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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같이 찍고싶다고 살며시 말하던 인도 소녀.
2011. 12. 2 . 아침 .공항에 나갈때 날씨가 약간 쌀쌀했었다.
힘께 같이 가기로 한 부부가 있었는데 아들이 제 차로 버스 정류장에 한시간이나 빨리 내려 놓고 간 바람에 추워서 기다릴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기다리기보다는 혼자라도 먼저 공항을 가는것이 우선이라 여겨 먼저 간다고 전화하고는 공항 버스를 탔고,한시간 먼저 인천공항착.
출발부터 일단 혼자로 나섰다.
혼자의 여행이나 다름없는 여행이라서 처음부터 마음을 잘 먹고 나섰고. 아무나 좋을 방짝이라고 생각을했고 , 여직 방짝때문에 성가셔본적이 없었기에 마음은 괸찮았지만 이번 여행은 도착해보니 거의가 3,40대의 여성들이었다.
오히려 내가 걸림돌이 될까봐 신경이 쓰일것 같았지만 뭐 그러려니하고 잘해보자고하면서 인도 델리 착.
사실 여행 일행들도 어차피 다들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들일뿐 안면도 없고 , 부부 두분만 잘 아는 분이라서 안도감도 있기는 했다.
일단 인도에 왔다는 기쁨. 그리도 와 보고싶었던 남인도. 몇년을 벼르고 벌렸지만 주부가 근 한달을 여행을 한다는것이 어이 그리 쉬운가?
계획은 있었어도 늘 주춤하고 선뜻 못 나섰던 이 여행길을 용감하게 계획을 수용하고 발을 딛기까지 그 사연들도 어찌 없겠는지.
어쨌든 이 꿈같은 땅에서 20여일을 머문다는 부푼마음으로 첫날부터 마음은 행복지수가 최고치? 였을거다.
한달전에 북인도쪽 시킴과 부탄을 다녀오고 바로 이 여행을 갈 루트가 생겼고 , 그래서 더 나서기가 미안해서 종종대다가 군인대장처럼 용감하게 내 인생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으니 휴가한번 얻는다치고 나서자했고 ,
너무 긴 시일이라고 머뭇거리던 남지기는 그래도 당신은 다녀올 자격이 있지.... 다둑여 보내는 따뜻함을 안고 나선 여행길이었으니까.
한달간의 양식들을 준비해두느라 이런저런 애를 다 쓰고 (조금이라도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 놓자고 ) 냉장고를 채우고 돌아선 그날이후 나는 내 혼자의 멋진 하루하루를 만끽하고 있었다.
특별히 뭐가 달라진건 없지만 , 일단 세끼니 밥을 하지 않아도 됬고, 빨래나 청소,가족들 요구들을 듣지않아도 됬고, 미리 세금이나 공과금등 한달을 앞서 다 정리해놓고 나갔기에 한달은 잊어버리고 살아도 큰 불편은 없으리라 여기고는 집에 대해서는 다 내려놓을수가 있었다.
여행은 또 다른 대지들을 볼 수있어서 좋고, 또 다른 문화나 종교등을 접하는것도 감사하고 놀랍지만 일단 異國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좋고 따뜻해서 이 모두가 어울려진 여행의 하루하루는 신비하고 기대감과 새로움 만남 그리고 보여지는것들에 대한 경이로움에 푹
빠져서 자신을 되돌아 볼수도 있고 나이외의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해 공감하고 존경하고 인정하는 사람다움을 갖게되는것이 넘 좋은것이다.
인도를 이번에 세번째 방문하는데 중부지역 북부지역 이번에는 남부지역을 오게 된것이 감사하고 꿈만 같았다.
우리 여행자들도 각기 개성들이 강해서 12명중 부부는 부부만, 모녀는 꼭 둘이서만 , 여행동지인 사진을 잘 찍는 멋진 두 자매같은 분들(이번 여행에서 가장 따뜻하게 나를 배려해주고 , 늘 혼자인 나를 간간히 드려다 보곤했던 사람들) 은 그녀들만 다녔다.
베낭여행의 고수인듯보여지는 분, 직장생활을하다가 나온 분, 결혼적령기를 놓친(?)여성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끼리 어울린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혼자서만 열심히 찿아다닌사람들까지 다 제 각각이었었다.
나름으로 직업들을 갖고 있었고 , 휴가를 얻어 죄다 용기있게 나온 여행자들이었고 6명만 주부였다.
각자 별명들을 부르기로 하고 서로 자기를 대변하는 별명들을 말하고는 간간히 그렇게들 부르기도 했다.
물론 길잡이앞에 한번 모여서 안내를 받으면 각자 다 헤어져서 그 일정들을 나름에 속한 사람들끼리 소화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특별히 함께 모인적도 별로 없었고 , 일정안에 만나거나 흩어지긴 했지만 글쎄 그렇게 투어여행처럼 진득하게 어떤 시간들을 공유하지는 못했었다. 처음으로 이번 여행자 중에 4번째 연장자가 되었고, 모녀팀에 어울리기도 , 그렇다고 부부팀에 어울리지도 못하고, 나머지는 훨씬 어린 사람들이라서 그쪽은 물론 내가 함께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불편해 할까봐 그러고 싶지않아서 거절했다.
그들끼리 어울리거나해서 돌아오는 날까지 혼자서만 일정을 거의 소화하고 시간을 보내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내게 쓸쓸함속에 깊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되어졌다.
왕따여행............ ㅎ 정말 혼자였다. 그래서 나를 더 바라볼수 있었지 않았을까?
사람은 여행을 와 보면 더 잘 드러난다고 한다. 씁쓸한 인간관계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관계들을 가까이보면서 마음이 아리고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도 가슴이 아팠고, 뭔가 다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을 접하는 것도 힘들고 견디기가 어려워서 속앓이도 했다.
스스로 이런 감정에 빠지지 말자고 혼자' 마인드컨츄럴'을 하면서 ' 내자유' 내 인생 최대의 이' 멋진 휴가'를 거기에 가두고싶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이 어둠을 비껴나려 애를 쓰기도 했다. 정말 시시하고 어이없는 감정이었고 내 여행의 낭비인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의 한계와 개인만이 지닌 이런 류의 아집들 (불완전한 모습들)을 바라보기가 비참해서 무시하고 넘어갔다.
이번 여행은 내 생애 최고의 긴 휴가였고 자유로움과 편안함안에서 만끽하고 싶다는 내 계획에 충실하게 잠기고 싶었으니까.
인도사람들은 몸이 뚱뚱한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간간히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몸이 마르고 그들이 입는 사리가 몸에 휘감기듯 잘도 어울리고 있었으니 보기도 좋았지만 날씨가 늘 따뜻한 남인도의 풍광은 여름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최고의 여행지였던것이다.
여기저기 일정들을 소화하면서 현지민들과의 만남들이 참 좋았다. 영어라야 단어몇개로 짜집기를하고 몸짓손짓 다하고서도 금새 알아듣고 다 소통되어지는 사람들. 여행자들에게 다감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은 순박하고 정이 많고 순수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모습이 놀라웠고 , 더듬어 말하는 내가 오히려 무안했으니까.
여기저기 문화유산이 많은 인도. 그것도 너무나 부러웠다. 가는곳마다 가득찬 사람들 , 그것도 부러웠고, 길거리에 노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노숙하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많은 나라 인도. 기차역에서 이를 닦고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거리음식들을 사먹기도 하는 사람들. 산더미같은 쓰레기가 온 나라 가득한 인도,상점에도 ,직장에도 온통 사람들이 가득하고 붕붕붕 뭔가 끊임없이 달리고 달려가는 도로의 차들, 오토바이들, 멋진 건물과 귀티나는 인도 상류층이 몰고가는 비싼 외국차들 속에서 그들은 함께 그렇게 잘도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베낭여행하는 내내 인도의 하층민들이 사용하는 기차나 버스를 탔고 릭샤는 거의 날마다 우리와 함께였었다.
사원앞에는 꽃들을 파는 가게가 성행하고 있었고 , 사람들은 꽃들을 힌두신들에게 또는 붓다앞에 정갈하게 내려놓는 모습이 너무나 많이볼수있는 인도.
자신의 지금 삶을 전생의 업으로 여기고 잘 순명하고 살아간다는 그들이라고 하네. 지금 이 업을 잘 견디고 잘 살아서 다음 생을 잘 맞을거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이들이라고 한다. 캬스트제도가 법으로 금해진지 오래지만 그들안에 녹아있는 이 제도의 뿌리는 남아있어서 최하층민이 스스로의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낸다는 이 귀한 숙명을 순명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는 이곳 인도.
상류층은 전생에 잘살아 지금의 삶을 누리기 때문에 존경하고 대접받아야한다는 의식이 이들에게 있어서 '나마스때'라는 이들의 인사말이 단순히 안녕이라는 의미 말고도 ' 지금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도 들은적이 있었다.
모든 살아있는것들이 神의 의미로 다가오는 이들의 사상은 어디를 가도 고개숙이고 읖하고 두손을 비비고 내려앉는 힌두인들.
생명체에 대한 공경이 대단했고 , 돌멩이에 헝겊을 두르고 색체를 바르고 음식과 꽃을 바치는 인도인들의 착한 심성은 어디서고 볼수도 만날수도 있었으니 작은것도 공경할줄 아는 그들의 모습안에서 편안함과 어떤 안도들을 늘 훔쳐볼수가 있었다.
수로를 하우스보트로 하루를 내내 운송하던 인도 아저씨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더 이상 태울수없을 만큼 새카만 얼굴로 앉아있는 내가 보기가 아플만큼 팔이 아프도록 종일을 대나무막대를 휘저어 우리를 끌어가고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그의 삶이겠지만 날마다 이렇게 일생을 살아가리라는 것이 나를 저리게 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묵직하게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성실했으니까. 지금 그 아저씨가 가장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삶을 다시 알게하고 있었으니까.
문득 남자의 길과 여자의 길을 생각해 보았고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의 진솔함에 경이로움을 느낀하루였으니까.
앨행중에 누군가가 저분에게 팁을 주자고 했는데 거부하는 일행이 있어 공동으로는 하지 못했고, 맘이 있는 사람만 슬그머니 손에 쥐어주고 돌아섰으니까. 처음으로 헤실하게 웃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면서 가슴이 짠했다.
밤기차에서 만난 한 남자는 가족모두가 휴가를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일주일정도를 한다고 했고 인디아은행에 다닌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끼니를 먹이기위해 기차밖에서 도시락을 사와서 시중들며 먹이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가 좋은지 ...마음 후덕한 그 아저씨가 다 낡은 샌달에 후줄한 옷차림을 해서 도저히 휴가갈 사람이 아닌것 같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선입견은 뭔지? 화목한 그 가정이 좋아보인다고 하자 화사하게 웃는 아내가 고운 사리를 입고 있는것도 보였다. 기차에서 자기 도시락을 덜어주고 여행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섞는 아저씨나 知的이면서도 은근하게 대화를 모색하는 젊은이들까지 누구하나 거부감없이 다정하고 유대감을 주는 것이었다.
릭샤를 타고 만난 기사아저씨의 배려나 여행자에게 친절한 그 모습. 길가에서 만난 짧은 대화를 주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웃음어린 말투까지 인도는 내게 그저 좋은나라 , 좋은 이웃, 맨날 만나던 사람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곁에 있는듯했고 , 거침없이 그들안으로 들어가도 괸찮을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슈퍼를 가거나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을때도 신문지에 싸주는 그들이 처음에는 낯설고 의아했으나 의례 그러려니 적응하게 만들던 인도.
눈이 어찌나 크고 얼굴이 예쁜지 누구하나 미운사람이 단 한명도 없던 인도여인들.
함피에서 만난 인도여인 . 무엇을 그리도 오래 보고있는지...
선이 굵은 인도 남자들을 보면서 한때 내가 좋아하던 '오마샤리프'를 닮은 사람들이구나 느끼기도 했었다.
피부가 새카맣던 그들을 보면서 인도에 한달동안 내내 맨발로 다니던 내 발등이 어찌나 새카맣던지 아! 나도 인도에 살면 이들처럼 새카맣게 되겠구나 느끼고는 그 까만 피부를 인정하게 되었었고. 저녁마다 달려드는 모기떼의 그 놀라운 흡인력에 두손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조차 재밌는 추억이 되어서 문을 꼭꼭 잠그고 모기를 사양하던 손짓들이 재밌기도 하다.
인도인들의 음식을 거의 못먹는 나는 어쩌면 이곳이 두렵기도 하지만 만약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을 채소들은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인도가 좋아서 이런 생각도 해보면서 그들의 재래시장도 들여다 보았었다. 남인도의 풍광이나 날씨 특히 폴투칼이나 유럽이 지배하던 시기가 있어서 가톨릭이 상당히 많은 이곳에서는 잘 적응하고 살수도 있겠구나하고 잠시 인도체류를 욕심내보기도 했다.
한국이라면 어림도없을 돈의 가치가 여기는 훨씬 많아서 그것조차도 매력이고 풍성함이었다. 미화 10달러가 이나라 510루피정도이니까.
웬만한 음식값은 100루피면 충분히 골라서 먹을수 있었고 , 수박은 2,30루피정도였으니깐.
하루 온 종일을 릭샤를 대절하여도 700루피이내면 충분했던 인도의 유적지 탐사.오히려 쓰리랑카는 인도물가의 두배로 비쌌고.
인도에서의 생활. 문화, 종교 , 사회의 여러모습들이 어쩌면 어느 레벨에서나 공통으로 똑같이 방향이나 목적들은 같다는것과 사람은 궁극적으로 동 서양등의 구별은 내적으로는 다를것이 없다는것까지 느끼고 또 느끼고 왔다.
오히려 후진국이라는 카테고리안에서 고단함과 질펀함은 있을지언정 더 순수하고 맑고 깊은 영혼들이 머문곳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어떤 동네에도 템플이 있었고 , 도시마다 붓다상이나 예수상. 힌두의 상들은 상존해 있었고 그 앞에는 사람들이 항상 줄을 잇고 있는 인도.
가장 인상깊은 모습도 꽃을 헌화하기위해 이들은 늘 두손에 꽃이나 음식들을 장식해서 들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신에게 자기를 비우고 기대는 그들의 맑은 마음들이 그렇게 내게 전해오고 있었다.
자신의 기도를 적어 걸어둔 휘장들이 보리수나무와 나무사이에 주렁주렁 메달려 있었다.
인도가 나를 善하게 하고 나를 비우게 하고 그들의 순명하는 삶안에서 나를 내릴수 있었음을 알아가는 여행이었다.
또 다시 델리를 떠나 쓰리랑카로 갔지만 붓다의 나라 쓰리랑카는 3년전부터 가자고 했는데도 돈을 다 내고 예약을 끝내고도 여행사가 비행기표를 구하지못해서 해약되면서 까지 왜인지 자꾸 못가게 되던 곳이었고 , 불자가 아닌 나는 그러면 말지 뭐하고 그만둘 참에 이번에 겸사겸사 떠나게 된곳이다.
영국 BBC방송이 뽑는 '죽기전에 가보아야할 여행지' 에 쓰리랑카가 들어있어서 잘 되었구나했다가 이제야 이루어진 여행길이었다.
쓰리랑카 시기리야의 골든탬플에서
몬슨기후라서 11월과12월사이도 雨期라 했고, 있는동안 하루걸러 비가 억수로 와서 심난하게도 했지만 용캐 유적지갈때는 슬슬 잘도 개이어주던 날씨였었다.
밀림정글이 우거져있고 , 길가에는 밀림에서 나온 코끼리가 어슬렁거리고. 정글에있는 호수에는 코끼리가 헤엄치던 모습을 보던 쓰리랑카.
인도와 달리 길이 한산하고 자동차도 한산하고 사람들도 듬성거리는 이곳. 특히 유적지가 많은곳은 더 적적해서 여행자들 아니면 거의 인적이 없을 만큼 한가한 곳이었다. 길은 깨끗했고 어디하나 쓰레기를 버린곳은 거의 없었고 사실 그럴 사람들도 별로 없었으니까. 시내로 들어오면 약간의 상가가 형성되어있고 거기엔 사람들이 붐비기도 했지만 정말 조용한 나라였다.
길가에 붓다상이 거리마다 크게 자리하고 있고 성탄시기라서인지 길가엔 역시 예수상이나 성모상 성인들의 상들이 세워져있고 간간히 장식물들이 크리스마스를 알으켜주고 있었다. 동네 어귀마다 구유가 장식되어 있는것이 너무나 곱고 예뻐서 오래 들여다보고 오기도 했었다.
불교에 심취한 이 나라 사람들의 고운 불심들을 지켜볼수있었음도 행복했다. 불치사의 아침이 그랬고 그들의 기도하는 자리에 한시간가량 앉아있었는데 그때 나는 가장 자신을 낮추고 붓다에게 모두를 맡기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경문외는 입모습이 그렇게 곱고 아름다울수가 없었고,
불치사 내 옆자리에 앉아 한시간 동안 무언가 주저리주저리 경문을 외뎐 소녀.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헌화하는 꽃향기가 그 사원에 넘치는 이 자리가 이들이 추구하는 극락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친견하는 자리에 줄을 서서 함께 한 그 순간들이 지금도 가슴에 벅참을 느끼고 있다. 인간이 종교를 갖고 그 종교에 신앙하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다운 모습이 아닐까.......? 어떤 종교를 개의치 않고.
크리스마스새벽미사를 궐하지 않으려고 호텔에서 새벽길을 내려서 갈때 캔디의 호수공원의 안개들이 넘 좋았고 ,그 옆에 자리한 불치사엔 그 새벽부터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불치사의 전등불빛이 왜 그리도 성스러운지 그 담안에 있는 숱한 불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했다.
성당에서 신부님을 뵈옵고 축성된 성체를 영하고 안수기도를 받고 돌아서 나올때..... 예수탄생의 그 자리에 동참한 기쁨에 은혜로운 눈물이 ... 그리고 그 새벽 불치사를 갔고 .
회랑에는 이미 새벽예불을 마친 사람들이 모여 도시락으로 아침을 나누던 사람들의 두런두런대는 말씨들이 왜 그리도 좋게 들리던지... 바지런하기도 하시지. 이 새벽 도시락 만들어 여기까지 와서 예불마치고 식사를 나누는 이들의 정성어린 모습을 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이른 그 새벽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하나의 촛불에 불을 밝히고 돌아서면서 많은 이들에게 자비를 빌었다.
어느 종교이던 善함으로 이끄는 이 길들은 너무나 감동스러워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게되던 시간들. .....
쓰리랑카는 빈민국이라고 말들하지만 물론 삶이 질퍽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은 언제나 그렇지만 않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콜롬보로 돌아오니 성탄절이고 토요일이라서인지 온통 모든 가게가 문이 닫혀있고 , 길은 아예 텅 비어있는것 같았다.
시내 한복판에 햄버거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들을 실은 자가용들이 길가에 차를 대고 우르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고,
부지런한 몇 걸인들은 연신 손들을 내밀고 있었고 , 날더러 돈을 달래는데 이미 쓰리랑카루피를 죄다 써버리고 1루피도 없어서 주지 못하고
그 옆에 앉아서 내가 갖인 빵과 과일을 둘이 나누어 먹었다. 그 할머니는 아마 지금도 그자리에서 손을 내밀고 있을것이지만 크게 불쌍해 보이지는 않았었다. 웬지 그들 종교를 지닌 사람들은 크게 절망하지않을거라는 확신이 지금도 내게 남게하던 인도와 쓰리랑카였으니깐.
콜롬보가 번화하다는 생각은 전혀 기억에 남지않는다. 왜냐하면 온 도시가 다 문을 닫았고 길은 거의 비어있었으니깐.
시내 길끝에 있는 바다옆에 철로길이 나 있어서 여기역에서 기차를 타면 쓰리랑카 해안도시를 빙빙돌다 다시 이자리로 올수있다는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 그곳. 정말 그 기차를 한번 타 보고 싶었는데 그럴수는 도저히없어서 떠나와 버렸지만.
콜롬보시내에 있던 바다기차역
그 파도소리 들리던 기차길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서 내 사유안에서 언젠가 한번 그 해안도시들을 떠나보게 될런지.......
콜롬보ㅡ첸나이ㅡ델리ㅡ홍콩 ㅡ인천 ㅡ 서울.
델리공항에서 서울로 비행기에 오르다
결국 되돌아 오고 말 내 자리로 돌아 온 지금.
어느 문학자가 말했다고 한다.
"여행은 돌아올 내 집이 있어서 더 행복하고 좋은것이다" 라고.
집에 오니 익숙한 사람들의 호들갑스런 반가움속에 해후가 이루어지고...
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엉킨 이 끈적임으로 다시 시작될 내 자리.
점심을 준비하기위해 부엌을 들어가면서도 나는 키들거렸다.
감사해....
다들 잘 있어주었으니 감사해.
재산상 이루고자했던 가족 모두의 소망이 나 없는 사이 이루어져서 들떠있는 가족들의 함성도 감사해.
해두었던 반찬들이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어서 당황하지않고 식사를 금방 차릴수 있었음도 감사해.
내일은 똑같이 빨래를 하고 밥을 지을수있도록 내가 건강하게 돌아와서 내가 감사해.
한국에서 처럼 인도나 쓰리랑카에서도 주일을 궐하지 않게 성당이 있어서 감사했어. 멋진 대림시기였으니깐.
TV에서는 여전히 우리나라의 뉴스들이 내가 알아 들을수있는 말로 방송을 들을수 있음이 감사했고. 이미 줄거리를 알수없게 진행된 드라마도 다시 볼수있어서 감사하고 , 정치판의 소용돌이도 여전히 익숙한 그 모습대로 뒤엉켜 있는것도 생소하지않아서 감사하고........
그저 감사하고 감사한 이 자리.
등을 감싸고 도닥여주는 우리 남지기는 어제 오는줄 알았다가 안 와서 하루 내내 걱정을 했다고 하면서 죽는날까지 잘해줄거라고 시키지않은 소리까지 보태면서 쑥스러워하던 그 모습도 감사하고.
주부가 얻은 한달여의 휴가같은 긴 여행 .
이렇게 마름하네요. 행복했고 편안했고 정말 나만 생각하고 한달을 살았다는 그 포만감. 나를 조금 알았고 ,그건 모두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엄마와 아내로서의 길이 얼마나 소중하고 근사한 일인지를 긍정하는것이었달까.
열심히 또 아줌마의 삶을 살꺼구요. 어느날 또 행운이와서 길이 열리고 소리가 들리면 귀를 열거예요.
인도에서의 내별명이 '휘파람' 이었어요.
그 휘파람소리 들리면 또 어딘가 짚시되어 나갈거구요. 우.....우......
2011.12, 2 ㅡ 12, 27 까지 한달여의 시간들 ,
내 기억의 풍선안에 꼭꼭 담기어 하늘을 날도록 하자. 그 추억으로 또 지금을 살아낼 나는 무지 행복한 여자인겨!!
나마스때!! 인디아
아이보완!! 쓰리랑카
하느님, 감사해요. 알렐루야!! 알렐루야!!
첫댓글 멋집니다. 휘파람님, 행복한 여행과 가족과 함께 행복하세요.
아름다운 여행기 감사합니다. 나마스떼~~아이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