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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 / 열왕기상 15:16-34
젊은 시절에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니엘은 아직 젊은 시절에, 너무나 귀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시작했는데, 마지막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에는 아주 성숙한 성도로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급만을 기다리는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한 모습이 아니라, 더 거룩한 모습으로 모두가 존경할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뀐 다니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젊은 시절에 그래도 한 때는 신앙이 괜찮은 것 같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영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 볼 아사왕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젊은 시절에 아사왕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척결하는 것으로 개혁을 시작하여, 열왕기 기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왕입니다. 아사 왕을 통해서 개혁자의 삶의 원리를 찾아 낼 정도로, 그는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하를 통해, 아사왕의 젊은 시절에 행한 다른 일들을 볼 때에도, 그는 처음에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 신앙의 왕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아사가 왕이 된지 36년이 지났을 때, 이제 아사왕이 나이가 어느 정도 많아졌을 때에, 그에게서 신앙의 사람답지 못한 일들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 드린 아들의 아버지가 주님께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우리가 잘 아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기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에게 능력이 풍성해진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자꾸 어떤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는가 하면, 믿음이 풍성해지면서, 내가 굉장한 능력을 갖추어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말은 맡긴다는 뜻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나는 도무지 할 수가 없어서, 한계가 있어서, 주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기다리는 자,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믿는 그 사람 자체가 못할 일이 없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기는 그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차이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자꾸 능력의 사람을 찾습니다. 슈퍼맨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하지만 능력자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온 땅을 두루두루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주실 사람을 찾습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닥쳐 온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주님께 전심으로 맡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아마 어떻게 답해야할지 망설이지 않겠습니까? 천국에 갈 자신이 있다고 하면, 교만한 말로 들려질 것 같아 망설일 것이고, 자신이 없다고 하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 같아 역시 망설이지 않겠습니까? 저 같으면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답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린 문제니까요? 천국에 대해 불확실성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관심을 둘 문제는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마지막까지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관심을 두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성도가 천국을 얘기하는 것이, 얼핏 세상보다 천국을 좋아하는 믿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자기만 챙기기에 급급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얘기하지도 소망하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말한다고 해서, 마치 자신이 천국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교회 밖에서는 내 생계에 급급해 하며 살아가며, 교회 안에서는 또한 나의 구원을 위해 살면서, 오직 자기 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도는 항상 자신의 믿음에 대해, 살피고 경계하면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것처럼, 자기 믿음에 대해 안심하지도 말고, 자신감을 갖지도 말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께서 끝까지 붙들어 인도하지 않으시면 믿음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사 왕이 믿음에 있어서, 인간은 결코 한결 같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시간에, 아사왕의 믿음에 대해 들으셨을 것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은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입니다. 그는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내쫓아 버리고,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들을 없애 버립니다. 심지어는 아세라 우상을 만든 태후의 위를 폐하여 버릴 정도로, 철저한 개혁을 행한 왕입니다. 14절을 보면 아사왕에 대해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라고 평가합니다. 비록 산당까지 없애지는 않았지만,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사왕은 분명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쫓아낸 믿음이라면, 다른 모든 삶 역시 믿음으로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곧 큰 착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17절을 보면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아사가 유다를 침공한 이유는, 백성들이 유다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이 우상을 쫓아낸 후, 이스라엘은 평화를 누립니다. 대하 15:9절을 보면, 이 소문이 북쪽 이스라엘에까지 들리게 되고, 북 이스라엘의 백성 중에는 평화를 누리는 유다로, 도망치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아사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요새를 건축함으로써, 백성들이 유다로 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산당을 만들고, 멋대로 제사장을 세운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바아사의 공격에 대해, 아사는 어떻게 대처를 합니까? 앞서 말한 대로 아사는 개혁을 일으킨 왕이며, 여호와 앞에 온전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믿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흔들림이 없이 대처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는, 아사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사왕은 전혀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19절 “아사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가져다가, 그 신하의 손에 넘겨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는, 아람의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이 내용을 보면, 아사왕은 하나님이 아닌, 아람 왕을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사왕은 르호보암 당시 애굽의 시삭에게 약탈당하고 남은 보물들을 몽땅 모아서,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바아사와 맺은 약조(동맹관계)를 깨뜨리고,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이 라마에서 물러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벤하닷은 아사왕의 요청을 수락하여, 바아사를 공격하게 되고, 바아사는 라마 건축하는 것을 중지하고, 물러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사가 비록 자신이 의도한 대로 바아사는 물리쳤지만, 하나님을 의지한 믿음이 아니라, 힘이 센 아람을 의지한 결과일 뿐입니다. 따라서 결과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하 16:7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이 구절을 보면, 아사왕은 선견자 하나니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 그리고 선견자로부터 경고를 듣게 됩니다. 16:9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선견자의 경고에 대해 아사는 노하여,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그때 아사가 몇 백성을 또 학대하는 악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과연 이것이 우상을 쫓아내고,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아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인간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그 어떤 인간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절대로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되고, 항상 주의하고 살피며, 자신에 대해 말씀을 근거로 하여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믿음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나같은 자를 주께서 붙들어, 인도하신 결과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끝은,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그것이 아닐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아사왕의 믿음은, 왜 처음과 나중이 이토록 다를까요? 역대하 16:8절을 보면 선견자가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구스 사람이 아사왕을 공격했던 일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대하 14장을 보면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아사를 공격합니다. 그때 아사의 군대는 58만이었습니다. 숫적으로 열세였던 것입니다. 아사는 여호와께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게 되고, 여호와가 구스 사람을 쳐서 패하게 하심으로 아사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처럼 전쟁에서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써, 승리한 경험이 있는 아사가, 왜 바아사의 공격에 대해서는 같은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아람 왕을 의지해서 바아사를 물리치고자 했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역대하 15:19절의 “이 때부터 아사왕 제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는 구절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전쟁이 없이, 평화로운 시절을 지낸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을 지내면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고, 여호와의 도움을 구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여호와는 그들의 의식에만 존재하는 분이었을 뿐, 이미 아사의 마음에서는 멀어진 분이었던 것입니다. 곧 오랜 평화가 아사에게는, 믿음의 큰 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지 않고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세월들이, 아사의 마음에서 여호와를 지워버리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가 날마다 자신을 경계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23절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그가 행한 일과 성읍을 건축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그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었더라.” 이에 대해서도 대하 16:12절에서는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발에 병이 들어 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허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들을 찾아 병을 낫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사는 시작은 좋았으나 그의 끝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사의 얘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얘기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아사가 간 길에 서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사는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아사는 인간의 연약함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랜 평화가 여호와가 함께 하신 결과라는 것을, 세월이 흘러가면서 희미하게 되고, 결국 그 마음에서 지워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아사의 공격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이 잊고 살았던 것을 다시 회복하기보다는, 인간의 힘을 이용하여 눈앞의 난관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모습만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을 지금의 믿음의 근거로 삼으면 안됩니다. 믿음의 근거에 자신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에 이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다’는 말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특히 환경이 평온함으로써 싸움을 잊어버립니다. 부르짖을 일이 없고, 여호와께 구할 일이 없음으로, 싸움을 잊은 채 교회만 왕래할 뿐입니다. 결국 여호와를 신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호와를 마음에서 지워 버린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평온한 세월일수록 자신의 연약함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루하루 여호와의 함께 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어려움이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우리의 잠자는 마음을 깨우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변하는 존재들입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수시로 다른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같은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영원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변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부탁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평온하다고 자고하지 말고, 평온할 때일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주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끝을 주께 부탁하는 겸손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아사왕의 관한 말씀을 살피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하나님 앞에 잘 한 것으로 결코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앙의 삶은 천국에 입성하는 순간까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신앙 생활을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 뛰어야 합니다. 처음에 아무리 1등으로 달렸어도, 마지막에 가서 주저앉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잘 달린 사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고, 아사왕과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잘 달렸지만, 마지막에 가서 완전히 주저앉은 사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믿음으로 달려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사왕의 말년의 취한 모습처럼, 여러분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며 살아왔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마지막까지, 여러분의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다 내려놓는 작업이요, 하나님께 맡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대하 16:9절상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므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온 땅을 두루두루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주실 사람을 찾습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닥쳐 온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주님께 전심으로 맡기게 하옵소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기다리는 자, 그가 바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런 믿음의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젊었을 때는 믿음으로 행동하다가도, 나이가 들면서 온갖 경험을 다하고, 이곳 저곳에서 듣고 배운 것들이 있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데 실패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실패하고 나면 계속 판단력이 흐려져서,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행동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승리의 비결임을 알고, 이제부터 하나님께 우리의 전심을, 전부를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전부를 받아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는 것이 곧 죄인 줄을 알고, 죽을 때까지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써, 그 하늘 아버지께서 반드시 베풀어 주시는, 금세의 구원과 내세의 영생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