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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5) 장 르클레르크 (상)
그리스도인 영적 여정 연구하는 영성신학 기틀 다져
- 20세기 영성신학자 장 르클레르크
영성신학 분야에서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를 추천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신학 분야에 비해 독립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지 100여년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을 접하고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한 지는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기에 어느 학자를 추천하더라도 모두 낯설고 관심 갖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18~19세기에는 주로 ‘신비신학’과 ‘수덕신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와서 서서히 ‘영성신학’이라 불리며 그리스도교인의 영적 여정에 대한 통합적 연구가 이뤄진다. 다만 공교롭게도 대부분 프랑스 출신의 다양한 수도회 소속 신학자들이 지난 몇 세기 동안 신비신학과 수덕신학을 연구하면서 학문으로서 영성신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에 필자도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출신 베네딕도회 영성신학자인 장 르클레르크(Jean Leclercq, 1911~1993)를 소개하고자 한다.
평수사 원했으나 사제로 서품
르클레르크는 1911년 1월 31일 프랑스 북부 아베느(Avesnes)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발발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에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게 지냈다. 만 16세가 되던 1927년 그는 수도자가 되길 바라면서 룩셈부르크 북부 클레르보(Clervaux)에 위치한 생-모리스(Saint-Maurice) 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르클레르크는 그냥 평수사로 살기를 원했는데, 이와 같은 원의가 수도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수도원 의향에 순명하기로 하여 이듬해인 1928년에 수도원에 입회할 수 있었고, 1930년에 수도서원을 하였으며 1936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933~1937년에 르클레르크는 로마 성 안셀모 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신비신학’이라는 주제로 활발하게 연구를 하던 베네딕도회 신학자 안셀름 슈톨츠(Amselm Stolz, 1900~1942)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됐고, 훗날 그와 같은 주제로 저술 활동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37년 박사 학위 논문 작성을 시작하게 되었을 즈음에, 르클레르크는 파리에서 잠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40년에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서 자신의 학위 논문을 마칠 수 있었고 1942년에 출판했다. 르클레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1939~45) 기간 중 파리와 프랑스 서부 리구게(Ligug)에 소재한 수도원에서 지냈다.
스승 질송의 영향과 베르나르도 연구
이 시기에 르클레르크는 자신의 앞날에 또 다른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 1884~1978)을 파리에서 만나 중요한 조언을 듣게 됐다.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사를 연구하던 질송은 르클레르크에게 11~12세기의 수도원운동(Monasticism)에 대해 연구해 볼 것을 제안했다. 결국 질송의 제안이 계기가 되어 그는 이후 중세 그리스도교 수도원운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가 됐다.
-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장 르클레르크는 중세기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시토회 수도자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연구자가 됐다. 사진은 바티칸 정원에 있는 베르나르도 성인의 석상. [CNS]
1946년에 르클레르크는 먼저 중세 베네딕도회 쎌르의 베드로(Peter of Celle, 1115~1183), 가경자 베드로(Peter the Venerable, 1092~1156), 패캉의 요한(John of Fcamp, ?~1079)에 대한 저서들을 발표하였다. 또 1948년에는 완덕의 삶에 대한 주제와 수도원의 용어를 다룬 저서를 비롯하여 시토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에 관한 저서 「신비체험가 성 베르나르도」(S. Bernard Mystique)를 발표하였다.
이 연구가 계기가 돼 르클레르크는 자신의 생애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 중의 하나를 맞게 되었다. 즉 1948년에 시토회 총장은 베네딕도회 젊은 수도자인 르클레르크에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저서들에 대한 비판본 작업을 의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르클레르크는 샤를 탈보(Charles H. Talbot)와 앙리 로쉐(Henri Rochais)의 도움을 받아 공동 작업으로 약 30년에 걸쳐 베르나르도 저서의 비판본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1957~1977년에 총 8권으로 구성된 「성 베르나르도 작품」(Sancti Bernardi Opera)이 출간되면서 마무리되었다.
르클레르크는 비판본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베르나르도에 관한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특히 1962~1992년에 베르나르도에 관한 연구를 모은 총 5권으로 구성된 「성 베르나르도와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 모음집」(Recueil d’tudes sur S. Bernard et ses crits)을 발간하였다. 결국 르클레르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이면서도 오늘날 시토회 수도자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가 될 수 있었다.
수도신학 연구
한편, 르클레르크는 모교인 안셀모 대학교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자신의 생애의 또 다른 중요한 연구 주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1955~1956년에 가르쳤던 강의 내용을 1957년에 「학문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Amour des lettres et le dsir de Dieu)이라는 제목으로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러한 연구가 계기가 되어 르클레르크는 중세 ‘스콜라 신학’과 대조가 되는 ‘수도 신학’(Monastic Theology)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10월 28일에 있었던 일반 알현 강론에서 르클레르크가 정한 이 저서 제목은 ‘수도 신학’의 특징을 지혜롭게 잘 정의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후에도 르클레르크는 수도원운동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면서, 1968년에 「수도원운동의 모습, 어제와 오늘」(Aspects du monachisme, hier et aujourd’hui)과 1969년에 「수도의 삶과 관상의 삶」(Vie religieuse et vie contemplative)을 출간하였다.
활동하는 학자
르클레르크는 학자로만 머무르지 않고, 1960~1980년대에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된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베네딕도회와 시토회가 전 세계에 수도원을 설립할 때, 르클레르크는 ‘수도원 연맹’(AIM: Alliance Inter Monastres)을 도와서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강의와 수도원 설립에 관한 조언을 하였다. 또 타종교와 수도생활에 관한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수도원 타종교 대화’(DIM: Dialogue Interreligieux Monastique)라는 기구를 창설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 르클레르크는 정교회 신학자 존 메이엔도르프(John Meyendorff, 1926~1992)와 함께 공동 편집자가 되어 그리스도교 영성역사에 관한 작품을 기획하여 1985년에 「그리스도교 영성 제1권: 초세기에서 12세기까지」(Christian Spirituality I. Origins to the Twelfth Century)를 편찬하여 발간하였다.
르클레르크는 1990년 로마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탄생 9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한 이후 은퇴해 자신이 입회하였던 생-모리스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3년 10월 27일에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평신도 신학자 버나드 맥긴(Bernard Mc-Ginn)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자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과 함께 장 르클레르크를 꼽았다. 머튼은 영어권에서 활동한 영성작가라서 우리에게 잘 알려졌다면, 르클레르크는 불어권에서 활동한 영성신학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개될 기회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가 장 르클레르크가 우리에게 잘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6) 장 르클레르크 (중)
신학은 신앙에 수반하는 ‘거룩한 학문’
- 장 르클레르크는 영성신학 분야 안에서도 특히 수도신학에 대해서 심혈을 기울여 집대성하는 업적을 남긴 신학자다. 사진은 독일 남부 에탈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 성당 전경. [CNS]
신앙인이든 아니든 일반인이 ‘신학’(神學, Theology)이라는 학문 분야를 접하게 되면 하느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단편적인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신학은 주제별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분류된 한 분야 안에서도 더 자세히 세분될 수 있다. 필자가 영성신학자로 소개하고 있는 장 르클레르크는 영성신학 분야 안에서도 특히 수도신학에 대해서 심혈을 기울여 집대성하는 업적을 남긴 신학자이다. 르클레르크가 이러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질송의 제안을 받고 중세 수도원운동에 대한 주제를 연구한 것과 큰 연관이 있다.
‘신학’이라는 학문
고대는 아직 신학이 다양한 분야로 구분되지 않은 때였다. 그 당시 교회학자, 즉 교부들은 교회의 선교사명에 부응하면서 기본적인 교리교육을 정립하는 데 매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해석하는 일을 즐겨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꼭 믿어야 할 신앙 원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런 까닭에 교부들의 신학 활동은 오늘날 성서신학과 유사함을 지니면서도 확연히 구분되는 차이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교부들은 성경을 연구할 때 지적 능력을 가지고 사변적으로만 연구하지 않고, 묵상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였다.
중세 초기 유럽 상황이 여러 모로 어려운 가운데 더 이상 출중한 신학자들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교부 시대는 일단락되었지만, 고대 교부들이 실천하던 신학 방법론은 수도원 안에서 수도자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고대와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어서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여 고대와 중세 초기의 신학을 구분하지 않다가 중세 중기에 들어와 새로운 학문 방법론이 나타나면서 함께 새로운 구분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중세 중기 유럽 사회가 안정되자 그 동안 수도원에서 유지해 왔던 학문적 열정과 학교 제도를 일반 사회에서도 실천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유럽 사회에는 대학들이 설립되고 기원전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지성적인 탐구의 분위기가 모든 학문 분야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교회 학자들도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여 철학적 방법으로 하느님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면서 스콜라 철학과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신학자들은 스콜라 신학을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의 지성으로 헤아려 보고자 세상 학문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연구하였고,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라는 공리(公理)를 만들었다. 심지어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경말씀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영적 묵상보다는 지성적 사색을 더 선호하였다. 이렇게 중세 중기를 기점으로 체계를 갖추게 된 스콜라 신학은 인간 지성으로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오늘날 교의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교회 안에서 스콜라 신학이 자신의 성격을 분명히 하자, 베네딕토회와 시토회를 비롯하여 중세 중기까지 설립된 몇몇 수도회에서 보전하였던 교부들의 성경연구 방법론이 상대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분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수도자들은 실천적인 영성이 제외된 학문탐구의 대상으로서의 신학만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수도자들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소위 객관적이라는 학문 방법론의 권위에 의탁하여 성경말씀의 의미를 조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성경말씀 안에서 활동하시는 신적 계시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나는 체험하기 위하여 믿는다”라는 공리를 만들었다. 수도자들이 교부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신학 방법론을 발전시킨 시점이 공교롭게도 중세 중기에 정점을 이루었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중세 수도자들의 이러한 활동들을 탐구하면서 그 당시 분위기와 주장을 ‘수도원운동’이나 ‘수도신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연구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수도신학이 수도자들의 수도원 생활을 단순히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도신학은 수도자들이 성경말씀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고 묵상하며 기도하였는지에 관한 전 과정을 객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영적 여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규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운동의 중심에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르클레르크의 중세 수도원운동 연구
장 르클레르크는 이러한 중세 수도원운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신앙인이 영적 발전을 도모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며 구원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는 ‘신학’을 마련하고자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였다. 즉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신학은 다른 여타 학문과 같은 단순한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거룩한 학문’이고 ‘경건한 교리’이며 ‘지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가 자신의 분명한 직무를 통하여 인류의 구원을 위해 훈련하는 일이며,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자신의 의무를 생각하여 오로지 단순한 개인의 만족만을 위해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적으로 유용한 직무를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신학은 ‘초월성’내지 ‘탁월함’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철학적인 원전이나 인간 지성의 생산물보다는 그리스도가 계시해 준 것이나 교회 전승에 의해 보존된 것을 그 출발점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학은 신앙의 신조에 관한 지성을 찾기에, 하느님 자신의 빛으로 비춰진 신학은 자신의 내적 생활 안에서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을 숙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실질적으로 하느님에게 일치시킨다.
신학은 이렇게 신앙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증거, 일반 신앙인들의 중요한 증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므로, 신학자는 신앙의 진리에 관해서 지적인 탐구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학은 신앙에 수반하는 학문이고 이렇게 신앙에 관한 탐구를 동반하기 때문에, 신학은 때로는 부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신학은 우리의 범위 안에서가 아니라 신학 자체의 범위 안에서 학문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에 따라 14세기 토마스주의자들도 신학은 정확하게 언급된 학문이지만 불완전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사로잡혔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중세 수도원운동에 대한 르클레르크는 연구는 중세 당시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고대 교부신학이 중세에 수도신학과 스콜라신학으로 분화되어 자리매김하는 과정과 특징을 알아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영성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포괄적인 개념에서의 영성신학 안에 세분화된 수도신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이 수도신학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효한 관점을 제공해 줌으로써 수도자들뿐 아니라,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신학 탐구에는 영성생활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일반알현 강론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학이 지닌 기도의 차원을 사랑이 생생히 일깨울 때, 이성으로 얻은 지식은 넓혀집니다. 진리는 겸손을 가지고 탐구하며, 경이로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한 마디로 지식은 진리를 사랑할 때만 성장합니다. 사랑은 지성이 되며, 진정한 신학은 마음의 지혜가 되어, 믿음과 믿는 이들의 삶을 이끌고 받쳐줍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7) 장 르클레르크 (하)
성경 중심으로 교회와 함께 고백하는 기도 생활 강조
중세 연구 통해 밝혀진 역사
장 르클레르크가 질송의 권유를 받아 중세 수도원운동(Monasticism)을 연구하면서 이론적 측면에서 수도신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신비체험(Mysticism)에 관한 슈톨츠의 연구에 영향을 받으며 연구하면서 실천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에 대한 고유한 관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
르클레르크가 특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던 중세는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 수덕 생활은 초세기부터 영성 생활을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였지만,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덕 생활이 과도한 고신극기의 모습을 바뀌면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실천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평신도 그리스도인 및 또 다른 성직자, 수도자들은 기도 생활 안에서 체험하는 신비 생활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됐다. 하지만 적절한 이론이나 외형적 틀 없이 추구한 기도 생활은 신비 생활을 왜곡시키면서 중세 후기에 신비 체험과 관련된 영성적 이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르클레르크는 중세를 연구하면서 이러한 역사를 분명히 목격하였다.
기도 생활의 어려움
한편, 르클레르크가 신학자로서 연구를 시작하던 20세기 직전까지 교회는 다시 한 번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의 부조화를 경험하였다. 즉, 17세기에 신비 체험과 관련된 이단이 출현하여 악영향을 끼치고 난 후 200여 년간 교회 안에서 신비 생활은 자취를 감추고 이단의 찌꺼기를 척결하고자 수덕 생활만 강조되는 영성 생활이 실천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19세기 말엽부터 교회는 다시 올바른 신비체험을 경험하면서 신비 생활에 대한 반감이 줄고 공개적으로 관심도 갖고 연구도 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를 몸소 체험한 르클레르크는 그리스도인이 영성 생활을 위해 기도 생활을 실천할 때, 아무 틀도 없이 신비 생활만 추종하는 것보다 적당한 틀 안에서 수덕 생활과 함께 접근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고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까닭에, 르클레르크는 현대 영성신학자답게 현대인의 입장에서 기도 생활의 어려움과 그에 대한 극복 요령을 수덕 생활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설명하였다.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현대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대부분 시간은 생산과 소비에 사용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도하기 위하여 보내 시간은 겉보기로는 소비된 시간이요 결실 없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외적인 성취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외적인 결과를 거부해야 한다.”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물론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기도로 바친다는 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얼마간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엇인가를 포기하면서 기도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기도의 가치에 대하여 확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르클레르크는 말한다. “즉 기도에 대한 확신을 했을 때만이 이와 같은 포기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르클레르크는 기도 생활을 수덕 생활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시도하였다. 즉, “현대의 소용돌이치는 삶 안에서 기도의 수덕은 노력을 의미”하는데, 특히 “시간에 대한 수덕은 희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의식적으로 있으려 하는 우리의 기도 활동에서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르클레르크는 지적한다. 사실 르클레르크가 생각하는 피조물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려는 우리의 지향을 끊임없이 감소시키고, 얽매어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 경향에서 탈피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에 접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르클레르크가 생각하는 기도 생활은 단지 일정한 시간 동안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게 하는 많은 장애물을 의도적으로 극복하여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은총의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수덕 생활과 연계된 기도 생활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발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서 “우리의 자유를 교육”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기도 생활은 새로운 활기를 가지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 생활에서 유의점
한편 르클레르크는 기도 생활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도 지적하였다. 즉, “주관적인 경향의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그 결과 나의 체험은 아주 깊게 느끼게 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주관적인 체험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너무도 빈약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취향에 맞는 개인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에서 탈피”하며, “자신에게서 소외되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르클레크는 말한다.
르클레르크는 우리가 주관적인 경향을 극복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마련하여 함께 바치던 공식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즉, “이러한 교회의 기도는 어떠한 형식으로 이루어지든 문제 되지 않으며 또한 이 교회의 기도를 혼자서 했을 때라도 교류는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확인하고 제시하고 반복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영양분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듣지 않는 위험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우리 자신에게만 말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정반대로 만약 “우리가 교회가 제시하는 영감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생명 없이 될 수 있는 빈약한 주관주의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런데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우리는 교회의 공식 기도문을 능가하는 원천에 눈을 돌려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사실 “하느님은 성경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성경은 하느님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알려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그분과 맺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기도는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입시킨다.”
그리고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우리는 성경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께 좋은 가르침과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 우리의 기도 생활은 원만하게 실천된다. 특히 르클레르크는 “우리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과의 깊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사랑을 기초로 두고 인간적이고 내적인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장하여 잘 사용하여야 하며”, 이것이 수덕 생활의 관점에서 다가가 실천하는 기도 생활이라고 강조하였다.
영성생활에 큰 도움 준 영성신학자
결국, 르클레르크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은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과 은총의 이끄심에 따라 기도 생활을 실천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면서 교회와 함께 고백하는 기도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가톨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영성 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현대 영성신학자 르클레르크에 대해 불행하게도 한국 가톨릭 교회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르클레르크의 중요 저서들이 번역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편적인 가르침조차 간단하게 소개된 적도 없었다. 이번 기회가 그를 아는 좋은 기회였길 생각하면서 훗날 또 다른 기회를 간절히 바란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9) 토마스 베리 (상)
종교 · 과학 아우른 우주론으로 생태적 회복 추구
토마스 베리의 생애
토마스 베리는 1914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서 열세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33년에 예수 고난회에 들어간 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토마스라는 이름을 수도명으로 택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쟘바티스타 비코의 역사 이론에 대한 연구”로 미국 가톨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토마스 베리는 1948년에 북경의 보인(輔仁) 가톨릭대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득세하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시아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서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라틴어ㆍ이탈리아어ㆍ스페인어ㆍ독일어까지 섭렵했다.
베리는 시튼홀대학교, 세인트존스대학교, 포담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아시아 문화와 종교의 역사에 대해 가르쳤는데, 특히 힌두교ㆍ불교ㆍ유교ㆍ도교 전통을 강의했다. 베리는 1970년에 리버데일 종교연구센터를 설립했으며, 1975년에는 미국 테이야르 학회를 창립하여 1987년까지 학회 회장을 지냈다. 베리는 8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8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베리는 2009년 6월 1일에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그의 사상을 따르는 수도자들의 의해 설립된 그린마운틴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지구학자
토마스 베리의 학문적 여정은 동ㆍ서양 문명을 연구하는 문명사학자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점차로 인간 문명을 넘어 생태계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생태계 보전과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은 그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말년에 그는 스스로를 문명사학자 또는 신학자보다는 지구학자(geologian)라고 호칭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지구학자라는 표현은 지구가 지닌 종교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토마스 베리의 생태사상은 많은 신학자뿐 아니라 경제인ㆍ정치인ㆍ교육자ㆍ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저서 중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것들로는 「우주이야기」, 「지구의 꿈」, 「위대한 과업」,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그리스도교의 미래와 지구의 운명」이 있다.
세 번에 걸쳐 연재하는 이번 기획에서는 베리의 핵심 사상을 (상)새로운 우주론이 필요하다, (중)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 (하)자연 속에 깃든 신성회복이 그리스도교의 과제를 주제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생태계 파괴의 원인
토마스 베리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는 현대 산업문명의 후유증으로 야기된 생태계의 파괴다.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태계 파괴의 규모는 일찍이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것으로,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는 산업혁명 이후 발달한 과학과 기계 기술을 오용하여 인간의 탐욕을 위해 자연을 착취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리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방임하거나 조장하는 세계관이나 우주관에서 더 근원적인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고 인도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우주론이 없다는 데에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며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우주론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우주론은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해 주는 전체적 맥락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우주론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다. 적절한 우주론이 없다면,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위치와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다. 베리는 현대 인류에게 적합한 우주론이 없다는 것이 현대 생태계 파괴의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특별히 현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물 종의 멸종과 현대 과학의 통찰에서 얻은 진화론적 우주관은 현대인이 새로운 우주론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생물 종의 멸종
베리는 현재 지구에서 일어나는 생태적 파괴 중에서 생물 종들의 멸종에 특별한 관심을 둔다. 현대 인류는 1년에 수천 종의 생물 종을 멸종시키고 있고, 멸종 속도는 갈수록 가속화하는 상황이다. 베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멸종의 규모와 속도는 지구의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멸종 중의 하나라고 평가한다. 생물 종의 멸종을 초래하는 현대 인류의 능력은 지구 역사상 고생대를 끝내고 중생대를 시작한 힘이나, 중생대를 끝내고 신생대를 도입한 힘과 비견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베리는 신생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예측한 최초의 학자이며, 그의 이런 주장에 현재는 많은 생물학자도 동의하고 있다.
베리는 생물 종의 멸종과 다양성은 생물학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도 지닌다고 설명한다. 그는 생물 종의 멸종이 지니는 의미를 종교적 언어로 설명한다. 멸종은 영원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생물 종이 멸종한 다음에는 어떠한 힘도 그것을 되살릴 수가 없다. 어떤 하나의 생물 종의 멸종은 우주로부터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이라는 것이 베리의 통찰이다.
또한, 생물 종의 다양성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와 관계가 있다고 베리는 설명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따라, 베리는 생물종의 다양성을 우주의 완전성으로, 또 멸종을 그 완전성의 결핍으로 설명한다. 우주 안에는 왜 많은 생물 종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의 완전성은 하나가 결핍되면 다른 것이 보충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통하여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아퀴나스는 설명한다. 그리고 베리는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주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통찰한다. 그러므로 우주가 완전성과 아름다움을 잃는다면 종교적 체험의 기초가 사라지는 것이다. 때문에 자연의 완전성과 아름다움을 보전하는 것은 원초적 종교 체험의 장을 보전하는 일이다. 베리에게 있어서 우주는 단지 물질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한 계시가 현존하고 있는 세계이다.
진화하는 우주
새로운 우주론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근대를 지나오면서 변했기 때문이다. 신화적이고 정적이고 순환적인 우주론은 현대 과학과 기계 기술이 발견한 경험적이고 동적이고 진화론적인 우주론으로 대체되었다. 다시 말해 우주는 더 이상 정적인 우주(cosmos)가 아니라 진화하는 우주(cosmogenesis)이다.
현재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우주론이 병존하고 있다. 하나는 종교적 우주론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우주론이다. 그러나 종교적 우주론뿐 아니라 과학적 우주론도 현대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우주론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전통 종교들이 가르치는 우주론은 세계와 우주를 신성한 것으로 제시하기는 하지만 현대 과학에서 파악하는 우주의 발생론적인 과정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현대 과학의 경험적인 관찰로부터 유래하는 과학적 이론은 의미와 도덕적 영적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리는 현재 인류에게 필요한 우주론은 과학적 이론과 종교적 신화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그러한 우주론을 인류에게 제시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것의 하나로 베리는 1992년 물리학자 브라이언 스윔과 함께 「우주이야기」를 출판하였다. 베리가 제시하는 우주론은 우주 발생 과정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부터 유래하는 신빙성과 신앙 전통의 영성에 의하여 투과된 의미를 포함하는 새로운 이야기이며, 경험적 과학과 직관적 지혜가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엮여 있는 이야기이다.
종교와 과학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베리의 우주론은 인간 문명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파괴적 상황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문명사적으로 규명하면서 동시에 생태적 회복을 위해 인류가 해야 할 치료책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산업 문명을 극복하고 생태 문명으로 전환해야 하는 당위성과 방법론을 제공한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0) 토마스 베리 (중)
인류 생존 위해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문명 제시
문명의 발전단계
토마스 베리 생태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생태계 파괴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조망하면서 인류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문명 형태로 생태문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리는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부족/샤머니즘 시대, 종교/문화 시대, 과학/기계 기술 시대, 그리고 생태 시대로 분류한다.
인류 역사의 각 단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부족/샤머니즘 시대는 우주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이 발달한 시기이며, 이러한 경험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베리는 설명한다.
종교/문화 시대는 소위 인류 역사상 위대한 문명이 발전한 시기로 사회의 계층화, 세련된 종교의식, 논리 정연한 이론들과 영성을 수련하는 방법들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의 주된 특징은 인간의 관심이 우주의 현상세계보다는 초월적 절대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세기 말기에 서양을 중심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의 관심은 절대자에서 우주의 물리 세계로 전환하였고 그 결과로 과학과 기계 기술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과학과 기계 기술의 시대는 발달한 과학과 기계 기술을 통하여 인류 생활을 향상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지구 생태계를 대규모적이고 무차별하게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착취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이로써 인간과 지구 공동체와의 신비로운 유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과학과 기계 기술 시대 이후에 인류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시대로 베리는 생태문명을 제시한다. 생태문명은 인류 역사의 네 번째 단계이다.
최첨단 기술문명과 생태문명 간의 갈등
지구적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는 생태계 파괴 앞에서 인류에게 현재 두 가지 선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최첨단 기술문명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문명으로 가는 길이다. 최첨단 기술문명은 인간의 산업기술에 근거한 문명인 반면에, 생태문명은 지구의 자기 조직 과정인 지구 기술에 근거한 문명이다. 최첨단 기술문명은 거대 자본이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고 조작하는 문명 형태이고, 생태문명은 지역 공동체가 자연과 함께 존재하면서 함께 진화하는 문명 형태이다.
최첨단 기술문명과 생태문명은 그 사고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에 양자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20세기를 주도했던 문제가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정치 사회적 갈등이었다면, 21세기를 주도하는 문제는 자연을 계속 착취하려는 자본주의자들과 자연을 보전하려는 생태주의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다. 4대강 사업, 도롱뇽 소송, 밀양송전탑, 강정 해군기지 등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최첨단 기술문명과 생태문명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지구 생태계가 미래에도 지속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기술문명이 아니라 생태문명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베리는 주장한다.
생태문명 실현의 전제 조건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 의식의 근본적 변화와 지구적 차원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베리는 주장한다. 인간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네 가지 사회 체제, 즉 정치ㆍ경제ㆍ교육ㆍ종교가 그 기본 원리를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명중심주의로 바꿔야 한다. 인간중심주의로는 생태문명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문명의 정치, 경제, 교육, 종교는 인간의 이익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다른 존재들의 가치와 권리를 소홀히 함으로써 인류 문명과 지구 상의 생명을 보전하는 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네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는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첫째, 현대의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베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가 국가나 인간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비판하며,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새로운 정치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구는 지구 전체 기능 안에서만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를 부분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라들의 연합(The United Nations) 정도가 아니라 종들의 연합(The United Species)이 필요하다.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democracy)에서 생명주의(bio-cracy)로 변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유엔 총회에서 통과한 ‘자연을 위한 세계 헌장’은 새로운 정치적 법적 체계를 위해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헌장은 모든 형태의 생명은 유일하며 인간에게 유용함에 상관없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간은 지구의 기능을 지배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기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적 장치가 특별히 필요하다.
둘째, 현대의 경제 체계도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현대의 경제 체제는 자연 세계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사고방식이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베리는 주장한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연 세계의 엔트로피는 그 한계에 이를 것이고 현재의 경제 체제는 더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인류는 지구 경제학이 우선적이고 인간 경제학은 부차적이라는 새로운 경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구 경제학은 인간 경제학의 전제 조건이다. 지구 경제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떠한 인간 경제 프로그램에서도 최우선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구 경제가 건강하다면 인간 경제도 건강할 수 있지만, 지구 경제가 부도에 이른다면 인간의 경제도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현대의 교육 체제도 근본 원리가 변해야 한다. 사회의 지성적 체계인 대학은 새로운 세대에게 미래지향적 전망을 제공하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다. 그런데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에 빠져 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적 내용은 인간과 자연 세계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고양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현대 세계가 지닌 어려움의 깊은 요인이다. 현재 대학의 교육 내용은 학생들에게 자연 세계와 친밀히 지내도록 하는 역할이 아니라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고 있다고 베리는 비판한다. 생태문명 실현에 적합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우주 이야기에 근거한 통합적 교과과정이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넷째, 종교도 그 가르침의 강조점이 변해야 한다. 그동안 종교들은 자연 세계가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인 계시적 경험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소홀하였다고 비판한다. 특별히 그리스도교는 창조 세계에 깃든 계시를 소홀히 한 채 성경을 통한 계시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현대의 생태위기에 대하여 책임이 적지 않다고 베리는 지적한다.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종교는 자연이 단순히 경제적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결과 손길이 깃든 신성한 창조 세계임을 강조해서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종교는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현대세계에서 우리는 자살ㆍ살인ㆍ종족살해 등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생태계와 지구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윤리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생태계 파괴, 지구 파괴를 절대적 악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 원칙이 있어야 한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인간은 그 힘과 같은 정도로 책임감과 윤리 의식도 함양시켜야 한다.
현재의 생태 위기를 극복하고 인류가 지속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문명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토마스 베리 생태 사상의 핵심이다. 인류가 자연 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적절한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며, 그에 근거하여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종교의 근본적 원리가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명중심주의로 변해야 한다. 생태문명은 인류의 문명사적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진화된 문명 형태이다.
이런 이유로 베리는 현재의 생태계 파괴를 위기만이 아니라 인류와 지구를 위한 호기로 보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는 호기이기도 하다. 베리는 생태문명을 이루는 것이 우리 시대에 주어진 ‘위대한 과업’(The Great Work)이라고 선언한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1) 토마스 베리 (하)
자연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 되찾아 생태문명 추진
아퀴나스와 테이야르
토마스 베리의 신학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와 테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이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13세기 유럽에 새롭게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종합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의 신학적 고정 관념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퀴나스의 새로운 종합은, 중간에 갈등은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관 안에서 신앙을 되살리는 작업이었고 결국 중세 교회가 근대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과학인 진화론과의 종합을 시도한 테이야르의 새로운 종합 역시 신학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테이야르는 진화론적 과학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테이야르는 그가 살고 있는 두 세계의 분열에 관심이 있었다. 하나는 종교적 의미를 잃은 세속적이고 과학적인 세계와 다른 하나는 현대 인류와 소통하기를 실패한 그리스도교의 세계이다.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추구는 이 두 개의 세계를 통합하는 일이었다.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테이야르는 존재와 실체에 의존하는 창조론 대신에 되어감과 과정에 의존하는 진화론을 이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대한 테이야르의 재해석은 다윈의 진화론을 염두에 둔 해석이며, 그런 면에서 성서와 전통적 교리가 전제하는 정적인 우주관과는 다른 설명 방식이다. 테이야르의 이런 새로운 시도는,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13세기 아퀴나스가 했던 시도의 현대판이라고 할 것이다.
베리의 생태사상과 신학사상은 테이야르의 우주관과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주는 처음부터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우주 이야기와 인간 이야기는 한 이야기의 두 가지 면이라는 것, 구원 과정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창조과정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이다. 더 나아가 베리는 테이야르를 사도 바오로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의 하나로 평가한다. 이런 의미로 베리는 근본적으로 테이야르 계통의 사상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리는 생태적 관점에서 테이야르와 일정한 거리를 둔다. 베리는 테이야르가 인간 중심주의적 우주론에 근거한 진보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 태도를 지녔다고 비판한다.
역사적 추진력
베리는 현대의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에 필요한 것은 자연 안에 깃든 신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가르침을 회복하는 것과 그것에 근거해서 새로운 생태문명을 실현해 낼 수 있는 역사적 추진력이라고 지적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베리는 그리스도교는 이미 강력한 역사적 추진력을 지니고 있다고 진단한다.
- 2009년 선종한 토마스 베리 신부의 묘비.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베리 신부의 묘비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새겨져 있다.
베리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더욱 강한 역사적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교는 천년왕국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있는데 그것이 역사성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 어느 종교보다도 그리스도교가 가장 강력해진 이유이다. 역사적 변화보다는 원형적 경험에 주로 관심이 있는 아시아 종교들과 달리, 그리스도교의 강점은 완성의 시간에 이를 때까지 역사적 발전에 대하여 의식하고 있고 그것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추진력이 서양 역사를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시켜 온 힘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베리는 생태문명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도 그리스도교가 지닌 역사적 역동성이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죄와 원복(原福)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에 요청되는 것은 자연 안에 깃든 신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하느님의 초월성은 강조하였지만 내재성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자연 안에 깃든 신성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은 그동안 지나치게 구원 중심적인 영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도 바오로가 사용한 원죄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구원 중심의 영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원죄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내려 주셨다는 원복 개념도 있으며, 원복이 하느님께서 이 세계와 맺으신 더 근본적인 관계이다. 창조를 긍정하는 창조 중심의 영성이 회복할 때 창조세계에 깃든 신성을 회복할 수 있다.
종교 간 대화와 협력
그리스도교가 자연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되찾기 위해 베리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와 협력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자연이 지닌 신비,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로운 삶은 아시아 종교들 안에서 더 발전하였기에 그리스도교는 거기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아시아 종교들로부터 자연 세계의 신성함,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 모든 생명체에 대한 깊은 사랑, 대우주와 소우주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배워야 한다고 베리는 강조한다. 그리고 인디언 같은 원주민들의 토착 종교들로부터 땅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는 지구에 대한 인간의 깊은 유대를 배울 때 자연에 깃든 신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자연 속에 깃든 신성의 회복
우주 속에 깃든 신성을 체험할 때, 창조세계 안에는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그대로 새겨져 있고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연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배우는 첫 번째 학교이며 자연의 신비 속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득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하느님을 체험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연 속에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 갖기가 어려운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어린이들을 보면 자연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없다. 많은 어린이가 인위적인 환경에서만 지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이럴 경우 자연과의 직접 체험이 없어서 하느님 체험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베리는 걱정하고 있다. 자연 앞에서 느끼는 신비 체험은 종교 체험의 원형적 요소라고 할 것이며, 때문에 자연 보호는 종교인들의 첫 번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
생태신학 발전에 끼친 영향
베리는 일차적으로 문명사학자이며 생태사상가이지만, 그의 생태사상과 생태신학적 전망은 기존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이 그동안 고민해 왔던 신학적 주제들을 생태적 전망으로 확대해야 할 근거와 방향을 제공하고 있다.
우선, 전통적 신학 주제들을 생태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시도들이 전개되고 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범재신론 (panentheism)적으로 설명하면서 생태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성부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드러내지만 성자와 성령은 창조 세계 안에 깃든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의 초월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재를 깊이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기치 아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던 해방신학자들도 그 신학적 전망을 생태 문제로 확대하였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이 처음에는 생태적 관심은 제1세계에 속한 부유한 사람들의 한가한 관심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생태계 보전과 생태정의의 실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긴박한 주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환경파괴의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생태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가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여성신학자들도 생태신학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가부장제도가 여성 억압의 도구만이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 형태라는 것이 학문적으로 연구되면서 여성의 해방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해방을 동반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로즈메리 류터나 샐리 맥페이그의 저서들은 여성신학이 여성생태신학으로 심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업문명을 생태문명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생태문명에 대한 꿈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가 인간과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줄 수 있는 가르침을 회복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생태 위기를 극복하고 생태문명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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