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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묵상글 들 ( 연중 3주 수요일-나는 어떤 사람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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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3주 수요일-나는 어떤 사람인가?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호숫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들려주시고 나중에 혼자 계실 때 당신 주변으로
다가온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비유에 대한 풀이를 해주시는데
이때 "저 바깥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저 바깥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바깥으로 내친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주님께 다가오는 열성이 부족하여 밖에 있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혼자 계실 때란 문맥을 보면 사람들이 떠나고 주님께서 혼자
계시게 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비유의 뜻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과 함께 그 뜻을 알기 위해 주님께 다가와 그 풀이를 듣고
이해를 하게 되지만 관심없는 사람은 첫 번째 비유의 사람들처럼
비유만 듣고 돌아가 비유의 뜻을 영영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저의 경우가 이에 꼭 적절한 예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저도 강의나 강론을 할 때 들으려는 사람에게는 신이 나서
더 열성적으로 그리고 더 풍성하게 강의나 강론을 하지만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에게는
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조금 얘기하고는 그만둡니다.
예를 들어서 수녀원의 수련자들은 얘기를 해주면
그들은 귀로만 듣지 않고 눈으로도 듣습니다.
그들의 눈이 '어서 더 얘기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그래서 그들의 눈이 저의 말을 끌어냅니다.
이에 비해 신부들에게 강의나 강론을 하면 이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몸은 안에 있지만 마음은 제 얘기의 바깥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며 주님께서 바같으로 내치지 않고 스스로 바깥에 있는 자들로서
주님이 비유까지만 말씀하시게 하고 더 이상은 그만두시게 한 자들입니다.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해도 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인용합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스스로 하느님 말씀의 바깥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깨닫지 못하게 하시고 돌아올 수 없게 하시며
그래서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요나가 도망친 이유가 바로 원수같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인데
설마 주님께서 요나와 같은 분이시겠습니까?
주님은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라는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도록 당신을 제물로 바치신 대사제가 아니십니까?
그래서 학자들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후대의 누가 또는
마르코가 집어넣은 얘기라고 얘기하고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설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일지라도 거기에 다른 뜻이 있을 겁니다.
혹시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과 같은 뜻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는 뜻인데 천지는 천지의 이치를 거스르는 자가
천지의 이치를 깨닫고 순종할 때까지는 인자하지 않다는 뜻이며
오늘 주님도 같은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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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연중 제3주간 수요일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져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우리를 완전하게 해 주셨다고 전합니다. 시나이산에서 맺어진 계약은 희생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림으로써 효력이 생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악을 없애 주는 새로운 계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돌판에 새겨진 계명이 아닌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시는 인격적인 계약으로, 이제 주님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과 사랑의 친교를 맺으면서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씨앗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오신 말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날마다 청하여, 사탄이 들어와 주님의 말씀을 앗아 가지 않게, 세상의 환난과 어려움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날마다 하루를 마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의식 성찰’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마음의 가시덤불과 자갈을 걷어 내고, 하느님의 말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또한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읽거나 핸드폰이나 다른 여러 방법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18],105).
- 신우식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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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연중 3주 수)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선사된 것’(datum)이요, ‘먼저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열매를 맺는 권능 곧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선물인 말씀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고, 우리의 소명은 그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신이 죽어야 맺는 일이요, 또한 그 열매는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게 됩니다. 곧 형제들과의 관계가 열매를 맺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가 됩니다. 그러니 내 형제, 내 공동체, 내 나라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한편, 이는 내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내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 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단지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먼저 알아야 할 일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이요, 그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땅을 지배하려들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동시에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는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주님의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말씀이 지금 여기, 내 형제와 더불어 내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르 4,20)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을 지배하지도 윽박지르지도 않는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며, 열매를 맺어야 하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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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연중 제3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절) 나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역사적인 섭리 안으로 나가신 것을 의미하며,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문이 가로막혀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분은 믿음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 나오셨다. 여기서 당신의 가르침은 “씨”요, 인간은 “밭”이며, 당신 자신은 “씨 뿌리는 사람”이라 말씀하신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땅속에서 썩지만, 주님의 위대한 섭리는 그 씨앗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알의 씨앗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3절) 씨 뿌리는 사람은 골고루 구별 없이 밭에 씨를 뿌리듯 주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말씀이라는 선물을 주신다(로마 5,15 참조). 그런데 인간은 그 씨앗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 곧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탓이다.
자연으로 보면 돌밭이나 길이나 가시덤불은 바뀌기는 힘들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는 돌밭이 기름진 땅이 될 수도 있고, 길도 풍요로운 밭이 될 수 있으며, 가시덤불도 걷어 내면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씨 뿌리는 분 탓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탓이다. 돌밭은 길과 같이 마음이 거칠고 무심하고 부주의하다. 그들은 나약함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7절) 하느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렸다면, 그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우리의 재물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 걱정”이라 했고,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19절) 세상과 재물을 탓하지 말고 타락한 의지를 탓해야 한다.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8절) 땅도 좋고, 씨 뿌리는 분도 한 분이시고, 씨도 같은데, 어찌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맨은 것인가? 이것은 땅의 준비 상태에 달려 있다. 좋은 땅이라고 해도 땅의 준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잘못은 농부나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의 밭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가? 내 마음의 굳은 땅은 쟁기로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한다. 사랑의 뿌리가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떤 결실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며 말씀의 씨앗을 잘 가꾸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매 순간 말씀을 살며 말씀이 우리 안에 강생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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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 3)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말씀의 씨가
뿌려졌다.
사람의 아들은
우리 내면에
말씀의 씨를
뿌리셨다.
우리 내면을
신뢰하신다.
우리또한
말씀의 씨를
통해
신뢰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미 말씀의
씨가 내면에
뿌려졌다.
말씀의 씨를
받아들일
존중의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신뢰하신다.
신뢰의 징표가
회개이다.
말씀의 씨가
뿌려진
가치있는
삶이다.
성장하는 삶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말씀의 씨앗은
사랑의 실천으로
자라난다.
말씀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
말씀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말씀과
마주하는
삶이다.
일상생활에서
말씀의 씨는
진가를 더욱
발휘한다.
말씀의 씨와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의 씨는
앞으로
나아간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자라난다.
말씀의 씨는
신뢰의 열매를
맺는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신뢰와 실천이
우리 삶의
바탕임을
믿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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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새벽을 열며.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빠다킹 신부님.
혼인 예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혼인 서약입니다.
“신랑 **와 신부 **는 어떠한 강박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혼인하려고 합니까?”
“두 분은 혼인 생활을 하면서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고는 두 손을 잡고 “나 **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고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일반 예식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혼인 서약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서약을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지키기 어렵고 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생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 약속하지만 참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혼인 예식에서 신랑·신부는 큰소리로 외칩니다. 아주 자신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일도 사랑한다면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자신 있어 하던 사랑의 서약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은 가능한 일이 되고, 어렵고 힘든 일이 가장 기쁜 행복의 순간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어떻게 될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이 씨앗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바로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우리 인간 영혼의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혼의 밭에 당신 말씀의 씨를 뿌리신 것이지요. 나중에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은 누구 탓일까요? 씨 뿌리시는 분의 잘못이 아니라, 씨를 받는 흙의 준비 상태 탓입니다. 즉, 우리 영혼의 밭 상태는 우리 각자의 생활 태도를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이 될 수 있으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바로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을 통해서만 좋은 땅이 될 수 없으며,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 자그마한 씨앗에서 무엇이 나올 수가 있어?’라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세속적인 생각과 달리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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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준다(J.E.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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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포도 명상
두 손가락 사이에 건포도를 끼운 다음 이리저리 꼼꼼히 살핍니다. 건포도 껍질의 주름 하나하나, 주름 속 그늘진 부분, 밖으로 돌출된 부분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봐야 합니다. 요리조리 돌려보다가 색조가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건포도를 손바닥에 올려놓습니다. 무게가 느껴집니까? 귀 가까이 들어 올린 다음 소라껍데기처럼 소리를 들어 봅니다. 손가락 끝 사이에 두고 살포시 잡았을 때의 느낌을 살펴봅니다.
아마 이때쯤이면 건포도가 좀 뜨뜻하고 질퍽해졌을 것입니다. 건포도의 돌출 부위와 움푹한 부위가 느껴집니까? 다른 손으로 바꿔 들어 보십시오. 똑같은 느낌입니까? 다르다면 정확하게 어떻게 다릅니까?
어제 코 밑에 건포도를 놓아 보십시오. 냄새가 납니까? 이제 입안에 넣어보십시오. 그리고 혀 위에 올려놓고 감촉을 30초간 살펴보세요. 그리고 씹어 보십시오. 입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각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위 건포도 명상은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성경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중할 수 있으며 이로써 더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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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연중 3주간 수요일.<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14-20).”
1)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신앙인들을 분류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더라도
잘 극복해서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부터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었던 사람도 없고, 악인이었던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고,
자만심에 빠지거나 방심하면 ‘나쁜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노력해서 성인이 되고, 스스로 타락해서 죄인이 됩니다.
(‘나쁜 땅’이라도 잘 개간하면 ‘좋은 땅’이 되고,
‘좋은 땅’이라도 방치하면 쓸모없는 ‘나쁜 땅’이 됩니다.
죄인이 회개해서 성인이 된 경우도 있고,
성인으로 존경받던 사람이 타락해서 죄인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2) 여기서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비유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라는 단어를 ‘성경 말씀’으로만 이해하고,
그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성경공부를 잘하라는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은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즉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의 너무 좁은 생각입니다.
이 비유는 신앙생활 전반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성경공부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성경만 열심히 읽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말씀’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신앙생활은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어 있는 생활이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만 있고 ‘삶’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성서학자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성서학자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성서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이고,
그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은(생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과 ‘삶’이(생활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3)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유혹이 다가오는 생활입니다.
유혹이 다가오는 것 자체는 우리 탓이 아니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하는 일이니 우리 탓입니다.
좋은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사도로 뽑힐 정도로 ‘좋은 땅’이었고,
유혹에 넘어가기 전까지는 계속 ‘좋은 땅’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루카 22,3).”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간 것은, 사탄이 한 일이고,
들어오는 사탄을 받아들인 것은 유다 자신이 한 일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배반하라고 유다를 유혹했을 뿐이고,
배반은 유다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한 일입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유다는 ‘기도하지 않아서’ 배반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있었으니, 자신의 위기 상황을 곧바로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 ‘배반의 길’로 갔습니다.)
4)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해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뿌리’ 없는 신앙인은 환난이나 박해를 견디어내는 힘이 없습니다(마태 7,26-27).
‘실천’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
각자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5)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는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런 것들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걱정거리가 생겨서 걱정을 하는 것이 잘못인가?”
물론 걱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믿음이 부족해서 걱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신앙인은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생긴 걱정거리를 주님께 말씀드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체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지도 않고,
걱정만 하고 있으면, 그 걱정 때문에 숨이 막힐 것입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상황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재물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을 누르는 방법은
앞에서 말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과 같습니다.
기도는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이지만,
많은 경우에 기도 자체에서 힘을 얻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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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어떤 열매든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혹 씨를 뿌리더라도 아무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꼭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열매는 맺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희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은들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토양이 좋다고 해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역시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풍요롭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토양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더없이 좋은 밭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부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 나눔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방식이 전혀 스며들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씀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그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의 다른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수능이나 혼사 등 어려운 일이나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닥치면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덤불, 진학, 결혼, 명예, 더 좋은 것, 미래에 대한 여러 걱정 등 욕심의 가시덤불은 말씀을 따르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늘 최우선에 두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등경위의 등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하루의 삶의 여정에 복음 말씀 한 구절만이라고 기억한다면 삶이 바뀝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때가 되어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7가지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씨가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라.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곧바로 거둘 수 없다. 제공 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
4. 뿌린 씨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에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마라.
5.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보다 많아 거둔다.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하지 마라.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손해를, 이익을 주면 이익을 얻는다. 심는 대로 거둔다.
7. 종자는 남겨 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 받았으면 상응하는 보답으로 돌려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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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연중 제3주간 수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 살면서 겪는 어려움 중에 ‘영어’가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한국 분들이 많아서 굳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왕에 미국에서 생활하니 영어를 공부하고, 배우면 좋습니다. 많은 사람이 영어공부에 도전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책을 사고, 학원에 등록하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방법입니다. 미국에 오래 사는 것만으로는 영어를 잘 할 수 없습니다. 영어라는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영어를 잘 하는 분들의 한결같은 대답이 있습니다. ‘꾸준히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화장실에도, 식탁에도, 거실에도, 침실에도 라디오를 틀어놓고 영어를 들었다고 합니다. 차에서도 영어를 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꾸준히 영어를 들으면 언제부터인가 들린다고 합니다. 잘 안된다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기는 먼저 기어 다니고, 두 다리로 일어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른 곳입니다. 영어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 사제에게 원로 사제가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아기면서 어른처럼 생각합니까?” 언어에 있어서는 아기라는 것을 인정하고,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배우면 언젠가 아기가 걷듯이 자연스럽게 말하는 날이 올 거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성으로 영성이 깊어지는 길은 없습니다. 신분, 직책, 성별, 세대, 지역에 따라서 영성이 깊어지는 법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창조하신 아담도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기름부음 받았던 다윗도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도 배반의 길을 걸었습니다. 깨끗하던 집도 1달만 치우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1년간 비워두면 엉망이 됩니다. 슬기로운 신앙생활이라는 밭에 꾸준히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을 때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예로니모 성인)”
둘째는 항상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삶의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2000년 교회가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제도와 법이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늘 겸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바리사이의 헌금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바리사이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과부와 세리는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신앙인, 언제나 기도하는 신앙인, 늘 겸손한 신앙인은 슬기로운 신앙생활로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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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말씀과 우리 마음의 관계를 보여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마르 4,14)
많은 군중이 모인 호숫가에서 예수님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숨은 뜻을 알아들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제자들마저 따로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풀이해 달라고 청했을 정도니 군중은 더 말할나위도 없어 보이지요.
이 상황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뿌린 말씀의 씨가 아직 어느 땅에도 스며들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지금은 땅을 파서 그 씨를 일일이 심어 주는 수고가 필요한 전초 단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군중도 제자들도 아직 준비가 덜 된 까닭이지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르 4,19)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네 가지 땅의 유형에는 나름의 걸림돌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에 떨어진 씨앗은 당장 사탄이 앗아가 버리고, 돌밭 같은 마음에 떨어진 씨앗은 뜨거운 햇볕에 타버리지요. 가시덤불 밑에 떨어진 씨는 겨우 싹을 내지만 열매를 맺기 전에 가시덤불 때문에 숨이 막혀 버립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그리고 욕심은 가시덤불과 같을 겁니다. 노후와 미래가 보장된 신분이 아니라면, 살아남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저마다 치열하게 세상을 헤쳐나가는 길에서 피할 수 없는 그림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가시들이 마음의 욕망을 건드려 관심을 끌면, 말씀은 뒷전이 되고 세속이 점점 더 크게 내면에 또아리를 틀게 되지요.
신앙의 길에 들어선 많은 이들 중에 이쯤에서 멈추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합니다. 말씀이 뭔지도 모르는 단계는 지났지만 세상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이 두려워 적당히 거리를 둡니다. 그 말씀이 자신을 바꾸어 아슬아슬 유지하고 있던 세상 맞춤형 가면이 일순간 벗겨질까봐, 그래서 세속적으로 뒷걸음질 칠까봐 두려운 게지요. 그래서 애써 가시덤불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고 싶어합니다. 하느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양다리'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요.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여 ...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좋은 땅에서는 씨앗이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을 환대하고 받아들여 머무르며, 그 말씀이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의탁하고 순종하는 이들은 좋은 땅과 같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그 사람만 변화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가 맺은 열매를 통해 세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말씀은 좋은 땅에서 기적을 이룹니다.
제1독서에서는 완전한 예물이 되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히브 10,16-17)
하느님의 법이 마음과 생각에 새겨진 우리는 사실 이미 좋은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기"(히브 10,14)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용서된 곳에서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히브 10,18)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해, 이를 믿음으로써 얻은 의로움을 통해 우리는 말씀이 생명을 틔울 수 있는 비옥하고도 좋은 땅이 되었습니다.
땅은 관심과 정성과 손길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을 잘 가꾸어 말씀에 적합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 몫이 되겠지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욕심에서 온전히 자유롭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얻은 거룩한 지위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되돌아가려는 노력이 우리 마음과 영혼을 지켜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말씀과 만나고 머물러, 나날이 비옥해져가는 좋은 땅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함께 복된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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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4,3)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농부들이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첫 번째로 흘리는 땀은 씨가 뿌려질 땅을 위해 흘리는 땀입니다.
이 땀이 부족하면 좋은 땅이 될 수도 없고, 결국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저도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닮아 흙노동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목을 하는 곳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작은 농사를 꼭 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농부)의 비유'를 통해 날마다 내 마음의 밭에 뿌려지는 '예수님이라는 씨앗',
'말씀이라는 씨앗', '생명의 양식인 성체의 씨앗'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항상 '내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밭이 '믿음이 약한 마음의 밭'이거나,
'환난이나 박해에 쉽게 넘어지는 마음의 밭'이거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있는 마음의 밭'이 되어서는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이 되는 나라'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되는 나라'이고, '예수님의 거룩한 몸과 피가 되는 나라'입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가 되도록 나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고 청소하는 그런 복된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화) 드린 저녁 평일미사(7시)는 배둔공소 신자들이 처음으로 드린 평일미사였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신자들이 이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과 흠숭을 드립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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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나의 사랑은 같은데 관계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예수님의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비유의 뜻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바깥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 이유가 비유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 죄를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죄를 용서하러 오신 분이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시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이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할 때 약간씩의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 사가들의 개인적인 구원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네 명이 믿음을 가지고 청하니 한 명의 병과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 마르코 복음에서는 공동체가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치푸리아누스 성인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에서 열두 사도는 공동체 안에 든 교회의 백성을 상징하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듣는 비유는 그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한 초대장이 됩니다. 초대장만 받았다고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분께 다가와 그분의 공동체에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듯이 이 세상에서도 당신과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구별하여 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마치 원 중심 안에 당신이 계시고 조금씩 멀어지면서 조금씩 더 차별하여 대하시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100배, 조금 먼 사람은 60배, 조금 더 먼 사람은 3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조금 더 밖에 머무는 사람은 아직 세상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여 열매를 맺으려다가 멈춰버립니다. 더 밖에 있는 사람들은 들을 때만 번뜩했다가 이내 시들어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도 세 부류가 있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세 부류로 나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와 얼마나 더 밀접한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물론 예수님께 겉으로는 가까이 있더라도 가리옷 유다처럼 본인이 거부하면 사실상은 가장 밖에 있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비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어떻게 구원받는 공동체에 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상담을 받기 위해 와서는 “아내가 많이 혼나고 반성하고 오라네요.”라고 머리를 긁적입니다.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도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이유는 너무 예쁜 아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누가 봐도 예쁜 외모를 지녔는데, 얼굴만큼이나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니 남편의 마음엔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말이 잘 통하는 여성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 것입니다. 상담사는 “아내 핑계 대지 마세요. 가장 큰 잘못은 당신이 했어요. 아내에게 불만이 있다고 바람을 피우는 게 잘하는 짓인가요?”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며칠 뒤 그 남자는 아내와 함께 상담실을 방문했습니다. 아내는 “바람이요? 그냥 사고죠. 어떻게 저 같은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담사가 남편이 마음으로 멀어졌다는 것을 말해주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예쁘기만 하면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 줄 거라고 믿었어요.”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담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도 관심을 두고 소통하려고 노력해야죠. 자신에게만 지나치게 빠져있으면 결국은 다 외로워져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참조: 『불행한 관계 걷어차기』, 장정숙, 스몰빅라이프]
바람피운 남성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부부는 사랑이 오가는 관계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아내의 외모가 오기를 바랐고, 아내 역시 자신의 외모만 가꾸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둘은 서로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밭에 뿌리시는 것은 사랑의 씨입니다. 그 씨를 받아 사랑으로 돌려주는 사람이라야 그분과 가까운 공동체에 들 수 있습니다. 그 열매는 그분의 뜻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즉 미사 참례나 봉헌, 혹은 봉사, 기도 등만 돌려드리면 끝나는 줄 안다면 오산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미사 참례나 봉헌 등도 사랑 없이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바치는 수도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아무 조건 없이 그분의 뜻만을 따라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이 예수님 공동체에 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그만큼 당신과 가까운 공동체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합당하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1명, 2명, 12명, 72명 순으로 공동체를 구성하셨습니다. 물론 개별적으로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도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그분의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그만큼 큰 진리와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이 차별은 나의 주님께 대한 사랑에 기인합니다. 그러니 차별이 아니고 정의입니다. 이 세상에서 꽝이 그렇게나 많은 로또나 도박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을 수 있는 분께 나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합니다.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고 오늘도 조금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 그분께 조금 더 다가가 하늘 나라에서 그분과 더 가까이 사는 공동체에 속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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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영의 눈,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영의 눈,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경이로움과 축복의 대상입니다!
시골에 와서 살다보니 좋은 점이 참 많습니다.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면 친절한 이장님께서 방송을 통해서 꼭 필요한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알려주십니다.
“아아! 이장입니다. 어느 마을 ** 할머님이 오늘 새벽 돌아가셨습니다. 조문을 가실 분은 10시까지 마을회관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이장입니다. 올 봄 필요한 퇴비와 복합 비료 신청 받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토요일까지 이장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혹한기가 지나면서 슬슬 올 봄 농사를 준비할 때가 왔습니다. 올해 설정한 중요 과제 하나는 운동장 위쪽 밭에 과실수 묘목을 심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 나무 시장에 가서 묘목 좀 사와서 심으면 되겠지 했는데, 그게 절대 아니더군요.
척박한 땅, 돌투성이 험한 땅에는 심어봐야 백전백패입니다. 우선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좋은 토양은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를 위해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엄청 신경을 씁니다.
날이 좀 풀리면 로타리라는 농기계를 동원해서 땅을 완전히 갈아엎습니다. 로타리 친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돌들이나 이물질들을 골라냅니다. 그렇게 갖은 정성을 기울인 좋은 토양과 적당한 일조량과 강수량이 합쳐져야 비로소 가을 무렵,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생명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말씀의 씨앗이 세상곳곳에 뿌려지는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여러 유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길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돼지 발에 진주 격입니다. 그들은 말씀의 가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기에 아무리 소중한 생명의 씨앗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마음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나 복음말씀이 좋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이 너무나 완고하다보니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생명의 씨앗을 적극적으로 가슴에 안고자 하는 수용성, 감성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그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조금도 열 기색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귀로 듣지만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에 몸과 마음이 온전히 쏠려 있어 말씀이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으며 지상의 것들이 천상의 것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희망으로 시작했지만 절망으로 끝나고 맙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자신 안에 소중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안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이뤄낸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놀랄만한 선물 한 가지를 선사하시는데, 그 선물은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영의 눈, 생명의 눈,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경이로움과 축복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꽃봉오리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다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생명의 이치를 한번 깨달은 사람의 삶은 점점 더 넉넉해지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더욱 풍성하게 내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열매 맺는 삶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토양을 어떻게 비옥하게 조성할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기본에 충실해야겠지요.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은 육체도 건강하지만, 육체를 지배하는 영혼과 정신도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겠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한 인격체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보완하고 지지할 때, 그 인생은 활짝 꽃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각자 인생의 나무에는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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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묵히, 충실히, 간절히, 깨어, 한결같이
- 진인사대천명의 삶 -
절망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책임을 다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올해는 신축년, 소의 해입니다. 소처럼 묵묵히, 충실히. 간절히, 한결같이, 깨어 우보천리, 우보호시牛步虎視의 자세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의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니라 과정의 충실성을 보십니다. 사실 이런 삶 자체가 성공적인 삶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이 있어야 이런 한결같은 진인사대천명의 삶이 가능합니다. 이런 삶이 바로 순교적인 삶입니다.
바로 성인의 특징이 이러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이렇게 분투한 성인들이었습니다. 평생 휴식이 없었고 평생 고통이 늘 따랐던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성인들에게는 내적 평화와 기쁨이 유우머가 늘 샘솟았습니다. 신망애의 하느님께, 진선미의 하느님께 깊이 뿌린 내린 삶이었기에 가능한 성인들의 이런 삶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참 한결같은 삶입니다. 참 매력적인 삶입니다. 기념하라 있는, 기억하라 있는 예수님의 삶, 성인들의 삶이 아니라 각자 친히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살아야 할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부분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부분이요, 후반부는 초대교회의 예수님 비유에 대한 풀이입니다. 전자는 비유parable요 후자는 우화allegory입니다. 전자는 씨뿌리는 사람에 초점이고 후자는 토양인 각자의 사람이 초점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그대로 예수님의 삶의 자세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없이 인내하며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한결같이, 묵묵히, 간절히,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대로 충실한 농부를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사실 예수님은 농부인 아버지를 닮아 농부처럼 묵묵히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셨습니다. 참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끊임없이 한결같이 노력해도 선행의 씨들은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밭에, 혹은 좋은 땅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100% 성공은 없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여도 긴 안목의 시야로 보면 성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실패처럼 보여도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최선을 다한 삶이라면 어디 선가 이런 수확이 이뤄지고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요셉수도원에서 산처럼, 나무처럼, 소처럼 하루하루 정주하기 만 33년 동안 수없이 수도원을 거쳐간 분들을 기억합니다. 결국은 모두가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과로 드러나는 바 각자에 걸맞는 좋은 땅의 삶에 적절한 수확이라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씨뿌리는 사람의 삶을, 바로 예수님의 삶을 깊이 경청하며 듣고 보며 배우라는 것입니다. 엊그제 사도 바오로 회심 축일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날 교황님은 극심한 좌골신경통의 고통으로 쿠르트 코흐 추기경이 저녁성무일도 끝 무렵 대신 교황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일치되어 머물 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요지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 역시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에 선행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예수님 안에 일치되어 머물 때 한결같이, 간절히,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내 자신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은총의 씨앗이 좋아도 내 마음의 땅이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땅 같다면 별무소득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수행은 좋은 마음 땅을 만들기 위한 노력처럼 생각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수행을 통해 정화되고 성화되어 좋은 땅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 우선적 과제입니다. 아니 한결같이 씨뿌리는 수행의 삶과 더불어 우리의 마음의 땅도 참으로 좋은 땅으로 변모되어 풍성한 수확이 있으리란 믿음이요, 결국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오늘 복음의 결론이요 우리 모두가 희구하는 궁극의 소망입니다. 한결같이 농부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살아 온 이들의 결과가 이러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유일한 제사의 효과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번이자 절대적인 효력을 가진 제사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단번에 성취한 제사입니다. 바로 이 하나의 제사를 매일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재현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없습니다.”
바로 한 번 뿐인 십자가의 유일한 희생 제사의 끊임없는 재현의 미사은총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깨어, 간절히, 충실히, 묵묵히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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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복음화의 원동력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사제직의 유일하고 온전한 특성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하여
단 한 번 십자가상에서 바치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주셨다는 것입니다(히브 10,11-12).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이 속죄의 힘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그분 자신도 하느님이시므로 그 희생
자체에 절대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중재해 주실 수 있는 구원의 힘을 발휘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대적이고 온전한 하느님의 사랑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오른쪽에 영구히 앉아계신다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이
그분처럼 희생적 사랑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중재해 주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열두 사도는 물론 바오로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이 사랑에 접촉된 이들이
주저 없이 복음을 전하는 길에 나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도들이나 선교사들이 자신의 고귀한 삶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불태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 열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에너지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위대한 선교의 여정을 걸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꾸로, 겉으로 나타난 삶의 모습을 보면 그가 받았던 에너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들려주시고, 그 복음을 필요로 하는
아픈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에게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기적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체험한 이들은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격하고 체험하고 깨닫는 이들이 많았던 만큼 그 반응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말씀하시며,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공중을 날아다니던 새가 쪼아 먹습니다.
씨앗이 싹을 돋아 올리기도 전에 새가 쪼아 먹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잊어버리거나 흘려 듣는 사람에게는 세속적인 관심이
앞서기 때문에,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어서 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류에 해당되는 군중은 예수님께서 좋은 일을 많이 하셨고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구경만 하거나 심지어 사두가이들이나
혁명당원들의 협박에 못이겨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화뇌동했습니다. 말씀의 구경꾼들입니다.
또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립니다. 이 부류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생각에 그칠 뿐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들은 말씀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자신의 일상사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시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든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사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소리로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또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도 내리고 싹도 돋아났지만,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부류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에 동의도 하고 깨달음도 생겨났지만,
이미 몸담았던 세속에서 영향받은 가치관이나 이해관계에 미련이
남아 있어서 이중으로 모순된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들이 서로 부딪쳐서
충돌하기 때문에 어느 쪽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신 지도자들은, 사두가이건 바리사이건 이 부류에 해당됩니다.
자신들이 종사해 온 종교적 직무로부터 얻은 경험 덕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신이나
가르치신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쌓아온 명성이나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있어서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사건건 그분을 반대하고 방해하고 적대시하다가 끝내는
그분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칼이나 총 같은 무기로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도 내리고 싹도 돋아나며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실패의 경우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이 경우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기 마련이라고 말씀을 마무리하셨습니다.
그 풍성함의 표현이 서른 배, 예순 배, 심지어 백 배입니다. 열두 제자,
일흔두 제자 그리고 백 스무 제자 등이 모두 이 부류에 해당됩니다.
각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씨앗처럼 자신들의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으며,
싹이 돋아나도록 깨닫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가시덤불과도 같은 세속적 장애를
치워버림으로써 말씀이 꽃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말씀을, 지금 여기서 나에게 들려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삶에서 응답했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사랑으로 알아듣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다고 풀이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막힌 사람은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복음화의 원동력은 하느님의 사랑에 열려 있는 마음으로 알아들을 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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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김 로마노 형제님.
2021년 1월 27일 수요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 (마르4,1-20) ![]() 제1독서<그리스도께서는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히브10,11-18)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5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니,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그들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17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의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화답송 시편 110(109),1.2.3.4(◎ 4ㄴㄷ) ◎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주님께서 내 주께 이르셨나이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주님이 당신 권능의 왕홀을 시온에서 뻗치시리이다. “너의 원수들을 다스려라.”◎ ○ 네 권능의 날에, 주권이 너와 함께하리라. 거룩한 빛, 새벽 품에서, 나는 너를 낳았노라. ◎ ○ 주님은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으시리이다.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복음<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4,1-20)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10,11-18)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1-12)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0장 5-10절에서 당신 몸을 속죄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에 대해 언급한 뒤, 히브리서 10장 11-18절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더 이상의 제사를 불필요하게 만든,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임을 진술한다. 히브리서 10장 11-19절은 히브리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주장해 온 여러 구약적 요소들에 근거한 예수님의 우월성에 대한 논증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더 이상의 제사를 필요없게 만든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제사에 대하여 간단 명료하게 논증한다. 히브리서 10장 11절 본문의 요지는 레위 계통 사제들의 자주 반복되는 제사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에 대한 지적이다. 그 제사의 문제점은 결코 어떤 죄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없애지 못합니다'로 번역된 '페리엘레인'(periellein)은 '페리아이레오'(periaireo)의 부정사이다. 동사 '페리아이레오'(periaireo)는 '주위', '둘레'를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eri)와 '빼앗다'(마태25,24), '치우다'(요한19,31)라는 뜻의 동사 '아이로'(air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주위에서 발견되는 것을 치워버리다','철저하게 없애버리다', '완전하게 제거하다' 등의 매우 강한 뜻을 가진다. 만약 구약의 동물 제사가 인간의 죄를 제거할 능력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했으므로 완전한 제사 곧 그리스도의 제사가 필요했다. 죄를 제거하지 못하는 희생 제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완전하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율법에 근거한 제사에 의존하고 있던 사람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여전히 죄중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자주 반복되는 많은 제사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있는 죄는 결코 씻겨지지 않았다. 구약의 사제들이 드리는 제사는 날마다 반복되었다. 성막 혹은 성전이 존속하는 한,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민수28,3-8).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의 제사는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거듭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러한 제사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시 구약의 제사 제도로 되돌아가려고 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은 말할 수 없이 잘못된 것이었다.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구약의 사제들이 매일 반복하여 같은 제사를 드린 것과 대조된다. 히브리서 10장 11절의 구약 사제들이 드린 '제물'에 해당하는 단어는 '튀시아스'(thysias)로서 복수형인 반면에, 본문의 '한 번 제물'에 해당하는 단어는 '미안 튀시안'(mian thysian)으로 단수형이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의 제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또한 '바치시고'로 번역된 '프로세넹카스'(prosenengkas)도 '바치다','드리다'를 뜻하는 '프로스페로'(prosphero)의 과거분사로서, 앞의 히브리서 10장 11절에 나오는 '프로스페론'(prospheron)과 대조를 이룬다. '프로스페론'(prospheron)은 현재분사로서 반복되는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내며 이것은 구약의 사제들이 드린 제사의 특징이 반복에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프로세넹카스'(prosenegkas)는 과거 시제로서 현재 분사처럼 진행의 개념이 없는 일회적 차원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제사의 특징이 일회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반복될 필요가 전혀 없는 일회적 행위였고 완전한 제사였다(히브12,18). 그분은 이 한 번 제물 즉 '미안 튀시안'(mian thysian)을 통해서 구약의 사제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죄를 없애시는 일을 해내셨다.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본문은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안식과 영광을 표현한다. 히브리서 10장 11절에 따르면, 구약 시대 레위 사제들은 제사를 다 드리고 나서 앉았다는 기사가 없고 오직 매일 서서 직무를 수행했다는 기사만 있다. 사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앉을 뿐 아니라 눕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서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음날이면 또 다시 일어나서 성소에 들어가 서서 전날과 똑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바쳐야 했던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제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반복된 제사였던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심으로써 다시 제사를 바치시고자 일어나실 필요가 없다. 골고타 언덕에서 바친 단 한번의 제사가 영원한 효력을 지닌 제사였기 떄문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는 사실 및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완수하지 못했거나 불완전하게 또는 부분적으로 이행하였다면, 그는 안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을 취하신 하느님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구속사업을 완벽히 수행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에게 천지창조 이전에 누렸던 그분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준 것이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토록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참으셨는지를(히브12,2) 짐작하게 한다. ![]()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성경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용서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심판입니다. (마르4,1-20)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 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ㄱ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 하느님의 뜻 그 길이 아닌 사람들의 뜻 그 길입니다. 15ㄴ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 들으면, 다시 죄의 덮으심을 위한 대속 그 하느님의 말씀을 도덕과 윤리의 사람의 말로 들으면 심판이 따를 것이니~ 구원의 씨, 말씀에 의한 구원을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긴다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 그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속여 먹고 하고 또 말하게 하는 그 뱀(사탄)의 거짓말 때문에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1데살2,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말씀을 하느님의 뜻, 그 분의 길로 받아 구원의 활동, 그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 예수님을, 복음을 처음 만났을 때 기쁩니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 뿌리, 깨달음이 없으면~입니다. 대속의 기쁜 소식- 그 복음, 그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 시련과 박해에 넘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기뻐~ (요한1,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그러나 자신이 감옥에 갇히는 시련이 오자 주님을 의심하게 됩니다.(마태11,2-6참조) 요한은 분명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감옥에 오랫동안 갇히게 되자~ 온갖 기적과 치유를 일으키시는 그 능력의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해 주실 기미가 없자 의심하게 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예수님’ 그 죄를 없애시기 위해 그 죄에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하늘의 진리로 깨닫지 못했기에~ 자신의 뜻을 모른체, 들어주시지 않는 예수님을 의심하게 되는,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물, 생수가 나오지 않는 행위의 신앙, 그 돌 신앙 때문입니다. 깨달음으로 나오는 생명수를 위한 참 신앙으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 하느님의 뜻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귀 그 뜻으로 들은 또다른 사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창세3, 17-18)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 자신의 뜻, 그 욕망대로 살고 싶어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수고 희생의 의로움 등 그가 맺는 그 모든 것은 가시덤불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사57, 12) 내가 너의 의로움과 너의 행실들을 밝혀내리니 그것들은 너에게 소용이 없으리라. =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말씀의 일하심,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무시해 버리는 그 행위의 신앙 때문입니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 어떤 땅이 좋은 땅일까요? 하느님의 뜻으로 듣고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그것이 좋은 거름으로 다저진, 채워진 땅입니다. 그 거름을 받아들이는 땅, 좋은 땅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비유에서 봅니다. 포도 밭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려라’하셨을 때~ (루가13,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 그냥 두시지요(아피엠-용서)- 용서 하시지요~ 하십니다. 왜요? 그 대신 거름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배자 이신 예수님 당신 대속의 죽음, 썪어짐, 그 거름으로 열매를 맺겠으니 그냥 두시지요, 용서 하시지요~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지요. 거름- 그 예수님의 죽음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결론입니다. 성경을~ 내 뜻을 위한 사람의 길, 사람의 말로 받는 것, 버리고 하느님의 길, 그분의 뜻인 구원의 말씀으로 듣고, 받아들이면, 그 말씀으로 내가 좋은 땅이 되는 것이지요. ♡ 아멘 -*^ㅇ^*-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마르4,1~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20) 마르코 복음 4장 3~8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씨'를 나타내는 직접적인 단어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 4장 3절에도 '씨 뿌리다'라는 동사만 나오며, '씨'라는 명사는 없다. 이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같은 자루에서 나온 '씨'의 '동질성'(homogeneity)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이다. 즉 '씨 뿌리는 사람'이 '예수님'을 상징하고, 뿌려진 '씨'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천국의 말씀'을 상징한다면(마르4,14; 마태13,19), 같은 선포자이신 예수님께서 전한 동일한 말씀들이 어떤 이에게는 열매를 맺고, 어떤 이에게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씨'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나라 농사법과 팔레스티나의 농사법이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이 비유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우리는 먼저 밭을 경작하고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려놓고 밭을 고른다. 그러니까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씨가 있는 것이다. 우선 새들이 씨를 먹어버린 일차적인 이유는 씨가 길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씨가 열매를 맺기는 커녕 바로 먹혀버린 일차적인 책임은 마르코 복음 4장 15절에서 '새들'이 상징하는 '사탄'에게 있다고 하기보다는, 길의 밭이 상징하는 굳어진 인간의 마음에 있다. 그리고 '흙지 많지 않은 돌밭'(마르4,5)에서 '있지 않은'에 해당하는 '우크 에이켄' (ouk eichen; it did not have)이 미완료 과거 시제이므로, 흙이 거의 없는 돌밭 같은 불모지의 상태가 이전부터 계속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마르코 복음 4장 5절을 해설하는 마르코 복음 4장 16절에는 '많은'을 의미하는 '폴렌'(polen; much)이라는 단어가 없이 '돌밭'에 해당하는 '페트로데스' (petrodes; stony ground; rocky place)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흙이 거의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 4장 6절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죽은 이유가 나오는데, '뿌리가 없어서'이다. 돌과 바위투성이 땅에서 물은 금방 흘러 가버리거나 말라서 습기가 없었고, 아울러 돌과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릴 수도 없어서 죽은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4장 7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마르코 복음 4장 4절에 기록된 '길에 떨어진 씨'는 발아도 못하고 새들에게 먹혀 버렸고, 마르코 복음 4장 5절에 기록된 '돌밭에 떨어진 씨'는 겨우 뿌리만 내린 채 말라 죽은데 비해, 마르코 복음 4장 6절에 기록된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랐다. 그래서 길보다는 돌밭이, 돌밭보다는 가시덤불이 더 나은 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잘못된 판단임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좋은 밭이란 열매를 맺는 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 4장 7절의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라는 표현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밭에 대한 결론이면서, 동시에 앞에 이미 언급된 두 밭에 대한 결론이다. 마르코 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당신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뿐만 아니라 이미 선포된 여러 가지 비유들의 뜻을 묻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 4장 11~12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서 6장 9~10절의 말씀이 '저 바깥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있다. '저 바깥 사람들'은 오직 기적과 치유에만 목적을 두고 찾아왔다가,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아무런 미련없이 돌아선 일종의 '불신과 배교의 무리'이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 4장 12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원의 길을 봉쇄하신다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목적으로 나아갔다가 사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면 쉽게 돌아서 버리는 '불신과 배교의 무리'를 그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구원의 길을 원천 봉쇄하실만큼 미워하신다는 것이다(마태7,6; 히브6,5.6).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라는 문제도 아니고,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가도 아니며, 또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도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열매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의 씨가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열매를 맺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좋은 신앙인으로 여기시는 것이다(마르4,28; 마태7,20). 마르코 복음 4장 20절에서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의 '받아들여'에 해당하는 '파라데콘타이'(paradechontai; receive; accept)의 원형 '파라데코마이' (paradechomai)로서 '인정하다'(사도16,21; 1티모5,19), '환영하다' (사도15,4; 히브12,6)라는 뜻이다. 즉 복음을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성을 인정하고 깊이 받아들여야함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받아들임은, 마르코 복음 4장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돌밭이 순간적인 기쁨에 도취되어 받는 것과는 달리, 생명을 잃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소유와 내주'로서의 받아들임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 4장 16절의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에서 사용된 '받는다'에 해당하는 '람바노'(lambano)는 일시적 소유물을 취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기에, 마르코 복음 4장 20절의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환영하는'의 의미를 지닌 '파라데코마이'(paradechomai)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마치 우리 자신이 소유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 쉽게 망각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명처럼 여기고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좋은 땅'이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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