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09. [역경의 열매] 김재곤 (1-15) 중학교 중퇴 후 생존 위한 삶… 그 속에서 복음을 만나다
부모님 여의고 형제들 뿔뿔이 흩어져
운명처럼 친척의 닭 유통 가게에 취업
당시 하루 20시간 일하며 숨가쁜 생활
김재곤 티지와이 대표가 지난 8일 서울 서초구 본사 사무실에서 ‘용서를 통한 은혜의 삶’에 대해 간증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순탄한 삶은 아니었다. 1958년 태어난 나는 14살 되던 1972년 부모님을 여의며 어린 나이에 큰 시련을 맞이했다. 부모님의 부재로 동생들은 전국의 친척 집으로 흩어졌고 나만 홀로 서울에 남겨졌다. 늘 외로웠다. 학업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만둬야 했다. 그게 나의 최종 학력이 됐다.
그 시절은 너무 힘들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가슴이 답답하고 기가 막힌 시절이었다. ‘고군분투.’ 당시 내 처지는 전쟁터에 홀로 남겨진 병사와 같았다.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삶 자체가 도전이었고 생존을 위해 매일 깨어 있어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지 않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흩어진 동생들을 돌봐야 할 때도 많았다. 나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 책임까지 내게 남겨졌다.
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 ‘닭’을 만났다. 친척이 운영하던 닭 유통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선 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매일 19시간씩 일하며 살아있는 닭을 도축하고 자전거에 싣고 배달을 다녔다. 힘든 노동이 끝나야 겨우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오후에는 거래처를 돌며 수금을 했다. 부모님께 기대야 할 나이에 전쟁터 같은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 내 처지가 딱했다.
미숙했던 사회생활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오해로 인해 구치소에 갇히고 결국 죄가 없는 데도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디 억울한 일이 이뿐이었을까. 분노와 복수의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이 어린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러나 의지할 곳도, 답을 구할 곳도 없었다. 매일 20시간 가까이 일하며 잠시 숨을 고른 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날 붙잡아 준 것이 있었다. 바로 신앙이었다. 복음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면서 기댈 언덕을 찾았다. 신앙은 삶의 중심이 됐고 오늘날 나를 이곳에 있게 한 힘이 됐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신앙의 열매를 나누게 된 것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도 믿음의 능력을 전하고 싶다.
나를 붙잡아 준 또 한 사람은 아내 김상숙 권사다. 28세에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현명하고 깊은 신앙을 가졌다. 함께 세 딸을 낳아 키우며 사업을 하던 어려운 시절에도 신앙의 중심을 잡도록 도와준 든든한 동반자였다. 흔들릴 때마다 묵묵히 기다려 준 그녀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사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인간적인 꾀를 부리기보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금식 기도원에서 눈물로 주님께 매달렸는데 그때마다 주님은 언제나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셨다. 내 삶의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은 용서였다.
분노와 복수심이 밀려올 때마다 주님께서는 “재곤아, 선으로 악을 이기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용서를 통해 얻은 은혜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지면을 통해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길 원한다.
약력=1958년생, 한강씨엠 상무이사, 목우촌과마니커 대표이사, 크레치코 대표이사 역임, 현 티지와이 대표, 염광장로교회 장로
* [역경의 열매] 김재곤 (1) 중학교 중퇴 후 생존 위한 삶… 그 속에서 복음을 만나다
* [역경의 열매] 김재곤 (2) 상경후 닭고기 소매업 종사하던 부모님 비보가…
* [역경의 열매] 김재곤 (3) 인생을 바꾼 '닭'과의 만남은 외로웠다
* [역경의 열매] 김재곤 (4) 눈 뜨면 일 일 일… 뛰고 또 뛰었던 나의 십대
* [역경의 열매] 김재곤 (5) 사고 낸 택시 기사 허위신고로 꼼짝없이 덫에 걸려
* [역경의 열매] 김재곤 (6) 분노로 가득 찼던 내게 용서의 길 보여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김재곤 (7) 신앙 안에서 삶 안정… 믿음 좋은 아내에 끌려 결혼
* [역경의 열매] 김재곤 (8) 거래 중단 각오하고 주일성수 결심… 닭 업계 '대상' 성장
* [역경의 열매] 김재곤 (9) 풍족에 취해 비틀거리다 아내 충고에 정신 차려
* [역경의 열매] 김재곤 (10) 동업 실패로 쓴맛… 마니커 계열사 대표로 인생 황금기
* [역경의 열매] 김재곤 (11) 인생 끝자락에서 만난 기적… 새 희망 속 주님 손길 느껴
* [역경의 열매] 김재곤 (12) 친구 도계공장에 취업… 모든 역량 쏟아 공장 정상궤도로
* [역경의 열매] 김재곤 (13) 프랜차이즈 사업 시작 첫해에만 100호 가맹점 달성
* [역경의 열매] 김재곤 (14)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7년 만에 지킨 하나님과의 약속
* [역경의 열매] 김재곤 (15·끝) "넘치도록 주신 복 이젠 나누며 살겠습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재곤 (2) 상경후 닭고기 소매업 종사하던 부모님 비보가…
초등 6학년때 고창서 사당동으로
부모님 가난 벗으려 생닭 노점일까지
동신중학교 입학한 첫해 10월쯤
초가을 연탄가스에 부모님 빼앗겨
김재곤 가마치 통닭 대표의 부모님 모습. 김 대표의 부모님은 1972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대표 제공
나는 195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김용권, 이이순)은 나를 낳은 뒤 세 명의 동생을 더 보셨다. 53년 7월 말 6·25전쟁이 끝나 당시는 전후 복구로 온 나라가 들썩일 때였다. 모든 게 부족했고 시골의 결핍은 더욱 심했다.
늘 배고팠지만 행복했었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했던 고향 마을에서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나야 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나를 큰집에, 동생들은 외갓집에 맡기고 서울로 먼저 떠나셨다. 우리를 부른 건 1년이 지난 뒤였다.
6학년이던 1969년 4월 서울로 향했다. 행복만 가득할 것 같던 시절이었다. 대도시의 인파 속에서도 여전히 가난했지만 그래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했다. 60년대 말 사당동은 흑석동에서 배를 타야 닿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동작구도 아니고 영등포구였다. 세월이 지나 모두 아파트촌으로 변한 자리엔 판잣집이 즐비했다. 산기슭에 얼기설기 축대를 쌓아 올려 위태롭게 지은 집 중 하나가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였다.
여섯 식구가 칼잠을 자야 했던 그 비좁았던 집. 그 집에서의 추억은 그리 길지 못했다. 부모님은 시장 입구 노점에서 생닭을 팔고 서울 여러 동네에 닭 부산물을 납품했다. 닭과의 만남은 이런 우연으로 시작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척 중 한 분이 닭고기 유통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소매를 알선하셨다. 아버지는 닭 부산물을 갈월동과 남영동, 후암동 일대 식당에 판매했고 어머니는 노점을 지키셨다. 먹고 사는 게 우선이었다. 나와 동생들 모두 바로 전학을 못 했고 1년을 놀았다.
사당동 산동네는 우리의 놀이터였다. 비탈을 구석구석 다니며 놀았다. 그러면서 중국 음식점과 자개농 공장에서 잠깐씩 일도 했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각별하셨다. 바쁜 가운데 고창에 있는 나의 초등학교까지 가셔서 졸업증명서를 발급받아 오셨다. 중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가 동신중학교였다. 정식인가를 받지 못한 고등공민학교였지만 기쁘고 감사했다.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신문 배달을 하고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동기생보다 나이 든 학생이었지만 뭔가를 배우는 게 무척 좋았다. 하지만 이 행복은 길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듬해 10월 초였다. 사촌 형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산길을 뛰어 학교에 왔다. “재곤아, 당숙과 당숙모가 돌아가셨다.” 대체 무슨 말이지. “아니 형, 형 부모님이 돌아가셨단 말이야?”라고 되물었고 “아니, 너희 부모님이 돌아가셨어”란 말이 돌아왔다. 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당시 부모님은 사촌 형이 마련해 준 이문시장에서 장사하셨는데 오가는 길이 멀어 종종 가게 한쪽에서 주무시곤 하셨다. 그날도 그랬다. 그해 10월은 이른 추위가 찾아왔다. 부모님도 이 가게에서 첫 추위를 맞으셨다. 연탄아궁이와 연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불을 피운 게 화근이었다. 밤새 연탄가스가 부모님을 짓눌렀고 그렇게 두 분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14살. 나는 그렇게 고아가 됐다. 동생들은 더 어렸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3) 인생을 바꾼 ‘닭’과의 만남은 외로웠다
한 줌의 재로 변해 돌아오신 부모님
소년 가장으로 살며 동생과 생이별
닭 팔던 육촌 형님과 함께 일 시작
운명처럼 다가온 닭 사업의 인연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몇 해 전 서울 경희대병원 영안실 앞 단풍나무의 나뭇잎을 만지고 있다. 김 대표는 1972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 나무에 기대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는 40세, 어머니는 39세 때 세상을 떠나셨다. 온 동네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 하지만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된 내겐 슬픔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저 고아일 뿐이었다. 경희대병원 영안실 앞에 있던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게 빛났었다. 그 나무에 기대 울고 또 울었다.
장례 비용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딱한 사정을 들은 병원에서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부모님은 벽제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변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동생들은 내가 우니 따라서 울 뿐, 그 슬픔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가장이구나.’ 마음으로는 각오를 했지만 몸은 어렸다. 담임선생님은 학비 걱정하지 말고 학업에 매진하라고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내게는 돌봐야 할 동생들이 있었다. 당장 살 집의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다. 꾸역꾸역 한 달 동안 학교에 더 나간 뒤에 포기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우리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큰 누이는 서울의 육촌 형님 집으로 갔고 나머지 동생들은 고향의 큰집으로 돌아갔다. 생이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기가 막혔다. 눈물이 앞으로 가려 이별의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 남았다. 남은 가족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반년 가까이 신문 배달을 했고 끼니때가 되면 라면을 끓였다. 내 처지를 가엽게 보신 이웃들이 종종 밥을 해주셨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늘 배고팠고 외로웠다. 겨울이면 연탄 살 돈이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냈다.
해가 지나 1973년 봄이 됐는데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척 형님이 찾아왔다. 만곤이 형은 나와는 육촌이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닭을 팔았는데 그곳으로 날 데려갔다. “재곤아, 같이 일하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얼마나 힘든 일상이 펼쳐질지는 담기지 않았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닭과는 이렇게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운명과도 같았다. 직업도 갖게 됐고 밥도 거르지 않고 먹게 됐는데 월급도 5000원이나 받았다. 감사한 일이었다. 가게는 종일 바빴다. 처음에는 손질한 생닭을 자전거에 싣고 배달만 했다. 닭에서 물이 나와 버스를 탈 수 없어 자전거가 유일한 배달 수단이었다.
짐 자전거는 내 몸보다 너무 컸다. 자동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닭을 날랐다. 잠은 가게 2층에 딸린 좁은 방에서 대여섯 명의 직원과 함께 잤다. 칼잠을 자야 했지만 그래도 당시 내겐 유일한 기댈 언덕이었다. 매일 닭을 잡고 손질하던 공간에서 잠을 청한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불결했지만 누우면 바로 잠드는 일상이 반복됐다.
배달이 익숙해지자 이제는 닭 도축 일이 맡겨졌다. 직접 잡은 닭을 배달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울면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빈자리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공허한 마음을 채운 건 흩어진 동생들이었다. 북악스카이웨이 중턱에 있던 식당 배달이 유독 고역이었다.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코피를 쏟으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삶의 이유가 된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이 나날이 커지던 어느 날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4) 눈 뜨면 일 일 일… 뛰고 또 뛰었던 나의 십대
큰집서 구박당하는 동생들 소식에 절망
소년 가장으로 반복되는 고된 일상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돌고 돌아 또 ‘닭’
20대 시절 김재곤(앞줄 오른쪽) 가마치통닭 대표가 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동생들이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고향 큰댁으로 간 동생들이 큰어머니 밑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삶이 힘들어 어린 동생들 생각을 하지 못 했던 게 후회됐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안타까웠다. 동생들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마음이 무너졌다.
지금처럼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소통할 수도 없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외갓집에서 알게 됐고 동생들을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큰집에서 반대하면서 갈등도 벌어졌다. 물론 동생들을 서럽게 한 큰댁에 앙심을 품지는 않았다.
동생들을 생각하면 기가 막혔지만 당장 내가 살아야 했다. 빨리 자리를 잡아야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계셨다면 사랑받으며 학교에 다녔을 테지만 현실은 남대문시장 닭 가게였다.
3년쯤 일했을 때였다. 아침에 배달을 가려는데 가게 사장인 사촌 형이 형수와 말싸움을 하다 느닷없이 내게 주먹질을 했다. 애먼 내게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흐르는 코피를 허겁지겁 막으면서 애써 참고 있던 분노와 서러움이 폭발했다. 동생들 얼굴이 떠오르니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더 이상 사촌 형 밑에서 있을 수 없었다.
가게를 떠난다는 건 잠잘 곳도 버리는 것과 같았다. 명륜동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남영동 자동차학원에서 정비 기술도 배웠다. 밤잠을 설치며 공부했지만 결국 자격증은 따지 못했다. 겨우겨우 살아가던 어느 날 보문동에서 닭을 팔던 또 다른 사촌 형에게 연락이 왔다. 나의 성실함을 알던 형님이 일을 준 것이었다.
돌고 돌아 또다시 닭이었다. 1970년대 후반만 해도 닭을 잡아 식품화하는 일에 관한 법규인 도계법이 없었다. 산 닭을 유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새 일터에선 새벽 4시부터 오전 7~8시까지 산 닭을 잡았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 내내 시장 구석구석으로 수금을 다녔다. 이틀마다 전국 각지로 닭도 사러가야 했다. 그렇게 2년간 일했다.
지금 다시 하라 하면 엄두도 못 낼 고된 일이었다. 편히 잠을 자는 것도, 배불리 먹는 것도 사치였다. 숨 쉬고 살기 위해 최소한 자고 먹는 게 유일한 기쁨이었다. 가게에 앉아 닭을 잡고 손질할 때는 그나마 덜했는데 배달하러 다니면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무너졌다.
부모님이 떠나시던 날은 왜 그리 이른 추위가 찾아왔을까. 왜 부모님은 그날 연통을 확인하지 않고 연탄에 불을 붙였을까.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깨어날 순 없었을까. 후회는 후회를 낳고 그때마다 아쉬움은 커졌다. 너무 이른 나이에 가장이 된 현실이 억울했다. 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도 한심했다.
물론 한탄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눈 뜨면 일해야 했고 늦은 밤 일과를 마치며 바로 쓰러져야 했다. 고된 일상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1종 운전면허증이 필요해졌다. 면허증 때문에 큰 위기가 올 것도 모르고 그 길을 향해 다가갔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5) 사고 낸 택시 기사 허위신고로 꼼짝없이 덫에 걸려
택시 기사로 취업, 안정 되어갈 무렵
사촌 형 제안으로 닭 유통 일 맡게 돼
새벽 배송하다 자전거 사고에 휘말려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20대 초반, 닭을 배달할 때 사용하던 트럭에 앉아 있다.
10대 중반부터 닭에 치여 살았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벌이도 변변치 않았는데 그마저도 동생들에게 보내고 나면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정비 자격증엔 실패했어도 운전면허증 시험은 가능할 것 같았다. 당시 운전면허증은 지금과 아주 달랐다. 특히 필기시험이 어려웠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된 일과가 끝나면 책상 앞에 앉았다. 시험은 한남동 면허시험장에서 봤고 다행히 한 번에 합격했다. 19살이던 1977년 1종 보통운전면허증을 받았다. 내 힘으로 뭔가를 이뤘다는 보람이 컸다. 이 면허증이 있으면 택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면허증을 딴 이듬해 택시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택시기사도 귀했던 시절이라 취업은 쉬웠다. 기사가 된 첫날 파란색 포니 택시를 끌고 나가 7000원을 벌었던 기억이 난다. 택시 일이 손에 익자 수입이 늘었다.
목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삶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그래도 저축도 조금씩 하게 됐다. 200만원을 모으면 한시택시(개인택시)를 살 수 있었다. 꿈이 생기니 일도 보람 있었다.
1년쯤 일했을 때였다. 사촌 형에게 연락이 왔다. 택시 기사 수입만큼 월급을 줄 테니 다시 닭 유통 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닭과 대체 무슨 인연인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사촌 형의 제안을 수락했다.
닭을 트럭에 싣고 서울과 경기 곳곳을 누볐다. 그러던 중 해외 취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대형 1종 면허도 취득한 뒤 대우건설 해외 파견 근무 시험과 신체검사까지 합격했다. 그 시절 해외 취업을 하고 돌아오면 수천만 원을 벌 수 있었다. 개인택시는 물론 동생들과 함께 지낼 전셋집도 마련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해 4월 20일로 기억한다. 새벽 배송을 하던 중 미아리고개를 지나 인수동에 있던 마지막 거래처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내 근처에서 사고가 났다. 삼양동 고갯길에서 좌회전하기 위해 기다리는데 중학생 둘이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다 내가 탄 트럭을 스친 뒤 옆에 있던 택시를 들이받고 나뒹굴었다.
내 차와 추돌한 건 아니었지만 학생들 상태가 궁금해 내리려 하자 옆에 있던 고참 직원이 그냥 가자고 보챘다. 그때 자리를 뜬 게 문제였다. 거래처에 닭을 내리고 출발하려는데 다친 중학생들을 싣고 달려온 택시기사가 내 옆에 급정거했다. “왜 뺑소니했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차에는 그 어떤 사고 흔적도 없었다. 택시는 달랐다. 그런데도 기사가 막무가내로 내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황당하게도 거짓 목격자까지 등장했다. 바로 동료 택시 기사였다. 그들은 입을 맞추고 거짓 진술서를 작성했다.
꼼짝없이 덫에 걸리고 말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너무 억울했지만 사고 조사는 내게 불리한 방향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국 서대문구치소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며칠 후면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었는데 이런 황당한 일을 겪고 나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분노가 눈을 가렸다. 무고로 구속되다니. 억울해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6) 분노로 가득 찼던 내게 용서의 길 보여주신 하나님
택시 기사 모함으로 구치소 갇히자
뜬눈으로 밤새우며 오직 복수 생각
무심코 펴든 성경 본 후 용서 결심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1981년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모함이었다. 나와 관계없던 일이 날 위협했다. 사고와 직접 관련이 있던 택시기사는 죄에서 벗어났다. 대우건설에선 출국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며 각종 서류를 보내오고 있었다. 검사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택시에 부딪혔던 중학생들이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나섰다. “트럭이 아니라 택시에 부딪혔다”고 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진술만 받아들여지면 나는 무죄였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사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이제 와서 증언을 바꾼다면 너희가 가해자가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발길을 돌렸다.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극단적 선택을 할까 싶다가도 날 죄인으로 만든 택시기사 일당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분노가 들끓어 잠도 제대로 청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합의하면 빨리 풀려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피해자 가족들과 합의를 한 것이었다. 뺑소니를 인정한 결과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의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이 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으로 교통사고 8개 항목 특례법에 저촉돼 죄인의 굴레를 쓰고 말았다. 고작 26살이었다. 1984년 5월 초 나는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자리였다. 2평 남짓한 좁은 교도소에서 6~7명이 칼잠을 잤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사고도 복기했다. 사실 너무나 가벼운 사고였다. 택시에 부딪힌 아이들의 부상도 가벼웠고 택시도 크게 망가지지 않았다. 이들이 그냥 합의했으면 원만히 끝났을 일이었다. 택시기사가 나에게 죄를 떠넘기며 일이 커졌다.
구치소의 시간은 느리게 갔다. 무료하던 어느 날 손바닥만한 파란색 책이 눈에 들어왔다. 기드온협회가 제작한 성경이었다. 무심코 성경을 폈는데 ‘억울할 때 읽으면 도움이 되는 구절’이라고 쓰인 문구가 유독 크게 보였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마태복음 6장 14~15절 말씀이었다.
용서라니. 분노로 가득 찼던 내게는 존재하지 않던 단어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찾아오셨다. 좁은 방, 억울함 속에서 이를 갈던 내게 찾아오신 예수는 따뜻했고 용서의 길을 보여주셨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
이 말씀을 읽던 날 밤 나는 그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날 처음으로 단잠을 청했다. 구치소에서의 두 달은 분노와 복수, 그리고 용서로 이어지며 날 다시 세우는 시간이었다. 법정에서도 “나의 혐의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판사는 내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그해 6월 풀려났다. 구치소를 나오며 용서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게 됐다. 악으로 선을 이긴다는 로마서 말씀은 삶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사업가로 향하는 좁은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7) 신앙 안에서 삶 안정… 믿음 좋은 아내에 끌려 결혼
중학교 친구 권유로 세례받고 교회 출석
거래처 지인 소개로 아내와 만남 가지다
처남과 동서들 도움으로 신혼살림 차려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1985년 4월 13일 김상숙씨와 서울 성북구 태극당예식장에서 결혼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지만 용서하니 삶 속의 작은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억울하게 재판을 받기 한 해 전이던 1983년 잠시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의 권유로 안암동 영암교회에 출석했다. 이듬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신앙 안에서 삶이 안정하면서 큰 기쁨도 찾아왔다. 아내와의 만남이다. 보문동에서 일하던 때였다. 하루는 거래처에 수금하러 갔는데 사장 조카가 자기 친구를 소개했다. 이름은 김상숙이었다. 상숙씨는 군산여상을 졸업한 뒤 섬유회사 재무담당 경리로 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앙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만남은 진지했다. 다방과 빵집, 극장 순례가 고작이던 데이트였지만 행복했다.
사실 보잘것없던 날 만나주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자격지심에 그만 만나면 좋겠다고까지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미련했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날 붙잡은 건 그녀였다. 결국 장인, 장모님이 될 어른들께 인사까지 드릴 수 있게 됐다. 어르신들은 서울분들로 6·25전쟁 때 군산까지 피란을 가서 8남매를 낳아 키우셨다. 내겐 과분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의 진심과 진가를 확인했다. 우여곡절도 많아 주변에서 만류하는 이들도 있었고 친구 중엔 간섭까지 했다.
어느 날 상숙씨가 “맞벌이하면서 살자”고 했다. 청혼이었다. 당장 결혼하고 싶었지만 돈이 문제였다. 1985년 1월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혼수 장만을 위해 가진 돈을 거의 다 쓴 뒤였다. 남동생 세곤이도 중앙대에 입학하면서 등록금을 내줬다. 빈털터리였던 내 처지를 알고 처남과 동서들이 십시일반 도움을 줬다. 그해 4월 13일 돈암동 태극당 예식장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했다. 신혼여행은 당시 인기 있던 불국사와 부곡온천으로 다녀왔다. 축의금 200만원으로 가게 근처 보문동 산동네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부엌도 없는 단칸방이었지만 행복했다. 아내가 먼저 출근하면 난 설거지부터 좁은 집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행복한 시절은 길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 원효로의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했을 때쯤이었다. 하루는 숭인동 여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세곤이가 집에 사흘째 안 들어오는데 걱정돼 죽겠어요.” 야간대학에 다니면서 낮엔 일하고 무척 성실했던 동생이었다. 큰 걱정은 되지 않았는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가출 신고를 하기 위해 파출소로 달려갔다. “대학에 다니는 제 동생이 며칠 동안 집에 오지 않아 가출 신고를 하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내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는데 혹시…”란 답이 허공을 갈랐다. 경찰관의 입에선 정확히 세곤이의 모습이 묘사되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동생이 발견된 곳은 낙산 절벽 아래였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연일 시위를 했지만 세곤인 아르바이트와 도서관, 강의실만 오갔다. 죽을 이유가 없었다.
동네를 다니며 알아보니 이웃에 살던 한 여중생이 동생을 짝사랑한 게 이유였다. 그 여중생이 동생을 일방적으로 따라다니자 학생 부모가 세곤이를 다그쳤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 일이 있은 후 절벽 아래에서 싸늘하게 식은 세곤이가 발견된 것이었다. 날로 그리움만 커질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8) 거래 중단 각오하고 주일성수 결심… 닭 업계 ‘대상’ 성장
닭 100마리로 가게 구석에서 사업 시작
거래처 늘어나 ‘보람유통’ 간판 달고
본격적으로 사업하며 신앙도 성장
주일 납품 중단했지만 매출 더 늘어
김재곤(왼쪽) 가마치통닭 대표가 지난 12일 가마치통닭 800호점 개점 행사에 가족과 함께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호사다마라는 말을 체감하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날 곤경에 빠트린 이들을 신앙 안에서 용서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결혼은 나를 성숙하게 했다. 가정을 꾸린 뒤 사업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동생의 황망한 죽음은 나를 다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죽음의 이유도 알 수 없는 처량한 죽음이 날 아프게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먼저 떠난 동생은 가슴에 묻었다.
1987년 당시 나는 용산에 있던 원일상회 직원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성실히 일했다. 일이 손에 익을수록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당장 점포를 빌릴 돈도 없었고 무엇보다 성공에 대한 보장이 없다 보니 섣부른 도전이 어려웠다.
결국 원일상회 한쪽 구석에서 사업을 시작해보자는 묘책을 냈다. 가게에도 양해를 구한 뒤 닭 100마리를 샀다. 내 사업 마중물과도 같았던 닭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거래처를 하나둘 늘려나갔다. 생닭 공급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나는 빠르게 자리 잡았다. 거래처는 서울 전역 식당으로 퍼져나갔다.
거래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용이 생명 같았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물량을 반드시 배달했다. 닭의 신선도가 중요했기 때문에 배달 시간을 줄이는 게 관건이었다. 잠시도 쉴 새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일하는 만큼 수입이 늘었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일을 하다 보니 유독 은평구에 거래처가 많아졌다. 회사를 거래처 근처로 옮기기로 했다. 점포를 임대해 ‘보람유통’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집도 근처로 이사했고 동네 교회에 등록도 마쳤다. 그 교회가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염광교회다. 이 교회에서 신앙이 성장했고 장로까지 됐다.
치킨이나 삼계탕을 파는 가게들은 그날 배달을 선호했다. 매일 필요한 분량의 닭을 정확히 배달해야 했다. 주일에도 쉴 수 없었던 이유였다. 닭은 불티나게 팔려나갔지만 바쁜 일상이 반복되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무엇보다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내도 걱정했다.
문제는 주일에 쉬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게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식당은 주일이 대목이다 보니 닭이 평소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토요일에 이틀치 닭을 배달할 수도 있지만 이건 전적으로 식당 냉장고에 달려 있었다. 대부분 식당이 이틀간 사용할 닭을 보관할 만큼 큰 냉장고를 갖고 있지 않았다. 거래처 중 반드시 주일에 닭을 납품받아야만 하는 곳은 관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매일 40~50군데 식당에 닭을 납품했는데 절반 가까이 떨어져 나갈 걸 각오했다. 우리 같은 업체가 식당과 거래를 틀 때 계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다 보니 평소에도 거래처들이 수시로 떨어졌다가 다시 생기길 반복했다. 그만큼 거래처 등락이 일상적이었다.
주일에 쉬기로 결정한 뒤 일일이 거래처를 돌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한두 군데 식당만 거래를 중단했을 뿐 나머지 식당들은 우리 결정을 존중해줬다. 그렇게 5년 사이 직원은 20명으로 늘었고 서울의 대상(大商) 중 하나로 성장해갔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9) 풍족에 취해 비틀거리다 아내 충고에 정신 차려
물질적 행복감으로 세상 유혹 빠져 휘청
기도하고 정신 차리라는 아내의 당부에
기도원 달려가 복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아내, 세 딸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학생 때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 고아가 됐다. 그때 우연히 만난 게 닭이었다. 어린 나이에 살아있는 닭을 잡고 손질해 거래처에 배달하고 수금하는 혹독한 인생 경험을 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돌고 돌아 또다시 닭이었다. 그리고 그 닭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늘 잘 될 때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서울 은평구에 보람유통 간판을 걸고 5년 남짓 지나자 나는 서울에서도 잘 알려진 ‘대상’이 됐다. 하루에 1만5000마리를 유통했다. 이 물량은 닭을 유통하는 개인사업자로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사이 세 명의 딸도 태어났다. 행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 보람이 컸던 시절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늘 비어있던 지갑이 가득 찼다는 점이다. 갑자기 돈이 생기니 주변의 허다한 유혹을 이기기 힘들었다. 술담배를 시작했고 노름에도 손을 댔다. 돈을 따거나 잃어도 별 감흥이 없었다. 갑자기 맛본 풍족함에 그만 취해버리고 말았다.
늘 자리를 지킨 건 아내였다. 어느 날 아내가 정색하고 따졌다. “당신 이렇게 살다가 어쩌려고 그래요. 다시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가려고 그래요? 주일 성수 하겠다고 납품 날짜까지 조정하더니 왜 교회에 소홀한 거예요?”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었다. 길을 잃은 내가 벼랑 아래로 미끄러지기 직전 붙잡은 건 아내였다. 아내는 잘못만 지적하지 않고 대안도 제시했다. 집에서 가까운 기도원을 소개해줬다. 기도하고 정신 차리라는 당부였다. 나는 이 끈을 놓치면 정말 나를 잃을 것만 같아 순종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불광동 임마누엘기도원이었다. 이곳에서 나의 죄를 만났다. 보름간 기도 생활로 삶이 변하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했다. 믿음이 약했던 나는 이곳에서 신앙이 조금은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죄에서 벗어났다.
그 시절 또 다른 기적을 체험했다. 첫째 딸 한나는 1986년 태어난 우리 집 첫 보물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생후 6개월쯤 심한 뇌전증 증세를 보였다. 병원에서는 뇌성마비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장애 판정도 그랬지만 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나는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록 우리 곁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 때였다. 바로 임마누엘기도원에 올랐던 시절이었다. 한나가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힘겹지만 걷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나는 지금까지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둘째 딸 우리는 고려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보스턴에 있는 한 일본계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다. 막내 청아는 내 사업을 도우며 사업을 배우고 있다. 위기에 빠진 나를 신앙으로 구해낸 아내에게 늘 감사할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10) 동업 실패로 쓴맛… 마니커 계열사 대표로 인생 황금기
동료 10명 1억씩 투자 ‘한강CM’ 설립
투자자들과 대표이사와의 갈등으로
퇴사하고 도계공장 인수해 재도전
또 동업 갈등, 마니커에 공장 넘겨
김재곤(가운데) 전 목우촌·마니커 도계공장 대표이사가 2008년 공장을 방문한 미국 수입업체 관계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많은 양의 닭을 유통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비즈니스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도계 업계에도 대형 기업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압도적 규모의 기업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대상들도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모든 거래처가 다 사라질 위기였다. 같은 일을 하며 가깝게 지내던 동료 10명과 머리를 맞댔다. 모두 내 생각과 같았다. 이렇게 있다가는 다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사장들은 하나같이 동업을 제안했다. 공동 출자해 닭을 대량으로 유통하는 회사를 세우는 데 뜻을 모았다. 그 결과 10명의 사장이 각각 1억원을 투자해 ‘한강CM’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나는 영업 담당 상무로 일하며 매출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모든 거래처 인맥을 동원해 납품하는 닭의 양을 지속해서 늘렸다.
하지만 사업이 잘되면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문제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뜻이 맞았던 동업자들과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삐걱거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내 할 일만 묵묵히 했다. 한 번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회사에 추가로 투자까지 했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투자자들과의 갈등뿐이었다. 이때도 용서와 화해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화합을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전권을 위임받았던 대표이사와의 갈등이 커지면서 더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초창기 동업자 중 나를 포함한 5명의 이사가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한강CM에서 나올 때가 딱 그랬다. 마무리도 깔끔하지 못했다. 내 몫의 지분을 매각한 대금을 받아야 했는데 대표는 무려 3년이나 질질 끌다가 뒤늦게 지급했다. 동업은 실패했지만 내 사업은 새로운 기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분 매각 대금을 종잣돈 삼아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이때 다시 동료 3명과 동업을 결정하고 충주에 있던 도계공장을 넘겨받았다. 이들과의 동업은 2년간 이어졌다. 닭고기 사업 유통의 모든 단계를 알고 있는 내가 사실상 모든 일을 했다. 문제는 또다시 동업이었다. 갈등이 조금씩 커질 때쯤 닭 대형유통사인 마니커 부회장이 도계공장을 팔라는 제안을 했다. 도계공장을 매각하고 이익금을 분배했다. 나는 마니커 계열사로 편입된 충주의 ‘목우촌과 마니커 도계공장’ 대표이사직을 수락했다.
이곳에서 2011년까지 6년을 일했다. 대표이사로서 이 공장에 지분 10%를 투자했고 훗날 12%까지 지분을 늘렸다. 돌아보면 그때가 황금기였다. 처음 18개월은 적자였지만 이 분야에서 쌓은 전문성을 최대한 살려 생산량과 거래처를 늘렸다.
이후 공장은 흑자로 전환됐다. 2008년 국내 최초로 미국으로 수출하는 삼계탕 작업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월급 받는 대표이사이면서 동시에 지분을 투자한 주주이다 보니 애착이 컸다. 일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하고 결실을 봤던 때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맘대로 되던가. 또 다른 먹구름이 몰려왔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11) 인생 끝자락에서 만난 기적… 새 희망 속 주님 손길 느껴
양계장 사업 좌초, 이자만 매달 1000만원
고난 속 마지막 30분 기도로 얻은 희망
“도계장 맡아 달라”는 친구의 전화 한통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한 기도원의 기도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목우촌과 마니커 충주공장 대표이사로 일하며 책임 경영 일선에서 구슬땀을 흘리던 시절 비보가 들려왔다. 회사 사주인 A회장이 서울 강남구의 한 빌라 사업에 투자했는데 그게 탈이 났다. 결국 이게 문제가 돼 회사 존립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부족한 자금을 긴급히 빌려 잘 해결되는 듯했지만 2011년 자금을 빌려줬던 회사로 매각되고 말았다. 새로운 사주는 내게 3년 동안 더 수고해 달라고 붙잡았지만 고사했다. 좋은 조건이었지만 회사가 휘청이는 과정에 새로운 비전이 생겼다.
사업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오랜 꿈이었다. 대출을 받아 충주에 1만평 부지를 샀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선교 후원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법적 절차도 마무리했다. 환경 평가를 받았고 민가에서도 1㎞ 이상 떨어져 있어 주민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환경이었다. 양계장 설계까지 마치고 착공을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다.
‘환경 파괴하는 양계장 반대한다’ ‘냄새 때문에 주민들 다 죽는다’ ‘청정 지역에 양계장이 웬 말이냐’ 같은 문구가 쓰인 플래카드가 동네 입구에 붙었다. 난데없이 주민들이 반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충주시장까지 찾아와 주민을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설명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난 상황에서 결국 주민 반대로 양계장 사업을 접었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입도 없는데 당장 대출이자 부담이 엄청났다.
나도 문제였다. 마음의 응어리가 사라지질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힘든 시기였다. 우울증이 왔을 정도였다. 강남금식기도원에 들어가 1주일 작정 기도를 하기로 했다. 기도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도하는데도 마음이 불편했다. 분노와 욕심을 갖고 하는 기도는 그렇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일주일이 지나 기도원을 내려가야 할 때가 됐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기도원을 나서기 전 불현듯 ‘30분만 더 기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기도굴로 들어갔다. 그 짧은 시간에 “다 내려놓아라” 하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마음이 편해졌지만 그때부터 1년은 연단의 시간이었다. 대출금이 문제였다. 땅이라도 팔리면 숨통이 트일 텐데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자로만 매달 1000만원씩 내야 했었으니 이만저만 고통이 아니었다.
노숙자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2012년 12월 말, 청계산 금식기도원에 있을 때였다. 훗날 국회의원이 된 오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혹시 김포에 있는 도계장 좀 맡아 줄 수 있을까.” 인생 막장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본 순간이었다. 나는 바로 수락하고 영업본부장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도계장 일은 잘 풀렸다. 그리고 충주의 부지까지 팔렸다. 7개월 후에는 친구와 공동대표가 됐다.
인생이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큰 회사 대표로 승승장구한 것도 나였고 양계업을 하려다 무너진 것도 나였다. 다시 기사회생에 선 것도 나였다. 모든 세월의 나를 지켜보시고 그때마다 필요한 복음 주신 건 주님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12) 친구 도계공장에 취업… 모든 역량 쏟아 공장 정상궤도로
가동률 떨어져 연간 수십억 적자인 공장
단기간에 도계 2만에서 7만 마리로 늘어
보너스로 받기로 한 닭 부산물도 대박
김재곤(오른쪽) 전 크레치코 대표가 2015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김포사랑 아이사랑’ ‘정읍사랑 아이사랑’ 캠페인 협약식을 가진 뒤 관계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를 나락에서 건져준 친구는 현재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하는 홍철호 정무수석이다.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올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친구가 ‘좋은 소식’을 전했을 때 나는 기도원에서 내려가면 택시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의 전화는 즉각적인 기도응답과도 같았다. 수입도 없이 달마다 거액의 은행이자를 내면서도 불평보다 묵묵히 기도했던 내게 준 하나님의 응답인 셈이었다.
당시 친구의 김포 공장은 가동률이 떨어져 연간 수십억원의 적자가 나고 있었다. 친구의 부탁은 하나였다. 가동률을 높여달라는 것이었다.
다시 취업한 뒤 나는 그동안 쌓은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하루 도계 2만 마리에서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7만 마리로 늘었다. 엄청난 성장세였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많은 사람이 몰려와 거래를 해줬다. 공장 가동률도 120%를 넘어섰다. 단기간에 공장을 정상궤도에 올린 덕분에 친구와 공동대표도 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갔을 당시 사명은 ‘플러스푸드’였다. 사세가 커지면서 이미지 쇄신이 필요해 ‘크레치코’로 사명을 변경했다. 일을 시작하고 8개월이 지나면서 인센티브도 받을 수 있었다. 입사할 때 닭의 부산물을 보너스로 받기로 별도 계약했었다. 보너스를 받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부산물 대박’이 터졌다.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닭의 부산물은 근위(모래집)과 닭발 등이었다. 이 시기에 닭발이 인기를 끌면서 결과적으로 보너스 금액이 예상했던 것보다 다섯 배 이상 커졌다. 큰 행운이었다.
내가 닭의 부산물을 보너스로 받기로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모두 내 수익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큰 수익을 다른 임원들과 나누기로 했다. 수입도 없이 이자로만 달마다 1000만원씩 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나누는 삶에 대한 소신이었다. 이 소신을 실천하기로 한 것이었다. 회사가 급성장하던 때 임원들과 보너스 수익까지 나누자 회사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다. 모두 신이 나서 일하던 때였다.
매일 처리해야 하는 물량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공장도 좁아졌다. 경영진은 공장 확장 준비에 돌입했다. 그 시기 우연치 않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홍철호 대표가 2014년 4월 뜻하지 않게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당선 뒤 친구는 사업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이 사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거래처 미수금을 모두 떠 안는 조건으로 2016년부터 회사를 맡았다.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크레치코에서의 훈련은 훗날 비즈니스를 키워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가마치통닭’ 프랜차이즈 비즈니스로 향하는 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이 기간의 훈련이 없었다면 지금의 비즈니스를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무엇보다 내 인생의 막장에서 시작한 일이었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숙인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 친구의 제안이 없었다면 난 재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돈 뒤에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3년의 훈련과 이에 앞선 극한의 고난은 내게 광야 40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고난을 통해 성숙했고 성장했다. 모든 게 훗날 프랜차이즈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13) 프랜차이즈 사업 시작 첫해에만 100호 가맹점 달성
비즈니스 통해 ‘여호와 이레’ 역사 체험
‘옛날 통닭’에서 ‘가마치 통닭’까지 1년
사육-도계-유통까지 원스톱 시스템 구축
김재곤(왼쪽 네 번째) 가마치통닭 대표가 가맹점 300호점 오픈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크레치코에서의 3년을 생각해 본다. 이 기간은 날 사업가로 완전히 변화시킨 시간이었다. 고난 속 희망과도 같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는 걸 믿는다. ‘여호와 이레’의 의미를 생각하며 훈련받고 단련 받았다.
크레치코에서의 소중한 경험과 이 기간 번 돈을 종잣돈 삼아 2016년 비즈니스다운 비즈니스의 닻을 올렸다. 내 투자금은 물론이고 지인들의 투자금과 신용보증기금까지 합쳐 20억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첫 회사 간판을 걸었다. 사명은 ‘티지와이’였다. 7명이 창업 멤버인데 양계는 위탁으로 하고 도계를 전문적으로 했다.
티지와이를 시작하고 6개월쯤 지나 늘 관심이 있던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도 시작했다. 브랜드 이름은 ‘옛날 통닭’이었다. 정겨운 느낌의 이름이었다. 경기도 산본에 ‘옛날통닭’ 1호점을 냈다. 2016년 6월이었다. 가맹점은 단기간에 300개까지 불붙듯 확장됐다.
사업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잘 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옛날 통닭의 순항을 보면서 사업의 속성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옛날 통닭이 빠르게 자리 잡으면서 매출이 정신없이 올라갔다. 옛날 통닭으로 ‘잘 되는 비즈니스’를 경험했다. 물론 거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옛날 통닭의 성공을 기반으로 또 다른 브랜드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 고민 끝에 브랜드명을 아예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지금의 ‘가마치통닭’이다. 옛날 통닭이라는 이름은 결과적으로 1년 남짓 사용한 셈이었다.
옛날 통닭의 성공 위에 선 가마치통닭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올 연말 800호점 돌파를 예상했는데 이 목표도 이미 이달 완수했다. 7명으로 시작한 회사도 이제 직원 240여명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가마치통닭을 시작한 첫해부터 충주를 중심으로 파격적으로 가맹점이 늘었다. 2017년 한 해만 충주 일대에 100개 매장이 생겼다.
큰 사랑을 받은 맛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유황을 먹여 사육해 특유의 닭 냄새가 없다는 게 특징이다.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맛도 장점이다. 가마치는 ‘누룽지’의 함경북도 방언이다. 치킨의 맛과 브랜드 명의 의미를 이은 것이었다.
지속해서 신제품을 출시하고 다양한 콤보 제품도 개발했다. 삼계탕 레토르트 식품도 출시했다. 공격적 경영으로 우리 제품을 대기업 여러 곳으로 납품했다. 닭고기는 대중 음식이다. 경기가 안 좋을 때 매출이 올라가는 게 이를 증명한다. 사육과 도계, 제품화까지 원 스톱 라인을 구축하면서 신선하면서도 위생적인 닭을 안정적으로 공급한 게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요즘도 ‘여호와 이레’의 은혜 아래 산다. 극한의 어려움을 겪으며 감사의 힘을 체험했다. 모두 주님께서 빚으시고 계획하시고 이끄셨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억울한 일 앞에 분노하지 않고 용서했으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의 제단을 쌓는다. 사업이 커지면서 수익을 선교에 사용하겠다는 젊을 때 약속을 다시 떠올렸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14)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7년 만에 지킨 하나님과의 약속
편치 않았던 삶, 날 지킨 건 복음
‘선교하는 기업가’ 꿈 실현하는 삶
고향에 교회 세우는 것부터 시작
매년 닭 10만 마리 나눔 ‘큰 보람’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자신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 세운 동산전원교회 전경.
돌아보면 편했던 시절이 많지 않았던 인생이었다. 14살 되던 해 부모님을 여의며 시작된 시련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반복했다. 그래도 감사한 건 고통의 때가 찾아오면 늘 기도했다는 점이다. 기도는 흔들리는 나를 굳게 세웠고 복음 안에 붙든 기둥이었다. 닭과 만남도 소중하다. 불행 중 만난 닭으로 흥했다. 닭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한다.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지는 몰라도 평탄하지 못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여정은 주님의 인도하심이 전부였다. 술과 담배, 도박을 끊고 복음에 붙들린 뒤로 나는 ‘선교하는 기업가’를 꿈꿨다. 티지와이를 이끄는 성경 말씀은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잠 11:3)이다. 이 말씀에 따른 사훈은 ‘정직과 성실’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인생이 번번이 바로 설 수 있었던 건 정직했고 성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건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건 나누는 삶이 아닐까. 나는 해마다 10만 마리의 닭을 전도용으로 기탁하고 있다. 벌써 8년간 해왔다. 농어촌교회를 비롯해 불우이웃과 장애인 기관 등에 닭을 보낸다.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과 나누는 기쁨이 적지 않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서도 작은 일을 하고 있다. 직원 중 자녀를 출산하는 가정에 200만원의 격려금을 전하고 있다. 큰돈은 아니지만 공동체가 새 생명의 탄생을 마음을 모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있다.
나눔의 시작은 고향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자 마음먹으면서 시작됐다. 내 고향은 전북 고창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 그곳에 교회를 세우기로 서원 기도를 한 게 2010년이었다. 그 시절 기도하면서 반복적으로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이 생겼다. 하루는 기도하던 중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고향 마을에 교회를 지으라”는 응답을 받았다. 나는 바로 약속했다. “주님, 제가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었다. 그 시절 바로 고향으로 가 길옆 2842㎡(860평) 크기의 땅을 샀다. 진입로를 위해 1669㎡(505평)도 별도로 마련했다. 하지만 실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려 7년이나 지난 뒤에야 결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난 지 50년 만의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세운 교회가 ‘동산전원교회’다. 고향 마을에는 50명의 주민이 있다. 이들은 선교 대상이다. 교회에는 고영학 목사님이 담임으로 부임하셨다.
나는 시편 23편을 좋아해 늘 암송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역경의 열매] 김재곤 (15·끝) “넘치도록 주신 복 이젠 나누며 살겠습니다”
하나님과 고객에 감사하는 경영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는 믿음
장애인 가정·선교사 지원하는 여생
기도로 전화위복 기회 맞이하길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고향 마을에 세운 동산전원교회 근처 저수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용서 위에 세워진 인생은 감사하는 삶으로 이어졌다. 가마치통닭을 소유한 회사인 ‘티지와이’는 ‘땡스 갓 앤 유(Thanks God & You)’의 첫 글자를 따 만든 조어다. 하나님과 고객에게 전하는 감사의 메시지를 회사 이름에 담았다. 하루를 열며 늘 하나님과 고객에게 감사기도를 하기 위해 이런 사명을 정했다. 이런 다짐은 늘 감사 경영을 향하는 길을 제시한다.
15살이 되기도 전 부모님을 잃고 가장이 된 건 비극이었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동력이기도 했다. 난데없는 교통사고에 연루되면서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신앙의 힘으로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하며 성숙했다. 요즘도 늘 잠언 24장 16절의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는 말씀을 되새긴다.
빈손으로 온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걸 얻었다. 이건 모두 내 것이 아니다. 나누는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다.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
은퇴 이후에 할 일도 나눔에 맞추고 있다. 장녀가 장애인이다 보니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장애가 있는 자녀는 온 가족이 24시간 돌봐야 한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은퇴하면 어떤 일보다 먼저 장애인 자녀를 돌보는 10가정을 선정해 생활비를 지원하고 싶다.
해외 선교사와 농어촌교회 목회자 지원은 이미 시작했다. 이 일도 앞으로 계속할 일이다. 현재 100명 가까운 사역자들을 돕고 있는데 더 많은 분을 지원하고 싶다.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선 집을 지어주고 싶다. 일거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사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들의 자녀 중 신학대에 진학할 때는 전액 장학금도 지원하려고 한다.
억울하게 구치소에 갇혀 있을 때 기드온협회의 성경을 읽으며 용서의 길을 찾았던 기억을 일생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기드온협회를 통해 성경과 만화 전도 책자를 보급하는 일도 관심이 크다. 성경은 죽을 위기에 놓인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아픔과 절망, 고통과 슬픔 속에 빠진 이들을 복음으로 건져내는 일이야말로 보람 있는 사역이 될 것이다.
사업가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주님, 이만큼 채워주시면 이런 봉사를 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종종 한다. 이런 서원 기도가 기복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크리스천 사업가들에겐 하나의 신앙적 목표가 되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돌아보니 이미 하나님은 내 기도를 넘치도록 채워주셨다. 전도서 말씀처럼 범사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은퇴 직후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선교와 봉사 현장을 다니며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고 싶다.
역경의열매를 시작하면서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내가 받은 은혜의 열매를 나누고 싶었다. 그 메시지가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사람도 복음 안에서 이만큼 살아냈다는 게 누군가에겐 위로와 용기가 되길 소망한다.
우리는 지금 매우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고난을 유익으로, 고통을 성숙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 게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어떤 어려움의 순간에도 기도로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어 가시길 기도한다. 주 안에서 성령 충만한 삶을 누리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