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3월 초 가톨릭신문에 게재된 창고지기의 삶 '행복한 노년'이 계기가 되어 나는 청송제1교도소에 무기수로 수감되어 있는 형제로 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내용은 '신앙안에서 희망과 용기를 내어 수형생활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한다는소식과 성경필사 할 노트와 볼펜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를 '소금창고1004' 카페에 게재하였고, 여기에 선한 이웃들이 책자와 노트를 청송으로 보낼 줄 수 있도록 협조해 주셨고, 어느 자매는 그 형제에게 매달 영치금으로 5만원씩 넣어주라며 저에게 매월 6만원을 송금해 주셨다. '왜 6만원을 보내셨냐?'고 여쭤보니 만원은 우체국 수수료와 경비에 쓰라고 하셨다. 그 자매님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십 오개월 동안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보내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그를 면회 갈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무도 모르게 청송 갈 때 경비로 쓰라며 여비도 넉넉히 준비해 주셨다. 철저히 자신을 감춘 채 소금창고의 창고지기들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삼아 복을 누리도록 배려해 주신 지방의 맘씨 고운 천사였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승용차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동서울터미날에서 6시30분 첫 차를 탔다
이 버스는 안동을 거쳐 진보, 청송을 간다.
진보까지 소요시간은 약 3시간 30분 예상.
새벽에 나와 고속버스에 오르니
마치 소풍을 가는 것 처럼 맘이 설렌다.
이제 버스는 안동을 지나 진보를 향한다.
드디어 진보터미널에 도착했다.
면회를 가기 전 늦은 아침으로 인근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진보터미널에서 청송교도소까지는
왕복 2만원에 택시를 대절했다.
고마운 기사님은 접견신청부터 마치고
나오는 시간까지 30여분을 대기료 없이
기다려 주셨다.
택시로 교도소 안을 지나가며 한 장 찍었다.
교도소 정문을 한참지나서야 나타난 제1교도소
이곳에 민원창구와 가족 접견실이 있었다.
첫 만남이었다.
그는 지금 나이가 사십이라 했는데
우리 눈에는 앳된 소년으로 보였다.
막달레나가 스피커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어진 접견시간은 20분
이제 남은 시간은 4분 뿐이다.
------------------
그는 건실한 청년이었다. 사건으로 인하여 무기수로 수감되기 전 까지는, 그에게 먼저 영치금은 잘 받고 있는지? 적지는 않은지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넉넉해요. 같은 방의 더 어려운 형제들에게 매월 2만원씩을 쓰고 있습니다. 밖으로 부터 제가 그냥 받는 고귀한 성금인데 나누어 써야죠." 이미 수감 전에 수원에 있을 때 영세를 받았단다.(세례명:미카엘) 어머니는 중학교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청송으로 올 무렵 암으로 투병중이셨는데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단다. 왜냐고 물었더니 하나 뿐인 혈육인 형이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한다. 자신의 사건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그는 예측했다. 고로 밖에서 소식을 전해 줄 형제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보니 그는 외로웠다, 365일 면회오는이 조차 없다하니 얼마나 서러웠을까! 그때 내가 순간적으로 그를 향해 얘기했다. " 0 0 아! 오늘부터 나는 네 아버지다! 그리고 여기 막달레나 아주머니는 네 어머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느냐? 사람이 그리우면 편지해라. 내가 내려오마.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얘기하거라 힘닿는 범위 안에서 내 노력하마. 우린 하느님 안에 한 가족이다." 곁에 있던 친구 막달레나가 옆구리를 치며 살짝 핀잔을 준다. '애 뜻이 어떤지? 허락도 없이 불쑥 부모라니~~'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두꺼운 투명 유리창 너머의 미카엘은 순간 이슬 맺힌 눈망울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접견시간이 2분 밖에 안 남았구나, 둘 셋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예수님도 함께하신다 하셨으니 네가 세상 죄의 온상 속에서 활동하는 엄마 아빠를 위해 기도해 다오, 우린 너를 위해 기도하마," 제의 하였더니 그가 같이 주님의 기도를 하자고 했다. 성모송에 영광송까지 바치고 나니 접견시간 종료를 알리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안과 밖의 대화를 이어주는 스피커도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