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파리에서 바욘을 거쳐 ‘프랑스 길’ 출발지인 생장피에드포르에 입성했다. ‘마침내’라는 말을 굳이 쓰는 데는 사연이 있어서다. 10년 전, 그러니까 2013년 9월 8일부터 33일 동안 890여 km를 걸은 건 내 인생에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 ‘카미노 병’에 걸렸다. 마치 히말라야에 한 번 다녀온 사람이 앓는 ‘히말라야 병’ 같은 것이었다. 다시 ‘카미노’를 걷겠다고 세 차례나 준비하다가 무산되었었다. 왕복 항공권까지 끊어 놓고 기다리는 중에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코로나19’라는 전염병까지 퍼져서 카미노는 꿈에서나 걸어야 했다. 그러니 ‘마침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파리에 도착해서는 하루를 더 묵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긴 줄을 서면서까지 모나리자를 만나 그녀의 잔잔한 미소를 마음에 담고 두려는 뜻이었다. 순례길을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10년 전에는 감당하기 힘든 짐을 걸머지고 걸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카미노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너무 가볍지 않게 걸어야 한다. 내 스스로 ‘카미노 원칙’을 정한 것은 그러한 뜻의 반영이다. 나의 카미노 7원칙 0 혼자 걷는다 0 말을 적게 한다 0 짐은 내가 지고, 숙소 예약을 하지 않는다 0 맛집을 찾지 않는다 0 매일 남을 위해 기도한다 0 일일 한 주제씩 묵상한다 0 일기를 쓴다(메모, 녹음, 영상) 순례길은 순례길다워야 한다. 천 년을 이어 온 이 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잖은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이어져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보존되고 더 좋은 길이 되길 바란다. 이 길을 사랑하고, 이 길을 걷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의 길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생장’에 도착하자마자 공립 알베르게-일명 55번 알베르게로 가서 스무 번째로 침대를 배정받았다. 순례자 여권이라는 ‘크레덴시알’은 출발 전 한국 순례자 협회에서 발급 받은 덕분에 순례자 사무실에 가서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 기차에서 내려 바로 알베르게로 향한 덕분에 경쟁이 심하다는 ‘55번 알베르게’를 차지했으니 일단 첫출발은 좋은 셈이다.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어놓고 성당에 가서 잠시 묵상 시간을 가졌다. 카미노는 그리움이 뭉친 길이다. 왜 다시 카미노를 걷고자 하는가. 10년 전 내 카미노의 간절한 기도와는 상관 없이 하늘의 별이 된 손자 시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건 기본이다. 지금도 몹쓸 병에 시달리는 동기생의 아들 00 군을 위해, 고교 친구 00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한다. 00 군은 조혈 모세포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스무 번도 넘게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랴. 00은 늘 가까이 지내던 고교 친구인데 몇 년 전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반복하는 바람에 면역력이 갓난아이처럼 약해져 외부 출타에 제한을 받는 등 고생을 하고 지낸다. 이렇듯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매일 길을 걸으며 기도하고 하늘의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생장’을 달구던 햇볕이 저녁 어스름에 이울기 시작한다. 그 옛날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할 때 넘었다는 피레네산맥 고갯길도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있다. 이제 침낭에 들어가 단잠을 자자.
첫댓글 고난의 시작?
프랑스 생장에도 알베르게가 있는 모양이네요~~
지금도 병마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석규동기님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 지길 소망합니다
생장에는 60여 명 수용하는 공립 알베르게가 하나 있고, 사설은 무척 많아요.
의미 있는 체험을 하는 장 동기생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좋은 결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이혁희 작가님 오랜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