이 찡하다. 자기도 감기몸살로 온몸이 아프면서 나를 위해 나 먹기 좋도록 생선을 발라주는 것도 그렇고 아침 먹고 먹어야 할 약 챙겨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내가 이런 여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은 돈도 자기가 벌고 운전도 자기가 하고 내가 해야 할 거의 대부분을 자기가 다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게 없다. 미안한 것도 이골이 났는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사람 심리가 이토록 묘하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야 글 쓴답시고 책상 앞에 앉아 음악 들으며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일밖에 없다.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다. 다행히 가로 늦게 깨달은 거지만 늦게나마 아내의 삶을 진심으로 함께하는 것만이 그동안에 죄 씻김 한다는 자각이었다. 아내는 내가 이런 일로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 몰라야 한다.
* 시월에 마지막 날 새벽 동트기 전
읽다 만 성경책
언젠가 나와 가깝게 지내는 여성에게서 성경책 한 권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오랜 세월 우리 부부와 좋은 계를 맺고 있는 이웃이었다. 기독교 신자였다. 목사와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해 기도하고 간 적도 있었다. 내가 몸이 아플 때도 마음 씀씀이가 남달랐다. 나에게 교회에 나가길 간절히 바랐지만 내 대답은 저절로 마음이 가면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그렇게 많은 고전을 읽었으면서도 성경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랑삼아 나에게 이런 책도 있다는 장식용이었을 뿐이었다. 손길이 가는 일이라고 해야 주변에 쌓인 먼지 닦는 일이 전부였다. 어느 목사가 설립한 학교에 다니던 중학생이던 시절 장학금을 받으려고 매주 나가던 교회에서도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을 뿐 성경책은 읽지 않았고 읽을 이유도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목사나 교회 신도가 아니면 우리 같은 사람은 읽지 않는다. 내가 가진 성경책도 우리가 그토록 즐겨 먹는 국그릇에서 끝까지 따돌림 받다가 버려지는 멸치처럼 오랜 시간을 책장 한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단칼에 무 자르듯 평생 그토록 아끼던 수석을 화장실 옆 화단 한구석에 버린 날이었다. 평생 짐이 되어 나를 괴롭힐 것 같았다. 막상 저지르고 보니 사랑하는 자식을 내다버린 부모 마음과 같았다. 너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담을 수 없었다. 무슨 심통이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손때 묻은 것을 남 주기도 싫었다. 그 생각에 밤새 잠이 오질 않아 뒤척거리다가 새벽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새벽이지만, 두통약을 먹어도 나아지질 않고 거기에 가슴도 답답했다. 생각할수록 손에 쥐고 있던 보석을 잃어버린 것 마냥 안절부절 이었다. 어찌 할 줄을 몰랐다. 그때 마음을 어떻게 설명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마치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 듯 나도 모르게 손이 간 것이 그녀가 준 성경책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길고긴 고전이라 생각하고 구약과 신약을 차례대로 읽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읽다 말았지만 성경책을 뒤적이는 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날 새벽에 성경책을 펼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시간 잠시 ‘저것들은 본래 네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전부다
우리가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할 것은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다. 나는 살면서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나 한 번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덕담삼아 하는 말쯤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다 막상 몸이 아파보니 이것만큼 새겨들어야 말이 없었다. 한마디로 몸이 전부였다. 살다가 건강을 읽으면 모든 걸 잃는다. 한번 아파보시라. 진짜 그렇다는 걸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이 무너지듯 마음이 무너지면 몸이 무너진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하나다. 내 경험이지만, 나는 아파보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평소 좋아했던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노랫말처럼 돈도 명예도 사랑도 모두가 싫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사람 마음이 똥 누러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겠지만,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삶이 달라질 것 같았다. 삶이 달라지면 인생이 바뀐다.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기억해둘만 했다. 늘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바로 내 일이 될 수 있음이다.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며 동전을 떨어뜨렸는데 병실 침대에 누워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백 원짜리 동전 줍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고 한다. 자기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아무리 애를 쓰도 집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돈도 많고 공직에 있을 때도 꽤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여러 말 할 것 없었다. 그것 하나로 건강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사람이 자기가 이리될 줄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살면서 수없이 격고 보는 일이다. 우리 모두 기억하자. 병은 온다고 말하지 않고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른 행주에 물 스미듯 온다. 소리 없는 바람처럼 오고 가는 것을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다. 몸에 나쁜 바람이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머물 곳이 없어 그냥 지나가도록해야 한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몫이다.
음식과 운동 그리고 병
그리스의 의학자이자 현대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고 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라며 더불어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의학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기(氣)가 막힌다며 몸을 움직이라고 했다. 요즘 말하는 운동을 말하지만 일상에서 몸으로 부딪cl는 모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건강을 위한 기본적 생각은 별 차이가 없다. 운동에 대해선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음식에 대해서다. 아까 말처럼 먹는 것만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먹는 것 하나로 오랜 시간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당뇨가 거짓말처럼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먹기에 따라 들쭉날쭉하던 혈당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동안 마음대로 먹지도 못했다. 지금은 걱정하지 않는다. 먹는 게 즐거우니 삶이 달라져버렸다. 모든 게 음식 때문이다. 운동은 다음 이야기다.
내가 생각하기엔 운동보다 음식이 먼저다. 옛날 어른들은 못 먹어서 생긴 병은 쉽게 고치지만 많이 먹어 생긴 병은 고치기 어렵다고 했다. 그 말처럼 요즘은 많이 먹어 생긴 병이 많아도 너무 많다. 잘못 먹어 생긴 병도 마찬가지다. 병에 종류도 다양하다. 비만을 비롯해 예전에는 없던 병이 요즘에는 세고 셌다. 암도 흔한 병중에 하나가 되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 음식 잘 먹어 병 생겼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운동으로 병이 호전되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운동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려면 “입안에는 말이 적고 마음에는 일이 적고 뱃속에는 밥이 적어야 한다.”라고 했던 법정 스님 말씀처럼 우리가 그렇게만 산다면 병들 일이 없다. 살면서 감당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병들고 후회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그랬다. 몸 아파 병실 침대에 누워있으니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밀려들어 지난 일들을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다. 누워있는 내 모습이 꼭 엎어져 자는 똥개 같았다. 기억하자. 기회의 신은 앞머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지나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건강 말이다.
한 번 더 일어서기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런데 자기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설치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저것도 한때다 싶다. 그렇게 설치고 다닐 수 있을 때 마음껏 설치고 다녀야한다. 그것도 때가 지나고 나면 그러고 싶어도 못한다. 나이 먹고 병들고 나니 그 시절이 무지 그립다. 세상 만물은 때가 있는 법이다. 내가 큰 병에 걸려보니 자기 몸에 대해 알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때를 놓치고 나면 말짱 도로 묵이다. 나는 때를 놓치는 바람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내 몸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설령 조금 알았다고 해도 이 나이에 이런 몸으로 아무것도 할 게 없을 것 같다.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며 내 운명에 맡기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그러나 때는 놓쳐버렸지만 이대로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번 생에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한번만 더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스스로 남은 내 살에 만족하며 살수 없을까. 지금이 그때 아닐까 싶다. 마지막을 촛불 타오르듯 살다 가고 싶다.
제법 오랜 시간 몸이 아파 내버려두었던 묵정밭을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일굴 때가 되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목숨이라며 될 대로 되라고 그냥 두었더니 조금 살만해져 다시 보니 밭 꼴이 말이 아니다. 내 뒷모습을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기름진 밭으로 바꿀 여력은 없겠지만 우선 우거진 가시나무와 잡초는 베어내고 주변 쓰레기라도 치워 청소부터 해야겠다.
가로 늦게 이러는 내가 볼수록 한심하다. 버스 지나간 뒤 발 구르는 내 모습을. 그러나 나는 어쩌면 다시 올지도 모른다며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하도 심심해 글쟁이 아니랄까 봐 글 쓰고 있다. 쓰는 동안은 복잡하고 자잘한 걱정 따위는 사라져버린다. 몸에 대한 불안, 가난과 불행도 아득히 저 먼 곳의 일이 되고 만다. 아까 말대로 쓰러진 자리에서 한 번만 더 일어서서 연필과 공책을 들고 마지막 버스를 타고 싶다.
독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의 명언 중에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라는 말이 있다. 국가나 사회 개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예의염치(禮義廉恥)다. 개인의 그것은 한 국가의 바탕이자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만약 한국이 그러하다면 그게 바로 선진사회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그 길에 달린 첫 번째 표지기가 가리키는 게 독서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의 남회근 선생은 문화의 기초, 국가와 민족문화의 기초는 문학에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선생의 말이야말로 정문일침(頂門一鍼)이다. 요즘 사람들은 갈수록 책을 너무 안 읽는다. 책에는 사람을 만드는 갖은 방법이 다 들어 있다. 때로는 나무라기도 하고, 온화하기도 하고,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사람을 자극하여 스스로 지혜의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책 읽기는 나이 먹을수록 천천히 읽어야 한다. 쇠도 녹일 만큼 소화력 좋은 젊은 시절처럼 국수 한 그릇 먹듯 뚝딱 읽어버리고 나면 책 한 권 읽었다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만심밖에는 남는 게 없다. 오랜만에 외식하며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쇠고기처럼 단물이 나오도록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나는 요즘 나이 먹어 소화력이 떨어져서인지 책을 그렇게 읽는다. 속도 편하고 소화도 잘된다. 달라진 것은 읽는 동안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임을 떠나보내듯 어루만진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책에 대해서만큼은 사랑이 깊다. 어떤 책은 읽으며 다시는 내 손길이 머물지 못할 것 같아 책장 한 쪽에 덩그러니 서서 나의 온기를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세상 만물에는 감응력(感應力)이라는 게 있다. 책도 그럴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내가 그동안 즐겨 썼던 말 가운데 하나가 마라톤 선수는 기록으로 축구 선수는 골로 작가는 작품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것을 작가의 신앙으로 생각하고 산지가 제법 오래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남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만큼 사실적 표현도 없을 것 같다. 백번을 반복해도 맞는 말이다. 사람들을 열광케 하고 밤잠을 설치게 하는 축구 선수는 골로 보여줘야 하고 마라톤선수는 기록으로 보여주고 작가는 작품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세상에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는 그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수필가인 나는 마지막 말을 글 쓰는 동안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수필로 보여주고 싶었다. 수필가는 수필을 온몸으로 써야 한다. 그래야만 골문을 향하는 축구공의 궤적 따라가듯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축구선수가 골문을 향해 자기를 불사르고 마라톤 선수는 결승점을 향해 자기를 불사르듯 작가는 작품을 위해 자기를 불살라야 한다. 저마다 목적지에 가려면 얼마나 힘들게 노를 저어야 하는지 노를 저으며 자기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거기에 도달하기 어렵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기가 하는 일에 반쯤은 미쳐야 한다. 그러나 미친다는 것이 그렇게 요란한 게 아니다. 그만큼 자기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뛰어난 운동선수나 작가는 그것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수필가인 나 같은 경우에는 어쭙잖은 단어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글 한 편이 되기도 한다. 글이 글을 불러오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사람 하는 일 모두가 자업자득의 이치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한 만큼 오고 심은 만큼 거둔다. 타다만 재는 보기 싫다. 참으로 아름다운 생의 마무리는 활활 타올라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는 것이다. 허리 굽혀 피었다가 마지막엔 꽃술 터트려 바람에 휘날리는 슬픈 기억의 할미꽃처럼.
범종소리
나는 범신론자라 불교 신자도 아니고 불교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일체의 종교성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일체의 종교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불교의 금강경만큼은 관심이 많았다. 마음으로 와 닿기는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강의’ 라는 책을 읽으면서다. 평소에는 스님의 독송이나 절에서 나오는 금강경에 관한 책을 통해 아는 게 전부였다.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이 세상 모든 것은 꿈같고, 번갯불 같고, 이슬과도 같다는 구절이다. 금강경의 깊은 뜻을 이번에야말로 마치 심 봉사가 눈을 뜨듯 알게 될 것 같다. 선생의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어둠이 걷히고 동트기 시작하는 새벽처럼 시야가 환해질 것이다. 전생에 자기를 알고 싶어 하는 제자에게 부처가 말하기를 전생에 너를 알고 싶으냐? 그러면 지금에 너를 보면 된다. 지금에 너를 알고 싶으면 과거에 너를 보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를 돌아보니 나는 지금까지 똑바로 산 시간이 노루 꼬리보다 짧다.
불교 속담에 불법을 배운지 일 년이면 부처가 눈앞에 있고, 이 년이면 대웅전에 있으며 삼 년이면 서천(西天에) 있다는 속담이다. 배울수록 멀어진다는 말이다. 불법과 학문을 짧은 시간에 깨우칠 수도 없고, 설령 깨우친다고 해도 그런 설익은 깨우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잡힐 듯 잡힐 것 같으면서도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처럼 그런 것이다.
선생의 책에서 고사 한 토막을 옮긴다. “명나라 때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날마다 심야에 정원에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했다고 한다. 삼십 여년을 빠짐없이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천신이 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가 별로 놀란 기색이 없자 천신이 말하기를 자네가 밤마다 그렇게 하늘을 섬겼는데 원하는 게 무엇인가? 빨리 말해보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저는 별로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한평생 굶주리지 않으며 그다지 궁색하지 않아 산수를 즐길 수 있고, 병 없이 죽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천신이 말했다. 자네가 요구하는 그것이 상계(上界) 신선의 복이라네. 자네가 만약 인간세상의 부귀공명을 바란다면 아무리 높은 지위라도 아무리 많은 재산을 원하더라도 들어줄 수 있다네. 그렇지만 상계 신선의 청복만큼은 들어줄 수 없다네.”라고 한 말이다. 나에겐 그것이 범종소리였다.
뒷모습
사람이 달라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길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만큼 사람과의 만남은 중요하다. 조금밖에 안 남은 내 인생 마지막 물길이 달라지게 한 것은 경남수필문학회 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한 사람은 병원원장이자 수필가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공무원에서 퇴직한 수필가다. 모두 노년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오늘 선생에 대해 쓰려고 한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나는 서정수필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것을 알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나 역시 두 사람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만남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수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컴퓨터 압축파일이었다.
사람 한평생 뒷모습이 보기 좋다는 것은 거기에 그 사람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음이다. 아흔이 넘은 사람은 여러 사람과 인사 건네는 앞모습과 옆모습, 뒷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중후하고 품격 있었다. 한마디로 아름다웠다. 또 한사람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리산 천왕봉을 600번을 오른 사람이었다. 나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650번 채우기도 얼마 안 남았다고 한다. 체격도 산악인처럼 강하게 보이질 않았다. 왜소해 보였다. 힘들게 한번 밖에 오르지 못한 나는 숫자 세는 것만으로도 가물가물했다. 선생과 나와의 만남은 처음이었지만 마침, 내 옆자리에 앉아 있어 그런 몸으로 어떻게 육십 번도 아닌 육백 번이나 올랐을까 싶어 생각할수록 위대해 보였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뒷모습이 있다. 밥 먹고 난 자리 뒷모습, 잔칫집 뒷모습, 노름꾼의 뒷모습,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 난 뒷모습 하여간 사람은 하는 일마다 각양각색의 뒷모습을 남긴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남기는 뒷모습은 사람이 남길 수 있는 최상의 뒷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는 수필가로서 어떤 뒷모습을 남겨야 할까. 나는 오늘 노년의 두 사람을 보며 답을 찾았다.
내 노래
나이 먹은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는 조용필의 ‘그 겨울에 찻집’과 해바라기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다. 언제 어디서 어느 때 들어도 좋다. 이 노래만큼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노래 모두 가사와 멜로디는 물론이고 처음과 끝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대중가요지만 고전음악 수준이다. 음악 애호가들이 말하는 클레식이라고 하는 고전음악에 대해선 여러 말하기 싫다. 그러나 이게 두 가수의 노래라면 수필은 수필가의 노래다. 내 이런 비유가 조금은 동 떨어진다고 할지 모르나 생각해 보면 이만큼 멋진 비유가 없을 것 같다. 노랫말과 수필은 한 가족이거나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사촌이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부를 노래는 몇 곡이나 될까. 다시 말해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내 수필은 과연 몇 편이나 될까 하는 것이다. 거듭 생각해도 자신 있게 부를 만한 노래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나는 좋을지 모르나 남은 듣기 싫을 수 있다. 그런 노래는 혼자 즐기면 모를까 남에게 들려줄 노래는 아니다. 그런 수필은 쓰나 마나다. 나는 수필 한 편을 써놓고 독자가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할지 늘 궁금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부르는 노래를 남의 귀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나는 요즘 즐거운 일 하나가 생겼다. 뭔가 하면 아내와 같이 마늘을 까거나 아내의 식당 손님상에 내놓을 비빔밥에 들어갈 나물 다듬는 걸 도와주며 도란거리는 그 시간이 그리 좋을 수 없다 예전에는 아내가 식당을 한다는 게 왠지 부끄러웠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했던 지질이도 못나 빠진 그때 내 모습이 부끄럽다.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들은 사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며 가까이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내가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나는 그 시간 수많은 글을 쓰며 내 안에 깊은 곳을 향해 내가 부를 노래를 부른다. 그러자 조금씩 귀가 열리기 시작한다. 차츰 남의 귀가 되어가는 것이다.
가던 길 돌아보게 한 말
언젠가 어느 원로시인이 나를 가리켜 “000은 천부적인 글 꾼이다. 어떤 것도 그에게 가면 글이 된다.” 라고 했다. 그 말 한마디가 쇠 걸음으로 걸어가던 길에서 나를 돌아서게 했다. 새 꿈을 꾸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였지만 나는 그날로 생각을 바꾸었다. 정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참된 말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문인이면 그게 무엇이든 자기 성장의 계기가 되는 일이 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그 소리가 얼마나 사람 가슴을 부풀게 하는지, 나 역시 내가 받은 벅찬 감동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다. 문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나와 유사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로시인의 그 말 한마디는 나에게만큼은 내 인생 못다 읽은 한편의 시였고, 가수 적우가 부른 꿈꾸는 카사 비앙카였다. 그러나 이젠 나를 알아주는 오직 한사람이 있어 노랫말에 나오는 부겐빌레아의 꽃말처럼 영원한 사랑과 열정으로 내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더구나 시인은 문학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 내가 왜 쪽팔리게 내 자랑 같은 말을 늘어놓는가 하면 남은 내 인생 다른 사람에게서 이렇게 가슴 떨리는 말을 다시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필가의 추억하나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사진 한 장 찍듯 글로 남기려는 것이다. 부끄럽지 않다. 그것하나로 지금 내 모습을 말해주는 것이다. 평생을 아웃사이드로 살아오다 문학계에 몸담은 지금은 나를 가로막는 게 하나도 없다.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않아야 할 일도 있다. 거기에 따라 인생 항로가 결정되는 것이다. 문학계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장벽이란 게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테네학당 같은 열린 공간이 있어 내 맘대로 들락거린다. 나는 요즘 그곳에서 내 말하고 꿈을 펼친다.
참, 쓸데없는 말
속담에 말이 고우면 비지 사러 갔다 두부 사 온다는 말이 있다. 말 잘하고 욕먹는 일은 없다. 같은 말이라도 억양이나 분위기 따라 좋게도 들리고 싫게도 들리는 것이기에 말은 될수록 분명하되 부드러워야 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은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좋은 일을 하고도 마지막에 말을 잘못해 그동안 쌓았던 신뢰가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대로 말을 잘해 없던 신뢰가 쌓이는 경우도 있다.
친구들과 만나면 같이 음식점이나 술집으로 가는 일이 많은데 정말 듣기 싫은 말이 있다. 친구 하나는 자주 가는 단골집이나 처음 가는 집 가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서 손님이 없으면, 어김없이 하는 소리가 큰 목소리로 "우째 이리 손님이 없노, 와 이렇소! 손님이 이리 없어가지고 우짜노." 라며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러면 주인과 종업원은 하나같이 민망한 모습이다. 장삿집이란 손님으로 크게 붐비는 집이 아니면 손님이 없을 시간도 있고, 때로는 유난히 손님이 없는 날도 있다. 또 어떨 때는 손님이 붐비는 날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왜 하필이면 손님이 없을 때만 가는가 싶어 내가 민망해진다.
말을 잘한다는 것, 그것은 달변도 아니고 달콤한 말도 아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속에서 숙성되어 걸러져 나온 말이라면 잘 익은 술과 같이 언제라도 듣기 좋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렇다. 손님이 없어 설렁한 집에만 들어가면 ‘어, 와이래 손님이 없노, 장사 안 할라카나,’ 큰 목소리로 침을 튀기며 소리 지르는 것이다. 정말 안 해도 될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집 문을 나설 때 종업원이나 주인들은 어김없이 친구에게는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 모습이 나는 보이는데 친구는 왜 모를까. 말 그대로 실컷 좋은 일 하고 뺨을 맞는 격이다. 살다 보면 친구도 언젠가는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느낄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좀 짓궂은 바람이 있다면 제발 친구도 식당 같은 자영업을 할 때가 있었으면 좋겠다.
밥 먹는 모습
사람이 밥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대부분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과장된 이야기일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밥 먹는 모습 하나만 봐도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 더불어 인품을 대충 가늠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밥 먹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거기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이 들어갈수록 얼굴에 그 사람의 역사가 드러나듯 밥 먹는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그런 흔적은 숨기려야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모습이 읽히고 청년이나 직장인이 밥 먹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몸담은 사회나 학교 아니면 직장에서의 정서가 어떠한가를 가늠할 수 있다. 연륜이 제법 쌓인 사람들의 밥 먹는 모습은 그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 밥을 먹을 때는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지만 각자 따로 놓고 지켜보면 그동안 몸과 마음에 쌓여있는 인생 여력이 각자 가진 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참 사소한 것에 관심을 두는 것에 의아해할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보니 그들의 밥 먹는 모습을 통해 내 모습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 밥 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할머니가 차린 밥상을 마주한 할아버지는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는 밥을 먹는데, 앉은 자세나 밥상을 물리고 숭늉을 마시는 과정이 글 읽는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자란 아버지는 밥 먹는 모습이 옛날 할아버지 모습과 다르지 않았고 그 모습을 자식들이 보며 따라 하게 된다. 옛 어른들이 가르치는 가정교육의 첫 번째가 밥상머리 교육이다. 이 시대의 뼈대를 이루는 큰 일물들의 가정교육은 대부분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요즘 식당 같은 데서 아이들이 밥 먹는 것을 보면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때가 있다. 밥을 먹다 수저를 들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고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밥상 위는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더 한심한 것은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모는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하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그것을 지켜보면 십중팔구 아이의 부모도 밥 먹는 모습이 어수선하고 단정하지 못하다. 아이는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자란다. 따갑게 말해 그 아이에 그 부모다.
국수
나는 국수라면 무엇이든 좋아한다. 칼국수든 잔치국수든 물 국수든 비빔국수든 가리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건 물 국수다. 들어 마시듯 먹는 게 내 성질하고도 맞다. 서서 먹어도 금세 한 그릇 뚝딱이다. 비빔국수는 맛은 있어도 비비는 게 귀찮고 천천히 먹어야 한다. 물 국수는 잘 끓인 육수 물이나 물김치 국물에 말아 먹는 게 제격이다. 겨울에 동치미 물에 말아먹는 것도 색다른 맛이다. 뜨거운 칼국수는 또 다른 맛이다. 추운 겨울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먹을 때는 세상 부러운 게 없다. 그때는 춥지도 않다. 건더기를 건져 먹으며 마시는 국물 맛은 어디에 비길 데가 없다.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기억 하나가 있다.
지난 시절 춥고 배고플 때였다. 집에 쌀이 떨어지면 학교에 가야 하는 자식들을 빈속으로 보낼 수는 없었던 어머니는 아침을 멀건 시래깃국에 밀가루 수제비 몇 알이 떠 있는 죽을 끓였다. 그것을 먹고 학교에 갔었는데 점심시간에는 내놓을 도시락이 없어 매점에 가는 척 슬며시 빠져나와 수도 간에서 물배를 채우고 학교 뒷마당을 서성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여름이라 덥기도 하고 힘이 빠져 머리가 어지러웠다. 더구나 집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라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먹을 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저녁에는 뭔가를 먹을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렇게 먹을 것만 생각하며 한참을 걸어가는데 길가 나무 그늘 밑 평상에 어른 두 사람이 앉아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국수였다. 가까이 지나가며 곁눈으로 보니 큰 양재기에 수북이 담긴 국수가 너무 맛있어 보였다. 몇 걸음 가다 쉬는 척하고 나무 밑에 퍼질고 앉아 안 보는 척하며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건더기를 다 건져 먹고 국물을 마실 때는 나도 따라서 마시는 것 같았다. 내가 국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지금도 국물을 마실 때는 국물 속에 그때 내 모습이 들어있다. 지나고 보면 배는 고팠어도 그 시절이 행복했다. 지금은 맛있는 게 없다.
아침 밥상 수저 소리
내가 초등학생일 때 우리 식구는 모두 열 한 명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작은 방에 따로 계셨다. 우리는 방 두 칸과 다락에서 서로 복닥거리며 살았다. 그때 우리 집 아침밥 먹는 풍경은 무슨 잔칫집 같았다. 아버지 할아버지 밥상은 따로 차렸다. 할머니를 포함한 아홉 식구는 둥근 둘레 판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고는 각자 제 갈 길대로 학교엘 갔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침 밥상에서 나는 수저 소리는 음악보다 정겨웠다. 어머니는 열 장으로 묶인 김을 연탄불에 구워 한 장씩 주셨다. 귀퉁이 떨어진 김을 받을 때는 곁눈으로 동생들 김을 쳐다보곤 했다. 나는 그 김을 여덟 조각으로 나누어 먹었다. 어머니가 연탄불에다 앞뒤로 살짝 김을 구울 때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냄새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요즘도 김을 보면 늘 그 생각이 난다. 돌아보면 김 한 장을 여덟 조각으로 나누어 먹던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아내 없이 집에 있을 때는 혼자 밥 먹을 때가 많다. 식탁에 앉아 먹다 보면 혼자 있길 좋아는 내 성질에 딱 맞다 싶어 좋다가도 번번이 쓸쓸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적막한 식탁에 덩그러니 앉은 내 모습이 겨울 들판의 허수아비 같다. 그러면 밥 먹다 말고 지난날 커다란 둘레 판에 식구대로 앉아 밥 먹던 생각을 하면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간다. 숟가락으로 밥그릇 긁는 소리,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후루룩거리며 국 먹는 소리, 간간이 뒤섞이는 어머니 목소리, 옆방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리는 환상에 젖는다. 정신이 들어 수저를 들면 입안에 침이 고여 있다. 아버지는 늘 밥을 조금 남기셨는데 그 밥을 서로 먹으려고 동생과 내가 눈치 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 밥은 하얀 쌀밥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밥을 조금씩 나누어주곤 했는데 칠 남매를 키워낸 내력이 밥 한술에도 묻어있었다. 저녁에는 밥그릇 깨끗이 비우는 아버지가 왜 아침마다 밥을 남기셨는지 아버지 된 사람이면 그때 그 심정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