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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조선과 그 예술(1922)
그가 ‘조선의 벗에게’라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한국역사의 비극, 슬픔 등에서 한국의 미를 찾으려고 했다. 불행한 역사 속에서 형성이 된 것이 비애미 이다. 그는 한국미의 특징 을- 비애의 미. 한의 미로 보았다.
1) 미술- 흐를 듯이 길게 길게 끌면서, 가늘고, 긴 선을 이룬다. - 지붕의 추녀선, 도자기의 선 등 - 온갖 원한이나 슬픔, 동경 등이 녹아 있다.
2) 한국인의 옷, 백자 등 - 백색은 슬픔의 상징이다.
그 외에 소박미, 치졸미 등등이고, 이와 유사한 용어를 수없이 많이 사용했다.
이런 것들을 총칭하여 ‘민예미’라고 했다.
이러한 민예미는 ‘친근감’을 준다.
民은 官에 대비되는 말로서 하층민 또는 서민이라는 뜻이 강하다.
(귀족층의 미는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야나기의 미론은 고유섭을 거쳐서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에게 이어지고
다음 세대인 김원용, 강우방에게 이어진다.
이후의 한국미학자들은 이들 1세대 학자의 미론을 두고
1) 야나기 추종자다. 즉 일본의 식민주의에 추종한다고 비난
2) 식민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흔하게 듣는 말이 세계 최초다. 세계 최고다. 이다. 열등감의 발로다.
* 야나기의 민예론
20세기 초 일본의 지식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상을 예술의 차원에서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는 미술문화는 공예문화 즉 생활문화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념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 보고, 느끼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보다 한 이름 없는 개인이 만든 소박하지만 멋이 깃들어 있는 공예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그는 그러한 가치를 실현 하기 위해 일상적인 예술성이 느껴지는 공예제품들을 수집하였다. 그에게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행위가 아닌 예술적 행위인 셈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지식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상을 예술의 차원에서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보다 한 이름 없는 개인이 만든 소박하지만 멋이 깃들어 있는 공예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자신이 펼친 ‘민예론’을 바탕으로 민간 작품들을 모았으며 수집된 작품과 작품사이에 얽힌 맥락들을 생각하며 그 사회문화를 읽어내려고 애썼습니다.수집하는 행위 속에서 일상에서 만들어진 그 시대 문화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따스한 시선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 와서 한국의 민속품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민중공예 속에서 한국미의 특질을 찾으려고 하였다.
‘중국의 예술은 의지의 예술이며, 일본은 정취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이 사이에서 숙명적으로 비애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조선의 예술인 것이다. 불안은 적막감을 낳고 적막감은 동경을 낳는다. 구원은 땅에 가득 찬 것이 아니고, 하늘이 갖고 있는 것이다. 슬퍼하는 자는 위로를 받는다. 예수는 말하지 않았던가. 비애란 신의 마음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신은 위로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신의 마음은 슬퍼하는 자에게 이끌리는 것이다. 슬픔이 어찌하여 미를 낳는가. 또한 슬픔의 미가 어찌하여 그렇게도 사람을 매혹시키는가. 그것은 신이 생각하고 있는 슬픔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힘 있는 자는 자연에 산다. 그러나 슬퍼하는 자는 신에게 산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예술의 기조를 이루는 것에는 형태, 빛깔, 선이라는 세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극동 3국의 국민성이 다르고, 토양이 다르고, 기질이 다른 만큼 예술이 추구하는 바도 다르다.*중국은 형태, 일본은 빛깔, 조선은 선을 주조로 삼고 있다고 여깁니다.
* 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무네요시(일본어: 柳宗悅,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는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연구가로, 미술평론가이다.
학습원(學習院) 고등부에 재학할 때 문예지 《시라카바》(白樺)를 만들었다. 1913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유럽 유학 후 귀국하여 1919년에서 1923년까지 도요 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있었다.
'사라지는 한 조선 건축물에 대하여'를 1922년 《개조》(改造) 9월호에 발표하는 등의 논설 활동을 했고,[1] 1924년 서울에 조선 민속 미술관을 세우고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했다. 한국의 전통 미술 및 공예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평론 및 수집을 하였다. 한국의 미를 설명하면서 한국 민족의 특성을 심도있게 분석하였다. 민예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대표적인 성과가 1936년 도쿄도 메구로 구에서의 민예관 설립이다.
일제 강점기 광화문 철거 당시 철거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타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와 존중을 표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야나기 민예론, 국내 학자들도 답습오병욱 교수는 나아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학 방법론이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서양의 역사결정론적 시각과 만나며, 이는 결국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형될 수밖에 없음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오교수가 발견해낸 인물이 19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자 이폴리트 텐이다. 텐은 유럽 민족을 라틴계(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칼)와 게르만계(독일·벨기에·네덜란드·영국·스웨던·미국)로 나누고 4백여 년에 걸친 작품 경향을 분석한 뒤, 종족과 민족에 따라 예술의 성격이 사실적이거나 데생적, 혹은 색채적으로 갈린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텐의 이론은 당시 유럽에서 꽤 인기를 끌었고, 유럽의 방법론을 급속히 받아들이던 일본 지식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오교수의 설명이다. 하지만 풍부한 자료를 섭렵했던 텐과 달리 야나기 무네요시는 도자기 등 한정된 작품의 단편적인 인상에만 의지해 조선의 예술은 물론 민족성까지 규정하는 오만함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야나기가 정의한 조선의 미나 ‘민예론’은 뒤집어 보면 유치함·고루함·비참함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오교수는 말했다. 야나기는 일제의 무단 통치를 보완한 문화적 식민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나기의 접근법이 국내에서 별 저항 없이 수용되고 자기 복제하는 데 성공한 이유는 뭘까? 오교수에 따르면, 그가 조선의 친구를 자청한 박애주의자이자 섬세한 양심을 가진 지식인으로 국내에 비쳤기 때문이다. 야나기의 조선예술론은 고유섭에 의해 ‘구수한 큰 맛’ ‘무관심성’ ‘무기교의 기교’ 따위 용어로 뿌리를 내린 이후 최순우·김원룡·이동주·황수영·진홍섭 등 국내의 대표적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이같은 ‘야나기 최면 효과’는 학계를 뛰어넘어 문화 전반과 일상 생활에까지 민족 정서로 포장된 채 유포되었다. 신석초 시인이 제기한 이른바 ‘멋론’에서도 야나기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백의민족도 야나기가 쓰기 시작한 말이다. 그러는 사이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은 일종의 성역으로 자리 잡았다. 김지하 시인 등이 인상 비평 차원의 비판을 남겼을 뿐 미술계 내부에서 제대로 된 야나기 비판이 나온 적은 거의 없다. 국내 미술사학계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얽혀 있어서 조심스러워하거나 비판을 회피한 탓도 크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야나기식 방법론이 비판 대상으로 오르내린 지 오래되었다. 1997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세계적인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미와 지배’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야나기의 시각은, 식민 지배자가 자신들이 멸망시키려는 민족을 향한 동정의 시각에서 비롯된 독단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오교수의 논문은 이제 국내에서도 인상 비평을 넘어서, 문화 사회학적 측면에서 야나기식 관점을 재고해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오교수는 “인상주의 이후, 특히 20세기 이후 미술에서 민족성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야나기식 시각으로 한국미를 재단하는 이들이 많아 이번 논문을 쓰게 됐다”라고 말했다. * 야나기 미론에 대한 비판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은 그런 야나기론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야나기의 글과 개인사, 시대적 배경을 추적하고 원문을 두루 충실하게 소개하면서 그에 관한 최근 연구성과들까지 담은 ‘야나기 읽기’의 새로운 총괄 텍스트다.
일본 민예운동을 이끈 야나기의 조선예술 비애미론(悲哀美論)은 의외로 단순소박하다. 그는 예술 구성요소의 기조를 형태와 색체, 선으로 나누고 이를 동양3국의 미적 특질과 하나씩 연결하는 도식화를 감행한다. 중국은 강대하니 형태의 예술이고, 일본은 아름다운 자연의 혜택을 보장받고 있으니 색체의 예술이며, 조선은 길고 가느다란 곡선이 주조를 이루는 선의 예술이다. 그런데 그 선의 미는 “즐거움이 허용되지 않고 슬픔이나 괴로움이 숙명처럼 몸에 따라다니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의 역사는 슬픈 운명이었다. 그들은 억압을 받으며 3천년의 세월을 거듭해왔다.”(‘조선인을 생각하다’) 오직 끝없는 침략과 착취, 억압과 고통과 비참, 슬픔, 쓸쓸함으로 점철됐으며, 그게 예술에 그대로 반영됐다는 것이다.
조선이 수많은 외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고대정복 왕조들간의 전쟁은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끝없이 되풀이됐고 왕후장상이 아닌 민초들의 수난과 비참은 동양 3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포함한 지구상 모든 역사의 일상다반사였다. 그것을 조선이니 일본이니 하는 근대 민족국가 관념으로 파악한 것부터 넌센스다. 그리고 임진란 전까지 일본의 어느 시대가 통일신라나 고려 전기, 조선 전기보다 더 번성과 안정을 구가했단 말인가.
게다가 야나기 자신이 말했듯이 신라·고려·조선 후기의 전란과 비참에는 일본의 책임이 크다. “오늘날 조선의 옛 예술, 즉 건축과 미술품이 거의 황폐하고 파괴되고 만 것은 대부분이 실로 가공할 왜구의 소행 때문이었다.” 그는 신라시대 건축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거의가 가공할 우리(일본) 조상들의 죄”의 결과로 봤고 “임진란의 조선 예술에 대한 일본의 부끄럽고도 무의미한 박해”를 개탄했다.
그리하여 조선땅의 예술품은 거의 파괴되고 약탈당했으며 침략자들이 남은 정수들을 휩쓸어갔다. “지난번 나라를 방문했을 때 호류지에서 놀랄 만한 옛 미술품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국보나 황실 소장품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조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얼마 전 행한 쇼토쿠 태자 1300주기 마쓰리는 실로 조선에 대한 예찬이었다.”(‘조선민족 미술전람회에 즈음하여’) “조선예술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과 추모의 정을 느끼지 않는 우리의 심리상태에는 대단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보 가운데 국보로 불리는 유물들 대부분이 조선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호류지의 …백제관음, …유메도노의 관음입상도 틀림없는 조선의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 일본의 국보급 유물은 조선의 미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조선의 미술’)
섬세한 미감을 지닌 도쿄제국대 철학과 출신의 지식인 야나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인정할만큼 양심적이었다. 그가 “그 무서운 사건”이라 했던 3·1저항운동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19년 5월부터 시작한 조선의 예술에 관한 수다한 저술은 바로 그 때문에 차별속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분노하고 자민족 역사에 절망하던 도쿄 유학생 등 식민지 조선의 지식그룹을 감동시켰다. 그들에게 야나기는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케 해주고 일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일본인 저명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사상과 행동은 일본 제국주의 정치사상과 공범관계에 있었다.”고 한 철학자 이토 도오루나 “야나기가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는 조선민족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관념적이고 정서적 세계인 예술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것은 ‘비극의 민족’의 관심을 예술로 돌려 현실타파를 단념시키기 위한 허구이자 기만”이라고 한 옛도자기 연구가 이데가와 나오키, “야나기가 조선예술을 집중 거론한 것은 일제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이라 한 고구마 에이지 게이오대 교수의 지적대로 야나기는 조선독립에 반대했다. 일제 식민통치야말로 왜구와 임진란을 능가하는 비극의 원천이었음에도 그는 그 구조적 모순에 눈을 감았다. 메이지유신 이후시대에 살았던 야나기는 철저히 메이지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 중심으로 재편된 동아시아근대라는 지평 속에서 과거를 바라봤다. 그에게 일본제국주의는 다소의 과오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선진(先進)이고 선(善)이었다. 그는 과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다. 그는 일제의 무단통치는 비판했으나 식민지배 자체는 긍정했다. 다만 총칼이 아니라 정(情)과 예술, 종교를 통해 부드러운 방법으로 피식민자들을 어루만져 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통치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을 뿐이다. 역시 ‘악어의 눈물’이었을까.
1922년 5월 일제의 조선식민지배를 정당화한 미국인 알렉산더 파월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평하다’를 읽고 <세계의 비판>(37호)에 쓴 ‘비평’이란 글에서 야나기는 “이만큼 오류가 적고 공명한 평론을 본 적이 없다”면서 주장한다. “조선민족에게 다소나마 자각이 있었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 또는 일본이 넘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측면에서는 일본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일-한합병이라는 결과에 대해서는 조선 스스로도 절반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강자를 원망하기 전에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를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사람들이여, 독립을 갈망하기 전에 인격자의 출현을 앙망하라. 위대한 과학자를 내고 위대한 예술가를 낳아라. 될 수 있는 대로 불평의 시간을 줄이고 면학의 시간을 많이 가져라.” 후일 변절한 이광수가 들고 나온 ‘민족개조론’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그의 가족사가 많은 걸 얘기해줄지 모른다. 아버지 나라요시는 해군 소장 출신으로 일본군함 운양호가 강화도를 침범했을 때 해군 수로국 책임자였으며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야나기는 지배그룹 자녀들이 다니던 가쿠슈인(학습원)을 거쳐 도교제국대에 들어갔다. 누나 스에코의 남편 가토는 인천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했고, 가토 사후 재혼한 해군무관 다니구치는 3·1운동 때 해군 인사국장으로 조선에 증파된 병력 수송작전을 맡았으며 나중에 해군대장으로 승진했다. 여동생 지에코의 남편 이마무라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인사권과 경찰권을 쥐고 있던 내무국장이었다.
야나기는 “일본이 칼로 여러분의 피부를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는 짓이 절대적 죄악이듯이 여러분들도 피를 흘리는 방법에 따라 혁명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피부 정도가 아니라 오장육부를 짖이겨 놓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양비론으로 얼버무리다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바라보는 강자들의 전형적인 시각과 다를 바 없다.
1974년 시인 최하림씨가 야나기의 <조선과 그 예술> 번역본(<한국과 그 예술>)에 대한 해설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술에 대하여’에서 야나기의 조선예술관을 정면으로 반박했을 때 나라 안팎에서 풍파가 일었다. 최씨는 야나기의 글들이 “말 못하는 조선인들의 상처를 달래주었음에 틀림없었다”면서도 그의 관점을 “한국인을 패배감으로 몰아넣으려는 술책과 한국의 역사를 사대로 일관한 비자주적인 역사로 몰아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이 교묘히 버무려진 사고방식”이자 “일제의 조선정책과 그의 센티멘털한 휴머니즘이 혼합 배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야나기 철옹성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우리나라 미술품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23년 전에 작고한 야나기에게 ‘보관 문화훈장’을 추서하기까지 했다. 야나기는 여전히 조선예술의 구원자이자 교사로 통하며, 심지어 그가 조선의 독립을 주창한 투사였다는 허구마저 사실마냥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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