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세상의 소금
마태복음 5:13
힘의 3요소가 있습니다. 힘의 세기, 힘의 방향, 힘의 작용점입니다. 책상위에 있는 책을 아래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책이 밀려갈 만큼의 힘이 필요합니다. 힘의 세기입니다. 떨어뜨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밀어야 합니다. 힘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책의 어디부분을 밀어야 잘 밀려 나갈 것인가를 정해야 합니다. 책의 양쪽 모서리를 밀면 책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밀리긴 하지만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제일 잘 밀리는 부분은 책의 중간입니다. 이곳이 힘의 작용점입니다. 그래서 가장 최고의 힘을 발휘할 때가 힘이 세기, 방향, 작용점이 조화를 이룰 때입니다.
영적으로 힘의 3 요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말씀을 가지고 적용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첫째, 힘의 세기는 영력, 성령입니다.
체력, 지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세상의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다리불구자에게 우리에게는 너에게 줄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둘째, 힘의 방향은 세상입니다.
성령은 권능, 힘입니다. 그 힘의 방향은 증거자로서 방향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에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 죄는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지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힘의 작용점은 우리의 헌신입니다.
성령이 믿는 자에게 임합니다. 성령은 권능이고, 세상을 향한 증거자로서 오셨지만, 믿는 자가 온전히 헌신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작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18-20절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세상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권세로 이 세상에 가서,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풀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누가 해야 합니다. 내가 헌신해야 합니다.
소금을 힘의 3 요소인 힘의 세기, 힘의 방향, 힘의 작용점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금 자체가 힘입니다. 힘의 세기입니다. 힘의 방향는 맛을 잃은 세상입니다. 부패와 변질을 막아 줍니다. 소금의 작용점은 소금으로서 녹을 때입니다. 세상에서 녹지 않은 소금은 쓸모가 없습니다. 유명무실합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97%의 물과 3%의 염분 때문입니다. 3%의 염분이 바닷물을 살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강물은 얼지만, 바닷물은 얼지 않습니다. 얼지 않는 이유는 3%의 염분 때문입니다. 또 파도로 인해 바닷물이 출렁거리면서 액체가 고체로 되는 것을 방해함으로 바닷물이 얼지 않게 됩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비록 3%의 성도일지라도 그 성도가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 세상은 썩지 않습니다. 살만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얼지 않고, 자비와 친절이 얼지 않는 이유는 소금과 같은 3%의 성도의 헌신과 사랑,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세상에 심판이 오는 것은 3%의 소금과 같은 성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3%의 마지노선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가정과 사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노아 홍수가 왜 왔습니까?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을 좋아하게 된 결과입니다. 예배를 잃어버렸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카멜레온처럼 낮에는 그리스도의 옷, 밤에는 사탄의 옷으로 번갈아 입으며 삽니다. 이중생활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사라지고, 세상의 영광과 안목의 자랑, 육신의 자랑을 쫓아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옵니다.
극한 직업 중에 염전의 염부들이 있습니다. 천일염을 만드는 염부들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일한다고 합니다. 기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천일염은 1년 중 봄부터 가을까지 약 5개월 동안에 생산합니다. 몸에 좋은 천일염은 칼슘, 철과 같은 무기질이 많아서 바다의 보석이라고 부릅니다. 천일염을 만드는 과정은 힘이 듭니다. 염전 한 칸 기준으로 500킬로의 뻘을 퍼내야 합니다. 기계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게로 뻘을 퍼냅니다. 바닷물의 염분보다 24배를 농축해야 합니다. 햇빛으로 증발 시킨 후, 또 바닷물을 채우고 또 증발시키고, 이것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허탕입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염도가 23도가 되어야 소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염도가 되었으면 염전을 평탄화하기 위해서 콘크리트로된 롤러는 끕니다. 뻘이기 때문에 소나 기계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람이 끄는 롤러는 70킬로가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주일 동안 말려야 물이 빠진다고 합니다. 물이 안 빠지면 쓴맛이 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힘이 들어서 옛날에는 천민들이 만들던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천일염을 제조할 때 재래식 방법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장화된 콘크리트 뻘을 만들어 강제적으로 소금을 얻는다고 합니다. 천일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소금이 되었다는 것은 염부가 되신 예수님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천일염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은 죄악의 뻘에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무거운 죄의 롤러를 홀로 끌고 다니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합니까? 잃어버린 소금의 맛을 돌이킬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맛을 잃으면 그 소금은 소금으로서 역할을 할수 없기 때문에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말씀합니다. 밟힌다는 말은 ‘모욕적으로 대우하다’, ‘경멸하다’, ‘멸시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래 존경을 받지 못하고, 모욕적으로 대우합니다. 경멸합니다. 멸시합니다. 경멸이란 깔보고 업신여긴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버려짐으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 도시는 사해 근처에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향으로 멸망할 때, 사해 바다 속으로 수장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롯의 처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뒤를 돌았다는 것은 썩어질 물질에 마음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사해 부근에는 소금 기둥이 많습니다. 기둥이 주는 의미는 소금이 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유물처럼 존재합니다. 소금의 본래 역할은 무엇입니까? 녹아서 없어져야 합니다. 재물은 사람들 사이에서 녹아져서 사라질 때 그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재능과 지식,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한 곳에 쓰임이 있어야 합니다. 소금처럼 녹아져야 합니다. 자꾸 쌓기만 하면 결국 기둥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자기를 발목을 잡아서 덫이 되고, 고통이 됩니다. 얼마나 단단해 졌는지 망치로 깨도 잘 깨지지 않았습니다. 단단해 질대로 단단해진 인간의 자아입니다. 모양은 소금인데, 소금이 아닙니다. 지금도 롯의 처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밧데리가 완전히 방전되면 버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사용가능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밧데리를 일회용이 아니라 충전용으로 바꾸어 주실지도 모릅니다. 나는 소금입니다. 소금의 맛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은 소금입니다. 소금의 맛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내 생명도 사명도 끝난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내 가정에 필요한 소금, 우리 교회에 필요한 소금, 이 사회에 필요한 소금으로서 자기 몫만큼은 감당해 나가시기를 원합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