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에서, “녹두를 물에 담그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것들을 들고 우물가로 가는데, 아무리 봐도 다 썩은 녹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 이런 것으로 어떻게 숙주를 키워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래도 괜찮으니 일단 씻어 보거라’고 하셔서 그냥 씻었는데, 그 때, 저는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좋은 녹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 고르고 보니, 한 줌도 안 되는 썩은 녹두가 그 안에 섞여 있어서 마치, 전체가 썩은 것처럼 보였던 겁니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좋은 녹두가 잔치에서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잠시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사는 것은 마치,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잠시 잃고 헤매더라도,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집중하고 따르면 결국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순종의 자리로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의 자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본문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주신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의 광주리에는 좋은 무화과가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었습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뒤,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겠다는 유다를 상징하며, 악한 무화과는 예루살렘에 남은 시드기야와 방백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돌아오겠다는 자를 좋은 무화과에 비유하심은,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의 형태는 다섯가지로 정리되는 데, 첫째는 “돌아보아 좋게 하여”라고 하심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인들을 돌보고 지켜주겠다는 것으로, 하만의 계교로 몰살당할 위기에 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 지켜주십니다. 둘째는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라고 하심으로, 바벨론이 멸망한 후,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솔하에 3차에 걸쳐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셋째는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라고 하심으로, 이전처럼 멸망시키는 일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넷째는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라고 하심으로, 본국으로 귀환한 이들이 에스라의 인도하에 대각성 회개운동을 행하게 합니다. 다섯째는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이 다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본토에 있으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가면 산다”는 겁니다. 이것은, 당시 애굽을 의지함으로 바벨론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유다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이를 보면, 오늘의 우리가 계획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맞추는 성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 - 3절을 보시면,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무화과는 이스라엘 특히 유다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좋은 무화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한 유다인들을 상징하며, 나쁜 무화과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만을 불러일으키는 악한 유다인들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열매를 맺든 삶의 열매를 맺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 3: 10을 보시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열매를 맺든, 그 열매에 의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는, 성도된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듯,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뜻에 살아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을 걸러내어, 정화된 새로운 세상을 출범시킬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 대해 우리가 즉시로 행하는 빠른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현명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것이 현명한 판단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조급한 때에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확할 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정확한 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의 인내가 성도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이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엘리야 당시,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남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해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지만, 그 속에서, 전심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은, 극상품의 좋은 무화과가 된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인 우리가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조차 소망을 잃지 않을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며, 소망의 자리로 이끄심을 알고, 언제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잘 돌봐주십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간 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스가랴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두 광주리에 있는 무화과를 보면서, “하나님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유대가 지금은 바벨론에 포로로 있지만, 본토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좋은 무화과와 같게 하리라”고 하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유다를 바벨론에 포로로 보냄으로, 그 곳에서 그들을 새로운 민족으로 변화시켜 본국으로 다시 귀한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그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 악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었던 겁니다. 여기서,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는 것은, 과일을 재배하는 농부나 파는 상인이 좋은 과일이 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 돌보는 것처럼, 바벨론 포로로 있는 자들은 해를 당하지 않게 각별히 보호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난 가운데 둘 때, 고난만 허락할 뿐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 두고, 돌봄의 손길을 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가 될 것이며, 우리는 그 고난 속에서 멸망하게 될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의 고난 이면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돌봄의 손길이 더욱 강하게 그 위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주위를 둘러볼 때 사면이 다 막힌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며,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자리로 옮기시며, 고난으로 우리를 연단한 후에는 정금처럼 순전하고 아름답게 빚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고난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망하거나 고통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속에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심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 - 7절을 보시면,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들은 사 10: 22의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에 나타난 “남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리켜 사 6: 13을 보시면,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루터기”를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국, 남은 자인 그들을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구속사를 중단 없이 이루어 나가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펼치는 구속사를 이루어가는 그루터기가 되는 백성들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좋은 무화과”라고 하며, 여기에 이스라엘의 미래와 소망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던 그들은 그 곳에서 하나님께 믿음의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이는, 똑같은 유대인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똑같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구절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들고, 예배당에 와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또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하나님과 성도 간에 있어서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의 보호자가 되시어 성도들을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시며, 성도들은 하나님께 순종의 의무를 가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목적이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목적이고, 성경 전체에 나타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어디서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인 우리가 거하는 곳이 어디든 그 곳에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의 삶을 은혜롭고 복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좋은 무화과로서의 삶이며, 날마다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