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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12
9월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연중 제2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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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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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UtA8VvAH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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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모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 전승을 통해서 개략적인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 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카오 출신 저희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님 가운데 고하퐁 수녀님이라고, 유명한 성경 학자 수녀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쓰신 책 제목이 참 특별합니다.
책 제목이 이렇습니다. ‘하느님 참 묘하셔라’ 수녀님께서는 당신의 글을 통해 우리 인간의 통상적인 사고방식이나 보편적인 논리를 늘 뛰어넘으시는 묘하신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왕실 가문이나 고관대작들, 대학자들이나 대사제들과 친하게 지내신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적 약자들, 이방인들, 가난한 사람들, 여인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셨음을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참 묘하십니다. 기를 쓰고 위를 향해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리십니다. 한사코 아래로 내려가려는 겸손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선택하시고 총애하시며 위로위로 높이 끌어올리십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복음서 안에서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성모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다 합쳐봐야 몇 장 안됩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낳으시고 양육하신 어머니의 행적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주로 예수님의 행적과 제자 공동체의 성장에 대해 촛점을 맞추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만큼 나자렛의 마리아는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사업이 아무런 차질없이 예정대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언제나 구세사의 무대 뒤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조력했던 결과가 복음서 상 지극히 부족한 마리아 관련 스토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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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 본성의 신분 상승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1G0IeHRI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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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전합니다. 보통은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심성 상 자녀는 남자가 낳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태어나게 하는 주체입니다. 하지만 유독 그리스도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십니다. 마리아가 낳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 마리아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알 수는 없으나 아브라함의 족보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 사가는 한 이스라엘 여인을 구원의 족보에 끼워놓습니다.
족보는 구원의 계보입니다. 그 사람에게서가 아니면 다윗의 후손이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가 아니면 이사악이 태어날 수 없고, 이사악에서가 아니면 야곱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마태오는 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서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수 없음을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에 끼일 수 있는 남자가 아님에도, 또 다윗의 후손임을 알 수가 없는데도 어떻게 그 족보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성모님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 성모님만이 아닌 다른 네 여인이 더 들어있습니다. 그들이 성모 마리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마르’입니다. 타마르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한 유다의 두 아들이 죽자 유다는 그녀를 쫓아내다시피 합니다. 그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집안의 씨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지나가던 시아버지인 유다의 씨를 받습니다. 그녀가 위대한 이유는 세상의 평가가 아닌 누구의 씨를 받느냐가 더 중요함을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남편 요셉으로부터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온 사람으로 취급된 적이 있습니다.
또 ‘라합’이라는 여인도 나옵니다. 라합은 예리코의 창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리고를 무너뜨리고 점령하였습니다. 라합은 비록 이스라엘 적국의 여자였지만 이스라엘의 씨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배신하는 일이었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구원되는 길이 바로 그 길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라합과 그의 가족이 이스라엘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모습도 성모 마리아의 상징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 세상 사람들의 씨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하늘의 씨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씨로 태어난 분이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러 오시는 분의 씨를 받았기 때문에 성모님은 이 세상에서 영혼이 칼이 찔리는 아픔을 겪으며 사셔야 했습니다.
그다음엔 ‘룻’이 있습니다. 룻은 남편을 여의고 이스라엘의 씨를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권고대로 라합의 아들인 보하즈의 밭에서 일하며 보하즈의 씨를 받습니다. 보하즈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룻을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룻은 마치 예수님이 계시지 않던 무덤에서 울고만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시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지만 구원 백성의 씨를 받기 위해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밭은 소명을 의미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소명에 끝까지 항구함으로써 하느님에게서 오는 아드님의 씨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다 보면 그분의 씨가 잉태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그녀도 역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우리야라는 남편이 있었지만, 다윗에게서 씨를 받았습니다. 다윗에게는 이것이 큰 죄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쨌건 그 덕분으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요셉이라는 남편이 있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씨를 받아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분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부산에 가고 싶어 하십니다. 가족이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부산에 내려가셔도 가족은 잘 보지 않으십니다. 사실 호적만 있는 가족이지 친어머니는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연세가 드시니까 당신의 진정한 핏줄을 찾고 싶으신 것입니다. 분명 연세로는 돌아가셨을 것이 당연하지만, 그냥 어머니가 사셨던 부산이 당신의 어머니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족보는 어쩌면 마지막 때에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핏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그 방법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씨를 받아야만 함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씨가 바로 주님의 뜻임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족보를 변화시키고 신분을 변화시켰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외도하거나 바람을 피우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씨가 어디서 오는지 알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씨란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들의 뜻이나, 이 세상에서 그 사람들에게 무언가 바라는 사람들의 뜻을 들어준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백성의 족보에 들 수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뜻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족보를 바꾸심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씨를 받는 여인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이 신분 상승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 분이셨습니다.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더 높은 신분을 가진 이의 씨를 받아야 하는데, 그 씨란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종이 되는 길만이 합당하지 않은 이방 여인들이 하느님 자녀의 족보에 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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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6,18-23: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교회가 성모님의 성탄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 즉 창세기의 원복음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하려는 그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시작이다. 마태오는 복음을 예수님의 족보(1,1-7)로 시작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 둘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합법성, 셋째, 구원 역사의 정점이며 종합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이 족보는 우선 우리나라의 족보가 장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것과도 다르지만, 당시의 유다이즘에서도 여인들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은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이다. 또 하나는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탄생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마태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네 여인들은 죄인들이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는 이 여인들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넷째로 이 여인들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 마리아의 경우도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건, 죄인이건, 또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떤 결함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주도로서 이루어진다. 즉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둘째, 예수의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요셉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가 출생하였다”(마태 1,16). 여기서 예수의 출생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 족보는 예수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로 제시하면서도,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요셉의 기능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더욱 중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서 동정으로 잉태되고 탄생된 사실을 명확히 한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점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에 그가 당황스러워하고 파혼까지도 생각하며 고민했던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 탄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로서(이사 7,14),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역시 작은 마리아로서 그리스도를 낳아 주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잘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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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대개 족보는 그 집안의 근본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집안을 드러내는 듯하나,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다섯 여인(타마르,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을 등장시킴으로써 꽤 복잡하고 심오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마태오 복음을 가리켜 ‘교회의 복음’이라고들 합니다. ‘교회’라는 용어를 유일하게 사용하는 복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합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특정 기준에 부합하는 이들만의 고결한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지언정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세상 기준으로는 어둡고 불결하다고 여긴 여인들이 족보에 등장한 것이지요. 더욱이 예수님마저 ‘처녀’의 몸을 통하여 탄생하셨다고 기술하고 있는 대목은 보란 듯 우리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혼인도 하지 않은 딸이 나가서 아이를 배어 들어오는 상황을 맞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고 갈라 놓아 아픔마저 느끼지 못하게 하는 처절한 호소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아무리 법과 질서를 지키고 윤리적으로 흠이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초대와 호소는 얼마간 제 삶을 흔들어 놓고 뒤집어 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혼란 속에서 당신의 믿음을 지켜 내신 분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기억과 존경은 삶의 익숙함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안도감 속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늘 새로운 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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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시간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29-30) 이 말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에는 ‘우발적으로’, 또는 ‘즉흥적으로’ 하시는 일은 하나도 없고, 또 하느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도 전혀 없다.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의지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다.”라는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일이 하느님께서 예상하지 못한 채로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생긴다면, 그래서 당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러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하느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프로그램’대로 진행되고, 인간은 로봇처럼 그 프로그램을 수행할 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를 짓는 일이 없겠지만 인간이 실천하는 선은 선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신앙생활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거부하면 차질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인간의 불순종이나 죄 때문에, 또는 마귀의 방해 때문에 하느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도,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즉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힘의 작용으로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모를 때가 많지만, 그래도 어떻든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인용한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미리 정하신 이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연히, 또는 갑자기 나타난 인물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시고 뽑으신 인물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고, 때가 되었을 때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셨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구원 역사의 주연급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떤 계획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떤 일에 쓰시려고 이 세상에 보내셨고, 당신이 정하신 때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또 아무 쓸모없이, 우연히 태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입니다. 또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어떤 이는 주춧돌의 역할을 하고, 어떤 이는 작은 벽돌의 역할을 하는데, 주춧돌만 중요하고 작은 벽돌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똑같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데, 단순히 그 이유만 있었다면ㅈ중간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생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연결하는 모든 이름을 다 기록하고, 또 특별한 사연이 있는 여자들의 이름까지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또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서 무시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각 개인은 ‘한처음’과 ‘종말’을 연결하는 긴 역사의 연결 고리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미리 정하신 때’에 세상에 보내시거나 부르시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시간표’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시간표를 보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3,32) 그런데 모른다는 것은 그것이 없다거나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시간표는 천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종말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때의 일을 보면,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난 일, 또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일, 예수님이 태어난 일 등이 모두 하느님의 시간표가 정말로 있고, 모든 일이 그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면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 그 일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지만, 언제 이루어지든지 간에, 하느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금’ 준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은(루카 1,26-27), 마리아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는데,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과 인사말 때문에 몹시 놀랐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잘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평소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리아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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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란치스코 성인은 두 번에 걸쳐 가슴이 뛴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아시시의 벌판에서 나환자를 만났을 때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나환자를 보듬어 주었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느낄 수 없었는데 나환자를 만나면서 가슴이 뛰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허물어져가는 성당에서 십자가를 보았을 때입니다. 성당의 이름이 다미아노 성당이었기에 다미아노의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프란치스코는 쓰러져가는 성당을 일으켜 세우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강한 느낌을 받았는지 모든 것을 팔아서 성당의 신부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프란치스코의 돈은 되돌려주고 성당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서를 설명해 주셨고,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식사하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있었을 때 가슴이 뛰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갔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움도 걱정도 없어졌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소경, 듣게 된 귀머거리, 깨끗해진 나병환자, 걷게 된 중풍병자도 가슴이 뛰었을 겁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용서 받았습니다. 역시 가슴이 뛰었을 겁니다.
산보 가는 길에 차에서 누가 저를 불렀습니다. 길을 물어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게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사제복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임신했는데 축복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마리아와 안드레아 부부 그리고 태어날 아기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묵주도 축성해 주었습니다. ‘사제입니까?’라는 질문이 저의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 신문을 제작하면서 사장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30년 가까이 사제로 살면서 어쩌면 사제라는 직분에 너무 익숙해서 소중함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가슴이 벅찰 것 같습니다. 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봉헌하는 미사도 가슴이 벅찰 것입니다. 오를 하루 가슴 뛰었던 순간을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 안나 성당이 있습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의 부모님입니다. 성당은 공명이 좋아서 성가를 부르면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순례를 가면 그곳에서 성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성당에는 어린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마리아의 탄생은 부모였던 요아킴과 안나에게는 가슴 뛰는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탄생은 그렇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탄생은 ‘임마누엘’입니다. 세상의 모든 탄생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기도인 성모찬송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을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주셨나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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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얼마나 좋을까>
마태오 1,1-16.18-23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얼마나 좋을까>
언제든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당신에게
고맙다는 작별 인사를
벗들에게 들으며
세상을 떠나는 날에
세상에 왔던 것을
축하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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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십자가와 함께 따라오는 선물>
+ 찬미예수님
신학교 개강을 한지 한 주가 지났습니다. 신학교는 대면 강의를 실시하고 있으니, 학교에 출퇴근을 한 지 한 주가 지난 셈입니다. 하루하루 수업들을 준비하고 본당 예비자 교리와 자모 교리 등을 녹화하며 한 주를 지내고 나니 솔직히 “망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한 학기를 어떻게 이렇게 살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러한 걱정이 기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실 것이고 저는 성실하게 제 할 일에 임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사실 마리아의 탄생에 관하여 공식적인 기록은 전해지는 바가 없지만 로마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신자들의 신앙을 토대로 이 날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축일과 복음을 연관시켜보면 다시 의아한 것이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오늘, 다소 뜬금없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야기를 복음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찬찬히 살펴보며 이것이 마리아의 탄생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점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난 뒤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혼인을 치르지 않았고 약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했음을 요셉이 알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에 비해 나이가 아주 많았고, 평소에 성실함과 의로움으로 마을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인간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약 열여섯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이 소문이 분명 삽시간에 퍼져나가게 될 것이 쉽게 예상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어린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으면 어쩌지?’ 온갖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잉태 사건은 요셉에게 있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천사를 만났다고 증언하지만 인간적으로 믿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평소 신심이 두터운 그녀이기에 믿어보려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혹시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 번 양보해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임으로 단순히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에 의해 제기될 아기의 출생에 대한 험담, 마리아에 대한 소문들을 견디어 내야하는 심리적인 고통. 이 모든 것을 앞으로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평범한 가정을 원하는 자신에게 왜 하필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파혼을 남몰래 결정하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이야기 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에 요셉은 천사의 명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 행동은 결코 단순한 응답이 아닙니다. 이는 결국 자신의 모든 두려움을 껴안고 세상을 위해 평범한 삶을 버리는 용기있는 행위이며, 나아가 충분히 예상되는 고통스러운 삶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굳건한 믿음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요셉의 순명은 우리 인간 모두의 운명을 구원으로 이끌어줄 것이며, 묵묵한 남편의 역할 안에서 마리아가 성실히 하느님의 외아들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인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적합한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의 삶에 있어서 요셉은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었으며 혼자 걸어갈 수 없는 길을 가능하게 하는 동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삶은 마리아의 전 생애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인류의 구원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삶에서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힘에 부치는 일들이 주어지곤 합니다. 베우자도 자식들도 돌봐야 하고, 손주 손녀도 돌봐야 하고, 며느리는 며느리 대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불가능한 역할을 부여받은 듯합니다.
가족관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 인간관계 안에서 오해와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버거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 받기도 합니다. 그러한 와중에 건강은 허락되지 않고 좋지 않은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니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할 때에 우리가 명심할 것은 마리아에게 요셉이 있었고 아기 예수님께 마리아가 있었듯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고통 받는 순간에도 그 십자가를 함께 짊어질 수 있도록 시몬을 보내셨고 아들의 고통에 신음하는 마리아에게는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예루살렘 여인들과 사도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십자가에는 언제나 이를 도와줄 하느님의 천사가 따라 붙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을 확신하며 오늘 하루 나 자신 또한 하느님의 도구로써 누군가의 벗이 되길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저 역시 하루하루 강의에 나서며 주님의 도움이 어떠한 방식으로 저와 함께 하시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다짐을 하는 저에게 매우 큰 힘이 됩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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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허인 베네딕도 신부님]
<구원의 신비>
교회전례 안에서 지상탄생축일을 지내는 분은 딱 세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탄신일 성탄절! 그리고 세례자 요한과 성모님의 탄생축일을 지냅니다.
다른 모든 성인의 축일은 천상탄일, 곧 순교자인 경우 순교일이거나 순교자가 아닌 경우도 대부분 돌아가신 날에 축일을 지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의 천상탄일에 지내면서 그분들의 지상에서의 삶을 기리고, 우리도 성인들을 본받을 것을 다짐하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니다.
반면에 지상탄생축일을 지내는 세 분! 그분들이 계심으로 해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세 분의 지상탄생축일을 지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가장 기쁜 소식인 구세주의 탄생, 우리가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세주 탄생을 기뻐하는 연장선에서, 구세주가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한 세례자 요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낳아주신 성모님의 탄신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탄신축일을 지내면서, 구세사 안에서 그분의 역할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묵상해[봅니다.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도록 자신을 바치신 분이 바로 성모님입니다.
이런 성모님의 탄생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바로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소명을 되새겨 봅니다. 이 세상에 구세주의 모습,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우리의 소명을 되새겨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당신홀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는 당신홀로 구원하시지 않고, 우리인간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신비를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이 신비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지만 당신홀로 구원하시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우리는 가만히 있고,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기도합니다. 자판기 같은 하느님을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고, 제대로 신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모델이신 성모님께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마음에 새겨둠으로써 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성모님에게서 우리는 신앙인의 참 모습을 봅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홀로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당신 홀로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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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상일 이냐시오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입니다. 이시간 하느님의 어머니 거룩한 동정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고 그분의 삶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어린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요아킴과 안나 성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셨고 16세가 되자 어른들의 뜻대로 같은 다윗가문의 청년인 목수 요셉을 남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녀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오직 순명으로 그 혼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큰 일을 시작하십니다. 바로 메시아의 어머니로 그녀를 선택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만삭이 되었을 때는 아우구스티노의 호적조사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베들레헴으로 내려갑니다.
추운 겨울날 방을 얻지 못해서 당신의 아이를 마굿간에서 낳게 됩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십니다. 또 몸도 제대로 풀지 못했을 때 헤로데의 추격을 피해서 멀리 이집트까지 피난을 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른 후 나자렛에 돌아와서는 어린 예수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스승이셨고, 가정을 보살피는 아내였고,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살아왔습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데로 하여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또 갈바리아산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하시며 같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로 주시고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제자들의 어머니이며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제자들이 불안에 떨때 마리아는 그들을 돌보았고 특별히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약속된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로 한평생 험난한 인생을 사셨던 마리아 그러나 당신의 아들을 잃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했던 마리아 그 여인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실 가장 위대한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성모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성모님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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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명섭 베드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제게 축하의 인사를 전해주시겠죠?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제 생일이 아니고요, 교회에서 성모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자주 기억하는 행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일이겠죠? 적어도 1년에 한번씩은 기억하니까요.
친한 친구들이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때 가끔 이런 노래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그 다음은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정말 왜 태어난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라면 분명 의미 없는 태어남은 아닐텐데.. 다가오는 생일엔 진지하게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을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미가 예언자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자 ,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주님의 힘을 입고, 그 주 하느님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
미가 예언자는 땅 끝까지 미칠 평화를 이룩할 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한 여인에게서 나실 것임을 말하고 있죠. 그 한 여인은 바로 마리아이며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한 여인에게서 탄생하시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을 빌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해서 성모님의 탄생으로 이제 인간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죠,
성모님의 탄생은 단순한 한 인간의 탄생이 아니며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보증하는 것이고,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마리아의 탄생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성모님의 탄생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세레자 요한의 탄생 축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앞길을 미리 준비하였듯이, 성모님도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한 하느님의 선택받은 도구였던 것이죠.
하지만 탄생 이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잉태하신 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성모님의 참된 믿음이 없었다면 어쩌면 오늘날 성모님의 탄신 축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방송을 듣는 애청자 여러분! 성모님의 탄신 축일을 지내는 우리이지만 단순히 태어남에 중심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님의 모범적인 삶에 우리는 더욱 더 관심 가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성모님의 신앙적 모법을 본받고자 하는 노력이 분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뜻을 하느님 안에서 이루려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탄생도 하느님 안에서 참된 가치를 들어내지 않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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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심리학자 마크 쉔은 말합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지면 불편함에 과민해진다.’ 이 말에 큰 공감이 되었습니다. 갑곶성지에 처음 왔을 때인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는 할 일이 너무 많고 불편한 것도 많았습니다.
제가 직접 하지 않으면 대신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일을 혼자서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6년 1월에 다시 갑곶성지에 왔습니다. 그동안 제 전임신부들이 많은 것을 해 놓았더군요. 직원도 많아서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 안에서 저도 편안함에 길들여졌었나 봅니다. 영성센터를 전담했던 신부님께서 올해 본당으로 발령받아 간 뒤에, 성지뿐 아니라 영성센터까지 담당하다 보니, 그리고 봉안당까지 운영하다 보니 힘들다는 생각만 가득해집니다. 분명히 예전보다 훨씬 더 편안한데 말입니다. 작은 흔들림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편안함에 길들여 있을 때였습니다. 편안함에 길들여 있을 때는 감사한 지도 모르고, 모든 것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 사람은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의 삶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참으로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는 절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불편함만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으면서부터 불편함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인 요셉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뻔하기도 했고, 결혼 전에 아기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산후조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에집트로 피난까지 가게 되십니다.
도대체 성모님의 삶 안에서 편안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불편함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믿음을 키워나가십니다. 우리 삶 안에 항상 편안함만 있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불편함이 있게 됩니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범을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불편함 안에서 커다란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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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이미’라는 제목의 최영미 시인의 시입니다. ‘이미’라는 단어로 표현한 시인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무심코 썼던 단어 하나에도 여러 가지 깊은 뜻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 각자는 어떨까요? ‘이미’ 많은 뜻을 간직하며 사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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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는 이들의 영적 족보>
-전통의 뿌리, 정체성-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5세기 말 성모 마리아 탄생 성당(성녀 안나의 집에 지었다고 함) 봉헌에서 유래합니다. 이 축일은 7세기에 콘스탄티노플과 로마로 확대되었으며, 15세기부터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은 팔일 축제와 더불어 대축일이 되었고 단식을 지키며 전야제를 지냈습니다. 이어 1955년 교황 비오 12세의 전례 개혁때 단순한 축제로 축소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모님 탄생 축일은 작년 12월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낸후 만9개월만에 맞이하는 축일입니다.
새삼 뿌리 깊은 전통의 가톨릭 교회임을 깨닫게 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가톨릭 교회 전통의 뿌리입니다. 이런 깊은 전통의 뿌리가 있어 정체성 뚜렷한 교회요 신자들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믿는 이들의 영적 족보-전통의 뿌리, 정체성-’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입당송 내용도, 본기도 내용도 은혜롭고 축일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하세.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그분이 낳으셨네.”
“주님, 복되신 동정녀께서 성자를 낳으시어 저희 구원이 시작되었으니, 동정녀 탄생 축일을 지내는 저희에게, 천상 은총의 선물을 내려 주시어, 길이 참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입당송, 본기도의 내용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초점은 성자 에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를 낳으신 뿌리와도 같은 성모님 탄생을 기립니다. 탄생 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모님 셋뿐입니다. 예수님 탄생에 앞서 하느님은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그 배경의 뿌리들을 마련했는지 깨닫습니다.
과거의 뿌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통의 뿌리를 잃으면 정체성의 위기요 현실의 어려움을 견뎌내기 힘듭니다. 믿는 이들의 오늘은 결코 단절된 하루가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이어진 영원 속의 하루임을 깨닫게 하는 구상 시인의 ‘오늘’이란 시입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관통한 ‘영원한 오늘’의 하루임을 깨닫게 하는 시입니다. 과거의 뿌리 없는 오늘은 없습니다. 전통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고 좋아야 뚜렷한 정체성에 좋은 꽃과 열매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1500년 수도 전통의 뿌리를 지닌 우리 분도 수도자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많이 강조하는 것 역시 전통의 뿌리입니다.
“사람들이 그 뿌리의 감각을 잃으면, 그의 정체성을 잃는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에게 참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속한 전통을 잘 돌보는 것이다. 그래야 열매도 좋다.”
참 좋은 전통의 뿌리에서 참 좋은 꽃과 열매로 표현되는 정체성입니다. 바로 오늘 성모님 탄생 축일, 우리는 제1독서 미카서와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그 깊은 뿌리를 다시 새롭게 확인합니다. 제1독서 미카 예언자가 아득한 그 옛날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합니다. 그리스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 줍니다.
“그의 뿌리는 아득한 시절로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을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탄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우리 믿는 이들의 영적 족보이기도 합니다. 완전히 끝난 족보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 역사를 통해 면면히 계속되고 있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영적 족보입니다.
영예롭게도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 영적 족보에 편입된 우리들이요 하여 가톨릭 신자로서 정체성 뚜렷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뿌리깊은 나무와 같이 깊고 튼튼한 전통의 뿌리를 지닌 우리 가톨릭 교회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관계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호관계속의 존재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봐도 참으로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치밀한 준비를 봅니다.
어느 누구도 쓸모 없다 버리지 않고 모두 각자의 자리에 배치하여 구원자 탄생의 배경과 뿌리로 삼습니다. 참으로 디테일이 강한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 성베네딕도 요셉수도원 족보의 역사를 봐도 디테일에 강한 이런 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 지혜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하느님 섭리의 손길이 참 오묘합니다, 마침내 참 의롭고 거룩한 부부, 순종과 겸손의 사람 성 마리아와 성 요셉이 그 역할을 다함으로 임마누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뤄집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어머니들인지! 오늘 성모님의 탄생 축일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탄생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배경의 뿌리 역할에 충실하심으로 참 좋은 아드님을 낳아 주신 성모님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영적 족보를, 우리의 근원적 뿌리인 주님을 새롭게 확인하고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뿌리가 되시겠다는 주님의 선언이자 약속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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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기홍보(Pr)시대>
현대를 자기피알 시대라고 합니다. 자기를 알려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이력을 과대 포장하고 심지어 거짓으로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는 법이고 마침내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으로 피알시대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째든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바라며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 견주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요셉은 그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태1,19)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리아를 위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되어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 인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으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고뇌와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 당황스러운 모습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드러내어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바보이지만 그는 역시 의로운 사람으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특권과 아이를 낳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마태1,24)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마태1,21) 요셉의 마음고생 못지않게 마리아의 마음도 고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까닭입니다.(루가1,45) 마침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 안에 항상 함께하시며 한 번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육화,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못 누릴 따름입니다.(차동엽) 그러므로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굳은 믿음과 온유함 속에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묵묵히 위엄과 사랑과 믿음 안에서 피할 것 피하고, 알릴 것을 알리는 지혜를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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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교회는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하며, 성경이 말하지 않는 마리아 탄생 일화 대신 예수님 잉태에 얽힌 후일담을 전합니다. 미사의 말씀은 기나긴 다윗 가문 족보 안에서 이어진 구원 역사가 예수님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 들려 주지요.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먼저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가문에서 탄생하실 구세주에 대해 미카 예언서의 한 구절을 들려 줍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예수님 족보의 요약인 셈입니다.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보잘것없는" 신분의 여인들을 통해 맥이 이어져 온 역사임이 오늘 마태복음 첫머리의 족보에서 드러나니까요.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다윗 가문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은 하나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이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양갓집 규수들의 조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 조상인 그녀들의 근본과 이력, 신원에 대해 포장하거나 덧칠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족보는 이스라엘 구원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 역사를 담고 있는 자취가 되기도 합니다. 세대를 거쳐 우리를 품어 온 태, 우리와 연결된 핏줄 역시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고, 그 덕에 지금 여기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마태 1,19)
약혼녀의 임신은 혼인을 기다리는 신랑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입니다. 배반한 여성에게 어떤 조처를 취해도 율법과 관습이 눈감아 주고 편들어 줄 처지일 겁니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 요셉은 마리아를 위해 물러나 주기로 합니다. 사랑과 겸손 위에 자라난 그의 "의로움"은 결국 순종의 열매로 완성될 것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복음사가는 예언서의 한 대목을 들어(이사 7,14 참조) 요셉의 결정을 숨죽여 바라보는 우리까지도 이해시키고자 합니다. 인간적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를 믿음으로 껴안아야 한다고 요셉과 함께 우리에게도 말을 건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대목에서 사건의 서술 안에만 등장하는 마리아나, 그 사건 앞에서 고뇌하는 요셉은 족보 속에 등장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박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입니다. 실제로 성왕 다윗도 자신에 대해 "나처럼 가난하고 천한 몸"(1사무 18,23 참조)이라 일컬었고, 후일 불리울 마니피캇에서 마리아 역시 "그분께서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루카 1,48 참조)다고 고백하지요. 주님 앞에 선 인간의 가난함과 비천함은 적나라한 실존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것이니까요.
사람은 태생이나 가문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곧, 자기 가문이나 집안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만큼 부질없고 민구스런 일도 없다는 뜻도 되지요. 이미 자기 집안의 역사를 보아서 알지만, 흠결 없이 완벽히 고귀한 족보는 희망사항이나 은폐의 증거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있게 한 집안 역사의 흠 많은 자취들에 대해서 솔직해도, 당당해도 괜찮습니다.
구세주를 일으킨 "보잘것없는" 집안의 족보가 말해주듯,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죄인인 바로 우리가 구원 역사의 한 줄기, 한 토막을 끗꿋이 연결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연민하고 사랑하며 겸손히 순종하는 우리를 통해 인류에게 이루실 주님의 구원이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가는 중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은 마리아와 함께, 구원의 신비와 우리 삶을 잇는 견고한 허브처럼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구원의 핏줄은 이렇게 믿는 우리 모두를 통해 오늘도 면면히 흘러간답니다. 마리아를 닮은 벗님은 복되십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되신 마리아의 탄신을 축하합니다. 그 구원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벗님의 탄생도 더불어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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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착하여 타인의 눈치만 보면 에너지 소모가 커서 쉽게 탈진한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서 오래 산다는 말은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일까요? 어쩐지 갸우뚱해지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사람은 평생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심리적인 힘, 육체적인 힘의 양이 정해져 있어서 그것을 다 쓰고 나면 죽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착하게만 대하는 사람들과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사람들은 에너지 소모량이 커서 쉽게 탈진하고 맙니다.
♣사람은 마음이 행복할 때 에너지 소비량이 가장 적어서 적은 양의 에너지로 큰일을 할 수가 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마음이 불행하면 그때부터 인생을 마치 자동차 공회전하듯이 살게 되고, 에너지 사용량도 엄청나게 늘어서 결국 자기 수명을 단축시키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착하게 살되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단서를 꼭 붙이고 싶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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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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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의 주보 축일입니다. 동시에 우리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주보 축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오늘 “성모성탄 대축일”로부터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범죄 하기 전부터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이처럼,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으며,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어머니의 그 은총과 축복의 충만함을 입고 되살아났기에, 오늘 어머니의 생신에 은총과 복을 주신 분께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어머니의 노래로 기뻐합니다.
“내 영혼이 내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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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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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1,23)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탄생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 탄생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를 통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곧 예수님의 뿌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에게서 끝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뿌리'에 대한 묵상을 해 봅니다.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원 뿌리'(제일원인.causa prima)는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온 뿌리, 곧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육신의 뿌리'와 영혼의 뿌리인 '신앙의 뿌리'입니다.
어제 밤에 어느 분이 보내주신 '찔레꽃' 노래를 들으면서 어머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 방에 걸려있는 어머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어머님의 사랑과 나의 부족함을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신 육신의 뿌리인 부모님을 떠올려 보면서, 부모님께 무조건 감사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뿌리인 신앙의 영적 부모님이신 대부님과 대모님들도 기억하고 전화 안부라도 꼭 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대부와 대모님들은 신앙의 영적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안부 전화나 문자라도 꼭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태풍 하이선이 곳곳에 많은 피해를 주고 떠나갔습니다. 큰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고통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를 힘차게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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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p_CojaRdu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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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 20)
이 가을
태풍속에서도
구절초가
피어난다.
모든 탄생의
현주소는
하느님이시다.
탄생은 탄생
그 자체로
뜨겁고
행복하다.
아프고 힘겹지만
생명의 시작은
고마운 탄생으로
시작된다.
하느님과 사람을
다시 묵상케 하는
시간이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 안에
마리아의 탄생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태어난다.
구원의
아름다운
첫걸음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탄생의 첫걸음이다.
모든 탄생은
하느님을
드러낸다.
보호자이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신다.
탄생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들에게는
신앙이며
섭리가 된다.
마리아의
탄생은
마침내 시작되는
희망의 기쁨이다.
희망의 기쁨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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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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