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란
것을 실감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사실 혁명적 수준의 기술적 변화를 우리는 지난 20세기 말부터 많이 겪어왔다. ‘인터넷의 혁명적 발전’과 ‘IT혁명’이란 말도
수없이 회자되었기에 이제 ‘혁명’이란 말이 식상해질 정도로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고, ‘산업혁명’이란 말도 ‘양치기 소년의 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이 마지막에 외친 경고는 사실이었던 것처럼 현재의 ‘혁명’이란 말은 진실이다.
우리는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잘 느끼지 못하지만, 중상주의 시절
이후 설립된 ‘주식회사’라는 법인의 질서가 사라지고, 소위 Platform이라는 것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또 인간의 노동과 규칙적이고 기초적인 생각은 로봇과 인공지능(AI)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와 함께 주식회사의 주식이라는, 경영과 분리되어 교환되던 소유권은 STO(Security Token Offering)라는 것에 의해
Cryptocurrency로 서서히 대체되고 있다. 사실
Cryptocurrency는 상품권, 포인트, 주식
등 여러 형태의 자산을 하나의 체계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 속에서 한국은 너무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선진국이 100여년 이상의 긴 시간에 걸쳐 이뤄낸 산업혁명을 단 30여년에
이뤄내면서 19세기 초부터 산업혁명에 의해 이뤄진 산업체계만을 소중한 기억으로 보듬고 있다.
나는 최근 한 사모펀드의 대표와 통화를 한 적 있다. 그에게 “요즘 어떤 분야에 투자하시나요?”하고 물으니 대답은 이랬다. “우리는 제조업체엔 투자 안해요. 이미 휴대폰 하청업체에 대한 투자를
멈췄고, 요새는 자동차 관련업체 투자를 멈췄어요. 뭐 조선은
말할 필요도 없구요.” 그의 말에 나도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요즘
제조업에는 투자할 만한 좋은 회사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투자기관들은 우리나라 제조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발전하는 제약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제약업에 대한 학습이 부족하고 Licensing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그저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는 회사의 말을 맹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제약사가 다 ‘신약을 개발한다’고 하였고, CRO(Contract Research Organization, 임상시험수탁기관)와 NRDO(No Research Development Only),
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CSO(Contract Sales Organization)로
분화되어 전문화 경쟁을 펼치고 있는 국제적 추세는 외면하고 있다. 해외 제약사처럼 구조조정은 하지 않고
그저 유행처럼 신약개발에 나서고 홍보에만 집중하고 있다.
진화의 역사를 보면 생존기준에 떨어지는 비효율적 능력을 가진 생물종은 도태되거나, 아니면
일부가 극적인 돌연변이적 변화를 통해 겨우 생존에 성공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제약기업은 해외업체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규제와 국경의 테두리 안에서 겨우 생존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회사가 보여주는 눈부신 성공은 정말 현실적 장애를 극복하고 이뤄낸 극적인 것이라 할 수
있고, 꾸준히 회사의 생존을 위해 애썼던 회사 임직원의 힘겨운 노력이 쌓인 덕이라고 본다.
그러나 워낙 낙후된 분야여서 과거 투자자에게 외면 받아왔던 제약사들은 갑작스레 너무나 버거운 관심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산업이 보이지 않고,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고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대한민국 경제에 제약사는 한 줄기 빛이었다. 조금 과장하면 투자할 만한 산업은
이제 ‘제약업’ 뿐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과도한 관심으로 인해 제약업계에 무리하게 쏠린 투자자금은 수많은 도덕적 해이를 낳았고, 힘든 과정에서도 성장을 위해 애썼던 제약업 종사자들의 마음을 왜곡시키게 했다.
신약개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신약의 부작용 그리고 시장성의 상실 등 갖가지 위험요인은 외면하고,
신약 성공에 따른 막대한 이익의 꿈을 현실처럼 강조하고, 그 꿈을 소위 ‘전환사채’라는 면죄부로 파는 종교적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제약업체의 재무담당자들은 ‘미래의 꿈’을 기반으로 한 기업가치 평가로 전환사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올바른 것 인양 생각하게 되는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낳았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건 전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미래의 꿈이 이뤄진다’면을 전제로 한 기대값의 기업가치 평가가 아니라, ‘그 희망찬 미래’라는 것의 가능성을 진정한 확률로 평가했을 때 얻어지는 진정한 기대값으로써 기업가치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약업체의 재무 담당자는 전가의 보도가 되다시피 한 전환사채라는 것에 기댄 자금조달이 아니라, 개발위험을 고려한 여러 방향의 자금조달을 신경 써야한다. 당장의
투자금을 구하는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그 쉬운 길이 자칫 회사의 명운을 가를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개발의 위험성이 현실로 드러났을 때 전환사채라는 전가의 보도는 오히려 회사의 숨통을 끊는 흉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만난 한 제약벤처기업(NRDO)의 전략담당자는 미래가치를
기반으로 한 전환사채 발행이 마치 새롭고 정의로운 자금조달인 것 마냥 생각했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오판이었다.
우리나라의 투자 관행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정말 큰 문제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돈을 가진 투자기관들의 지나친 관심으로 제약과 헬스케어기업에 과도한 투자자금이 몰렸고, 이
돈이 결국 도덕적 해이를 일으켰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투자기관의 투자자금은 미래에 투자수익을 얻어 노후자금 등 각종 생활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투자자들의 소중한 자산이다. 금융기관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다해 가려낸 좋은 투자안에 투자해야 하지만,
대개는 남들이 투자하는 트렌드대로 투자한다. 그렇게 해서 윗사람에게 변명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거나, 아니면 담보가 있는 것에 투자하여 손실을 피하고자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약업에 대한 투자는 전자에 해당한다.
면밀히 살펴보면 과도한 기업가치 평가라는 생각이 들어도 좋은 뉴스 소재와 ‘남들도 투자한다’는 면죄부가 더 크게 작용한다. 특히 벤처제약사의 경우 합리적 의심과
검증을 애써 외면하며 신화를 현실이라 믿고 투자하고 있으며, 제약업 담당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런 생태계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면 계속 그런 탑을 쌓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틀렸어도 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보면 그런 일은 없다. 사상누각은 결국 무너진다. 대한민국 국경이라는 분리된 장벽을 믿고 정부가 수많은 은행을 독려하여 기업에 과도한 대출을 해주며 이뤄낸 OECD 진입이라는 사상누각은 1997년 급격한 외환이동에 의해 촉발된
동아시아의 위기상황에서 결국 무너졌다. 계속 나아갈 것 같던 성장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건강한 견제와 도덕적 해이의 방지가 지금 당장은 쓴 약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향후 제약업계의
발전엔 좋은 토대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선 금융업계의 반성도 필요하다. 1960년 경제개발을 추진하며 만들었던 ‘은행대출’이라는 상품에 기댄 기업의 자금조달이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강제로
금융문호가 개방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이론은 알아도 실제 잘 적용되지 않았던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전환상환우선주(RCPS)와 파생상품 등 낯선 투자도구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7년까지 우리의 제조업은 경쟁력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서비스 산업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많은 전문가의
조언이 있었지만 우리는 외식산업 부문에만 비대하게 서비스산업을 구축했다.
2018년 말 현재, 진실로 우리의 제조업은 쇠락하고 있다. 마치 미국의 Rust Belt와 같다.
이제 금융업계가 익숙해져야 하는 분야는 제조업보다는 개발업에 가까운 제약업이다. 적용대상이
바뀌었으니 금융도구도 바꿔야한다. 언제나 적용되는 답이란 것은 세상에 없다. 예외는 없다. 금융업계는 바뀐 투자대상 산업을 고려하여 제대로 된
투자도구를 고민해야 하지만, 누구도 앞에 나서서 모난 돌이 되고 싶어하지 않으니 여전히 과거 패러다임의
전환사채와 전환상환우선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신약개발을 목적으로 한 제약사는, 복제약 중심의 제조전문 제약사로써 역사를 써온 제약사와
이름은 같아도 전혀 다른 기업이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같은 금융도구를 썼으니, 어쩌면 이것도 제약사의 도덕적 해이를 일으킨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2019년 경제전망은 어둡다. 각 경제연구소, 정부기관의
경제전망은 올해 성장이 둔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성장둔화의 원인은 많지만 성장을 이끌 주도산업이 사라진
것이 기저 요인이다. 제약업에 대한 수많은 꿈과 희망으로 과도한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2019년의 제약산업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떠받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제약산업의 진실한 현주소다.
제약산업에 대한 투자는 꾸준히 이뤄져야 하고 금융업계 및 각 경제 주체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이 진실’이라는 종교 그리고 ‘그 경향이 옳다’는 잘못된 믿음 하에 그 방안만으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제약기업의 도덕적 해이는 일부의 경향이라고 믿고 싶다.
대한민국 제약산업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전문가들과 투자기관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하루빨리
그들이 성과를 이뤄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인적자원만 많은 격한 경쟁 속의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도약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