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혁신은 `사람`
대체불가능한 정예인력
확보
불황에도 감원 안해…이직률 1.7%
직원 출신 최고경영진 가족기업 유지
◆유필화와 함께하는 히든챔피언 이야기 / ①시장지배력 막강한 獨트룸프◆
1923년 설립돼 약 1만명이 근무하는 트룸프(Trumpf)는 공작기계, 산업용 레이저 가공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회사다. 2011~2012회계연도 기준 약 23억3000만유로(약 3조46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한 트룸프의 포부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기술 그리고 조직면에서 업계를 선도`한다는 것이다. 트룸프 최고 경영진과 어느 컨설턴트와의 식사 자리에서였다. 한 참석자는
일본의 대표 회사로 도요타(Toyota), 독일을 대표하는 회사로 트룸프를 들었다.
다음 질문이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이
회사들의 제품이 시장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요타의 고객들은 다른 자동차를 살 것`이란 대답이 나왔다. 그러나
트룸프가 자취를 감추면 전 세계 금속가공 공장 대다수가 멈춰 설 것이다.
이처럼 트룸프 제품은 고객들에게 필수불가결하며 고객들은
트룸프에 종속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트룸프가 `을`이지만 실질적으론 `갑`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트룸프는 어떻게
이런 막강한 시장지배력을 갖게 됐을까. 베르톨트 라이빙어(Berthold Leibinger) 전 트룸프 회장은 자사의 성공요인으로 혁신과
세계화, 연속성을 꼽는다.
`혁신` 하면 흔히 극단적으로 새로운 제품이나 방식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제품은 무척
드물다. 라이빙어 전 회장은 자신의 업계에선 대략 15년에 1개꼴로 그런 제품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전형적인 혁신 과정은 사소한 개선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트룸프는 혁신의 관건은 예산이 아닌 연구ㆍ개발(R&D) 인력의 수준이라 믿는다. 트룸프는 대기업 평균을 웃도는
매출액의 약 7%를 R&D에 투입하고 있다.
트룸프가 대기업보다 훨씬 적은 예산과 인원으로 기술선도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집중과 깊이, 연속성이다. 그들의 혁신 비밀은 평생을 제품 향상에 매진하는 소수 정예 인력들인 것이다. 이러한 대가들을 육성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대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인재 확보야말로 트룸프의 경쟁력이다.
트룸프의 혁신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 건 1980년대 초반부터다. 트룸프는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함석판과 금속을 절단하는 기계 생산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레이저 기술이 밀려들어 왔다. 이는 트룸프에 매우 심각한 도전이자 위협이었다. 트룸프는 핵심역량을 유지하면서 자체
레이저를 개발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트룸프는 절단기 시장에서 지위를 유지함과 동시에 산업용 레이저 업계 최고가 됐다.
트룸프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이직률이 1.7%에 불과하다는 거다. 자진해서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불황에도
직원을 내보내지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듬해인 2009년 트룸프 매출액은 21억유로에서 13억유로로 38%나 줄었다.
그럼에도 트룸프는 감원 대신 직원 스스로 근무시간을 정하는 유연근무제를 택했다. 유연근무제와 동시에 사람을 중시 여기는 기업문화는
직원들의 높은 충성심과 장기근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트룸프는 2005년부터 어문학 박사인 니콜라 라이빙어-캄뮐러 회장이 경영하고
있다. 그는 오랜 기간 트룸프 회장직을 맡아온 베르톨트 라이빙어 전 회장의 딸이다. 라이빙어 전 회장은 트룸프의 직원으로 시작해 차츰 경영권을
인수했고 결국 그의 집안이 트룸프를 경영하고 있다. 최고경영진의 재임 기간이 긴 가족기업인 만큼 회사 경영진의 불연속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트룸프는 기존 사업과 거리가 먼 레이저 기술 분야에
도전해 의료기술 분야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사진은 수술용 무영등.
트룸프는 집중전략과 함께 다각화전략도 구사했다. 레이저 금속 절단 기계로 세계 시장을 제패했던 이 회사는
레이저 기술을 자사 기계 제작에만 쓰지 않고 신규 사업 분야에 도전했다. 현재 신규 분야의 매출 기여도는 약 26%에 달한다. 병원 수술대를
만들고, 수술실의 조명시설을 제작하는 등 의료기술 분야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기존 사업과 거리가 먼 제품으로 새로운 고객을 창출한 것이다.
트룸프는 여타 히든챔피언들과 다른 면도 보인다. 대다수의 히든챔피언들은 철저한 집중전략을 고수한다. 그러나 트룸프는 사업 다각화도
진행하고 있다. 풍력터빈 제작회사 에네르콘(Enercon) 등 일부 히든챔피언 기업들은 설비 제작 못지않게 서비스에도 힘을 기울이는 반면
트룸프는 하드웨어 생산과 판매에만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트룸프는 직원 출신의 경영자가 소유권을 인수해 창립자가 아닌 다른
가문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점도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