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주(李後主:李煜)와 탕웨이(湯唯) 그리고 중국 강남 사람들의 깊고 은근한 정서
2022년 5월 31일
지난 5월 28일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헤어질 결심(중국어, 分手的决定)”으로 박찬욱 감독상과 송강호 남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영화에서 중국 항주 출신 탕웨이(湯唯)가 여우 주연을 맡았기에 큰 상 받기를 기대하였으나 아쉬워하였습니다.
그녀는 박찬욱 감독에게 “제 인생의 한 부분을 완전히 새롭게 이루어주신 감독님 감사합니다.(謝謝導演完整了我人生的一部分)”라고 고마워하였답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겼겠지만 아마도 과거와 달리 중년 나이에 이르러 그녀의 타고난 성격과 항주에서 물든 정서를 잘 발현시켜주어 중년 시기의 여배우 이미지를 가꾸어주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성격과 정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현재 그녀는 깊은 인연으로 한국 사람과 결혼하였고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앞으로도 한나라 채옹(蔡邕)의 딸 채문희(蔡文姬)를 떠올리지 말고 양국에 있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중국 사람들은 탕웨이 인상을 여러 가지로 보았는데 꾸밈없이 솔직(直率)하다는 평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솔직한 성격 안에는 생기발랄한 모습도 있지만 슬픔도 담긴 것 같습니다. 탕웨이가 절강성 낙청시(浙江省 樂清市)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항주에 이사 와서 항주에서 자라면서 학교를 다녔고 북경에서 중앙연극학원(中央戏剧学院) 연출학과(导演系)를 졸업하였다고 합니다. 북경에서 대학을 다녔으나 그의 기본 정서는 절강성 항주의 특색을 강하게 풍깁니다. 중국 여배우들은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성격(豪爽)을 가졌는데 탕웨이는 오히려 진정(眞情)을 갖고 진실(眞切)하며 내향적(涵蓄)이라고 합니다.
탕웨이의 내향적인 성격과 항주 사람들의 공통된 정서를 보면 그녀의 성격이 솔직하면서도 표현이 은근히 뜸을 들이며 상대방의 의향을 기다리는 태도는 한국에서도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의 정서와 비슷합니다.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 강소성과 절강성에 건너가서 많이 정착하면서 고향의 풍물을 가져가서 살았고, 신선(神仙)들이 사는 고향 땅을 그리워하였답니다. 지금은 흔적만 조금 남았습니다. 어쩌면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 살았던 강남지역과 현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는 서로 비슷한 정서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절강성 사람들의 은근하고 속 깊은 정서는 남당(南唐, 937-975)의 마지막 군주 이욱(李煜,937년 8월 15일-978년 8월 13일, 향년 41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욱은 강소성 사람이지만 절강성 사람의 깊고 솔직한 정서도 갖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강남지역이라고 말하면 남경과 소주(蘇州)가 있는 강소성(江蘇省)과 항주가 있는 절강성(浙江省)을 말합니다. 두 지역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있던 지역으로 문화와 풍속 그리고 정서가 서로 다릅니다. 두 지역 가운데 강소성 사람들은 자존심과 명예심이 강하다고 하며 절강성 사람들은 희노애락 깊은 정서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왕양명도 절강성 사람인데 어린 여성처럼 곱고 여리며 깊은 정서를 가졌습니다. 물론 중국 근현대 시기에는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였던 광동성 광주 사람들과 함께 상해 사람들도 잘난 척하고 잘 속였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지금은 가장 예의가 바르다고 합니다.
남당 마지막 군주 이욱(李煜)의 유명한 작품 셋에서 솔직하면서도 은근한 슬픈 정서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는 나라가 북송(北宋)에게 멸망 당한 뒤에 포로로 잡혀가서 변경(汴京)에서 지내다가 독살당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뒤에 고국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짓고 불렀습니다.
현재 그에 관한 자료와 소개는 바이두에서 아래와 같습니다.
그의 조상 거주지가 서주 팽성현(徐州 彭城縣, 현재 江蘇省 徐州市)이며 현재 강소성 남경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종가(從嘉)이고 자(字)가 중광(重光)이고 호(號)는 종산은사(鍾山隱士)、종봉은자(鍾鋒隱者)、백련거사(白蓮居士)、연봉거사(蓮峰居士)라고 불렀습니다. 당나라 원종(元宗) 이경(李璟)의 여섯째 아들이며 남당(南唐)의 멸망 임금이며 그래서 나중에 세상에서는 남당 후주(南唐後主)라고 알려졌습니다.
이욱은 서예와 회화를 잘하고 음악도 잘 알고 시(詩)와 산문도 잘 지었으며 사(詞) 작품은 아주 뛰어났습니다. 이욱의 사(詞) 작품은 만당(晩唐) 이래로 온정균(溫庭筠, 약 812-약 866)과 韋莊, 약 836-약 910)의 문학 전통을 계승하고 또 이경(李璟, 916-961)과 풍연사(馮延巳, 903-960)의 영향을 받았기에 말이 명료하고 묘사한 형상들이 생동감이 있으며 감정이 진지하고 나름의 품격이 뚜렷합니다. 남당 나라가 멸망하여 북송에 포로로 잡혀간 뒤에는 그의 사(詞) 작품은 문학 소재가 넓어졌고 뜻도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만당과 오대 시기에 우뚝한 작가이며 후대에 영향이 컸습니다.
-------------------------------------
「우미인(虞美人)」︰
春花秋月何時了,往事知多少?
小樓昨夜又東風,故國不堪回首月明中!
雕欄玉砌應猶在,只是朱顏改。
問君能有幾多愁?恰似一江春水向東流。
고향에서 봄에 예쁘게 피었던 꽃과 가을 밤하늘에 떴던 밝은 달의 추억들은 언제나 다시 떠오르지 않고 그칠까? 지난 세월에 화려하였던 기억들이 아직도 얼마나 남았기에 자꾸 떠오를까?
어젯밤에는 작은 누각에서 밤을 새웠는데 봄바람이 또 불어오니, 망해버린 나라가 있는 동쪽을 고개 들어 바라볼 수 없었다, 이렇게 밝은 달 아래에서는!
궁궐의 아름다운 난간과 옥 계단들은 아직도 그대로 있겠지, 다만 나의 젊었던 얼굴만 나라 잃은 설움으로 상하였구나.
당신은 걱정과 슬픔이 얼마나 많습니까 묻는다면? 흐르는 눈물이 마치 강남지역에서 매화꽃 필 때 내리는 봄장마로 불어난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만큼 많다고 대답하렵니다.
「꿈속에서 다시 만난 기쁨(相見歡)」︰
無言獨上西樓,月如鉤,寂寞梧桐深院鎖清秋。
剪不斷,理還亂,是離愁,別有一番滋味在心頭。
새벽에 말없이 혼자 서쪽 누각에 올라가니, 갈고리처럼 얇은 달이 떴는데,
내가 갇혀있는 외롭고 고요한 오동나무 정원에도 늦가을이 가득 찾아들었구나.
아무리 잘라내도 끊어지지 않고 생각할수록 마음만 산란해지는 것이 가족과 고향을 떠난 이별의 슬픔이로다, 이별의 슬픔 속에서도 옛날 만났던 사람들의 즐거웠던 기억이 떠오를 때는 오히려 기쁘네.
「낭도사 곡조에 붙여 부른 노래(浪淘沙令)」︰
簾外雨潺潺,春意闌珊。羅衾不耐五更寒。夢裡不知身是客,一晌貪歡。
獨自莫憑欄,無限江山。別時容易見時難。流水落花春去也,天上人間。
창밖에는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니 봄기운도 끝나는가 보다.
비단 이불 속에서도 한밤중 추위를 참기 어려워 잠에서 깨었는데.
꿈속에서라도 내가 잡혀온 포로라는 것을 잊고 잠시나마 기쁠 수 있었는데.
혼자 난간에 기대어 끝없이 넓었던 고국 강산을 더 이상 떠올리지 말자.
고국을 떠날 때가 차라리 쉬웠고 다시 돌아가기는 아주 영영 어렵겠지.
봄장마에 불어난 강물도 떨어진 꽃들도 모두 봄과 함께 떠나가는데,
옛날 좋았던 고향이 천상(天上)이었다면 지금 유폐는 고생스러운 인간 세상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