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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롬8:20]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 인간의 타락은 자기 자신만 허무(虛無)한 데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허무하게 만들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러한 허무를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전 1:1-11;2:11-23). 피조물은 스스로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았고 인간으 타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하는 가운데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명하셨다(창 3:17, 18).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굴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타게'(*)가 제 2단순 과거 수동태로서 '굴복을 당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was made subject, KJV). 한편 이러한 현상은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이 타락하여 그 지배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발생케 되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즉 만물의 대표자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당하는 허무를 그 인간에 종속된 피조물도 함께 당하게 된 것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피조물들은 각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에 순종한다. 피조물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부패해 갈지라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에프 헬피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들도 썩지 않는 영광을 함께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성 경: [롬8:21]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 41)라고 진술했다. 이와 같이 각 피조물이 각기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타락과 함께 그 영광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혹자는 본 구절의 '피조물'이 전우주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E. Brunner).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22절과 23절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바울의 진술대로(고전 15:40, 41) 각 피조물은 각기 고유한 영광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인간과 대립된 관계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허무하고 썩어질 것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때 전우주는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피조물들도 각기 자기의 영광된 위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바울은 피조물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관계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죄와 불의에서 하나님의 절대 자유, 즉 구원과 영생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 또한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본절의 '이르는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류데로데세타이'(*)가 미래 수동형인 점은 그와 같은 사실을 확증해 준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19절에서 22절까지가 피조물의 회복 자체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도가 자기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조물의 회복은 성도의 영광의 회복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완성될 때에 다음과 같은 사 11:6-9의 예언이 완성될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害)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태초의 에덴 동산의 회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앞으로 회복될 영광은 이러한 에덴 동산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날 것이다(P. Robertson).
성 경: [롬8:22]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피조물이...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 - 바울은 인간이 본래의 영광과 자유를 회복해야 할 필연성을 피조물이 그 일을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과 비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조물조차도 영광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본절에 깊이 암시되어 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범우주적인 요구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제까지'(*, 아크리 투 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이 저주와 고통을 받았으며, 이 저주와 고통이 주의 재림시까지 현재적으로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Murray, Meyer).
성 경: [롬8:23]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 성도 자신이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고전 15:20, 23). 다만 성도는 처음 익은 열매되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면 '처음 익은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세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령의 보증',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성도의 '출생 증명서'라는 견해와(Kasemann, James Dunn) (2)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누릴 완전한 후사에 대한 서약이라는 주장(Hodge), 그리고 (3) 중생의 체험을 한 성도가 몸의 부활을 하게 될 것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모든 선물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Philippi) 등이 그것이다. 세 가지 견해가 모두 일견 타당하나 마지막 견해가 더욱 구체적이고 지배적이다. 한편 '처음 익은 열매'(*, 아파르켄)를 받는 대상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사도 시대처럼 이적과 기사와 각양 은사를 체험한 깊은 신앙을 소유한 일부 성도에게 적용된다(Reiche, Erasmus, de Wette). (2)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맛본 초대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중생의 체험을 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Meuer, Calvin, Bengel, Keil). 이중에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 성도는 구원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거룩함을 입은 자이나 예수께서 만유(萬有)를 회복하실 때를 기다리는 자다(행 3:21).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성도의 몸 안에서 투쟁하고 있다. 다만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죄인을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몸의 구속'(球贖)을 기다리며 산다. 이렇게 될 때 성도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에 의해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성 경: [롬8:24]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성도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산다. 이 소망은 믿음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소망을 성도에게서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은 오직 믿음뿐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이나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한편 본절에 '구원을 얻었으매'로 번역된 헬라어 '에소데멘'(*)은 과거 시제로서 성도가 구원을 얻은 것이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생의 체험으로 죄의 종에서 해방된 성도는 이 땅에서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지만, 이미 성령의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권속(眷屬)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본 구절은 히 11:1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과 잘 조화된다. 성도는 믿음으로 자기가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한다. 비록 완전한 구원이 아직 실체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믿음으로 그 실체(實體)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실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장차 이루어질 소망을 믿고 바라게 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보이는 물질만이 실상이요 믿을 것'이라고 하는 유물론(唯物論)과 명백히 구별되는 것이다.
성 경: [롬8:25]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만일(*, 에이) - 바울이 이 접속사를 사용한 것은 성도가 마땅히 받았어야만 하는 것을 받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가 이미 받았으나 그 실체가 손에 잡힌 바 되듯이 완성될 때까지 소망 가운데 있어야 함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성도는 성령에 의해 양자의 보증(保證)과 구원의 보증을 동시에 얻었다. 그러나 아직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려야 한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었으나 아직 완전한 구원은 완성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이는 성도가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의 투쟁에서 비롯된 갈등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자유에 대한 기쁨과 감격 가운데서 살아야 할 것에 대한 권면이다. 더불어 바울은 성도가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이 '참음으로'(*, 디 휘포모네스)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위해 사는 성도의 삶에는 갖은 환난과 역경이 수반되므로 여기에는 오래 참는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하는 목적은 성도의 소망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대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데 있다.
성 경: [롬8:26]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이와 같이 - 이 접속사는 성도가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참음으로 기다림을 지칭한다(Black).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 성령은 성도를 양자로 보증해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도와 주신다. 성도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계시면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 16:13) 양자로서의 보증이 성도 안에서 확실히 성취되도록 도와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보혜사(保惠師)이시다(요 14:16, 26;16:7). 한편 본절의 '도우시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난틸람바네타이'(*)는 '쉬난틸람바노마이'(*)의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준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가운데 본절과, 마르다가 마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인 눅 10:40에만 나온다. 성령께서는 성도가 연약해 있을 때에 성도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곁에서 일으켜 세워주며 붙들어 주신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본 구절은 기도하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성도는 연약하기에 영적 힘을 공급해주는 통로인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도는 기도함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기도의 능력도, 기도할 내용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본 구절은 성령께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 즉 성령께서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실들을 미리 아시고 성도들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C.H. Dodd). 성도가 갈등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성령께서도 성도보다 더 심한 탄식으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도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며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성 경: [롬8:27]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 본 구절에서 바울은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성령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활동을 구별한다(Black).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구원 계시를 바탕으로 해서 성도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요 14:26;16:7-14).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뜻대로'에 해당되는 헬라어 '카타 데온'(*)은 직역하면 '하나님을 따라 '란 의미이다. 여기에는 개역성경처럼 '뜻'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성부 하나님이 구속 사역을 위해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그 강조점이 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별개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거대한 구원 계획에 따라 활동하신다.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도 성부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성 경: [롬8:28]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졌다는 인상이 본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성도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비롯된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를 동격(同格)으로 취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이에 대한 헬라어 본문은 '판타 쉬네르게이 에이스 아가돈'(*)으로 직역하면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이다. 즉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하여 협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본 구절이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지 않고 '만물'이 주어가 된 것은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 호 데오스)을 주어로 삽입시키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은 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도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원동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에 있다(27절).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적용은 31-39절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 경: [롬8:29]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 본 구절은 '예정'(豫定)의 목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사건이 (1)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변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2)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때부터 계속 변화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달라 두 견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두 입장에 대한 학자들의 분류는 헨드릭슨(Hendriksen)에 의해 잘 설명되었다. 즉 (1)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는 그레이다너스(Greijdanus), 렌스키(Lenski), 머레이(Murray), 그리고 리델보스(Ridderbos)와 같은 학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2)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는 칼빈(Calvin), 크랜필드(Cranfield), 로버트슨(Robertson), 그리고 잔(Zahn)과 같은 학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헨드릭슨(Hendriksen)은 두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두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성화(聖化)의 교리를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그의 형상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성도는 믿음의 눈으로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3:21에서 지금까지 진술한 바울의 논리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
성 경: [롬8:30]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미리 정하신 그들을...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본절은 29절과 함께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구원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이 믿음에 의해서 확정되며, 칭의와 영화도 믿음에 의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굳이 그 단어를 삽입시킬 필요가 없었다. 바울이 본절에서 구원의 과정을 자세히 나열한 것은 성도로 하여금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39절) 사랑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바울이 나열한 단어 하나하나에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가 암시되어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언급했던 것처럼 구원의 모든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한편 본절에 나오는 동사 '의롭다 하시고'와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각각 헬라어로 '에디카이오센'(*)과 '에돝사센'(*)인데 이들은 모두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롬8:31]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 일'은 직접적으로는 28-30절까지 언급된 것을 지칭하지만 보다 포괄적으로는 3:21부터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전체를 지칭한다. 다만 28-30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요약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두고 마귀와 변론할 때 다른 말보다도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 1:9)고 말했던 것을 유다가 언급한 적이 있다. 선악간(善惡間)의 모든 일을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시면 그 무엇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다.
성 경: [롬8:32]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 본 구절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했던 내용 즉,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창 22:12),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 22:16)을 연상시킨다. 바울은 본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실례로 들어 이신 칭의를 설명하였으나 거기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기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음에 있어서 이삭을 제물로 바친 기사는 아브라함의 절대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므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사도 바울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4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아마도 본서의 핵심 장(章)이라 할 수 있는 본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건에 그 이야기를 적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Gifford, Sanday, Dunn). 그렇다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에게 내어 주신 사실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기사와의 유비 관계에서 적절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성부 하나님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게 하셨다. 둘째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때 많은 고통과 고초가 따랐으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김없이 준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로 하여금 온갖 수난과 고초가 따르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집행과정을 겪도록 그대로 허용하셨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이상의 지극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대속물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 '만일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우리 모든 사람'은 26절에 기록된 '성령의 간구하심을 힘입은 자들'이요, 28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29, 30절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에 의해 '선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여기서 '모든 것'은 구원 자체도 될 수 있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 및 모든 피조물도 포함될 수 있다. 심지어 천사도 성도를 위하여 '부리는 영'으로서 활동하고 있다(히 1:14).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요 3:16) 성도를 위해 다른 무엇을 아끼겠는가 ! 그러므로 이것은 성도의 위치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성 경: [롬8:33]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 31절의 '대적하리요'와 '송사(訟事)하리요'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송사하리요'란 단어는 법정적(法定的)인 술어로서 곧이어 언급되는 '칭의'와 직접적으로 연관지어진다. 사단이 여호와 앞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송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거듭 책망하시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를 사하시고 아름다운 옷과 깨끗한 관을 씌우셨다(슥 3:1-5). 여호수아 자신이 깨끗했기에 송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기에 여호수아는 사단의 송사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본절에서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논지(論旨)이다.
성 경: [롬8:34]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누가 정죄하리요 -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되었기에 율법의 정죄에서도 해방되었다(1절). 비록 죄의 법에서 사로잡혀 마음이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못했을지라도 성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정죄를 당하지 않는 신분을 지니고 있음을 바울은 본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바울은 26절에서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성령은 성도의 연약한 삶을 위해 간구하시지만 성자 그리스도는 정죄받을 성도를 위해 변호하시고 탄원하신다. 비록 본절에 언급된 '간구하다'(*, 엔튕카네이)가 기도의 형식을 나타내지만, 본절에서 이 단어가 지닌 진정한 의미는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변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자신이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자기 백성된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 변호해 주신다.
성 경: [롬8:35]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본절은 바울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을 나열하고 있다(Black). 고후 11:23-27에서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보다 세부적으로 진술했으나 본절에서는 그 경험을 요약하여 대표적인 용어를 선택하여 진술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이 질문은 앞에서 언급했던 질문들(31, 33, 34절)을 포괄한다. 어느 누구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으며, 송사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고 본 구절의 질문은 39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 대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환난(*, 들마시스) - 이는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여섯 가지를 대표하며 '고난'(17, 18절)과 같은 표현이다.
곤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노코리아'(*)는 '행동이 제한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옥에 갇힌 경험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기근(*, 리모스) - 이는 민족이나 지역적인 차원의 기근일 수 있으나, 본절이 바울 자신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굶주리며 마시지 못한(고후 11:27) 경험을 나타내는 것같다.
적신(*, 귐노테스) - 이는 고후 11:27의 '헐벗었음'과 원어상 동일하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자기의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할 만큼(딤후 4:13) 항상 입을 것조차 변변치 않았다.
성 경: [롬8:36]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 본절은 시 44:22의 인용문이다. 혹자는 바울이 이 인용문을 사용한 것을 안티오커스(Antiochus)의 폭정하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비참한 고난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한다(Calin). 바울이 고후 4:11에서도 본절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 자신뿐 아니라 당시 성도들이 당하던 박해와 고난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안티오커스(Antiochus)의 폭정에 의한 고난만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본절은 바울이 35절에서 언급한 여러 환난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합리적이다.
성 경: [롬8:37]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이 표현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니코멘'(*)은 신약성경 중 오직 여기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를 혹자는 '우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얻고 있느니라'(We are winning an overwhelming victory)라고 풀이하기도 한다(Black). 그리고 렌스키(Lenski)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가장 혁혁(赫赫)한 승리를 지속적으로 성취하고 있다'(We keep achiving the most brilliant victory)로 해석한다. 바우어(Bauer)는 '휘페르니코멘'(*)이 '정복하다'란 동사의 강의형으로 '영광스러운 승리'와 연관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실제로 영역 성경 중에는 이 단어의 '정복'이라는 의미에 강조점을 두어 '우리는 정복자들 그 이상이다'(We are more than conquerors)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있다(KJV, RSV, NIV).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이'(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승리를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롬8:38]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바울은 본절과 39절 상반절에서 어떤 피조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과 여건도 성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방해할 수 없음을 진술하고 있다.
권세자들(*, 아르카이) - 이는 본래 바울 신학에서 천사의 한 부류에 속하지만(엡 1:21) 주로 사단의 세력하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을 지칭한다(엡 2:2;6:12). 그리고 특히 바울은 본절에서 '사망'과 '생명', '현재 일'과 '장래 일'과 같이 서로 대조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므로 본절의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인 천사와 대조되는 영, 곧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악한 영들을 의미한다.
능력(*, 뒤나메이스) - 이 단어에 대해 혹자는 '폭풍, 천둥과 번개, 그리고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으로 해석한다(Lenski). 혹자는 '능력'이 '천사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Calvin). 아무튼 본절에서 '능력'이 '천사'를 지칭하든지 '악의 세력'을 지칭하든지 '신적(神的)인 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 경: [롬8:39]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 앞에 언급된 아홉 가지 모두 '피조물'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된다. 피조물 중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구별할 것 없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언급하기 위해 바울은 아홉 가지의 단어를 나열했던 것이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본 구절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a절)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37절의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진술에 따라 나오게 되는 필연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견인(堅忍)뿐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근원이다. 성도는 7:24과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사실과(2절) 함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