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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3vtyS0Vn4s?si=C-IiWqG21ejL3uTd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독일이 그것을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C말~18C중엽 1580(70) ~ 1750(40)을 말하며 어원이 건축상의 용어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의 균형미로부터 떠나 번잡하고도 까다로운 세부기구의 과잉을 표시한 것입니다. 르네상스 예술은 “조화가 잡힌 정적인 존재”로 바로크는 “감동적인 힘에 가득찬 직접적으로 압도하는 예술”로 표현 하기도 합니다. 바하와 헨델이 나타나 대위법 음악을 완성함으로써 복음악이 승리에 도달 하기까지의 기간을 바로크 시대로 말합니다. 근대적인 화성적 원칙과 중세의 대위법적인 방법이 결합한 양식입니다. 사회상 : 당시 극도로 타락한 카톨릭 반하여 종교개혁의 움직임. 절대 당좌제도의 궁정문화등의 배경 십자군의 실패와 상업자본의 대두 특 징 : 다성음악 시대였으며 교회무대 발전≪ 바로크: 귀족이나 상륙계급이 관심 세속음악 이 종교음악보다 우위 차지했었으며 기악이 독립된 음악에는 = 성악 동등한 위치 음악의 기풍은 극적인 요소에 근원을 둡니다. 수자저음(general bass 통주저음) 화성의 진행을 저음에 붙인 숫자로써 연주하는 방법입니다. 베이스로부터 화성적인부는 발전하기 때문에 저음부 중요하게 되어 건반악기 주자가 즉흥적으로 화음을 보충하면서 반주성부를 완성시키는 방법이고 결국 대위법에서 화성적으로 또는 선율적인 구조에서 화현적인 화성구조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다성음악이 아니고 화성적 음악(homophony 호모포니)입니다. 이 시대부터 화성적으로 지어진 단음악(monodia) 지배하게 됩니다. 오페라 오페라(opera)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문학적인 요소인 대본과 미술적 요소인 배경과 장치 그리고 무용적인 요소인 발레와 춤 연극적 요소인 연기와 음악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오페라 발달의 지역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이탈리아 : 인문주의가 나타나자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음악에 있어서 독창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오페라 탄생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초로 극에 음악을 이용한 것은 그리스 시대 입니다. 육성으로 부르는 합창과 독백이라는 모놀로그 (Monologue) ,대화등의 2중창과 합창을 포함한 영식으로 된 그리스 극도 오페라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흥을 목표로 한 르네상스의 일환으로서 새로운 음악운동의 하나로 이탈리아에서 일어났습니다. 16세기 말경 피렌체에서 새로운 음악을 연구하는 카메라타(camerata)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동료’라는 뜻의 이모임은 고대 그리스 극을 연구하여 그것을 이상으로 하는 새로운 음악을 생산하려 했습니다. 대위법을 무시하고 서창풍인 멜로디에 단순한 가락을 붙인 단성음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징은 음악보다 가사를 중요시 했으며 그러기에 폴리포니 양식 보다는 다선가락 (Monedy)양식이 더 적합하였습니다. 서창적인 독창에 화성적인 기악반주가 붙었습니다. 시인 리눗치에 대본에 페리 가 작곡한 오페라 “다프네” 가 1597년에 상연 되었는데 이것이 오페라 역사의 출발입니다. 두번째로 리눗치니의 시에 페리와 탓치니가 작곡한 신화극 “에우리디체”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오페라로서 최초의 확립을 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국왕 헨리 4세와 메디치 가문의 딸 마리와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에 공개적으로 연주되었습니다. 이것은 악보로 인쇄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최초의 완전한 오페라 입니다. 한편 피렌체의 일어난 운동은 여러 도시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 이탈리아 오페라 초기의 개척자로써 극적인 효과 음악으로 표현 했으며 현악기의 트레몰로(tremolo) 효과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등장 인물의 성격을 악기로 나타냈습니다. 1607년 ‘오르페오’ 1608 아리아드네(lamento d’Arianna)상연 오케스트라 사용(극적인 표현의 절대적 필요) * 1637 오페라 하우스 개관. 유럽 오페라계의 중심지(베네치아)였습니다. 오페라하우스는 시민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운영 되었으며 그들 생활의 한 부분이 될 만큼 오락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페라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와 고전적인 신화중심으로부터?? 역사적인 제재로 옮겨 졌습니다. 이 몬테베르디는 사실상의 오페라의 창시자이며 오페라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자입니다. * 카발리(Francesco Cavalli:1602~1676) 민요풍으로 정돈된 아리아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낭독적인 서창인 레치티티브와는 완전히 구분이 됩니다. 41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지야쏘네’(giasone)가 대표적입니다. * 체스터(Marc Antonio Cesti :1623~1669) 정가극(opera seria)과 희가극(opera buffa) 구분 시켰으며 레그렌치(Grovanni Legrenzi:1626~1690)와 칼다라(Antonio Cadara: 1670~1736)등의 음악가가 있습니다. 형식의 특징을 보면 독창에 치중 하였으며 합주. 기악에는 비교적 소홀히 하였습니다. 영창(Aria)과 레시타티브를 갈라 떨어지게 했으며 아리아를 위해 뚜렷한 양식과 분명한 형태를 도입했습니다. 오라토리오 1600년경 카발리에리(Emillio del Gavalieri:1570년경~1602)에 의해 발표. 영혼과 육체의 극(La rappresentazione di Animae di cropo) 이라는 극 형식의 오라토리오 였습니다. 원래 오라토리오는 종교적 ,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극적인 대본에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오페라에 비해 보다 도덕적이고 교훈적입니다. 오라토리오라는 글자는 교회안의 예배실을 말하며 16C말경 로마의 성지 라보성당의 성 필리포네리(Fillipo Neri:1515~15950)가 자기 예배실에서 음악 중심의 신성극을 시작함으로 유래 됩니다. 분장과 몸동작도 했는데 카릿시미(Giacomo Carissimi 1605~1674)시대에 이르러서는 현재와 같은 합창 형식이 됨 오라토리오의 형태와 명칭이 오늘날과 같이 고정되기는 18C중엽이며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쉬쯔가 있습니다. 칸타타 17C초엽 단음악의 형식으로 이며 이를 칸타타(cantata)라 말합니다. 본래 성악곡을 지칭하는 말로서 기악반주를 가진 대규모의 성악곡 이었으며 아리아. 레시타티브. 중창. 합창 등으로 되어있습니다. 가사내용에 따라 실내칸타타(cantata da camera) 교회칸타타로 구분되며 실내 칸타타는 17C초 극적인 형식에 성악 예술로서 마드리갈의 양식을 취한 것입니다. 나폴리 악파 A. 스카를랏티가 대표적인 작곡가로 800곡에 달하는 칸타타를 냈는데 혁신적 수법으로 반주가 있는 서창과 세 도막 형식의 아리아등을 칸타타에 사용하였으며 교회의 전례용 사용, 처음에는 성서에서 가사를 따왔으나 후에는 바로크적이면서 감미로운 종교적인 시를 즐겨함으로 성서적 가사를 잃어버립니다. 교회칸타타에 형태에 이르기 까지 설교음악으로써 수준을 높인 작곡가는 쉬쯔이며 J. 바하는 칸타타. 대성시킨 사람이며 300곡의 작품을 썼으며 지금도 200여곡이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기악적인 소나타에 대립하는 뜻에서 사용되던 칸타타라는 말이 독일에서는 점차 교회의 예배 부르는 설교음악으로 의미를 띕니다. 프로데스탄트 음악의 새 양식 17C초기부터 단성가락 양식(monody)와 콘체르타토 양식(Concertato style)의 새 기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샤인, 쉬쯔, 샤이트 이며 이들을 17C의 3대sch라 불립니다. 기악곡 바로크시대 초기에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중심으로 기악부문도 발전하게 되며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나타난 것 처럼 인간은 신의 얼굴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사람의 목소리로서 노래하는 음악은 고상한 것이고, 기악의 음향은 오르간을 제외하고는 천박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휴머니즘의 사상이 보급됨에 따라 악기는 다같이 인간의 정신에 이래 취급되는 점은 똑같으므로 귀하고 천함이 없다고 생각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악기는 성악 편곡을 연주 하거나 또는 중창과 합창에서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던 것이 기악의 독립화를 이룩합니다. 형 식 : 리체르카레(ricercare)형 환타지아(fantasia)17C 초 건반악기용의 악곡 스타일 칸쪼나(canzona)형 모방대위법 교회소나타(sonata da chiesa) 테아와 변주곡(Thema and variation) 파르티타(partita) 3박자 변주곡 파사칼리아(passacaglia) 샤콘느(chaconne) 코랄 파르티타(chorale partita) 코랄전주곡(chorale prelude) 모음곡(Suite) 기존선율이나 베이스에 바탕을 둔 작품을 말합니다. 독주건반 악기나 16.7C 현악기 류트(linte)를 위한 즉흥적인 양식 : 토카타(tocata) 판타지아(fantasia) 또는 전주곡 합주 칸절나Ü 메룰라(Tarquinio Merula:1594~1665) 그 후 작곡가?? 소나타(sonata) 바이올린을 위해 작곡17C초 17C 중기 칸절나+소나타Þ sonata 말을 사용 했습니다. 17C 기악 합주용 무용 모음곡(Suite of dances)이 많이 작곡되었습니다. 16C 이탈리아 춤곡 빠른 6/8 파도바나(padovana) 쾌활 빠른 3박자인 예 프랑스 춤곡인 갈리아르다(gaglrarda) 3박자 무곡 쿠랑트(courente) 트리폴라로 된 변주곡 알라망드(alle mande with a tripla)가 있습니다. 악기발달 * 바이올린 : 5 - 6C 활로 줄을 마찰시켜 만든 음을 내는 바이올린 계통의 악기는 동양의 아라비아에서 레바브(rebab) 라 하여 성행 했으며 여기에서8 - 9C 회교도들에 의하여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전해졌으며 15.16C 유럽남부에도 활로 마찰하여 음을내는 악기가 있어 이탈리아에서는(비올라 Viola) 프랑스에서는 비엘(vielle) 영국에서는 바이올(viol)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모양의 악기를 만든 사람은 뒤포프루카르(Casparo Duffoprugcar:1514~1571) 였으며 최초로 바이올린을 만든 시기는 16C의 30~40년대 제작되었다고 간주되며 이탈리아 브레시아(Bresia)에 있는 사람이 계승,발전 시켯습니다. 그중 중 가스파로 다 살로(Gasparo da Salo: 1542~1609) 현존하는 가장 오랜 바이올린 입니다. 현재 전하여지고 있는 바이올린의 대가라면 니콜로의 제자로서 명인이라 칭함받는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 - 1737)가 있으며 현존하고 있는 악기는 대략 바이올린 540대, 비올라 12대 , 첼로약50대 정도입니다. 건반악기(Keyboard instruments) 건반악기라 하면 오르간, 피아노, 쳄발로, 하아모늄, 첼레스타등의 악기와 같이 건반을 가진 악기를 말합니다. 그중 대표적으로 살펴보면 * 오르간 : 팬파이프(panpipe) 시링크스(Syrinx) 파이프를 조립하여 입으로 부는 악기로 발전하며 오르간의 시초가 됩니다. 건반을 사용한 것은15C경에 나타났고, 17C에 이르러는 크게 발달했습니다. 줄을 쳐서 내는 방법과 튕겨서 음을 내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 클라비코드(klavichord) 는 음을 쳐서 내는 악기로서14C~18C 걸쳐 사용 되었으며 건반이 붙은 타현 악기로서 셈 여림이 가능하고 이것이 피아노 전신으로 말합니다. 음역은 3 ~4옥타브 정도 였습니다. 그리고 하프시코드(harpsichord)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스는 쳄발로(cembalo)로 불려지며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clavcin)으로 불려지는 악기로 피아노가 발명되기 전 피아노 구실을 한 악기로 피아노와 같이 줄을 헤머로 치는 방식이 아니라 건반을 눌러 깃대 혹은 가죽으로 만든 픽 으로 튕겨 울리게 합니다. 셈 여림의 표현이 안되어 셈 여림 변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가 요구되어 집니다. 그리하여 * Piano forte 라는 악기가 등장하며 피아노의 줄을 해머로 쳐서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본래는 회교악기인 카눈(kanun) 을 본뜬 것입니다. 1711 이탈리아 쳄발로 제작자인 크리스토포리(Bartolommeo Cristofori:1655~1731)는 스페인 사람이 사용하는 쳄발로에다 건반 장치를 한 후 건반을 눌러 튕기는 장치에 의해 나무 해머에 무명을 씌워 쳐서 소리를 내는 방법을 고안 이것이 최초의 피아노인 동시에 피아노의 발명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 후 1783년 영국 의 브로오드우드(John Brodwood 1732~1812)가 페달(pedal)을 고안 합니다. *영국 오페라 엘리자베드 시대와 (1558 - 1603), 제임즈(james 1세; 1603 -1625)의 치세 시대에 음악이 황금의 시기로 발전하며 17세기 후반 ;영국의 음악사상 최대의 음악가 퍼셀이 등장 20세기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음악가들에게 우두머리격으로 발전합니다. 17세기 중엽 시, 성악, 기악, 댄스, 연기, 등을 결합시킨 형태를 취한 것으로 왕후와 귀족을 위한 “가면극”(masque)이 성행합니다. *프랑스 오페라 16C가 끝날 무렵 발레(ballet)라는 것이 생겼으며 무도에 적합하고 경쾌한 합창곡, 또는 마드리갈이 있으며17C에는 무대 뒤에서 하는 무용극이 되었습니다. 이는 가극의 진출에 따라오페라 중간에 넣거나 후에 연주되었습니다. 장려하고 색채가 짙은 발레와 고전적인 프랑스의 비극등이 오페라 특유의 민족문화의 2개의 전통 기인하게 됩니다. 륄리는 음악의 대표적인물이며 (Jean-Baptiste Lully 1632~1687) 스스로 음악 비극(Tragedie Lyrigue)이라는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특징이 있다면 무용을 중요시 했고 서창 에서는 프랑스어의 억양 향상시켜 오페라의 서곡에 새로운 수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느리게 - 빠르게 - 느리게 이른바 프랑스풍의 서곡을 창안 했으며 반주가 있는 래치타티보의 중요성을 발전시켜 가극의 혁명자인 글룩의 선구자라 할 것입니다. 극적인 표현법 매우 우수 하였습니다. 라모(Jean phillippe Rameau:1683~1764)는 화성수법이 우수했고 특히 조바꿈의 묘미를 보였습니다. 1772 저서 ‘화성론’ 이 유명하며 “근대 화성학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받습니다. <바로크 후기> 1) 이탈리아 오페라 오페라 중심지는 베네치아로 17C후 나폴리 악파(Scuola Napoletana)의 오페라가 주목할만 하며 창시자, 지도자인 스카를랏티(Scarlatti Alessandro:1660~1725)는 *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 3부분 A-B-C 행동에 의한 아리아를 지었습니다. 가창법을 향상시킨 벨칸토(Bel Canto)의 창법과 관현악의 편성을 고쳐 현악 4부에 중점 두었습니다. 서곡(overtyre) 빠름-느림-빠름의 순서로 이탈리아풍의 서곡이라는 일정한 형식을 만들었으며 악풍은 고상하고 위대하며 반주 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초창기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독창의 발달과 관현악의 기초가 되었으며 중세적인 음악에서 오늘에 이르는 교량적인 역할을 합니다. 당시에는 대위법적인 작곡법에서 멜로디나 반주적인 화음이 붙은 화성적 작곡법이 발달되었습니다. 이때에 카스트라토(castrato)라는 거세된 남자 sop 또는 Alto 가수가 등장 하였습니다. 소년의 목소리를 변화시키지 않기 위하여 거세를 하였는데 16~8C성행 하였습니다. 16C에 이탈리아 에서는 극중간에 연주되는 인테르메조(intermezzo)가 생겼으며 처음에는 마드리갈풍인 합창곡이었으나 17C초 짧은 희극적인 음악곡으로 되어 가극 사이에 연주가 외었습니다. 그것이 이후에 희가극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밖의 페르골레지(Giovanni B. Pergolesi:1710~1736), 비발디. D. 스카를랏티 (D.Scartatti 1685~1753)의 음악가가 있습니다. 2) 볼로냐.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기악의 중심이며 성 베드로 대성당은 기악협주곡의 본거지입니다. * 코렐리(Ar cangelo Corelli:1653~1713)는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의 창시자이며 트리오 소나타에서 17C 후기 이탈리아 실내악의 성과를 요약, 육성의 노래대신 바이올린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 비발디(Antonio Vivaldi:1678~1741)는 바하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협주곡에 독주부분과 합주부에 유기적인 연관성 시도 하여 빈 고전파 협주곡 양식에의 접근 시도 하였으며 근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기초를 완성한 작곡가 입니다. 그 밖의 작곡가로는 * D. 스카를랏티 (Domenico Scarlatti:1685~1757) 근대적 클라비어 주법의 아버지라 불렸습니다. 3) 독일 오스트리아의 오페라 순음악에 힘썼으며 15 -6C 노래의 연극인 징 시필(sing spiel)이 있었으나 대화사이에 간단한 노래 삽입한 희극적 내용을 가진 정도 입니다. 징시필 형식의 오페라는 모짜르트의 '후궁에서의 유괴’가 대표적입니다. 4) 독일. 오스트리아 기악곡 건반악기 : 토카타. 투가. 코랄. 변주곡. 파사칼리아. 샤콘느. 모음곡. 소나타. 기타 합 주 : 소나타. 심포니아. 실내 소나타. 등의 모음곡과 관련된 여러 형식. 콘체르토 등이 있습니다. 5) 프랑스 음악가들 륄리 , 샤르팡티에, 쿠프랭, 라모,등의 작곡가는 파리를 중신하여 활약한 “베르사이유 악파(Ecole Versaillaise)에 속합니다. 비발디 * rococo는 조가비를 뜻하는 프랑스어의 로카이유(rocaille)에서 유래 되었으며 프랑스 중심의 미술사의 시대 양식의 개념으로 점차 문화현상 전반에도 적용됩니다. 음악의 흐름이 장식이 많고 우아하고 쾌락. 또는 관능적이며 가느다란 면을 강조하였으며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장대하고 입체적인 것에 대한 반동으로 생겼습니다. 당시 쳉발로. 클라비코드는 오늘날 피아노처럼 음을 지속할 수 없었으므로 장식음으로써 음을 연결시키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 로코코(roroco) 양식은 후기 바로크로부터 고전파로 옮겨지는 과도기적인 시대 양식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독일에서는 1730년경 실내음악의 작은 형식의 작품 가운데 널리 침투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정신적인 내용이 다소 박약한 면이 많으나 독일에서는 정신성도 퍽 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태도는 바하의 아들들에 의해 북부 독일에서는 낭만파적인 경향마저 보이는 감정과다 양식(empfindsamer stil)에 이르게 됩니다. 로코코음악은 우아하고 장식적이며 쾌락, 관능적이고 우아한 맛이 있으나 깊이와 내용적인 면에서는 부족했습니다. 한편 음악이 전반적으로 화성적인 양식을 취하고 단순한 형식감을 특징으로 했습니다. 바로크 후기의 기악곡 건반악기와 합주의 두형태로 나타나며 건반악기(keyboard)의 곡에는 토카타, 푸가, 코랄, 코랄전주곡 ,오르간곡인 베르세(versert)등의 편곡, 변주곡, 3박자의 변주곡형식인 파사칼리아(passacaglia), 샤콘느, 모음곡, 1700년 이후 소나타, 등이 있습니다. 합주(ensenble)곡에는 교회소나타, 신포니아(sinfonia), 실내소나타 모음곡, 콘체르토(concerto)등이 있다. 소나타는 17C전반 성악 작품이 포함되어 있는 기악적인 전주곡과 간주곡으로 지칭되며 17C후반 소나타와 심포니는 독립된 기악곡으로 상용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작곡가들에 의해 푸가양식의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로 구분Þ 17C하나로 합치게 되었고, 소나타는 4인이 연주하지만 트리오 소나타(trio sonata)라 부릅니다. 코렐리와 동료들 사이에 카덴짜(cadenza)가 있으며 협주곡(concerto)은 16C전반 성악과 기악의 앙상블로써 2중창 또는 중주라는 의미로 통합니다. 16C 말경 콘체르토라는 말로 사용햇으며, 17C 후반 반주가 있는 독주를 의미하는 대 협주곡인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이 생겼습니다. 관현악이 2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독주부인 콘체르티노(concertino)와 관현악의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대화풍으로 서로 응답하는 형식의 음악입니다. 모음곡으로는 두가지가 있는데 고전모음곡 - 16C~17C 바로크시대의 기악 형식. 조로 관련된 일련의 무곡이며 근대모음곡 - 자유스런 형식으로 낭만파 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관현악(orchestra)곡에는 신포니아(sinfonia, symphony)라는오페라의 기악만의 곡을 가르킨 것으로 서곡, 간주곡 짧은 전주와 후주를 말합니다. 한편 17세기 오르간곡으로 푸가 형식(fuga)이 점차 완성되어 J.S.바하시대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모방 대위법이 가진 원숙한 형식으로 1개 또는 복수의 테마가 각 독립된 성부에 규칙적인 모방 반복을 되풀이 하면서 특별한 조성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곡입니다. |
바로크 시대 <대표적인 작곡가>
비발디(Antonia Vivaldi, 1678∼1741)
<사계>를 비롯해 협주곡으로 유명한 비발디는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도시이자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비발디는 바로크 음악 연구와 감상이 활발해진 오늘날, 음악 애호가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을 뿐 아니라, 코렐리, 바하, 헨델의 음악을 감상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음악가이다. 그가 이룩한 협주곡 양식은 후에 바하나 헨델에 의해 확립될 수 있는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하는 생전에 '나의 작품이 모두 비발디의 작품과 같고, 그와 같은 작품을 작곡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바하는 비발디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근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작곡 방법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을 듣는 그는 79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18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12개의 첼로를 위한 3중주곡 등 수많은 곡을 썼다. 뿐만 아니라 38개의 오페라와 미사곡, 모테트,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 음악도 많이 작곡했다.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18세기 초기와 중기에 활동한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은 당시 독일 최고의 작곡가였다. 4000여 곡 이상의 방대한 작품에는 바로크와 전 고전주의 양식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음악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텔레만은 창작은 물론이고 연주와 이론, 음악교육 모두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텔레만은 방대한 양의 작품을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20여 명에 이르는 당 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의 편집 출판하였다. 텔레만의 오라토리오는 바로크 양식에 기초하고 있지만 전기 고전파 양식의 특징이 나타나는 진보성을 갖고 있다. 종교음악이라 해도 오페라 적인 특징이나 자신의 사상,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바로크 적인 대위법으로 쓴 기악작품에도 기교적인 장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많은 기악작품에서 선율이 분명하고 악구가 규칙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733년에 작곡된 하프시코드 판타지들은 초기 소나타 형식의 시초가 되었다. 텔레만은 그의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모두 작곡하였다. 그는 음악회의 연주회 프로그램에서도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함께 올림으로 전통적인 연주회의 관습을 무너뜨리고 모든 종류의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음악 교육에도 관심이 깊어서 음악의 편집과 출판에도 관여하였다. 텔레만의 이러한 시도는 교회음악이나 세속음악을 음악이라는 예술의 한 분야로 귀속시켰다는 점에서 현대의 예술관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텔레만은 바로크 시대에 있어서 진보적인 작곡가였다. 그의 이름은 바하의 그늘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그의 음악적인 업적이 재평가되고 있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바하의 가문은 그의 선조 대(代)부터 음악가들이 많았다. 대부분 양친이나 친척에게서 음악교육을 받았고 직업 음악가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부친 요한 암브로시우스(Johann Ambrosius)를 비롯하여 형제나 친척들이 모두 궁정의 음악감독이나 연주자로 활동하였고, 바하는 그런 환경 속에서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아이제나하(Eisenach) 지방에서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든 음악의 물줄기는 바하로부터 흘러 나와서 다시 바하로 되돌아갈 만큼, 그의 이름이 차지하는 음악사적 비중은 너무나 크고 당당하다. 그래서 바하를 가리켜 "음악의 아버지"라고 스스럼없이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 이름에 합당할 만큼 바하의 음악은 인류의 위대한 음악 문화적 유산으로 길이 흠모되고 있는 것이다. 바하의 이름자인 Bach는 독일어로 '작은 시냇물'이란 뜻이다. 그러나 악성 베토벤은 바하를 가리켜 "당신은 작은 시냇물이 아니라 드넓은 대양입니다." 라고 멋진 비유를 했다. 사실 바하의 이름으로 작곡되어진 모든 음악들이야말로 어떤 대해보다도 드넓으며, 어떤 계곡보다도 깊고 오묘하다. 평생동안을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생활을 지켜 가면서 써낸 수많은 종교 음악을 비롯해서 기악곡과 관현악곡에 이르는 모든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는 엄청난 대업을 이루어냈다. 헨델(G.F.Handel)과 함께 바로크시대를 총결산(?)했던 바하는 1749년 봄 뇌졸증의 발작과 함께 시력감퇴 현상이 일어나 체력이 눈에 띠게 줄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력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이 잘 못 돼서 결국 1750년 7월 28일 밤 8시 45분 경에 바하는 위대한 65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부인 안나 막달레나가 임종을 지켜보았다. 바하가 죽고 난 뒤에 그의 가족들은 이리 저리 흩어졌으며 수많은 악보도 분실되거나 손상되어 버린 채 그의 이름은 점점 세상 사람들의 귀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을 비롯한 후세 사람들의 끈질긴 노고에 힘입어 바하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모든 곡들이 연주회장의 레파토리에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 바하의 음악작품들이 인류의 가장 귀중한 보물로 대접받고 있는 이유도 그가 써낸 음악들이 인류의 정신사적 흐름을 가장 농밀하게 표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항상 신앙적 구도의 길을 버리지 않았던 생활관과 음악관이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하야말로 인류가 갖는 가장 고귀한 음악가였다고 해도 좋을 그런 사람이었다.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독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헨델은 젊어서 대단히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재력이 있었으므로 청년 시대의 처음 3년간은 노래의 나라이며 오페라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에서 보낼 수가 있었다. 여기서 그는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의 양식을 흡수하면서 서서히 천재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25세도되지 않아서 오페라 작곡가로서 상당한 평판을 받게 된다. 우선 1790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오페라 '아그리피나'의 성공을 계기로 많은 오페라 작품을 써내게 된다. 하지만 20대 초반에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수를 습득한 헨델은 자기 오페라를 알아주지 않는 모국 독일에 실망한 나머지 근대화가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던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에게 런던은 제 2의 고향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는 영국의 자랑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는 또한 오라토리오(종교적인 내용으로 무대, 의상 등이 없는 음악만으로 연주되는 악곡 형식)에서도 큰 활약을 해서 그 음악의 종교적인 엄숙함이나 장엄함에서 바하와 함께 바로크의 큰 줄기를 이룬다. 그의 기악곡은 비교적 많지는 않으나, 이탈리아 기악 양식을 발전시킨 코렐리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아 합주 협주곡과 트리오 소나타를 한층 발전시켰다.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등과 같은 훌륭한 관현악곡을 남겼다.
글쓴이: 베토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