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점이 사람 잡는다
김 현 룡의 글
▪홍계관의 점쟁이 수업
홍계관은 본래 양주(楊州)의 향족(鄕族)이었다. 모친이 임신한 다음 부친이 병을 앓아서 사망했기 때문에 홍계관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는데, 맹인이었다.
그 모친이 혼자 앞을 못 보는 아들을 키우면서 많은 고생을 했는데, 늘 모친은 집 뒤 밭 두렁에 외로이 서 있는 돌부처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부처님, 제 아들을 제발 사람 노릇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라고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집이 가난하여 이웃집 일을 해주고 얻은 음식이며, 또 남의 잔칫집이나 제사 음식이라도 생기면 항상 그 돌부처 앞에 먼저 가져다 놓고 제를 지낸 다음에 먹었다.
홍계관이 15세 때, 어느 날 밤 꿈에 그 돌부처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점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누구든지 점치러 오면 내가 가만히 불러주는 대로만 말을 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 홍계관은 집 앞에 나가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와서 점을 칠 줄 아느냐고 묻기에 홍계관은 그렇다고 하자 그 사람은,
“어제 저녁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사냥매가 날아서 집을 나가 없어졌는데, 어디에 있는지 점을 쳐서 찾아 봐주게.”
하고 말했다.
곧 홍계관은 점을 치는 체하고 돌부처가 알려주는 대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냥매가 나갔다가 잡혀 아무 재상 집 벽장 속에 있다.”
하고 일러주니, 이 사람은 그 재상 집으로 가서 애원했다.
“소생이 사냥매를 잃었는데 홍계관에게 가서 점을 치니 대감 댁 벽장 속에 있다고 합니다. 사냥매를 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재상은 감탄을 하면서 사냥매를 내주고는, 점을 쳐주었다는 홍계관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가르쳐주자, 곧 재상은 홍계관을 찾아와 점을 쳐 달라고 부탁했다.
“내 외동아들이 병이 나서 오래 앓고 있는데, 온갖 약을 다 써도 낫지 않으니, 병을 고칠 방법이 있는지 점을 쳐보게.”
재상이 이렇게 사정하니, 홍계관은 점을 치는 체하고는,
“어떤 약을 쓰면 차차 나아지고 며칠 지나면 완전히 낫습니다.”
라고, 돌부처가 일러주는 대로 말해주었다.
이 말을 들은 재상이 반드시 아들의 병이 낫겠느냐고 다짐하기에, 홍계관은 틀림없이 낫는다고 말한 다음에,
“만약에 대감의 아들 병이 낫고, 우연히 대감 댁에 생각지도 않았던 돈 1천 냥이 생긴다면, 저에게 사례금으로 그 돈을 다 주시겠습니까?
하고, 역시 돌부처가 시키는 대로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재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서 1천 냥이란 거금이 들어올 곳이 없기에,
“아들의 병이 낫고, 천 냥이 생긴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
집에 돌아온 재상은 홍계관이 일러준 대로 아들에게 약을 쓰니, 신통하게도 그 말과 꼭 같이 일러준 날에 병이 나았다.
그래서 재상이 좋아하고 있는데, 전에 재상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지방 관장으로 임명해주었던 사람이 편지와 함께 돈 1천 냥을 보내온 것이었다. 이에 재상은 넋을 잃고 앉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앞으로의 일을 잘 아는 점쟁이도 있단 말인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라고 말하고, 그 돈을 모두 홍계관에게 보내주고는 치하했다.
이날 밤 홍계관의 꿈에 다시 그 돌부처가 나타나 말했다.
“오늘 들어온 돈 1천 냥을 가지고 값진 선물을 마련해, 어느 고을에 살고 아무 술사(術士)를 찾아가서 그 선물을 받치고 제자가 되어서 점술(占術)을 가르쳐달라고 하라.”
꿈을 깬 홍계관은 날이 밝는 대로 1천 냥으로 선물을 마련하여 꿈속에서 돌부처가 일러준 곳을 찾아가서 술사를 만났고, 제자가 되어 점치는 기술을 모두 배웠다.
그래서 홍계관은 그 스승보다도 더 우수한 점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돌부처가 수시로 꿈에 나타나서 가르쳐주었다. 인조반정 후 앞서의 그 재상이 홍계관을 임금에게 추천하여 국정에 많은 자문을 하였는데, 홍계관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조선 중기>
옛날 중국에서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점을 쳤는데, 주로 앞서의 이규보 이야기에서처럼 가부(可否)와 행불행(幸不幸)을 묻는 점이었다. 점치는 방법으로서는 거북을 잡아 그 껍질을 말려두었다가, 거북 껍질의 등 부분에 불을 얹어 거북 등이 터져 금가는 균열(龜裂) 모습을 보고 점을 쳤고, 다른 방법으로서는 ‘서(筮)‘라는 막대기를 이용해, 그 막대기를 뽑아 연결되는 모습을 보고 점을 쳤다.
그리고 함순명이나 홍계관 같은 점쟁이가 치는 점을 사주(四柱)점이다. 곧 태어난 날의 연월일시(年月日時)에 해당하는 간지(干支) 8글자, 즉 사주팔자(四柱八字)에 건명(乾命 : 남자)이냐 곤명(坤命 : 여자)이냐 하는 남녀 관계를 연관지어, 이른바 자기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시점인 ‘5주(五柱 : 年月日時와 性)’가 우주 운행의 어느 시점에 맞추어져 있느냐 하는 것으로 점치는 방법이다.
또한 점치기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결과가 흉(凶)인 경우에는 위 이야기에서처럼 모두 그 처방인 액땜 방법이 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역시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 몇 편을 더 보고자 한다.
▪김생려(金生麗)와 애꾸눈 점쟁이
조선 선조 말엽, 한양에 김생려라는 점쟁이가 있어서 널리 소문이 났다.
맹모 재상이 늦게 외동아들을 두어 애지중지 길렀는데, 재상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이름난 중국 점쟁이 곡전자(曲顚子)에게 아들의 사주를 적어주고 점을 쳐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곡전자는,
“이 아이 15세 때 몇월 며칠날 정오에 반드시 죽는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귀국한 재상은 슬픔 속에서 아들을 별로 돌보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15세가 되니 정말 아들은 병이 들면서 점점 쇠약해졌고, 중국 점쟁이가 죽는다고 말한 그 날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재상은 슬픔에 잠겨 등청(登廳)도 하지 않고 애를 태우면서, 한양에서 이름난 점쟁이 김생려를 불러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번 더 아들에 대해 점을 쳐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김생려는 엽전을 던져 흩어진 모습을 보며 이리저리 맞추어서 점괘를 얻고는,
“이 아이는 내일 정오가 지극히 불길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재상은 중국 곡전자에게 점친 얘기를 들려주고는, 어쩌면 그렇게도 서로 잘 맞느냐고 하면서 감탄했다.
이제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며 재상이 한탄하고 있는데, 이때 밖에서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점치시오! 문수(問數)하시오. 점치시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재상은 종을 시켜 그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사름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애꾸눈이었다. 재상이 이 사람에게 점칠 줄 아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아들의 사주를 불러주면서 점을 쳐보라고 했다.
애꾸눈 점쟁이는 사주를 듣고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손바닥에 짚더니 말했다.
“이 아이는 내일 정오에 죽을 운수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재상은 점쟁이마다 같은 말을 하니, 이제 정말 구제할 길이 없다고 말하면서 한숨을 쉬고 탄식했다. 그런데 애꾸눈 점쟁이는 다시 한참 동안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니 무릎을 탁 치고는 말했다.
“내일 정오에 죽었다가 곧 술시(戌時 : 오후 8시)에 다시 깨어나고, 그리고 내후년이면 완전히 회복되는데, 그때부터 다시 죽은 사람처럼 실낱같은 목숨을 유지하다가, 10년이 지나면 급제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형통해집니다.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김생려가 화를 내고 다가앉으며,
“이 사람아, 나는 한양에서 이름난 점쟁이 김생려라고 하네. 내가 아무리 점괘를 맞추어보아도 그런 결과는 나오지 않는데, 무슨 거짓말로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 사람을 놀리는가?”
애꾸눈 점쟁이는 이 말을 듣고 놀라는 체하며,
“아아, 유명한 김생려 어른을 몰라보고 헛소리를 지껄였습니다. 매우 죄송합니다. 소인 이만 물러갑니다.”
하고는 얼른 일어나 나가버렸다. 이어 김생려도 멋쩍은 듯이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재상이 아들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정말 정오가 되니 아들의 숨이 끊어졌다. 재상은 슬픔을 머금고 발상(發喪)하고 장례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저녁을 막 먹고 났을 때, 병풍 뒤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아들이 숨을 쉬며 깨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새 미음을 먹이고 팔다리를 주무르니, 이튿날 날이 새자 기운을 완전히 회복했다.
크게 놀란 재상은 종들을 모아 그제 왔던 애꾸눈 점쟁이를 찾으라고 사방으로 보냈으나, 영영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이후 재상의 아들은 몸이 회복되어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마침 조정에서 부당한 처사가 있어서 유생들이 강한 어조로 상소를 하는 바람에, 재상 아들은 먼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재상 아들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급제했고,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니 애꾸눈 점쟁이의 말대로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기술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첨부했다.
사람 운명이, 단순하게 정해져 있는 사람의 경우는 사주팔자를 맞추어 운명을 알아보기가 쉽다. 그러나 사람의 운수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부분이 있고, 더구나 죽고 사는 문제는 또 별도로 따로 연관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방법으로 사주를 맞추어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인 우리가 인생의 운명을 모두 다 알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다만 중국과 우리나라 점쟁이들이 기본문제에 대해 일치했다는 사실은, 공통된 방법으로 점을 쳤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조선 중기>
이 글은 고려기문 학회지 <변화하는 삶> 2003년 2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