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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 주일 전에 찾아오신 여러분들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3월 둘째 주일이자 또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 사순절은 주님의 순한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부활절을 경건하게 맞이하는 절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사순절은 그리스어로 4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의 시작은 지난주 수요일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주일을 뺀 40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이 사순절 기간을 주님을 생각하면서 은혜롭게 잘 보내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의 제목입니다. 뭐가 있는 사람이라고요?
네 은혜가 있는 사람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이 가장 많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뭔가를 생각해 보면 은혜를 받았다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 가사처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걷고 보니 내 영혼이 뭘 입었다고요?
은총을 입었다. 그리고 이 은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마 여러분 대충 이해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은혜를 입으면 은혜를 받으면 성도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개념 정리가 잘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성도들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될지 모르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 성도답지 못한 그런 어떤 모습 그런 행동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건널목에서 신호를 지켜야 되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신호를 지켜야 되는데 차도 다니지 않고 사람도 보지 않으니까 은근슬쩍 무단횡단을 했다고 할 때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런 모습이 계속 반복이 되다 보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그러면 되는구나 신호를 안 지켜도 되는구나.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구나. 그러다 보면 그게 우리의 인격이 되고 그게 혹시 나중에 내 삶의 고착화가 되고 그게 우리의 삶의 행동이 된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모습들이 혹 우리의 자녀들이 보고 있다고 한다면, 또 아니면 우리 믿음이 약한 우리 성도들이 보고 있다 라고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혹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어떤 입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삶으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 하는 것은 결코 내 자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라고 하면서 거친 말을 하게 되고 거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을 하고, 그러다 보면 여러분 교회가 욕을 먹고 결과적으로 보면 누구에게 누가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게는 이 기어 무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만약 그 남편이 후손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나 그 동생이 없다면 친척들 중에 그 아내와 동침해서 자손을 이어주고 또 그 가정의 명맥을 유지하고 뿐만 아니라 그 밭을 쓰거나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그런 제도입니다.
이 중동에서는 이 여자가 남자 없이는 아무런 생활을 할 수조차도 없습니다. 경제 생활을 할 수가 없고, 심지어 남자 없이는 밖에 출입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남편 없는 과부는 그야말로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풍습과 제도를 통해서 그 과부가 그 가문을 살리는 제도를 만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 이 룻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이방 나라 모압의 여인이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 온 이스라엘 사람 엘리멜렉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가 그 남편이 자식을 두지 않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고향 모압을 떠나서 낯선 땅 이스라엘로 왔으니 이 과부로서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이겠습니까? 이런 룻의 가문에 기어 물을 자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보아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보아스는 이스라엘 사람이오 또 우리로 치면 신앙인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보아스는 룻기 3장에서 룻의 가문에 기어 무르는 일을 위해서 나서서 도와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아스는 지금 기어 물을 자의 순서가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고요? 기어 물을 순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룻기 3장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나으로 나는 위험을 부를 자이며 기부를 자로서 나보다 더 극강 사랑이 있으니
아멘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물을 자이나 기업 물을 자로서 나보다 더 뭐 한 사람이 있다고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보아서 즉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이 은혜라는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해서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보아스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또 실력이 있고 룻이 자기를 찾아와서 도움을 구했다고 하더라도 이 기어 물을 자에 순서가 있으니 그 순서대로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어 물을 자에게 지급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 우리 3절 4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3절 4절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보아스가 그 기어 물을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함으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내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내가 물으려면 물으려니와 만일 내가 물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내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물을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물으리라 하는지라
아멘 그런데 이 기업 물을 자가 자기가 룻의 기업을 이어주게 되면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것을 포기하고 자기는 기업을 부르지 않겠다고 거절을 합니다. 그 말씀이 5절 6절에 나와 있는데, 다시 한 번 보 5절 6절의 말씀 시작,
보아스가 이르되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어 물을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물을 것을 니가 물으라 나는 물르지 아니하는지라.
아멘 이 보아서는 기어 무르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순서를 지키고 그 과정을 무시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세상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떤 상황이나 문제 앞에서 이와 같이 이 과정을 잘 지키는 그 과정을 잘 지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너무 혹 은혜로 은혜로 하는 태도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은혜면 다 되고 은혜로 하면 다 주님이 지켜주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과정을 무시해 버리고 무조건 은혜로만 하려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래전에 서울에 있었던 이 삼풍 백화점 이 사건을 잘 알 겁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대표가 선교사로서 사역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마 이분에게도 은혜로워 하는 마음이 있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대충 지어도 주님이 주님은 은혜로 우리를 지켜주시겠지 하는 그 은혜로라는 마음 그것이 어쩌면 큰 사고로 이어지게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사업을 합니다. 비록 대충 운영해도 집사인 내 사업체는 주님이 은혜로 도와주시겠지 이런 마음 이런 마음을 내려놓으시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은혜로만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상대를 할 때에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은혜로 은혜로 하다 보면 오히려 불신만 가중되게 되고 오히려 상처만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도 가정도, 내 사업도 비록 더디게 이루어질지라도 그 과정을 잘 지켜가면서 이루어 가는 것이 그것이 더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급하게 빠르게 막 그걸 판단하고 뭘 시정을 하다 보면 주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다 보면 그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두 번째는 은혜는 결국 손해라는 교훈입니다. 은혜는 결국 뭐라고요? 손해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기업 물을자의 선택 기준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손해를 입을 것인가, 손해 보지 않을 것인가 이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손해를 입을 것인가 내가 손해 보지 않을 것인가 우리 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6절의 말씀 시작
그 기억 부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의 손이 가 있을 것이라 나를 위하여 이루지 못하노니, 내가 그 것을 내가 보라 나는 부르지 못하겠노라 하느니라.
아멘, 그 기업 물을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물을 것을 니가 물어라 나는 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자기가 이 기업을 물으면 손해가 날 것 같으니까 내가 무르지 않겠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보아스는 그 손해를 입더라도 내가 기업 무르는 일을 감당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와 받지 않는 자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우리 성경을 자세히 읽다 보면 이 손해 보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20장에 보면 이삭의 우물을 파는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까?
먼저 아브라함이 죽고 나중에 이삭의 아버지가 파던 우물을 다시 파게 됩니다. 그러자 그럴 목자들이 와서 그 우물 우리 거다.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삭은 그것을 그들에게 주고 또 다른 우물을 팝니다. 그랬더니 또 다시 또 와서 그 우물로 인해서 다투게 되자 이삭은 또다시 그 우물을 넘겨주고 다른 우물을 파고 비로소 다툼이 다 사라졌습니다.
어찌 보면 이삭은 이런저런 손해를 아주 많이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손해 보게 하시지를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삭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역시 그의 조카 롯에게 니가 좌하면 나는 우할 것이고 니가 우하면 나는 좌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선 선택권을 자신에게 두지 아니하고 그 조카에게 모든 것을 다 양보했습니다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 손해를 본 이야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고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조금은 조금은 손해 보며 살려고 하는 그런 마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손해만 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살고 돈 벌고 성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저는 부자들이 참 많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주님이 손해 보라고 하시는구나라는 어떤 그런 마음,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듯이 손해 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자의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다.
나는 내 눈에 절대 손해 볼 거 안 할 거야. 절대 내가 절대 내 손해 안 볼 거야.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은혜받은 자와 은혜 받지 않는 자의 모습이 세상 사람과 비교해 보면 아무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손해 볼 기회를 주실 때 그때 한 번쯤 손해 봐주는 은혜 입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제가 조금 전에 손해 볼 기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손해를 보는 것도 기회를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내가 손해 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 손해를 보신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세 번째로는 은혜가 사라지면 계산만 남습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뭐가 남는다고요? 예 계산만 남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손해 보는 것을 못하는가? 자세히 보면 은혜가 식은 사람이 절대 나는 손해볼 짓을 안 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도 가만히 있어도 성도가 될까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만 다니고 세상에서는 내 고친 내 방법, 내 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게 과연 성도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만약 성도가 이 세상에서 뭐라고 해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손해 보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우리 달성 교회 성도님들은 이 손해 보는 성도들이 저는 참 많다 그렇게 봅니다. 이른 아침 일찍 주일 전에 나와서 봉사를 하는 성도들, 성도들을 태우기 위해서 차량 운행하는 우리 차량 부원들,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성경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우리 교사들, 또 성도들을 먹여야 된다는 사명으로 열심히 주방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손해가 얼마나 무지막지합니다. 손해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고 우리 달성 교회가 그나마 은혜가 있는 교회인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손해 보심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주님은 무슨 손해를 보았을까?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손해를 보셔서 이 땅에 오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면서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얘들아 너희도 나처럼 나를 닮아서 세상에서 손해 보는 자가 되라 하지 않겠습니까? 악착같이 돈 많이 벌고 부자가 되라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손해 볼 수 있는 자가 되라. 아마 여러분들도 예수 믿고 처음에는 나름 이런저런 손해도 보고 양보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혜가 사라지고 또 예수 예수 믿는 기쁨 그런 감벽이 사라지다 보면 손해 보는 마음은 지는 것입니다. 손해를 안 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도에게 은혜가 떨어지면 사라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은혜가 사라지면 예수님이 내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누가 사라진다고요? 예수님 여러분 지난날 생각해 보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봉사 헌신할 때 그때는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다 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있죠.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면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뭐가 나타날까요? 세상의 이익만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가 보이면 세상의 이익도 조금 내려놓을 수 있는데 예수가 안 보이니까 당장 지금 눈앞에 현실 눈앞의 이익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은혜가 사라지면 나만 잘 보입니다. 누가 잘 보인다고요? 내가 너무 잘 보입니다. 내 감정, 내 서운함, 내 상처. 성도들도 보면 자기가 남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내가 상처받은 것만 그것만 보고 있거든요.
그런데 때로는 자기로 인해서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는 안 보입니다. 나만 보이는 것이죠. 내 자랑, 내 명예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면 굉장히 섭섭해집니다. 내가 너무 잘 보이면 정말 내가 부끄러워할 것도 있는데 내가 부끄러운 것조차도 모른다고 하면 그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은혜가 식으면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가 보이지 않고 그저 이 땅에 이익만 보이고 나만 보인다면 그 모습은 어떻게 보면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어찌 은혜 받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보아스의 행동을 통해서 그리고 기어 물을 자의 모습을 통해서 은혜 받은 성도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먼저는 비록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세상 속에서는 그 과정과 절차를 무시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은혜는 결국 내가 손해 보는 이야기로 채워져야 합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섬기고, 그래서 내가 더 피곤하고 힘들고 내 물질도 사라지고 이런 손해 보는 이야기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랬었고 또 신앙의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자신의 손해 보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통해서 내가 뭘 덕을 보겠다 그런 생각하시는 분은 이 자리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반대로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어떻게 하면 잘 섬길까 그런 어떤 손해 보는 그런 마음, 그런 중심에 있는 성도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은혜를 잃으면 계산만 남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에 천국에 이르렀을 때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샘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샘은 누가 얼마나 이익을 남겼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느냐 아니라 내가 이 땅에서 얼마나 내가 손해를 보며 살았느냐 그것을 주님께서 보시지 않겠습니까?
은혜 받은 성도는 자신이 손해를 지금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그저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그저 주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냥 주의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가 되고 헌신할 수 있음이 기쁨이 되어서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 은혜받은 자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은혜 안에 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꼭 붙잡아주시고, 결코 하나님은 손해 보지 않는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다 은혜 안에 있는 자, 복이 있는 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