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토해낼 자는 계시록 3:14-22
정상적인 음식물을 먹었는데 토해낼 때는 위장에 탈이 났을 때나, 위장에 문제가 없을 때는 음식물이 문제가 있을 때 입에서 토해냅니다. 또한 여름날에 미지근한 물은 입에서 뱉어버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히 16절에 입에서 토해 버린다는 말씀을 살펴 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지금의 튀르키예 내륙에 속한 도시로써,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였던 에베소에서 내륙 쪽으로 160km 정도 들어온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도시는 에베소에서 출발한 물자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한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사데와 마찬가지로 양모 산업의 중심지였고 무역의 요충지였던 만큼 금융업이 발달했습니다. 또 특이하게도 의학교가 있었으며 ‘브루기아 가루(Phrygian powder)’라고 불리던 안약으로 유명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에베소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때문에 무역이 발달했으며 양모와 금융업이 발달하여 그곳의 시민들이 부요하게 살았습니다. 외부의 핍박도 없고 어려움도 없어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환경에서 그들의 신앙은 육의 향락을 위한 기회로 삼고 기회주의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사데교회와 같이 책망만 있는데 라오디게아는 남은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의 말세에 있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창조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믿음이라 하시면서 중간지대를 버리라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입에서 토해 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자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리고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절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절“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우리 가운데는 교회 다니면서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만난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자신이 주님을 만난 줄로 압니다. 또한 성령을 받은 적도 없는데, 주변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리면서 성령을 받은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않았는데,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믿음에서 멀리 떨어졌는데, 자신은 멀리 떨어진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은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는데, 서서히 변하였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뜨겁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지근해졌다는 것은 과거에 뜨거웠다는 것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상태는 뜨거운 것이고. 뜨겁지 않고 식어가는 것을 성령께서 보시고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점점 자신과 혹은 환경과 타협하고 나태해집니다. 노력하지 않고, 힘쓰지 않고, 울지 않고, 애통해하지 않으며, 주님의 십자가를 끊임없이 묵상하지 않으면 나도 모른 채 시간이 흐르면서 미지근해집니다. 미지근한 것의 종착역은 차가워지는 것이며. 차가운 것은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반대로 뜨거운 것은 주님의 손에 붙들린 것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죽은 것은 아니지만, 죽어가는 상태이며. 곧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근한 상태는 위험한 것입니다.
차가운 상태는 자신이 차가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과 애초에 주님과 관계없는 자들은 자신이 예수와 상관없는 것을 압니다. 미지근한 상태는 이미 주님과 상관없지만, 자신은 여전히 주님과 건강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회복하기 어렵고.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차가운 사람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삭개오는 회개했지만, 바리새인은 회개하기보다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기 힘듭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뜨거운 초심의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면서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 수 있을까요?
감정(자아)은 내 편이기 때문에 감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아는 신앙의 적이므로,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변화가 없는 것은 바로 감정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로 진단할 수 있는 기준은 ‘말씀’입니다.
첫째는 열매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은 무화과 나무의 잎을 보지 않으시고, 열매를 보셨습니다. 보통의 경우 잎이 먼저 생기고 꽃이 피어 열매가 나옵니다. 또한 열매는 남아도 잎은 시들어 없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감나무를 보면 그렇습니다. 농부는 열매를 보려고 나무를 심으며. 열매가 없는 나무는 가지가 아무리 풍성해도 잘려서 불에 던져 태웁니다.
잎은 신앙 행위입니다. 모임에 참석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주님께서 잎을 보시는 것이 아니다. 잎을 통해 우리의 삶의 열매를 보기 찾으십니다.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열매이고 뜨거움입니다. 처음부터 뜨겁지 않습니다. 반드시 미지근함을 통과해야 뜨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열매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 잎을 주셨습니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거룩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입니다.
큰 사과, 작은 사과는 있을 수 있지만, 사과나무에서 배는 열리지 않습니다.
신앙을 평가할 때 종교적 예식으로 믿음을 보아서는 안 되고. 열매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사람은 육체의 열매를 맺는것입니다.
엡4:31-32절을 보면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언어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다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형제를 미워할 수 없고. 절대로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25:11절을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말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기 힘들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열매가 작을 수는 있어도, 열매가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행동을 살펴야 합니다.
성령이 열매를 맺듯이 육체도 열매를 맺습니다. 갈5:19-21절을 보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음란한 상태로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음란한 상태로 가면 회개하기 어렵고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죄의 고백이 회개가 아니고 뉘우침이 회개가 아니고 그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원에 올라가서 소리쳐 부르짖어 기도하고 나면 후련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대로 길을 바꾸지 않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벧후2:02-22절에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아멘
원수를 맺는 것도 육체의 열매이며.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는 것은 원수를 맺는 길이며.
분을 내는 것, 분열하는 것, 당을 짓는 것도 모두 육체의 열매인 것입니다.
마치려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결단하고 회개에 열심을 내어야 하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삶 속에서 믿음으로 이길 때 주님의 보좌에 영광스런 그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그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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