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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의 영역에서 속출한 빗살무늬
발해만 유역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가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73년 신러유적에서 BC 5300
~BC 4400년으로 편년되는 지(之)자형 토기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76년 황허 하류인 허베이(河北)성 우안(武安)의 츠산(磁山)유적과 77년 페이리강(裴李崗) 유적에서
잇달아 之자와 人자 토기가 확인됐다. 연대는 BC 6000~BC 5500년이었다.
이런 형태의 토기들은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1979년)와 링위안(凌源)현 뉴허량
유적(1984·85년)에서도 잇달아 확인됐다.
이런 가운데 80년대 초반 동이의 본향인 차하이-싱룽와 마을에서 8000년 전 사람들이 새긴 정교한 빗살
무늬 토기들이 확인되자 중국 학계도 깜짝 놀란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랴오둥 반도 최남단 섬인 샤오주산(小珠山)과 다롄(大連)시 뤼순(旅順)의 궈자춘(郭家村)에서도 之자, 人
자형 토기들이 속출했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
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人)자형은 한반도 압록강·대동강·재령강·한강유역은 물론 두만강과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 등 전국적
으로 분포되고 있어요. 지(之)자형은 평북 의주읍 미송리 동굴유적, 경남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유적에서 보이고…. 빗점무늬는 대동강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의 지탑리 유적, 한강유역의 암사동 유적,
동북부의 서포항 유적 등에서 확인됩니다.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발해연안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형구 교수)
또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결(옥귀고리)이 나온 강원 고성 문암리(BC 6000년)와, 양양 오산리(BC
5000년)에서는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인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문암리 유적을 발굴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차하이-싱룽와에서 나온 유물을 본 결과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문암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면서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았다.
8000년 예술의 정수
또하나 강조할 부분은 빗살무늬 토기의 예술성. 이형구 교수는 빗살무늬 토기를 “8000년 전 예술의 정수”
라고 극찬한다.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요즘으로 치면 화폭으로 여기고 빼어난 예술감각을 자랑했어요.
크게 상·중·하로 화폭(토기표면)을 나눠 3~7단까지 구성하여 갖가지 문양을 새겼어요. 상부는 빗금,
배부분은 갈지자, 밑바닥은 선무늬…. 뭐 이런 식으로 예술적인 욕구를 정교하게 표출한 거죠.”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토기 하나에 눌러찍은 압인무늬와 빗살무늬와 덧띠무늬를 동시에
표현했으며, 무늬 자체도 직선 혹은 활무늬, 之자무늬, 마름모무늬, 교차무늬, 그물무늬, 번개무늬, 꽃무늬
등 매우 다채롭다”고 극찬했다. 이런 예술적 감수성은 한반도 출토 토기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
차하이-싱룽와에서 확인된 계획도시를 방불케 하는 주거지와 빼어난 예술감각을 표현한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신앙의 상징인 용과 옥결까지….
저명한 중국 고고학자인 쑤빙치가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문명의 시작을 알린 표지이며, 중화문명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던 이유다.
한반도를 극복하라
7월27일 저녁 6시20분. 싱룽와를 떠나는 기자는 동이의 본향을 짙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
에 빠졌다.
이제. 우리 역사를 살필 때 ‘한반도 신석기 문화’ ‘한반도 청동기 문화’라 해서 ‘한반도’라는 좁은 틀로
가두면 안되지 않을까.
올해 초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관련된 개정 국사교과서 논쟁도 역시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것은 아닐까.
8000년 전 동이는 결코 한반도라는 좁은 영역에서만 살지 않았을 것인데…. 발해연안에서 출발해서
황허유역을 포함한 산둥반도,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까지를 누볐을 것인데….
〈싱룽와|이기환 선임기자〉
초학기의 발해와 발제해
《習遺記》중 顓頊
帝顓頊高陽氏,黃帝孫,昌意之子。昌意出河濱,遇黑龍負玄玉圖。時有一老叟謂昌意云:“生子必葉水德
而王。”至十年,顓頊生,手有文如龍,亦有玉圖之像。其夜昌意仰視天,北辰下,化為老叟。及顓頊居位,
奇祥眾祉,莫不總集,不稟正朔者,越山航海而皆至也。帝乃揖四方之靈,群後執珪以禮,百辟各有班序。
受文德者,錫以鐘磬;受武德者,錫以干戈。有浮金之鐘,沉明之磬,以羽毛拂之,則聲振百里。石浮於水
上,如萍藻之輕,取以為磬,不加磨琢。及朝萬國之時,及奏含英之樂,其音清密,落雲間之羽,鯨鯢游湧,
海水恬波。有曳影之劍,騰空而舒,若四方有兵,此劍則飛起指其方,則剋伐;未用之時,常於匣裡如龍虎
之吟。
溟海之北,有勃鞮之國。人皆衣羽毛,無翼而飛,日中無影,壽千歲。食以黑河水藻,飲以陰山桂脂。憑風
而翔,乘波而至。中國氣暄,羽毛之衣,稍稍自落。帝乃更以文豹為飾。獻黑玉之環,色如淳漆。貢玄駒千
匹。帝以駕鐵輪,騁勞殊鄉絕域。其人依風泛黑河以旋其國也。
闇河之北,有紫桂成林,其實如棗,群仙餌焉。韓終採藥四言詩曰:“闇河之桂,實大如棗。得而食之,
後天而老。”
《조선지》...西曰黃海 其西抵大海 古朝鮮 馬韓舊地 後爲高句麗所有 唐高宗滅高句麗不能守其地 新羅遂幷
地 及季世爲 弓裔所據 高麗始祖盡有其地
*《조선지》에서 고조선위치에 대한 대목을 이와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기록들은 모두 한반도를 위주로 한 기록이지만 뒤에 나오는 이 대목은 황해와 발해의 서쪽끝까지를
고조선과 마한의 구지라고 한것입니다.
이대목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려면 《산해경》과 《조선부》《초학기》등에서 잘설명하고 있습니다.
北接慈悲<嶺名>, 南臨渤澥。在前元則劃此爲界,
*<북쪽으로는 자비령과 접하고 남쪽으로 발해(渤澥)에
다다른다.이곳이 전 원나라와 경계선이었다.>
이대목은 한반도의 평양성이 원나라시대 동령로나 원의 총관부가 될 수 없다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만약 자비령의 위치를 황해도와 평안도 경게선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남쪽으로 발해에 임한다는 설명이
잘못된것이지요. 평양의 남쪽으로 바다가 있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령의 기준을 요동반도의 천산산맥으로 한다면 남으로 발해에 다다른다는 <남임 발해> 가
가능합니다.渤澥란 발해(渤海)의 구명이라고 사전은 설명하고습니다.
그렇다면 《초학기》에서 말하는 발해(渤澥)는 옛날 중국의 동해로
공칭되던 삼신산지역을 말합니다.
《산해경》에서 군자국.불사국으로 부르던 바로 그곳이지요.
《조선부(朝鮮賦)》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이대목은 당시 황해도가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때 황해도에 대방이 있었다는 기록이 이해가 되고 그 대방의 동남쪽 대해에 왜(倭)가 있다고 한
대목을 이해할 수 있는것입니다.
"넓은바다의 파도가 바라다 보이는 바다를 설명하는
주석에서 그땅은 황해도에 속하는데 대개 산들의
남쪽으로 넓은 바다가 펼처져 있다."
*한반도의 황해도와는 근본적으로 방향이 다른
설명입니다.
<望波濤於海上識洪量之恢恢> 주석:地屬黃海道 其址皆山其南際海>
"成佛<關名>雄關, 棄石磊磊。北接慈悲<嶺名>, 南臨渤澥。在前元則劃此爲界, 至國朝乃示以無外也。
<成佛嶺北枕山, 南枕海。
*《조선부(朝鮮賦)》의 이대목은 성불령은 돌로
쌓아올린 웅장한 관문이요 위치는 북쪽으로 자비령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봉황성밖에 없습니다.
봉황성이 국경의 관문으로서 역활을 하였다는 사실은 알려진 사실이고 축성은 석축으로 하였다는 사실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북쪽으로 요양과 심양근처에 이르면 단단대령 즉 자비령이 연결되지요.그리고 남쪽으로 책성과 바다에
연결됩니다.봉황성과 단단대령의 이름이 왜 성불웅관과 자비령으로 바뀌었는지는 아직도 찾는중입니다.
《各省沿海口隘全圖》
<中華沿海形勢
從京師天津 東向 遼海 鐵山 黃城 皮島 外對朝鮮. 左延 東北山海關歷 海.復.金等州 轉旅順
口 直抵鴨綠江
與高麗界.>
*《각성연해구애전도》에 의하면 천진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요해.철산.황성.피도밖으로 조선과 마주하고,
좌측으로 연하여 동북쪽으로 산해관을 거쳐 해성.복주.금주등 주를 돌아 여순구에서 압록강까지를 고려계
라고 하였다면 이곳은 바로 요동반도의 남쪽이 고려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요동반도가 신라의 강역을 물려받은 고려영토였다는 사실을 부정할려면 타당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적지않은 지도에 동고려와 서고려성이 요동반도의 남쪽에 그려진걸 보고 그것은 아마 고구려성이었을것
이라고 잘못 해명한 글이 이 역사교실 826번에 있습니다.
고려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않은 심정에서 나온 소견이겠지요.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요동반도의 서남쪽 해변이 고려였다고 한 사료가 중국측의 사료에서 발견됩니다.
그런데 이를 뒷바침하는 한국측의 사료를 왕조실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 88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2월 18일(신묘)
2번째기사
우의정 신개가 함길·평안 양도의 부방, 입보 등의 폐단과 비변책에 대해 상언하다
*이 글의 내용에는
고려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의 길이가 수천리에 달하고 걸어서 가려면 3개월이 걸린다고 하네요.그리고 지명중에 대련을 영해로
표시한 대목도 보입니다.이 성은 석축으로 쌓았으며 폭과높이가 25척으로 대단한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문]
謹按《高麗史》, 德宗命平章柳韶, 創置北境關防, 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綠江入海處,
東跨威遠、興化、
靜州、寧海、寧朔、雲州、安水、靑塞、平虜、寧遠、定戎、朔州等十三城, 東傳于海, 延袤數千里, 以石爲
城, 高二十五尺, 廣如之。 首尾凡三朔程。 自是東西蕃賊, 不敢窺邊。 至文宗時, 爭來款塞, 願置州縣, 屬
籍偏戶者, 殆近萬人。 今中朝亦自山海衛至遼東數千里之地, 鑿塹築堡樹木, 北胡不敢有窺覦之心, 而無入
保騷擾, 閭閻撲地, 牛羊布野。 乞依中朝與高麗防胡之策, 自義州至慶源, 起築長城, 則可爲萬歲之利矣。
[번역문]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오니, 덕종(德宗)이 평장(平章)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
(北境)의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서해(西海) 물가 · 예전 국내성(國內城) 지경의 압록강이 해
(海)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삭(寧朔)·
운주(雲州)·안수(安水)·청새(靑塞)·평노(平虜)·영원(寧遠)·정융(定戎)·삭주(朔州) 등 13성에 걸쳐있으며,
동(東)으로 해(海)에 달하기까지 길이가 수천리(數千里)에 이르며 돌로 성을 쌓았는데, (장성) 성벽의
높이가 25척이요, 성벽의 폭도 그와 같습니다。
무릇 장성의 처음부터 끝나는 곳까지 가려면 3달이나 걸렸습니다.
이로부터, 동서의 번적(蕃賊:오랑캐 도적)들이 감히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다투어 와서 변경의 요새에 이르러 주(州)나 현(縣)을 설치해주기를 청원하
였고 국적에 붙여 민호로 편입된 자가 거의 1만 명에 가까웠사옵니다。
오늘날은 중조(中朝)에서도 산해위(山海衛)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는 수천리의 북방에 참호를 파고
보(堡)를 쌓으며 나무를 심어서 북호(北胡)가 감히 엿볼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입보하는 소요가
없어져 여염집이 땅에 덮였고 소와 양이 들에 널려 있사옵니다。
중조(中朝)과 고려(高麗)에서 오랑캐를 방비하는 정책에 따르시고, 의주(義州)로부터 경원(慶源)에 이르는
사이에다 장성(長城)을 쌓는다면 곧, 가히 만세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덕종(德宗) : 재위 4년,
1031년~1034년 / 현종(顯宗) : 재위 22년, 1009년~1031년 / 강감찬(姜邯贊) :
생몰년 948년~1031년
관방(關防) : 변경에 세우는 요새. 연무(延袤) : (종횡으로 뻗은) 길이
*한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왕조실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용되었던 《고려사》는 왕조실록이후에 왜곡된것으로 추정됩니다.그 핵심내용은 성의 길이가 수천리
라는 대목과 성의 끝에서 끝까지 갈려면 3개월이 걸린다는 내용이 빠져있고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려면
천여리라고 바꾸었습니다.
高麗史 卷八十二 志 卷第三十六
兵 二 城堡
(德宗)
二年 命平章事 柳韶, 創置北境關防. 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 鴨綠江入海處,
東跨威遠·興化·靜州·
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三城, 抵耀德·靜邊·和州等三城, 東傅于海,
延袤千餘里,
以石爲城, 高厚, 各二十五尺.
[고려사 번역문]
고려사(高麗史) 권(卷) 八十二 지(志) 권제(卷第)
三十六 병지(兵誌) 二 / 성보(城堡)
덕종(德宗) 2년(1032년),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국경에 관방(關防)을 세우게
하였다.
서해(西海) 물가(濱) · 옛 국내성(國內城)경계인 압록강(鴨綠江) 입해처(入海處)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
(淸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의 13성(城)에 걸쳐 뻗어 있으며,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등의 3성(城)에
이르러서는 동쪽으로 해(海)에 달할때까지 길이가
천여리에 이른다.석축으로 장성을 쌓았으며 성벽의 높이와 너비(두께)는 각각
25척이었다.
덕종(德宗) : 재위 4년, 1031년~1034년 / 현종(顯宗) : 재위 22년, 1009년~1031년
/ 강감찬(姜邯贊) :
생몰년 948년~1031년 . 관방(關防) : 변경에 세우는 요새
부우(傅于) : ~에 육박하다. ~에 닿다. ~에 도달하다. 연무(延袤) : (종횡으로 뻗은) 길이
《各省沿海口隘全圖》
<中華沿海形勢 從京師天津 東向 遼海 鐵山 黃城 皮島 外對朝鮮. 左延
東北山海關歷 海.復.金等州 轉旅順
口 直抵鴨綠江 與高麗界.>(원문중에서)
*《각성연해구애전도》에 의하면 천진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요해.철산.황성.피도밖으로 조선과 마주하고,
좌측으로 연하여 동북쪽으로 산해관을 거쳐 해성.복주.금주등 주를 돌아 여순구에서 압록강까지를 고려계
라고 하였다면 이곳은 바로 요동반도의 남쪽이 고려땅이란 말입니다.따라서 요동반도가 신라의 강역을
물려받은 고려영토였다는 사실을 부정할려면
타당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지도에 기록된 대만의 백화문(白話文)은 원문이라고 소개한 위의 기록과는 상이한 내용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白話文
中華沿海的形勢,從京師天津開始,東邊面向遼海、鐵山、黃城、皮島,外測面
對朝鮮,
左側沿著東北山海關可至海、復,金等州、轉旅順口可直抵鴨綠江與朝鮮邊界,從天津右側延伸至東南爲山東
之利津、??登州,可和旅順隔海對峙.東側爲皮島,西邊爲兩京.從廟島可直連旅順,航行里程五百五十里,如遇順
風一日卽可抵..登州突出於東海,位於成山後方,因此欲往盛京,天津的船,均以成山故爲地標.
從成山轉向往,可晴海,大嵩,萊陽,鰲山,靈山,一直到江南海州,一路均平洋無險,?就是山東之西測海路
무엇이
다른가요?산해관으로부터 해주,복주,금주.여순을 돌아 바로 압록강까지를 고려계가 아니라 조선
변계라고 하고있는것입니다.
이때는 요동반도 또한 조선이었다는 말입니다.같은 한개의 지도를 설명하는 과정에 두개의 다른설명을
올바로 해독하는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실증]단군의 성씨는 고양(高陽)으로 고씨의 시조였다.
중국학자들과 한국학자들의 단기(檀紀)에 대한 이견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신화로 취급하는 《삼국유사》의 조선 건국년도를 중국의 사학계에서는 인정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7년도에 산동반도의 창락에서 발견된 고대문자는 4.5천년전에 동이민족에 의해서 만들어
졌음이 전문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당시 창락지역은 조선의 영지였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들어나고 있어 단군조선이 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것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존재를 기록하였던 《산해경》은 한층 신빙성이 굳어진다.
뿐만아니라 단기의 기년을 확인하여 인증한 동작빈의 《중한문화론집》은 출판년도인 1955년을 기하여
단기4288년이라는 기원전 2333년 건국설을 지지하고 있다.
한국의 사학계가 주장하는 조선의 건국년도를 기원전 7세기라고 한다면 단군시대의 1600여년이 날아가고
기자가 동래한 이후 500여년의 역사가 날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남긴 수없이 많은 업적을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단기로 현재의 연수를 계산함에는 자연히 추산이 용이해진다. 민국 3년에 의거하면 상무출판의 세계대사
년표에 중국기년을 열거한 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요 원년은 갑진이고 25년은 무진인데 의당 서력기원전
2333년이며 올해 1955년을 더 하면 합 4288의 숫자가 된다 .>
동작빈 등, 중한문화론집1. 동작빈, 단기와 중국고대사연대, 중화민국 55년, 3판, 타이뻬이, 중화대전편인회.
일본에서 발견된 단군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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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도]단군관련 사서 보도자료
일제시대 관련 책자 분류작업 박창화씨 해방후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에 증언
[연합뉴스 1999-10-04] (수원=연합뉴스)
한국 강점후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본이 사실상 단군을 인정한 문서가 발견됐다.
서지학자 이종학(李鍾學.73)씨는 개천절을 앞둔 2일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왕실의 재산, 문화재를 관리
하기 위해 만든 이왕직(李王職)이란 기관이 발행한 문서 9쪽을 공개했다.
이왕직 장관을 지낸 시노다 지사꾸(條田治策)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서는 소화(小和) 13년
(1938년) 8월 이왕직에서 발행한 것으로 적혀있고, `종묘의 기원'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이 문서는“단군의 사실여부에 관한 분분한 의견이 있으나 단군에 대한 기록이 사실임을 확신한다”면서,
단군의 근거로 “사마천의 사기 등 많은 기록과 동사고기(東史古記), 삼국유사 등에서 단군에 대한 기록이
이미 있었다”고 주장했다.
문서는 또“배씨와 기씨 등 조선내 일부 가문의 족보에도 단군 개국설을 인정하는 기록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경성제대 총장을 역임했던 시노다 지사꾸는 조선역사에 정통했던 일본인이었다”며 “자료는 한반도
강점 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제의 역사 왜곡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기록한 조선사료(朝鮮史料) 중 3권을 공개하고 “조선사료에 단군의
출생과 사망, 유적, 평론 등과 단군건국에 관한 내용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점으로 미뤄 당시 일본이 단군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음은 청나라 오임순의 《산해경 광주》다.이 부분에서 단군조선이 거론된다고 밝힌 학자는 심백강박사다.
오임순은 단군조선의 전거를 《전박조선국지(錢溥朝鮮國志)》라고 인용하고 있다.
월식국(인도)으로 떠난사람들 (부도지)
사문도를 천축국으로 부르던 사유를 고전을 통하여 살펴본 결과 그 대답은 의외에도 《부도지》에 있었다.
박제상이 저술했다는 《부도지》는 그 해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단군왕검과 요 임금이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왕검께서는 신하였던 유호(有戶)씨에게 지시
하여 환부(鰥夫)와 권사(權士) 백 여인을 이끌고 가서 요 임금을 설득케 하였으나 실패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단군왕검께서는 웅씨국(熊氏國)에서 비왕으로 24년간을 섭정하시다가 마지막 배달국 말엽 요임금의 반란
으로 웅씨국 왕이 서거하자 오가(五加)와 800의 종자들을 대동하고 동해의 장도로 옮겨 고조선을 건국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때 요임금을 설득하기 위해서 유호씨 일행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설득에 실패하고 방황하던 이 들은 우(禹)임금때 이르러 월식(月息)의 땅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백인종과 흑인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월식생성의 땅이란 인도를 말하고, 그 곳에는 당시부터 흑인종과 백인종이 섞여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단군왕검 시대) 이 들은 고기를 잡던 어부가 중심이 되었던 무리었다.
이때부터 이미 바다를 통하여 아유타와 연결되어 있던 까닭에 부도(符都)- 소도(蘇塗)의 삼신사상을 전파
하여 인도의 원시 불교와 힌두교에 영양을 준 것으로 추정을 해 본다.
이러한 《부도지》의 기록은 사학계에서 공인을 받지 못하는 입장에 있지만 고대의 사료가 극히 부족한
우리로서는 외면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부정하려면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인도 북부 펀잡지방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즉 쫓기던 박트리아가 그곳에 터를
잡고, 그후에 스키타이가 들어오며, 이에 월지가 들어와 나라를 세운다는 얘기다.
상나라의 사카국은 그 지방 천축국중의 하나로 스키타이/알지 세력과 관계가 있었고 한나라를 거쳐 신라
로 유입되었으며, 신라 김씨에서 부도/부처가 나왔다는 설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유타국,스리랑카등등 신라/가야/왜와 그곳 여러 나라들과 신화, 왕명 등에서 매우 닮아있는 등등,
그 연관성을 생각해보지않을수 없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전문학자인 죤 브라이트는"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비문들 중에 판독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것은 bc3000년대 초기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보다는 약1000년전,모세 시기보다는 약 1500년전의 시대로 올라가서 고전적 형식을 가춘 문화가 발달해 왔던 것으로 확인하게 된다고"그의 저서 《A history of Israel》서론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드기네씨는 파리비명협회(碑銘協會)의 회원들 앞에서 강연을 통해 「상형문자와 표의문자와 설형 문자등 제반 문자들은 극동문화와 비교하여 보면 고대중공과 실재의 생활에 있어서 연관이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근거에 대하여 이집트와 메스포타미아지역의 고대유물에서 나타난 비명에 대한고고학적 분석을 마치고 그들 돌비에 새겨진 내용에 대해서 고고학연구회원(세계적인 고고학연구회원)들에게 「농업이나 상업이나 관리상의 암시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히브리의 신비철학과 점성학 그노시스타(기독사상의 원조 의 원리)와 성경내용을 구성하는 골격도 갈대아나 히브리아나 대부분의 문명적 바탕이 고대중공문화가 옮겨진것은 물론 심지어는 태고의 문학인 갑골문자 기록까지도 이집트에서 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 되었음을 실증하게 되었다」는 쟝 플랑소아 샹폴리리옹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밀이국의 점토명판은「동방의 먼곳에 근국(根國)이 있어 다스림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상은 《우리의 강역은 신화가 아니다》의 저자 김정권님의 글에서 인용된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단고기》에서 주장하는 수밀이국이 배달국의 제후국이었음이 주장되고 있는데 고대 비문해독에서 그 증거가 들어나고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문화를 서쪽으로 수출한 시기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바로 소호김천씨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그의 행적에서 들어나고 있다.
곡부에서 제위에 올랐던 그는 전욱고양씨(단군)에게 24개국의 섭정을 맡기고 서쪽으로 멀리 해가 지는곳 으로 떠나 1만2천리를 개척하고 문명을 전파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뒷바침하고 있는것이다. 서방을 개척하느라 본바탕의 관리를 소흘히하는 틈을 타서 요임금의 구테타로 시해되는 비극을 맞았지만 사서들은 오히려 요임금을 성군으로 추겨세웠다.이러한 정변으로 고조선이 탄생하는 계기를 맞게 된것이다.
≪회남자≫「시칙편(時則篇)」에 실려있는 전설에 의하면, 소호는 뒤에 아들 구망(句芒)을 태호 복희씨의 보좌관으로 남겨두고, 자기는 다른 아들 욕수(?收)를 데리고 서방으로 가서 서방의 천제가 되어, 곤륜사막 에서 '삼위지국'(三危之國: 지금의 감숙성 돈황현)에 이르는 12000리의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소호는 장류산(長留山)에 살면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동쪽으로 반사되는 빛이 정상인지 아닌지를 살폈 으며, 아들 욕수도 부근의 유(水+幼)에서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하략-- |
모자국인의 조상
《로사?국명기3》에, 모국牟國은 전욱고양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로 나와 있다.
고양씨 이후에 생긴 소국들이 131국이었다. 그중에서 산동성 지경 안에 22국이 있었다.
위고(범현), (정도), (유방), 관(수광), 개(교주), 우(림기), 기(조장), 제(제성), 핍양(조장), 이(즉묵),
조(정도), 주(제성), 근모(기수)、몽(평음), 모(래성)、구이(유방동)이다.
이들 작은 나라들은 대국인 전욱고양의 나라가 멸망한 후에 조선에 속했던 소국들로 볼 수 있다.
사서史書에는 전욱고양의 나라에 대해선 언급이 없으나 전욱고양의 백성을 전민?民이라 하였다.
전욱고양이 붕어한 후에 전욱고양의 백성을 여민黎民이라 하였다.
여민은 전욱고양의 아들인 중여곤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중여곤의 아들이 옥장이었고, 여민은 옥장의 백성이 되었다.
옥장의 백성이 모만민牟萬民이었다. 모만민은 모국인이다. 모국인이 전욱고양의 적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욱고양의 아들 중여곤(간단하게 여黎라 부르기도 하였다)은 당시에 있었던 푸날루아에 따라 제곡고신
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곡고신은 중여곤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자기의 막내아들 지摯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이 사건을 용납하지 못한 일부 소국들이 전욱고양의 휘하에서 제곡고신의 휘하에 있던 소국들과 싸웠다.
이때 싸움을 불주산不周山 전쟁이라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전욱고양이 패하여 세상은 제곡고신의 천하가 되었다.
제곡고신 쪽에서 <불주산신화>를 만들어 후세에 전했다.
신화는 “인류의 최고 조상인 여와를 계승하고자 축융인 제곡고신에게 전욱고양이 도전하였으나 싸움에
졌다. 이에 화가 난 전욱고양이 분노하여 머리로 불주산을 들이받아 무너졌다. 그래서 하늘을 받치고 있던
기동이 부러지고 땅을 엮고 있던 밧줄이 끊어졌다. 이에 여와가 하늘의 돌을 다듬어 보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불주산 싸움은 제곡고신이 전욱고양의 아들 중여곤에게 물려주어야 할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막내
아들 지에게 물려줌으로써 일어나게 된 싸움이었다.
신화를 날조하여 싸움을 일으킨 책임을 전욱고양에게 돌린 것이다.
이 싸움에서 전욱고양의 적통을 이어받은 모국(모만민)이 전욱고양 쪽에 서서 싸웠다고 볼 수 있다.
모국은 전욱고양이 패할 때 함께 패하였다. 모국의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전욱고양 쪽에 서서 모국과 함께 싸웠다가 함께 패한 부족이 있었다.
이 부족이 중원 땅에 곤오昆吾라는 지명을 남긴 기풍己豊 곤오昆吾의 부족이였다.
기풍 곤오는 한인천제의 61세 손으로 황하 일대에서 부족 간에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하는 하백河伯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하백으로서 이 전쟁에 개입하여야 하였으므로 당연히 전욱고양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여 전욱고양이 패하자 제곡고신에게 밀려 황하 서북쪽 지류 수분하
綏芬河의 동쪽을 장악하고 있는 단국檀國의 제2세 홍제洪帝에게 귀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제는 그를 받아들이고 숙신 북쪽의 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홍제 8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를 넘어 단국에 쳐들어왔다. 기풍 곤오가 출동하여 침략군을 수분하 서쪽
으로 몰아내었다. 홍제가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소성蘇姓을 내려주었다. 기성이 소성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소성이 된 곤오는 단국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소풍 곤오의 아들을 비서갑菲西岬이라 하는데 그가 사는 곳의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족보상으로는 부소갑扶蘇岬이었다. 그의 딸이 소도蘇塗에서 하백 신녀神女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 하백
녀라 하였다.
하백녀는 단군왕검이 단국의 제3세 제위帝位에 있다가 무진년(BC 2333)에 국호를 바꾸어 조선을 선포
하면서 단군왕검에게 납비納妃가 되어 조선의 신모神母가 되었다.
소도에서 신모가 주관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이 시대에 모국에서 흙으로 솥을 빚어 불에 구어 제사에
제기로 쓸 토부土釜를 만들었다. 이 토부를 모국에서 모인이 만들었으므로 모牟라 하였다.
《석문》에서 제나라 사람은 흙으로 만든 솥을 모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모민牟民이 흙으로 솥을 만들어 썼음을 의미한다.
이 시대는 소금을 넣어 삶는 제물을 쓰던 시대였다. 양념이 없었던 시대라 양념을 제물에 쓸 수 없었다.
우리가 오늘 날도 제사 음식에 양념을 넣지 않는 것은 이때의 유습을 지켜 오는 때문이다.
모인이 모를 떡을 하고 밥을 짓고 고기를 삶아 탕을 만들고 나물을 삶아내는 데에 썼다.
이 시대에 곤오는 청동으로 솥을 만들었는데 이 솥을 정鼎이라 하였다.
곤오족은 정을 발명한 부족이었다. 곤오인이 정을 쓰는 용도도 모인이 모를 쓰는 용도와 같았다.
그림9 곤오가 지명으로 나와 있다.
여에서 말하는 곤오는 한인천제의 61세 손 기성己姓 곤오昆吾를 말한다.
곤오가 청동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 보인다.
《일주서?대취해》에 곤오가 소집하여 금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곽박郭璞은《산해경주》에서
“곤오의 산에서 동이 출토되었는데, 색은 불과 같은 적색이었다. 칼을 만들어 진흙을 자르듯이 옥을
잘랐다.”고 하였다.《여씨춘추?군수》에서 “곤오가 질그릇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로사》에 고양시에 속한 소국이 131국이라 하였는데, 이들 중에 청도定陶(曹國)와 근모根牟가 모두
질그릇을 생산할 수 있는 지명이므로 정도는 곤오의 다른 지명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보기에 정도는 기성 곤오의 땅이고 근모는 모인의 땅이다.
《하씨성원》에 모씨가 나온다. 모씨를 보리라 하였다. 이 말은 모인이 보리를 농사지었다는 말이다.
《모전훈》은 모는 보리라 하였다.
곤오의 성인 소蘇가 차조기(필자는 찰조기로 본다)를 의미하는 문자이고, 기록에 모인이 보리와 밀을
처음으로 농사지었다고 나오므로, 모인이 곡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질그릇을 발명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림10 삼한시대에 부천에서 만든 토부土釜(흙 솥)은 부천의 역사가 모족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이 임진년 시월상달에 조선제朝鮮帝로 등극하면서 우가牛加로 볼 수 있는 모인과 어족魚族으로
볼 수 있는 곤오인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월상달은 음력으로 10월 3일을 의미한다. 10월 3일이라는 숫자에는 1→3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공식은 <천부경>에 나오는 우주만물 분화分化의 원리인 일석삼극一析三極을 의미한다.
일석삼극의 이치에 맞도록 조선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뜻이 시월상달에 들어 있다.
단군왕검은 조선을 선포할 때 나라의 기틀(紀)을 잡았는데, 그것이 당시에 집에서 기를 수 있는 가축의
이름을 부족의 명칭과 부족장의 명칭으로 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군왕검 등극 초기인 신묘 24년(BC 2310)에 부족의 이름을 마가馬加, 양가羊加, 우가牛加, 구가
狗加, 저가猪加라 하였다.
각 부족을 다스리는 부족장에게는 말과 수레를 주어 가駕로 불렀다.
그래서 마가의 부족장은 마가馬駕라 하였고, 양가의 부족장은 양가羊駕라 하였고, 우가의 부족장은 우가
牛駕라 하였고, 구가의 부족장은 구가狗駕라 하였고, 저가의 부족장은 저가猪駕라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기틀을 잡을 때 가축의 이름만으로 잡은 것은 아니었다.
단군왕검이 속했던 양가와 대립할 만큼 부족의 숫자가 많았던 어족魚族이 있었다.
조선朝鮮이라는 문자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조선의 선자에 어魚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들을 하화족(화하족)은 어족이라 부르기 싫어 예濊라 하였다.
예는 세월이 많이 흘러 어족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모牟자는 사?+우牛로 되어 있는 문자이다. ‘내가 우가에 속한 부족의 일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인은 우가로 볼 수 있다. 또 모자에 내가 소 앞에 서서 소를 끌고 간다는 의미가 있다.
소를 끌고 가는 사내를 견우牽牛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견우를 모국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림11 < 천상열차분야지도>. 북방현무칠수 방위에 직녀3성, 견우6성, 수녀4성이 배치되어 있다.
견우와 직녀 신화의 원천이 되는 천문도이다. 칠월칠석 날 수녀가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지내는데,
이때 지내는 제사를 유월장마를 그치게 해 달라고 드리는 제사라 지우제止雨祭로 불렸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 “하백은 천하의 사람이다. 7월7일은 바로 나반이 강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 용왕에 명하여 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의 뭇 신을 주관케 하느니라.”라
하였다.
7월7일은 나반이 천하를 건너는 날이라 하였으니, 칠월칠석날 은하수를 건너는 사람이 견우라는 말이다.
나반은 부인 아만과 함께 인류의 시조가 된다. 견우는 인류의 시조이다.
따라서 아만은 견우의 정실인 직녀가 된다.
그는 인류의 시조로서 하백을 부른다. 하백을 부르는 이유는 6월 장마를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백은 소도에서 하백의 일을 하다가 소집명령을 받고 나반에게로 간다.
그가 하는 일이 사해의 뭇 신들을 주관하여 장마를 그치게 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하백이 하는 일이 땅과 하늘에서 분쟁과 재앙을 막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요즈음 말로 UN평화유지군 사령관이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견우를 배출한 모국에 칠석제를 지내는 소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시조를 배출한 모국이 어디에 있었을까?《산해경?대황동경》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해 밖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소오의 국이라 한다.
소호가 어렸을 때 전욱이 이곳에서 소호를 양육하였다. 전욱 10년에 왕이 된 후에, 소오가 능히 신(혜鞋)
을 기울 수 있으므로 공무를 맡겼다.
전욱 20년에 제위에 오르자 소호시대가 열렸는데 무리 중에서 재능이 뛰어나 모국의 선조가 되었다.”
《산해경?대황동경》은 모국의 시조가 전욱고양의 아들 소호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기록이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 기록된 인류의 시조 나반과 아만-즉, 견우와 직녀보다 훨씬
후대에 생성된 특정한 부족의 시조출생역사를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국의 시조가 과연 소호였는지 좀 더 추적해 보기로 한다.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는 모씨종친회에서 발간한 《모씨원류여보서牟氏源流??序》에 따르면, 모씨들에
대한 기록이 화신축융火神祝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화신축융의 축융은 불을 다스리는 신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모씨의 조상이 문중의 최고 어른으로서 불씨를 관리하던 분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화신은 국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적제赤帝 또는 염제炎帝로 호칭되었다.
동이東夷 쪽에서는 적제로 호칭하였고, 화이華夷 쪽에서는 염제로 호칭하였다.
처음 쓰게 된 호칭이 적제였고, 다음에 쓰게 된 호칭이 염제였다.
축융은 동이와 화이가 다 같이 같게 호칭하였다.
적제를 처음 쓴 부족은 풍이족시대風夷族時代에 속한 구한족九桓族이었고, 이 호칭은 배달나라倍達那羅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배달나라시대 말기에 치우천왕蚩尤天王(BC 2707~재위 년수 109년)과 황제(동작빈 연표, BC
2692 ~2592)가 중원의 패자覇者를 가리는 탁록대전?鹿大戰에서 황제가 승리한 이후에 적제라는 호칭을
버리고 염제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는 화이가 동이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취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림12 고지도에는 발해만에 쇠머리 형상의 청구(치우천왕이 직접 다스리는 소국)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은 사라져 없다. 이 땅이 사라진 때 중원에서 치우천왕과 황제 사이에 배달나라의
패권을 다투는 10년 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축융이라는 말을 제일 처음 쓴 분은 《부소보서-진주소씨 문중의 족보 서문》에 따르면, 기묘년己卯年에
풍주風州 배곡倍谷에서 한국桓國을 세운 한인천제桓因天帝(재위 BC 7197~미상)였다.
중국에 이런 기록이 없다. 축융이라는 호칭을 처음 쓴 사람이 제곡고신이었다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백가성》에 이르기를, “멀리 제곡고신(주, 중국의 역사학자 부락성傅樂成에 따르면, 은殷의 시조, BC
2420 즉위)시대에 여러 성씨를 합하여 하나의 옛 성을 만들었다.
멀리 제곡고신 때에 화정관火正官(화신化神)이 능히 빛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었다.
제곡고신이 명을 내려 화정관을 축융이라 하였다. 이로써 불을 베풀어 쓸 수 있었다.
화정관의 호를 적제라 하였다.“고 하였다.
《백가성》에서 적제의 호칭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를 밝히고 있다.
제곡고신은 황제의 손자로 유망의 손자인 전욱고양(주, 전락성의 연표에 따르면, 하夏의 시조, BC 2467
즉위)의 다음 대에 전욱고양을 불주산不周山에서 괴멸시키고 유백국楡伯國(유망국)을 유웅국有熊國
(황제국)에 통합하여 제위에 오른 분이다.
그러나 《부소보서》에 보면 적제라는 말은 이미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시대로부터 써왔음을 알 수 있다.
축융이라는 말도 이때부터 써 왔다.
昔有赤帝諱復解號曰祝融爲桓國之帝
석유적제휘부해호왈축융위한국지제
옛날에 적제 휘 부해 호 축융이 한국의 제가 되었다. 한인천제가 누구인가를 밝힌 글이다.
그의 휘는 부해였고 호는 축융이었다.
그림13 치우천왕 이미지.
치우蚩尤는 화이華夷의 호칭이고 동이東夷의 호칭은 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이다.
자오지는 ‘해를 사랑하는 지파’라는 뜻이다.
그가 무당이자 제관임을 나타내는 문자로 볼 수 있다. 천왕은 ‘하늘 문을 여는 제관’이라는 뜻이다.
復자를 부자로 보면 부해復解가 둥근 해라는 뜻이 되고, 복자로 보면 복해復解가 다시 떠오르는 해라는
뜻이 된다. 본문에서는 부해로 읽었다. 한국에서 桓에는 한, 환, 원의 3가지 발음이 있다. 한은 크다,
처음이라는 뜻이고, 환은 밝다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한으로 읽었다.
적제는 남방의 제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적은 양자강 남쪽으로 읽을 수 있고, 또한 홍산紅山이나 적봉赤峰
남쪽으로 읽을 수도 있다.
홍산에 홍紅자가 들어가 있고, 적봉에 적赤자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렇게 보는 것이다.
적제는 이곳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축융祝融에서 축祝은 해·달·칠성 삼신에게 풍이족의 장자(장손)가 축문을 읽어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융融은 격?+충?자로 풍이족의 차자(지손)가 솥에 제물을 삶는다는 뜻이다.
적제는 일은 불씨를 보존하고 제물을 솥에 삶아 제사지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가 제였다.
풍이족은 한인천제 이래로 적제와 축융을 세습하였다. 적제라는 호칭이 신농의 대에 와서 염제炎帝로
바뀌었다. 그러나 축융은 바뀌지 않았다.
《예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전욱고양씨는 약수에서 태어나 제구에서 살았다. (현재의 하남 복양 동남쪽이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중과 여이다. 전욱은 장자 중을 남정관에 임명했고, 제사를 맡아 하도록 하였다.
차자 여는 화정관에 임명하여 민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중여의 아들에 옥장이 있었다.
중은 자손이 있었고 여는 없었다.
전해 오기로, 옥장은 몸이 키가 크고 장대한 재목이었고, 무예가 고강하였다.
조정에서 중년 나이에 대장이 되었다. 간신의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하였다. 영혼이 흩어지지 않고 낮
에는 불이 되어 날아다니며 땅에 가득하였다. 밤에는 흙이 되어 날아다니며 티끌을 날렸다.
황성이 종일 안녕을 얻을 수 없었다. 하루는 아침에 골주가 나타나니, 구멍이 하나 뚫린 홍포를 입은 자가
허공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거닐었다. 골주가 물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자가 누구인가?” 신하가 대답
했다. “옥장입니다.” 낮에 화광이 땅에 가득했다. “밤에 티끌을 날리는 자는 누구인가?” 역시 신하가 옥장
이라 하였다. 골주는 옥장을 불을 관장하는 축융에 봉했다.옥장이 웃으며 은혜를 감사해 하며 떠나갔다.
이런 이유로 축융의 후예를 모에 봉하니 받아들였다. 역사에서 칭하기를 모국이라 하였다.
제가 모국을 멸망시키니 후인들이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때문에 후세에 모성이 크게 번성하였고
존경을 받았다. 축융은 모씨가 되어 시조의 성을 얻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욱의 후예가 된다.”
이와는 다른 고증도 있다.
“아주 오래 전에 황하가 범람하여 북방에서 남방으로 이주한 북방 이족의 무씨족이 있었다.
부락 수령을 황제라 하였다. 남방에는 복희씨의 후예 신농씨가 있었다. 그 부락의 수령을 염제라 하였다.
동부 산동반도에 살았다. 일대에 복희씨에게서 떨어져 나온 한 지파가 있었다.
소호씨라 하는데 호를 동이씨라 하였다. 부락의 수령인 전욱씨와 신농씨가 연합하였다.
후에 칭하기를 고양씨라 하였다. 황제씨와 고양씨가 중원을 통일하였다. 순의 시대에 남쪽을 정벌하였다.
순은 전사하는 꿈을 꾸었다. (현재 산중일대이다) 그가 전사하여 형산에 장사지냈다.
우임금 후에 모를 하남에 봉했다. 축융의 원래의 계통은 산동반도 동이씨이다. 황우와 봉조가 토템이었다.
고로 후대의 사람들이 모로 국명을 취하고 성이 되었다.”
이 기록은 왜곡이 심하다. 염제 신농을 황제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다.
황제는 염제 신농의 8대나 후대 사람이다. 황제와 같은 시대 사람은 염제 신농의 8대손 유망이었다.
전욱씨와 신농씨가 연합했다고 했는데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전욱은 신농의 9대손이었다.
전욱이 연합했다면 황제의 다음 대인 소호금천과 연합했다고 해야 하였다.
염제 신농의 8대 후손에 유망楡罔이 있었다. 이들이 동이족이었다.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신농과 유망을
의도적으로 동일한 인물로 호칭한다. 동이와 화이를 얼버무려 화이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유망의 배다른 동생에 황제黃帝가 있었다. 이들 형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었다.
소전은 제문祭文을 관리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황제가 세력을 키워 형 유망을 굴복시키고 탁록에서 응룡應龍을 시켜 치우천왕에게 수공水攻을 가하여
이겼다. 동이는 흩어지고 화이華夷가 출현하였다. 이리하여 동이와 화이 사이에 장자가 지내는 제사를
가지고 다툼이 생겼다. 황제가 전쟁에 이겼으므로 장자권을 행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림14 유망 집안과 황제 집안의 푸날루아 가계도.
당시에는 형제가 남매를 취하거나 고모와 조카딸이 형제에게 시집을 가기도 하였다.
종족보존을 위해서 근친혼, 양급제를 허용하였다.
황제는 소호금천小昊金天을 장자로 인정하여 제위에 앉혔고, 푸날루아제도를 시행하여 제관(화정관火正官
축융祝融)으로 유망의 아들 전욱고양?頊高陽을 다음 순위의 제위에 임명하였다.
다음에 전욱고양은 소호금천의 아들 제곡고신帝?高辛을 장자로 인정하는 제관에 임명하였고 제곡고신이
제위를 물려받았다.
이러한 제도를 족자제도族子制度라 하였다.
《사기?오제본기》에, “고신高辛은 전욱?頊에게 족자族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곡고신이 전욱고양의 제위帝位를 잇기 위하여 장자長子가 되었다는 말이다.
실제는 장자가 아니지만 종친이나 제왕이 양자를 맞아들여 장자로 삼은 사람이 족자였다.
제곡고신은 전욱고양의 아들 중여곤衆艅?(여黎라고도 하였다)을 제관에 임명하여 족자로 삼았다.
그림15 술두루미 안에 새겨진 금문. 알자왕(알에서 태어난 왕이라는 뜻)이 돈을 중여곤에게 하사하여
조상 희화씨를 제사지냈다는 내용이다.
이 문장 안에 래이족의 조상이 되는 衆艅?과 萊자의 근원문자인 來자가 있다.
제곡고신의 시대가 끝나고 하夏(?B.C.2200~?B.C.1700)가 주周(B.C.1100~ ?)에게 멸망하였다.
주대周代에 주의 조정이 모에게 화신 축융을 봉했다.
역사는 그를 모라 하였고, 주대에 모자국이 되었다고《성씨고략》(풍속통)에 기록하였다. .
그렇다면 모자국이 되기 이전의 모국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모국 사람들 중에 일부가 주에 항복하지 않고 은에 항복하였다. 그래서 주에 항복한 모인들의 나라를
모자국이라 하였다. 이때가 동주東周의 환제(제2대 주周 환왕桓王 희림姬林 BC 720~697)15년이었다.
《춘추》에, “주인?人과 갈인葛人도 (모인과) 함께 은에 내조來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들은 모두 은과 함께 동이東夷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모인의 후예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로 한다.
만주에 있는 고구려의 무덤들 중에 모두루총牟頭婁塚이라는 무덤이 있다.
무덤의 주인이 모牟씨이고 두루頭婁는 루수婁宿의 머리별이라는 뜻이니 고구려 때의 벼슬 이름으로 보인다.
고구려시대에 모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두루총이 있는 곳의 지명이 하해방촌인데, 하해방촌의 옛 이름이 하양어두下羊魚頭다.
하양어두는 양이 아래에 있고 물고기가 머리에 있다는 뜻인데, 이를 다시 말하면, 양을 족표로 쓰는 양족
羊族은 백성이고 물고기를 족표로 쓰는 어족魚族(희족熙族)은 지배자라는 뜻이다.
이름으로 보아서 조선을 의미하는 선鮮자를 풀어 쓴 말이다. 선자는 선모鮮牟를 줄인 말이다.
하양어두는 조선의 백성이 살던 곳이다. 모두루총은 옛 조선 땅에서 고구려시대에 상당히 지체가 높은
신분의 사람이 묻힌 무덤이다. 그의 무덤이 있음으로 해서 하양어두라는 지명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시황은 8년(제47대 고열가 단군왕검 때)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조선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하양어두
라는 말을 버리고 하해방촌이라는 말을 쓰게 하였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을 추모왕이라 하였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의 시호가 추모왕鄒牟王
이다. 추모왕은 그가 추국鄒國과 모국牟國의 후예라는 뜻이다.
그림16 모두루총 벽에 써있는 묵서墨書. 모두루총은 1935년 10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하양어두下羊魚頭(鮮이라는 뜻)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 때 북부여 수사守事인 모두루의 묘지로 알려졌다. 그의 성이 모씨인 점으로 보아서
모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전욱
전욱(顓頊)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으로, 황제(黃帝)의 손자라고 한다.
처음 고양(高陽)이라는 곳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고양씨(高陽氏)라고 불렸다.
제왕세기(帝王世紀), 사기(史記), 수경주(水經注)등에 따르면 전욱은 황제 헌원의 아들인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전욱은 전설상의 염황연맹(炎黃聯盟)의 장으로, 고양(高陽: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 서쪽)에
살았다.
고려 말의 문신인 백문보는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3천 6백년이 경과하여 바로 지금 주원(周元)을
맞았으니 요(堯)·순(舜)과 육경(六經)이 제시한 길을 마땅히 따라야 하며 눈앞의 공로나 이익을 따지거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따위의 이단을 쫓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여 일연 사후 처음으로 단군을 언급하였다.
백문보는 일찍이 불교의 폐단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래서 신돈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불교를 배척한 백문보가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은 적다.
백문보는 무엇을 보고 단군을 언급하였을까?
그것은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단군기(檀君記)이다. 그러나 단군기는 누가 언제 편찬했는지 알수가 없다.
고려시대 단군을 언급한 사람은 백문보와 일연뿐이다. 백문보 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단군에 대해 먼저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일연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삼국유사>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위서(魏書)에 말하길, 지난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으니,
바로 요(堯:與高) 임금과 같은 시기이다.
중국 기록을 보면 관자에 “발조선(發朝鮮)에서 생산되는 범 가죽”이라는 말이 있는데, 제환공이 관자에게
해내(海內)에 귀중한 일곱 가지 예물이 뭐냐고 묻자 그 중에 하나로 발조선의 범 가죽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발조선이 조근하지 않는 이유는 비싼 범 가죽과 태복을 예물로 요구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관자의 기록에 나타나는 발조선이란 명칭이 기자를 봉한 그 조선(朝鮮)일 것이다.
일주서에 “발인(發人)은 록(鹿)인데 마치 록(鹿)이 신주(迅走)하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발(發)이라는 것은 록(鹿), 즉 사슴이 질주하는 형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인(發人)이란 사슴이 질주하는 것처럼 빠르고, 산(山)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발조선이란 명칭은 서주(西周) 시기에 완성 되었다는 시경이나 기타 상서나 주례의 기록에는 보이질
않는다.
상서에 “무왕(武王)이 동이(東夷)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이를 하례하였다.” 죽서기년에 “순임금 25년
식신(息愼)이 와서 활과 화살을 바쳤다.”라는 기록에 보이는 숙신과 식신을 발조선의 이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종족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관자나 죽서기년 등을 참고한 사마천은 조선에 대해 시기별로 오제본기에 “북쪽에는 산융(山戎)과 발식신
(發息愼)이 있다.”라고 하여 은(殷)나라 이전에 산융과 발조선을 뜻하는 발식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라며 발식신이 조선의 이칭임을 나타내고 있다.
화식열전과 진 본기 등에 비로써 조선이라는 명칭을 기술 하였고, 만(滿)이 조선을 멸망 시킨 것으로 마무리
하여 기술 하였다.
따라서 일연이 인용한 위서에서 말한 조선은 발조선, 발식신, 숙신 등의 이칭으로 불리우던 종족을 가리킨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위서(魏書)에서 인용했다는 문구이다.
현전하는 위서 가운데 단군조선 건국에 관련된 기록을 전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위서 가운데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이 더 많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재야사학자들은 삼국지의 위서, 북위의 위서, 어환의 위략 에 단군에 관한 기록이 기재되어 있었으나, 후대
중국의 사학자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삭제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또한 육당 최남선은 지금은 망실(亡失)된 중국의 어떤 위서(魏書)일 것이라고 하였고, 위당 정인보는 일연이
말한 위서가 바로 기록상으로만 전해오는 왕침의 위서라 했다.
정중환 교수의 주장은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에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라는
문구가, 바로 그 위서가 성립되던 해라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조선 다음에 위만조선(魏滿朝鮮)이 나오는데 그 위(魏)자가 바로 위서(魏書)의 증거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나오는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에는 그냥 만(滿)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가, 후대의 삼국지나 후한서에 이르러서야 위만(衛滿)이라 하여 위(衛)자가 성과 같이 따라 붙게 되었다.
그러나 유독 삼국유사와 왕부의 잠부론에서만 위만(魏滿)으로, 기록 되어있다.
만약 잠부론이 없고, 삼국유사의 기록만 있다면 정중환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수 있다.
이러한 위(魏)자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같은 발음을 다르게 옮긴 오기나 실수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위만조선조 전 내용을 통틀어 위만(魏滿)이라고 쓰여져 있음을 생각하면 오기나 실수
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마한조에는 분명 위지(魏志)라고 하여 위서(魏書)와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이 잠부론을 인용하여 위만(魏滿)이라 했는지, 아니면 자신 스스로 단군왕검으로부터 2천년 후 라는 조건
을 참작하여 위만조선이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는 중국측 사료라는 것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사료들은 우리 사서와 중국 사서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연이 인용한 위서(魏書)라는 것이 각각의 위나라 시대를 중심으로 편찬된 정사라는 의미는 아닐 것
이다. 단지 일연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정사가 아니라, 위나라때 쓰여진 야사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칭해서 위서(魏書)라고 했던 것이다.
<삼국유사>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伯山)
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桓雄)에게 주어
인간(人間)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중략
웅녀(熊女)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壇樹)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한 것이다.
일연은 단군의 존재를 처음 입전한 위서(魏書)가 맞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 사서인 고기(古記)를 인용
하였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古記)란 어떤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나 시중에 돌아다니는 잡서를 총칭
하여 고기라고 하였을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인용한 고기(古記)를 살펴보자면 단군부터 후삼국시대를 아우르고 있다.
상기의 단군 관련 고기(古記)는 불가에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절 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를 상고하여
보면 이렇게 말했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 처음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으나, 7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웠다.”라는 문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일연은 조선왕을 가리켜 단군이라 지칭한 것이고, 단군의 탄생설화를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밝히고자 하였
던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라고 하여 불가의 고기(古記)에서 밝힌 단군의 탄생설화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려조 김관의 가락국기속의 수로왕 탄생설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임금이 왕검(王儉)에 도읍하였다.’라고도 한다.”라고 하여 단군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선인(仙人) 왕검(王儉)으로 기술하여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문구를
생각하면 일연의 생각과 다름이 없다고 본다.
더욱이 일연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고구려 추모왕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다.
고조선에 이어 위만조선과 부여 그리고 고구려까지 단군의 계보로 일연은 생각한 것이다.
김부식과 악연의 고리가 깊은 묘청은 “첫째는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넷째는 구려 평양선인, 다섯째는 구려
목멱선인”이라는 팔성(八聖) 화상을 그려 안치하였다.
이로보면 유교를 신봉한 김부식이나 불교를 신봉한 묘청 모두 단군을 신(神)적인 존재로 생각하였음을 알수가
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버리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왕실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군을 조선의 시조로 생각하였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서 인용한 단군기에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서 부루(夫婁)
라고 이름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구삼국사를 인용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상고하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주몽을 낳았
다고 하였다.
일연은 이를두고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이복형제라고 생각한다.
고려조 백문보, 김부식, 일연, 묘청 등 이들은 단군기를 통해 단군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군기에는 상기에서 보듯 부여와 고구려 탄생설화만 있었을 것이다.
이에 일연은 불가의 고기(古記)와 어렵게 얻은 위나라때의 서책을 통해 단군의 탄생설화를 삼국유사에 기록
하였던 것이다.
일연이 불가의 사람이라고 단군의 탄생설화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도,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사 기록 어디에도 없는 단군의 실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우리가 중국의 시조
들을 못 믿은 것처럼 신중을 기할 일이다.
선비족 위수는 왜 단군을 중국정사에 남겼을까?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와 같은 때였다."
이 내용을 보면 단군왕검, 아사달, 조선이라는 낱말을 위수가 직접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경(시경)에 따르면 아사달이 무엽산 또는 백악, 백주, 백악궁..."이라는 주해가 붙어 있는데 이것
이 정확히 위수가 주를 단 것인지, 아니면 일연 스님이 주를 단 것인지는 애매합니다.
다만, 이 인용문이 사실이었다는 가정 아래 적어도 "아사달"이라는 지명이 시경에 나온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시경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문집입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시경에는 아사달이나 무엽산, 백악 등등
이러한 구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위수나 일연스님 둘 중에 어느 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든지 아니면 둘 다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위수가 지은 '위서'와 진수가 지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다른 책이라는
점입니다.
위서에는 고구려, 백제만 있고 신라 기록은 없다?
우리는 한 가지 가정을 놓치고 있습니다.
바로 지나 사학자들이 조직적으로 위서에서 단군의 이야기를 지웠을 것이라는 점이죠.
이 혐의를 세 번째로 드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위서에 실린 동이 기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위서에는 고구려와 백제 글만 있고 신라의 글이 없습니다.
위수가 위서의 동이전을 펴낼 무렵, 그러니까 6세기 중반이면 신라가 중흥기를 맞고 있을 때 아닙니까?
그런 신라를 빼고 위수가 고구려, 백제만을 적을 까닭이 있었을까요?
위수의 북조, 즉 유목민족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은 남조, 즉 양,제 등으로부터 심한 거부를 받았었고
결국 중국의 남북조의 갈등은 수나라에게 통합됩니다.
수는 북조와 남조를 다 인정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선비족이었던 위수는 아마도 지나족과는 다른 입장에서 중원의 역사를 적을 필요를 느꼈던 것이고 따라서
위수는 단군조선의 글을 발굴하여 동북아 전체의 헤게모니로 제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추측은 일연스님이 인용한 다른 저본, 즉 "단군기"라는 별도의 글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