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청에 근무하는 분의 기행문입니다.
마음에 와 닿아서
또 지리산 종주를 하고자 하는 분이 계시거들랑
도움이 되라고 올렸습니다.
긴 글이니까 한글에 올려서 보든지 프린터해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산에 무척 가고 싶네요
특히나 가을바람이 지금처럼 솔솔 부니 더더욱...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고독하고
세상 살면서 힘든거
산에 가면 위로받을 것 같고
맘껏 울어도 보고
그런 나 편안히 감싸 안아줄 것 같은
그런
...
그래서 다시 돌아온 이자리에서
다시 의연하게 더 씩씩하게 살수 있게 해 줄 것 같은 그런 기대
산은 그런 것 같습니다.
지리산은 그 웅장함에서처럼 국립공원 제 1호로 지정된 곳이다.
3개도 5개 시·군(전라도는 남원군과 구례군 경상도는 산청군, 함양군, 하동군)으로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지만 종주는 뜻대로 이루어진 적이 많지 않다.
산행 한 달 전부터 인터넷 산장예약을 하고 새로운 정보탐색과 이것저것 산행을 위한 물건을 사며 설레던 마음... 기다림과 그리움에 길게 느껴지는 8월이었다.
배낭에 꼼꼼히 짐을 싸는 마음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그렇듯이 설렘과 약간의 긴장으로 삶에 변화를 주곤 한다. 무척 힘들었던 몇 달 동안의 마음을 보상받으려는 듯 이번 여행에 대한 나의 기다림은 더욱 간절하고 간절했다.
산행을 위해 몰두해 있는 나를 염려하는 동료들의 마음이 날 위해서임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내가 왜 이렇게 산에 몰두하는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산은 하나의 나의 삶이 담겨져 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깊어 지친 마음을 보상받고 그 속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나면 남은 나날이 조금은 자연 속에서 혼이 묻어나 잘 살아지는 마음이 들기에 난 떠나곤 한다. 산으로.. 그러나 그런 마음을 다른 이에게 어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첫째날
8월 25일 일요일 맑음
화엄사 ∼ 노고단( 1507m) ( 7km : 4시간10분)
특이한 엉겅퀴를 만나다. 노고단의 운해와 저녁노을을 바라보다.
새벽 5시40분
자가용으로 태안을 출발하여 논산을 거쳐 대전 입구에 들어서자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대전 남부순환도로)가 개통이 되어 한시간만에 경남 산청IC를 빠져 나왔다.
산청에서 자가용을 대신 운전해 줄 기사님을 알게 된 것도 인터넷 덕분이며 이번 여행을 하루정도 시간낭비 하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산청에서 만난 기사 님이 우리를 화엄사 입구에서 내려준 시간이 11시 25분.
화엄사 입구의 찻집 옆에서 간단히 도시락 점심을 먹었다.
화엄사 경내를 잠깐 둘러보고 드디어 산행을 시작한 건 정각 12시.
노고단 오르는 길은 몇 년 전의 기억에 비해 매우 잘 정돈되고 다듬어져서 가파른 돌길은 없어지고 거칠지 않은 계단 길을 오르는 기분으로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산행이 가볍다.
그러나 약 2KM를 지나면서 명순이가 매우 힘들어한다. 하얗게 변한 친구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하산하여 성삼재로 올라가자는 나의 제안을 친구는 미안했던지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위해 힘들어도 노력하는 벗에게 내가 도리어 미안하다. 다행이 소금물과 사탕을 입에 물고 친구는 점점 기력을 회복하여 노고단 산행은 시간이 좀 지체되긴 했지만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두시간 쯤 올랐을까. 메모를 하는 내 모습을 친구가 사진에 담는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은 다듬어지긴 했어도 계속 오르막이다. 오르는 동안 계곡도 계속 옆구리에 머문다. 계곡의 물줄기가 크지는 않지만 산이 있는 곳에 물은 역시 너무도 잘 어울리는 부부 같기만 하다.
한참을 그렇게 오르다 벗들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바위에 앉아 노트에 메모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열심히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니 역시 나는 지금 산 속에 있구나 하는 마음. 답답했던 마음에서 점점 초연하게 정돈되는 듯한 마음이 든다.
5KM 정도를 지나면서 상당히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다. 이곳이 바로 깔딱 고개인가 보다. 안개가 갑자기 어디선가 밀려오면서 맑던 하늘이 비를 뿌릴 듯한 느낌까지 들었지만 어디선가 야호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고지가 멀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에 기운을 내어 걸었다. 노고단 도착 1KM를 앞두고 막바지 오르막을 지나니 성삼재에서 오르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을 드디어 만났다. 성삼재까지 도로가 생기면서 우리처럼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오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 올라오는 동안 하산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천천히 오르는 동안에도 우리를 앞서가는 산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람들은 도로를 이용한 길을 통해 예전보다 좀 편안한 산행을 하는가보다.
친구는 나에게 "왜 들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야 " 하면서 오르는데 힘이 든다는 투정을 한다. 화엄사에서 노고단 길을 선택한 것은 성삼재 때문에 인적이 드물어 들꽃이 많을 것이라고 내가 우겼기 때문이거든. 난 꼭 이 길을 오르고 싶어서 약간의 거짓말을 했었다.
드디어 만난다. 지리산에 들어서서 만나는 특이한 들꽃들을...
노고단 산장 직전에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한 것은 엉겅퀴다. 흰색의 엉겅퀴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의 이름은 흰바늘 엉겅퀴. 한번도 보지 못한 색깔이 그 고고함에 한동안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삼백초(까치수염 비슷한 것), 자주지장보살꽃( 노란빛), 흰지리터리풀, 원추리, 동자꽃, 산오이풀, 섬바디 등의 들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기에 들꽃을 담았는데 현상이 잘 되려는지...
무거울까봐 가져갈까 망설였다가 챙긴 들꽃 책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가슴이 설레서 책을 통해 우리가 만난 꽃들을 찾으면 우리 모두 감탄을 금지 못했다.
노고단 도착(1507M) 오후 4시 10분
노고단 정상은 2002.12.31일까지 몇 년 동안 휴식년제에 들어가서 노고단 탐방을 예약하여야만 실제 노고단정상을 오를 수가 있다. 노고단 탐방을 오후 4시로 예약하였으나 아쉽게도 도착이 늦어지면서 탐방의 기회를 잃었다.
산장에 예약명단 확인 후( 하룻밤에 일인당 오천원, 담요한장 천원) 정해진 잠자리를 배정 받으니( 산장번호 21-23번) 우리가 오늘 산장에서 묵는 첫 번째 손님이었던지 아무도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깨끗이 옷을 갈아입고 여유 있게 취사장으로 향했다.
산장은 깨끗한 편이다. 산에서의 규칙은 세면이나 비누사용 금지, 음식물은 버리지 않아야 하며 쓰레기는 되가져 가는 것이다. 노고단은 쓰레기 분리수거가 가능한 곳이었지만 나름대로 지킬 것은 지키고 싶었다.
취사장에서 밥을 하는 동안 오늘 하루를 접어보는 메모를 했다. 메모하는 동안 영주는 미역국이 맛이 좋다고 한다.
오늘의 저녁메뉴는 햇반, 미역국, 햄, 김치, 멸치볶음이다.
탈수증상이 있었던 친구가 시원한 맥주를 원했는데 산장에서는 맥주를 안 판다. 친구가 기념이라고 노고단산장에서 파는 지리산 손수건을 사서 내게 선물을 준다. 모두들 힘들어도 산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 때문에 아직도 긴장감이 얼굴에 가득하다.
오후 6시 50분
저녁식사를 마치고 노고단 정상부근까지 산책에 나섰다.
노고단은 여름철의 원추리 군락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노고단 정상 1507M라는 간판이 있는 곳에서 탐방은 못했지만 산책로를 걸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산의 기가 느껴진다. 산책로를 홀로 걷다가 뒤늦게 명순이가 나를 찾았다. 우리는 많은 들꽃에 감탄하면서 셀레는 마음으로 사진기에 노고단을 담는다. 그러기를 한참.
우리 앞에 등장한 노고단의 구름과 구름사이로 붉게 빛나던 저녁노을. 노고단의 운해는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이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조화에 신기로움이 가득 찬 모습은 언제나 숙연한 감동과 이름 모를 편안함을 주곤 한다.
산책길에서 보니 전에 우리가 텐트를 치고 지리산의 밤하늘에서 별을 헤이던 곳이 지금은 모두 폐쇄가 되었다. 지리산 전체에 야영과 취사를 금지하게 되면서 텐트를 치던 자리엔 나무들이 심어져있다.
오후 8시 15분
내일의 산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누웠지만 하얀 형광 빛은 밤 10가 되어야 꺼진다나. 친구들이 뒤척인다. 벌써부터 코를 고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야릇한 기분이었다.
첫째 날을 보내면서 기록한 메모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 홀로 하는 산행도 분명 의미 있지만 긴 지리산 종주를 위해 친구들은 훌륭한 산행의 동반자로서 오늘 하루 무사히 마치게 됨이 감격스럽다. 산은 역시 위대하다. 노고단의 구름과 저녁노을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 첫날인가. 많은 들꽃과 새의 지저귐, 그리고 시원한 계곡 물줄기, 흠뻑 적시는 흥건한 땀, 산은 나의 마음을 편안히 감싼다. 노고단에서 바라본 산줄기는 내 마음을 온전히 편안하게 하는 마력을 발휘한다. 산에서 사진을 잘 찍지 않지만 이번 산행은 다르다. 왠지 깊이 깊이 남기고만 싶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긴 마음의 평온을 위해, 나의 의지를 위해, 몸과 마음을 위해.
다시 돌아가면 이 의지처럼 나 자신을 잘 이겨내고 싶다. 그러기에 오늘의 산행은 더없이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
아침 6시
산장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상쾌하다. 산장도 대체로 깨끗하고 비교적 편안하게 잠을 이룬 것 같다. 간단히 산장에서 감자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전 7시 산장을 출발하여 노고단 정상부근에 올라서 운무 바라보며 사진 한 장에 세 사람의 추억을 담았다.
노고단에서 돼지평전은 한마디로 흰진범이라는 야생화 나라이다. 하얗게 핀 흰진범 천지다. 그 외에도 모싯대, 짚신나물, 둥근이질풀.. 등의 꽃이 가득하며 산 속으로 점점 깊이 묻혀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평탄한 숲길이다. 돼지평전은 멧돼지가 원추리를 자주 먹으러 나타나던 곳이라서 이름 붙여진 것이란다.
멀리 산등성이들이 화려하게 드러나는 평원에서의 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만 같다. 언젠가 텐트를 짊어지고 노고단에 왔다가 반야봉을 향해 친구들 넷이서 이 길을 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8시 40분 임걸령 도착
1400고지의 돼지평전이나 임걸령 오르는 길은 전망이 아주 빼어난 풀밭이다.
임걸령 고개에서 잠깐 멈추며 간식을 먹었다. 보이는 것은 거대한 능선들과 흘러가는 구름, 산등성이를 가리는 안개. 안개가 스물스물 흘러오다 산을 가리고 다시 흘러 산의 장엄한 언저리를 보여준다. 장관이다. 오로지 산이 보여주는 절묘한 아름다움이다.
9시 30분 노루목 도착
이곳은 반야봉으로 오르는 삼거리(갈림길)이다.
영주는 이곳에서 우리의 배낭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기로 하고 명순이와 둘이서 반야봉으로 향했다. 먼저 떠난 이들의 배낭이 노루목 한 귀퉁이에 가득하다.
노루목에서 반야봉 오르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지리산에 이런 길도 있었네 할 만큼 오솔길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길이라고 명순이가 중얼거린다. 노루목에서 40분정도 올랐을까/ 영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들꽃이 천지에 가득하다.
산오이풀, 모싯대, 동자꽃, 둥근이질풀, 그리고도 이름을 아직도 모르는 꽃들. 그리고 주목나무( 나중에 알았는데 주목이 아니라 구상나무)에 꽃이 피어 그 향내가 진하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보아도 지리산의 나무와 꽃들은 어쩜 이리도 건강 해 보이는지....싱싱한 모습이 너무 멋지다. 나무와 꽃과 풀 모두에 기가 잔뜩 들어있는 것 같다.
10시 5분 반야봉 1715M고지에 도착.
반야봉에는 바람과 안개가 가득하다. 시원한 바람을 통해 안개가 출렁인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면서 산언저리의 고사목이 눈에 들어온다. 늙어 백년 죽어 천년이라는 고사목을 지리산 자락에 들어서서 오늘 처음 만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말로 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진한 무언가가 가슴에서 울렁인다. 왜 그런지 고사목만 바라보면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말이 없어지고 만다. 그냥 고사목과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다.
반야봉 직전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가 반야봉에 이르자 모두들 벌써 하산했는가보다. 반야봉 정상에 조용히 친구와 둘이서 한참을 서 있었다. 언젠가 반야봉에서 내 발 밑에 가득하던 구름을 바라보았는데 오늘은 약간은 흐려서인지 구름대신 바람과 안개다. 그 또한 인상적이다.
노루목을 다시 내려오는데는 약 30분 정도 소요하면서 꽃과 하늘과 안개를 감상했다. 노루목에서 다시 만난 우리가 간식을 먹으며 메모를 하는 동안 새 한 마리와 다람쥐 한 마리가 우리들 가까이서 머물다 간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11시 정각 노루목 출발
11시 20분 삼도봉 도착 (1550M)
삼도봉에는 작은 바위에 세 개 도의 이름이 씌어져 있다. 이 봉우리에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분기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이 화개재까지 이어져 있고 화개재에서 또다시 2km정도 가파른 오르막에 서면 바로 거기가 토끼봉이다.
화개재를 거쳐 토끼봉(1533M)에 도착한 것은 12시 30분
노루목에서 토끼봉까지는 꽤 무게가 느껴지는 산행이다. 높이는 차이가 없지만 산등성이가 보이지 않아 약간은 답답하다. 숲길은 계속 오르막 내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이 힘들었는지 명순이는 어깨가 깨지는 것 같다 하고 영주는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고 한다.
토기봉에서 도시락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토끼봉에서 주능선을 따라 6km정도 더 가면 연하천 산장이다. 이 길은 비교적 평탄하지만
연하천 산장을 1KM앞두고 많이 지친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고 안개가 산자락에 가득하다. 스물 거리며 기어드는 안개와 습한 느낌은 나름의 운치가 있다. 지리산에 와서 이런 날을 만나지 않은 적이 거의 없듯이 지리산은 변화무쌍한 곳이다.
2시 40분 연하천 산장에 도착.
뒤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산장 주변에 많다.
연하천 산장은 지리산 산장 중에 비교적 아담하고 오래된 건물이다. 전에 언젠가 이 근처에서 텐트를 쳤던 기억이 난다. 연하천 산장주변의 텐트를 치던 공간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모두 없애고 철조망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주변을 되살리고 있었다. 참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하천 산장에도 예약은 되었으나 산행을 멈추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내일 비가 올 가능성이 커서 우리는 벽소령까지 가기로 했다. 오후 3시 출발.
연하천에서 벽소령은 약 6km의 거리로 연하천까지의 길이에 비해 굴곡은 비교적 없으나 긴시간의 산행으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지리산 가장 한가운데로 들어서 있는 기쁨이 너무 커서 감격스러웠고 시간도 넉넉하여 마음의 부담도 적었다. 벽소령 도착 10여분 전부터 이슬비를 만났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더니 .... 그래도 이슬비를 맨몸으로 만났다.
드디어 지리산 8경의 하나인 벽소명월( 碧 明月) 로 유명한 벽소령이다.
오후 4시 50분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
지리산 자락의 한가운데에 묻혀 있는 것이다. 어디에도 산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문 것이다. 그 자체가 나에게는 감격일 뿐이다.
벽소령 산장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을 묵게 할 수 있는 시설이었으나 노고단보다는 취사장이 작고 좁았다. 식수는 산장에서 약 50m정도 내려가야만 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산장주변에 안개가 자욱하다. 다섯시쯤인데도 늦은 저녁 같은 기분이 든다. 벽소령 산장은 국립공원에서 관리를 하는데 산장지기 아저씨가 꽤 불친절하다. 아마도 많은 사람으로 힘이 드는가보다. 산장예약으로 잠자리를 확인하고 짐을 내려놓은 뒤 취사장으로 내려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취사장에 가득하다. 오늘의 저녁메뉴는 북어국에 카레라이스, 김치와 멸치볶음, 단무지.
모두들 밥이 너무 맛있다고, 힘든 하루의 피곤이 가신다고 한다.
명순이의 발은 물집 투성이다. 많이 걸었나보다. 그래도 우리들 모두 건강상태는 양호.
보람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나름의 대견함과 알 수 없는 편안함이 그득한 하루.
벽소령 산장에 누워 세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오늘 만난 들꽃들을 책에서 찾아보며 일기예보도 듣는 여유를 가지며 일찍 이불 속에 들었다. 여전히 이슬비는 내리고 있다. 내일의 산행이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지리산에서 비를 만나지 않으면 그 또한 의미 없으리... 비오는 산행도 멋진 일이지 않은가¡
오늘 우리가 만난 들꽃의 이름은
흰진범, 꿩의다리, 삼백초, 흰꽃바디, 흰바늘엉겅퀴, 원추리, 동자꽃, 회향, 둥근이질풀, 짚신나물, 질경이, 참골무꽃 , 엉겅퀴, 자주지장보살꽃, 모싯대, 톱바위취 등....
우리가 책에서 들꽃을 찾으니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꽃 이름을 묻는다. 명순이와 나는 신이 나서 꽃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아침 7시기상
내가 메모를 하는 동안에도 영주와 명순이는 이불 속이다. 비가 내리니 서둘러 산행을 하지 않기로 했다. 밤사이 영주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로 지은 산장에서 어찌 물이 떨어지는가. 바로 옆에서 떨어지는 빗물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영주의 두 눈은 충혈 되어 있고 명순이는 물집 잡힌 발에 대일밴드를 바른다. 나의 얼굴과 눈은 퉁퉁 부어서 밉상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마음만은 평화롭다. 서로를 바라보고 여유 있는 표정이다.
산장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10M 앞이 안 보인다. 바람도 심하고 이슬비는 계속 내리기에 아침을 천천히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어쩌면 비가 개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아침 메뉴는 라면 3개에 밥 말아서 김치와.
친구들은 입맛이 없나보다. 왜 나는 이리도 입맛이 좋고 배가 고픈 것인지. 꿀맛이었다. 라면 3개를 거의 다 먹고도 간식이다.
8시 40분 벽소령 출발
지리산 자락에는 들꽃이 많은데 산자락마다 모여있는 들꽃이 약간 다르다. 노고단은 원추리와 엉겅퀴, 돼지평전에는 흰진범, 반야봉에는 산오이풀과 둥근이질풀, 그리고 여기 벽소령에서 선비샘 가는 길은 비비추가 가득하다.
선비샘(1491M)에 9시 50분 도착.
선비샘에는 말 그대로 식수가 제공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취사를 하면 안 되는데도 뒤늦은 아침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취사금지구역인데 사람들은.....
영주가 그랬던가. 여기서 식수제공이 될 줄 알았으면 무겁게 물을 잔뜩 짊어지지 않을 것을 한 것은. 그만큼 배낭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는가 보다. 배낭의 무게가 첫날과 다름없는 무게로 느껴지는 것은 내리는 비가 한 몫 했을 터인데...
11시 15분 칠선봉 도착(1558M)
선비샘을 출발한 지 40여분만에 칠선봉에 도착했다. 원래 칠선봉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휴식공간이며 7개의 바위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흐린 날씨와 안개로 아름다운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비가 내려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않은 상태로 지나치고 말아서 무척 아쉽다.
영신봉(1651M)에 12시 20분 도착.
오르막을 힘들게 올랐다. 영신봉 능선에 올라서서도 여전히 안개가 가득하다.
아쉽다. 너무도 아쉽다. 아름다운 절경을 이리 놓치다니.
모두들 네발로 기듯이 걸었다. 심하게 퍼붓는 비는 아니지만 입은 판쵸는 덥고 배낭은 전날보다 더 무겁게만 느껴지니 결국 명순이는 판쵸를 벗어 버린다.
12시 50분 세석대피소 도착
드디어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세석평전이다.
지리산 8경의 하나로 봄이면 철쭉제가 열리는 세석..
세석평전, 세석고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 언제가도 이곳에서 비 오는 저녁 날 잠을 자고 일어나니 새벽에 산장을 나선 우리에게 안개가 저만큼 걷히고 해가 나면서 펼쳐진 평전의 아름다운 모습에 혼을 잃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세석평전은 말 그대로 방대한 자연의 세계이다. 안개로 인해 황홀하도록 넓은 평원은 볼 수 없었으나 그래도 곳곳을 통해 지리산 여느 곳과는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세석은 말 그대로 안개와 바람과 산오이풀의 나라다. 잎과 꽃에서 오이냄새가 나서 산오이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들꽃. 산오이풀이 지천에 깔렸다. 여기서 우리가 만난 아름다운 또 하나의 꽃은 "용담". 특이한 보랏빛의 용담에서는 알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진다. 사진기에 담았다. 소중한 마음으로...
날씨가 맑은 날도 바람이 유명한 세석 평원에 비 내리는 오늘의 세석 바람이 이상하리만큼 친근감 있고 아름답다. 산장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안개가 없다면 아름다운 평전을 바라볼텐데 아쉽다는 마음이 컸지만 안개바람도 매우 인상적이다. 산장으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습한 안개바람을 열심히 마셨다. 입을 크게 벌리고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대면서.
아름다운 세계 세석에서 만난 들꽃은 용담, 구절초, 쑥부쟁이, 송이풀, 호오리새, 돌쩌귀, 비비추, 외갓냉이 그리고 가문비나무와 구상나무...
세석은 또한 개꽃이라 하는 철쭉이 가득하다.( 진달래는 참꽃이라고 한다. )
우리가 흔히 부르던 주목도 주목나무와는 다른 구상나무임을 알게 되었다. 세석의 50년전 모습이 구상나무로 가득한 곳이었는데 일제시대 때 모두 없어진 후 철쭉과 들꽃 세상에 구상나무를 새로 심기 시작하여 앞으로 몇 십 년 후에는 이곳이 다시금 구상나무의 나라가 될 것이란다. 언젠가는 구상나무 가득한 세석을 만날 것이 한눈에 그려진다.
세석에서 점심메뉴는 도시락에 야채 죽--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너무너무 맛있는 야채 죽.
친구들이 감동한 맛이다.
점심을 마치고 걷는 동안 몸은 점점 무겁다.
영주의 신발은 벌써부터 물이 쩌걱 된다는데 나의 등산화도 방수가 잘 되는 것인데도 양말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함을 느낀다. 땀을 무척 흘리는 명순이는 땀과 빗물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1시55분 촛대봉(1703M) 도착
천왕봉이 가까워진 느낌이다. 전에도 여러 번 경험 있는 이곳에서 천왕봉 가는 길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전히 멋진 촛대봉. 안개에 쌓인 촛대봉.
안개로 인해 촛대봉 가는 아름다운 길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 못해 몹시 속상하다. 말 그대로 안개에 가려 촛대봉이 서 있는 줄도 잘 모를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 바람이 너무 시원하여 세석평전에서처럼 입을 크게 벌려 들이마시던 안개바람.....
3시30분 연하봉 도착
세석에서 장터목 가는 아름다운 길목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어서 아쉬운 산행이지만 비 내리는 날 고생한 기억이 두고두고 남을 것만 같다.
연하봉에서 장터목 가는 길목에서 바위를 타다 미끄러져 영광의 상처가 오른팔과 왼쪽 무릎에 생겼다. 가져간 무릎보호대를 하는 동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장대비를 맞으며 부지런히 걷다보니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 비가 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석에서 장터목 가는 길목은 비교적 평탄한 길이며 아름다운 고사목이 눈에 띄는 곳인데 이번 산행에서는 고사목 대신에 안개 속에 운치 깃 든 지리산 자락이 드러났다 숨었다를 반복하면서 경이로운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그래도 장터목 도착 직전 안개 속에 드러나는 고사목이 또다시 마음을 흥분시킨다.
들꽃과 고사목과 안개와 바람....... 그리고 산과 하나인 우리들이다.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면서 산이 드러나는 그 아름다움. 안개가 바람에 몰려 산등성이가 보이기 시작하자 급한 마음에 사진을 찰칵 찰칵. 어쩌면 이번 산행에서 이토록 그림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에 젖은 배낭에서 사진기를 꺼내다 명순이와 잠시 말다툼 한 것도 지금 생각하니 추억이고 우습다. 아름다운 절경에 내가 얼마나 흥분했었던지...
그렇게 하기를 잠시. 안개가 산을 삼키면서 다시금 절경이 안개 속에 묻혔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대자연에 대한 영광이다.
오후 4시 장터목 도착
장터목은 언제나 사람들이 분비는 곳인가 보다. 아마도 오르막 내리막의 마지막 부분이라서 일까. 장날이 따로 없다. 식수는 산장에서 50m정도 내려가야만 한다. 그래도 다리가 풀리거나 힘들지 않아서 물을 뜨고 음식을 만드는데 힘이 들지는 않았다. 산장 또한 비교적 크고 새로 세워진 건물이다. 예약자가 많아서 애를 먹었는데 다행히 예약을 해놓은 상태라 기다리는 마음도 가볍다.
장터목산장에서 사건이 하나 생겼다. 밥을 하는 동안 잠깐 사이에 영주가 샌들을 잃어버렸다. 두 눈에 불을 켜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발을 열심히 바라보니 어떤 중년의 남자가 발 사이즈에 맞지도 않아 반쯤 걸친 영주의 샌들을 신고있는 것이 아니가. 사람들 참 이상하다. 멀쩡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어찌 남의 신발을 신어버린단 말인가. 아무리 비가 내려 등산화가 젖어도 .... 화가 났지만 신발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장터목에서 내가 끓인 김치 국에 밥을 말았더니 영주가 개밥이라고 적으란다. 난 맛있는데 영주는 왜 죽을 싫어하는겨....
밤 8시가 넘으니 장터목 산장지기 아저씨는 늘 그렇게 한다는 듯이 날씨가 흐려서 일출이 어려울 줄 알면서도 방송을 한다. " 내일 일출시간은 다섯시 20분 경이며 일출을 보실 분은 2시간정도 일찍 산장을 나서셔야 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
우리들은 자기 전에 맨소래담을 여기저기 바르고 서로 마사지도 해주고 누웠지만 그 날 밤 비 때문인지 안으로 들어온 파리 때문에 우리 모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면 마지막 산장에서의 밤이라서 벌써부터 아쉬웠던지...... 아마도..
산을 내려가야 하는 산행의 마지막 날이다.
벌써부터 서운함이 가득하다. 산장에서 세 번이나 잠을 잤는데도 어제 바로 산에 온 기분이라고 영주가 말을 한다. 나는 아쉬움에 말조차 할 수가 없는 기분이다.
날씨가 흐리니 서두르지 않고 아침 6시에 이불 속에서 나왔다.
대피소 유리창문으로 바라보니 어제 내리던 비는 그쳤는데도 안개는 여전하다.
일출은 보기 어려운 날씨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은 새벽 4시부터 산장을 출발했다. 산에 오르지 않은 우리도 새벽 4시부터 짐을 싸고 출발하는 부산한 소리에 잠을 깨었으나 이불 속에서 6시까지 뒤척였다. 일어나 보니 산장에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온몸이 여기저기 쑤신다. 어깨와 어제 미끄러진 팔과 다리까지. 그리고 천왕봉을 오른다는 기쁨보다 산행의 마지막이라는 기분까지 더욱 몸과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아닌지..
아침메뉴는 즉석국과 햇반. 남은 반찬인 멸치조림, 단무지, 김치
김치 없이 3분짜장 먹는 젊은 청년에게 김치를 나누어주니 무척 고마워한다.
오전 8시 장터목 출발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지만 날씨는 갤 것이 분명한 느낌.
역시 제석봉이 가까워지면서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한다. 제석봉 오르는 길이 지리산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우린 늘 제석봉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의 컴퓨터 배경화면이 제석봉의 고사목인 우리에겐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기억의 제석봉이기 때문이다.
안개에 드러나는 고사목..
비는 그쳤지만 안개는 아직 산자락에 가득하다. 바람이 안개를 몰아가려면 시간이 걸릴텐데 너무 빨리 제석봉에 도착한 것 같은 아쉬움이 크다.
고사목은 늘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삶을 생각하게 하고 삶을 느끼게 해준다. 언제나 말없이 내게 말을 건네는 모습으로.. 그러나 지리산 제석봉의 고사목들은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제석봉(1811M)에 도착
제석봉의 고사목 사연은 이렇다.
[원래 제석봉 일대는 전나무와 잣나무, 구상나무 등이 울창하였다. 그런데 자유당 말기 대규모 도벌로 무참하게 나무들이 짤려 나갔다. 이것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일자 도벌의 증거를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의 나무들이 지금처럼 앙상하다고 한다. ]
안타까운 것은 이들 고사목 마저 날이 갈수록 점차 쓰러지는지 언젠가의 기억보다 많이 사라지지 않았나 싶기만 하다. 쓰러지고 낮아진 모습의 고사목이 많이 눈에 띈다.
아픈 사연을 가진 고사목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라도 계속 남으면 좋으련만......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사목을 올려 다 보았다. 많이 아파 보이는 고사목들이 오래오래 "죽어 천년" 이대로 사라지지 말고 꿋꿋이 머물러 있어주기를......
제석봉에서 천왕봉 오르는 동안 날씨는 점점 더 좋아진다.
통천문이란다. 하늘로 오르는 길목.
암벽 벼랑사이로 좁은 통로가 바로 통천문이란다.
통천문을 지나 한껏 하늘로 뻣은 길을 오르면 천왕봉.
9시20분 천왕봉 도착.
"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된다"
왠지 신성한 느낌이 드는 글귀가 눈에 보인다.
천왕봉의 꽃은 쑥부쟁이와 용담, 구절초, 송이풀이다. 쑥부쟁이의 연한 보랏빛이 빛을 받아 너무도 아름다웠다.
천왕봉이 가까워지면서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해가 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산등성이가 드러나고 해가 구름을 걷으려 한다.
산 정상에 선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드러나라, 드러나라, 드러나라"
해가 뜨면서 바람이 안개를 몰아 산 저편을 드러내니 누군가 " 어딘들 안 좋으랴" 혼자서 중얼거린다.
오늘은 현숙이 생일.
명순이와 영주는 현숙이에게 메시지를 넣는다. 생일축하 메시지를 천왕봉에서..
보내는 이도 받는 이도 행복할 터이다.
천왕봉에서 산행동안 자주 만난 한 쌍의 연인과 사진 한 장 찍었다. 이런 만남도 인연이라고 자주 만나는 우리와 사진을 찍고 싶었는가보다. 우리가 밥을 나눠주고 간식거리도 주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던가. 여하튼 산에 오면 그렇게 모두 한마음이다.
10시 천왕봉 출발
아쉬운 마음으로 이제 지리산을 등지고 내려가야 한다. 모두들 말이 없어졌다. 아쉬움이 큰 것이다. 힘이 덜 들지만 하산길이 무겁고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런 마음 때문인가¡ 오를 때의 마음과 내려 갈 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지 싶다.
서로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참을 내려왔다.
11시10분 법계사 도착
법계사에서 산언저리를 바라보니 내가 언제 지리산에 있었는가 싶다. 어제까지 보았던 모습이 점점 눈에서 멀어지고 있음이 확연해진다. 법계사에 앉아 허탈한 마음을 가다듬는다.
법계사는 대웅전이 없다.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향해 예배드리는 법당이라는 적멸보궁이 대웅전 대신 자리잡고 있다.
스님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무겁던 우리 마음을 위로하는 가운데 적멸보궁 옆에 앉아 풍경이 바람에 맑은 소리를 내는 고요를 만난다. 잠시 후 새 한 마리가 노래하는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우리의 산행을 접어야 하는 마음이다. 마음을 채우기 떠난 여행이듯이 아쉬움을 접고 다시금 열심히 우리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마음으로 이제 마무리를 해야만 한다.
11시 40분 법계사 출발 한 후 칼바위를 접어들면서 시원한 계곡물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하산 길에 중산리 계곡 물소리가 무엇인지 몰라 친구들은 바람소리냐 폭포소리냐 하였는데 역시 이것은 중산리 계곡 시원한 물소리였다.
칼바위에서 40분 정도 더 내려오자 이제 정말로 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우리가 내려온 산자락이 아름다운 자태로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눈물 날만큼 아쉬움이 크다. 내가 왜 이렇게 산을 사모하는지 모를 일이다. 산자락에 서면 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인지 정말 모를 일이다.
오후 1시 30분
산을 벗어나서 매표소 직전에 젖은 등산화를 벗고 시원한 물줄기에 발을 씻은 후 샌달로 갈아 신었다. . 발이 상쾌하다. 피곤도 물러가는 느낌이다. 이제 정말 산을 등지고 다시 우리의 자리로 미련 없이 돌아가야만 한다. 아마도 이쯤에서 다들 아쉬움을 접고 이제 돌아가는 기분으로 마음의 정리를 하지 않았나 싶다. 나도 마찬가지.
1시 48분 중산리 매표소
지리산 새 지도를 샀다.
그러면서 매표소 직원에게 명순이가 던진 말은...." 아저씨. 어떻게 하면 이런 곳에서 근무하나요?" 친구도 나만큼 산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중산리 매표소로 내려오니 우리가 자주 만난 꽃 이름을 써놓은 간판이 보인다. 정영엉겅퀴와 지리바꽃.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꽃이었다. 지리산은 그렇게 이름모를 들꽃이 가득해서 지금도 들꽃들이 눈에 그려진다.
늦은 점심을 "천왕봉 집"에서 맛있게 먹었다. 산나물의 향이 무척 강했던 것 같다.
경남 산청은 대나무와 곶감과 밤나무가 그리 유명하단다. 길가에서 조금만 산으로 눈을 돌리면 반은 대나무고 반은 밤나무다. 택시 기사님의 고향자랑을 들으면서 산청읍을 빠져나와 다시 대·진 고속도로를 탄다.
돌아오다가 덕산 온천에 들러 목욕을 한 뒤 태안으로 돌아오니 밤 8시.
그때까지 저녁을 먹지 않은 현숙이와 함께 보쌈과 쟁반국수와 케익으로 산행을 마무리하며, 현숙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여행을 접었다.
여행후기 :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날들이다. 어찌 앞으로를 또 견디나 싶은 나약한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할 일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제는 산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접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하리라.
산이 내게 주었던 많은 감탄들처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산행처럼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