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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항일독립운동유적지 간도
옛 간도는 지금의 연변지방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약 1백만 명에 가까운 조선족이 살고 있다. 이곳은 중국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이기도 하다. 이는 미국에 형성된 한인타운이나 중앙아시아에 이주 당한 옛 소련에 산재해 있던 조선(고려)사람들의 마을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현재 중국의 통치하에 있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은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의 자치를 위해 국공 (중국 국민당-공산당)전쟁이 있어났을 때와 만주에서 빨치산 투쟁을 할 때 중국공산당과 함께 투쟁한 결과다. 1930년대 우리 독립운동 투사들이 만들었던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의 10대강령 제2조는 만주에 사는 조선인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길림성 연변 조선족의 자치는 중국공산당의 혜택이 아니라 중국 동북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중국공산혁명에 기여한 대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간도지역에 정착한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 전의 일이다. 요, 금, 원나라 시기에는 조선사람들이 납치되어 갔거나 강제로 이주 당한 사람들이 있었고, 병자호란(1836~1637년) 후에도 납치된 포로들이 팔려가서 중국에 정착한 흔적이 있다. 청조 말엽에 인삼을 캐거나 다른 경제적 목적으로 월경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청나라와 조선왕조는 이 지방을 봉금지역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을 맺은 후 약 200년가량 출입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들은 개인 또는 소수의 무리가 월경한 뒤 마을을 형성해 집단생활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종 6년(1869년)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은 양전관을 파견하여 전정(田政)을 설치하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게 지권(地券)을 교부하여 두만강을 건너 법정주민이 될 수 있도록 알선하였다. 1980년 회령부사 홍남주는 경진개척을 지도하여 회령대안에 100여 정보에 달하는 평야를 개간하고 집단월강이 이뤄졌다. 이런 조치는 북부지방의 민생고를 해결하려는 방책이었다. 정부가 1881년 봉금령을 해제하자 변경에 있는 조선인들은 대거 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흔히 만주지역을 부르는 ‘간도(間島)’라는 말이나 지명은 그때까지 중국에는 없었다. 간도라는 명칭은 조선 사람이 만든 지명으로, 봉금지대가 공식적으로 풀리기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올 때마다 두만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은 월강 경작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월강이나 만주에서의 철새농사를 주변에 알리지 않기 위해 두만강에 있는 섬, 즉 사이섬(간도)에 간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민속학적 어원의 타당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 이주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개척한 땅을 간도라 불렀다.간도는 만주의 연길, 화룡, 왕청, 훈춘(도문) 4현을 망라한 지역이며 여기에 백두산 북쪽의 안도와 돈화 3현을 합쳐 지금의 조선족자치주가 형성되었다. 북간도라 불리는 이곳에서 조선인의 개척이 서쪽으로 확산되면서 북간도 서쪽 백두산 서남쪽의 압록강 주변을 남만주 또는 서간도라고 불렀다. 간도의 동과 서를 구분해 동간도와 서간도라 불렀지만, 조선인이 개간한 이 지대를 포괄하여 일반적으로 간도라고 말한다.그런가 하면, ‘간도개척사’를 쓴 간도 출신 윤화수의 아들 윤정희 는 1881년 정부에서 임명한 양전관이 토지대장과 야초(野草-지세명기장)를 작성하여 ‘간도야초(間島野草)’라는 제목으로 제출했다고 해서 이것이 간도이름의 근원이라고 하였으나 그 이전부터 간도는 사용되고 있었다. 이 당시 이주한 한인 개척자들은 수만호에 달하였으나 중국 사람들은 수백 호에 지나지 않았고 1919년에는 한인 25만 명이 넘는 숫자에 중국 사람들은 불과 8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만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한말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이 구국운동으로 전개되면서 간도지역으로 애국지사들의 망명과 함께 간도의 독립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을 3시기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시기: 1895년~1921년
만주에 망명촌을 건설하고 독립군기지 개척과 계몽운동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다.
1906년 이상설은 만주 최초의 근대식 민족교육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는데 그 전통이 규암 김약연의 명동학교로 발전하는 등 이러한 근대식 민족학교는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1910년에는 정재면 을 중심으로 한 명동학교, 계봉우의 광성학교, 남공신의 창동학교가 간민교육회의 민족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교육과 함께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조직들이 만들어지는데 이상룡,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서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연합한 대한 독립군 등이 있었다.
제2시기:1921년~1933년
러시아에서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을 겪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 독립전선을 개편하는 가운데 참의부, 정위부, 신민부의 3부로 활동하다가 한족총연합회와 국민부로 개편되고 한족총연합회는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북만주와 동만주에서,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만들어 남만주에서 활동하였다. 만주국에 대해서는 민족진영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 사회주의진영의 항일유격대와 하나가 되어 중국구국군대와 연합작전으로 항일운동을 폈는데 1933년 한국독립군은 중국관내로 이동하고 항일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제3시기 1933년~1945년
1932년부터 3년 4개월 지속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좌경적 오류인 반민생단투쟁으로 동북인민혁명군 내 조선인들이 큰 피해를 입어 독립운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 뒤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새롭게 항일독립운동에 매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용정기원우물
우리 민족이 처음 용정에 이주하여 판 우물. 이곳에는 <용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서있다. 1879년 전후에 장인석, 박인언 두 농가가 육도구 부근(지금의 용정)에서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 때 우물터를 발견하였다. 음료수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근의 한족 농민들과 함께 우물을 잘 정리하고 용두레를 설치하여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시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육도구를 용정이라고 했다. 1934년에 이 지명기원의 우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물을 보수하고, 주위에 돌기둥을 쌓고, 돌 비석을 세우고, 비술나무도 한 그루 세우고 "용정지명기원의 우물"이라고 글씨를 새겨 비를 세웠다. 지금도 한 그루의 비술나무는 우물가에 있다.
. 간도 일본 총영사관
용정시 육도하로 869번지, 용정시 인민정부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간도 일본 총령사관은 원래의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취소하고 세운 외교기관의 허울을 쓴 침략기구로 항일무장투쟁을 탄압하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수뇌부였다.총영사관은 용정에 분관들은 국자가(지금의 연길), 투도구, 배초구, 훈춘 등지에 설치되었다. 총영사관은 1909년 11월 2일 용정에 설치되었는데 원래의 건물은 2차례의 화재로 불타고 1926년 지금의 자리에 준공되었다. 인민정부청사 뒤편 지하실에는 우리민족을 고문한 <일제침략죄증실>이 있다. 미리 예약을 해야 관람 할 수 있다.
대성중학
1921년 7월 11일 만주 길림성 용정에 세워진 민족학교. 대성유교 공교회에서 세운 학교. 대성유교의 석호준과 청림교의 임창세가 중학교 건립을 계획하고, 대성유교 공교회의 회원인 강훈 등이 연길도윤 도빈의 허락 하에 용정촌 제4구에 2층 벽돌목조건물로 교사를 짓고 1921년 7월 11일에 정식으로 대성중학교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대성중학교는 점차 한인공산주의자들이 학교의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수많은 항일공산주의자들이 배출하였다. 옛 건물은 1996년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역사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항일운동과 관계되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윤동주기념관> 코너가 설립되어 그의 항일운동과 순수했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 그 옆에는 새로 지은 <이상설역사기념관>도 있다. 이 학교는 광명중학, 광명여중, 명신여중, 동흥중학, 은진중학, 대성중학을 통합하여 현재의 이름인 용정중학이 되었다.
서전서숙
1906년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한 만주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만주지역 교육기관 설치 기여했다. 1906 년 만주 용정에서 이상설. 여준. 정순만. 이동녕 등이 서전평야의 이름을 따 설립. 숙장 이상설, 운영 이동녕, 정순만 등 교사 이상설, 여준, 황달영, 김우용 등이 철저한 항일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4월 이상설 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된 것을 계기로 재정난과 일제의 감시와 탄압 등으로 폐교되었다.1년 미만의 짧은 역사임에도 만주지역에 수많은 신식 민족교육 기관이 설립되는데 영향을 줌. 건물은 없고, 위치는 길림성 용정시 용정실험소학교의 운동장으로 비정된다. 현재 용정실험소학 교정에는 1995년 용정항일역사연구회에서 세운 "1906년 4월 반일지사 이상설 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라는 내용의 서전서숙기념비가 서 있다.
제창병원과 은진중학 옛터
제창병원은 용정지역 기독교 독립운동의 본산 1914 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 병원 지하실은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된 곳이며, 3.13만세운동 당시에는 일본군의 저격으로 쓰러진 애국동포 시체안치소 및 부상자 치료소로도 이용되었다. 한편 이 병원에서는 실비진료와 더불어 빈곤자에 대해서는 무료치료를 실시하였으며, 순회진료도 시행하여 오지에 있는 한인촌을 찾아다니면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지금의 용정시 제4중학이 제창병원과 은진중학이 있던 캐나다 조계지로 추정된다. 은진중학은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스쿨로, 위만주국이 건국되기까지는 일본 헌병이나 중국 관헌들이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따라서 우리 한인들은 이 언덕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교문 입구의 오른쪽 언덕이 제창병원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고 학교 운동장 끝 축구골대 옆에는 은진중학 옛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 규암 김약연이 명동학교를 떠나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있었고 윤동주도 외삼촌인 김약연을 따라 은진중학을 다녔다.
3,13 만세운동지(서전대야 터)
1919년 3월 13일 북간도에서 최초로 3.1만세시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3월 13일 서전대야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대회 부회장 배형식 목사의 개회선언에 이어 대회장 김영학이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였다. 이어서 용정시내에서 시위행진이 있었다. 현재 용정시 제1유치원에 서전대야유적지라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일송정
용정에 망명하였던 민족운동가들이 자주 올랐던 비암산 위에 있는 멀리서 보면 정자 같은 한 그루의 소나무를 말한다. 그때의 소나무는 일제에 의해 없어지고 지금은 후계목이 서있다. ‘일송정’은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윤해영, 조두남 모두 친일혐의가 있어 옛날에 세웠던 선구자노래비의 글씨는 지워졌다. 선구자노래의 모델로 알려진 일송 김동삼(1878~1937)은 경북 안동출신으로 국내에서 애국계몽을 하다 1911년 국권피탈 직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등과 함께 경학사를 설립하고 유명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군의 맹장이다.
명동촌과 명동학교유적지
함경북도 회령과 종성의 문씨, 남씨, 김씨, 윤씨, 송씨 등 다섯 가문은 조선에 대한 열강의 침탈과 위정자의 무능과 부패, 억압과 착취를 피해 1899년 2월18일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명동촌을 건설하여 터전을 일구었다. 명동촌에는 명동학교, 시인 윤동주의 생가, 명동교회, 김약연목사 기념비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명동교회>
독립운동의 근거지이며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교회
1909년 5, 6월경 명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의 설립에는 국내에서 온 정재면의 공헌이 컸다. 명동교회는 처음에는 8칸의 집을 사서 방을 터 사용하였다. 명동교회는 길선주 목사, 김익두 부흥사를 초청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주일 평균 예배 참석자는 6~70명이 넘었고, 이동휘 전도사의 부흥회 때에는 인근 수백리 에서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산혁명이후 정미소로 사용되면서 그 본 모습을 잃고 폐허가 된 것을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단층 70여 평 크기의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김약연목사 기념비>
북간도에서 활동한 기독교계 민족운동가 김약연의 기념비
1942년 건립되어 문화혁명 때 일부 파손되었다가 최근 복원. 규암 김약연(1868~1942)은 1908년에 명동서숙을 설립하였으며, 1912년 북간도 국민회 회장, 1917년 간민교육회 회장, 1919년 대한독립기성총회 의사부원 등을 역임. 북간도와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일제로부터 한국독립운동의 "수령"으로 지목되어 체포의 표적이 되었다. 만년 캐나다 선교회에서 용정에 설립한 은진중학교의이사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61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명동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다가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75세로 별세했다. 최근에 복원되었다.
<명동학교>
북간도 지역의 근대민족주의 교육의 본산으로 1908 년 4월 27일 김약연에 의해서 명동촌에 설립된 민족교육기관. 유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규얌제를 설립하여 교육을 해오던 김약연이 이상설의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하여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 교육이념을 "독립정신"의 함양과 신지식의 보급에 두고, 이를 위하여 역사 황의돈, 윤리 박태항, 한글 장지영, 체육․군사에 김홍일 외에 여준, 최기학, 송창의, 박태식, 김철, 박경철, 김성환, 김근승 등의 교사가 있었다. 설립 2년 만에 여학교까지 병설하고 명동중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 출신의 많은 인물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5만엔 탈취 사건 기념비
1920년 철혈광복단이 일본은행의 송금마차로부터 군자금을 탈취한 곳
1919년 겨울, 임국정과 최봉설 등은 철혈광복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마련에 헌신하던 중 회령에서 용정으로 조선은행권 15만엔이 우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습격, 군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1920년 1월 4일 동랑어구의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현금 수송마차를 습격하여 15만원의 현금을 확보하였다. 15만엔을 소지한 이들은 국자가, 와룡동, 의란구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 중 최봉설을 제외하고는 체포되었다. 현재 탈취십오만엔사건 기념비가 있다. 그 당시 총 한자루 가격은 10원정도였다고 한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의 배경이 되었던 사건이다.
. 3.13반일의사 릉
북간도 용정 지역 3.1운동 당시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묘
1919년 3월 13일 만주 용정의 서전 벌판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항의 시위에서 공덕 선생 등 12명이 순국하였다. 이에 용정에서 최근갑이 3.13 순국열사 13인의 합동묘소를 찾아냈다. 이 묘역은 근래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오다가 용정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1990년에 목비를 세우고 부근을 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허청리(현재 합성리)에 소재한 13의사의 묘소에서 해마다 성대한 추모제를 거행, 1993년 5월에는 화강암으로 3.13반일 의사능이라고 새긴 묘비를 세웠고, 1996년에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동 묘역을 성역화하였다. 기념비를 중앙에 두고 전열에 9기, 후열에 4기를 배열하였다.
윤동주 묘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생체실험)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시인 윤동주 묘는 용정 지신진 북산 동산교회묘지에 있다. 3,13반일의사릉에서 1km쯤 올라간 능선 왼쪽 아래에 있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뒤에(1945년 3월 7일) 옥사한 고종사촌이자 친구인 송몽규의 묘는 20m 왼쪽에 이장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현석칠목사(감리교)의 묘도 있다. 같이 참배하자.
첫댓글 간도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승화한 곳이다.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