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정치의 기적 끝내 꽃피운 ‘인동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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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1925년 12월3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하의도는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34km, 1930년 경의 뱃길로는 두세 시간 걸리는 정도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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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 중에는 오늘의 김대중을 예고하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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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기억에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은 정이 많고 예술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춤을 잘 추었으며 틈만 나면 남도 육자배기나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멋지게 불러제끼곤 했다. 또 김운식은 민족의식 또는 부당함에 대한 반발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김운식은 어린 김대중 앞에서 일본 왕을 꼭 「유인(裕人)」이라고 지칭했다. 일본 왕을 천황(天皇)이라고 부르기 싫었기 때문이다. 또 김운식은 어린 김대중에게 조선왕조 계통도를 보여주곤 했다. 당시로서는 불온서적일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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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정치면 열독한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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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일들이 미묘한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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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김대중이 아버지로부터 입은 또 다른 혜택은 신문이었다. 김운식은 마을 이장을 지냈는데, 그 덕분에 김대중의 집에는 신문이 무료로 배달되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8~9세 때 이미 정치면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정치에 관심을 기울인 나이가 매우 어리다는 것도 놀랍지만, 김대중은 신문 덕분에 타고난 정치감각을 일찍부터 갈고 닦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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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장수금(張守錦) 여사는 얼핏 보면 그 당시의 보통 어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놀기 좋아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계를 유지하고 김대중의 집안을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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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장수금 여사는 보통 어머니 이상이었던 것같다. 하루는 동네 꼬마 녀석들이 술에 취해 곯아 떨어진 엿장수의 물건을 훔친 사건이 벌어졌다. 그 중에는 아직 일곱 살이 안 된 김대중도 끼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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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친구가 나눠준 담뱃대를 가져다 어머니에게 드렸다. 아버지께 드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전후 사정을 파악한 어머니는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이!』라는 욕설을 퍼부으며, 김대중에게 심한 매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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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도 어머니가 그토록 심하게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40세 이상의 한국 남성들이 가슴 속에 품고있는 어머니에 관한 추억과 유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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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장수금 여사는 보통의 어머니와 약간 다른 점도 보여준다. 매질이 끝나자 어머니는 김대중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아직도 길 옆에 누워 코를 골고 있는 엿장수에게 다가가 『당신은 팔아야 할 물건을 다 팽개치고 잠을 자도 되나요?』라고 엿장수를 꾸짖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하도 심하게 다그쳐서 김대중은 그 엿장수에게 『미안해서 혼이 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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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보기에 김대중의 어머니는 「무분별한 자식애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장수금 여사는 동네 꼬마들을 악에 빠뜨린 엿장수의 「사회적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추측건대 김대중이 정치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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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정들었던 하의도를 떠나 목포로 이주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김대중의 학업을 위해서였다. 하의도에서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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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부모님의 기대대로 목포 제일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5년제 목포 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당시 목포 상업학교는 광주 서중, 전주 북중, 광주사범 등과 함께 호남의 유수한 명문이었다. 김대중은 어린 시절 순조로운 출발을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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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적 고통 겪는 고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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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이후 김대중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크게 요동치는 내면적 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그 분열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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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식민지 고등학생의 민족의식이 그를 괴롭혔다. 그 의식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배워온 것이었다. 더구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창씨개명을 겪어야 했다. 창씨개명은 김대중에게 「인정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으나 현실적으로 벌어진 아주 난감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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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일본인 상급생으로부터 뭇매를 맞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그는 일본인 상급생들에게 「건방진 놈」 「사상이 불건전한 놈」으로 찍혀 있었다. 뭇매는 3학년 때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김대중은 취직반 반장을 그만두고, 진학반으로 옮겼다. 학기 도중 전과(轉科)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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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렵 김대중의 성적도 급격히 떨어졌다. 바로 이 점이 김대중의 내면적 고통을 보여 준다. 심리적 붕괴도 나타났다. 1943년의 태평양 전쟁 분위기와 겹쳐 「어차피 대학도 갈 수 없는 처지에 공부는 해서 뭐하겠느냐」는 청소년 특유의 반항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의 졸업성적은 1백64명 중 39등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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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다. 이는 민족적 고통과 무관할 수 없는데, 김대중은 그것을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해소했던 것 같다. 당시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번씩 시국강연회가 열렸는데, 김대중은 여기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전세계의 정세를 듣고 배우는 일에 신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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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소년 김대중은 시국강연회가 끝나면 이따금 일본의 일방적 군국주의 논리에 어긋나는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질문이 한편에서는 「사리가 분명하고 남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평가를 낳았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문제가 있는 요주의 학생」으로 경계 대상이 되도록 만들었다. 아무튼 그는 내적 고통이 많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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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를 요동치게 만드는 두 가지 심리적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통속적으로 말하면 「성공에 대한 야망」이다. 둘째는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동력은 김대중의 인생에서 「혹독한 시련기」와 「승승장구하는 성공」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감성적 예민함과 두뇌의 명석함 같은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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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인생에는 부당함에 저항하며, 그 부당함을 해결하기 위한 고독한 투쟁과 그것이 열매맺는 감격의 시대가 번갈아 나타난다. 그의 첫번째 성공은 20대 전반기에 꽃피운 청년실업가로서였다. 이 시기의 성공은 그의 우울했던 고교생 시절과 대비된다. 답답한 시련기를 벗어나자 승승장구하는 성공기에 들어선다는 특성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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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실업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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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이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경위는 상당 부분 우연이었던 것 같다. 김대중은 목포 상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광복 후 그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됐는데(노동조합은 그 당시 하나의 유행이었다), 김대중은 조합위원장이 된다. 광복 직후에는 회사마다 경영상태가 좋지 않았고 일본인들이 철수한 후라 소유권도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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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의 소유주가 불분명하니 종업원들은 임금인상이나 처우개선을 노조위원장에게 요구하였다. 그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김대중으로서는 준경영자의 입장에 서보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와 같은 경험이 젊은 나이에 회사를 창업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때마침 미군정청은 엉뚱한 사람을 그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은 힘들기만 했던 노조위원장 자리를 얼씨구나 사직하고 흥국해운 주식회사를 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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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사업은 주로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예컨대 금융조합연합회(오늘날의 농협중앙회)와 계약을 하고 곡물, 비료, 농약 따위를 배로 독점 운송했다. 이를 위해 김대중은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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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들은 얘기로는 6·25전쟁중에 군량미를 싣고 서울 방면에 납품한 뒤에는 빈 배에 피란민을 실어나르기도 했다. 또 그 피란민 중에는 훗날 전두환 정부에서 보사부장관을 지낸 김정례씨도 끼여 있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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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 무렵 그는 이미 「목포일보」를 인수한 상태였다. 비록 지방신문사이긴 하지만 일제시대부터 발간되던 전통있는 신문사를 인수했다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의 높은 신뢰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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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종업원들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이익을 나누고, 동고동락했다. 아마도 그것이 김대중의 사업이 번창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업은 1955년까지 계속됐다. 만약 김대중이 계속 그 길을 걸었더라면 일정 규모 이상의 재벌이 되었을 것이란 얘기는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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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전4기만에 의원 배지,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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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김대중의 내면에는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는 특히 정치 부조리를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운명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 정권의 부패구조가 자리를 잡아갈수록 정치에 대한 꿈은 더욱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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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김대중은 1954년 5월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정계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는 보기좋게 낙선한다. 바로 이 선거에서 김영삼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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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김대중이 54년 정치에 입문한 이후 61년 제5대 국회의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하게 요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은 김대중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란 특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시대는 부당한 시대였다. 그런데 김대중은 시류에 편승하여 편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온 부당함에 정면으로 맞서는 특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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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61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 국회의원 선거 출마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한번은 출마조차 거부당하고 만다. 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 때의 일이다. 김대중의 선거등록이 부당하게 등록무효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김대중은 10개월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무효 선거라는 판정을 이끌어낸다. 그때가 법이 잘 통하지 않던 이승만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투쟁 성과가 놀랍다.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란 김대중의 특성이 잘 나타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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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부당함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처음 출마했던 제3대 민의원 선거 역시 부당한 선거였다. 자유당 경찰은 그를 지지하기로 했던 노조간부들을 체포해버렸다. 그들은 경찰에서 풀려난 후 모두 자유당 지지로 돌아섰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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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이 겪은 부당함은 또 있다. 59년 6월에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가 실시됐다. 김대중 자신이 선거무효 판정을 받아낸 바로 그 선거였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여당의 모든 물량이 총동원된 흑색선전에 처참하게 패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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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 속에 새 싹 틔우는 「인동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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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은 결국 세번 낙선하고 네번째 출마한 강원도 인제에서 국회의원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김대중은 당선 2일만에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이틀 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국회는 쿠데타와 동시에 해산됐다. 김대중은 정계에 입문하려는 순간 다시 한번 부당함에 발목을 잡혔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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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구나 김대중은 5·16 쿠데타가 성공한 후 부패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된다. 군사정부가 이 구실 저 구실을 붙여 정치인들을 잡아 넣었기 때문이다. 길고 긴 감옥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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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김대중이 먼저 현행법을 어기면서 정치범이 되기를 자청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부당함이 그를 정치범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훗날 김대중은 박정희와 운명적 대결을 벌이는데, 그 싸움은 김대중 쪽에서 보면 부당함에 맞선 투쟁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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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실패의 뒤쪽에는 개인적 비참함이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김대중 역시 거듭되는 정치적 실패로 참담함을 겪어야 했다. 청년기에 모았던 재산을 모두 날렸고, 사랑하는 아내 차용애(車容愛)를 먼저 떠나 보내야 했다. 그녀의 죽음은 김대중을 매우 아프게 했다. 또 김대중은 당시 이화여대에 재학중이던 여동생이 변변히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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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상하게도 김대중은 그런 비참함 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싹을 찾아낸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이런 특성을 두고 인동초(忍冬草)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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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생명의 싹을 티워내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사람도 있었다. 가장 큰 은인은 그의 아내 이희호 여사다.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의 러브스토리는 아름답지만, 한두 줄로 요약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또 무명 정치인 시절 1백명의 국회의원을 제쳐두고 그를 민주당 대변인으로 임명한 장면 박사도 김대중의 커다란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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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초 김대중에게 새로운 정치의 기회가 찾아왔다. 군사정부는 내부적으로 민정참여를 결정한 후 야당 정치인들의 활동규제를 해제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야당 정치인들이 다시 모여 민주당을 재건하고, 박순천 여사를 당수로 선출한 뒤 그해 7월에 창당대회를 가졌다. 김대중은 또 다시 당 대변인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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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김대중을 보고 『말을 잘 한다』고 하는데, 그런 별명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의 말은 천성적인 것도 있지만, 철저하게 준비하여 나오는 말이다. 『말 잘 한다』는 별명이 결코 거저 얻어진 평가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단 1분짜리 성명을 내기 위해 하루종일 준비했다. 그런 준비는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에 당선된 지금까지 계속되는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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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는데, 「민주당 대변인 김대중」의 활약은 눈부셨다. 김대중은 군사정권이 자행한 부정부패를 낱낱이 공격했다. 이때 김대중은 여러 번 박정희를 궁지에 몰아넣었는데, 박정희가 김대중을 미워하게 된 이유가 이 당시 김대중의 비판이 하도 날카로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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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년 11월 김대중은 마침내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67년 6·8총선, 71년의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국가지도자로 부상했다. 불과 7~8년만에 일궈낸 급속한 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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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 이후 온갖 시련과 좌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모든 시련을 넘었다. 96~97년에는 DJT 연합을 통해 자신에 대한 차별적 지역장벽을 넘어 정치적 성공을 이끌어낸다. 어떤 시련도 결코 그를 침몰시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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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말이나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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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는 김대중 정치의 특성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자. 세상에는 김대중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김대중은 무조건 나쁜 놈』이라거나 『김대중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두 가지 견해가 포착하지 못했던 김대중의 특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이제 대통령이 됐으며, 우리는 김대중의 진정한 강점과 약점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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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치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말과 대화의 정치다. 둘째,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셋째, 비폭력 평화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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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에서 김대중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말과 대화의 정치다. 김대중은 말로 성공한 정치가지만 말 때문에 시련을 겪기도 했다. 김대중은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서 말의 의미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정치가다. 사실 한국의 문화에서 말이란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말 많은 남자란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의미하며,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말(수다)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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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김대중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의 정치를 추구했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는 김대중 정치의 가장 뛰어난 특성이 여기에 있다. 또 그의 당선은 「말의 정치가 승리한 사례」를 낳았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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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컨대 처음 국회에 진출한 제6대 국회의원 시절 김대중의 연설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휴게실에서 바둑을 두던 동료의원들도 『김대중이 말하는데 들으러 가야지』 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한다. 얼마간 과장이 있겠지만, 그 당시 『김대중 말이나 듣자』는 표현은 바둑돌을 그냥 던지라는 뜻으로 통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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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김대중의 말을 「말을 위한 말」이라거나 단지 「연설을 잘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의 말은 대화와 타협, 여야의 상호인정을 바탕에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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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가 정치 그 자체를 비난하는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한국의 정치 풍토는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유행이다. 『다 쓸어버려야 한다』거나 『OO를 청산해야 한다』거나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비난하는 양비론이 주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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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사실 그와 같은 접근방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인정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지루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김대중은 바로 그 길을 걸어 왔다. 김대중을 꽤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김대중의 이런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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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김대중은 97 대선 과정에서 『모든 국민이 6개월에 한 번씩 TV 앞에 모여앉아 나라일을 논의하는 대화를 갖겠다』고 약속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오랫동안 「말과 대화의 정치」를 추구한 데서 나온 참신한 발상이다. 그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관점에서 「6개월마다의 대화」를 기대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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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치」의 정수, 「연합과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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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치의 두번째 특징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분명 권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왜냐하면 권력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추구했기 때문에 현실주의로 나간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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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솔직히 말해 김대중의 권력욕은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우리 권력은 되지만 김대중의 권력은 안된다』는 배제의 논리가 그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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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현실주의는 많은 경우 「정치적 연합」으로 나타난다. 79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정적(政敵)인 김영삼 지지선언을 한 것이나, 85년 민추협에서 김영삼 진영과 연합전선을 편 것이나, 현재의 DJT 연합이 그 예다. 이들 연합은 한국정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압권들이다. 물론 김대중이 언제나 연합과 타협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87년의 야권분열은 김대중에게 절반의 책임이 있는 최악의 분열이었다. 그런 과오는 지금도 깊이 반성해야 할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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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김대중 정치의 본령은 연합과 타협이다. 예컨대 현재의 DJT 연합을 보자. 이것을 정치적 야합으로 보는 견해도 많지만 한마디로 필자는 DJT 연합을 한국의 현실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정치적 대안으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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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60년대 이후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분열된 채 진행돼왔다. 양 진영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했으며, 「도덕적으로 저급한 사람들」이라거나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서로를 비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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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와 같은 분열은 지역감정이 강해지면서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경상도라고 민주화 세력이 없는 것이 아니건만 민주화는 전라도의 몫이 되었고, 전라도 사람들이 산업화를 싫어한 것도 아니건만 마치 「경상도=산업화=민주화 반대, 전라도=민주화=산업화 반대」인 것처럼 국민이 나뉘었다. 필자가 느끼기에 DJT 연합은 60년대 이래 상호불신했던 양진영이 처음으로 진정한 신뢰와 타협을 이끌어낸 쾌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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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과 베켄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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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정치적 수준에서 그런 방법이 아니고 어떻게 양 진영이 상호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양 진영이 그와 같은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치영역에서 물러나고, 그 분열을 그대로 남긴 채 21세기 통일시대를 열어야 할 경우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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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와 같은 타협은 권력과 명분 양쪽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김대중의 끈질긴 현실주의가 한 축을 형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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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치의 세번째 특징이자 그 동안 한국정치가 몰라라 했던 것은 비폭력 평화주의다. 사실 한국사회는 김대중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김대중이란 존재가 한국사회의 극단적 충돌을 막는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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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면적으로 보면 전라도에서 김대중에 대한 90% 이상의 지지가 형성되고, 김대중이란 존재가 지역감정을 한층 조장하는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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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당한 인격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억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합해져 나타난 사건이 광주항쟁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광주항쟁을 잊지 않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갔을 경우를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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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김대중이란 존재는 전라도 사람들의 쓰라린 정치적 상처를 그래도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표출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했다. 만약 김대중이란 비폭력 평화적 통로마저 없었다면 『에라 될대로 되라』는 전라도 사람들의 낙심과 반항을 막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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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리는 김대중을 마치 「반란의 지도자」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책과 권력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에게 그와 같은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은 김대중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탄압을 잘 막아낸 「수비형 정치가」이기 때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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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에서 세계적인 공격수로 평가받는 브라질의 마라도나 선수는 독일의 세계적인 수비수였던 베켄바우어 선수를 보고, 『그 친구는 참 지독한 놈이다. 그 놈은 내가 아무리 공격을 해도 다 막아낸다. 정말 골치아픈 놈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김대중의 과격 이미지도 사실은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함을 끈질기게 막아낸 데서 생겨난 것일 뿐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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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 약점은 폐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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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김대중은 장점만 있고 약점과 단점은 없는 정치가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김대중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김대중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좀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것은 많은 경우 조심성으로 나타난다. 그 조심성은 정치가 또는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결정을 신속히 내려야 할 때 지나치게 신중하여 「때를 놓치는 결정」을 낳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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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김대중 또는 그를 둘러싼 김대중 캠프의 최대 약점은 폐쇄적이라는 데 있다. 이 폐쇄성은 흔히 말하는 「1인 중심의 보스체제」 또는 「3김식 정치」에서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김대중 캠프의 정서적 심리적 특성이 폐쇄적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최대 약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탄압만 받아온 정치집단이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라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권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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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캠프의 폐쇄성이 잘 드러난 두 가지 예를 들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선 92년 대선과정에서 등장했던 「뉴DJ 플랜」을 보자. 이것은 그야말로 김대중을 반대하는 50% 이상의 유권자 경향을 무시한 채, 김대중 한 사람의 이미지를 개선해서 상황을 돌파하겠다는 생산자 중심의 선거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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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말해 김대중 캠프는 김대중을 중심에 놓고 모든 정세판단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바로 김대중 캠프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오죽했으면 그럴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험악한 정치세계에서 도출된 생존방식치고는 너무도 순진한 대응방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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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와 같은 폐쇄성은 이번 선거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국민회의는 DJT 연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후부터 지지율이 떨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김대중 캠프의 폐쇄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김종필과 박태준이란 빛나는 상품을 구입해 놓고도 그들 스스로 「우리가 지금 권력을 나누어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폐쇄적 회의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김대중씨에게 가해진 비인간적 공격이 그들 자신을 그처럼 위축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니, 권력이란 나눌수록 좋은 것 아닌가?』 라며 여당의 공세를 명랑하게 일축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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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쇄성은 또 집권과정에도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염려된다. 그러나 79년과 85년의 정치적 연합, 현재의 DJT 연합이 성립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정치적 계기들을 잘 살피고, 정치적 연합의 정신을 잘 발휘한다면 그와 같은 폐쇄성은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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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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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 글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김대중의 어린 시절 이야기 속에는 흥미로운 「두 편의 군함 이야기」가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김대중이 일본 군함을 목격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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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략 여덟 살 무렵의 일로 추측되는데, 김대중은 섬소년답게 언덕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바다 저쪽에서 여러 척의 일본 군함이 위용을 자랑하며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소년 김대중은 그 배를 보고 흥미로운 이중적 감상에 사로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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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에 나타난 표현을 빌리면, 외경심과 부러움 및 (민족적)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군함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 김운식에 대한 행복한 추억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 장면이다. 그의 진술을 그대로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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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인가 내가 마루에 앉아 장난감 배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딘가 막 외출을 하려던 참에 힐끗 나를 내려다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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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아 거기서 뭐하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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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를 만들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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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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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군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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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전까지 외출준비에 발걸음이 급하셨던 아버지가 웬일인지 그냥 마루에 걸터 앉으셨다. 그리고는 잠시 내가 나무를 깎는 모습을 바라보며 담뱃대의 대통에 엽연초를 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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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김대중의 아버지는 반나절에 걸쳐 장난감 군함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년 김대중이 군함을 갖고 싶어했다는 점인 것 같다. 그의 아버지가 외출을 중단하고 장난감 군함을 만들어 주게 된 원인도 군함을 갖고 싶어하는 어린 김대중의 강렬한 열망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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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두 편의 군함 이야기는 김대중의 독특한 정치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토록 위대한 일본의 군함이라면 그저 구경만 하거나, 한번 타보고 싶다거나, 아니면 무섭다거나, 그저 위대한 일본의 배겠거니 하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길 법도 한 일이다. 그런데 소년 김대중은 그걸 스스로 만들어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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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위용을 자랑하는 일본 군함 선단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권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겁이 많은 김대중은 권력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군함을 가지려 했다. 우리는 여기서 소년 김대중의 정치와 권력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군함에 대한 이중적 감정(ambivalence)은 김대중이 권력과 세상의 부당함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 되게 만든 동력이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보면, 그의 당선은 장난감 군함을 갖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의 소망을 충족한 것이다. 참으로 끈질긴 현실주의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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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글의 맨 앞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하나의 기적」으로 묘사했다. 그 기적은 양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선 김대중 개인의 끈질긴 노력의 승리다. 그러나 그 기적은 한국사회의 기적이기도 하다. 그 기적은 처음 DJT 연합으로 시작되었다. 상호불신을 털고 야권 수준에서 단일화를 일궈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는 국민통합의 시대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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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경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서민들은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모재벌 총수가 경제는 2류고 정치는 4류라고 정치를 비웃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 경제는 낙제생이 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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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제는 정치에도 기대를 걸 때라는 생각도 든다. 정치를 정상화시키지 않고는 경제발전도 불가능하며, 광복 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4류정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전의 치열한 논쟁은 뒤로 하고 우선 힘을 합해 이 난국을 돌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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