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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 춘천-가평, 인제-홍천투
제1절 : 개 요
중동부지역 작전은 6.25전쟁 바발 초기인 1950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중동부 전선의 화천-춘천과 인제-홍천 축선에서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조공인 제2군단의 제2사단과 제12사단, 고속기동부대인 제603모터사이클 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춘천, 어론리 및 말고개, 현리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구군 제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과 말고개 일대에서 6일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이 건투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은ㄴ 상당히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부한군 제2군단은 춘천과 홍천으로진출이 지연되었다. 결과적을로 북한군 제2군단은 예하의 병력을 춘천-홍천-이천-수원축선으로 우회기동시켜 국군의 병력증원과 퇴로를 차단하므로서 그들의 1단계 작전에 기여한다는 당초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반면에 국군은 한강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전쟁 당시에 중동부 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던 국군 부대는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이엇다. 제6사단은 사령부를 원주에 두고 예하의 제7연대를 춘천 방면에, 그리고 제2연대를 홍천 방면에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에비로 원주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정면의 국군을 포위섬멸하고 고속기동부대로서 수원 이남으로 우회, 국군의 퇴로 차단 및 병력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제2군단을 투입하였다. 이에따라 화천-춘천 축선에는 제2사단을, 인제-홍천 축선에는 제12사단과 고속기동부대인 제603모터사이클연대를 투입하였으며 제2제대러 제5사단을 보유함으로서 국군보다 병력은 4배, 화력은 10배 이상의 전투력을 보유하였다.
중동부 지역의 작전은 3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최초 38도선 경계진지 전초전으로부터 주저항선 전투가 전개되는 개전 당일의 상황이다. 제2단계는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최후저항선 또는 예비진지에서 전투를 전개하는 2~3일차, 즉 6월 26일과 27일의 상황이다. 국군 제2사단은 이 단계에서 소양강 남안과 말고개로 철수, 각각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마지막 제3단계는 최후저항선이 와해되고 지연전을 전개하는 6월28일과 6월29일 상황이다. 국군 제7연대는 춘천이 피탈되자 춘천-홍천간 도로를 따라 철수하며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고, 제2연대는 말고개에서 4차례에 걸쳐 북한군의 돌파를 격퇴한 후 지연전으로 돌입하였다.
[7연대 지역] 화천 적 2군단 사령부 원통
적603모터
적2사단 지휘소/2-17연대지휘소 젹2사=적12사 인재
추곡리 적12사=적5사
적6연 적4연 적31연 계명산 적30연 하수내리 적32연
대곡리
38선---------------------------------------------------------------------------------------------------------------------------------------------------------------
1개소대 작교 고수령 1개소대 9중대 2-6중대 2-5 7중대 1개소대 2중대
청평골
2=3 적목리 3-2 내평리 신풍리
서상리 하천전리 2=1
9연=7연 7-10중 7-11중 우두산 어론리
석장리 춘천 7연=2연
옥녀봉 19연 예비진지 자은리
대룡산
7연=2연 역내리
7사=6사 원창고개 한계리
7연대 말고개 2연
사현
7연대 내삼포리
홍천
19연집결지
2연지휘소
횡성
원주
제 2 절 북한군과 국군 상황
1. 북한군 상황
가. 북한군 전투편성
국군 제6사단이 담당한 춘천-홍천 북쪽의 정면에는 북한군 제2군단이 조공군단으로 투입되어 있엇다. 제2군단은 예하의 제2사단과 제12사단을 제1제대로, 제5사단을 제2제대로, 제603모터사이클연대를 고속기동부대로 편성하였다. 특히 모터사이클 연대는 4개 대대와 장갑차 1개 대대, 대전차포 1개 대대로 되어 있고 모터사이클대대는 3개중대와 1개 박격포중대 그리고 1개 중기관총중대로 편성되었었다.
제2군단장은 제88교도여단 출신 김광협 소장, 군단 참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 최인 소장이었다. 제2사단은 사단장이 이청송 소장이고 제5사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 김창덕 소장, 제12사단장은 조선의용군 출신 전 우 소장이고 예하 연대장 모두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나. 공격준비태세
공격제대 편성을 완료한 북한군은 2주에 걸친 대기동훈련을 실시하는 것으로 부대전개를 위장하였다. 각 사단은 6월 12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으며 23일까지 최초 계획된 진지를 점령하였다.
(1) 제2사단 (화천-춘천-가평방면)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정면인 화천-춘천 축선에 북한군 제2사단은 6월 10일 함흥에서 김화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 6월 17일에 추곡리, 장촌리, 원천리 북방에 집결하였다.
적 2사단은 춘천-가평을 점령한 후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동남쪽으로로 진출, 국군 예비전력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적 주력인 제1군단의 동측방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단은 우선적으로 882고지-송ㅇ암리-모진교-마평리 간에서 국군 방어진지를 돌파한 후 최근임무계선인 직교-세밀고개-청평동선을 점령하고 차후 임무게선인 석장리-계관촌-춘천을 연하는 차후임무계선을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1일차 에 춘천, 가평을 점령하고 이어서 2일차에 덕소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하도록 계획했다.
(2) 제12사단(인제-홍천-여주방면)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정면인 인제-홍천 축선에 대한 공격을 담당한 제12사단은 6월 18일 원산에서 양양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 6월 23일에 대목리-선수리지역에 진출하게 되며 사단 예하의 잔여 부대는 인제와 고사리에 배치하였다.
군단의 주공 임무를 받은 적 12사단은 인제-홍천 축선으로 지격하여 홍천을 점령한 후 원주-여주간 도로를 차단하고, 이천-수원방면으로 우회 기동하는 제603모터사이클연대의 좌측바응ㄹ 엄호하며, 홍천-영주 방ㅁ변으로 진출하여 국구늬 퇴로 및 병력증원을 차단하는 계획이었다.
적 12사단은 최근임무게선이 청평리-내평리-청막동-신풍리선이고, 차후임무계선은 하천전리-품걸리-가리산-역내리선이었다.
이에따라 1일차는 석사리-대룡산-수철대-내삼포리로 진출하고, 2일차는 원주-여주간 도로차단 및 모터사이클연대 ㅈ좌측방 엄호 후 홍천-여주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3) 제5사단(홍천-횡성-원주 방면)
제5사단은 제2제대로, 1950년 6월 20일에 나남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사단은 12사단을 후속하다 홍천지역에서 최초 투입되어 횡성-원주 방면으로 진출하여 전과확대를 하며, 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군단의 제1단계 목표인 원주-삼척선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이었다.
(4) 제603모터사이클연대(홍천-이천 방면)
제603모터사이클연대는 1949년 8월 중국으로부터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 약 2,000명이 근간을 이루었다. 이 연댄ㄴ 제12사단을 후속하여 진격한 후 수원이남으로신속히 우회하여 수원-원주-삼척선을 점령함으로서 제1단계작전의 종결에 기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603연대는 제12사단을 후속하다 전쟁 2일차에 홍천 서남쪽 5km 지역에서 전ㅌ에 투입되어 양평-이천-김량장리-수원 방면으로 진격,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수원을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2. 국군 상황
가. 국군 제6사단 부대 현황
중동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담당한 제6사단은 1949년에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한 후 현리로부터 가평에 이르는 84km의 넓은 정면에 대한 경비를 맡고 있었다. 제6사단은 에하에 제2.제7. 제19연대의 3개 연대와 제16포병대대, 공병대대를 보유하였다.
제6사다는 사령부를 원주에 두고 우익은 789고지를 경게로 제8사단과 그리고 좌익은 적목리를 사이에 두고 제7사단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
제6사단장은 김종오 대령이고, 제2연대장은 함병선 대령, 제7연대장은 임부택 중령, 제19연대장은 민병권 중령이었다.
사단의 우일선인 제2연대는 육본 명에 의거 '50.6.12일 홍천으로 이동한 후 제8연대와 교대를 실시하여 6월 22일 배치완료하였다.
이러한 사단의 예하 연대들은 창설 당시부터 편성상의 건제부대가 아니라 필요에 다라 타 사단의 연대와 수시로 교체하여 전투력 발휘에 문제가 많았다. 즉 제19연대는 남원지구공비격멸작전에 참가하고 1950년 5월 1일 원주에 주둔하게 되엇고, 제2연대는 '49년 8월 13일부터 11월 15일까지 옹진의 은파산 전투를 마치고 서울로 복귀한 후 전쟁발발 1주일 전인 6월 20일에 홍천으로 이동하여 사단에 예속되었다. 제7연대는 1949년 2월 20일 사단에 예속되어 청주로부터 원주로 이동하여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다음 49년 5월 3일 춘천으로 이동하여 제8연대로부터 인수받고 3개월 뒤인 8월 6일에는 신남을 침공한 적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을 포착하여 섬멸하는 경험을 쌓기도 했다.
나. 전투준비태세
주한미군의 철수에 따라 1949년 1월부터 38도선의 방어임무를 인수한다. 국군은 1950년 봄에 북한군이 38도선에서 정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정보보고서에 의해 '50.3.25일 방어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시 육본 제38호로 하달된 계획은 적의 주공이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지향될 것이라는 판단아래 방어중잠을 의정부에 두고 3개의 바어선을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38도선을 담당한 정방 사단은 경계진지전투.주저항선저누.최후저항선전투 등 3단계로 구분하여, 경계진지전투는 38도선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키고 주저항진지 정면의 교량 및 도로를 파괴하도록 하였다.
제2기 작전이 주저항선전투는 주진지선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고, 철저한 역습으로가장 강력한 전투를 실시하여 진전에서 적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3기 작전인 최후저항선 전투는 전군이 예비진지에서 모든 화력을 집중하고 역습을 통해 적의 전력을 철저히 분쇄 격파하여 최후가지 이진지를 확보하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개념에 의거 제6사단은 춘천에 방어중점을 두고 , 적의 주공이 화천-춘천 접근로로 지향할 것으로 판단하여 포병화력을 온용할 수있도록 제16포병대대를 춘천에 배치하고 전방 2개 연대에 공병 1개 중대식을 배속하였다.
제7연대는 철근 콘크리트진지는 적의 접근이 에상되는 9개 지역에 설치하였다. 적의 모진교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모진교 우측과 동남쪽 1km 지점에 각각 1개소씩 구축하고, 용산리와 지내리 중간의 도로 우측변에 2개소, 화천 -가평간 관문인 홍적령의 전사면에 1개소를 구축하는 등 9개지역을 설치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이 오ㅔ에도 중대마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2~3개소의 유개호를 마련하였다. 한편 포병진지도 주요접근로인 용산리-지내리간 도로 좌측변 1개소, 우두산 도로좌측변에 1개소, 지내리 북쪽 1km 지점과 고탄리 북쪽 1.5km 지점, 그리고 천전리 북쪽 500m 지점에 각각 1개소씩 구축하였다.
그러나 제2연대는 큰크리트진지가 없고, 통나무로 쌓은 유개호를 제8연대로부터 인수받았다. 그러나 전쟁 발발 3일 전에 부대교대가 이루어져 새로 설치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며 기존진지를 보수하는 임시조치 중에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 인접부대 상항
사단의 우익인 제8사단(이성가 대령)은 38도선에 제10연대를 배치하고 삼척에 제21연대를 예비로 집결하고 있었다. 제8사단의 책임지역은 진흑동에서 동해안의 기사문리까지 26km로써, 적의 남침시에는 제21연대를 좌일선에 투입하여 강릉을 고수방어한다는 방어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제 3 절 춘천-가평 전투
1. 전투 개요
춘천-가평전투는 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국군 제6사단제7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제2사단과 춘천 및 가평일대에서 실시한 방어전투다. 제7연대는 우측 제7사단과의 협조점으로부터 설정된 가평 적목리로부터 춘천 동북쪽 764고지(계명산) 남쪽에 이르는 방어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제7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화천-춘천 방면에 제3대대를, 조공의 공격로로 예상되는 양구-춘천 방면에 제2대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화천-가평간 접근로에는 제3대대 제10중대를 방어정면에 배치하고 제11중대는 대대에비로 춘천에 두고 있었다.
이로한 가운데 북한군은 제2사단은 춘천-가평을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에 따라 주공축선에 제6연대, 조공축선에 제4연대, 예비로 제17연대를 두었으며, 화천-가평 축선에는 제6연대 예하의 제2대대를 공격부대로 편성하였다.
북한군 제2사단의 기습공격을 받은 제7연대는 38도선상의 경게진지로부터 철수하여 소양강 북안의 164고지와 우두산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던 적을 격퇴하였다. 이후 소양강선에서 6월 27일까지 적의 공세를 저지한 후 춘천외곾의 원창고개 일대에서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도한 화천-가평 축선의 제3대대(-)도 고수령(고시락고개)과 홍적령 등에서 지연전을 전개하여 적의 진출을 3일간 저지한 후 6월 27일 금곡으로 철수하였다.
2. 춘천지구 전투
가.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1) 북한군 제2사단의 기습공격
북한군 제2사단이 2개 연대 병진으로 연대 정면응 공격해 왔다. 북한군 제2사단은 화천-춘천축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있었다.
한편 국군 제3대대는 적목리-마평리-양통고개를 잇는 약 28km 구간으로 적 제6연대 공격을 개시하였고 특히 주공이 지향되는 화천-춘천간 5번 도로 방면에는 제9중대가 투입되었다. 국군 제2대대의 방어정면에 적 제4연대가 조공으로 양통고개-부용산간을 연하는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배치고개-청평리-천전리 방면으로 공격을 지향하여 춘천을 포위하려 하였다.
화천 적 2군단 지휘소
적2사=적12사
원천리 적2사/적2-17연대 집결지 추곡리
적6-2대대 적6연 가일현 적4연대 적12-31연대
마평 상송암 양통리 배치고개 부귀대 대곡리
----38선 매봉-------------------------------------------------------------------------------------------------------------------------------------------------------
1개소대 고수령 모진교 379 286 372 652 장재동 1개소대
1개소대 9중대 9-6 1개 소대
지암리 청평골
직교 인람리
홍적령 용산리 지내리
1개소대 3=2 발산리 7연=2연
서상리
신당리 옥산포 164 천전리 부창리 내평리
제7-1대대
양재일 제7-2대대
맴내 우두산
제19-3대대
금산리
춘천 제7연지휘소
목동리(죽둔리)
석장리 계관촌
(2) 모진교 및 배치고개 일대의 경계진지 전투
50년 6월 25일 04:00시에 적은 포병공비준지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포격은 38도선으로부터 후방 3km 지점까지 도달했으며, 특히 고탄리 북쪽 286고지에설칟된 제3대대 제9중대의 관측소에 집중되어 중대장이 전사하고 통신이 두절되었다.
약 1시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을 끝낸 적은 제3대대 제9중대의 방어정면이 마평리에서 상송암리를 연하는 선으로 SUㅡ76 자주포와 함께 1개 연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국군은 험악한 산악지의 중요 부분에만 경계병 수준의 병력만을 배치하므로서 대규모 병력으로 침공해 오는 적을 격퇴할 수는 없었다.마침내 07:30분에 제9중대 30여 명이 방어선에서 철수하여 인접 6중대 1개 소대와 합류, 우두산을 거쳐 예정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적 조공연대인 제4연대는 국군 제7-2대대의 방어정면인 추전리 및 부용산 좌측계곡, 그리고 발산리 소로를 따라 공격을가해 왔다. 하지만 좌일선과 같이 중과부족으로 철수하여 경계진지 부대들이 내평리를 경유하여 지내리, 제5중대는 마작산 기슭과 천전리를 경유하여 우두산으로 각각 철수하였다.
전방 경계부대들은 철수를 하여 11:00시에 연대지휘소가 있는 우두산으로 집결했다가 다시 소양강을 도하하여 가마골에서 양재일에 이르는 주진지를 점령하고 하천선 방어에 임하였다.
이 무렵 천전리에서는 북한군 제4연대 병력이 집결하여 소양강 도하를 준비하였다. 이에 국군 제7-2대대는 제5중대장(이지역에서 도하작전을 실시한 경험이 있는 중대장 김상흥)에게 30명의 병사를 선발 교육을 마친 후 적지능로 침투하여 도하준비하던 적에게 수류탄과 소총으로 역습을 가하고 전원 무사히 귀대하였다.
(나) 주저항선 전투
1) 주저항선 진지 점령
연대의 예비로 춘천역 부그에 위치하고 있던 제1대대에 6월 25일 05:00시를 기해 비상이 발령되었다. 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연대의 비상발령에 앞서 자체 소집망을 통해 영외 거주자를 소집해 놓고 있었고, 외박 외출 중인 병사들도 귀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1대대는 08:20분에 예정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사단의 예비연대인 제19연대는 25일 07:0시가 되어서야 준비태세에 돌입하였다. 당시 연대장 민병권 중령이 참모학교 교육으로 부재중이었다. 그래서 부연대장이 통제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병력이 외박 외출 중에 있었다. 그러나 제3대대는 대대장 김한덕 소령의 독단으로 외박 외출을 금지시킨 결과로 바로 준비하여 징발 차량 20대를 이용하여 13:00시에 원주를 출발하였다. 부재중인 병력이 복귀하면서 20:00시에 나머지 병력은 원주역을 출발하여 청량리를 경유하여 춘천으로 향하였다.
제3대대는 20:00시에 남춘천역에 도착하여 북한강 서안의 금산리 북쪽 1.5km 지점에 병력을 배치하고 화찬방향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의 전진을 저지하였다.
2) 옥산포 및 가래모기전투
경계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제6연대는 SU-76 자주포를 앞세우고 5번도로를 다라 내려오고 있었다. 57mm대전차포 중대장은 제2소대를 보대이벼루 도선장(지내리 남쪽 1.5km)으로 급파하였다. 그러나 명중에도 계속하여 내려오자 옥산포로 철수하였다. 자주포를 앞세우고 선두가 10:00시경 옥산포에 이르렀다. 이에 1소대를 차출하여 적을 사농동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이때 제16포병대대 제2포대장인 이금열 중위는 포 2문을 이끌고 사농동으로부터 적진 500m 지점에 추진방열 하였다. 12:00시경 옥산포를 통과한 적의 주력이 넓은 보리밭에 나타나자 보.포 협동으로 사격하여 적은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하여 지내리선까지 회복하였다.
이 무렵 적의 일부가 춘천 북쪽 4km 지점의 신북리-발산리까지 진출하고 있는데, 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한 적이 다시 SU-76 자주포 10대를 앞세우고 다시 옥산포로 공격해 왔다. 여기에 옥산포로 철수하여 있던 57mm 제2소대가 자주포에 사격을 가했으나 멈추지않게 되자 심일 중위는 자주포에 육탄공격을 결정하고 도로변 민가에서 대기 중 자주포가 다가오자 다시 포격으로 2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자주포에서 뛰어내려 도주하려던 승무원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다시 적은 이곳 옥산포 일대로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진출을 꾀하지만 국군의 집중화력에 많은 피해를 입고 조기에 춘천을 점령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에 대대군수주임 김운한 소위와 최갑석 상사, 정기백 상사를 대동하고 징발한 민간차량을 이용하여 소양강 북안의 제사공자 앞에 위치한 대대탄약보급소의 포탄을 소양강 남안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춘천사범학교 학도호국단 학생들이 자원하여 5,000발의 포탄과 기관총, 소충류 등의 실탄을 운반하였다.
3) 제19연대의 증원과 전선 축소
6.25일 20:00시를 기해 원주역을 출발한 제19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청량리역을 경유하여 26일 05:00시에 춘천역에 도착하였다.
제2대대는 강행군을로 우두산으로 진출하여 제7연대 1대대와 연계에 성공하였다.
이와같은병력증원에 힘을 얻은 제7연대장은 옥산포를 기습으로 공격하여 공격준비 중이던 적 1개 대대 규모가 대부분 사살되고 그들은 역골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가 13:00시경 다시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을 해옴에 다라 전방 병력은 다시 164고지 일대로 복귀하였다.
(다) 최후 방어선 전투
1) 최후저항선 진지 점령
164고지로 복귀한 제1대대는 15:00시에 사단명령으로 소양강을 도하하여 석사리에 집결하여 휴식과 탄약재보급을 받고 소양강 남안의 준비된 진지를 점령한다.
그리고 제19-2대대도 우도산에서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적이 제2대대를 격파하려 공격을 해왔지만 효과적인 지연작전을 하며 21:00시경 모두 도하를 완료하였다.
한편 연대의 좌익인 금산리 일대 제19-3대대는 정적만이 유지되다가 26일 09:00시경에야 일부 침투와 포격을 실시하였다. 이는 북한강 동안으로 전투력이 전환 되는 것을 방해하려는 의도였으며 결국 대대는 15:00시에 철수를시작하여 의암교를 건너 18:00시경 춘천역 일대의 근화동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이처럼 방어정면을 축소하고 소양강 남안에 방어지지를 점령하고 있으 대에 공병대대장이 사단장에게 소양교의 파괴를 건의했으나 반격시 문제가 된다며 일시적 건의를 보류하자 공병대대자은 폭파장치를 제거하고 파괴된 차량 4대를 장애물로 설치하였다. 17:00시경에 춘천 동북족 천전리 방향에 자주포와 대규모 병력이 우두동으로 이동하고 있어 박곂사격을 집중하여 분산시켰다.
한편 공격개시 당일 춘천 동북쪽의 추곡리와 대곡리 선에서 춘천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12사단 제31연대는 하천전리 지역까지 진출한 후 진격을 멈추고 기다렸다. 이는 제2사단과의 협조체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6월 26일 하룻동안 휴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합동으로 춘천을 점령하려던 그들의 기도는 실패했고 국군 제7연대가 별다른 손실없이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2) 춘천 공방전과 춘천 철수
6월 27일 05:00시부터 북한군은 총공격을 위한 준비사격으로 보이는 집중포격을 소양강 남안과 봉의산 일대는 물론 춘천 시내에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시간 후인 06:00시부터 공격을 감행해 왔다.
더이상 현진지를 고수하기가 어렵게 되자 제19연대와 1개 포대를 홍천에 제2선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한편 제7연대는 소양강선에서 계속 적들의 도하를 바어하던 중에 11:00시에 가래모기로 적 1개 연대 규모가 도하에 성공하고 인해전술로 계속하여 도하를 감행함으로서 연대는 원창고개제2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우측에서 진출을 중지하고 있던 적12사 31연대 일부 병력이 원진나루터를 도하하여 구봉산으로 남진을 시작하였다. 그동안 사단과 통신두절이 이날 제2사단과의 통신을 재개한 결과였다.
소양교 입구까지 진출한 적의 자주포는 교량 위에 산적한 그들의 시체를 강으로 밀어붙이고 다리를 건너 소양강 남안의 일각을 점령하였다. 계속하여 적이 춘천시내로 유입됨에 따라 연대는 13:00시에 연대관측소를 원창고개로 이동시켰다. 이를 위해배속된 제19-5중대는 사전에 원창고개를 확보하게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하게 하고, 제19-1중대는 국사봉-중일리를 점령하여 연대의 좌측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연대 수색대는 대룡산 일대를 수색하고 연대의 우측방을 경계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연대는 27일 18:00시에 춘천을철수하여 원창고개선으로 밀려나고 적 제2사단이 6월 27일 춘천을 점령하고 이어 자정 무렵에는 가평인근까지 진출하게 된다.
한편 대룡산 인접부근을 수색하던 수색중대는 일련의 적과 교전으로 정상 확보는 못한채 급편방어에 들어가 결국 연대관측소 지역으로 심야에 철수하여 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3. 가평지구 전투
가.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제7연대의 좌전빙인 적목리에서 인람리에 이르는 20km의 넓은 정면을 담당한 제3대대 10중대의 방어지역은 화악산과 매봉, 그리고 촉대봉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준령이 산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단지 잔투지대 내에은 사창리-시룬고개-신당리와 신포리-고수령(고시락고개)-홍적령-목동리-가평으로 두 개의 계곡접근로만이 있었다.
가평지역은 춘천과 멀리 떨어져 있고, 지형상 인접부대와의 협조가 불가능함으로 유사시에 제10중대와 제11중대는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개전 첫날, 지암리 일대에 대한 공격준비사격이 주춤해진 05:00 무렵 적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고수령의 제1소대 경계초소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병력은 춘천을 공격하는 제2사단 제6연대 제2대대로서 서울을 우회하여 국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제10중대는 홍적령에 구축된 1개 소대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콘크리트 호를 이용하여 적을 격멸하려 했으나 적은 1개 소대로 견제하고 주력이 우회함에 따라 적은 개전 당일 오후 늦게 가평 하남종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나. 주저항선 전투
(1) 장갑차소대의 증원과 지연작전
한편 춘천에 있던 제11중대도 19:00시에 이곳에 도착, 맴내 앞에 진지를 점령함으로로서 대대의 우일선이 되었다. 이로서 제10.11중대는신포리-고수령-홍적령-목동리-가평으로 이어지는 계곡접근로를 사이에 두고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적은 26일 07:00시부터 공격을 계속하였고, 이 시기에 육본으로부터 전황 파악을 위해 출동한 제1기갑연대 제1중대 1개 소대가 도착하여 장갑차를 이용하여 화력지원에 나섰다.
치열한 교전 속에서 제3대대(-)는 14:00시부터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가평북쪽으로 후퇴하여 제11중대는 우일선 434고지에, 제10중대는 좌일선이 되어 옥녀봉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적은 계속 진출하여 가평 서방 2km,지점에 위치한 경반리까지 진출하여 서울-춘천간 도로의 차단을 기도하였다.
(2) 제8연대의 증원과 복귀
육군본부는 의정부 방면의 제7사단과 제6사단의 사이에 30km의 간격이 발생하자 수경사의 제8연대를 즉시 가평으로 전진시켜 제6사단의 지휘를 받게 하고, 기갑연대장은 예하 도보 1개 중대를 즉시 가평으로 이동시켜 제6사단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육군본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제8연대는 27일 03:00시에, 기갑연대 제8중대는 07:00시에 각각 서울로 복귀하였다.
제7연대 제3대대(-) 가평전투 상황도 적6연-2대대 적2사-6연
매봉 마평리
-----------------------------------------------------------------------------------------------------------------------------------------------------------------
화악산 1개소대
적목리 고수령 1개소대
지암리
촉대봉 직교
홍적령 273
2=3
신당리 적6연ㄴ-2대대
339
10중대 11중대
맴내
하남종
9연=7연
목동리(죽둔리)
석장리 계관촌
옥녀봉 상마장리 434고지
11중대 10중대
경반리 보납산
7사=6사
가평
(3) 최후저항선 전투
가평 부근 434고지와 옥녀봉에 진지를 점령한 제3대대(-)는 6월 27일 07:00시경 적의 공격을 받고 보납산(717)으로 적을 유인하여 격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증원하러온 제8연대와 기갑연대8중대가 사전 철수하여 복귀함에 따라 공간이 발생하여 결국 상색리로 철수시켰다. 12:00시경 제3대대(-)는 청평 동북쪽의 논골고개를넘고 있을 때 원주로 철수하여 연대와 합류하라는 육본의 지시로 청평을 거쳐 횡성으로직행하여 본대와 합류하였다.
제3대대(-)의 철수와 동시에 가평을 공격한 북한군 제2사단 제6연대 제2대대는 우회기동을 하여 경춘철로를 차단하였다. 또한 적 제2사단 주력은 춘천-홍천간 도로를 따라 우회기동하던 제12사단 제31연대와 합동공격으로 정오 무렵 춘천을 점령한 후 가평으로 진격을 시작하여 12:00시경 갚평을 점령하였다.
이어 북한군 제2사단은 후퇴하는 국군 제3대대(-)를 추격하여 6월 29일 20:00시경 서울 동쪽 25km 고안 지역의 한강 북안에 진출하여 도하를 실시하였다. 이들의 한강 도하는 다음날 10:00시까지 계속되엇으며, 팔당 남족의 하번천리와 경안리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이를 확대하기 위해 전투를 전개 하였다.
4. 제7연대의 원창고개 전투
가. 춘천 외곾의 방어선 형성
전날 자정 무렵 제7연대 진지에 가까이 접근하여 진지를 구축한 북한군제12사단 제31연대는 6월 28일 08:00시를 기해 종대 대형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국구 제7연대를 원창고개에서 포위. 차단한다는 의도를 지닌 그들은 주력을 춘천-홍천간 5번도로에 지향하고 자주포와 포병을 이곳에 집중하여 연대 정면을 공격하여 왔다. 또한 조공의 일부가 금병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창고개일대는, 우일선에는 410고지-341고지간에는 근무대대.연대 수색중대. 제3대대 제9중대. 제19연대 제5중대. 57mm박격포 중대가 배치되고, 중앙인 602고지 능선에는 제2대대가, 좌일선 금병산 능선에는 제1대대와 제19연대 제1중대가 배치되었다.
12:30분에 적은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연대는 이를 격퇴하엿으나 연대의 보급로 차단이 우려되어 연대는 13:00시ㅐ에 원창고개에서 철수하여 사현선에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으며 제2대대는 계속하여 원창고개에서 철수부대를 엄호하였다.
나. 원창고개 전투
29일 새벽부터 적은 강력한 포벽으로 원창고개 일대를 사격하며 대규모 병력이 06:00시에 고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였다. 계속되는 인해전술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제2대대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11:00시에 적은 위장전술로 백기를 들고 나타나 구군 제2대대는 투항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순간 몸에 숨기고 들어온 다발총을 사격하여 진내는 일대 혼란이 발생하여 백병전이 벌어져 가까스로 그들을 격퇴했다.
이에 제2대대도 바로 철수를 단행하여 연대 주력이 있는 사현에 집결하여 연대장의 명령으로 삼마치에 신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제1대대는 원주가도 우측 371고지에 근무대대는 원주가도 좌측 418고지에 신방어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13:30분에 다시 차량과 도보로 출발하여 24:00시에 저지진지에 도착하여 급편 방어에 돌입하였다,
제 4 절 인제-홍천 전투 적12사 적5사(-)
적603모터사이클연대
제2연대 경계진지 전투 상황도
인제 적12사-적 제1경비여단
적30연 적32연
하수내리 관대리 남전리 하추리 귀둔리
적6경비대대 적4경비데대 적5경비대대
계명산 막장골 부소현 원대리 하담 갬재고개
--38선----------------------------------------------------------------------------------------------------------------------------------------------------
723 452 392 682 음양리 576 669 769 547
2-2중대 2-5중대 2-1중대 2-11중 2-9중
7-2 상수내리 양지평 1-11
진다리
2=1
1=3
502 2-5중 2-3중 2-10중
창막동 신풍리 현리
7연=2연 어론리 갑둔리 매화고개
2=3대대
어구촌 하남리
가리산 자은리 엄수동
2-1대대지휘소/3중대집결지 2-3대대 지휘소
역내리
말고개
1. 전투 개요
인제-홍천 전투는 1950년 6월 25이부터 30일까지 제6사단 제2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제12사단의 공격을 받고 홍천 동북지구 및 현리 지역에서 실시한 방어전투이다. 당시 제2연대는 춘천 동북의 764고지(계명산)남족으로부터 우측 제8사단과의 협조점이 설정된 현리 965고지에 이르는 42km의 방어정면을 담당했다.
연대는 전투지대 중간지점에 있는 남전리 뭉앙골 서던 동아실 마을을 전방 양 대대의 협조점으로 정하여 좌일선에 제1대대, 우일선에 제3대대를 각각 배치 하고 제2대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반면 북한군 제12사단은 제2군단의 주공사단으로 인제-홍천 축선으로 진출하여 홍천을 점령한 후 홍천-여주 방면으로 진격, 국군의 퇴로를 차단 및 증원을 차단한다는 계획으로 2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투입했다. ㅈㅈ이들은 주공축선에 제32연대를, 조공 축선에 제30연대를 투입하고 예비로 제5사단(-)을 확보했다.
북한군 제12사다늬 공격을 받은 제2연대는 38도선상의 경계진지로부터 철수하여 어론리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여 적의 남진을 저지햇다., 이후 자은리를 거쳐 말고개 일대에 최후저항선을 구축한 제2연대는 적의 공격을 총 4차례 격퇴한 후 홍천으로 철수했다.
또한 인제-현리 축선의 제3대대도 하답-운니산에 이르는 38도선 경계진지에 교전을 실시한 후 철수를 하여 수안보에서 본대와 합류한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북한군 제12사단은 중공군 중남군구 독립 15사 소속의 조선족부대가 모체로서 1950년 3월 20일 중국 정주에서 열차편으로 입북하였다. 이들은 3개 보병연대와1개 포병연대, 경위중대 등 완편사단이었다. 3월말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북한군 제12사단으로 개칭된다.
제12사단은 홍천 공격을 위해 언산에서 양양까지 기차로 이동, 6월 23일 인제인근에 배치되었으며 홍천을 점령한 후 원주-여주간 도로를 차단하고 국군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따라 제32연대는 사단의 우익으로 응봉산-부소현간에서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홍천으로 공격하고, 제30연대는 사다늬우익으로 계명산-하수내리간에서 공격하여 어론리 일대로 우회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한편 고속기동부대인 제603모터사이클연대는 제12사단이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면 이를 후속하고, 전쟁 2일차에 홍천 인근에서 전투에 투입하여 수원방면으로 진격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수원을 점령하려 했다.
나. 국군 상황
제6-2연대는 사단의 우일선부대로서 홍천에 본부를 두고 인제방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2연대는 옹진의 은파산 전투를 마치고 전쟁 발발 5일전인 1950년 6월 20일 수경사로 편입된 제8연대와 교대, 제6사단에 예속되었다. 다행히도 이 지역에 오래 주둔했던 제8연대 대전차포중대와 연대헌병대가 제2연대로 예속 변경되어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연대에 도움을 주었다.
제2연대는 제1대대와 제3대대를 전방에, 제2대대를 연대 예비로 당포리에 배치하였다.
3. 홍천 동북지구 전투
가.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국군 제6사단의 우전방을 담당하고 있는 제2연대의 경계지역에는 북한군 제12사단이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해 왔다. 북한군 제12사단은 인제-홍천 축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전투대형을 2개 제대로 편성하였다.
제1제대는 주공인 제12사단 제32연대로서 이날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홍천 내삼포리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에 응봉산-부소현에 이르는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또한 국군 제2연대 제1대대의 정면인 하수내리로부터 계명산을 연하는서에서도 적의 공격이 개시 되었다. 북한군 제12사단의 조공인 제30연대는 신남 및 어론리 부근으로 우회하여 철수하는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0분간에 걸친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되었다. 북한군 제32연대는 05:30분을 기해 음양리와 막장골 부근으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계속되는 적의 소양강 도하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적은 계속공격으로 막장골 일대에서 성수내리로 침투를 감행하여 결국 어론리 아랫다무리고개로 06:20분에 1중대와 5중대는 철수를하게 된다.
나. 주저항선 전투
경계진지에서 철수하는 제1대대는 제2연대는 5중대가 어론리 서측 402고지, 제1중대가 558고지에 바로 밑에 제3중대로 진지편성을 했다. 제2대대는 어구촌의 667고지선에 배치되었다. 이때 대전포중대가 홍천을 출발하여 어론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적 1개 연대규모의 적이 계속 공격해와 11:50분에 교전이 되고 적은 자주포 2대가 피해를 입으면서 일시적 후퇴를 하였으나 결국 제1대대는 12:30분을 기해 어구촌에 진지를 편성한 제2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어론리로부터 철수하여 우측의 828고지-560고지선을 점령하였다. 제2대대는 제1대대의 좌측 394-402고지선을 점령했다.
연대는 26일 06:00시에 2개 대대 병진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는 어론리 동쪽 585고지를, 제2대대는 어론리 서쪽 593고지를 탈취하도록 하고 제3대대는 자은리로 집결하여 연대의 예비로 하였다.
그러나 자주포를 동반한 적이 계속하여 밀어붙이고, 가마봉일대로도 침투공격을 감행하여 제1,2대대가 고전을 계속하자 11:30분에 연대장은 철수를 명하였다. 차후진지는 한계리-북창선으로 특징은 한계리로부터 홍천으로 내려가는 도로좌측에 큰말고개와 작은 말고개가 성산리가지 이어져 있고, 도로에 연해 우측에는 도섭이 가능한 화양강이 흐르고 있다,.
이에 앞서 전날 어론리까지 진출했던 북한군 제12사단 제30연대와 제32연대는 6월 26일 04:00시에 홍천을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더구나 연대의 철수기미를 탐지한 1개 대대규모의 적이 5대의 자주포를 앞세우고 연대 중앙에 쐐기를 박을 태세로 침공해 왔다.
다. 최후저항선 전투
한편 제1대대와 제2대대가 자은리 선에서부터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상황을 지켜본 연대장은 한계리에서 이들을 수습하여 재편할 것을 결심하였다. 한계리로 돌아가면서 연대장은 제5중대장에게 적의 공격을 저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제2연대 최후저항선 전투
철정리
적30/32연대
복골
한계리 287고지 아2연-3대대(-)
아2-3대대
아2-2대대 북창
아2-1대대 아2-1대대
아2-11중대 아19-3대대
성산리
아2연대전술지휘소
내삼포리
제2연대는 17:00시를 기해 말고개일대에 진지편성을 하게 된다. 개전 3일째인 6월 27일 07:00에 성산리 제2연대 지휘소를 사단장이 방문하여 제19연대와 포병 주력을 홍천으로 전용하여 말고개에서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기로 한다.
한편 북한군 제12사단 제30연대와 제32연대는 춘천지구에서의 총공격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이날 새벽부터 제2연대에 포격을 집중하면서 자주포를 선두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에 연대는 적의 정면돌파 기도를 간파하고 S자형 굴곡으로 된 도로에서 57mm 대전차포를 배치하였다. 또한 09:00시를 기해 성산리로 전진한 제3포대로 하여 적의 집결지인 철정리에 집중공격을 하도록 하여 그들을 진전에서 격멸하였다.
2차에 걸친 공격에 실패한 북한군은 작전을 변경하여 바매 대구경포와 자주포로 말고개 일대에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연대는 적의 포화가 집중되는 속에서도 진지보강에 주력하였다.
이무렵 연대는 반격으로 내촌천을 도섭, 복골을 기습공격하여 적의 에상되는 지휘소와 보급소를 격멸하려 한다. 28일 05:30분을 기해 제2대대로부터 1개 중대를 지원받은 제1대대가 499고지를 탈취하러 공격을 개시히여 기습작전으로 복골을 완전포위하였다. 적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졌지만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복골에 집중포격을 가하면서 대대의 진출로를 차단하기 위해 397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그리고 일부는 499고지에서 복골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역포위를 고려하여 다시 말고개로 복귀하였다.
이날 아침 적은 3대의 사이드카로 도로변을 수색한 후 자주포를 앞세우고 말고개를 돌파하려 했다. 이에 국군은 신속히 대전차포 개 소대를 추진배치하고, 제19연대 3대대에서 특공대원 11명을 선발하여 도로변에 죽은 시체를 가장하여 배치하였다. 이런 상황속으로 적 자주포는 밀려오고, 김학두 하사의 연속적인 포사격으로 선두 자주포가 저지되자 제19연대 특공대 조달진 일병이 수류탄 2발을 포탑으로 투척하여 폭파시켰다. 일제히 특공대가 수류탄을 투척하여 진퇴양난의 북한군은 자주포 10대를 남겨두고 후퇴하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물러났던 적은 다시 야간 22:30분에 다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협조된 방어로 적의 공격을 방어허여 24:00시에 연대는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이날 제2연대는 3차에 걸친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라. 최후 공격과 홍천 피탈
적은 다시 29일 08:00시를 기해 홍천가도로 돌파를 시도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부병력을 우회기동시켜 양 연대를 고착 견제하려 하였다. 14:00시에 사단장의 홍천철수 지시로 21:00시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공격기세가 높아지자 연대장은 제1대대장 김주형 소령에게 다시 되돌아가 말고개 정상인 371고지를 재탈환하라고 명령하였다.
아군의 철수로 방심하고 있던 말고개 371고지의 적들은 제1대대의 기습에 방심한 나머지 모두 도주하여 고지를 무난히 탈환하였다. 이에 적들은 6월 30일 새벽에 1개 대대규모로 공격을 재개하여 백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연대의 철수완료에 따른 대대의 철수지시를 받고 05:00시에 성산리에 집결하게 된다. 적은 계속하여 아군의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한편 제3대대가 철수를 단행하는동안 좌측방에서 위협하는 적을 저지하고 있던 제11중대는 적중에 고립되어 소대별로 탈출을 하기로 작정을하고 원주에서 다시 집결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병력ㅇ이 화양강을 도하하여 원주에서 합류했지만 일부는20일 후 영천 신녕부근에서 합류한다.
이렇ㄱ게 하여 홍천을 향해 진격하던 북한군 제12사단 제30연대와 32연대는 6월 30일 15:00시까지 아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ㅇ며 이날 18:00시에야 홍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4. 현리지구 전투
가.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제2연대 현리 전투
상답
적 제6경보병대대 적제4경보병대대 적제1/5경보병대대
하답 중답
--38선---------------------------------------------------------------------------------------------------------------------------------------------------------------
원대리 흙고개 갬재고개
559 622 472 669 799 557
11중대 9중대
11-9
1-11
진다리 520
1=3
558 현리 521
오마치
엄수동 2연-3대대지휘소/집결지
현리 동북쪽 9km에 위치한 789고지로부터 관대리 동북쪽 8km 지점의 옥목골 간을 방어하고 있던 제2연대 제3대대는 6월 25일 04:00시에 연대장으로부터 전투태세에 돌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1시간이 경과해도 적의 도발징후가 없게되자 평소처럼 공비침투 정도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05:30분에 이르러 각종 포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하답부근으로 침입하여 제3대대 제9중대 정면으로 종대대형으로 공격을 해왔다. 이들은 동해연안의 소로를 따라 진격하도록 임무를 받은 제38경비 제1여단 예하제1.4.5.6대대 병력이었다.
제9중대와 제11중대는 적을 최대한 유인하여 최후저지사격을 실시했으나 적이 계속 밀려들어 대대장은 철수를 명하고, 예비로 있던 제10중대를 현리 좌측 558고지를 점령토록 하였다.
나. 주저항선 전투
대대장 명으로 제10중대가 12:00시에 558고지에 도착하고, 전방에서 철수한 제11중대는 진다리 520고지 좌측에 배치돼었다. 하지만 우측 제9중대는 통신이 두절되었다. 이어서 연대주력이 홍천으로 철수했다는 맣을 듣고 제11중대는 다시 철수를 개시하여 현리 우측방 521고지를 점령했다. 558고지를 점령한 제10중대는 적 2개 대대의 압력을 받으며 15:00시에 철수를개시하여 엄수동에 집결한다. 연대와의 통신이 23:00시에 회복되어 한계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따라 26일 04:00시에 도보로(부상병과 보급품은 차량)이동하여 27일 08:00시경에 연대와 합류하게 된다.
한편 연락이 두절된 제9중대는 적에게 후방도로가 차단되어 방대산을 경유하여 사단 우익의 제8사단 제10연대의 철수병력과 함께 수안보에 이르러 100% 병력을 유지한 채 대대에 흡수되었다.
5. 충주로의 철수
홍천에서 징발차량을 이용하여 철수한 제6사단은 삼마치에 제19연대 일부병력을 엄호부대로 배치하고, 주력은 원주로 철수한다. 6월 30일 엄호부대가철수하자 횡성 북족은 제7연대 제2대대만이 저지부대로 배치되어 있다가 정오경 원주로 철수하였다.
7월 1일 사단은 충주선으로 철수를 결정하고, 전널 육본의 명령에 따라 강릉에서 이동하는 제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7연대를 신림고개에서 저지임무를 수행토록 하고 본대는 충주로 이동항여 오후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편 제7연대는 제천에서 후속 철수하는제8사단에게 심림고개의 저지임무를 수행하던중에 장갑차와 사이드카를 앞세운 적 정찰대를 제압하였다. 7월 2일 새벽 제8사단 선두부대인 제10연대가 차량을 이용하여 평창에서 철수해 오자 제10연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충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제 5 절 유해발굴 위한 탐문 및 탐사결과
1.춘천 서북방지역 분석
차는 중부전선으로 달려간다
요즈음 한국전쟁사를 흔들고 있는 심일소위의 육탄공격의 신화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나는 이지역에서 대대장과 인사참모를 '95~'99년 9월까지 근무한 곳이다.
산좋고 물좋은 곳으로 북한강과 소양강이 있고 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화천댐, 춘천댐,소양댐,의암댐이 자리잡아 한편으로는 운무가 심하여 호흡기에는 약간 안좋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중년이상들은 한번쯤 들어본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곳으러 그러한 곳이 지금은 바뀌어 "이제 떠나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떠나겠네"로 천지개벽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 중부전선을 담당한 제6사단(김종오 장군)은 춘천에 제7연대를, 홍천 북방에 제2연대를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예비로 원주에 집결 보유하여 가평북방 적목리로부터 현리 진흙동까지 84km의 광정면을 방어하였다.
적은 북한군 제2군단으로 춘천북방에 제2사단으로 홍천북방에서는 제12사단이 독립전차연대로 증강 편성하여 조기에 춘천과 홍천을 점령하고 서울 포위를 위해 이천-수원으로 우회기동을 할 계획이었다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되었던 전쟁에 직전에 부대재배치 문제가 이곳에서도 진행되었다.
사실 홍천 북방을 담당한 제2연대는 '50.6월24일에야 제8연대와 진지교대가 이루어 졌다. 제2대대는 24일에 홍천에 도착하여 아직 장비의 포장도 풀지 못한 가운데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표 두 대대장이 월북한 지역으로 그 연대인 제8연대가 빠지고 24일까지 임무교대를 하였으니 무슨 전투준비가 되었겠는가.
다만 소양강 남안에 최초진지가 편성되어 마침 내린 비로 소양강 물이 불어나 도섭을 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있었다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었다.
춘천 북방의 제7연대는 화악산이란 주봉을 안고 있으면서 바로 동서를 연하는 선이 38도선으로 서쪽은 완전 가평북방의 산악지형이며 그 가운데 북한강이 흐르고 동쪽에 춘천이 있으면서 서울에서도 관광지로 이름이 있는 춘천에서 양구로 넘어가는 길목인 배후령 고개와 추곡터널 그리고 추곡 약수터, 소양강 댐안의 청평사 바로 위의 오봉산, 부용산 ,종로봉이 있는 북면 내포리가 소양강 북안에 발달해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북한군 제2사단이 공격을 해 오게 되는데 화천에서 춘천-원주에 이르는 5번도로가 발달해 있고 소양강 차안에 봉의산이 춘천시내에 우뚝솟아 중요한 감제고지 역활을 하였다.
먼저 서쪽의 제7연대(임부택 대령) 상황은 지금 춘천댐을 지나 북한강 서안을 타고 올라가면 원평리가 나오고 여기에 38도선 푯말이 서 있다.
바로 이곳에 모진교라는 250m되는 다리(현재는 춘천댐 공사로 수몰됨)를 건너야만이 기계화 부대가 내려올 수 있는데 이걸 폭파할 준비가 전혀 없이 제3대대는 전쟁을 맞이했고 바로 옥산포 일대까지 밀리게 되며 이곳에 살상지대가 계획되어 있어서 포병사격으로 적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바로 이 옥산포 인접 도로에서 심일 소위의 특공대가 북한의 자주포 2문을 파괴했다는 것인데 그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이문제는 나중에 이병용 주월공사(6.25당시 중대장)의 증언편에서 언급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북한강 서안에는 제10중대 1개중대로 적목리에서 고수령까지 방어하는 광정면이다.
그리고 옥산포 우측이 지내리로 고탄리에서 제2군단 화학대가 있는 곳으로 현재는 도로가 양호하게 개통되어 있는데 지내리에서 정면으로 여우고개가 나오고 우두동 충혼탑이 나온다.
그 우측이 수리봉에서 배후령고개 ,오봉산-부용산-오항리(추전리)로 2대대가 방어하다 천전리 지금 제2군단 사령부 들어가는 우측의 소양강 남안에 저지진지를 편성하다 원창고개선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소양강이고 쌍용다리가 있는데 소양강 대안(일부는 수몰됨)에서 제7연대는 적의 예봉을 완전히 제압하지만 소양교를 폭파하지 않아 전차가 넘어오고 결국은 인제-홍천쪽에서 우회한 적의 공격에 무너져 금병산-원창고개-대룡산선으로 밀리고 홍천 밑으로 내려가게 된다.
반면에 제2연대는 소양강 남쪽 좌측에 제1대대로 계명산 하단으로부터 강태무가 월북했던 원대리간을 방어하고 제3대대가 원대리 동쪽에서 현리 진흙동까지 방어를 했다.
북한군이 인제에서 홍천방향으로 그들의 최정예부대인 제12사단(팔로군 출신 조선군이 주축)와 제603모터사이클 부대를 투입하고 현리쪽에는 제1경비여단 소속 대대들이 밀어 닥쳤다.
그러나 바로 제1대대는 어론리와 말고개에서 적전차와 자주포를 제압하는 기염을 토하여 일시적 방어를 하게 된다.
결국 북한군은 이곳 춘천북방에서 48시간을 지연하여 우회기동으로 서울을 포위섬멸하려던 계획이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2. 춘천 서북방 지역 탐사 및 주민 탐문결과
나는 이곳에서 레이다부대장을 하면서 웬만한 산은 다 답사하였다.
이유는 당시에 조영길 군단장(전 국방부장관)이 바로 이 무기체계를 도입한 장본인으로 북한군의 대박격포레이다를 전방에 배치하여 초전에 적의 포병위치를 탐지하여 표적을 자동적으로 분석하여 대포뵹 화력전으로 적의 공격을 조기에 무력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이 레이다로 지상무기로는 유일하다. 그러니 밥만 먹으면 산에 올라 앞에 막힘이 없이 이 장비를 운용할 진지를 찾는 것이 나의 주 임무였다.
'99년 9월 23일 육본에 내려가 유해발굴을 위한 지형정찰을 하는데 내가 근무했던 이곳에 모진교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옥산포에 매운탕집이 유명한 곳이 있는데 이곳이 살상지대로 북한군이 이곳에 집결해 있다가 아군의 집중 포병화력에 혼비백산하고 뒤로 물러났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절을 찾아가 그 오랜 역사를 탐사하고 옛정치를 그 이끼가 형성된 기와로부터 호흡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배를 타고 청평사에 들어가고 오봉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리고 이곳에 있는 고려시대 삼은의 한명인 목은 이색의 선비됨만 느겼지 전쟁터란 것은 알지 못했다.
가. 동네 노인 면담 : "군인이 어디있어요, 목총들고 우리가 근무서다가 전쟁났다."
매봉과 고수령 밑에 지암리와 홍적령이 있다. 가평에서 춘천을 오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니 그 당시에 열악한 도로상황을 고려해 보면 적의 기계화 부대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원평리또는 마평리라 하는 지암리 입구에서 지금 수몰되어 보이지 않는 모진교를 건너야 화천에서 춘천에 이르는 기동로가 되는 것이다.
매봉과 촉대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일품이고 몽덕산과 가덕산에서 북한강 방향으로 완만하게 지맥이 흘러내려 넓은 개활지처럼 되어 있는 지암리 바로 밑의 오월리에는 지금 강원 춘천지역 수렵장이 개장되어 있다.
홍적령고개만 넘어가면 가평으로 들어가는 곳이고 춘천으로 내려가니 당연 북한군의 공격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이곳에 근무한 군인들은 놀라서 혼비백산 도망치고 말았다 한다.
이곳 지암리 아랫말에 북한군이 오면 북한군 부역을 아군이 오면 아군 노무자를 하며 살아난 한 노인이 있다. 이분은 당연히 군대는 가질 못했다. 키가 너무 작아 150cm미만이다. 하지만 기억력은 치고로 동네 이장도 보았다.
동네 바로 위가 500고지군으로 횡격실로 되어 있는데 제3대대 10중대가 2개소대를 전초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측 거리가 무려 10km이상 되는 곳으로 사실 누가 넘어와도 알 수도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넘어가면 원천리가 나오는데 면소재지로 사람이 많이 북적대는 곳이라 전쟁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넘나드는 사람이 있었다 한다.
결국 그 사람들은 지금 한명도 이곳일대에는 살지않는 것으로 봐서 북으로 갔다고 한다.
결국 방법이 없으니 동네에 청년방위대를 조직하여 밤에는 함께 초소에 올라가 보초를 서게 되었는데 총이 어디 있어야 무장을 할텐데 한심한 시절이니 뭉둥이를 준비하여 들고 근무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무척 놀랐지만 나는 많이도 들어 놀라지는 않았다.
제대로 부식도 조달이 안되어 동네에서 얻어먹어야 했다.
그나마 군인이 경계근무를 하면서 그래도 보초라도 나가지만 처음 경찰이 해방이후 잠깐 근무를 할때는 동네에 마을 집에 살면서 근무교대를 나가고 산 위에서 북한군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산위는 우리 지역인데 그들은 자기집처럼 들어다녔으니 한심할 뿐이다.
이런 시절이니 바로 원평리에서 표무원이란 대대장이 대대병력 일부를 데리고 월북한 그 자체가 어렵지도 않았다 한다.
군 내부에는 북에서 내려온 빨갱이들이 많이 있었고 그 신분은 장교에서 부사관 병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파고들어 있어 우리의 움직임은 그들은 손금보듯이 알게 되었다.
이 할아버지는 나이는 15살이나 어린애같으니 누가 잡아가지도 않고 하지만 똑똑하다보니 아군들은 함께 근무하기를 원하여 인기도 있었단다.
지금 이 할아버지는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다. 할머니도 안계시고 극빈자 대우를 받으며 살고 계신데 젊었을 때는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어 연명하였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그것도 못한단다.
그러니 화악산 일대 어느 산이고 안가본 곳이 없이 다 가보았다.
"처음 전쟁이 났을 때는 어디에 계셨어요?"
"고시락고개 우측 초소에 올라가 있는데 한밤중에 비가 내려요. 그래서 우산도 없어 나무로 움막처럼 초소가 되어 있는데 비가 죽죽 내리니 집에 가서 우산을 가지려 가는데 뭐가 번쩍 하면서 꽝꽝 거리는데 목총을 들고 다시 초소쪽으로 뛰어가니 군인들이 달려내려오며 빨리 도망치라고 하면서 몽덕산쪽으로 뛰어 올라 갔어요."
"그럼 같이 가지는 않고 어르신은 여기에 그냥 남아 계셨네요?"
"도망칠 겨를도 없었어요. 어리둥절하고 다시 집으로 내려오는데 벌써 북한군이 들이닥치는데 쪼그만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바로 길따라 홍적령쪽으로 걸어 갔어요."
"북한군이 이곳에 있는 동안은 뭐 하셨어요?"
"집에 가만히 있는데 모두 나오라 해서 나갔더니 내 어깨에 무슨 견장같은 것을 달아주고선 호르라길를 주고 낮에나 밤에나 사람들이 모이지 않도록 하고 특히 밤에는 불빛이 세어나가지 않도록 감시하고 신고하라고 하길래 그렇게 했지요. 그 당시에 이곳은 대부분 숯굽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젊은 사람들이 없으니 문제도 없이 그냥 지나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북한군 통제로 다른 부역을 한 것이 없나요?"
"처음에는 없다가 한 한달인가 지났는데 방공호를 파야 된다고 해서 집집마다 방공호를 팠고 또 얼마 있으니 해방전선에 기여를 해야 한다고 동네 어른들중 일부가 밤에 북한군이 만들어 놓은 것을 메고 홍천까지 걸어갔다 새벽에 돌아오기도 하고 다른 것은 그 놈들이 뭐 특별나게 못살게 군적은 없어요."
여기서 잠깐 제6사단의 창설 멤버이며 유해발굴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직접 현장에 동참도 하신 서울지역 참전전우회 회장을 지낸 김용청님과의 만남을 소개하여 이곳 춘천지역니나 가평지역에서의 증언에 관한 내용을 잠깐 어필하고자 한다.
나. 참전용사 김용철님 대담
1999년 12월 초 어느날 최초 유해발굴 지역을 찾기위해 양구북방 백석산 지역과 수리봉 지역을 답사하는데 계룡대에서 연락이 왔었다.
제6사단 참전용사 한분이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이름 제19연대 출신 김용철님이다.
전화번호를 받아 직접 연락을 드렸다.
"네 김용철 입니다."
"충성 유배발굴팀 이용석입니다. 저를 찾는다고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그래요. 내가 제6사단 창설 멤버로 특무상사까지 달고 월남에도 가고 32년 근무했어요. 그래서 어디서 유해를 찾아야 하는지 알려주려고 전화했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전쟁기념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업무차 매주 화요일 올라가기에 일정을 정했다.
사실 제19연대는 초기전투시 예비연대라 동쪽 홍천에 추진되고 춘천에는 '51년도 중공군 4울공세시 가평일원, 5월공세 이후 진격시 바로 지금의 지암리 오월리등 춘천-가평동부지역이 해당이 된다.
전쟁기념간관 6.25전쟁룸에 먼저 가서 6사단의 전투연역을 헤아려 보고 용사님을 기다렸다.
정해진 시간대에 무척 키가 크신 분이 전쟁기념관 홀내에 커피숍으로 일행과 들어오고 계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앞으로 나가 혹시 김용철 용사님이신지 물어보니 맞았다.
우린 자리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앞에 놓고 잠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유해발굴 사업으로 인해 알게된 육탄 10용사사업회 사무총장인 유법사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다.
그런데 또 어떻게 김용사님과 두 손을 붙잡고 격한 인사를 나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법사님도 제6사단 출신이고 물론 전후이지만 그래서 말고개 전투기념 행사나 신령지구 전투기념행사 등에 함께 참여하여 잘 알고 있었다.
"홍천 말고개 전투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유법사 : "어떻게 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나 : "아니 우리 여기서 만나는 것을 염탐하여 알고 찾아온 것 아닙니까? 하하하."
김용사님 : "건강하지요. 어떻게 오셨어요?"
유법사 : "아 오늘 공주지역 참전용사 12명을 모시고 이곳을 관람하러 왔고 이과장은 지난 10월에 홍천 말고개전투 탱크 부순 업적에 대해 진실성을 알아보려 한다고 해서 김주형 장군과 동석하여 2~3시간 토론을 했지요."
김용사님 : 아 그건 가짜가 많아요. 조달진이 말고는 가짜입니다."
유법사 : 그때 그곳에 19연대는 없었는데 어떻게 잘 아시나봐?"
나 : "잠깐만요. 지금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건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은데 유법사님 시간 되시면 점심을 같이 하실 수 있습니까?"
유법사 : "일행과 함께 해야 되니 나중에 연락해서 우리 논산에서 한번 봅시다."
이렇게 돼서 유법사는 떠나고 김용철 용사님과 마주앉아 하실려는 이야기를 경청하게 된다.
"가평 북면 목동지역과 화악리 일대를 탐문하여 숯가마터를 찾으세요. 우리 그곳에 중공군을 죽였고 중공이나 북한군은 우리 군인이나 경찰등 포로들을 쫒기게 되니까 몰아넣고 ㅘ염방사기로 지지고 이놈들이 도망쳐서 우리가 도착해 보니 이건 눈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
"그때가 언제 입니까?"
"그러니까 '51년도 5월말쯤 됩니다. 우리가 용문산에서 밀고 올라가 거 북배산인지 있잖아요? 그 능선을 1개부대가 올라서 추격하고 우리는 밑에서 길로 추격하는데 중공군 200명이상 생포했지요. 파로호 있잖아요? 그곳에 중공군 1개군단을 수장시킨 사단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이제 유치원생 입니다. 전사는 처음 접하고 있고 다만 주요 전투중 년도별로 국군이 주로 전투하여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주로 내년에는 6개 전투지역을 발굴하려 하는데 그 근거를 찾으려 지금 탐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50년6월 최초 전투시 6사단이 피해를 많이 당한 곳이 어디신지 아시나요?"
"홍천 말고개에서 최고 많이 죽었지요. 탱크도 부수고 대단했어요."
'아니 북한군말고 아군이 많이 죽은 곳을 우선 찾으려 합니다. 아군이 많이 전사한 곳을......"
"가평 설악면에 가면 엄소리가 있는데 그곳 산이 진내사격을 해서 국군도 많이 죽었을 겁니다. 저기 문경새재 있잖아 거기서도 우리 6사단 녹아났지......"
그 당시에 여러 이야기를 하는데 아는게 없는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이렇게 첫 만남이 성공리에 끝나고 그 후에는 거의 1년에 한 두번은 만나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곳 춘천이나 홍천 말고개 발굴시 현장에서 증언을 부탁드렸더니 용사님도 혼쾌히 승락하여 주어서 우린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이곳 춘천 서북방의 전투와 관련된 제보나 증언이 많지가 않다.
용사님 이야기대로 중공군이 넘어와서 벌어지는 전투와는 사례가 꽤나 많이 있지만......
우린 그 최초 소초라는 곳을 보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곳은 전투준비가 다른 연대보다는 되었고 훈련도 어느정도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초소의 수준이라는 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안내를 받아 한 장소로 올랐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다. 전쟁때 불타버렸고 그 후에도 몇번 산불이 나서 타 버렸다는 설명이지만 그 위치에 바닥은 아무런 인위적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솔직히 초소라는 것이 주변의 나무를 잘라서 만든 나무토막 초소라는 사실이 더 가슴에 와 닿았고 지촌초교 지암 분교가 있는 곳에서 지암천을 건너 맞은편에 있었다는 초소 위치도 확인했지만 아무 흔적이 없었다.
도대체 초전에 북한이 많은 병력과 물자를 그리고 장비를 전방에 추진하고 어쩌다 남으로 넘어온 북한 군인이 북측이 곧 침공할거라고 조언을 했는데도 무슨 배짱으로 아무런 대비를 안하고 버티기를 했는지 의문이 갈 뿐이다.
물론 그 답이야 우리 군조직 그것도 저 상부에 프락치가 숨어들어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막고 헛것(명태)만 보이고 탐하게 하였기에 당연한(?)거라 하겠지만 마음이 편하질 않는다.
동네분들도 솔직히 그때는 우리보다 저들이 더 잘 살았고 우리는 얻어먹기도 햇던 시절이라니 지금의 우리 수준의 판단력으로 비교하는 것 자차체가 무리 일 수도 있다.
다. 나는 어르신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오월교가 있는 5번도로 입구로 났다.
머구넘이에 맛있는 막국수 집이 아주 오래된 손맛을 간직하고 있어 종종 찾던 곳이다.
"안녕 하셨어요. 어머님?"
"아이고 이 누구요? 대장님 아니요. 그래 어디간나 했더니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저기 충청도에 계룡대라고 육군본부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 있어요. 오늘 이곳에 유해 찾으러 왔다가 아랫말에서 여기 어른을 만나서 여기저기 다니다 생각이 나서 왔습니다."
"아니 아저씨가 전쟁을 하였다고, 군대도 안갔잖아?"
동네분들 간에는 모르는게 없다. 그 집안의 내력부터 집안에 숱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다 아는 것이 시골 인심이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어른을 집에 모셔다 들이고 다시 음식점에 왔다.마침 춘천시내로 장보러 간 사장님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99년 9월에 떠나 지금 들렸으니 거의 10년만에 찾아온 사장님 내외분은 별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흰머리가 상당히 생겨 파릇파릇하던 옛모습은 없다. 그간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대대장 참모시절 도와 주셔서 고맙다고 했더니 오히려 내가 많이 찾아와 주어서 고마웠다고 한다.
자주 찾아간 이유는 일단 맛이 있고 성의가 있으며 시골 밥상의 구수한 맛이 하나하나에 다 살아있었기 때문에 같은 값이면 이곳을 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속에 사장님이 오월교 건너오자마자 우측 산을 가 보았느냐고 물었다.
사실 그 산은 조그마한 산인데 가보지 않았다고 하니 사장님이 나이 10살에 전쟁이 났는데 그 위에도 초소가 있었고 어린 나이라 처음에는 전쟁이 뭔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중공군이 왔다가 다시 북으로 갈 때는 이곳에서 전투도 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원평리 말고개 ,매봉하고 가덕산, 북배산, 북한강 넘어 인람리, 송암리 산에 오르면 탄피가 엄청나게 나와 그걸 주어다 엿도 바꿔먹고 돈으로 무게를 재서 돈으로 받기도 했다고 한다.
옛정을 찾아온 것이 갑작스레 대박이 났다.
참전용사님보다 더 확실한 정보를 우리에게 준 것이다. 이렇듯 전쟁터에 오래 살고 계신 분들이 눈치보지말고 본인들의 옛 이야기를 제대로 해준다면 이것의 정보가치가 가장 높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부역자 내지는 빨갱이와 반동분자의 고자질 문화로 얼룩져 과거를 덮으려 하는 경향이 많다. 아무리 우리가 설득하고 연좌제 법도 없어졌고 오히려 유해를 찾는다면 포상금을 준다고 해도 그 쓰라린 충격이 너무 크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이드신 분들의 모습이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며 건강하시라고 인사를 드렸다.
"사장님 조만간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오월교로 갔다.
"오월교에서 숨져간 영혼들이여 평안하소서!"
오월교는 참 나에게는 많은 슬픔을 준 곳이다.
인사참모로 '98년 8월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그해 12월 30일인가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다름 아닌 마산인지 거제도인지 남쪽에서 올라온 군 유류수송하는 대형 트럭이 그만 이곳 오월교에서 북한강으로 떠어져 운전사등 2명이 숨지는 사고였다.
이 오월교는 우리부대에서 불과 한 500m 밖에 안되는 곳인데 그날 일직사령을 하고 있었는데 새벽 5시경에 꽝하는 엄청난 폭음이 들려 상황실 밖으로 뛰어나왔더니 보초가 원평리쪽에서 났다고 한다. 그래서 일직대기차를 이용하여 다리까지 갔으나 아무런 징후를 찾지 못하고 부대에 들어 왔는데 바로 싸이렌을 울리는 요란한 경적음과 함께 불자동차들이 춘천댐을 지나 오월교쪽으로 간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는데 장군님 공관에서 무슨 난리가 났느냐고 전속 부관의 전화가 왔다.
부대는 아무 일이 없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답변하고 다시 차를 몰았다.
시간은 벌써 7시가 되어가는데 아직도 어둠이 깔려 있는데 다리 입구에 차량들이 서있고 번쩍번쩍 거린다. 아뿔사 접근하여 보니 웬 잠수부들이 산소통을 메고 그 추운 꽁꽁 얼어붙은 북한강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일정 부분이 푹 꺼져 있었다.
"한 곳에서 물속에 자동차 7대가 더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결론을 말한다면 운전사가 다리 코너에서 졸다가 그만 물속으로 그대로 들어가 버렸고 25만톤이나 실은 무게로 강 얼음이 60cm도 넘는데 깨지는 것이 아니라 대형트럭이 떨어져 닿는 부분만 푹 거지고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느냐면 언덕을 올라서 휴식을 취하는데 함께 온 5대중 1대가 보이지않아 바로 뒤 운전자가 느낌이 이상하여 다리 입구로 가서 확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수부가 동원되어 오일펜스를 치고 물속 주변을 탐색하니 탱크로리 말고도 일반 승용차가 7대나 더 있었다.
이런 사실을 지휘부에 보고나니 내가 처음 짚차로 갔을 때에 발견했더라면 혹시 오늘 사고로 숨진 분들은 구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었다.
이런 사연이 있는 곳인데 오늘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혹시 6.25전쟁 당시에 이곳을 뛰어내리던 군인들이 죽어가고 그 원혼이 남아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 바로 탐사를 하고 발굴을 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일대에 개인호는 많이 있고 탄피나 파편은 호 속에 남아 있었지만 유해는 없었다.
나는 다리 앞에서 묵념을 드리고 말고개로 이동해 갔다.
라. "81부대마크 발굴, 팔로군의 남침 근거 확보"
(1927년 8월1일 강서성 남창에서 주은래 주도하 중국 공산당은 소위 팔일남창기의를 일으켰다. 이 부대는 중국공산당 최초의 근거지인 강서성 정강산에서 모택동이 이끄는 농민들로 구성되었던 부대와 회합하여 중국 공산당의 독립적인 무장 세력을 갖게 되었다.)
말고개는 홍천 북방에도 있고 화천 마현리 적근산 밑에도 있고 전국에 여러 곳에 있다.
내가 찾아간 곳은 말고개는 두곳인데 앞에 있는 곳은 말고개, 뒤에 있는 것은 달거리고개라 한다.
달거리고개는 일명 여기서는 작은 말고개라 일컫고 있으며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에 있는 고개로 지도에는 '달거리고개'라 한다. 그 이유는 고개 바로 밑이 북한강이라 달이 오르면 막힘이 없이 달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서쪽 능선으로 오르면 오탄리 북쪽에 있는 812고지로 해서 814고지 명지현에 이르고 명지현에서 북쪽으로 달리면 명월리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두류산-967고지/피나무골의 장군산(847m)-실내고개/만산현에 이르게 되고 동쪽으로 내려서면 새고개를 지나 원천 농업단지-북한강에 이르는 곳으로 아주 중요한 고개인데 마지막 부분에 일제시대부터 파놓은 금광굴이 있다.
또 하나는 원평리에 있는 말고개로 지금은그 밑으로 터널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은 서쪽으로 능선을 이용하여 이동하면 매봉에 이르게 되는 능선으로 동쪽으로 내려서면 밤나무골로 바로 북한강이 나오는데 매우 전술적 가치가 높다.
나는 우리 발굴팀을 대동하고 매년 1회이상 탐사를 실시하고 혼자서도 2번에 걸쳐 이곳을 직접 탐사하여 어떠한전투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최초 전쟁시 북한군이 어디에 병력과 장비를 집결시켰는지 알아보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발굴계획도 먼저 큰 말고개위주로 탐사했고 북한의 최초진지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이곳은 사실 최초 공격진지로는 적합하지않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 최초 경계진지가 있는 곳과 북한의 진지는 가운데에 마평천이 흐르고 있고 일거에 우리 군을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기동화 하기는 곤란하게 보였다.
그런데 왜 포소리 듣고 병력이 고시락 고개로 오니 모두 도망쳤을까?
북한군은 밑에서 올라와야 하고 우리는 밑으로 바라보며 방어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으로 무너질 수 없는데......
지역주민들의 이야기가 말고개전투, 말고개전투하여 나는 홍천말고개로 알았는데 이곳도 지역주민들이 전투를 많이 했다고 하니 어쨌든 나는 한번 발굴을 해 보기로 했다.
20001년도에 제27사단과 협조하여 이곳 말고개(1구) 일대와 월송리(1구), 춘천 동면(춘천지역 전투시 소개 : 7구)일대에 대해 1달 여간에 걸쳐 발굴작전을 개시하여 8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말고개는 무려 2,000개의 개인호와 3km의 교통호를 발굴하여 1구의 유해를 찾았다.
사실 이곳은 초기 전투와는 거리가 있는 곳인데 지역주민들이 말고개에 귀신이 출현한다는 등의 민원성 요구와 실제 이 고개에서 교통사고가 자주 나는데 사실 가보면 알지만 사고가 나게 되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마평리 지역주민들의 요구가 있어 발굴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팔일"이 새겨진 모표를 발굴 하고 탄피와 수많은 파편을 발굴 하게 되었다.
발굴 도중에 동네에서 살고 있는 어른들이 올라와 본인들이 과거에 보았던 곳을 증언도 해주고 함께 발굴에 동참도 하여 이곳 사람들의 반공정신이 남다름을 보여주었다.
결국 우리는 한구의 유해라도 찾으려 노력한 결과 얼굴이 없는 한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하지만 발굴 당시의 모습이 예전에 누군가 발굴하여 이곳에 재매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도 함께 출토된 유품들, 플라스틱 스픈. 칼빈탄알. 전투화 잔해등을 남겨놓아 군인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곳이 중공군이 주로 내려와 전투를 벌인 곳이니 그 당시에 내려온 군인들의 부대의 성격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월송리에서도 대규모 발굴작전이 진행 되었다. 그리고 한구를 발굴 했다.
마. 동네에서 가장 어른 되시는 90이 넘은 할아버지가 직접 아군을 100여구 묻었다고 증언하고 나섰다.
월송리는 가덕산이나 북배산에서 동쪽으로 내려서면 나오는 동네로 바로 앞에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는 곳으로 얼마든지 초전투든 그 이후에 전투는 전쟁을 할 만한 곳으로 마침 지역탐문 중인데 할아버지가 잘 안다고 지역 이장의 안내를 받아 제보를 받아 바로 마을 일대 야산을 전수 조사하게 되었다. 동네에서 호응도가 좋아 여러사람이 나서서 이집저집을 안내하며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발굴준비를 하게 되었다.
산이 높은 고지군도 아니고 마을 동산인데 서상리 방동리 금산리가 인접해 있어 접근성도 좋았다.
막상 조사를 실시하다보니 '51년 5월말 미군이 진격시 이곳에 미군 포부대가 들어와 사격을 하였고 중공군은 주로 서쪽 북배산이나 가덕산 줄기를 따라 매봉으로 도망가고 우리 아군은 국군 제6사단이 바로 산 넘어에서 홍적령쪽으로 진출하여 적을 차단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전사에서 보면 중공군은 현리지역에서 넘어오던 부대들이 후퇴하는 시간이 더디어 결국 지금의 파로호, 그 당시 대붕호일대에서 일부 퇴로가 차단되어 물 속에 수장되고 일부는 화천을 거쳐 매봉지역으로 밀려나가려다 다시 유엔군과 우리 6사단에 치명타를 입고 그들 180사단은 아예 소멸해 버리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아군도 피해를 일부 입었을 것이고 초기전투시에도 얼마든지 피해는 있을 수 있다.
이런 저런 제보가 넘쳐나고 서상리 삼층석탑에 총탄흔적, 광산골에 은거하다 많은 군인이 잡혀서 그곳일대에서 대창으로 질려서 죽었다는 소문이 있는 곳은 다 탐사와 발굴을 해 보았다.
특히 할아버지가 100여구를 매장했다는 월송리 마을 뒷산은 사실 개인호도 엄청 많았다.
하지만 한달여의 발굴에도 우리는 1구의 유해만 찾을 수 있었다.
예비로 있던 제19연대 제3대대가 투입되어 서상리로 진출했다고는 하지만 지역주민들은 총쏘고 전투하는 모습은 못보았고 후퇴하는 모습만 보았다 한다.
바. 가평 북면 소법리 등지거리의 이용기씨 증언이다.(76세. '05)
중공군 정월공세(1.4후퇴)시 중공군이 사전에 이 지역 일대를 포위하여 등지거리에는 국군전사자가 쌓여 있었다고 한다. 지역에는 철모며 전투화들이 굴러 다니고 집 개들이 물어 뜯고 다녀 아비규환의 동네처럼 되어 있었으며 이때 중공군이 사전에 목동에 들어왔는데 산을 타고 계관산까지 내려와 춘천 서면과 가평 북면을 차단하여 북한강을 건너 아군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했단다.
그 당시에 가평에서 춘천 시장에 장사를 하러 가는데 가는 지름길이 목동 성황당에서 작은멱골로 해서 북배산을 넘어 티골고개로 해서 신매저수지로 해서 월송천을 따라 내려가 서상리에 나룻배를 타고 춘천에 들어가 물건을 팔고 사고 돌아온다.또한 목동리에서 싸리재로 해서 덕두원리아나 방동리로 넘나들기도 했다고 한다. 상식이 조금 있어 보이는 어른의 증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 춘천 후평동에 사는 최성근씨의 증언이다.('07)
'67년도에 화전으로 밭을 일구어 생활하는데 덕두원리에서 군번표 1개, 대나무 파이프(태극기 표식)등을 보았고 전사자 무덤이 많이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우린 덕두원리로 달려가 나온 유품을 묻어두었다는 바위 밑을 발굴하고 지역을 탐문하였은나 이곳은 지금 수목원으로 완전 탈바꿈하여 그 흔적을 볼 수가 없다. 특히 잣나무 수종을 개량하는 곳이다.
제보자와 다시 통화하여 본 결과 덕두원 입구에 노인 양로원이 있는데 그곳에 가기 바로 전에 냇가를 건너면 큰 바위가 밭 입구에 있고 그 밑에도 언젠가 한구를 매장하였다 하여 실제 그 바위를 찾아 발굴하여 보았으나 미제 프라스틱 스픈과 박격포탄 파편 몇개, 전투화 조각만 나왔지 유해는 발굴하지 못했다.
아. 춘천 서북방 초기전투지역에서 유해 발굴하다.
결국 얻은 해답은 북한군이 매봉에서 내달려 촉대봉을 지나 홍적령을 선점하여 배후를 차단하려 하니 1개소대 밖에 없는 인원들이 혼비백산하여 마을 앞산으로 철수했으리라 판단 되었다. 어르신의 제보에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직접 탐사해 보기로 작정했다. 당연히 매봉근처에 1개소대는 바로 밑으로 계곡으로 내려서 화악리 바깥마을로 달려와 길을 타던지 산으로 올라가 가덕산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춘천으로 빠졌을 것이다.
"철모를 쓰고 얼굴은 반이 포탄에 날아간 용사님을 바라본다, 충성"
이일대에서 개인호와 교통호 파편등 전투흔적이 가장 많은 곳은 처음 어르신을 만났던 아랫말에서 남쪽의 하남실에서 몽덕산에 오르는 지맥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호가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중간쯤에 있는 587고지 주변은 호가 집단으로 구축 되어 소대나 중대규모가 항전을 했다고 보여지는 곳으로 구축형태도 아군이 판 것임에 틀임이 없다.
나는 이곳을 승원이에게 임무를 주어 정밀 탐사를 하도록 하고 그 결과를 발굴계획에 반영하여 '09년도에 12구 그리고 '13년도에 4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아마도 후퇴했다는 용사님들이 주저항 진지가 이곳이 아닌가 싶었다.
왜냐하면 만약에 '51년도 5월 말에 제6사단이 이곳으로 진격할 때라면 중공군이 완전히 지휘체계가 무너져 3만여 명이 포로 잡히는 마당인데 국군이 이렇게 집단으로 한곳에서 전사할 일이 없다고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발굴된 유해는 멀리 떨어져 한구한구 발굴된 것이 아니고 바로 고지 주변에서만 각 개인호마다 한구씩 발굴 되어 흩으러지지 않고 집단으로 대항하다 함께 전사했음이 명확하다. 소대원 중에 2분의 1일이 전사하고 나머지 병력은 그 틈을 이용하여 아마도 춘천으로 철수해 갈 수 있었으리라 본다.
[음지에서 일하는 분들이 묵념올리다]
때는 2009년도 7월쯤인데 마침 국정원에서 안보견학을 오겠다고 해서 과감하게 이곳으로 안내토록 하고 나는 전사 브리핑 준비를 했는데 지금에야 실토하지만 난 엉터리로 보고를 하였다.
감사실장 : "고생이 많습니다. 이곳 전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과장 : 네 알겠습니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시는 박쥐부대원들의 안보현장 견학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이곳 전사를 간략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곳 전투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전초기에 바로 이 앞에 지암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국군 제6사단의 1개 소대가 있었고 지형설명에서 말씀드렸던 매봉 밑에 1개 소대가 경계진지 초소를 운용하는 과정에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인 역전의 용사들인 중공 모택동이 지휘하는 팔로군 출신 조선족으로 주요 인원이 편성된 제12사단이 공격을 하게 됩니다.
주 방향은 바로 동쪽의 북한강변을 따라 5번도로가 춘천으로 해서 원주나 이천으로 빠질 수 있는 양호한 기동로인데 이곳에 전차와 자주포가 기동하여 내려가는 소리를 이곳에서 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경계병들이 이곳으로 철수하여 전사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51.1.4후퇴 당시에 이곳 매봉에 국군 제2사단 제31,32연대가 '50년 12월 중순에 들어와 점령하여 후방지역 공비토벌 작전을 하다 중공군이 목동을 차단하여 포위 되는 바람에 무질서한 후퇴를 하다가 많은 인원이 바로 여러분이 서 있는 곳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몽덕산 695고지를 따라 남쪽으로 능선이동을 하면서 전사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세번째는 '51년 5월 16일부터 있었던 중공군의 춘계 2차공세시 제6사단이 양평의 용문산전투에서 대승으로 중공군 1개군단 우리로 말하면 3개사단 병력을 몰살시키고 반격으로 돌아서서 추격하여 이곳 가평-춘천-화천으로 밀고 올라오는 '51..24~28일 어간에 중공군은 너무 긴박한 상황에 우리의 포로들을 이곳 화악산 일대 숯가마터에 밀어넣고 화염방사기로 불질러 죽이고 매봉 방향으로 도망치는데 이때 우리의 국군 포로중 일부를 산악 기동로를 이용하여 북으로 가려다 안되니까 각 개인호에 밀어넣고 사살했다고 하는 가정입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의 견해는 세번째가 더 유력하다고 진단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세월동안 여러 각도에서 관련 증언을 모으고 실제 전투진지를 탐사하다 얻는 결론이 물론 이것도 100%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가정치에 접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첫번째 내용으로 우리 용사님들이 최초 경계진지에서야 기습으로 어제 낮에도 38선상에서 만나 평양의 뚱순이 이야기와 부산의 갈매기 아가씨를 자랑하며 농담을 주고 받던 그들이, 보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탱크가 저 강변으로 크르릉거리며 달려 가지 대포가 꽝꽝 떨어지니 어떻게 하겠는가 일단 저지진지에서 숨을 돌리고 가지고 있는 실탄으로 끝까지 저항하고 일부는 이 사실을 알리려 전우가 인간 방패를 자처하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할 때 바로 춘천으로 내려가 48시간이나 적의 수도권 진출을 방해함으로써 대힌민국이 대전으로 이사하여 운명이 이어지게 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했다고 했어야 했다.
어쨌든 그 요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본인들만이 아닌 야전에서 이렇게 고생하며 목숨을 받치는 전사가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하고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이 고지는 한 100평 남짓한 고지 정상에 호는 거의 50여개 구축되어 있는데 후사면에도 10여개가 구축 되어 있었다. 물론 이곳에는 중공군 호도 방향이 남쪽으로 굴토되어 함께 있다. 아쉬운 것은 순수 아군 호만 구별하기란 사실 불가능 하다.
몽덕산에서 하남실에 이르는구간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호까지 700여 개가 있는데 6.25당시 것도 일부 최근 호로 재굴토 되어 버리기도 했고 어느 구간은 수렵장을 만들면서 훼손도 되었다.
12구의 유해가 한 장소에서 그것도 각 개인호마다 발굴 되는데 전사하신 모습이나 유해가 남아 있는 정도가 다 다르다.
철모 속에 얼굴이 들어 있는데 아랫 턱이 없는 유해도 있다.
어느 유해는 목이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목없는 유해로 나머지는 그대로 있는 유해도 있다.
어느 유해는 팔이 다 없고 다리는 한쪽만 호속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어느 유해는 움크리고 전사 했는데 언제 자란는지는 모르지만 도토리나무가 유해를 뿌리로 감싸 완전유해로 발굴 되기도 했다.
어느 호에는 수류탄이 4발 남아 있고 m1실탄이 2탄창 그대로 남아 있는데 유해는 없다.
어느 유해는 두개골이 있고 몸둥아리는 없는데 오른쪽 발에 전투화가 싣겨진 체로 발가락 뼈가 살아서 굴을 파고 살아가는 개미들을 피하느라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용사는 수류탄을 쥐고 있는 한손이 그 손가락뼈가 아직도 힘이 남아 있어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어느 용사님은 조그만 호속에서 금방이라도 적진으로 달려들 100m 스타트 자세로 숨져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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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의 진혼곡
우우우, 용사님 우리용사님 그리운 용사님
그 모습앞에 엎드려 국화 한송이 올립니다
눈으로 보고도 못 본 체 해야 하는 슬픈 모습에 눈감아
어이 나는 돌아가야 하는지 몰겠습니다.
이런 날 하늘은 애 조용한건지 천둥이 치고 폭풍이라도 불어라, 이 산하에~
우린 너무 몰랐습니다
아니 알면서 모르는체 눈감고 봉사인양 배고품에 찌들린 들개들처럼
내나이 40에 눈을 뜨고 바라보니 아픔이었습니다
누구도 알려주지않던 역사의 질곡에 빠져 허부적거리며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비극이 주어졌는지 울분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명령이기에 산에 오르고
용사님이 파놓았던 그 개인호에 그 교통호를 뒤져보았습니다
들국화 하나 핀 흑운토령에서도 그랬고
다부동 369고지의 대한경찰뺏지, 여농단추, 소위계급철제뺏지, 북한군 별모표......
우리 용사님은 땅에 엎드려 50년, 70년을 기다려 눈물나지 않았습니다
자유는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피끓는 정열로 뛰어올라 목숨받힌 고지 위의 찬란한 함성소리
총칼로 적진을 가르며 오직 조국위한 한 마음
그 피 뿌려진 곳에는 들꽃도 피어나지 않고 낙엽이 쌓여지고 쌓여지고
눈비 내리더니 어언 그 숱한 세월속에 눈물이 매달라버렸습니다
이제는 잊혀진 전설처럼 적마저 잊어 친구가 되고
달빛 별빛이 쏟아지는 하얀 가슴
운명이 그러려니 체념이 되어 백마고지에 울려 퍼지는 '진군가'
북한강 소양강 말없이 흐르고 351고지 수도고지 저격능선 베티고지에도 용사님 계신다
아아 까마귀 날아 속절없이 봄이 오느니 나는 외롭게 광덕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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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감사실장이 엎드렸다.
함께 온 여성들이 오열했다.
철모속 아픈 용사님의 얼굴에 미소가 보인다, "찾아줘서 고맙다"
하지만 박격포에 날아간 턱이 없어 말은 못하신다, "이해해 달라" 하신다
그동안 얼마나 그리움이 쌓였겠는가.
이곳 산은 오히려 높지 않아서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던 곳이다.
저 설악산 대청봉이나 저항령, 미시령 북쪽의 상봉이나 신선봉같은 곳은 높아서 그나마 철없는 등산객이라도 왔다갔다 했지만 이곳은 마을 앞산이니 누구도 오지 않았다.
자. 발굴팀은 2005년도에 사실 오월리에서 무려 21구의 중공군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이곳에 대한 탐사조차도 못하고 지나쳤다. 설마 능선의 정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요한 감제고지도 아닌 곳에 전투가 있었을까 하는 미덥지않은 판단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월리는 어떻게 그리 많은 유해를 발굴했느냐는 의문이 들게 되는데 이곳은 제보지역으로 산악지형이 아닌 한 집단 매장장소에서 발굴된 유해다.
지역주민 홍순일(81세, '05)할머니에 의하면 수렵장 어느 한곳에 '51년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싯점에 미군 해병대가 들어와 중공군과 전투를 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중공군이 수없이 죽어갔다고 한다. 이걸 할머니 남편도 참여하여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수십구를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렵장을 만들면서 주변이 변하여 정확하게 어딘지는 찝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린 당시 수렵장 공사관계자를 찾았다.
"혹시 수렵장 개설공사시 포크레인 기사를 하셨습니까?"
"네 제가 한 6개월 그곳에서 공사를 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가 아니고 우린 유해발굴단인데 혹시 공사하시면서 사람뼈를 목격했는가 알아보려 전화를 했습니다. 공사한 한 곳이 6.25전쟁 때에 유해를 묻었다고 제보가 있어서요."
"그럼 어떻게 해 드릴까요. 오늘 시간이 있는데 현장에 가서 말씀드릴까요?"
정말 고마운 기사였다.
왠만하면 귀찮다고 막무가내로 전화끊으라고 하던가 모른다고 할텐데 정말 고마운 분이였다.
이렇게 해서 3자 현장확인을 통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잡아서 발굴을 개시하여 2주일에 걸쳐서 거의 완전유해에 가까운 모습으로 21구의 유해를 발굴 하였다.
발굴 당시에 유품들이 중국동전, 전투화, 손목시계, 약병, 바클, 수통, 용문양 금반지, 호루라기, 판쵸우의, 철제그릇등 수없이 출토 되었다.
"가평과 춘천 동쪽지역은 모두가 전투지역이다."
초기전투뿐만이 아니라 이곳 지암리와 오월리 홍적령 일대는 '51년 6월초 중공군이 마지막 물러나가는 순간까지 전쟁이 계속된 곳으로 산마다, 골짜기마다, 각 개인의 논밭에 유해 없는 곳이 사실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3. 춘천 북방지역의 초기전투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의 초기전투는 3대대가 좌측에서 2대대가 우측에서 방어작전을 실시 했다.
지금 앞에서 언급된 것은 모두 제3대대의 좌측 중대인 10중대지역의 전사 및 유해 발굴관련 내용이었으며 지금부터는 그 우측인 제9중대 지역으로 북한강 동안에서 현재 제2군단의 본부가 있는 천전리 뒤의 배후령고개 좌측에 있는 양통고개에서 발산리에 이르는 선이 전투지경선으로 제2대대와와 구별 되었다.
이곳의 38선은 사북면 송암리와 고성리-배후령고개 앞-부용산-대곡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넓은 광정면에 1개중대로 지금의 407번도로 넘어 바로 북방에 최초진지를 편성하고 있다가 바로 지내리를 거쳐 발산리로 해서 천전리로 낼려오 우두산에 모이게 된다.
적은 자주포를 앞세우고 춘천북방 모진교를 넘어 북한강 동안을 타고 용산리로해서 옥산포로 달려오고 보병들은 별도로 줄을 지어 여유만만하게 38선을 통과하여 춘천을 향해 내려왔다.
가. ["심일 소령의 아픈 진실게임"]
바로 이곳에서 심일소위의 자주포 박살내는 특공대의 위력이 발휘하게 되는데 당시 제1대대 중대장이던 이대용('17년도 작고. 92세)대위 전 주월공사가 조작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 내용 은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의 인텨뷰 내용으로 공개 되었다.('17.6.17일자 신문: 호국 영웅의불편한 진실")
당시 제1대대는 예비대대로 옥산포에서 동쪽으로 1km 이격된 곳인 164고지에 지휘소가 있었다.
심일 소위는 연대의 대전차포중대 소속이고 이대용 대위는 제1대대 중대장으로 164고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거다.
심일 소위 아니면 그가 지휘하는 특공대가 자주포를 파괴했느냐 못했느냐의 진실게임이다.
나는 이곳에서 대대장 3년과 인사참모 1년을 포함하여 무려 만 4년을 근무('05~'09)하며 가장 꽃다운 군대 생활을 한 곳이다.
지금 눈감고 그 곳을 그려라 해도 90%이상을 그려낼 수 있는 곳이다.
가장 높은 고지인 용화산(878)을 아마도 10회 이상 올라 갔고 제2군단 지역의 명승지와 식물도감을 만들려고 휴일이면 거의 매일 작전지역을 답사했다. 더구나 레이다 부대장으로 대박격포레이다를 운용하기 위한 진지를 개발하려 대대장 3년은 군단장 지시로 거의 산에서 산으로 답사를 해야 했다.
지금 옥산포니 용산리니 하는 곳이 모두 5km내에 있는 거의 동일 지역이다.
현재는 춘천동면 46번 도로에서 우회하여 용산에 이르는 도로가 양호하게 개설되어 용산리에 이르는 교통이 좋다.
옥산포는 이미 신동이라하여 그 개활지가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버렸고 용산리에 이르는 곳의 좌측으로는 개활지가 지금도 있다.
우측에 있던 1군지역 보충대도 이제는 역사속에 사라지고 없지만 그 주변에 있던 공병부댄 그대로 있어 크게 변한게 없지만 그 동쪽안으로 들어가면 지내리 저수지를 상에 두고 남북으로는 꽤나 변하여 조금 상상하기에 힘들다.
이유는 군단 화학대대가 있고 국군춘천병원이 있고 율문리등이 재개발에 의하여 6.25전쟁 당시의 모습은 변했다. 하지만 164고지와 우두동의 충혼탑 위치는 변동이 없이 그대로 있다.
문제의 핵심주장은 자주포 격파나 특공조의 활동은 없었다는 것이고 이대용 장군은 오히려 대전차포를 2문중 1문을 논에 빠트려 지휘관 눈밖에 나서 나중에 대전차포 중대가 없어지면서 포병연락장교 비슷하게 했다는 것이고 이 모습을 본인이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니다는 측은 분명 전차인지 자주포인지 옥산포로 접근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분명 특공조가 심일 소위 지휘하에 나갔고 공격도 감행되어 내려오던 적이 후퇴하게 되었다 한다.
물론 그 자주포이든 적 전차이든 격파는 심일 소위가 아닐 수 있지만 분명 있었던 사실 이란다.
사실 나는 아무런 문제 제기나 의문점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법사라는 충남 부여의 한 사찰을 갖고 있으면서 전국에 주요 격전지 17군데에 찾아가 그 핵심 인물의 공덕비를 세우는 일을 전생의 업보로 여기고 행하고 있는 유법안 법사를 '00년부터 알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홍천 말고개의 대전차공격의 진실도 이 분으로부터 듣고 실제 가담자로 생존해 계시던 "김학도 하사"를 만나고 "조달진 용사"를 만나 관련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6사단을 춘천에서 지원하던 제16 포병대대 군수장교를 하신 김운한장군, 당시 대위를 직접 몇 회에 걸쳐 만났고 홍천 말고개 전투 대대장인 김주형 장군도 2~3회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다 운명하고 안 계시니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데 기억을 지배하는 한가지는 김학도란 홍천 말고개 육탄 용사가 사실 이쪽 춘천에서 심일 소위와 함께 육탄공격을 했다는 이야기다.
모두가 휴가를 나가 병들은 아직 들어오지도 못했고 다만 대기 상태에 있던 간부들이 바로 소집되어 특공대에 하사관들이 포함되어 공격을 감행 했고 적은 돌아갔다 한다.
그러나 대전차포 중대가 해체되게 되고 이 와중에 각자 흩어지게 되는데 바로 말고개 지역에 적 전차가 출현한다 하니 그 곳으로 김학도하사는 차출되어 가서 임무를 성공리에 마치게 되었단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후 전쟁이 종료된 후에 '67년도인지 지금 춘천 MBC방송국 맞은 편에 전쟁 기념관이 있는데 그 곳에 육탄 5용사 상이 서 있다.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하사관이라 한다. 그 한명이 심일소위란 사람도 있고......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와 지원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혁명정부 시절에 감히 누가 거짓 보고를 올려 그렇게 할 수 있느냐의 의문이다.
더구나 당시 제7연대장을 했던 임부택 장군이 어디에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남긴 기록이 없는데 사실 심일 소위에게 적 전차를 막아라고 임무를 부여한 지휘관이 연대장이었다 한다.
이제 모든 당사자들은 다 자연인이 되었는데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답할 수 없다.
이로인해 이곳 전투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열심히 싸워 춘천을 48시간 이상 적의 수중에 넣지않았다는 사실이다.
407번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보건 진료소가 나오고 바로 옆에 마을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거기서 북쪽을 바라보면 300고지군이 횡격실로 연결되고 바로 중앙에 286고지가 있는데 송암리 이곳에서는 중대장이 전사하게 된다.
양통고개 우측 수리봉(650m)전방 5km에 652고지가 있는데 이곳 일대는 제6중대가 방어하고 부용산과 종로봉구간은 5중대가 종로봉 우단에서 대곡리 좌단은 제7중대가 방어하니 이거 뭐 방어를 하나마나 한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우리 선배 용사님들은 죽을 힘을 다해 적의 진출을 막아내려 노력했다.
이 넓은 정면에 무슨 수로 병력을 배치하여 운용하겠는가.
그러니 자연 지역 청방대를 끌여 들여 함께 경계근무에 임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 경계군기는 높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적의 입장에서는 오봉산(779m) 정상에서 내려오면 마적산(605m)이 나오고 지금 소양강댐 하단부로 들어와 동면으로 해서 춘천을 우회 포위가 가능하다. 하지만 부용산(882m)과 그 우측 종로봉(811m)이나 추전리 쪽에서는 소양강이란 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어 큰 장애물로 기동장비의 운용이 곤란한 곳이다.
나. 초기전투 제6사단의 무용담은 종로봉, 662고지에도 있었다.
"용사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산꼭대기에서 100명이 전사했다.!"
그러기에 제6사단 제7연대의 전사는 주로 이곳 춘천 북방에 치우쳐 소개되고 사실 또 이곳의 운명이 북한군의 신속한 서울 포위를 위한 우회 돌파를 방어한 것도 부인하지못할 사실이라고 본다.
하지만 용사님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것으로 사실 유해발굴에서 얻은 교훈은 부용산과 종로봉 그리고 그 우측 662고지에서 초전에 많은 국군이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곳이 초전에 그냥 무너졌다면 서울 방어가 문제가 아니라 춘천이 밑으로부터 포위되어 초기의 병력이 아직 소집 되지 못하여 우왕좌왕 하던 시기에 춘천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봐야 한다.
이곳 소양강 북안에는 부창리와 내평리가 있다.
지금은 수몰되어 안보이지만 학교도 있고 경찰지서도 있고 우체국도 있었다.
우리 전사에는 이곳에 대해 어필하는 부분이 없다.
다만 1.4후퇴시 홍천 북방을 점령하던 국군 제8사단이 일시적인 반격작전을 하여 추전리 662고지에 올라섰다가 후퇴해 나갔다는 정도가 가장 큰 이슈다.
하지만 웬지 무언가 숨어있을 것같은 생각이 들어 북산면 오항리를 수없이 넘나 들었다.
사전리 이용석씨의 증언이다.
"아니 뻥뻥 하더니 공산군이 저 산에서 뛰어 내려오는데 벌써 우리 군인이 강건너 가고 없어요. 저 속칭 뒷골에서 육박전이 있었고 지금도 최초 38선 철조망이 그대로 남아 있고 유골이 많았어요.
전쟁 나기 전에는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들고와서 이곳 철조망에 걸어 놓으면 북에서 언제 내려와 편지를 가져가고 편지를 철조망에 곶아 놓은면 이곳 사람이 가서 가져왔다.
그때는 처음에 쏘련군도 와서 있었고 미군도 와서 얼마동안 있었는데 언제보니 아무도 없었고 전쟁이 났다.
그러다 보니 하루는 산에 올라가니 편지가 그대로 철조망에 꽂아있는 체로 비를 맞아버려 주소를 알 수가 없게 된 것도 보았다."
화천 간동 간척2리 전문재씨의 증언이다.
"나이 15살에 전쟁이 났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들이 함께 경계초소에 올라가 제6사단 형들과 밤을 세우기도 했으며 전쟁이 나서 직접 실탄과 식량을 추진해 주었다.
주로 종로봉 일대 702고지와 깃대봉 아래 고지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아군이 전사하여 현장에 묻어졌다.
처음에는 국군이 곧 올라 온다고 하였는데 그 후로는 제6사단이 오질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산에 올라가면 거의 한 20년 이상 그 자리에 철모나 수류탄등이 있었고 m1총도 많이 있었는데 총은 바로 경찰지서에서 마을 사람들을 부역으로 올려보내 다 수거해 갔다.
어디서 오는지 탄피캐러 오는 사람들이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도 어떻게 알고 산에 들어와 마구 파놓아 해골이 굴러다니기도 했다."
우린 변성원씨가 현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함께 동행을 했다.
한여름에 덥기도 하고 살인 진드기가 기승을 부린다하여 매우 조심스레 증언하신 분들이 직접 전투를 지원했다는 곳을 찾아 올랐다.
이곳 모든 산은 그후에도 중공군이 들어오고 또 넘어가는 길목처럼 되어 미군의 비행기 폭격도 엄청 심하여 제대로 자란 소나무 한그루가 없다.
잡목이 우거지고 있어 진출하기가 상당히 거칠게 이어졌다.
하지만 땅은 그대로 있어 약 2시간의 노력끝에 현장에 도착했고 집중적으로 굴토된 개인호의 실태를 탐사 하였다. 호마다 윙윙 울려대는 탐지기의 소리가 우리를 슬프게 했다.
100여개의 호가 주변에 산재해 있고 눈으로 바로 보이는 탄피나 탄창 그리고 반쯤 썩어서 뒹글고 있는 전투화 잔해들이 여기저기 있다.
아마도 탄피를 캐러다니는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굴토를 하고 탄피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한 모습이었다. 이 일대에서 우린 15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그런데 우리가 최초 탐사시에는 이런 위치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전후에 공비들의 침투를 막기위한 매복장소나 그 후에 진지공사한 곳으로 여겨 버렸다.
사실 6.25당시의 호를 찾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참전용사나 해당지역에서 살아오신 분들의 증언이나 제보가 절대적이다.
오항리 박기수씨의 증언이다.
"내 나이 15살에 전쟁이 나고 제6사단이 많이 상했다.
누구도 찾아오지않아서 얼마간은 산에 시체가 호구덩이나 교통호에 엎드혀 죽은 사람, 거꾸로 뒤집어져 죽은, 사람 배가 터져서 창자가 나와서 죽은 사람, 머리에 총알을 맞아 빵구가 크게 생기어 죽은 사람, 어떤 사람은 팔다리가 떨어져 나와 나무가지에 걸려져 있는 사람 등 차마 보기가 민망스럽게 홀딱 옷을 베껴가 벌거벗고 하늘보고 죽어 있는 사람 등 말 할 수 없는 지옥같았다.
그런데 얼마 있어 동네에서 어른들이 나서 괭이들고 올라가 대부분 묻어버렸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도 군대갔다와서 어떻게 되었나 하고 올라가 보니 언제 불이 났는지 주변이 새까맣게 타버렸는데 1구의 유해가 바위밑에 있어서 육본으로 보내주었더니 신원확인이 곤란하다고 화장을 하여 다시 보내와 마을 사람들과 목함을 매장하였다."
우린 이 매장했다는 곳을 발굴하기로 했다.
이유는 '07년도에 김해지역에서 대규모로 지역 공동묘지에 조성된 자가봉송 유해를 70여구 발굴한 경험이 있다.
이곳은 전쟁 당시에 지역 사찰이나 동네에 보내졌으나 유족이 없거나 잘못 봉송되어 한곳에 가매장된 유해로 발굴해 보니 일부는 목함이 남아 있고 그 안에 모든 자리에서 화장재가 나오고 일부 뼈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정말 발굴하니유해의 화장재가 나오고 일부 뼈가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왜 전사에는 이곳 전투가 별로 어필되지않고 있을까?
벌말 김종봉씨의 증언이다.
"깃대봉(662고지)에 정말 많은 군인이 죽어 있었고 교통호도 지금 그대로 있다. 죽어 있던 사람중에는 미군도 있었다.
온통 산에는 초기 전투시 북한군이 저 밑으로 내려가 한번 산에 올라갔더니 온통 유해였다.
총도 많이 있고 수류탄도 그대로 있었는데 휴전 되고 나서 경찰이 들어와 동네사람들을 동원해서 다 수거해 갔지만 유해는 누구도 와서 발굴해 가지않았다."
김희오씨의 증언이다.
"부친이 당시 동네 이장이었다. 이곳은 그렇게 빨갱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내평리 일대는 소양강을 끼고 있어 먹고살기에 괜찮아 사람이 꽤나 살았고 외부인도 많았다 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춘천을 나가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일제시대에도 탄광에서 일하거나 숯굽는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는데 그래서 경찰지서에 항상 경찰관이 상주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강을 건너가면 춘천 동면 품안리, 물노리, 품걸리 그리고 북산면 조교리가 나오게 되는데 품걸리로해서 사오랑고개를 넘어가면 홍천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이 길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러 다녔고 전쟁시는 피난민이 이용하는 길이며 군인이 이 길을타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희오씨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좀 더하면 요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실게임이 여러번 화두로 등장하는데 이곳도 그 축소판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가 이장을 하고 있는데 북한군이 내려와서는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쳐 지서를 접수하고 학교를 접수하고 면서기까지 모두를 그들이 자리를 차고 앉아 있었다
그 당시는 누가 누구를 고자질하고 붙잡아 가고 그런 것은 없었다고 한다.
세상이 어둡다보니 북한군이 지서에 들어와 있는데 한 경찰은 자전거를 타고 전쟁이 났다고 헨드마이크를 들고 동네에 알리며 지서로 들어가는 풍경이란다.
종로봉이나 부용산, 아니면 이곳 깃대봉전투에서 살아남은 군인이 뛰어 내려가 상부에 보고한다고 지서를 찾아들어가 이미 북한군이 앉아 웃고 있는데 딸딸이 사용하자고 흥정하는 모습을 그려보라.
그 군인은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고 경찰은 자전거 놓고 강으로 도망치는 곳, 내평리다.
그러니 내무서원 지시를 받고 그들이 해 달라고 하는 것을 마을에 전달하게 되는데 북한군이 요구한 것은 처음에는 별거 없이 밤에 불을 켜지마라는 것과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는 정도였단다.
학교도 문을 열고 학생들이 들어와 공부를 계속했고 다만 듣지도 못한 무슨 김일성 찬양가를 배우는 것이 신기했고 가끔 동네사람들을 저녁시간에 불러모아서 교육을 하는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어린 나이에 무슨 교육인지는 모르겠고 어쩌다 동네 사람이 앞에 나가 뭐라고 악을 지르면 다같이 박수를 치고 '올소 올소'하는 소리가 내평리를 들썩거리게 했다.
한 여름이고 비는 왜 그리 자주오는지 소양강 물이 흙탕물로 변하기 일쑤인데 고약한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여 코를 틀어막고 살아야 했다.
"에이 냄새야, 엄마 이거 무슨 냄새야?"
"너 산에 가면 안된다. 알았지?"
항상 그렇때마다 엄마는 나의 입을 틀어 막으며 산에 가지 말라는 당부만 하였지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더니 몇일을 동네 할아버지등 많은 사람이 산으로 올라 갔는데 나중에 들으니 죽어있는 군인들을 개인호나 교통호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머니가 산에 올라가지 말라 했던 것이다.
그러다 여름이 가고 벌써 추수하는 때가 다가오는데 논이며 밭에 나가 포기수를 세고 낱알을 세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세금을 받아가는데 확실하게 챙기려는 수법이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여 동네사람들이 나서서 등짐을 지고 밤이면 소양강을 건너 홍천 어디까지 갔다 온다고 한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을 전부 모아놓고 승냥이놈(미군을 말함)들이 올라온다며 가만히 있다간 다 죽는다고 짐을 싸들고 북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새벽에 떠난다고 모두 준비를 단단히 하라하여 집집마다 실제 짐을 싸서 떠날 준비를 하는 집도 있고 이래도저래도 한세상인지라 그대로 살겠다고 하는 집도 있다.
정말 다음날 아침에 북한군과 내무서원등 모두가 한순간에 떠나고 동네에서는 몇집이 따라서 올라갔다. 갑작스레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
그리고 국군이 밀려오고 있다.
전에는 6사단 군인인데 지금은 잘 모르는 군인들이 들어오는데 5사단이라고도 하고 2사단이라고도 하고 대위가 앞장서서 동네에 들어와 진을 치고 있다.
신기해서 어린마음에 군인들이 있는 곳을 가보기도 하고 형이라 부르며 처음 동네에 군인이 있을 때처럼 붙임성있게 지내려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이장이 누구요?"
"희오 아범인 내가 이장입니다."
"그래요, 우리들 지금 식사를 제대로 못해서 그러는데 밥을 해 오세요."
"밤내 얻어맞고 골병들어 죽은 내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이장인 아버지는 동네 사람을 소집하여 해결책을 토의하여 누구집은 밥을 짓고 누구집은 반찬을 준비하고 분주히 움직인다.
어제는 쌀밥, 오늘은 옥수수밥을 해서 가져가는데 그만 군화발로 옥수수밥을 차 버렸다.
"야 새끼야, 빨갱이 새끼들한테는 좋은 밥 주고 우린 옥수수밥이야?"
"아이고 그게 아닙니다. 우린 한번도 북한군에게 밥을 해준 적이 없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다 알고 왔는데. 야 애들아 다 뒤져서 쌀이 있으면 다 압수해 와!"
"네 알겠습니다."
집집마다 난리가 났다.
내년에 파종해야할 벼씨부터 콩이며 옥수수등 죄다 거둬 가버려 아예 내년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니 처음 38선이 그어지고 경찰이 오고 군인이 오고 했는데 그래도 이사람들은 마을 집에서 먹을 것을 같이 먹고 혹시라도 부식이 나오면 나누어 먹기도 하고 의의가 좋았다.
청년들이 나가서 함께 보초도 서 주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어느 때는 막걸리로 마을에서 잔치도 하고 동네에 뚱순이도 만나고 영이도 만나고 재미 있었다.
같은 대한민국 군인인데 이거 어떻게 된 것인지......
"내 아버지가 죽었다. 동네 사람들이 아우성이다."
"이장이 어떻게 좀 나서서 협조를 해 봐요? 내년 농사는 고사하고 이러다가 다 굶어죽게 됩니다."
아버지가 하루는 책임자인 대위를 만나러 지휘소에 간다고 나갔다.
그리고 밤이 다 되어 가는데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앓아 눕더니 얼마 후에 화병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어이 어이, 이제가면 언제 오나. 어이 어이"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사나, 숙명으로 가는 인생"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억울하다 억울하다, 이놈세상 억울하다......"
온 동네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이번에는 갑작스레 군 숙영지에서 요란스럽다.
그런데 아침이 되었는데 밥 가지러오는 군인이 오질 않고 웬 솰라 솰라 하는 군인들이 왔다.
밥과 국이 꽁꽁 얼어붙는데도 군인은 오질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중공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나주에야 알았지만 그날 밤에 아버지는 군인에게 똥개 맞듯이 맞아서 골병이 들어 죽었다.
흰눈이 내리는데 우리 군인들은 강건너 사라지고 없다.
어디서 왔는지 중공군이 들어와 학교며 창고며 집집마다 몇명씩 들어와 앉아서 쉬고 있는데 바라보니 발에는 신발이 없는 군인도 있고 군복은 없이 무슨 허연색 누비옷 같은 것을 입고 솥단지를 메고 와서는 자기들끼리 밥을 한다.
아주 어린애같은 군인도 있고 발가락이 얼어서 진물이 흘러내리며 썩어가는 군인도 있다.
얼굴을 칭칭 동여맨 군인도 있는데 무슨 화상을 입은 모양이다.
다리를 절둑 거리기도 하고 손이 하나는 없는 군인도 있고 무슨 부상병 집합소인 것 같다.
이제는 다 죽었다고 동네사람들이 집에 들어앉아 벌벌 떨고 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아무런 말이 없는 중공군이다.
국군에게 하도 당하여 동네에는 더 이상 먹을 것도 없는 마당에 혹시라도 뭘 내놓으라 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한데 도대체 아무런 요구가 없다.
그러더니 어느날 아침에 보니 모두 다 떠나고 어느새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북한 내무서원이라는 자들이 다시 내려와 호구조사를 한답시고 집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기노길 어른의 증언이다.
"떡갈매기 지역에 전사자가 많아서 탄피를 캔다고 호를 파다보면 유해가 나오는데 대충 묻어버리거나 두개골은 발로 휙 차버리면 대굴대굴 굴러가다 팍하고 깨어진다.
여기저기 하도 많으니 누가 신경도 않쓰고 나중에 냄새가 나서 부역자들을 동원하여 이곳 저곳에 매장했는데 산에는 남아 있겠지만 논밭 등 골에다 묻은 것은 그 후 수해등에 다 떠내려 가고 없을거다.
여기서 처음 '50년 6월에 경계근무를 한 병사들은 정말 열심히 싸웠고 대부분 죽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사전에 내려와 경찰지서를 탈취하게 되는데 경찰은 총 한방 못 쏘고 도망쳤다.
산 고지에 초소를 점령한 군인들과 청방대원들아 열심히싸웠고 부창고개나 늘목고개 위에서 많이 죽었다. 깃대봉에서는 육박전도 했고 1.4후퇴시에도 깃대봉에서는 전투가 심했는데 눈이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51년도 6월인가 6사단 군인들이 와서 고지에 올라가 뼈를 가지고 내려와 지금은 수몰되어 버린 내평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땅을 파고 화장을 해서 목함에 넣어 갔다."
"부창고개 꽃신은 누구의 선물일까?"
우린 2008년도에 부귀리에서 청평리에 이르는 고갯길인 하우고개 일대(615m)에서 발굴 작전을 실시하여 1구의 유해를 발굴 하였다.
이곳은 부용산에서길게 남북으로 연결된 종격실 능선으로 봉화산을 거쳐 부창고개로 해서 소양강에 이르는 긴 능선의 중간이다.
청평사 선착장 입구에 가면 몇 곳의 상점이 있고 막국수를 파는 할머니가 계신 식당도 있다.
"할머니가 만든 막국수 맛있어요. 들어 오세요?"
"할머니 연세가 얼마신데 목소리가 그렇게 크세요?"
"내 나이 7989, 아지 99까지는 10년이 남았습니다."
"양반집 딸과 머슴의 첫사랑"
워낙 구수하여 나는 할머니를 청평사 할머니로 명명 하고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
깡마른 체구지만 검은 점이 얼굴에 하나도 없으신 할머니로 고향이 여기도 아니고 고령에서 양반집 규수로 자라 이곳까지 흘러온 인생이란다.
사랑에는 눈이 먼다고 하던가, 집안에서 정한 남정네는 싫었다.
한 동네 건너에 사는 마음씨 착한 머슴이 마음에 들어 사랑에 빠지고 죽기살기로 둘이서 도망쳐 온 것이 여기까지 왔다.
대한민국의 모든 야바위꾼들은 다 안다고 하는 할머니는 사람장사부터 안해본 것이 없는 꾼이지만 돈하고는 인연이 없어 무일푼으로 살아간다.
전국을 떠돌다 전쟁이 나고 한순간 으스름한 달밤에 맺어진 첫사랑은 전쟁터로 갔다.
이름은 이순신, 그리고 할머니 배에는 그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단다.
누구에게도 말 하지않은 , 아니 할 수가 없는 이야기를 지금 나와 단 둘이서 독대하여 가정사를 토로하고 나에게 도와줄 수 없느냐의 기막힌 인생사를 풀어놓고 계시다.
물론 할머니를 처음 본 것은 아니다.
내가 춘천에서 근무할 때에도 가족과 이곳 오봉산 자락에 있는 청평사를 찾아오게 되면 이곳으 ㄹ거쳐 가기에 한두번 식당에 들렀다.
그땐 단순히 말 잘하고 구수한 입담에 이끌리어 식다에 들어가고 생칡즙을 한컵 사먹고 나오기도 했었는데 워낙 깨끗한 모습이라 욕심이 많고 장사수완이 좋은 것으로만 인식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수일과 심순애'처럼 너무나 구구절절 애뜻한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할머니였다.
고령은 경남이지만 동쪽은 성주와 같이 있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구 달성과 함께하는 곳으로 우리 역사의 고령가야가 있고 조선 개국시 이성계와 이방원에 맞서 권세를 누리던 이인임이 고향이다.
그러니 절대로 산골이 아니라 유서깊은 역사의 고장인데 이곳에 이씨 가문하면 바로 전두환 전대통령의 영부인인 이순자여사 집안이 현대판 대표적인 성주이씨 가문이다.
이런 할머니가 족보도 없는 머슴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온 집안의 만류를 뿌리치고 야밤에 도망쳐 젊은 기분에 둘이서 꼭 껴안도 긴긴 세월을 보내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바위꾼으로 살았다.
하지만 첫사랑의 남자 이름이 이순신이라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보따리 이고 이것저것 뭉쳐서 지게에 지고 피난을 부산으로 갔다.
이 무슨 개고생인지......
하지만 본인이 좋아서 선택한 길이라 악착같이 살아서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아 보란듯이 가려했던 꿈은 멀어져 가고 있다.
"고향에는 보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언명이 자꾸만 귀에 들리고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여 피난살이의 하루하루는 힘들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 그 시끌벅적한 국제시장 바닥에 주저앉아 장사를 하여 목구멍은 풀칠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변고인지 갑작스레 남편이 헌병에 붙잡혀 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수도사단에 들어가 안강에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것이 끝이였다.
하지만 이미 할머니 뱃속에는 한 생명이 잉태되어 자라고 있어 기막힌 현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오시려나, 남편을 기다리며 불러오는 배를 동여매고 열심히 장사를 했다.
꽃다운 열아홉 순정이 이제 20살이 되고 그러니 험한 세태에 어이 버티고 살란 말인가!
기다려도 님은 오질 않았다.
기다려도 님은 오질 않았다.
그런 어느날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누군가 군인들이 나타나 이여사를 찾고 있었다. 군인들의 가슴에 하얀 보자기끈으로 네모난 상자를 안고 찾아온 군인, 이순간 그만 졸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군에 가더니 처음이자 마지막이 죽은 자로 화장재 되어 국제시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 세월을 말하려니 너무나 애처롭다.
때가 되어 많은 손님들이 식당에 들어오고 칡즙판매대에도 서성거린다.
"할머니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리고 찾아 오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후에 나는 춘천 후평동 아파트에 찾아갔다.
할머니가 이곳에 살고 있고 아들이 있는데 지금 서울에서 직장생할을 하는데 가끔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는 음료수를 들고 아파트를 방문하여 장시간 할머니의 인생역경을 들어 주었다.
때가 되어가니 배는 불러오고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우려해도 안되고 얼마나 그 돗데기같은 시장바닥에서 굴렀는지모른다.
드디어 아들이 나오고 아픔을 안고 2~3년간 넋나간 사람처럼 살아가는데 그 어린 것을 키울수가 없어서 입양을 해야만 했다.
전쟁은 이제 휴전이 된다는 등 국제시장도 술렁술렁 거리며 모두가 고향을 찾고 부모형제를 찾으려 몸부림치는 모습에 다들 들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고향이 있어도 가지못하고 남편은 전선에서 죽어가 한줌 재로 돌아와 어느 사찰인지 모셔졌다. 그러나 그 핏줄은 어느 곳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 떠나간 상황이다.
하지만 슬픔도 세월이 약이라던가 굶고 죽을 수는 없으니 이리저리 보따리 장사를 하다가 어느 야시장에서 잘생기고 훤칠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며 시작한 가정은 하는 장사마다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휴전이 되고 서울 영등포 골목이 괜찮다하여 이곳으로 원정을하여 정말 돈많이 벌고 보란듯이 떵떵거리는 신세가 된다.
집도 3채씩 되고 또 자식이 태어난 것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이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던가 남편이 술을 알게 되고 여자를 알게 되고 왜 그리도 그당시는 놀음이 많은지 그 놀음에 빠져 하나둘 집을 팔아먹더니 그만 쪽박을 차는 신세가 되었다.
영등포시장에서 그래도 큰손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망하니 이거 창피해서 다시 도망쳐야 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온 곳이 오음리 파월장병 훈련소였다.
때는 60년대 중반인데 월남전에 가면 처음에는 다 죽는다고 소문이 나서 서로들 안가려 빽을 쓰고 심지어는 자살이나 자애사고도 많았다고한다.
하지만 1~2년 지나더니 서로가 가려고 멈부림을 쳤다.
이유는 달러를 주고 먹고사는데 지자이 없다는 소문이 전국에 돌았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고 양말, 펜티, 고무줄, 옷핀등 온갖 것을 서울에서 싼값에 받아서 보따리 장사를 하는데 국제시장 못지않게 잘 되었다.
지금도 파월장병 만남의 장소가 이곳에 남아 있는데 월남전에 파병되는 모든 인원은 이곳에서 제대르 편성하고 별도의 교육을 받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월남으로 파병되었다.
이제 인생은 30을 넘어가고 고향을 떠난지도 10여년이 지났다.
그래서 예쁜 아들을 안고 고향에 가고 싶었지만 갈 수도 없다. 부모도 형제도 보고 싶은데 도저히 갈 수가 없는 현실이 눈물나게 만든다.
사랑마저도 슬픈 사연으로 메아리되어 이곳 오음리 산야에 울려 퍼진다.
이렇게 다시 일어선 가정을 지키려 남편은 더 열심히 장사를 했다.
그러나 이 기구한 운명은 또 다시 오음리 훈련소가 없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고 어디엔가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기구한 운명은 그렇게 꿈을 키워주지않았다.
사랑하던 남편이 몹쓸병에 걸려 세상을 등져야 했다. 그 흔한 병인 결핵에 걸린 것이다.
온갖 세상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간호를 하고 큰 병원을 전전 했지만 생명을 구하진 못했다. 오히려 그 나마 장사를 해서 조금 벌어놓은 재산마저 다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안다.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걸. 하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집한채 남겨두고 떠난 남편이지만 이제 자식이 있으니 살아야 했다.
그래서 들어 간 곳이 바로 이곳 청평사 입구다.
장사를 하면서 보니 이곳이 그런대로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판단이 되어 무작정 땅에다 움막을 치고 기거를 했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는데 오봉산, 마적산, 부용산, 종로봉, 죽엽산, 사명산,용화산 그리고 소양강 너머에 있는 가리산, 대룡산 등 안가본 산이 없다.
남편을 간호하면서 익힌 산에서 나는 나물이며 약재를 캐어서 길거리에 내놓으면 그런대로 수입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전쟁 직후에 그 많은 유해를 다 목격한 장본인이 된 것이다.
"할머니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좀 말씀 드리기가 거시기 한데......"
"괜찮아요. 이제는 다 지나간 세월이고 결자해지 차원에서 말씀하세요. 저희는 비밀을 보장해 드립니다. 혹시나 누가 들을까봐 저 혼자 보자고 하셨지요?"
"음~" ......
몇번이고 망설이시는 할머니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는 안다.
"할머니, 첫사랑 이순신 할아버지의 생사를 다시한번 알아달라는 거지요?"
"어떻게 알아볼 수가 있을까요. 죽었다고 했는데 요즘 TV보니 죽은 사람 뼈를 가지고 신원이 확인 된다고 하던데."
할머니는 유전자 검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면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중 나이드신 분이 있거나 참전용사 모자나 기장을 달고 게신분이 있으면 수도사단에 대해 물어보고 혹시나 북한에 살아 계실 수 있고 그 옛날에는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남의 화장재를 나누어 보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 다 알고 계셨다.
"할머니 그 할아버지 찾고 싶어요?"
할머니는 자꾸만 시선을 문쪽으로 보내며 누가 들어올까봐 섬짓섬짓 하신다.
벌써 나이 89세로 이제 살으실만큼 살았지만 세상사가 그게 아니란다.
나는 이 할머니가 혹시나 할아버지를 찾으면 유족연금을 타실려고 그러는지 알고 오해도 했는데 그게 아니라 고령땅에 명문가문에서 그 하지말라는 연애를 하여 몸을 함께했던 그 첫사랑을 어이 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이 발전하고 남북간계가 좋아지니 만약에 살아 있다면 만나거나 실제 그 뼈라도 있다면 추수려서 곱게 묻어주고 저승에 가고 싶다고 하신다.
"할머니 만약에 뼈를 발굴하면 그 분의 형제나 자식이 있어야 비교가 되어 확인이 되는건데 어떻게 그 분의 집안사람들을 찾을 수 있어요? 입양간 자식도?"
참 어려운 선택이다.
할머니는 눈시울만 적시며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라고 탄식만 했다.
"할머니 어느산에 뼈가 가장 많았어요?"
나는 마음 아파하는 할머니를 위하여 화재를 돌렸다.
전쟁 기간만 제외하고 거의 이곳에서 생활하며 모든 산은 다 올라가 약초를 캐고 탄피를 캐서 돈을 만들던 할머니다.
"아니 중공군도 북한군도 아군도 다 같은 뿌리인데 그걸 어떻게 구별하나요?"
"그건 제가 하는게 하니고 별도 전문 박사들이 있는데 가령 발굴 현장에 많이 나오는 유품이 중공군 것이 많으면 중공군이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제보나 증언이 중요한 것이 예를 들어 할머니가 처음으로 산에 올라가 현장을 목격했는데 그때 그곳에 남아 있는 유품이나 단서가 될만한 것이 있었는가? 그 다음에는 전사적 사실로 이곳에서 누가 누구하고 전투를 했는가? 다음에는 실제 이곳에서 전투를 했던가 살아계시던 사람이 내가 누구를 어떻게 했다고 증언하는 경우가 다 분석자료에 들어가 종합적인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할머니는 모르는 것 같아도 이분야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방송에 나오는 유해발굴내용은 다 보았다고 한다. 그러니 상식이 꽤나 높으신 수준이다.
"할머니 이제 어디에 유해가 많았는지 알려 주셔야지요?"
"부용산에 올라가니 고지 전체가 다 사람뼈로 널려있어. 북쪽 호구덩이를 보니 총알이 그냥 쏘지않은 체로 남아 있었지. 그 부용산에서 쭉 내려오면 봉화산이 나오는데 그 산도 엄청많이 있었는데 언제 올라 가니 눈에 잘 보이질 않아요."
"아니 저기 종로봉 아시죠?"
"알지, 추곡령 터널부근에서 올라가면 아주 쉽게 가요. 산림청에서 산길도 만들어 놓았어요."
"그 산이 6.25전쟁 때는 북한지역인데 그 산에서 내려오는 늘목고개가 나오고 부기터골이 나오고 부귀고개가 나오는데 그곳 능선에 개인호가 수없이 있던데 그곳에서는 뼈를 보았다던가 다른 군이들이 사용하는 유품류를 본적이 없습니까?"
"다 있었지. 수류탄도 있고 철모도 있고 전투화도 있고 뼈는 그때는 너무 많아서 거들떠 보지도 않했어요. 나중에 너무 흉해서 경찰이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 여기 저기 호구덩이에 묻었지. 그 산에서 북으로 올라가면 죽엽산(859m)이 나오는데 계속 타고 내려가면 방천리 운수골이 나오고 파로호가 있어요. 그 당시에만 해도 이 골짜기에 사람들이 화전을 해 먹고 숯울 굽는다고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지금은 별로 없어요. 군데군데 그 흔적들이 남아 있어요. 이야기로는 중공군이 넘나들던 통로였다고 하는데 그 산속에는 그렇게 흔적이 없었어요."
"그럼 할머니 깃대봉 아시지, 그 산에는 들어가셨어요?'
"아유 내가 안가 본 산이 없다니까. 그 산에는 워낙 사람이 많이 죽어서 특히 그 추전리라는 동네인데 선드레라는 지명이 있어요. 그곳에 가니 미군들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있는데 혹시나 뭐가 있나해서 그 속을 뒤져보니 별게 다 있어. 그곳을 사람들이 귀신골이라 하던데. 왜냐하면 붙잡힌 사람들을 그 골짜기 안에서 매일 총으로 죽였데요. 기관총 쏘는 소리가 매일 나는데 그렇게 많이 죽였다고 하던데 들어가 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보여. 무섭기는 뭐가 무서워. 산 놈이 가장 무서운거지."
"깃대봉 꼭대기 일대는 어쩐지요?"
"아 깃대봉? 맞아요. 그곳에 가니 호가 아니라 쭉 파놓은 것을 뭐라고 해요. 그게 동서로 길게 파놓았는데 그 안에 군인이 다 죽었다고 하던데요. 함께 다니는 사람중에 이곳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어렸을 때에 올라와서 땅을 파서 전투화도 꺼내고 잘하면 시계도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저 양구에 있는 사명산(1199m)이나 소양강 너머에 있는 가리산(1051m)은 어떤가요?"
"사명산은 약초가 많아요. 그런데 거기서는 부용산같은 흔적은 본 기억이 없고 앞에 가리산은 추전리에서 넘어가면 북산면 조교리가 나오고 계속 길따라 남쪽으로 가면 홍천고개를 넘어 홍천 두촌리가 나오는데 옛날에도 사람이 넘나들던 길이였어요. 가리산은 산이 사명산보다 약간 험한데 동면 품걸리로 해서 올라가면 사오랑고개가 나오는데 그쪽이 많이 있었고 가리산보다는 매봉이라는 곳이 약초나 산나물도 많고 깃대봉처럼 호구덩이와 죽 늘어진 방공호같은 것이 많이 있었어요."
할머니는 정말 모르는게 없고 이 나이에 꼭 60밖에 안된 총명한 분이였다.
할머니 전화번호가 8979인데 연유가 있었다. 89는 현제 나이고 79는 친구라는 뜻으로 흔한 말처럼 객지에 살다보면 10년지기는 다 친구란다. 그런데 주변에 79된 분도 별로 없다고 한다.
격동의 세월을 살으신 어른들의 애환은 들어도 들어도 눈물나고 애처롭다.
난 할머니를 위해 먼저 만났던 그 운명같은 첫사랑의 남자 이름을 가지고 전사자 명부나 참전용사 명부를 조회하였으나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 옛날에는 동네에서 부르는 이름 다르고 호적에 올라간 이름이 다른 것이 다반사였다고 하니......
내가 확인이 곤란하다는 설명을 드린 이후에 얼마 안돼서서 부터 헐머니와의 연락은 끝이났다.
할머니의 증언내용은 대부분 오항리와 추전리등 많은 사람들이 들려준 내용과 틀린점이 없이 일치했다. 다른점 하나는 할머니 이야기가 내평리에서 조교리 들어가는 증간쯤에 조그만 동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도 많은 유해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그 동산은 소양강댐 공사로 수몰되고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판단컨데 동면 품안리의 두리봉 412-544-후봉550-남쪽으로699-수리봉533고지 능선일대, 북산면 물노리의 499고지일대의 곧은골 능선, 조교리의324-372고지에 이르는 소양강 남안의 고지들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탐사를 한번 해 보면 국군 유해가 있으리라 본다.
북산면의 청평리, 부귀리, 내평리, 추전리도 주요 고지군만 발굴하였는데 모든 교통호와 가매장 할 만한 곳을 탐사하여 유해를 찾는다면 지금의 100구와 같은 수준의 유해가 발굴 되리라 본다.
종로봉에서 부귀리의 버들골 서쪽 능선까지에서 50여구의 유해가 발굴 되고 오항리 뒷산 깃대봉으로부터 추전리 662고지능선에서 5구의 유해가 발ㄹ굴 되었는데 이곳은 교통호를 무려 3km이상 발굴하였다. 내평리 백민터 산악지역에서 7구의 유해를 발굴하고 봉화산 일원에서도 5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이 지역이 얼마나 전투행위가 많이 있었는가를 증명하게 되었다.
"꽃신은 누구의 선물일까?"
나는 할머니와의 우연한 인연을 필연이라 생각을 한다.
어느날 춘천 KBS방송국 박상용기자로부터 유해발굴 현장에 동참하겠다는 협조문서가 왔다.
비록 지방 방송이지만 유해발굴의 현장을 짧은 시간이지만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묻어있는 협조문서였다.
우리야 상부에서 승인하면 지원하는 입장이므로 그렇게 큰 준비는 없지만 그래도 강원도민에게 나가는 중앙 방송인데 아무렇게나 지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없는 것을 조작하여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렇때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염원을 모아 호국용사님을 부르고 지혜를 달라고 매달린다.
비록 유해가 나오지 않더라도 뭔가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그 머리카락 하나 아니면 손발톱 하나라도 찾으려는 모습을 여과없이 진정성 있게 현장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먼저 파로호안에 있는 작은 섬에 오르고 방천리 운수골 밑에 내동이라는 곳을 탐사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화천군 어로담당자와 협조하여 어업 지도선을 활용하기도 했다.
언론의 힘이 대단하다. 우린 그곳을 가려해도 여러 제한사항에 머뭇거렸는데 이 기회에 가보지않은 곳을 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은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초기전투가 문제가 아니고 '51년 춘계 중공군 1, 2차공세가 4월부터 5월에 이르어지는데 이때 이 화천댐을 확보히기 위한 쌍방간의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졌고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에 중공군이 공격에 실패하여 후퇴하다 소문으로는 1개군단이 이 화천댐 파로호에 수장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얼마간의 피해는 있을 것이고 몇몇 참전용사님이 제보를 한 것이 있어서다.
두번째는 바로 38도선이 지나는 북산면 대곡리의 장터골에 들어가 초기전투시 전투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은 바로 위가 계명산(756m)이 북한지역이고 장터골은 바로 뒤가 730m고지군으로 능선에 올라서면 수청골 편파골등 인제군 신남면 수산리에서 들어서면 정말 동쪽을 보고 병풍처럼 산세가 둘러싸인 아주 좋은 곳이다.
그러니 장터골에서 올라서면 쉽게 730m고지군에 올라서 능선을 타고 매봉-홍천고개-가리산-홍천 철정까지 이르는 30km 이상의 산악능선이 장엄하게 이어지는 아주 좋은 접근로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분명 어떠한 전투행위가 있으리라 보는데 마침 양구 웅진리 낚시터에 이장되는 분이 우리에게 이곳을 제보하여 왔다.
"발동선을 대고 바로 올라서면 옛날 밭같은 것이 나오고 그곳 일대에 반합이며 전투화 수통 철모등이 많이 있어 그걸 가져다 똥바가지도 했습니다."
소양댐은 종전후에 만들어졌고 화천댐(파로호)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졌다.
드디어 춘천 케이비에스에서 찾아오고 우린 어업 지도선을 타고 파로호 안으로 들어가 지금은 작은 섬이 되어버린 곳을 올라섰다.
주변이야 댐을 만들고 나서 몇번의 보수작업을 하여 깨끗하게 정화 되어 있는데 그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곳이니 새들의 낙원이 되어 있었다.
숲속에 들어가 실태를 분석해 보니 군데군데 포탄이 낙하된 탄흔이 보이고 개인호가 여기저기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포천지구 전투시 제7사단의 우측연대인 제9연대의 일부 부대원과 육사생도 대대의 일부가 철수하여 태릉근처에 도착하니 벌써 북한군이 육사정문에 보초를 서고 있고 지역이 점령당하여 피신처를 찾다가 순찰대를 보고 급한 김에 인접 논의 조그만 저수지에 들어간 4명이 2명은 자수를 하자, 2명은 안된다 끝까지 저항하다 가자라고 옥신각신하다 결국 2명을 처리한 후에 어둠을 틈타 광진나루로 내려와 한강을 건넜다는 참전자의 증언이다."
분명 이 섬에는 생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뛰어들은 병력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는 뒤따르는 적에게 총을 맞고 죽는가 아니면 서로 살기 위해 어던 형식으로든 몸부림을 쳤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생한 전투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곳에서 탐사하는 모습을 스케치하고 떠났다.
우린 다시 지도선을 타고 섬을 떠나 오음리에서 에내미고개를 넘어오면 나오는 후동지역으로 들어가 이곳 둔전밭에서 구봉산을 올라 실태를 탐사했다. 하지만 이곳일대는 언젠가 우리가 올라섰던 높은 산인 병풍산(795m)의 좌우능선 7km구간과 같이 듬성 듬성 개인호는 있지만 제보나 증언처럼 전투 흔적은 많이 있질 않았다.
구봉산에서 내려와 다시 배를 타고마지막 목적지인 운수골 밑의 내동에 들어가 우측 사명산(1199m)의 좌측 자락인 350m고지군에 올랐다.
여기는 운수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본인들이 약초캐러 가서 유해를 목격했다고 하는 곳으로 실제 오늘 그 현장을 목격한 분이 동행하여 탐사를 하게 된 것이다. 올라서니 비록 높지는 않아도 경사는 있었다. 정상에 1시간정도 걸어가 도달하니 넓은 공간에 생각외로 앞이 탁 트여 경계하기에 아주 안성마춤이었다. 개인호가 40여개 있고 탄피와 파편등이 호속에서 식별 되었으나 유해는찾지 못했다.
그런데 간동에서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기현이 팀에서 연락이 왔다.
"밭에서 여러구의 유해가 식별 되었습니다. 제보자가 어릴때 학도병이 들어왔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어서 동네 사람들이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알았다. 더이상 발굴하지말고 기다려라. 우리가 곧 갈것이다."
춘천 방송국 팀은 복이 있었다. 우린 바로 내동에서 내려와 지도선을 이용하여 선착장에 도착후 차량으로 현장에 달려갔다.
해는 지금 용화산(878m)과 성불현(799m) 능선 밑으로 내려가는 찰라였다.
유춘리 마을사람 여럿이 나와서 현장을 바라보며 군인아저씨들 고생한다며 위로를 한다.
할아버지되는 분이 이곳에 제보자이며 밭주인이었다.
"할아버지 어떻게 이곳에 학도병이 전사하여 매장되어 있다고 아셨어요?"
"나도 그당시에 군에 붙잡혀가 사실 잘 몰랐어요. 나는 제2사단으로 저격능선에서 살아왔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이야기해 주었지요. 학도병들이 차에 실려 와서는 여기저기 앉아있는데 점심때쯤해서 중공군이 기습을 하여 그만 저기 개천 옆에서 10여명이 죽었는데 군인들은 다 흩어져 어디로 가버리고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하도 냄새나고 누가 찾아오지도 않고 안쓰러워서 묻어주었는데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고 해요."
우린 열심히 주변의 흙을 파내고 전체적인 윤곽을 들어나게 하였더니 6구의 유해가 식별되었다.
이때 오철환이라는 분이 앞으로 나와 상세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6.25전쟁 당시에 이곳 간동 유촌리는 북한지역이었고 평화로운 동네였지요. 논밭이 많아서 굶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처음에야 전쟁도 몰랐고 국군이 치고 올라가는 10월이 넘어서야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때 산속으로 많은 패잔병들이 숨어들어 밤에는 내려오고 낮에는 숨고 그러다가 중공군이 내려 왔어요.
사실 동네에 피난을 떠난 사람도 별로 없고 이리둥절하게 중공군과 집에서 함께 얼마동안을 살게 되었는데 밤에만 중공군이 움직이고 낮에는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정찰을 하고 가끔씩 하늘에 드럼통 같은 것을 떨어뜨리면 뱀이 꼬리치듯 내려오다 펑하고 터지는데 곧 일대가 불바다 되어 버립니다.
여기 묻힌 학도병들은 어디 이천인가에서 왔다고 하던데 총도 들지않고 몸만 와서 여기 학교 입구에 쭈욱 앉아서 점심 먹으려다 중공군 기습으로 죽었는데 아마 초여름쯤 됩니다."
또 다른 지역주민 김재관씨의 증언이다.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게 되는데 비행기가 하늘에서 빙빙 돌며 있고 밤이 되면 국군은 어디로 나가버리고 패잔병이 숨어 있다가 마을에 내려와 먹을 것도 가져가고 낮과 밤이 달랐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밤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 죽은군인이 널려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서 교통호에 묻었는데 교통호가 산에만 있는게 아니고 마을 입구 야산에도 있었다.
전쟁 종료직전에 우리 군대들이 이곳 일대에 많이 들어와 있었고 파로호에서 고기를 잡아서 먹기도 했다. 5사단도 있고 6사단도 있고 8사단도 있고 2사단도 있었다.
고기를 잡는데 그물로 잡는게 아니고 수류탄이지 다이나마이트인지 물속에 던지면 엄청 높게 물기둥이 올라가고 고기들이 허옇게 떠 오르는데 사람만한 잉어도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도 3구의 유해가 식별 되고 있었다.
나오는 유품을 보니 만년필이 나오고 손목시계가 있다.
상의 단추가 학교뺏지도 있는데 많이 부식되어 식별이 제한 되어 세월이 야속하기만 했다.
춘천 케이비에스는 이렇게 많은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현장을 떠나갔다.
다시 원점으로 들어와 장터골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곳은 제6사단의 좌측 연대인 제7연대의 가장 우측으로 2대대의 1개소대가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초전에 이 소대들은 어디로 철수하여 본대와 합류하게 될까?
당연히 산악 능선을 따라 후퇴하게 될텐데 홍천 말고개에서 매봉으로 다시 매봉에서 한골고개쪽으로 진출하면 산 능선상에 콘크리트 벽돌로 지은 낡은 초소막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도 초전에 그런대로 전쟁준비을 한 노력이 보였다.
사실 내평리 전방 7중대다 이곳 장터골의 소대는 철수하여 본대와 합류한다는 것은 상당히 제한되고 오히려 인제지역에서 철수하는 제2연대에 합류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보였다.
이곳에 대곡리 밑에 대동리가 있고 그 중간에 동막골과 윗말이 있다.
이런 곳은 들어가 있으면 뭐가 있는지 모를 정도의 깊은 산골인데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강가 끝까지 내려가 보니 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이장이라는 사람집을 찾아서 오게된 목적을 이야기하고 전쟁관련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본인은 나중에 들어와 잘 모르고 이웃집이 할머니가 살아계신데 6.25전쟁 전부터 살아오셨다 한다.
"이곳이 배를 이용하여 소리없이 북한군이 올라온 곳입니다."
집에는 할머니 혼자서 살고 계셨다.
집 앞에 텃밭에서 풀을 뽑고 계시는데 우리가 잠깐 도와 드리고 그늘로 이동하여 전쟁관련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혹시 전쟁때부터 살고 계셨으니까 북한군도 보고 중공군도 보았겠습니다?"
"그래도 이곳에 전쟁 당시에는 10가구가 넘었어요. 다른 곳은 쌀밥을 못 먹어도 이곳은 쌀밥을 먹던 곳인데 지금 논들이 다 수몰되어 버렸어요. 나는 저 산너머 수산리에서 이곳에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중매쟁이에 속아서 시집을 왔는데 전쟁 나기 한해 전에 왔어요.
1년 지난는데 아침에 웅성웅성 하여 나가보니 무슨 군인이 배를 대고 올라서며 저 산(바위산, 858m)쪽으로 올라 가고 있었어요. 전쟁이 났는지도 몰랐지."
"그럼 여기서는 전투는 없었겠습니다."
"여기는 없고 가만히 들으니까 저 산 위로 올라가며 총소리가 조금 나더니 바로 조용하게 되고 이곳은 사실 누가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런 일은 없었지요."
"그럼 중공군도 못 보았습니까?"
"중공군은 겨울에 이곳으로 해서 북한군이 가던 길로 걸어갔고 얼마 있어서 중공군의 높은 사람이라는데 다리가 부상을 당했는지 들것에 실려서 우리집에 와서 한달이상 머물다 갔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도 안하고 내가 색시인데 피해도 없어요.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데 중공군이 배를 타고 떠나가고 국군이 와서는 자초지종을 듣고 뭐라 하더니 남편을 데리고 중공군이 올라갔던 곳을 알려달라고 동행하여 저 산을 올라갔어요.
이때 집에서 밥을 해서 내가 밥을 이고 고개로 올라가 국군에게 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며 떠났어요."
"크게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이리 벌을 주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근심이 가득하였다.
이유를 들어보니 할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큰 아들마저 간암으로 죽고 지금 큰 손자가 간암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고 그래서 병원에서도 역학조사를 하러 나왔다 갔다고 한다.
수질검사도 해 갔는데 할머니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천벌을 내리는지 할머니는 살아오면서 잘못한 일도 없다고 한다.
오고가는 손님이나 군인들도 가리지않고 있으면 다 주었단다.
우리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망설여지는데 눈치있는 이장님이 화제를 바꾸어 동막골에 들어가 봐야한다며 집을 나섰다.
차는 다시 부창고개로 달린다.
재국이가 팀장을 하고 있는데 이상한 유품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지역주민이 제보한 지역으로 6.25전쟁시에 군인들이 근무하는 초소위치라 한다.
도착하여 보니 주변이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초진지 이후에 점령하는 사전 준비된 진지임에 틀림이 없는 형태였다.
이복재 어른의 증언이다.
"전쟁때 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이 전사자를 묻는 것을 목격했고 실제 야산에 유해가 많았다. 그런데 그 지역은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평상시에 하던 곳으로 동네 청방대도 함께 올라가 경계를 섰다."
조심스레 겉 흙을 걷어내고 붓으로 뼈에 상흔이 나지않토록 하고 특히 발쪽의 신발에 조심조심하여 발굴하는데 가만히 보니 전투화도 아니고 통일화도 아니다.
도대체 무슨 신발일까, 혹시 고무신일까? 지역 청방대가 죽어갔다면 고무신을 신고 있을 수 있다.
우린 비디오를 이용하여 현장을 녹화하면서 발굴을 진행하였다.
들어나는 꽃신,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무려 이 하나의 개인호를 발굴하는데 1주일의 시간이 소요 되었다.
주변을 완벽하게 정리한 가운데 드디어 유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3구의 유해가 엉켜 있는데 유해를 구분하는대는 문제가 없다. 던지지 못한 수류탄이 3발나오고 8발이 들어 있는 M1 완탄 탄창이 2개 나왔다. 수류탄 파편이 널려있고 칼빈탄피도 많이 있다.
그런데 전투화가 2켤레 나오고 1켤레는 전투화가 아니라 고무신인데 여성용 꽃신이다.
비록 그 빨간 꽃신의 색깔은 검은색으로 변해있었지만 원형이 그대로 있다.
그렇다면 혹시 나오는 유해에 여인은 없을까?
우리 군은 초기에 여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적은 없다.
나는 북산면 오항리 내포리 일대의 웬만한 집은 다 찾아다니며 관련된 증언을 찾으려 노력하던 중에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어른 한분을 만났다.
변성원(76세. '09)의 증언이다.
"군인이 부창고개 일대에 많이 죽었고 경찰도 죽었으며 당시에는 마을에서 청년들이나 일부 주민들이 군인과 함께 초소에서 근무도 하고 있다가 죽기도 했다.
전쟁이 났는데 벌써 내평리 지서에 인민군들이 들어와 점령하고 있고 그러니 북쪽에서 싸우는 군인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또한 그 당시에 결혼한 군인이나 경찰의 가족들이 동네에 들어와 살았는데 전쟁이 나니 다 피난을 가야 살아나는데 일부는 가지도 못하고 쏠려 다니다 죽기도 했다. 이 일대에서 소대장의 전령도 죽었고 어떤 군인은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데 그 가족도 이곳에서 죽었는데 소대장이 물러나며 묻어라 하여 보이는 시체만 이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정말 중요한 증언을 들었다.
얼마나 이곳에서 군인들이 초전에 이미 침투한 적으로부터 배후가 차단된 상황에서 처절하게 전투를 하였으며 군인, 경찰, 민간인등이 춘천처럼 열심히 서로 협조하여 전투를 하였고 그 가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속적인 발굴지역을 확장하니 무려 5구의 유해가 나오는데 정말 제일 키가 작아 보이는 시신의 유해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식별되었다.
턱의 둥근정도와 이마 눈덩이의 형태, 골반의 모습등이 여성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니 변성원씨, 이복재씨의 증언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동네의 여인이 이곳에 군인들의 식사를 지원하다 함께 죽었다고 보는 견해와 하나는 군인의 아내가 전쟁이 나니 남편을 찾아왔다가 죽었다고 보는 견해였다.
우리는 여인의 유해를 정중히 분류하여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약식제례를 올리고 묻어드렸다.
그렇다면 이 꽃신은 누구의 것일까?
신발이 작아서 함께 묻힌 여자의 것은 아닌듯하다. 그렇다면 이 곳에서 전사한 어느 군인이 아마도 집에 있는 어린 딸에게 휴가 때에 갔다주려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새색시가 전쟁이 났다하니 혹시나 밤사이 경계근무를 나간 남편을 찾아왔다가 먼저 떠나라는 말을 듣고 떠나다 벗겨져 남겨진 것일까?
아니면 바로 이 신발의 주인이 여기 여인이며 사랑한 군인의 아내 혹은 애인의 것일까?
우린 별별 생각속에 이 신발도 고이 그 여인의 무덤속에 모셔두기로 했다.
한없는 죄책감도 들고 한없는 안쓰러움도 들고 한없는 슬픔도 들어 나는 이후에도 이곳을 혼자서 한번 더 찾았다.
우리의 선배 군인들은 전사해서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못하고 있다.
이념논쟁이며 지역분쟁이며 명분만을 내세우고 갑론을박 하면서 진정 나라를 지킨 것은 여기 숨져간 4인, 아니 5인의 죽음으로 그 숨막히는 단 몇초, 몇분의 지연작전 성공으로 춘천에서 제7연대가 원창고개로 정상적인 철수를 하게 되고 그 48시간 춘천을 지킨 결과가 수도 서울이 조기에 적에게 함락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을 누가 알아줄까?
"신이시여, 여기 존귀한 한 여인의 영혼을 받아 주시고 하늘에서나마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4. 홍천 동북지구 전투 분석 및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이곳은 국군 제6사단의 우측연대인 제2연대가 대덕리로부터 인제 현리 귀둔리까지 방어하게 되는데 이미 언급 하였듯이 이 연대는 앞에 연대와 진지 교대를 한것 이 하루 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연대는 제1대대를 ㅘ전방 계명산으로부터 원대리까지, 우전바에는 제3대대로 원대리에서 귀둔리까지 방어를 하고 제2댇대는 예비로 홍천북쪽 결운리에 집결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24일에 도착하여 아직 짐도 풀지 못한 상태였다.
가. 대전차 특공조 조달진은 가짜다?
연대의 전방은 소양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었는데 마침 그해에는 비가 많이 내려 인민군이 도섭하기에는 부분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다.
우측 제3대대에는 종심상으로 내린천이 특이하게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어 '51년 중공군의 춘계2차공세시 이곳을 점령 방어하던 제3사단이나 제9사단의 병력이 기습공격에 오합지졸이 되어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면 아군을 만나는줄 알고 강물따라 내려갔다가 많은 인원이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가 살아있는 곳이다.
작전지역이 홍천에서 인제에 이르는 44번도로 양분 되면서 제3대대지역에는 내린천을 따라 31번 도로가 남북으로 달리고 있고 이 두 도로의 횡으로 부평리에서 상남에 이르는 446도로와 자은리에서 광암리르 ㄹ지나 내촌에 이르는 408도로가 발달되어 있지만 사실 1,000m~800m 고지군으로 형성되어 종적인 기계화 부대 진출이 불가 하다.
그러니 자연 인제 방향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제 1대대정면에 인민군 제12사단의 공격이 집중되었지만 소양강이라는 천예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두번에 걸친 적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적은 다시 강력한 포사격으로 아군의 경게진지를 초토화 시켜 제대로 탄약의 보급마저 어려운 상황에서 병력은 2/3의 손실이 발생하게 되어 어론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고 연대는 예비인 제2대대를 어론리에 추진하게 된다.
반면 우측의 제3대대는 인민군 제1경비여단의 침투식 집중공격으로 전방 경계부대들은 각자 흩어져 철수하게 되었다.
이로써 연대는 동서로 양분되어 통신두절에 우측 부대인 제9중대는 행방마저 모르게 된다.
계속되는 적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제1대대(소령 김주형) 제5중대 제1소대(강승호 소위)는 트공대 20며으로 어론리 북쪽에서 3.26"포로 적전차를 파괴하게 되고 그 순간에 예비대인 제2대대의 반격으로 적은 일시적 후퇴하게 된다.
이 시간 6월26일 춘천북방에서는 예비연대인 제19연대 제2대대가 원주에서 이동하여 소양강 넘어 우두산에 배치되고 있는 시간대에 적 제2사단은 예비연대를 투입하고 강력한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밀어 붙여 소양강변에 도달하게 되고 다시한번 옥산포 일대의 살상지대 사격처럼 강력한 제16포병대대의 화력이 적들의 머리위에 퍼부어져 소양강물이 핏물이 되어갔다.
이로써 소양강을 경계선으로 서측은 제19연대, 동측은 제7연대가 방어를 하게 되었다.
같은 시간 우측 연대인 제2연대 지역은 어론리에서 적전차를 격멸한 기세로 반격작전으로 돌입하였으나 중과 부족으로 곧바로 자운리-철정리로 철수하게 되는데 연대 병력이 1개 대대수준에 불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철정리의 작은 말고개에 제1대대로, 큰 말고개에 제2대대로 종심깊게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적의 전차공격에 대비하여 제 1대대에서 대전차 특공대를 편성하게 된다.
같은 시간대에 인민군은 춘천이 조기에 함락되지 못하고 있자 홍천방향으로 공격중인 제12사단의 2개 연대를 춘천방향으로 전환, 26일 저녁에 도착하여 춘천을 집중공격하게 되고 소양강이 다시 피로 물들게 된다.
이 시간이 27일 오전중이 되는데 이미 서부전선이 무너지고 수도서울이 실함위기에 처해 육군본부가 시흥으로 이동준비에 들어가는데 김종오 사단장은 이때서야 육본과 전화 연결이 되어 실상을 파악하게 되면서 제19연대를 홍천으로 뽑아 제2방어선을 구축토록하고 제7연대와 연대직할 부대들을 모아서 제19연대가 빠진 곳을 방어토록 한다.
이어서 27일 춘천의 봉의산을 17시30분경 피탈당하면서 철수를 개시하여 원창고개일대에 28일 정오경 신방어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잠잠하던 인제-홍천축선의 적 제12사단(-)은 28일 새벽에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말고개 방향으로 밀려오개 되고 트공대의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내부의 병력들이 동요가 일어나 순시간에 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바로 제2연대 대전차중대 "김학도 일등중사"가 철갑탄을 장전하여 선두 자주포를 명중하게 되자 뒤 따르던 전차들이 멈칫 하는 사이에 제19연대 대전차 특공대 "조달진 일병"이 전차에 뛰어 올라 수류탄을 까 넣었다는 것이 홍천 말고개 신화의 전사 기록이다.
"참 웃기는 승리 탑?"
참 웃기는 참전탑이 그래서 홍천 말고개에 가면중앙을 중심으로 좌우측으로 제2연대, 제19연대가의 탑이 우툭솟아 당시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나는 이미 다 고인이 되었지만 이곳 전투의 당시 대대장인 김주형 장군('07년 작고)도 만나고 제16포병에 있었던 김운한 장군('17년 작고)도 한 10~17년간 매년 한두번은 만나서 당시의 증언을 많이도 들었다.
내가 들은 결론은 이거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니 또 명예훼손이니 하여 고발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장군님, 직접 대대장으로 말고개에서 김학도 일등중사가 적 자주포를 명중시키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까?"
"야 이놈아 내가 지역 책임자인데 누가 그걸 통제하겠는냐?'
"유법사 이놈 사상을 점검해봐요. 아니 내가 직접 통제하여 내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누가 뭐라고 해? 어떤 놈이 조달진이가 했다고 해?"
"조달진이가 했다는 것이 전사에 나와 있어 함께 한 것인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김장군님은 나만 만나면 끌어 당겨 귀뽈을 붙잡고 안타까워 하셨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만나면 "이놈 또 왔네"하시며 끌어 당기고 쓰다듬으셨다.
항시 김 장군님 옆에는 김운한 장군도 계시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 육탄10용사 사무총장을 무려 20년 이상한 유법사가 항상 함께 하고 다녔다.
꽂꽂한 자세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는 모습이 참 멋져 보이는 대선배 장군님들이었다. 하지만 한분이 작고하니 바로 이어서 또 한분이 작고하여 지금은 아무도 안계시다.
"장군님 그런데 전사에는 왜 조달진 용사가 나오는 것인지 알려주십시요?'
'이놈아 그건 민병권(제19연대장이었다)장군한테 알아봐."
이때 옆에 있던 유법사가 거들었다.
그러면서 무슨 자료를 건네는데 재판관련 서류들이다. 내용을 보니 이 말고개 전투의 진실게임이 법정으로 비화하여 명예훼손건으로 비화 되어 있었다.
조달진 용사님(생전에 3번정도 만났음)이 "본인을 가짜라고 했다"하여 유법사를 고소한 명예 훼손으로 결국 법정에서 제2연대가 적전차 격멸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인정하여 조용히 끝나고 말았다.
용사님은 깡마른 체구에 다부져 보였는데 사실 그 용맹성은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특히 문경 유곡리전투에서는 실제 북한군 전차를 육탄공격한 사실이 있어 미국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한 분이다.
하지만 전사는 명확해야 한다.
이 사실을 분명 제19연대장이었던 민병권 대령은 알고 있으면서도 연대의 공이고 얼마동안 조달진 일병을 당번으로 데리고 있었다는 등등이 연관되어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한다.
결국 진실은 양학진이란 분이 당시에 조달진 일병의 특공대 반장이었는데 이분이 공주사람이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제19연대도 특공대를 편성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미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김학도 중사팀이 자주포를 파괴하여 단차로에서 물러나지도 못하고 따라오던 보병도 다 괴멸되어 없다보니 적들이 해치를 열고 다 도망쳐 버리고 끝난 상황에서 확인 사살한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말고개 , 춘천지역에서 28일까지 적을 지연하던 제6사단은 제7연대가 원창고개일대에서 적의 거짓투항(총에 백기를 달고 진전에 나타남)에 속아 일시에 진지가 무너지면서 금병산-원창곻개-수리봉에 구축된 진지에서 백병전이 벌어지고 밀려 내려가게 된다.
우측 제2연대와 제 19연대도 적이 좌우로 우회하여 진출함에 따라 포위 될 것이 우려되어 29일부터 홍천-원주방향으로 철수를 하게 되고 육본의 지시로 1개연대(제19연대)를 이천으로 보내게 돤다;
먼 훗날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이었던, 러시아에 망명에 살고 있던 유성철이라는 자가 말하기를 이곳 말고개 전투에서 북한군 제12사단장이 박격포에 부상을 당하여 전사하였다 한다.
이 제6사단의 분전으로 조기에 서울을 포위 아군의 주력을 한강 이북에서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유엔군의 투입과 한강선 방어의 시간을 갖게한 정말 중요한 48시간의 지연전 이었다.
이 춘천지구 전투와 홍천 북방의 전투지역에는 많은 높은 고지들이 산재하지만 그때만 하더라고 실제 산악 전투를 한 것이 아니고 주로 기동로상에서 전투를 했기에 유해발굴도 주로 도로를 끼고 주요 감제고지를 대상으로 타사가 이루어지고 유해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춘천에서 원창고개에 이르는 곳의 주요고지군과 소양강변에 대한 탐사에서 몇 건의 중요한 제보가 들어와 우리를 힘나게 하였다.
다. 지역관련 제보 및 탐사 결과
용인 신갈에 살고 계시던 정병기씨로부터 온 제보다.
"춘천 우샘마을 지역에서 66년경 소양강댐 물막이 공사간 외국인 기술자 숙소 정화 작업간 군화, 칼빈탄, 군번줄, 수구의 유해를 발견했다. 땅속 60~70cm정도 묻혀 있었으며 발겨후 그 자리에 그대로 묻었는데 지금도 꿈에 나타나 제보를 하게 되었으며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 소속이라 들었다."
그래서 이곳은 내가 직접 발굴과장할 때부터 조사과장을 할 때도 여러번 실제 그 곳에 가서 조사를 하였다. 하지만 그 후에 물탱크 공사니 새로 한동의 아파트를 더 증축하는 과정에 사실 이곳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찾을 길이 없게 되어버렸다.
이곳의 바로 위의 산이 원적산으로 계속 올라서면 배후령고개에서 오봉산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만나는 양호한 산악 기동로다.
그 당시에 양통고개를 올라가 있던 제7연대 우측 대대인 제2대대 5중대 또는 6중대가 이루트를 이용하여 철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적산에는 그렇게 개인호가 많이 있지는 않다.
남양주에 거주하는 김영민씨의 제보다.
"춘천 소양강 구다리(제1교)건너편 맹아학교 뚝방근처에서 유해를 많이 목격하였다."
이 다리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측에 쌍용다리가 별도로 4차선으로 건설되어 있다.
현재도 맹아학교는 그대로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 그 지역은 복토 및 복개를 하여 강변으로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발굴하기가 제한이 된다.
우리는 현장에 가서 지역주민에게 알아본 결과 지역주민이 이 김영민씨를 알고 있고 실제 전쟁이 나서 인민군이 몰려들어 국군의 포사격과 박격포 사격으로 많은 인민군이 죽었는데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시체들이 갈기갈기 찢기어 신원확인이 불가하여 인민군 통제하 지역 주민들이 동원되어 여러 곳에 분산 하여 강변에 묻었고 그 후로 홍수가 몇번 나고 해서 실제 위치는 조금 앞쪽인데 원형이 다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말하였다.
이곳 전투에 참전한 김성곤, 경산시 무공수훈자 지회장의 증언이다.
"처음 소양강 넘어에서 전투를 하다 강 이남으로 후퇴하였으며 높은산(봉의산으로 추정)이 있어 이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한 이틀간 적의 강력한 포사격과 박격포 사격, 때로는 탱크를 가지고 지져대는데 많은 전우들이 죽었다. 알기로는 여기서 아마도 반은 녹았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다리를 통과하여 탱크가 시내로 들어오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죽은 시신을 그 옆에 있는 개인호나 교통호에 임시 가매장할 수 밖에 없다.
이때 동료인 김성박이가 전사했는데 산 능선 큰돌사이에 임시 묻고 철수하였다."
봉의산은 그런대로 별로 개발이 없이 현재에 이르는데 산에 오르면 바로 강변일대에 개인호나 교통호의 흔적이 그대로 있다.
그러나 몇번의 산불이 나고 사방공사나 산에 나무 심기를 한다고 하여 실제 남아있는 전투 흔적은 별로 없다.
이 산 서쪽 편으로 절이 중간에 몇 군데 자리잡고 있어 탐사과정에 들어가 전쟁관련 조사르 한다고하니 산불이 났는데 산에서 뻥, 빵하며 요란하게 불발탄들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의 산자락 밑에 있던 교통호등은 다 도로 확장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시신은 불에 타면 싑게 불이 붙고 재로 변하여 간다. 그러니 용사님의 제보대로라면 아마도 돌틈에 놓고 간 것으로 추정하는데 남아 있을리 없다.
아니면 산에 사는 멧돼지나 오소리들이 먹거나, 아니면 들개들이 분명 물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 불에 타 산화하여 나라를 지키는 그 한 목숨이 허무하게 한 줌 재로 자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다. "우리 할아버지, 경찰 당길중을 발굴해 주세요."
참 기막힌 사연도 많고 엉터리 제보도 많고 세상사가 그렇듯이 이 사업의 속사정도 많고 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다.
하루는 부대로 직접 민원인이 찾아왔다.
그 이름 당세원, 약관 30세의 나이인데 대뜸 찾아와서 본인 할아버지를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몹시나 흥분된 모습으로 찾아와서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같은 모습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국방부에 민원을 이미 접수 시킨 것인데 어던 연유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처리가 안되고 이것이 다시 청와대 신문고에 접수되고 나름 골치아픈 민원이었던 모양이다.
내용은 이렇다. 외할아버지가 춘천 경찰이셨는데 춘천지역 전투시 공지천 옆, 지금의 금호아파트 뒷편 야산에 강변을 보고 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고 하니 무슨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 나라를 지키다 전사했는데 시신을 찾아주지도 않았으면서 유가족이 찾아놓으니까 맞니 안맞니 그런 0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요?"
"아니 말이 너무 거칠지않아요?"
그랬더니 사무실에 딍굴고 여기서 죽어버리겠다며 눈을 보니 살기가 돌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발굴을 무작정 할 수도 없다. 경찰에 신원조회를 의뢰하니 당시에 철도경찰 이었다. 철도경찰잉란 대부분이 최초 군 조직이 없을 때에 38선을 경계한 인원들이 군조직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철도 경찰이 되어 전국의 역마다 배치되어 순찰과 이동간 안전보장 그리고 게속되는 공비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래서 경찰에서 경찰에서 발굴의 주체가 되고 우리는 전문인력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업무협조가 이루어졌다. 참 경찰이라는 조직이 재미 있어보인다.
"배타적인 경찰의 두 얼굴!"
경찰청에 이런 사실을 통보하니 강원경찰 소관이라고 그곳으로 연락하라 한다.
남지역 6.25전쟁사를 다룰 때에 말하겠지만 우린 영광에서 무려 38구의 경찰을 발굴한 적이 있다.
경찰은 그들 자료에도 명확하게 전투 사실이 나와 있고 지역 주민이 본인들이 부역으로 전사한 경찰을 매장했다고 하는데도 나몰라라하여 나는 경찰처에 직접 찾아가 문제제기를 하고 결국 경찰 입호하게 발굴을 진행 하였던 사례가 있다. 책임이 경찰에 있고 우린 전문인력을 지원하는 것이다.
아니 본인들의 선배 경찰을 발굴하는데 주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감사하다 하고 적극적으로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이곳에서 저곳으로 핑퐁을 하는 모습에 나는 본청 업무 담당자를 찾아가 만나 이런 경우는 없다며 이 민원은 우리 것이 아니고 엄연히 경찰인데 슬그머니 유해발굴이라 하니 우리에게 보내 민원인이 화나게하고 국가 조직을 믿지 못하게 하면 되겠느냐고 이야기 하니 어찌된 일인지 잘 알았다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발굴을 할 것이니 인력만 지원해 달라고 하여 나는 민원인에게 통보를 하고 발굴 날짜를 경찰에서 연락이 오면 알려주겠으니 돌아가 달라고 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는다.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두번 속은게 아니라는 것이다. 참 어떻게 해야 문제가 풀린 것인지......
사실 그때는 법에 우리는 국군 전사자만 발굴하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안되어 아예 발굴 날짜를 내가 정하고 이대 현장에 와 달라고 한후에 경찰과 협조하여 그 날짜에 경찰도 나오기로 하여 끝장을 보았다. 정말 그렇게 한 후에 그 날짜에 가서 본인이 발굴해 달라는 곳을 발구하니 유해가 나왔다.
정중히 발굴을 하여 수습한 유해를 경찰에 인계하고 우리는 현장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후에 연락이 왔다.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게 되었다며 고맙다는 인사였다.
너무도 황당한 민원에 마음 고생했던 것이 한 순간에 다 지워졌다.
우측 연대지역에서의 발굴도 많은 제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 어론리 등 기타지역관련 자료
어론리 이수경어른의 제보다.
"전쟁초기에 부평리와 44번도로 우측의 수리봉 일대에서 전투가 심했고 국군이 많이 전사했다.
직접 가매장에도 참여하여 10여구를 직접 매장도 하였다."
이곳은 소양강 바로 남안의 38선 도로변 좌우측에 해당하는 곳으로 부평리는 매고개에서 좌측으로 양지말에서 성재까지 악어입처럼 지형이 되어 있다.
이곳은 전쟁전에도 수시로 북한군의 침투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우측에 수리봉(704m)이 우뚝 솟아 있는 곳으로 모든 산 능선상에 많은 개인호가 굴토 되어 있다.
특히 수리봉은 원형으로 교통호가 구축되어 있으며 이 능선을 타고 동남방향으로 이동하면 정자리로 해서 상남까지 이동이 가능한 산악 능선이다.
특히 '51년도 중공군의 춘계 1,2차 공세기간인 4월부터 5월 어간에 많은 전투가 중공군과 국군간에 벌어져 엄청난 희생이 발생한 곳이다.
나는 한여름에 이곳에 들어가 성재로부터 수리봉으로 올라서 능선을 이용한 탐사를 해본 결과 유해가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하여 영배팀을 투입하여 발굴결과 의외로 1구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더=ㅗ장이 나왔다.
그 이름 배재용으로 군번도 전사자 명부에서 확인이 되었지만 유가족을 찾을 수 없어 신운확인이 현재가지 안도고 있다.
또한 10여구를 묻었다는 곳은 발굴해 보았으나 남아있는 유해가 없었다. 아마도 전후에 누군가 파서 가져간 모양이다.
어론리 장영춘, 박상용씨의 제보다.
이분들은 직접 전쟁을 목격한 분이 아니고 전후에 수리보에 올라가 약초와 탄피를 캐러 올라가니 유해가 발굴 되어 함께 있던 판쵸우의로 잘 싸서 개인호 그자리에 잘 모셨다는 제보로 우리는 제보자가 말한 지역 일대의 개인호 500여개를 전수 발굴하는 노력끝에 2구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