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현대사 - 의병의 전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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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1.09. 06:30조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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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전개 과정
1. 교과서 속 주개념
1) 을미의병(1895)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을미의병은 보수적 유생층이 주도(유인석, 이소응)하였고 일반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였다. 특징은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하였고, 의병 투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아관파천 후 단발령 철회와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으로 대부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의병 해산 이후에도 농민층은 활빈당, 영학당 등의 농민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2) 을사·병오의병(1905~1906)
러·일 전쟁 발발 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징은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신돌석, 홍범도와 같은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 의병장으로는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이 있었다. 민종식은 전직 관리였으며 충남 홍주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은 유생으로 전북 태인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이 보낸 군대와 싸울 수 없다 하여 스스로 체포되어 쓰시마로 유배를 당하였고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최익현의 활동은 전라도 지역의 의병 투쟁을 자극하며 더욱 활발한 의병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신돌석은 평민출신으로서 경북, 강원도의 관동 지방 일대(평해, 울진 등)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상당히 괴롭혔다.
3) 정미 의병(1907)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해산 군대의 의병 가담으로 전투력과 조직력이 강화되었고 각계 각층이 참여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그 참여 폭이 대폭 늘어나면서 전투도 곳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단순한 의병투쟁을 넘어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대일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정미의병은 이인영(총대장), 허위(군사장) 등 유생 의병장의 주도로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돌석, 홍범도 등 평민 의병장을 제외하는 한계를 드러내었으며 일본의 우세한 화력으로 실패하였다. 반면 평민 의병장들은 유격 전술을 사용하여 최소의 희생으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특히 호남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는 의병 부대들을 진압하지 않고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인 의병 토벌에 나서게 된다. 이후 의병 투쟁은 더욱 위축되었고 의병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였으며 국내에서는 1910년대 중반까지 의병투쟁이 지속되었다.
4) 의병 전쟁의 의의와 한계
의병 전쟁의 의의는 일제 침략에 맞서 가장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민족의 강한 독립정신을 표출하였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의병 투쟁은 이후 항일 무장 투쟁의 기반을 형성하며 독립군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봉건적 지배 질서를 고집하는 양반 유생층의 지도 노선으로 결속력이 약화되었으며, 일본에 대한 무력적 열세 속에서 전개되었다.
2. 확장 개념
활빈당 활동
세상에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큰 도적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첩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잡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 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하여 두루 탐문해 보았으나, 마침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 만 일이 있었다. ··· 그들은 비록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의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구제함을 쾌사로 삼았다. [김구, 〈백범일지〉]
3. 관련 지식
1) 민영환의 유서
아,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다다랐구나.··· 나 영환은 한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사(謝;사과)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 배나 열심히 하여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맘과 힘을 합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 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다. 아, 조금이라도 실망하지 마라.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마지막 고한다. [한국인민에게 고함, 〈대한매일신보〉, 1905. 12. 1.]
2)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민중의 울분
매국노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였는데, 그 딸이 시집갈 때 하녀 하나를 데리고 갔다.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오며 숨이 차서 땀을 흘리며 부인을 대하였다. 그는 늑약(肋約, = 을사조약)을 맺은 일을 말하며 "내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하니, 하녀가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 들고 뛰어나오면서 소리쳐 말하기를 "이근택아! 네 놈이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가 어떤 것인데 나라가 위태함에 능히 죽지 않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기로서니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는가? 내 힘이 약해서 능히 너를 만 도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하고 다시 한규설의 집으로 도망쳐 왔다. [황현, 〈매천야록〉]
3) 안중근의 법정 진술
검 사 : 범행 동기가 무엇인가?
안중근 : 나는 일본 재판소에서 재판 받을 의무가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하겠다. 나는 의병의 참모장으로 독립 전쟁을 하는 중이고, 그 일환으로 이토를 죽였다. 따라서 나는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이다.
검 사 : 한국이 문명개화하고 능력을 갖추면 일본이 보호할 필요가 없어지지만, 당신과 같이 스스로 망치는 행동을 하면 통감 제도는 영구히 존속되지 않겠는가?안중근 : 한국의 흥망은 한국인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국은 오늘날까지 진보해 왔다.
검 사 : 이토를 죽인다고 통감 제도가 폐지되리라고 보는가?
안중근 :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일본 국민과 세계 각 국은 우리 민족의 뜻을 알게 됐을 것이다.
검 사 : 청이나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한국을 그대로 두면 망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안중근 : 그렇다면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이유는 뭔가, 또 통감 제도 실시 이후 우리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 일본은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병의 전개 과정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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