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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3년 2월 26일 주일 오후 예배 |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95편 1,2,3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36편 5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122편 1,2,3 폐회찬송 – 시 105편 17,18 (고정)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 |
제38주일 | |
성경낭독 : 시 32; 롬 5:12-19 본문 : 요 5:17; 히 4:9-11 제목 : “일하고 쉬시는 하나님” |
제38주일
103문 : 제 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첫째,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봉사와 그 봉사를 위한 교육이 유지되기를 원하시며,
특히 안식의 날인 주일에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에 참여하며, 주님을 공적으로 부르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독교적 자비를 행하기 원하십니다.
둘째, 나의 일생동안 악한 일들을 그만두고 주께서 그의 성령으로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하며
그럼으로써 영원한 안식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기를 원하십니다.
일하고 쉬시는 하나님
제가 신대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한창 우리나라에서는 ‘주 5일 근무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그때 저는 신학 허락을 받기 위해서 같이 시험을 치르는 이들과 함께 대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우연히 이 ‘주 5일 근무제’ 이야기가 나왔고,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하나님이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라고 하셨는데 닷새만 일하겠다니
이런 주장들은 전부 사탄이 하는 이야기라구요!
이런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는 정작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조차도, 정작 그걸 처음 만났을 때는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사고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맞닥뜨렸을 때 우리 속에 얼마나 희한한 생각이나 대응책들이 많았습니까?
오늘날에야 주 5일 근무가 거의 상식이 되어버려, 교역자들 중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 즉 “하나님이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하셨으니, 주 5일 일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라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주장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저는 당시에 두 가지 정도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1) 하나는, “일한다”는 개념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명했을 때, 그때의 “일”이란 ‘직장’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직장에 6일 출근하면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를 지키는 것입니까? 반대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면 주일에 일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요?
이런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4계명이 금하고 있는 “일하지 말라”는 말씀의 내용은 직장을 가지 말라거나, 사업장을 열지 말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하지 말라”에서 일은 우리가 세상에서 기울이는 모든 종류의 노력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에서의 요지는 “내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의 대립입니다. 나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일에 기울이라는 뜻이지, “직장을 주 6일 출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 중 누구도 주 5일 근무하는 것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주 5일 근무여도 우리는 토요일에도 열심히 자기가 맡은 역할에서 충분히 일합니다. 엄마나 아빠로서, 남편이나 아내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토요일에도 일합니다.
반면, 주일을 충실하게 지킨다는 것은, ‘나의 일을 멈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어도 마음이 온통 주중의 일에 빼앗겨 있다면 그 사람은 안식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이와 연결된 것으로, 이 “엿새 동안 힘써 일한다”의 문제를 ‘분할의 문제’로 여긴다는 잘못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십일조를 할 때, 십분의 구는 내 꺼, 십분의 일은 하나님 꺼.....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헌금할 때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나의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고백으로서입니다.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써 ‘전체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죠. 따라서 자기의 수입에 비해 충실하게 헌금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돈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가 결여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걸 단지 ‘내꺼’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내 필요를 위해서만 계속 채우고, 하나님께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비슷합니다. 시간 중 7분의 1을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엿새는 나의 것이고 칠일째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7분의 1만 가지시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코로나 기간 중에 ‘예배’에 관하여 연속 말씀을 들을 때, 일곱째 날이 나머지 여섯 날 전체를 장악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땅에 사는 것’이지 ‘땅에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늘에 올라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일곱째 날에 있고, 나머지 여섯 날은 이 일곱째 날의 정신을 스케치북 위에 그려보는, 실험과 실습의 기간들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교회 가는 것은 전체 사회 생활 중 종교 생활에 해당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자로서의 가치관을 올바르게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거꾸로 “교회에서의 사고방식과 삶의 습관 전체가 일상의 삶에서 넘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의 삶의 특징입니다.
즉, “엿새 동안 힘써 일한다는 것의 분할의 문제로 여긴다는 것”은 6일은 내꺼, 7일째는 하나님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시간도 내 돈도 내 가치나 지위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오늘은 넷째 계명을 배우겠습니다. 그 중 특히 오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일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이 되는가
라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안식일의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방금 들은 것처럼, ‘그 날의 규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이라는 데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잘 살피는 데에 요한복음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주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실 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이 ‘일’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16절에 보면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이 일이 소위 앞으로 계속해서 지속될 예수님 박해의 첫 시작점이 된 셈입니다.
유대인들과 다투는 일은 일단 차치하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신 후에 박해를 받자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응수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유대 전통에서 이해하려고 했던 한 주석가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창세기 2장 2절(“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의 ‘창조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안식’이 현재까지 계속된다고, 곧 하나님의 사역은 종결되었다고 암시한다 믿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한 난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하나님이 계속 안식하신다면, 그가 어떻게 성경에서 ‘활동하신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뒤의 내용에 보면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과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조화시켰는지 설명이 나옵니다.
쉽게 이해해 보자면, 유대인들은 애초에 (안식일에조차) “활동하시는 하나님”,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안식은 ‘쉬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일”에서 쉬어버리면, 세상은 ‘죽은 세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활동’도 하나님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 쉬시면 온 우주가 죽은 세계가 되어버리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안식일에조차 여전히 온 우주에 생명을 공급해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이해를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가 일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씀하심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이 말씀은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 “활동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고, 그렇다면 주님께서도 그 “아버지처럼” 하신다는 말은, 주님께서 지금 “생명을 주시는 일”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기 전에 하신 일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한다고 핍박을 받게 된 상황”이 무엇입니까? 38년 동안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던 자에게 놓임을 주신 일입니다. 우리가 앞의 이해, 곧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한 채로 이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역을 바라보면, 주님은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일’을 하신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일”이죠.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일은 고통 속에 있던 이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이를 고치셨고, “아버지께서 생명을 공급하시기 위해 안식일에도 일하시듯, 나도 생명을 공급하기 위하여 안식일에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의 직접 해설도 나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아버지의 사역’과 연결시키셨는데, 그때의 아버지의 사역이 무엇인가 하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신 일은 다름 아닌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일”, 곧 ‘생명을 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요한복음의 이 말씀을 이렇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측면에서 이해하게 되면,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아주 분명하게 조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심으로써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참된 이해는 무엇으로부터 나옵니까? 우리는 안식일 규례를 통해 본질적으로는 무엇을 얻는 것입니까?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아니시면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나옵니다!
우리는 안식일 규례를 통해서 이 생명을 얻고, 경험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에베소서 2장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계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평일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일요일이 되어서 집에서 ‘완전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식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직업적 일을 하는 죽음(평일)’으로부터, ‘휴식하는 죽음(휴일)’으로 옮겨탔을 뿐입니다. 괌이나 몰디브로 휴가를 가고 여행을 다녀도, 그에게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없고,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지, 전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에게 무슨 안식이 있겠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는가’, ‘무슨 규칙을 지키는가’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안식일 규례의 핵심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참된 안식일이 되려면, 그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하시기 위하여 38년 동안이나 죽음 가운데 있던 이에게 생명을 흘려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진짜 안식일에 할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그 권세를 부여받아 세상에서 그 일을 이루고 계신 안식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안식에 들어가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안식의 날’에 ‘무엇을 해야만’ 이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교리문답의 대답들입니다.
교리문답 103문답의 대답을 보십시오. 교리문답은 넷째 계명을 ‘예배의 날’과 ‘자비의 봉사의 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봉사”는 ‘성도의 교제’라고 읽어도 되겠습니다.
첫째, ......안식의 날인 주일에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에 참여하며, 주님을 공적으로 부르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독교적 자비를 행하기 원하십니다.
아마, 여기 아이들 중에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 것이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야?”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이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야?”
아마도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4장 10절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합시다.
일하고 쉬시는 하나님 and 그리스도
히브리서 4장 10절 말씀은 아주 묘한 이야기를 합니다.
8절과 9절은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으면 후에 다른 말을 말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즉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0절은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쉰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는 누구일까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바는 바로 이어지는 1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를 1인칭 복수로 말했기 때문에, 10절의 “그”는 “우리”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야 할 안식을 말할 때도 원문에도 지시어인 “저”(that)가 붙어 있습니다. “저 안식”입니다. 들어가야 할 곳은 “저기”인 것이죠. 그러니까 10절의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주체가 셋 나옵니다.
창조의 일을 마치고 쉬신 하나님
그리고 “그도 자기의 일을 마치고 쉬셨다”할 때의 그
이어지는 11절에서 “저기 저 안식”에 들어가야 할 우리
그래서 존 오웬이나 아더 핑크같은 개혁파 저자들은 10절의 “그”를 문맥 안에서 읽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그렇다면 10절 말씀의 의미는 이렇게 됩니다.
창조의 일을 다 마치고 안식에 들어가신 성부
구속의 일을 다 마치고 역시 안식에 들어가신 성자
그러면 9절과 10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에 들어갈 일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안식에 들어가 계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우면서도 멋진 사실을 지시해줍니다.
첫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 곧 몸을 입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이 모든 구속의 일들을 다 완수하셨을 때, 도착한 종착지점이 ‘안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속사역’과 ‘안식’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창조의 도착 지점도 안식이었고, 구속의 도착 지점도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최종 목표 지점은 항상 ‘안식’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구속 사역이 궁극적으로는 창조의 사역과 닿아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구속과 창조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무로부터’ 없던 생명을 창조하시는 ‘생명의 원천’, ‘생명의 공급자되시는 분’이십니다.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 없던 생명을 창조하심으로써, 중생하는 주의 백성들 모두에게 ‘생명의 원천’, ‘생명의 공급자’가 됩니다.
셋째, 그래서 이제 세 번째 대상인 주의 백성들이 그 다음 등장합니다. 우리도 11절 말씀처럼 이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창조의 사역을 완수하신 하나님과 구속의 사역을 완수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안식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안식’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예배를 통해 안식에 들어간다
‘안식’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들을 때, 휴양지에서 선텐 의자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요한복음 5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죽음 가운데를 헤엄치고 있는 중생들에게 ‘참된 안식’ 같은 것은 ‘어떤 활동 속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식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은 한가지 뿐입니다.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성부와 성자 속으로 들어가는 공식적인 길을 무엇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 우리가 지난 주일에 들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과 ‘예배’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분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이것이 예배입니다.
절대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배는 국경일이 되면 국가에서 ‘기념식’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메마르고 건조한 기념 의식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오늘날 찬양 집회 같은 데서 흔히 만나는 것처럼 ‘나의 흥에 도취되어’ 열정적인 음악에 몸을 맡기는 콘서트 같은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이 ‘성부와 성자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공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문답의 대답, 곧 “우리는 어떻게 안식을 누리게 됩니까?”의 대답으로 주어진 이 교리문답의 가르침을 잊지 마십시오.
특히 안식의 날인 주일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에 참여하며
주의 이름을 공적으로 부르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독교적 자비를 행할 때
바로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 속으로’,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귀히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거룩한 공동체와 교제를 나누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그래서 무엇보다, 일주일 중 하루는 온전하게 여기에 자신을 다 소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 안식에 들어가게 됨을 주의 깊게 인식하면서, 예배와 기독교적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한 대답
이렇게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을 ‘예배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마무리해도 좋겠는데, 구체적인 질문 몇을 다루고 마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여 몇 가지 세부적인 실천 사항을 말씀드리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1)
우선 한 예를 먼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 목사님이 저에게 개혁교회의 주일 성수에 대해 질문을 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주일에 돈을 쓰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도 되느냐는 종류의 질문이었습니다.
성도들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화란 개혁교회 성도들은 주일에 돈을 쓰지 않습니다. 4월에 읽을 책에서도 느끼실 수 있을텐데, 이런 행동 수칙들에 있어서 좋은 전통으로 자리잡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일에 돈을 쓰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이유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돈을 쓰는 자체만 제제해 왔기 때문에, 결국 ‘음성적으로’ 이를 행하는 전통이 자리잡았습니다. 교회는 돈을 쓰지 말라 하고, 목사님한테 들키면 혼이 나지만, 뒷구멍으로는 다들 하고 있는 방식으로 토착화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일에 돈을 쓰지 않는다”의 핵심은, 우리가 오늘 배운 것처럼, 우리가 참으로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의 ‘실천 사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주일에 ‘내 욕망’을 위해, ‘내 필요’를 위해 무언가를 사는 일을 멈추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행동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는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내가 주일을 ‘하나님의 날’이라고 여기고, 따라서 “엿새 동안의 나의 일”로부터 끊겠다는 것을 고백했다면, 행위로 그것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돈을 쓰지 않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고, 단지 돈 쓰는 일 자체에 걸린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 목사님께 이렇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사욕’과 ‘성도의 교제’를 구별하시라. 그렇습니다. 주일에 나의 필요를 위하여 소비재를 사용하는 일, 그것은 ‘삼가야 할 일’에 해당합니다. 그걸 하면 단순히 ‘죄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행동이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일이 하나님의 날이라 믿습니다”라는 표현으로, 그래서 “나를 위하여 하는 행위들은 멈추겠습니다”라는 표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목사님한테,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성도의 교제를 위해 식당에 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알려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과 가는 것은 ‘나의 소비욕구’를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집에 가서 음식을 하면 더 좋지만, 지금 우리들 형편처럼, 저녁 시간에 집에 도착해서 음식을 만드는 것이 사람따라 편차가 있어서 너무 부담스런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느라고 정작 집 주인은 교제에서 제외되어 버리고 음식만 만들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지는 그것입니다. 주일에 돈을 쓰느냐가 아니라, ‘사욕’과 ‘성도의 교제’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날이니, 내가 필요한 것 사는 일은 좀 다음 날로 미루라는 것이지요.
2)
현실적인 문제를 한 가지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월요일이 빨간 날이어서, 가족들이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주일 오후 늦게 출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을 주일 저녁에 꼭 만나야만 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습니까?
이 역시, 원리는 분명할 것입니다. 주일을 바르게 준수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는 것에 최고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좀 더 자유로우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저녁 시간에 가족들끼리 어울리시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좀 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날 자체의 중요성, 12시가 딱 되는 시간 까지의 시간적 중요성이 핵심이 아니고, ‘예배하는 날’이라는 중요성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일 예배가 모두 마치고 출발해야 할 때, 그 출발 시간 때문에 성도의 교제를 생략하거나, 혹은 온전히 주일을 아름답게 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깎아먹어 가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만, 정상적인 방식으로 예배를 다 마치고 나서 월요일의 휴가를 위해 해당지로 떠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정도의 여유 쯤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혼인을 해야 할 청년들은 기억하십시오. 신혼 여행을 떠날 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늦게 가시기 바랍니다. 주일 예배를 다 마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예배와 성도들과의 교제가 다 끝난 후에 떠나십시오.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꼭 가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또 어떤 것들은 때로 희생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적인 용무를 보기 위하여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자꾸 희생시키는 상황이 되는 것은 “행동이 신앙고백이다”라는 견지에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