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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白頭山)
4.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白頭山)
백두산(白頭山)은 천지(天池)를 정점(頂點)으로 동남쪽으로는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간백산(間白山, 2,164m), 소백산(小白山, 2,174m),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 백사봉(白沙峰, 2,099m) 등 2,000m 이상의 연봉(連峰)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한반도의 지붕이라 일컫는 개마고원(蓋馬高原)은 백두산 남쪽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과 낭림산맥(狼林山脈),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로 평균 해발 1,300m가 넘는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백두산을 ‘단단대령(單單大嶺)’, 남북조의 위(魏)나라 시대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하였고 또는 ‘도태산(徒太山), 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은 고대 중국 선진(先秦) 시대(BC200)에 저술된 국외의 지리를 다룬 지리서인데 여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백두산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었다. 따라서 백두산(白頭山)의 명칭은 불함산(不咸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백두산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한대(漢代) 이후 불린 명칭의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이다. ‘머리가 하얀 산’이란 뜻의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흰색 부석(浮石)이 온 산을 뒤덮고 있어 붙여졌다고도 하고, 1년 중 겨울이 230일 이상으로 정상에 흰 눈이 쌓여 있는 기간이 길어 붙여졌다고도 한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에 백두산을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했는데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開國)의 터전으로 숭배되었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었다.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보면, 하늘의 ‘환인천제(桓因天帝)께서 아들 환웅(桓雄)에게 신하 3,000명을 주어 땅으로 내려보내니 태백산(太伯山)으로 내려와 신단수(神檀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白頭山)을 말하는 것이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지만 여진족, 말갈족의 개국신화에도 등장하는 성산이기도 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백두산의 비탈진 면에서 샘으로 솟아 나와 시작되고, 천지(天池)의 물이 폭포(瀑布)로 흘러나와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쑹화강(松花江)의 원류이다.
1962년에 중국과 북한 정부가 영토의 경계를 나누어 백두산의 60%는 중국 땅, 40%는 북한 땅으로 확정하고 천지 호수도 절반으로 나누었다. 이전에는 백두산은 기슭을 포함하여 모두 우리 땅으로 인정되고 있었다는데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5.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중국은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漢族) 외에 55개 소수민족(少數民族)이 살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티베트(吐藩)족, 위구르(維吾尔)족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홍콩(香港)까지 자치권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여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 인구의 8%를 차지하는 소수민족 중에서 우리 조선족은 다시 소수민족 전체의 2.6%인 19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중국 동북쪽의 변경으로 동북삼성(東北三省)이라고 일컫는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린성(吉林省)에 주로 살고 있다. 중국이 조선족 자치주로 지정한 곳이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인데 전체 인구의 42% 정도가 조선족이라고 하며, 이곳이 바로 간도(間島)이다.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는 연길(延吉)이고 도문(图門), 돈화(敦化), 용정(龍井), 훈춘(琿春), 화룡(和龍)의 6개 시(市)와 안도(安图), 왕청(汪清)의 2개 현이 있다. 연길(延吉)의 인구는 총 50만 정도인데 절반 정도가 조선족인 셈으로, 시내를 다니면서 보면 간판은 한자를 쓰고 아래는 반드시 한글을 병기(倂記)하고 있다.
이곳 옌지(延吉) 인근에는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곳들이 수없이 많은데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海蘭江)과 용문교(龍門橋), 용두레 우물(龍井),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작가 윤동주(尹東柱) 시인 생가(生家), 가까운 곳에는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도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 세운 연변대학(延邊大學), 화룡현에 있는 청산리전투의 대승을 거두었던 청산리 계곡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에 익은 친근한 명칭들이 산재한다. 청산리 계곡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 정예군 200명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곳인데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골짜기로 팻말 하나 없이 쓸쓸하여 아쉬웠다.
우리의 여행일정 중 연변대학(延邊大學) 방문이 있어 연변대학 총장실에 들러 총장과 면담이 있었다.
총장 이야기로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대학을 설립한 소수민족은 오직 조선족뿐으로 바로 이 연변대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모든 강의는 중국어로 한다는 답변이다. 중국 학생들도 많지만, 조선족도 젊은 사람들은 한국어가 서툴러서 한국어 강의를 어려워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를 잠시 살펴보면 당시는 예상컨대 국경선이 고무줄처럼 자주 부풀어 오르고 줄어들던 때라 분명한 경계선이 없었을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중국영토인 만주지역과 요동 반도 전역이 고구려영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영토 / 발해 영토 / 개마고원(蓋馬高原)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지도에서 보는 고구려영토의 3배 정도나 커서 중국 동북부지역은 물론 동부해안인 산동(山東) 반도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지만 영토가 안정될 시기의 고구려영토는 위 그림과 비슷한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초대 동명성왕(東明聖王/BC 37~BC 19)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보장왕(寶藏王/642~668)에 이르러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간 지속(持續)되었던 강대국이었다.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때에 불교의 전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에 이르러 광대한 영토 확장 등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한 우리나라 고대사가 이곳 이야기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流民)들이 후고구려를 세우기도 했지만 곧이어 고구려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건국하고 확장하는데 과거 고구려영토에 동만주(東滿洲)지역도 추가된다.
발해(渤海)는 AD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698년 대조영이 말갈족(靺鞨族)들을 거느리고 동만주 지역에 나라를 세웠는데 당(唐)은 705년 발해를 인정했고 713년에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도 맺었다.
초대 高王(大祚榮/698~719)부터 제15대 인선(諲譔/906~926)까지 228년간 지속(持續)되었던 발해는 5대 선왕(宣王)에 이르러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고치고 랴오허강(遼河江) 일대의 후고구려지역까지 확장하여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때 5경 15부 62주(五京 十五府 六十二州)를 설치하고 정비하여 대국의 기틀을 공고히 했으며 후세 사람들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遺將)으로 단정하고 발해사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 보았는데 현재 중국은 발해가 중화민국 일부였다고 주장하지만, 학자들은 발해사를 한국사(韓國史)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과 우리 대한민국의 국경선이 어디까지인지가 매우 모호한데 당시 양국 간의 합의(合議)로 국경선이 확정되어 비석으로 남은 것이 위에 언급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고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한국과 중국이 정식수교(修交)로 국가 간 조약을 한 것이 1992년에 맺은 한중수교(韓中修交)이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 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기 위하여 중국을 방문하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2002년 2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2004년 동북공정 사무처가 발표한 내용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역사 또한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한중간 외교 문제로 비화(飛化)되었다. 한국도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2004년 고구려사 연구재단을 발족했지만, 활동내용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
6.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간도(間島)
연변조선족자치주(흰 부분) /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 간도(間島) 지방 / 백두산정계비 내용
조선(朝鮮)은 세종 19년인 1437년, 백두산과 주변 지역에 6진(六鎭)을 개척하며 국경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우리나라(朝鮮)와 중국(淸)의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12년, 조선과 청은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에서 회담(會談)이 있었고, 그해 5월에 ‘서쪽 국경은 압록강으로 삼고, 동쪽 국경은 토문강으로 삼는다.(西爲鴨綠東爲土門)’는 내용의 국경비석(國境碑石)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고 숙종 38년이었다. 이 비석은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물(水)이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갈라져 흐르는 분수령 위 벌판에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이 현지답사 후 세웠다고 한다.
그 비에는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鴨綠)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라고 기록된 비석(碑石)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청과 조선의 국경은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고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이다.’라는 말이다.
<康熙: 淸나라 康熙帝의 年號, 康熙51년-1712년>
그런데 훗날 문제가 된 것은 정계비에 있는 토문강(土門江)을 둘러싸고 해석이 엇갈렸다고 한다.
청(淸)과 조선(朝鮮)은 압록강에는 이의(異意)가 없었지만, 청에서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豆滿江)이라 주장하며 나섰는데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두만강과 별도로 토문강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조선의 주장은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정계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두 물줄기 중 한줄기가 토문강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은 만주 용어로 지금의 쑹화강(松花江)의 지류를 가리키는 강 이름이었다. 부연(敷衍)하면, 압록강은 백두산 아래에서 샘으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고 두만강(豆滿江)은 백두산에서 한참 떨어져 샘이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동해안으로 빠지는 강인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직접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천지폭포(天池瀑布) 혹은 비룡폭포(飛龍瀑布)라고 불렀는데 중국에서는 장백폭포(長白瀑布)라고 부른다. 이 폭포의 물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쑹화강(松花江)이 되는데 그 한 지류(支流)가 토문강(土門江)이며 그 남동쪽이 동간도(東間島)가 되니 토문을 국경으로 보면 동간도는 분명히 조선영토가 되는 것이 맞다.
동간도(東間島)는 섬 도(島)로 표기되지만 섬이 아니고 현재 중국 동북지역 지린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沿邊朝鮮族自治州)를 지칭하는데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으로 조선 시대 말부터 함경도 주민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며 거주한 곳이다. 압록강 건너편은 서간도(西間島)라 부른다.
더 기막힌 사실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日帝)는 당연히 간도는 조선영토라고 주장하다가 1909년 남만(南滿) 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해 남만주(南滿洲)의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代價)로 동간도 지방을 청나라 영토로 인정을 하였다니 일제(日帝)의 간계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안봉선(安奉線)-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단둥(丹東)에서 봉천(奉天:瀋陽)을 잇는 철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에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가곡> 선구자(先驅者) -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1절) 일송정(一松亭)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海蘭江)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절) 용두레(龍井)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백두산 관광이 끝난 후 일본 도쿄(東京)로 갔는데 도쿄를 둘러본 후 도쿄 한국인학교 방문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전통악기 단소(短簫)에 빠져있던 나는 도쿄 한국인학교 교직원이 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나가 단소를 연주한 후, 제법 고가(高價)이던 내 단소를 교장에게 증정(贈呈)했더니 교장이 일어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감사히 받는다고 했다. 나중 들었더니 내가 증정한 단소를 학교 박물관에 영원히 보관하기로 했다고 한다. 아직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