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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원감국사 보명탑비(順天 松廣寺 圓鑑國師 寶明塔碑)
시대 : 고려
연대 : 1314년(충숙왕 1), 1701년(숙종 27)
유형 : 비문
크기 : 전체높이 217.0cm
비신높이 : 181.0cm
너비 : 89.5cm
두께 : 20.5cm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송광사
서체 : 미상
찬자/김훈(金曛)
각자/미상
서자/김형오(金亨五)
圓鑑國師碑銘
(앞면)
曹溪山修禪社第六世圓鑑國師碑銘幷序.
奉祿大夫國學大司成文翰學士承旨臣金曛奉敎, 撰.
國師諱法桓, 後改爲冲止, 自號宓庵. 俗姓魏氏, 定安人也. 考諱紹, 戶部員外郎. 妣宋氏, 吏部員外郎子沃女也. 師生於丙戌十一月十七日, 眉面秀異. 九歲, 始就學, 凡經書子史, 過目卽頌, 又善屬文. 十九, 登壯元第. 奉使日域, 顯國美於異邦.
少有出塵之志, 時圓悟國師主法於禪源社. 師直造堂, 卽零染受具. 乃策杖南遊, 歷叅講肆, 去留爲叢林重輕. 師初不欲作住持, 人盖慕大原孚之高風也.
至年四十一, 始住金海縣甘露社. 有一禪德進師前請詩. 師云, “春日花開桂苑中, 暗香浮動少林風, 今朝果熟沾甘露, 無限人天一味同.” 茲詩膾炙人口, 遠近聞師, 想見其像.
自師入院, 宿德風馳, 後進雲集. 丙戌二月, 圓悟順世, 大衆擧師次繼席狀. 聞于上, 命員外侍郞金浩淡, 請師入院. 師於是年四月十六日, 入院開堂, 而嗣圓悟爲第六世.
住院七年, 更光普照之遺軌, 乃奏請田之表, 復土如舊. 其略曰, “舜厥聰明, 湯其齊聖, 盛業匹於三王, 休光隻於千古.” 上國聞師之風, 嘉師之德, 遣宮使迓師. 乘馹至中夏, 皇帝親自迎迓, 對以賓主之禮, 褒以師傅之恩, 擧國仰德, 萬民歸仁. 授金襴袈裟·碧繡長衫·白拂一雙, 皆道具也.
至壬辰八月初旬, 師示微疾, 癸巳正月初七日, 疾彌重. 十日晨起, 凈髮更衣, 謂門人曰, “有生有死, 人世之事, 吾當行矣, 汝等好住.” 門人請偈句, 師乃偈曰, “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曾失, 手中纔有一枝笻, 且喜途中脚不倦.”
萬浩長老問, “承師言, 故鄕歸路, 在什麽處?” 師云, “着眼看.” 曰, “看是什麽道?” 師云, “知則得.” 言訖, 泊然而逝. 顔色鮮白, 屈申如生. 是月廿日, 茶毘拾骨. 骨有五色, 互相明顯, 瑞氣亘天, 彌月不己.
上聞之, 震悼, 下勅書誄書, 慰門徒. 仍贈諡曰圓鑑國師, 塔曰寶明. 浮圖于曹溪之北洞. 師壽六十七, 臘三十九.
師性本寬裕, 心情純樸, 愛人救物, 禀自天然. 觀師之平生大槩, 可謂於世出世, 具足無虧, 眞大丈夫也. 嗚呼, 美哉! 門人等請跡立碑, 奉行狀, 聞于上. 命臣文之. 臣宿承慈誨, 又其高誼景行, 耳目所詳, 不可以辞, 語蕪淺爲辤, 故勉强而撰焉.
其銘曰, 淸凈摩尼 圓潔無虧 隨方各現 物不能欺名如意寶 動有靈奇 誰其似也 惟我國師有德從釋 牧牛正嫡 住諸叢林 俱爲上客隨處養恬 優游自適 爲衆所推 繼圓悟席荷擔重器 闡揚宗旨 學者雲從 景仰高致朝野歸崇 丐以物理 慮遠妨微 脫人禍機緖餘所庇 民阜國肥 道尊德茂 所嫌者壽明日墜空 白日沉照 道隨而㣲 天不我祐
紀美鐫珉 傳之不朽
大元延祐元年甲寅八月日, 門人大禪師靜眼等立石.
崇禎紀元後七十四年辛巳五月日, 花田後人金亨五重書幷篆.
(뒷면)
(판독불가)
해설...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 제6세(第6世) 증시원감국사(贈諡圓鑑國師) 비문과 아울러 그 서문(序文)
봉록대부(奉祿大夫)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국학(國學) 대사성(大司成) 문한(文翰)학사(學士) 승지(承旨) 신(臣) 김훈(金曛)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다
국사의 휘는 법환(法桓)이었는데, 뒤에 충지(冲止)로 개명(改名)하였다. 자호(自號)는 복암노인(宓庵老人)이고 속성은 위씨(魏氏)이며 정안(定安) 도초현(道艸縣)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소(紹)이니 호부(戶部)원외랑(員外郞)이었고, 어머니는 원방대부인(原邦大夫人) 송씨(宋氏)이니 이부(吏部)원외랑(員外郞)을 지낸 자옥(子沃)의 딸이다. 스님은 병술세(丙戌歲) 11월 17일에 출생하였는데, 미면(眉面)이 빼어나고 특이하였다. 9살 때 학업을 시작하였는데 총명이 남달리 뛰어나 모든 경서(經書)와 자(子)·사(史)를 눈으로 한 번 보기만 하면 곧 외웠을 뿐아니라 시와 문학에도 능했다. 17살 적에 사원시(司院試)에 합격하였고, 19살 때에는 춘위(春闈)고시(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일찍이 영가(永嘉)의 서기(書記)로 발령받았다. 그 후 일역(日域)으로 사신가서 나라의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에 크게 선양하였으며, 옥당(玉堂)에서 금직(禁直)할 때에는 그 제작(製作)하는 문장 체재(體裁)가 원숙하며 화려하였으므로 기유(耆儒)와 숙배(宿輩)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러나 소년 시절부터 세속의 진로(塵勞)에서 벗어나 스님이 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원오국사(圓悟國師)가 선원사(禪源社)의 법주(法主)로 있었는데, 스님께서 곧바로 그 곳으로 찾아가 원오를 은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리고 곧 남쪽으로 내려가 강사(講肆)에서 경을 배웠고, 다시 총림(叢林)으로 가서 정진함에 혹은 연적(宴寂)하되 우상과 같이 오뚝하였으며, 혹은 대중과 함께 한가롭고 여유있게 지내기도 하였다. 거주함에는 일정한 곳이 없고 가는 곳마다 무애자적(無礙自適)하였다. 스님은 애초부터 주지(住持) 등 외호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니, 대개 대원(大原)이 만물을 육성하는 도리를 흠모한 것이다. 41살 때에 이르러 원종(元宗) 임금이 나라의 중책을 맡기려고 환속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린 적도 있었다. 일찍이 김해현(金海縣)의 감로사(甘露社) 주지로 있을 때 한 선덕(禪德)이 있어 스님의 앞에 나아가 시를 간청하였으므로 스님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따뜻한 봄날 계원(桂苑)에 꽃이 피니
그윽한 향기 소림(小林)에 풍겨오네!
오늘에 익은 열매 감로(甘露)와 같아
무한(無限)한 인천대중(人天大衆) 함께 먹도다.
이 시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원근에서 이 시를 듣는 이는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이 여겼다. 감로사(甘露社)로 찾아와 법을 배워 깨달은 스님이 많아 회상(會上)이 번창하였으므로, 도반(道伴)들이 운집하여 총림(叢林)을 이루어 법석(法席)이 울창하였다. 감로사가 본래는 조그마한 난야(蘭若)였으나, 스님께서 입원(入院)함으로부터 종고불사(鍾鼓佛事) 등을 일신하여 사찰전당(寺刹殿堂)과 주변환경이 광채를 띠었다. 산 경치는 더욱 아름답고 고승(高僧) 대덕(大德)은 바람처럼 찾아오며 후진(後進)은 구름 같이 모였으니, 불교의 대법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이후 의학(義學)의 왕성함이 스님에 의해 크게 떨치게 되었다.
기사년(己巳年) 5월 비서(批署)를 받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2년 후인 신미년(辛未年)에 이르러 첨회당(尖晦堂)으로 옮겼다. 뜰 앞에는 호랑이가 항상 호위(護衛)하고 정원(庭園)에는 지초(芝草)가 나타난 것 등 영이(靈異)한 일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글이 너무 번다(繁多)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그 곳에서 잠깐 머물다가 평양(平陽) 정혜사(定慧社)로 옮겨 주석하면서 다시 보조(普照)의 유풍(遺風)을 진작하였다. 따라서청전(請田)의 표(表)를 올려 옛날 소유했던 토지를 모두 복구하였으니, 그 표장(表狀)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전하(殿下)의 총명함은 순(舜)임금 같고, 성스러운 덕(德)은 은(殷)나라의 탕(湯)임금과 같아서, 성업(盛業)은 삼왕(三王)보다 앞서고 아름다운 치적(治績)은 천고(千古)에 비길 곳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원(元)나라의 세조(世祖)가 스님의 도풍(道風)을 듣고,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궁사(宮使)를 보내와서 원나라 서울로 모시고 가 함께 계획하여 속식(續食)하고자 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 국교상(國交上)의 필요를 느껴 원의 초청을 수락하도록 강권(强勸)하므로 부득이 도행(道行)에 올라 역마를 타고 중하(中夏)에 이르렀다. 세조황제가 친히 영접하여 빈주(賓主)의 예(禮)로써 접대하고, 사부(師傅)의 은혜로 높이 받들었다. 따라서 온 나라가 도덕을 숭앙(崇仰)하며 만민(萬民)이 인의(仁義)로 귀화(歸化)되었다. 그리하여 황제가 금란가사(金襴袈裟)와 푸른색 실로 수놓은 장삼(長衫)과 백모(白毛)로 만든 불자(拂子) 일쌍(一雙) 등의 도구(道具)를 하사하였다. 관기(官記)로 하여금 하사한 도구를 가지고 귀국길을 호행(護行)하여 환산(還山)토록 하였다. 그 다음 해인 병자년(丙子年)에 선사(禪師)의 승계(僧階)를 받았으며, 기묘년(己卯年)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진가(進加)받았다. 14년 동안 정혜사(定慧寺)에 있으면서 학인(學人)을 제접(提接)하다가 권태(倦怠)를 느껴 자기본분사(自己本分事)에 좀 더 충실히 정진하고자 회하(會下)에 있던 대중을 모두 해산하고, 갑신년(甲申年) 3월 8일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올라가 괴연(塊然)히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갔으니, 마치 토목(土木)으로 만든 우인(偶人)과 같아서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들이 무릎 위에 앉아서 놀았다.
병술년(丙戌年) 2월 원오(圓悟)스님이 입적(入寂)하였으므로 대중이 스님을 천거하여 수선사 제6대 법주(法主)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장계(狀啓)를 올렸다. 장계를 받은 충렬왕은 원외시랑(員外侍郞) 김호담(金浩淡)에게 명하여 스님에게 수선사의 법주로 입원(入院)토록 청하였다. 스님은 이 해 4월 16일(율장(律藏)에는 16일이 결제이고 15일이 해제이다) 여름 결제일(結制日)을 기하여 입원하여 개당(開堂)하고, 원오국사의 자리를 계승하여 6세(世)의 법주가 되어 7년간 후진을 유액(誘掖)하며 중생을 개도(開導)하였다. 스님의 흉차(胸次)에는 부처님의 말씀인 금문보장(金文寶藏)만 가득하여 스스로 자재할 뿐아니라, 일찍부터 사림(詞林)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어 깊이 마음에 구상하지 아니하고, 입으로 나오는대로 맡겨도 훌륭한 문장을 이루어 마치 미리 원고를 구상하여 두었던 것과 같아서 옛 작가들의 가풍(家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림이 비록 석문(釋門)에서는 별로 필요가 없는 여분(餘分)의 일에 속한다 하겠으나, 종지(種智)를 성취하는 데 있어 여파(餘波)가 되기 때문에 진리(眞理)를 설(說)하거나 도를 넓히는 데 모두가 필요하고 하나도 버릴 것이 없으므로 세법(世法)도 또한 가히 닦지 않을 수 없다.
스님께서는 항상 상주물(常住物)을 아끼고 절약하여 털끝 만큼도 잘못 사용하거나 낭비하는 일이 없었으며, 또 사람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연식(緣飾)도 없고 또한 배면(背面)도 없었으니, 그 마음이 충직하고 성실하여 대하는 사람마다 귀천의 차별없이 대하였다. 스님께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항상 영험이 나타나 도와주었다. 일찍이 지리산 삼장사(三藏社)에 있었는데, 갑자기 한 부인(婦人)이 스님 앞에 나타나 법문을 청하므로 여자출정화(女子出定話)에 대한 인연(因緣)으로써 일러 주었더니, 부인은 듣고나서 감사하는 뜻으로 예배하고 물러갔는데, 이는 지리산의 산주(山主)인 여산신(女山神)이었다. 스님은 이를 깨닫고나서 게송(偈頌)을 지어 칭송하였다. 그 후 또 어느 날 백안소년(白顔少年)이 푸른 옷을 입고 찾아와 선(禪)에 대한 법문을 청하였으니, 스님은 산신을 만난 것에 대하여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면서 수행력(修行力)이 부족하여 문득 용이(容易)하게 자신을 산신(山神)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귀신을 부릴 수 있는 법술(法術)로 감득한 이와 같은 류가 많으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염려되어 모두 비문에 싣지는 않는다.
임진년(壬辰年) 8월 초순에 스님께서 가벼운 병을 보였고, 계사년(癸巳年) 정월 7일에 병세가 더욱 위중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0일 새벽 일찍 일어나 삭발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태어남이 있으면 또한 죽음이 있는 것은 인간 세상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니, 나는 곧 떠날 것이다. 너희들은 잘 있으라” 하고, 미시(未時)에 이르러 시자(侍者)인 심선(心旋)에게 명하여 불전(佛前)에 향을 사르고 국왕에 대한 축원을 마치게 하고, 승가리(僧伽梨)를 걸치고 자그마한 선상(禪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들어 흔든 다음 말씀하기를 “설법(說法)을 하나 본시 설(說)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문인(門人)이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니, 스님께서 임종게를 설하되,
무상세월(無常歲月) 흘러 흘러 어언 67 오늘 아침 금생(今生)일이 끝나고 보니 고향(故鄕) 길 분명하게 열려 있는데 앞길이 분명(分明)하여 잃음이 없네!
다행히도 한 개의 지팡이 있어
고향(故鄕)가는 도중에 다리를 돕다.
만호장로(萬浩長老)가 묻기를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고향 가는 길이 평탄(平坦)하다 하시니, 평탄한 그 길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기를 “눈을 번쩍 뜨고 보아라” 하였다. 장로가 묻기를 “무슨 길을 보라는 말씀입니까?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와도 오는 것이 아닌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기를 “알면 곧 그 길을 얻게 되리라” 하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조용히 입적하시니 얼굴빛이 선백(鮮白)하며 사지(四肢)의 굴신(屈伸)도 생시(生時)와 같았다. 이 달 20일 다비(茶毘)하고 습골(拾骨)하니, 유골에 오색이 영롱하여 유골끼리 서로 비추었으며, 서기(瑞氣)가 하늘 높이 뻗쳐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다. 충렬왕이 부음을 듣고 진도(震悼)하시어 칙서(勅書)와 만사를 보내어 문도(門徒)를 위문하고, 이어 시호를 원감국사(圓鑑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보명(寶明)이라 증사(贈賜)하였다. 그리하여 탑을 조계사(曹溪社) 북동(北洞)에 세웠는데, 스님의 세수는 67세요 법랍은 39하였다.
스님의 성품은 본래 관유(寬裕)하고 정의(情誼)는 순박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구제하였는데, 스스로 타고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스님의 평생 자취의 대개(大槪)를 살펴보니, 참으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모든 면에 구족(具足)하고 부족함이 없으니, 참다운 대장부라고 할 만하다. 오호라! 이 얼마나 위대함인가! 문인들이 임금께 스님의 탑비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고 행장(行狀)을 엮어 올렸다. 임금께서 이를 받아들여 신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신은 일찍부터 스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고상하고 빛나는 행적을 소상하게 보고 들은 바 있어 비록 무천(蕪淺)한 문사(文辭)이지만 임금님의 명을 어길 수 없어 힘을 다하여 비문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르되, 구족(具足)하고 청정한 마니보주(摩尼寶珠)는 둥글고 깨끗하여 모자람 없네!
대상 따라 만상(萬像)을 비추어 주되
한 물건(物件)도 그 범주 피할 수 없네!
이 구슬 이름하여 여의(如意)라 하니
움직이면 기적(奇跡)을 보이시도다
이 세상(世上) 어떤 것이 이와 같으랴!
오로지 스님만이 이와 같을세.
덕(德) 높은 선비 모두 귀의(歸依)시키고
목우자(牧牛子)의 정통(正統)을 이어 받아서 제방(諸方)의 총림(叢林)으로 두루 다니되 곳곳마다 상좌(上座)로 추대(推戴)받았네!
정법안장(正法眼藏) 알려고 정진(精進)하여서 우유(優游)히 삼매(三昧) 중(中)에 자적(自適)하도다.
수선사(修禪社) 대중들의 추천을 받아
원오국사 뒤를 이어 법주(法主)가 되다.
부처님 사명(使命)을 하담(荷擔)할 큰 그릇 달마종지(達磨宗旨) 더 높혀 천양(闡揚)하시니 학인(學人)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한결같이 추앙하여 높이 받들다.
군신(君臣)과 백성들이 한결 같아서
자연(自然)한 물리(物理)로써 지도하였네!
작은 일도 세심(細審)히 미리 막아서
사람들의 재앙(災殃)을 막아 주시다.
사람들에 편안(便安)을 끼쳐 주므로
영원(永遠)토록 그 은혜(恩惠) 잊지 않으리.
넘치는 법력(法力)으로 비호(庇護)하여서 나라와 백성들은 부강하도다.
도력(道力)도 높고 덕행(德行)도 크시건만 스님의 수명(壽命)만은 불만(不滿)스럽네!
밝은 달 허공에서 떨어졌으며
혁혁(赫赫)한 태양은 그 빛을 잃었네!
불교(佛敎)도 이에 따라 쇠미(衰微)해지니 애석하다! 하늘도 우리를 버리네.
아름다운 그 행적(行蹟) 비(碑)에 새겨서 억만년 지나도록 영원(永遠)하소서.
원(元)나라 연우(延祐) 원년(元年)(1314) 갑인(甲寅) 8월 일에 문인(門人)인 대선사(大禪師) 정안(靜眼)과 대선사 진적(眞寂) 및 신열(神悅) 등이 비석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