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벽
이영선
벽을 짚고 걷는다
흐릿한 가시거리에 드리워진 그림자
팔에 꽂힌 주사 바늘
낮과 밤을 정제한 수액을 맞는다
앰뷸런스에 실린 몸
한번 문이 닫히면 알아볼 수 없는
모든 길은 바닥에서 바닥으로 흐른다
자르는 손목과
봉합하는 손목이 나란해지는 곳
고인 연못에도 햇살은 반짝이고
마른 가지에도 바람은 물결쳐
투명한 이중창에 내리는 달빛
굴절된 초점으로
내일의 판타지를 읽는다
석양에 물드는 축제의 메아리
부서지는 대로
깨어지는 대로
아모르파티
어둠에 분절된 얼굴들
꽃병에 꽂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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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이영선
아버지는 죽을 좋아하셨다.
전복죽, 야채죽, 쇠고기죽, 흑임자죽
죽이란 죽은 잘 드셨다 몸이 허한 날. 불린 쌀에 정성 담아 오래 끓여낸 죽이 제일이라 하셨다. 삶이 빡빡해서 더부룩해지던 뱃속. 뜨거운 죽을 휘휘저어 넘기면 뭉쳐있던 생각도 풀려 목구멍부터 편안해진다 하셨다 헛헛한 세상이 참 좋다 하셨다
어머니는 밥이 최고라 하셨다
흑미밥, 현미밥, 검은콩밥, 흰쌀밥
그 중에 윤기 잘잘 흐르는 흰쌀밥을 고집하셨다 밥통에 밥이 부족할까 죽이 되진 않을까 날마다 노심초사 밥물을 살피셨다 고달픈 하루를 늘 챙겨주던 어머니의 압력밥솥. 젖은 세상에서 고슬고슬 지은 밥을 그릇에 꾹꾹 담아내셨다 허여멀건 죽만 아니면 뭐가 되어도 괜찮다 하셨다
바스러진 아버지 곤죽으로 엉키던 날
평생 죽만 쑤는 인생은 되는 일이 없다던
어머니
허공에 흩뿌려진 얼굴로
빈 그릇 매만지며
죽을 쑤던 때가 좋았다고 깊은 한숨 쓸어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