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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여성시문학의 사적 고찰
1920년 한국현대여성시의 전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서론
우리의 한국현대시가 앞으로 몇 백 년 뒤에는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이 쓴 시라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한 숱한 시편들이 있음직한데 덮어두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여성시가 무시되고 있음을 확인한 이상, 한국현대여성시의 문학사적 접근은 그 당위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한국현대문학사는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정리되어 왔다. 그러나 남성학자들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정리된『현대문학사』에서 여류문학사는 그 명맥을 찾아볼 수 없고 스쳐 지나가는 문인들의 끝자리에 겨우 거명되고 있을 뿐이다. 백철. 이병기의『국문학전사』에는 여류문학의 수준이라는 항목에서 그 질의 얕음을 은근히 내비치며 여류라는 특성 때문에 문단에서 취급했다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다각도로 『중국부녀문학사』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정리, 연구되어 있음을 인지할 때 한국현대문학사에 있어서도 여류문학의 그 특성적 흐름을 한 맥으로 정리해 볼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근대로부터 한국여성문학의 전통적 수용을 잇는 한 방법으로서 시대별 여성시문학을 연구하여 당시의 여성시적 특성을 밝히는 것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개인적인 사상, 감정의 표현임과 동시에 그것이 자라나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의 예술적 가치라는 것도 알고 보면 작품이 지니는 사회적 의의다. 무관한 것이 아니며, 문학의 주제니 사상이니 하는 것도 대체로 작품에 나타난 작가가 작가군의 사회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문학 내용의 구체적 양상 역시 시대상이나 사회현상의 직접적인 투영이거나 굴절된 반사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삶과 그 방향을 현실인식과 역사성에 비추어 반영, 제시, 개발하는 방법으로서 여성문학은 한국문학 연구의 한 분야로서 연구 대상이 충분하다고 보겠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현대여성문학의 태동기인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꽃피기 시작한 현대여성시를 선행 연구된 논저를 참조하여 그 특성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가. 1920년 한국현대여성시의 전개
1920년대는 구시대의 전통과 새로운 사회개혁으로 문화, 정치, 경제 등의 갈등이 심해진 과도기적 상황이 일어났다. 3.1운동을 분기점으로 하여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운동은 여러 갈래로 전개되었다. 안창호의 준비론류의 온건론은 우선 민족역량의 배양을 절실한 과제로 인식하여 갖가지 활동을 펼쳤다. 그 하나는 민립대학 설치운동으로 대표되는 각급 교유기관의 설치와 국민 대다수의 교육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다른 하나는 각종 단체의 결성, 잡지나 일간지의 발행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활동이었다. 비록 3.1운동은 가시적으로는 실패한 운동이었으나 이를 계기로 응집되어 분출하기 시작한 민족적 역량과 저항운동은 정치․사회․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특히 문화적 저항운동은 앞서 말한 준비론을 바탕으로 하여 일정한 민족역량의 축적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조선』『동아 』두 일간지의 발행과『개벽』 등의 잡지 발간은 1920년대 우리 문학의 전개와 발전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백철. 조연현 두 분이 한결같이 지적한 바와 같이, 3.1운동 이후 우리 문학은 순문학운동으로 전환하면서 동인지의 속출과 작가층의 확대를 가져왔다. 곧 이광수류의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문학엔 문학 자체의 목적이 있음을 선언하면서『창조』『백조『폐허』 등을 중심으로 젊은 시인 작가들이 등장 하였던 것이다. 시의 경우 1915년 이후 활발하게 나타난 신시운동을 통하여 자유시형식이 꾸준히 모색되었고 1920년 이후에는 그 완전한 정착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1919년 이전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던 한시. 가사. 시조. 국문풍월. 창가. 신체시 등의 갈래가 서서히 재정리되면서 자유시 하나로 남게 된 사실을 뜻하는 것이었다. 특히 3.1운동 이후 등장한 신문. 잡지는 현저히 시에 대한 경사, 그것도 자유시에 대한 경사를 보여준다. 김용종 교수는 이같은 시의 경사를 당시 소설의 상대적 미숙, 전통적인 시 선호 경향, 신문․잡지 편집인들의 시적 취향, 당국의 사상통제에 의한 검열 통과의 용이함 등으로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이러한 시 경사는 위와 같은 원인 이외에도 시가 갈래의 속성으로 지니고 있는 파편성. 도구성 등을 암묵리에 인식한 소치일 것이다.
3.1운동 이후 시의 활발한 생산과 수용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첫째, 자유시로의 갈래 정착, 둘째, 신문. 잡지. 동인지 등을 통한 발표양식의 변화, 셋째, 담당층의 확산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자유시로의 갈래 정착은 3.1운동 직전까지 있었던 다양한 형태의 시가들이 서서히 시의 범주 밖으로 밀려나고 자유시만이 중심적인 형식으로 남게 된 현상을 말한다. 이는 앞선 시기에 있었던 중세적인 시관의 해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근대로의 전환에 따라 새로운 삶의 양식이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시가 형식이 모색되면서 종래의 시형태들이 활기를 잃게 된 것이다. 또 그 모색 과정에서 종래 시가의 여러 형식들이 나름대로의 변모를 추구했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새로운 역사적 갈래로서 자유시만이 남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발표양식의 변모는 신문. 잡지. 동인지 등을 중심으로 한 시의 발표로 바뀐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인쇄매체의 발달에 따라 작품발표는 인쇄된 것이라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진 결과이다. 아울러 저작권개념이 시인들에게 생겨나 종래 가명. 필명. 호 등으로 잡다하게 기명되던 현상이 불식되고 자기 이름을 반드시 밝히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요컨대 발표지면의 확대는 물론 저작권개념이 성립되어 시인의 이름 내지는 개성이 중시되게 된 것이다. 이는 조연현 교수가 전문적 시인의 출현으로 설명한 사실이기도 하다. 셋째, 담당층의 확산은 시의 생산과 수용이 모두 근대적 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애국계몽기로부터 1910년대에 걸쳐 시의 담당층은 전통적인 유학자에서부터 근대적 학교교육을 받은 이들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었으나, 이제는 후자에 속하는 시인과 독자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창조』『백조』『폐허』 등의 동인들이 모두 국내와 일본에서 근대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 전반적인 면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부녀자의 지위 향상의 문제가 대두 되었고 여성들의 해외 육학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으며 여성의 자유사상 도입은 생활의 실제와 문학 활동에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예에서 여성시인은 여성의 권리와 여성 해방의 가치를 들고 자유연애사상으로 기존의 전형적 가족 형태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순종과 예속을 여성의 미덕으로 삼았던 봉건적 구제도와 전근대적 사상이 갑오경장 이후 3.1운동을 기점으로 붕괴되기 시작할 때 세 여성들은 신학문에 접근하면서 여성의식이 싹트고 개혁의 신문화 활동에 앞장서고 문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이때에 남긴 시편들을 그 시대의 배경이나 한국 문확사적인 위치에서 대단한 실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은 신학문의 체계적 과정을 밟았고 그 시대적 배경에서는 어려운 일본 유학을 하였다. 유학생 모임을 통해 민족적 아픔과 인생을 노하고 동인지 활동에도 참여하여 새로운 문물에 접근되면서 전통적인 관명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시의 형태는 전통적인 율조의 틀을 깨기 시작하였고 구체적인 묘사와 서사시적인 형태를 가미하면서 자유시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귀국후 자기 실현을 위해 사회생활과 문학활동을 하면서 발표된 시가 20년대 개화의 여명기에 대표적인 여성시로 남아 있다.
김명순은 1920년대의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시인이다. 『생명의 과실(1925. 4. 5한성도서주식회사, 4. 6판 162)』이라는 창작 시집의 간행으로 한국 여성 문단사에 최초의 단독 시집을 낸 것은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시인 김명순의 문학적 절정은 20대를 전성기로 보고 30대에는 인간적 고뇌와 준비되지 않은 가난과 심리적 갈등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초기에는 외래 사조의 영향과 번역시를 통해 상징주의 탐미주의 표현주의의 경향을 보였으며 보수적 전통사회에 대한 젊은 여성의 고통과 비탄은 절규와 저항의 시로 표출되고 있다.
『내 가슴에』이 시에서는 1920년대의 신여성이 느껴야했던 한과 고통을 강열한 이미지로 심화 시키고 있으며『저주』에서는 사랑의 비판적 시각을 표면화 하고 있다. 『유리관 속으로』사회제도와 전통적 인습에 대한 울분과 한의 시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20년대의 시는 사회에 대한 저항과 좌절,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서정적 시적 표현에서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표현 기법으로 발전해 나갔다. 또 그의 시에서는 민요조의 서정이 있고 반복적 정형성이 있고 여성으로서의 한과 인간으로서 고뇌가 있고, 좌절과 비판적 저항이 있고, 일제에 대한 저항적 민족시의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나혜석은 1920년대에 근대적 여권시장과 사회제도개혁에 대한 논설을 학지광과 여자계에 발표하였는데 그때의 한국사회에서는 여권이나 여성해방을 위해 과감하게 논지를 피력한 것은 성과라고 판단된다. 나혜석은 논설가로 페미니스트로 자기 주장을 뚜렷하게 펼 수 있는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보였다. 나혜석이 발표한 글을 보면 시보다 산문의 양이 많다. 수적으로는 작지만 편편의 시가 리듬이 있고 여성적 이미지가 힘이 있다. 나혜석의 다양한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에서 시는 어떻게 표현 되었는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시 ‘인형의 집’을 매일신보(1921. 4.3)에 발표 했는데 이 시를 인간성 회복과 여성의 주권이 형상화 되면서 허물어지는 자아의 정립을 희구하고 있다.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 실현을 위한 자각의 시다. 나혜석의 시는 감상주의적 낭만에만, 빠져 있지 않고 강력한 자기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한 가정의 인형의 역할과 인고의 시간들이 자기에게 가져다 준 대가에 대해서 그는 질문하고 항의하면서 인생에 도전하는 시다. 특히 여성이기에 불평등한 가부장제 시회에서 여성의 자각을 적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폐허’ 2호에(1921)에 ‘냇물’과 ‘사’가 발표되었다. 첫사랑에서 인간 상실의 슬픔이 농축되어 시로 승화 시켰다. ‘냇물’에서는 인간의 고독과 독백을 색채화하고 형상화하여 냇물이 강으로 바다로 끊임없이 흐르는 물에서 인생을 음미하고 있다. 모래는 한 인간으로 은유하여 시로 승화시킨 ‘사’는 외롭고 절박한 인간의 고뇌를 새로운 도전의 적극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시 ‘냇물’에서 나혜석은 흐르는 물과 자기 삶의 상황과 인생의 문제를 결부하여 유유히 흐르다가 성난 물구비로 바쁜 듯 흐르는 냇물은 끊임없이 강으로 호수로 바다를 이루는데 자기 인생의 성취는 무엇인가 반문하고 자아 실현에 대한 회의를 엿볼 수 있다. 물의 색상변화와 정화에서 인간들의 심상을 은유한 표출로 정리했다.
시 ‘사’에서 모래알의 위치는 자기요 여성이며 만족일 수도 있으며 휘몰아치는 바람이다. 짓밟는 발은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남권이고 남의 나라를 침탈한 일제 일 수도 있다. 또한 자기 생에 대한 운명적인 어떤 흐름으로 애절한 사랑의 흔적을 허무로 느끼며, 잃어버린 민족의 힘 없고 형편 없음을 흩날리는 모래를 보면서 사유했으며 여성인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삶의 질곡에서 허탈함을 시에서 묘사했다. 그러면서도 여권 신장과 여성 각성, 그리고 자아실현과 인간적인 자각으로서 여성 자신을 찾는 시의 이미지에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자아완성을 위한 몸부림으로 나타난다.
‘인형의 집’ ‘노라’ 같은 시에서 여성 해방과 여권, 사회제도와 도덕의 모순에 도전 받았던 상황적 위기와 좌절의 늪에서 새로운 도전의 에너지를 창출하여 시를 통해 미학적으로 표출하는가 하면 심층적으로 고뇌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유럽 여행을 하면서 조국에 대한 인식과 여권신장에 대한 견해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자신의 사랑과 이혼의 역정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사유하며 재음미하면서 여성해방의 절실함을 시로 표현했다. 나혜석의 시에서는 또 자유주의 사상으로 얽매인 가정과 기존의 사회제도 인습된 도덕률에 도전했다. 노라는 여성이고자 했고 인간이 되고자 했으며 평등한 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끌어 가려는 강한 의지는 선구자 적이다. 감동적 순수의 추구와 삶의 승화로서의 시, 한 인간으로 순수한 감정의 가치추구를 시로 승화 시켰다. 그리고 화려했던 여행을, 개화된 문명을 읽히는 데 충분조건이었으며 그의 생애에서 애인의 죽음은 휴머니즘 사상을 일깨웠으며 이혼에 대한 관념과 도덕의 모순에 도전하여 여성권익에도 눈을 뜨게 했다.
나혜석의 시는 모두 5편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시의 편편에 시대적 감각이 서려 있고 부정에 대해 항거하고 속박에 대해 해방을 부르짖었다. 선각자적인 여성 해방론자로서 평등하고 긍정적인 삶을 갈파하고 자유주의적 자아실현을 갈망했다. 강인한 의지를 시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멋있는 페미니스트적 시이다. 순수한 인간의 감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나혜석은 그의 삶의 역정이 시를 창작하는데 한 차원 높여주는 자양이 되었다고 본다.
나혜석은 20년대 시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대부분 시문학으로 일관된 한국고전여류문학은 정한의 문학이며 현실을 추구하고 현실을 지향하는 우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각성으로 출발된 1920년대의 한국여성문학은 여성문인들에 의하여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사명감으로 문학을 그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하였으며 삶의 의미를 자유에 두었다. 감미로운 시가 있는가 하면 불의에 항거하여 울분을 토하는 현실비판의 저항시도 있고, 여성의 한을 잇는 전통적 서정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20년대라는 애매하고 기형적인 시대에 뿌리를 내린 그들의 문학은 제대로 방향조절이나 심화된 문학적 업적을 쌓기도 전에 인생의 종말을 고하였던 것이다.
김명순은 상징주의와 표현주의 시에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소설은 이광수와 김동인 시대의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김일엽은 자전적 고백형식으로 깨달음의 세계를 수필로 묘사하였으며,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나혜석은 여류화가로 알려진 여성선각자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시론과 세계여행의 기행문을 통하여 주장하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는 칼럼니스트의 기질을 보여준 작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20년대 여류시의 특성은 1919년 3.1운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과 울분, 그리고 감상적 낭만주의가 풍비하던 그 당시의 사조에 편승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여성의 고유한 정한의 전통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바탕으로 하는 허무의식과 비애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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