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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泰)仁
26. 오월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을 떠나셨으나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도다. 그리하여 매우 염려하는 상제의 부친을 보고 유덕안(兪德安)은 대신하여 상제를 찾으려고 의관을 갖추고 객망리를 떠났도다. 그가 태인(泰仁) 강심리에 이르렀을 때 관군은 의병 두 사람을 잡고 덕안을 동학군으로 몰고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 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두 사람이 먼저 참형되고 덕안의 차례가 되었을 찰나에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지라. 관군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어 사방이 보이지 않아 덕안이 정신을 차리니 두 사람의 시체만이 짙은 어둠 속에 뒹굴어 있었도다. 무서움에 쫓겨 그는 먼 곳에서 비치는 등불을 향하여 지친 몸을 이끌어가니 날이 새기 시작하니라. 등불은 간데 온데 없는 산중이었도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그는 이 재생의 인도를 호랑이가 불빛을 비춰 준 것으로 믿었도다. 얼마 후 상제께서 객망리에 홀연히 돌아오셨도다. 상제께서 덕안을 보시고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도다” 말씀하며 위로하시니 그는 더욱 자신의 재생을 상제의 덕화라고 굳게 믿으며 재생의 감격을 되새기니라. 당시는 가릴 사이 없이 마구 죽이는 판국이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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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절에는 한자가 병기된 단어가 2개 나온다. 兪德安 과 泰仁 이다. 이 중 오늘은 泰仁 의 仁 과 관련된 글을 2가지만 소개하려 한다.
(참고1)
運合呪
元亨利貞天地之道 仁義禮智人神之道 乾坎艮巽坤离兌震八位之精 東西南北四位之精 周千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轉換之度 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天十之精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地十二之精 金木水火土五行之精 靑紅黃白黑五色之精 宮商角藢羽五音之精
(참고2)
1. 건(乾)〔문언전(文言傳)〕
文言曰 元者는 善之長也요 亨者는 嘉之會也요 利者는 義之和也요 貞者는 事之幹也니
〈문언전(文言傳)〉에 말하였다.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요,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이(利)는 의(義)에 화함이요, 정(貞)은 일의 근간이니,
【傳】 他卦는 彖象而已요 獨乾坤은 更設文言하여 以發明其[一作文] 義하니라 推乾之道하여 施於人事하니 元亨利貞乾之四德이 在人이면 則元者는 衆善之首也요 亨者는 嘉美之會也요 利者는 和合於義也요 貞者는 幹事之用也라.
다른 괘(卦)는 〈단전(彖傳)〉과 〈상전(象傳)〉 뿐이요, 오직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만이 〈문언전(文言傳)〉을 두어 그 뜻을 밝혔다. 건도(乾道)를 미루어 사람의 일에 시행하니, 건(乾)의 원(元)·형(亨)·이(利)·정(貞) 네 덕(德)이 사람에게 있으면, 원(元)은 여러 선(善)의 으뜸이요,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이(利)는 의(義)에 화합함이요, 정(貞)은 일을 주간(主幹)할 때의 쓰임이다.
【本義】 此篇은 申彖傳象傳之意하여 以盡乾坤二卦之蘊하니 而餘卦之說도 因可以例推云이라.
이 편은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의 뜻을 거듭 말하여 건(乾), 곤(坤) 두 괘(卦)의 깊은 뜻을 다하였으니, 다른 괘(卦)의 말도 따라서 이 예로 미루어 알 수 있다.
○ 元者는 生物之始니 天地之德이 莫先於此라 故로 於時爲春이요 於人則爲仁而衆善之長也며 亨者는 生物之通이니 物至於此하면 莫不嘉美라 故로 於時爲夏요 於人則爲禮而衆美之會也며 利者는 生物之遂니 物各得宜하여 不相妨害라 故로 於時爲秋요 於人則爲義而得其分之和며 貞者는 生物之成이니 實理具備하여 隨在各足이라 故로 於時爲冬이요 於人則爲智而爲衆事之幹이니 幹은 木之身而枝葉所依以立者也라.
○ 원(元)은 생물(生物)[물건을 낳음]의 시작이니, 천지(天地)의 덕(德)이 이보다 먼저함이 없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봄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仁)이 되어 모든 선(善)의 으뜸이 된다. 형(亨)은 생물(生物)의 통함이니, 물건이 이에 이르면 아름답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예(禮)가 되어 모든 아름다움의 모임이 된다. 이(利)는 생물(生物)의 이룸이니, 물건이 각기 마땅함을 얻어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義)가 되어 그 분수의 화함을 얻음이 된다. 정(貞)은 생물(生物)의 완성이니, 실리(實理)가 갖추어져서 있는 곳에 따라 각기 충족하다. 그러므로 때에 있어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智)가 되어 모든 일의 근간이 된다. 간(幹)은 나무의 몸통으로 가지와 잎이 의지하여 서는 것이다.
君子體仁이 足以長人이며
군자(君子)가 인(仁)을 체행함이 남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며,
【傳】 體法於乾之仁은 乃爲君長之道니 足以長人也라 體仁은 體元也니 比而效之를 謂之體라.
건(乾)의 인(仁)을 본받음은 바로 군장(君長)이 될 수 있는 도(道)이니, 족히 사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인(仁)을 체행함은 원(元)을 체행하는 것이니, 견주어 본받음을 체(體)라 한다.
嘉會足以合禮며,
모임을 아름답게 함이 족히 예(禮)에 합하며,
【傳】 得會通之嘉라야 乃合於禮也라 不合禮則非理니 豈得爲嘉리오 非理면 安有亨乎아.
회통(會通)의 아름다움을 얻어야 예(禮)에 합한다. 예(禮)에 합하지 않으면 이치가 아니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치가 아니면 어찌 형통함이 있겠는가.
利物이 足以和義며,
물건을 이롭게 함이 족히 의(義)에 조화되며,
【傳】 和於義라야 乃能利物이니 豈有不得其宜而能利物者乎아.
의(義)에 화합하여야 물건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어찌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고 물건을 이롭게 함이 있겠는가.
貞固足以幹事니,
정(貞)하여 견고함이 족히 일의 근간이 될 수 있으니,
【傳】 貞[一作正]固는 所以能幹事也라.
정고(貞固)함은 일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本義】 以仁爲體면 則无一物不在所愛之中이라 故로 足以長人이요 嘉其所會면 則无不合禮요 使物各得其所利면 則義无不和라 貞固者는 知正之所在而固守之니 所謂知而弗去者也라 故로 足以爲事之幹이라.
인(仁)으로써 체(體)를 삼으면 어느 한 물건도 사랑하는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으므로 족히 사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요, 그 모이는 바를 아름답게 하면 예(禮)에 합하지 않음이 없고, 물건이 그 이로운 바를 얻게 하면 의(義)로와서 화하지 않음이 없다. 정고(貞固)는 정도(正道)가 있는 곳을 알아 굳게 지키는 것이니, 이른바 알아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君子行此四德者라 故로 曰 乾元亨利貞이라.
군자(君子)는 이 사덕(四德)을 행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건(乾)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정(貞)하다 한 것이다.
【傳】 行此四德이라야 乃合於乾也라.
이 사덕(四德)을 행하여야 건도(乾道)에 합한다.
【本義】 非君子之至健이면 无以行此라 故로 曰乾元亨利貞이라 하니라.
군자(君子)의 지극히 굳셈이 아니면 이것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건(乾)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정(貞)하다 한 것이다.
○ 此는 第一節이니 申彖傳之意라 與春秋傳所載穆姜之言不異하니 疑古者已有此語어늘 穆姜稱之요 而夫子亦有取焉이라 故로 下文에 別以子曰로 表孔子之辭하니 蓋傳者欲以明此章之爲古語也라.
○ 이는 제1절(節)이니, 〈단전(彖傳)〉의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이 내용은 《춘추전(春秋傳)》에 실린 목강(穆姜)의 말과 다르지 않으니, 아마도 이미 옛날부터 있었던 이 말을 목강(穆姜)이 칭하였고 공자(孔子)도 취하신 듯하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 별도로 ‘자왈(子曰)’로써 공자(孔子)의 말씀임을 표시하였으니, 이를 전하는 이가 이 장(章)이 옛말임을 밝히고자 해서인 듯하다.
初九曰 潛龍勿用은 何謂也오 子曰 龍德而隱者也니 不易乎世하며 不成乎名하여 遯世无悶하며 不見是而无悶하여 樂則行之하고 憂則違之하여 確乎其不可拔이 潛龍也라.
초구(初九)에 말하기를 ‘잠겨 있는 용(龍)은 쓰지 말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용덕(龍德)을 가지고 은둔한 이이니, 세상에 따라 변치 않으며 명성을 이루려 하지 않아, 세상에 은둔하되 근심하지 않으며,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여도 고민하지 않아, 즐거운 세상이면 도(道)를 행하고 걱정스런 세상이면 떠나가서, 뜻이 확고하여 뽑을 수 없는 것이 잠겨있는 용(龍)이다.”
【傳】 自此以下는 言乾之用하니 用九之道也라 初九는 陽之微니 龍德之潛隱이니 乃聖賢之在側陋也라 守其道하여 不隨世而變하고 晦其行하여 不求知於時하여 自信自樂하여 見可而動하고 知難而避하여 其守堅不可奪이니 潛龍之德也라.
이 이하는 건(乾)의 쓰임을 말하였으니, 구(九)를 쓰는 방법이다. 초구(初九)는 양(陽)이 미미하니, 용덕(龍德)이 잠기고 숨은 것으로 성현(聖賢)이 미천할 때이다. 그 도(道)를 지켜 세상에 따라 변치 않으며, 그 행동을 감추어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아 스스로 믿고 스스로 즐거워하여 가능함을 보고 동하며 어려움을 알고 피하여, 그 지킴이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으니, 잠룡(潛龍)의 덕(德)이다.
【本義】 龍德은 聖人之德也니 在下故로 隱이라 易은 謂變其所守라 大抵乾卦六爻를 文言은 皆以聖人明之하니 有隱顯而无淺深也라.
용덕(龍德)은 성인(聖人)의 덕(德)인데, 아랫자리에 있으므로 숨은 것이다. 역(易)은 그 지키는 바를 변함이다. 대저 건괘(乾卦)의 육효(六爻)를 〈문언전(文言傳)〉은 모두 성인(聖人)으로 밝혔으니, 숨고 나타남은 있으나 덕(德)에 깊고 얕음은 없다.
九二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은 何謂也오 子曰 龍德而正中者也니 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여 閑邪存其誠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니 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라.
구이(九二)에 말하기를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용덕(龍德)으로 정중(正中)한 이이니, 평상시의 말을 믿게 하고 평상시의 행동을 삼가서, 사(邪)를 막고 성(誠)을 보존하며, 세상을 좋게 하고도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덕(德)이 넓어 교화하는 이이니, 역(易)에 이르기를 ‘현룡(見龍)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이는 군주의 덕(德)이다.”
【傳】 以龍德而處正中者也라 在卦之正中하니 爲得正中之義라 庸信庸謹은 造次必於是也라 旣處无過之地면 則唯在閑邪니 邪旣閑則誠存矣라 善世而不伐은 不有其善也요 德博而化는 正己而物正也니 皆大人之事니 雖非君位나 君之德也라.
용덕(龍德)으로써 정중(正中)에 처한 이이다. 괘(卦)의 가운데 있으니 정중(正中)을 얻은 뜻이 된다. 평상시의 말을 믿게 하고 평상시의 행실을 삼간다는 것은 잠시라도 이에 반드시 하는 것이다. 이미 과실이 없는 곳에 처했으면 오직 사(邪)를 막음에 있을 뿐이니, 이미 사(邪)를 막았으면 성(誠)이 보존된다. 세상을 좋게 하고도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선(善)을 소유하지 않음이요, 덕(德)이 넓어 교화시킨다는 것은 자기를 바르게 함에 사물이 바루어지는 것이다. 모두 대인(大人)의 일이니, 비록 군주의 지위는 아니나 군주의 덕(德)인 것이다.
【本義】 正中은 不潛而未躍之時也라 常言亦信하고 常行亦謹은 盛德之至也라 閑邪存其誠은 无斁亦保之意라 言君德也者는 釋大人之爲九二也라.
정중(正中)은 못에 잠기지도 않고 위로 뛰어오르지도 않은 때이다. 평상시의 말도 믿게 하고 평상시의 행동도 삼감은 성덕(盛德)이 지극한 것이다. 사(邪)를 막고 성(誠)을 보존한다는 것은 싫어함이 없을 때에도 보존한다는 뜻이다. 군덕(君德)이라고 말한 것은 대인(大人)이 구이(九二)가 됨을 해석한 것이다.
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는 何謂也오 子曰 君子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이 所以進德也요 修辭立其誠이 所以居業也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니 是故로 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故로 乾乾하여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구삼(九三)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君子)는 덕(德)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나니, 충(忠)·신(信)이 덕(德)을 진전시키는 것이요 말을 함에 그 성실함을 세움이 업(業)을 보유(保有)하는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 더불어 기미를 알 수 있고, 마칠 데를 알아 마치므로 더불어 의(義)를 보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쓰고 힘써 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
【傳】 三居下之上而君德已著하니 將何爲哉아 唯進德修業而已라 內積忠信은 所以進德也요 擇言篤志는 所以居業也라 知至至之는 致知也니 求知所至而[一後字] 後至之니 知之在先이라 故로 可與幾니 所謂始條理者知(智)之事也라 知終終之는 力行也니 旣知所終이면 則力進而終之니 守之在後라 故로 可與存義니 所謂終條理者聖之事也니 此는 學之始終也라 君子之學如是라 故로 知處上下之道而无驕憂하고 不懈而知懼하여 雖在危地而无咎也라.
삼(三)은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여 군주의 덕(德)이 이미 드러났으니, 장차 무슨 일을 하겠는가. 오직 진덕(進德)과 수업(修業)을 할 뿐이다. 안에 충신(忠信)을 쌓는 것이 진덕(進德)이요, 말을 가려 하고 뜻을 돈독히 하는 것이 거업(居業)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는 것은 치지(致知)인 바, 이를 곳을 알기를 구한 뒤에 이르니, 아는 것이 먼저 있다. 그러므로 더불어 기미를 안다고 한 것이니, 이른바 ‘조리(條理)를 시작함은 지(智)의 일’이라는 것이다.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것은 역행(力行)이니, 이미 마칠 곳을 알았으면 힘써 나아가 마쳐야 하니, 지키는 것은 뒤에 있다. 그러므로 더불어 의(義)를 보존하는 것이니, 이른바 ‘조리(條理)를 끝마침은 성(聖)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학문의 시작과 끝이다. 군자(君子)의 학문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위와 아래에 처하는 도리를 알아 교만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으며 두려워할 줄을 알아 비록 위태로운 자리에 있어도 허물이 없는 것이다.
【本義】 忠信은 主於心者니 无一念之不誠也요 修辭는 見於事者니 无一言之不實也라 雖有忠信之心이나 然非修辭立誠이면 則无以居之라 知至至之는 進德之事요 知終終之는 居業之事니 所以終日乾乾而夕猶惕若者는 以此故也라 可上可下하고 不驕不憂하니 所謂无咎也라.
충신(忠信)은 마음에 주장하는 것이니 한 생각이라도 성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말을 함은 일에 나타나는 것이니 한 마디 말이라도 성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비록 충신(忠信)의 마음이 있더라도 말을 함에 성실함을 세우지 않으면 머물지 못한다. 이를 데를 알아 이름은 진덕(進德)의 일이요, 마칠 데를 알아 마침은 거업(居業)의 일이니,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오히려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위로 오를 수도 있고 아래로 내려올 수도 있으며 교만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니, 이른바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九四曰 或躍在淵无咎는 何謂也오 子曰 上下无常이 非爲邪也며 進退无恒이 非離群也라 君子進德修業은 欲及時也니 故로 无咎니라.
구사(九四)에 말하기를 ‘혹 뛰어오르거나 연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오르고 내림에 일정함이 없는 것이 간사함이 되지 않으며, 나아가고 물러감에 항상함이 없는 것이 동류(同類)를 떠남이 아니다. 군자(君子)가 진덕(進德)하고 수업(修業)함은 때에 미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傳】 或躍或處하여 上下无常하고 或進或退하여 去就從宜는 非爲邪枉이요 非離群類니 進德修業은 欲及時耳라 時行時止하여 不可恒也라 故로 云或이라 深淵者는 龍之所安也니 在淵은 謂躍就所安이라 淵在深而言躍은 但取進就所安之義라 或은 疑辭니 隨時而未可必也라 君子之順時는 猶影之隨形이니 可離면 非道也라.
혹 뛰어오르고 혹 머물러 있어서 오르내림에 일정함이 없고, 혹 나아가고 혹 물러나 거취가 마땅함을 따름이 간사하거나 굽은 것이 아니요, 여러 동류(同類)와 떨어짐이 아니니, 진덕(進德)하고 수업(修業)함은 때에 미치고자 할 뿐이다. 때로 행하고 때로 멈추어 항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혹(或)이라고 말한 것이다. 깊은 못은 용이 편안히 있는 곳이니, 못에 있다는 것은 용(龍)이 뛰어 편안한 곳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못은 깊은 곳에 있는데 뛴다고 말함은 다만 편안한 곳으로 나아가는 뜻을 취한 것이다. 혹(或)은 의문사이니, 때에 따르고 반드시 함은 아니다. 군자(君子)가 때를 따름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本義】 內卦는 以德學言이요 外卦는 以時位言이라 進德修業은 九三備矣요 此則欲其及時而進也라.
내괘(內卦)는 덕(德)과 학문(學問)으로 말하고, 외괘(外卦)는 때와 지위로 말하였다. 진덕(進德), 수업(修業)은 구삼효(九三爻)에 구비하였고 이는 때에 미처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九五曰 飛龍在天利見大人은 何謂也오 子曰 同聲相應하며 同氣相求하여 水流濕하며 火就燥하며 雲從龍하며 風從虎라 聖人作而萬物覩하나니 本乎天者는 親上하고 本乎地者는 親下하나니 則各從其類也니라.
구오(九五)에 말하기를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하여,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나아가며, 구름은 용(龍)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성인(聖人)이 나옴에 만물(萬物)이 우러러본다. 하늘에 근본한 것은 위를 친히 하고 땅에 근본한 것은 아래를 친히 하니, 각기 그 유(類)를 따르는 것이다.”
【傳】 人之與聖人은 類也라 五以龍德升尊位하니 人之類莫不歸仰이어든 況同德乎아 上應於下하고 下從於上하니 同聲相應하고 同氣相求也라 流濕, 就燥, 從龍, 從虎는 皆以氣類라 故로 聖人作而萬物皆覩하니 上旣見下하고 下亦見上이라 物은 人也라 古語云人物物論이라 하니 謂人也라 易中에 利見大人은 其言則同이나 義則有異하니 如訟之利見大人은 謂宜見大德中正之人則其辨明이니 言在見前이요 乾之二五는 則聖人旣出에 上下相見하여 共成其事니 所利者見大人也니 言在見後라 本乎天者는 如日月星辰이요 本乎地者는 如蟲獸草木이라 陰陽이 各從其類하니 人物莫不然也라.
일반인과 성인(聖人)은 동류(同類)이다. 구오(九五)가 용덕(龍德)으로서 높은 지위에 오르니, 인류가 돌아가 우러르지 않음이 없거든 하물며 덕(德)이 같음에랴. 위는 아래에 응하고 아래는 위를 따르니, 같은 소리가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이 서로 구하는 것이다.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나아가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름은 모두 기(氣)가 같은 유(類)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나옴에 만물(萬物)이 모두 우러러보는 것이니, 윗사람이 이미 아랫사람을 만나보고 아랫사람 역시 윗사람을 만나보는 것이다. 물(物)은 사람이다. 옛말에 인물(人物)이라 하고 물론(物論)이라 하였는데, 사람을 말한다. 역(易)에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는 것은 그 말은 같으나 뜻은 서로 다르니, 예컨대 송괘(訟卦)의 ‘이견대인(利見大人)’은 대덕(大德)·중정(中正)의 사람을 만나보면 그 분변이 명백함을 말한 것으로 만나보기 전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요, 건괘(乾卦)의 구이(九二)와 구오(九五)는 성인(聖人)이 이미 나옴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만나서 함께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니, 이로운 것이 대인(大人)을 만나보는 것으로 만나본 뒤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늘에 근본한 것은 해와 달, 별과 같은 것들이요, 땅에 근본한 것은 벌레와 짐승, 초목과 같은 것들이다. 음(陰)과 양(陽)이 각기 그 유(類)를 따르니, 사람과 물건도 그렇지 않음이 없다.
【本義】 作은 起也요 物은 猶人也라 覩는 釋利見之意也라 本乎天者는 謂動物이요 本乎地者는 謂植物이라 物各從其類하니 聖人은 人類之首也라 故로 興起於上則人皆見之라.
작(作)은 흥기(興起)함이요, 물(物)은 인(人)과 같다. 도(覩)는 이견(利見)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하늘에 근본한 것은 동물을 이르고 땅에 근본한 것은 식물을 이른다. 물건이 각기 그 유(類)를 따르니, 성인(聖人)은 인류의 우두머리이므로 위에서 흥기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보는 것이다.
上九曰 亢龍有悔는 何謂也오 子曰 貴而无位하며 高而无民하며 賢人이 在下位而无輔라 是以動而有悔也니라.
상구(上九)에 말하기를 ‘끝까지 올라간 용(龍)이니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귀하나 지위가 없으며 높으나 백성이 없으며 현인(賢人)이 아랫자리에 있어서 도와주는 이가 없다. 이 때문에 동하면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傳】 九居上而不當尊位라 是以无民无輔하여 動則有悔也라.
구(九)가 상(上)에 거하여 높은 자리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백성이 없고 보필하는 이가 없어서 동하면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本義】 賢人在下位는 謂九五以下요 无輔는 以上九過高志滿하여 不來輔助之也라.
현인(賢人)이 아랫자리에 있다는 것은 구오(九五) 이하를 이르고, 보필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상구(上九)가 지나치게 높고 뜻이 자만하여 와서 도와주지 않음을 이른다.
○ 此는 第二節이니 申象傳之意하니라.
○ 이는 제2절(節)이니, 〈상전(象傳)〉의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潛龍勿用은 下也요.
잠룡(潛龍)은 쓰지 말라는 것은 아래에 있기 때문이요,
【傳】 此以下는 言乾之時라 勿用은 以在下하여 未可用也라.
이 이하는 건(乾)의 때를 말하였다. 쓰지 말라는 것은 아래에 있어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見龍在田은 時舍也요.
현룡(見龍)이 밭에 있다는 것은 때로 멈추라는 것이요.
【본의】 때가 버림이요.
【傳】 隨時而止也라.
때에 따라 멈추는 것이다.
【本義】 言未爲時用也라.
때에 쓰임이 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終日乾乾은 行事也요.
종일(終日)토록 힘쓰고 힘쓴다는 것은 일을 행함이요,
【傳】 進德修業也라.
덕(德)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는 것이다.
或躍在淵은 自試也요,
혹 뛰어오르거나 못에 있다는 것은 스스로 시험함이요,
【傳】 隨時自用也라.
때에 따라 스스로 쓰는 것이다.
【本義】 未遽有爲요 姑試其可라.
대번에 일을 할 수는 없고 우선 그 가함을 시험하는 것이다.
飛龍在天은 上治也요,
비룡(飛龍)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위의 다스림이요,
【본의】 위에서 다스림이요
【傳】 得位而行은 上之治也라.
지위를 얻어 행함은 위의 다스림이다.
【本義】 居上以治下라.
위에 거하여 아래를 다스리는 것이다.
亢龍有悔는 窮之災也요,
항룡(亢龍)이니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궁극함의 재앙이요,
【傳】 窮極而災至也라.
궁극하여 재앙이 이른 것이다.
乾元用九는 天下治也라.
건원(乾元)의 용구(用九)는 천하가 다스려짐이다.
【傳】 用九之道는 天與聖人同하니 得其用이면 則天下治也라.
구(九)를 쓰는 방법은 하늘과 성인(聖人)이 같으니, 그 씀을 얻으면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本義】 言乾元用九는 見與他卦不同이니 君道剛而能柔면 天下无不治矣리라.
건원(乾元)의 용구(用九)라고 말한 것은 다른 괘(卦)와 같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군주의 도(道)가 강하면서 능히 부드러우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此는 第三節이니 再申前意하니라.
○ 이는 제3절(節)이니, 앞의 뜻을 다시 밝힌 것이다.
潛龍勿用은 陽氣潛藏이요,
잠룡(潛龍)은 쓰지 말라는 것은 양(陽)의 기운이 잠기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요,
【傳】 此以下는 言乾之義라 方陽微潛藏之時하니 君子亦當晦隱이요 未可用也라.
이 이하는 건(乾)의 뜻을 말하였다. 양(陽)이 미약하여 잠기고 감추는 때를 당하였으니, 군자(君子) 역시 숨고 은둔하여야 하고 써서는 안 된다.
見龍在田은 天下文明이요,
현룡(見龍)이 밭에 있다는 것은 천하(天下)가 문명(文明)함이요,
【傳】 龍德이 見於地上이면 則天下見其文明之化也[一作而化之]라.
용덕(龍德)이 지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그 문명(文明)의 교화(敎化)를 입는다.
【本義】 雖不在上位나 然天下已被其化라.
비록 윗자리에 있지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 교화를 입는다.
終日乾乾은 與時偕行이요,
종일토록 힘쓰고 힘쓴다는 것은 때에 따라 함께 행하는 것이요,
【傳】 隨時而進也라.
때에 따라 나아가는 것이다.
【本義】 時當然也라.
때가 당연한 것이다.
或躍在淵은 乾道乃革이요,
혹 뛰어오르거나 못에 있다는 것은 건도(乾道)가 이에 변혁함이요,
【傳】 離下位而升上位하니 上下革矣라.
아랫자리를 떠나 윗자리로 오르니 상하가 변혁된다.
【本義】 離下而上하니 變革之時라.
아랫자리를 떠나 윗자리로 오르니, 변혁의 시기이다.
飛龍在天은 乃位乎天德이요,
비룡(飛龍)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마침내 천덕(天德)에 자리함이요,
【傳】 正位乎上하여 位當天德[一作德矣] 이라.
위에 자리를 바로하여 지위가 천덕(天德)에 당한 것이다.
【本義】 天德은 卽天位也니 蓋唯有是德이라야 乃宜居是位라 故로 以名之라.
천덕(天德)은 곧 천자의 자리이니, 오직 이 덕(德)이 있어야 이 지위에 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덕(天德)’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亢龍有悔는 與時偕極이요.
항룡(亢龍)이니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때와 함께 궁극함이요,
【傳】 時旣極則處時者亦極矣라.
때가 이미 궁극에 달하면 때에 처하는 이도 궁극하기 마련이다.
乾元用九는 乃見天則이라.
건원(乾元)의 용구(用九)는 이에 하늘의 법칙을 볼 수 있다.
【傳】 用九之道는 天之則也니 天之法則은 謂天道也라 或問乾之六爻가 皆聖人之事乎아 曰 盡其道者는 聖人也라 得失則吉凶存焉이니 豈特乾哉리오 諸卦皆然也니라.
구(九)를 쓰는 방법은 하늘의 법칙이니, 하늘의 법칙이란 천도(天道)를 이른다. 혹자가 묻기를 “건괘(乾卦)의 육효(六爻)가 모두 성인(聖人)의 일입니까?”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도리를 다하는 이는 성인(聖人)이다. 잘하고 잘못함은 길흉이 이에 달려있는 것이니, 어찌 유독 건괘(乾卦)만 그렇겠는가. 모든 괘(卦)가 다 그러하다.”
【本義】 剛而能柔는 天之法也라.
강하면서 능히 부드러움은 하늘의 법칙이다.
○ 此는 第四節이니 又申前意하니라.
○ 이는 제 4절(節)이니, 앞의 뜻을 다시 밝혔다.
乾元者는 始而亨者也요,
건원(乾元)은 시작하여 형통한 것이요,
【傳】 又反覆詳說하여 以盡其義라 旣始則必亨이니 不亨則息矣라.
또 반복하여 상세히 말해서 그 뜻을 다하였다. 이미 시작하면 반드시 형통하니, 형통하지 못하면 종식되고 만다.
【本義】 始則必亨은 理勢然也라.
시작하면 반드시 형통함은 이치와 형세에 그러한 것이다.
利貞者는 性情也라.
이(利)와 정(貞)은 성정(性情)이다.
【傳】 乾之性情也라 旣始而亨하니 非利貞이면 其能不息乎아.
건(乾)의 성정(性情)이다. 이미 시작하여 형통하니, 이(利)와 정(貞)이 아니면 종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本義】 收斂歸藏에 乃見性情之實이라.
수렴하고 돌아가 감춤에 성정(性情)의 실제를 볼 수 있다.
乾始能以美利利天下라 不言所利하니 大矣哉라.
건(乾)의 시작이 아름다운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하므로 굳이 이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로움이 크구나.
【傳】 乾始之道 能使庶類生成하여 天下蒙其美利로되 而不言所利者는 蓋无所不利하여 非可指名也라 故로 贊其利之大曰大矣哉라 하니라.
건시(乾始)의 도(道)가 여러 종류(種類)가 능히 생성하게 하여 천하가 그 아름다운 이로움을 입으나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는 것은 이롭지 않은 바가 없어서 지적하여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로움의 큼을 칭찬하여 ‘크구나’라고 말한 것이다.
【本義】 始者는 元而亨也요 利天下者는 利也요 不言所利者는 貞也라 或曰 坤利牝馬則言所利矣라 하니라.
시작한다는 것은 원(元)하고 형(亨)함이요, 천하를 이롭게 함은 이(利)이고, 이로운 바를 말하지 않음은 정(貞)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곤괘(坤卦)에 빈마(牝馬)면 이로운 바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哉라 乾乎여 剛健中正純粹精也요,
위대하다, 건(乾)이여!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함이 정(精)함이요,
【本義】 剛健中正이 純粹精也요,
【본의】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함이 순수(純粹)하여 정(精)하고
【本義】 剛은 以體言이요 健은 兼用言이요 中者는 其行无過不及이요 正者는 其立不偏이니 四者는 乾之德也라 純者는 不雜於陰柔요 粹者는 不雜於邪惡이니 蓋剛健中正之至極이요 而精者는 又純粹之至極也라 或疑乾剛无柔하니 不得言中正者라 하니 不然也라 天地之間에 本一氣之流行而有動靜爾니 以其流行之統體而言이면 則但謂之乾而无所不包矣요 以其動靜分之然後有陰陽剛柔之別也니라.
강(剛)은 체(體)로써 말한 것이요, 건(健)은 용(用)을 겸하여 말한 것이요, 중(中)은 그 행실이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함이 없는 것이요, 정(正)은 그 섬이 치우치지 않은 것이니, 네 가지는 건(乾)의 덕(德)이다. 순(純)은 음유(陰柔)에 섞이지 않음이요, 수(粹)는 사악(邪惡)에 섞이지 않음이니, 강건중정(剛健中正)함이 지극한 것이요, 정(精)은 또 순수함이 지극한 것이다. 혹 “건강(乾剛)하기만 하고 유(柔)가 없으니 중정(中正)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천지(天地)의 사이에는 본래 한 기운이 유행(流行)하는데 동(動)과 정(靜)이 있을 뿐이니, 유행(流行)의 통체(統體)를 가지고 말하면 다만 건(乾)이라고만 말하여도 포함되지 않음이 없고, 동(動)과 정(靜)으로 나눈 뒤에야 음(陰)과 양(陽), 강(剛)과 유(柔)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六爻發揮는 旁通情也요,
육효(六爻)로 발휘함은 정(情)에 곡진함이요,
【本義】 旁通은 猶言曲盡이라.
방통(旁通)은 곡진(曲盡)하다는 말과 같다.
時乘六龍하여 以御天也니 雲行雨施라 天下平也라.
때로 육룡(六龍)을 타고 하늘을 나니, 구름이 다니고 비가 내려 천하가 화평하다.
【傳】 大哉는 贊乾道之大也라 以剛健中正純粹六者로 形容乾道하니 精은 謂六者之精極이라 以六爻로 發揮旁通하여 盡其情義하고 乘六爻之時하여 以當天運이면 則天之功用著矣라 故로 見[一作曰] 雲行雨施하니 陰陽溥暢은 天下和平之道也라.
대재(大哉)는 건도(乾道)의 큼을 찬양한 것이다. 강(剛)·건(健)·중(中)·정(正)·순(純)·수(粹) 여섯 가지로 건도(乾道)를 형용하였으니, 정(精)은 이 여섯 가지가 정(精)함이 지극함을 말한 것이다. 육효(六爻)로써 발휘하고 널리 통하여 그 정의(情義)를 다하고 육효(六爻)의 때를 타 천운(天運)을 당하면 하늘의 공용(功用)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구름이 다니고 비가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이니, 음(陰)과 양(陽)이 크게 화창함은 천하가 화평한 도(道)이다.
【本義】 言聖人時乘六龍以御天이면 則如天之雲行雨施而天下平也라.
성인(聖人)이 때로 육룡(六龍)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은 하늘에 구름이 다니고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아 천하가 화평함을 말한 것이다.
○ 此는 第五節이니 復申首章之意하니라.
○ 이는 제5절(節)이니, 머릿 장(章)의 뜻을 다시 밝힌 것이다.
君子以成德爲行하나니 日可見之行也라 潛之爲言也는 隱而未見(현)하며 行而未成이라 是以君子弗用也하나니라.
군자(君子)는 덕(德)을 이룸을 행실로 삼으니, 날로 볼 수 있는 것이 행실이다. 잠(潛)이란 말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으며 행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가 쓰지 않는 것이다.
【본의】 군자(君子)는 이루어진 덕(德)을 행실로 삼으니,
【傳】 德之成에 其事可見者는 行也라 德成而後可施於用이니 初方潛隱未見하여 其行未成하니 未成이면 未著也라 是以君子弗用也라.
덕(德)이 이루어짐에 그 일을 볼 수 있는 것은 행실이다. 덕(德)이 이루어진 뒤에야 씀에 베풀 수 있는데, 초구(初九)는 잠기고 숨어서 나타나지 않아 그 행실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드러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가 쓰지 않는 것이다.
【本義】 成德은 已成之德也라 初九는 固成德이나 但其行未可見爾라.
성덕(成德)은 이미 이루어진 덕(德)이다. 초구(初九)는 진실로 이루어진 덕(德)이나 다만 그 행실이 아직 드러날 수 없을 뿐이다.
君子學以聚之하고 問以辨之하며 寬以居之하고 仁以行之하나니 易曰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라.
군자(君子)가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물어서 분변(分辨)하며 너그러움으로 거하고 인(仁)으로써 행하나니, 역(易)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龍)이 밭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고 하니, 이는 군자의 덕(德)인 것이다.
【傳】 聖人在下하여 雖已顯而未得位면 則進德修業而已니 學聚問辨은 進德也요 寬居仁行은 修業也라 君德已著면 利見大人而進以行之耳니 進居其位者는 舜禹也요 進行其道者는 伊傅也라.
성인(聖人)이 아랫자리에 있어서 비록 이미 드러났으나 군주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면 진덕(進德)하고 수업(修業)할 뿐이다.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分辨)함은 진덕(進德)이다. 너그러움으로 거하고 인(仁)으로 행함은 수업(修業)이다. 군주의 덕(德)이 이미 드러나면 대인(大人)을 만나보아 나아가서 도(道)를 행하는 것이 이로우니, 나아가 그 지위에 머무른 이는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이었고, 나아가 그 도(道)를 행한 이는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었다.
【本義】 蓋由四者하여 以成大人之德이라 再言君德은 以深明九二之爲大人也라.
네 가지로 말미암아 大人의 德을 이룬다. ‘군주의 德’이라고 두 번 말한 것은 九二가 大人이 됨을 깊이 밝힌 것이다.
九三은 重剛而不中하여 上不在天하며 下不在田이라 故로 乾乾하여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구삼(九三)은 거듭된 강(剛)이고 중(中)하지 못하여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힘쓰고 힘써서 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을 것이다.
【傳】 三은 重剛이니 剛之盛也라 過中而居下之上하여 上未至於天而下已離於田하니 危懼之地也라 因時順處하여 乾乾兢惕하여 以防危라 故로 雖危而不至於咎라 君子順時兢惕은 所以能泰也라.
구삼(九三)은 거듭된 강(剛)이니 강(剛)이 성(盛)한 것이다. 중(中)을 지나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여 위로는 아직 하늘에 이르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이미 밭에서 떠났으니, 위태롭고 두려운 자리이다. 때에 따라 순히 처하여 힘쓰고 힘쓰며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위험을 방비한다. 그러므로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에는 이르지 않는다. 군자(君子)가 때에 따라 조심하고 두려워함은 편안할 수 있는 소이(所以)이다.
【本義】 重剛은 謂陽爻陽位라.
중강(重剛)이라 함은 양효(陽爻)가 양위(陽位)에 있음을 이른다.
九四는 重剛而不中하여 上不在天하며 下不在田하며 中不在人이라 故로 或之하니 或之者는 疑之也니 故로 无咎니라.
구사(九四)는 거듭된 강(剛)이고 중(中)이 되지 못하여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지상에 있지 않고, 가운데로는 인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혹(或)이라고 하였으니, 혹(或)이란 의심하는 말이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傳】 四는 不在天, 不在田하고 而出人之上矣니 危地也라 疑者는 未決之辭니 處非可必也라 或進或退하여 唯所安耳니 所以无咎也라.
구사(九四)는 하늘에도 있지 않고 지상에도 있지 않으면서 인간의 위로 나왔으니, 위험한 자리이다. 의(疑)는 아직 결단하지 못한 말이니, 처함을 기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 나아가고 혹 물러가서 오직 편안한 대로 할 뿐이니,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本義】 九四는 非重剛이니 重字는 疑衍이라 在人은 謂三이요 或者는 隨時而未定也라.
구사(九四)는 중강(重剛)이 아니니, 중자(重字)는 의심컨대 연문(衍文)인 듯하다. 인간에 있다는 것은 삼(三)을 말함이요, 혹(或)이란 때에 따르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夫大人者는 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하여 先天而天弗違하며 後天而奉天時하나니 天且弗違온 而況於人乎며 況於鬼神乎여.
무릇 대인(大人)이란 천지(天地)와 그 덕(德)이 합하며, 일월(日月)과 그 밝음이 합하며, 사시(四時)와 그 질서가 합하며, 귀신(鬼神)과 그 길흉(吉凶)이 합하여, 하늘보다 먼저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않으며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天時)를 받드나니, 하늘도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며, 귀신에게 있어서랴.
【傳】 大人이 與天地日月四時鬼神合者는 合乎道也라 天地者는 道也요 鬼神者는 造化之跡也라 聖人이 先於天而天同之하고 後於天而能順天者는 合於道而已니 合於道면 則人與鬼神이 豈能違也리오.
대인(大人)이 천지(天地), 일월(日月), 사시(四時), 귀신(鬼神)과 더불어 합하는 것은 도(道)에 합하는 것이다. 천지(天地)는 도(道)이고 귀신(鬼神)은 조화의 자취다. 성인(聖人)이 하늘보다 먼저하여도 하늘이 이에 같이 하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하늘에 순응하는 것은 도(道)에 합할 뿐이니, 도(道)에 합하면 사람과 귀신이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本義】 大人은 卽釋爻辭所利見之大人也니 有是德而當其位라야 乃可以當之라 人與天地鬼神이 本无二理로되 特蔽於有我之私라 是以로 梏於形體而不能相通하나니 大人은 无私하여 以道爲體하니 曾何彼此先後之可言哉리오 先天不違는 謂意之所爲 默與道契요 後天奉天은 謂知理如是하여 奉而行之라 回紇이 謂郭子儀曰 卜者言此行에 當見一大人而還이라 하더니 其占이 蓋與此合이라 하니 若子儀者는 雖未及乎夫子之所論이나 然其至公无我하니 亦可謂當時之大人矣라.
대인(大人)은 효사(爻辭)에 ‘이견대인(利見大人)’의 대인(大人)을 해석한 것이니, 이 덕(德)이 있으면서 이런 지위에 당하여야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사람은 천지(天地), 귀신(鬼神)과는 본래 두 이치가 없으나 다만 유아(有我)의 사욕에 가리워질 뿐이다. 이 때문에 형체에 질곡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니, 대인(大人)은 사욕이 없어 도(道)로서 본체를 삼으니, 어찌 피차(彼此)와 선후(先後)를 말할 수 있겠는가. ‘선천불위(先天不違)’는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묵묵히 도(道)와 합함을 말한 것이고, ‘후천봉천(後天奉天)’은 이치가 이와 같음을 알아 받들어 행함을 말한다. 회흘(回紇)이 곽자의(郭子儀)를 두고 말하기를, “점치는 이가 이번 걸음에 한 대인(大人)을 만나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더니, 그 점(占)이 이와 부합했다.” 하였으니, 곽자의(郭子儀)와 같은 사람은 비록 공자(孔子)의 말씀에는 미치지 못하나 지극히 공정하고 사욕이 없었으니, 역시 당시의 대인(大人)이라 일컬을 수 있다.
亢之爲言也는 知進而不知退하며 知存而不知亡하며 知得而不知喪이니,
항(亢)이란 말은 나아감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보존함만 알고 망할 줄을 모르며, 얻음만 알고 잃을 줄을 모르는 것이니,
【本義】 所以動而有悔也라.
이 때문에 동(動)하면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
其唯聖人乎아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인저.
오직 성인(聖人)인가?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 이는 오직 성인(聖人)뿐일 것이다.
【傳】 極之甚이 爲亢이니 至於亢者는 不知進退存亡得喪之理也라 聖人則知而處之하여 皆不失其正이라 故로 不至於亢也라.
궁극함이 심한 것을 항(亢)이라 하니, 항극에 이르는 이는 진퇴(進退), 존망(存亡), 득상(得喪)의 이치를 알지 못해서이다. 성인(聖人)은 이를 알고 대처하여 모두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극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本義】 知其理勢如是而處之以道면 則不至於有悔矣니 固非計私以避害者也라 再言其唯聖人乎는 始若設問而卒自應之也라.
이치〔理〕와 형세〔勢〕가 이와 같음을 알고 도(道)로써 대처하면 뉘우침이 있음에 이르지 않는 것이니, 진실로 사사로움을 헤아려서 해(害)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기유성인호(其唯聖人乎)’라고 두 번 말한 것은 처음에는 가설하여 묻는 것처럼 하고, 끝에는 스스로 응답한 것이다.
○ 此는 第六節이니 復申第二第三第四節之意하니라.
○ 이는 제(第) 6절(節)이니 제(第) 2절(節), 제(第) 3절(節), 제(第) 4절(節)의 뜻을 거듭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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