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시간
『하나님 뜻 앞에서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창세기 24:35-67(50), 265장
50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로부터 하나님께서 헤브론에서 이곳 하란의 나홀성까지 어떻게 자신을 인도하셨고 자신의 서원을 이루어 주셨는지를 들은 라반과 브두엘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24장 50절에서 동시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50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에서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로 번역되었지만 표준새번역에서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라반과 브두엘을 통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그분의 청지기들인 우리가 좋은 것이 따로 있고 나쁜 것이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좋은 일은 순종하고 그렇지 못한 일은 따르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에게 주의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메섹 직가라고 하는 거리 유다의 집에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안수하여라.”
아나니아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사울이 스테반 집사를 순교하는데 앞장섰고 지금 예수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하여 이곳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제 발로 그를 찾아가라고 하십니까?”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그래도 가야 한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의 성령께서 임하셨기에 아나니아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좋은 것, 싫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뛰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라반과 브두엘에게도 좋은 것, 싫은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뜻이 리브가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기꺼이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마리아와 요셉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위해 순종하였듯이
노아와 그의 가족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방주를 지었듯이 말입니다.
우리 가정이 이토록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위하여 쓰임받는 복된 가정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길 축원합니다.
삶의 적용:하나님 뜻 앞에 가부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마무리기도
좋으신 하나님! 마리아와 요셉처럼, 노아의 가족처럼, 라반과 브두가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복된 가정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