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 2008년 6월 29일 일요일, 안개 끼고 흐림 >
어제 등산을 가려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안 갔다.
나 혼자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아내와 오늘 같이 가려고
참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오지 않았지만 잔뜩 흐려 있었다.
일기예보는 오전 중에 개일 거라고 했지만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비를 맞고 가기가 싫은지 혼자 가라고 했다.
아마 지난 주에 비를 맞고 등산을 한 것이 불편했나 보다.
나는 도시락을 싸서 초읍동 성지곡 수원지로 갔다.
오늘 걸을 코스는 성지곡 수원지에서 백양산을 거쳐
구포 시장까지 갈 예정이었다.
구포 시장에 가서 살구가 있으면 사고 싶었다.
우산에다 우비까지 단단히 준비했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으니 햇빛이 쨍쨍한 날보다 나았다.
성지곡 수원지에 올라가서 호수가를 걸었다.
호수는 언제봐도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다리 밑에는
비단잉어들이 헤엄치고 있고 탁 트인 전망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호수를 돌다가 숲길로 접어 들었다.
우람하고 굵은 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부산 근교에서는
가장 숲이 울창한 곳이다.
몇 백년 묵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다. 그런 나무들
사이를 걸어가자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가는 느낌이다.
지혜와 통찰력과 사색이 가득한 공간이다.
사람은 나이 먹을수록 추해지는데 나무는 나이 먹을수록
더 품위가 있고 멋있다.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 서 있는데도 어디서 그런
기품이 생기는 걸까?
나무는 마치 한 자리에서 도를 닦는 고승같다.
귀를 기울여보면 금방이라도 '똑또그르르- 똑 또르르르'하고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질 듯 하다.
나무 숲을 걷는 동안에 점점 고도가 높아졌다.
호수가 어느새 저 밑으로 사라졌다.
안개가 발밑으로 스쳐 지나가니 내가 마치 구름을 집어 타고
하늘로 오른 것 같다.
산봉우리들이 소 잔등처럼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
만남의 숲에서 백양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나는 지금까지 백양산에는 잘 오르지 않았다. 성지곡의
울창한 숲은 좋지만 주로 금정산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백양산은 갑자기 가팔라지기 때문에 힘이 들어서 오르기가
싫었다.
그런데 오늘 올라보니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백양산
정상에 오를 때까지 거의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다.
가파른 길도 자꾸 걸으니 몸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전에는
평탄한 길이 좋았는데 오늘 걸어보니 밋밋한 숲길은 싱거웠다.
진땀나는 오르막길이 힘들긴 해도 도전해볼 만한 재미가 있고
변화가 있어서 좋다.
모든 일이 그러할 것이다. 쉬운 길만 골라 다니는 사람은 험한
길을 겁낼 것이고, 험한 길도 마다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길이든지 자신이 있을 것이다.
나리꽃
까치수영
백양산 정상 부근을 오르고 있을 때 안개가 앞을 가렸다.
이러다 비가 쏟아질 것인가? 앞이 보이지 않으니 길을 잃기라도
하면 어쩌지? 안개가 잔뜩 끼면 분위기는 좋은데 길을 찾기는
힘들어진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걸어갔더니 안개 속에서도 길은 뚜렷이
보였다. 안개를 뚫고 한참 걷다가 뒤돌아 보니 내 뒤에는
더 심한 안개가 자욱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어려워져서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으면 누구나 힘들어 한다. 어떻게 살아가지?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나가지? 결국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쫄딱 망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알고 보면 지금 눈앞에 닥친 문제보다 여태까지 살아온
나날들도 몹시 힘들었다. 이미 지나가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때도 고통스럽고 버거워서 쩔쩔 매었다.
그러니 자신의 앞에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미리 겁을 집어
먹을 필요는 없겠다. 닥치면 다 넘어가기 마련이다.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떨어봐야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게 되면 어떻게든 뚫고 나갈 길이 보이게 된다.
싸리꽃
노루오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에 충실하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려 나간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 축제처럼.
오늘 이 순간을 쾌락적으로 마음껏 즐겨라는 뜻이 아니라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스럽게 염려하거나 지나간 과거를
되씹으며 고민에 잠기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오늘이 중요하고, 내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 어떤 걱정 거리가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만은 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
12시도 안 되어 백양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점심을 먹기가
일러서 산을 내려오다가 먹기로 했다.
정상에서 구포 시장으로 가는 길을 물어서 하산을 시작했다.
역시 숲길이 이어진다.
실비가 뿌렸지만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었고, 길도 미끄럽지
않았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걸었다. 나는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아도
라디오는 좋아한다. 아내는 내가 차만 타면 라디오부터 튼다고
라디오광이라며 놀린다.
라디오에서는 멋진 음악이 계속 흘러 나오고 좋은 말도 나왔다.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는 가볍고 명랑하게 하는 것이 좋고, 가볍고
우스운 이야기는 무겁고 진지하게 하는 것이 좋단다.
동화를 쓰는 방법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힘들게 고생한 일을 있는 그대로 쓰면 딱딱하고
칙칙해지지만, 유머를 섞어 가볍게 쓰면 소재 자체는 무거운
이야기라도 밝은 분위기를 띄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책을 빨리 속독으로 읽으면 내일을 위한 것이지만, 천천히 깊이
있게 읽으면 5년이나 10년 뒤를 위한 책읽기가 된단다.
책을 여러 권 빠르게 읽는 것보다는 한 권이라도 여러 번 깊게
읽는 것이 좋단다. 그렇지. 세상 모든 것이 다 빨라진다고 책을
읽는 것까지 빨라져서야 안 되지. 사고력을 키우려면 천천히 읽어야
한다.
숲속에서 점심을 먹고 긴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구포 시장이 보였다.
시장 안에 들어가 보니 철망에 갇힌 개들이 보였다. 문득 진이가
생각났다. 끝까지 키우지 못한 진이가 못내 안스럽다.
나는 언제 시골에서 개를 마음 놓고 키워 보나?
아무리 찾아 보아도 살구는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두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새콤하면서도 단맛이 나는 자두를 먹으며 또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는 언제 들어도 재밌다.
첫댓글 나도 자두 사러 나가고 싶다. 찐 옥수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