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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솔로몬아,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4.10-12
1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일렀다.
2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3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4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0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
11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
12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자, 그의 왕권이 튼튼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2,19-20)와 복음(마태 28,16-20)을 봉독할 수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
말씀의 초대
다윗은 주님의 길을 걸으면 성공할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유언을 남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복음).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자,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며 병자들을 고쳐 준다(복음).
오늘의 묵상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내리신 이 명령은 꽤 가혹한 요구로 들립니다.
험한 지형을 걷기 위한 신발과 맹수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할 지팡이를 제외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식량은 물론이고 숙박에 필요한 돈, 심지어 여벌의 옷도 지녀서는 안 됩니다. 나름대로 필수적인 준비물들인데도 말이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파견 여정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주어진다는 사실, 곧 제자들의 선교 임무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돌보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체험합니다. 그들이 먹을 빵을 손수 하늘에서 내려 주셨고, 마실 물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그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들이 해진 적이 없고, 너희 발에 신은 신들이 떨어진 적이 없다”(신명 29,4). 예수님 제자들의 여정도 이와 비슷하게 자급자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살핌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뿐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옛 제자들의 선교 여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도 하느님의 보살핌은 늘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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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한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려면 적어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마르 8,19-21 참조). 어디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는 소리에 그러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여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마르 8,33 참조). 또 그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가 하면(마르 9,34 참조),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으로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마르 10,37 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파견하십니다.단순하기로는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떠나라는 소리에 그냥 떠납니다. 더구나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챙기지 말라시니 그냥 그렇게 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겪게 될 불편함도, 위험도 많을 터인데 그들은 그냥 떠납니다.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점은 하느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깜냥보다 더 큰 것을 바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제게 단순한 응답을 가르쳐 줍니다. 그 어떤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단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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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도 이런 선교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선교 활동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이기주의,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지요. 대신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며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방해, 무시 등도 감수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여도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점을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때로는 함께 활동하는 이들과 의견 차이가 생기고, 갈등마저 심해집니다. 그러니 선교 활동을 하는 이는 모든 이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지요(1코린 9,22 참조).
이를 위해 자신을 꾸준히 단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만 하지요. 아울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끊임없이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작용하실 때만이, 우리가 하느님을 보는 눈이, 그리고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까지도 다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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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간에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우리가 묵상하는 열왕기 독서가 중단되므로, 솔로몬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미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윗이 세상을 떠나면서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다윗이 왕조를 세운 지 어언 40년이 흘렀으니, 장차 솔로몬이 해야 할 일이 많겠지요. 성전도 지어야 하고 왕궁도 지어야 하며 국력을 한창 키워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를 위해서 솔로몬이 우선적으로 꼭 해야 할 일은, 금과 은을 모으고 군사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서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훈계합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나고 여호수아가 통수권을 이어받을 때,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도 거의 똑같았습니다(여호 1,7-8 참조). 강을 건너가서 영토를 정복한 다음, 그것을 지파들에게 나누어 줄 장본인이 바로 여호수아요 이것이 그의 역할이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다해 모세의 율법을 지켜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라는 이 말씀을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외적으로는 힘을 키워 이스라엘을 막강한 왕국으로 성장시켰지만, 하느님께는 충실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는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 달리,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도 않았으며…….”(1열왕 11,33)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은 하였지만, 엉뚱한 데에 심혈을 기울인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보따리를 많이 준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처럼 우리도 보따리만 잔뜩 마련하고서는, 그것에 의지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르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우리 힘과 복음 선포의 원천은 우리를 파견하시는 분과, 그분의 말씀에 충성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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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족하면 청하고 없으면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힘’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제자들은 그 힘에 이끌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니 선교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다른 것은 준비 못 해도 ‘이 힘’은 지녀야 합니다.사람들은 너무 쉽게 ‘제도’를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을 갖추고 많은 이가 동참하면 ‘힘’이 생긴 것으로 판단합니다. 세속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다릅니다.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숫자가 많아도 ‘하느님의 힘’이 함께하지 않으면 결국은 시들고 맙니다.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소리 없이 문을 닫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교는 ‘마음먹기’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끄심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사도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에게 매인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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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연인으로, 친구로, 또는 아내나 남편으로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선택은 자유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장점이나 탁월함 때문에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그분의 자유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그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학교를 선택하고, 우리가 배우고 싶은 교수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제자로,사제로, 수도자로, 교사로, 선교사로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어떤 직분이나 처지에 있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당부하십니다. 아니, ‘지금 여기’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바라십니다.“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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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많으면 본인도 모르는 새에 게을러집니다. 웬만큼 어려운 일은 물질로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족해야 간절한 마음이 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결실이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기쁨을 만나게 합니다.
일류 선수들은 마음을 비울 줄 압니다. 무아의 상태에서 경기에 임하려 애씁니다. 점수에 집착하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내기’를 하면 언제나 이기던 사람도 ‘큰돈’을 걸면 가끔은 실수합니다. 실력은 그대로지만, 마음이 ‘졸아들었기’ 때문입니다. ‘큰돈’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지요.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행동도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는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자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관리자임을 늘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가르침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실천했기에 기적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인생은 ‘내기’가 아닙니다. 남의 것에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것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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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고생과 시련을 겪기를 바라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께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이니 그러한 부차적인 걱정을 하지 말라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빵은 먹을 음식을 상징하고, 여행 보따리는 여행에 필요한 모든 준비물을 의미하며, 돈은 미처 마련하지 못한 필수품을 구입하거나 비상시에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도움을 뜻합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준비들은 어쩌면 예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을 상대적으로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상 현실적으로 더 이상의 방도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도우심을 청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인간이 당신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고통 받고 어려움에 놓여 있을 때에는 물론이요, 현실적으로 여유 있고 안정되어 있을 때에도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차를 타고 안전띠를 매지 않는 사람이 참 많았지만, 요즘에는 뒷좌석까지 안전띠를 맵니다. 안전띠를 하지 않는 것이 훨씬 편안합니다. 몸이 안전띠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안전띠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안전띠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시속 48km의 속도에서 사고가 났을 때의 충격이 7층 높이에서 떨어질 때 받는 충격과 같다고 하지요. 그만큼 큰 위험에 있으므로, 스스로 보호하고 또 다른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안전띠는 반드시 매어야 합니다. 조금의 편안함을 위해 생명을 담보로 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큰 손해가 분명합니다.
차에 탄 사람이 안전띠를 반드시 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이라는 안전띠를 반드시 매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이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만 같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주님을 생각하면 사랑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놀고 싶은데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라는 것은 큰 구속처럼 보입니다. 나의 노력을 얻은 재화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놓아야 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떠올려 보면 당연히 주님이라는 안전띠를 매어야 할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전띠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도저히 그 명령을 따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명령을 철저히 따랐고,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지금은 부자 청년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결국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더욱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주님이라는 안전띠는 완전한 사람을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당신이라는 안전띠를 매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안전띠를 매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의 굳건한 의지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모범을 떠올리면서 주님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뜻을 잘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견딜 수 없는 뭔가를 원한다. 그래서 부질 없는 것들로 마음을 채운다.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어리석은 희망으로(오스카 와일드).
너무 무거운 도토리
지금은 꾸준히 운동해서인지 불편함 없이 살고 있지만, 한때 제 삶을 힘들게 했던 신체 부위가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허리’입니다. 이 허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매년 병원에 입원하고, 어떤 때는 가벼운 것을 집어 들다가 또 어떤 때는 엉덩이로 차 문을 닫다가 삐끗해서 꼼짝 못 하게 되는 어이없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입니다.
처음 허리가 아파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때는 정말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쎄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다가 쓰러진 것입니다.
도토리는 아주 가볍습니다. 그러나 이 도토리를 줍다가도 병원에 입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허리 상태가 좋았다면 아주 무거운 것을 들더라도 아플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토리 하나에도 꼼짝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내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좌절이나 절망으로 쓰러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튼튼한 내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에 집중할수록 주님한테서 멀어져서 약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마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날 악마가 한 청년에게 나타났습니다.
“흐흐, 이제 너는 나와 함께 죽음의 세계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네 재산을 모두 내게 바치든지, 네 누이를 팔든지 아니면 큰 술잔으로 술 열 잔을 마시든지 이 셋 중의 하나를 행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이 말은 들은 청년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을 했습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내 다정한 누이를 팔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인간의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다. 애써 모은 나의 귀한 재물 또한 어찌 네게 줄 수 있겠느냐? 차라리 술 열 잔을 마시겠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술 열 잔을 단숨에 들이마시고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 술을 즐겨마셨습니다. 늘 술에 취해 살던 그는 결국 가장 사랑스런 누이를 팔아넘겼고, 급기야는 재산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악마의 뜻대로 그는 죽음의 세계로 끌려갔습니다.
악한 것들 중에 어떤 것만 안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내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끊으려면 다 끊어야합니다.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말아야합니다. 대죄는 내 안에서 성령의 귀한 은총을 잃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실 때 힘을 넣어 주셨던 ‘지팡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성령’입니다.
성령이라는 무기를 주시며 파견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마치 빛처럼 어둠을 침략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둠이 가만히 있을까요? 악착같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인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쳐 이겨야 합니다.
다만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무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잃느냐면 재물에 집착할 때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혹은 인간적인 애정에 얽매일 때도 잃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아의 욕구이고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성령을 잃게 만드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갈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막대기도 있었지만 ‘매끄러운 돌 다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사무 17,40 참조). 막대기는 분명 지팡이, 즉 성령님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이 꺼지는 경우는 육의 욕망에 넘어갈 때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지팡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육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통제력도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조약돌 ‘다섯’은 ‘오감’, 즉 육체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좋은 무기를 주셔도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데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조약돌이 매끄러웠다는 말을 굳이 쓴 이유는 다윗이 그때는 오감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쳐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영혼입니다. 많은 영혼을 주님께 바치려면 내 안에 주어진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절제하여 적어도 대죄에는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먼저 길러야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한 모임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2세의 어르신께서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위원회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1990년부터 작성한 ‘연도명부’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3458명의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명부에는 고인의 이름, 세례명, 나이, 장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고인의 유족들은 고인을 위한 기도를 들으며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면 연도를 받고 싶어서 개종하신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3458명의 고인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어르신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가시면 연도명부를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위원회에 선물로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숨은 봉사자들이 계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 90이 넘으신 어르신께서 고백성사를 원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미국에 오신지 오래되셨지만 영어가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어르신이 사시는 아파트 옆에는 미국 성당이 있어서 그곳으로 미사를 가지만 3년 동안 성사를 못 보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연락이 되었고, 저는 어르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저는 어르신이 가지고 계신 오래된 가톨릭 기도서를 보았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당시에 새롭게 개정된 기도서였습니다. 기도서를 열어보니 1968년에 발간되었습니다. 52년 된 기도서입니다. 어르신께서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기도서를 가지고 오셨다고 합니다. 기도서는 진리가 담긴 보물이라고 하십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낡았다는 이유로 보물을 너무 쉽게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진리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입원을 하신 교우 분을 위해서 봉성체를 하였습니다. 병실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자매님은 저를 보면서 간절한 모습으로 부탁을 하였습니다. ‘오늘 암 수술을 받기로 했는데, 신부님께서 기도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병원 복도에서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자매님의 간절함을 기억합니다. 함께 기도를 하면서 자매님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매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술이 잘되셨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은 기억입니다. 사제가 된 보람을 느끼던 기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욥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의지하며 걸어간다면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소녀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할까요?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욕망, 욕심, 시기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길과 채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채비가 있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이 있어
채비하는 거지
채비하러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나러
채비하는 거지
채비가 되지 않아
길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나기 싫어
채비하지 않는 거지
채비가 모자라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채비에만 신경 쓰다
길을 잃는 거지
채비하다가
길을 놓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
12제자의 사명
곽승룡 비오 신부님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 시작하였다.”(마르6,7)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로마 교황청은 교회의 선교활동을 위한 성성(聖省)부서를 배치하였다. 일명 포교성성(De propaganda fide)라고 하였다. 그 후 이름이 바뀌었다. 왜하면 포교(propaganda)라는 말이 현대인들에게 그렇게 좋게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서였다. 어떤 상품을 광고하는 이미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리스도 신앙의 전파를 위해 ‘선교’라고 호칭되었으며, 이 선교는 초대받은 자만이 수행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초대를 받고, 선발되어 양성을 받아 세상에 예수님의 제로로 파견 받은 사람만이 선교를 완성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따르는 길을 가르쳐주셨는데, 선교사(사목봉사자)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선교(사목)란 무엇일까. 먼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사목봉사자)라면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주님은 선교라는 당신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실행할 방법을 말씀하신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 시작하였다.”(마르6,7) 이 말씀은 선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둘씩 짝지어 파견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교의 열매가 열리게 된다. 선교는 서로에게 꽃이 되어주어 사랑의 열매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뭐 때문에, 어디까지, 나를 원하시고 파견하실까. 특히 나를 파견하는 그분이 하느님인데, 그래서인지 나의 꿈도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느님 한 분만이 다른 이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라고 허락하신다. 그래서 선교사(사목봉사자)는 하느님의 권위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남용하면 미래에 펼쳐 질 드라마 각본을 즉시 망치게 하는 재앙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6,8)
파견을 받는 봉사자에게 예수님은 돈 없이 출발할 것을 권고한다. 인간의 경험이 가르치는 바, 어떤 수단을 써서 생기는 모든 이익들과 효과적인 생각들은 그것들을 확산시키는 데에 지불할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9)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일에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도록 권고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평화를 살아가면서 평화를 가르치는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여정에 필요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파견’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사자 및 전령은 하느님이외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무거운 박해의 시기 때,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던 순간에, 많은 백성들이 회개하게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도의 배는 순풍을 만나든 역풍을 만나든 모든 조건들에서 다른 연안을 향해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마태 8, 24)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일을 하려다보면 늘 안좋은 일들도 종종 생겨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곧 우리가 사도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마귀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하려고 하면서 우리를 흔들어 놓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명히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다고 전합니다. 곧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함께 보내주시면서 더러운 영들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통해 언제나 힘이 되어주심을 기억하며 늘 기도를 통해 성령과 함께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분의 성령과 함께 이루어 갈 때 비록 지금의 상황이 악의 공격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결말은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전역신고식 하러 갑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신부님, 2020, 고향 오송본당 설정 60주년입니다. 본당에 오셔서 미사 함께 하시고 강론을 해 주십시요” 출신 본당신부님이 오늘 나에게 한 부탁이다. 사제서품일이 1,26일이고 엊그제 사제생활 37년이 지났다. 사제생활 동안 출신 본당에 가서 교우분들과 미사를 드린 것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고 싶었다. 나는 신부님의 부탁을 받고 기쁘게 허락을 했다.
오송본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하고 파견되어 은퇴할 때까지 네 곳에서 지냈다. 음성 7년반, 충주 교현동 8년 반, 옥산에서 16년, 그리고 청주 산남동 4.5년 그리고 은퇴사제가 되었다. 한번 파견되면 그곳에서 오래 산 것이 나의 사제생활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행복하게 지낸 것 밖에 기억되는 것은 없다. 사목도 했고 선교도 했다. 사목은 본당사목이였고, 선교는 학교를 일구며 학생들과 산 특수사목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제생활도 짧게 훅 지나갔다. 보람이 있었다.
구원을 향한 발걸음에서 나는 기다려도 보았고, 함께해 보았고, 상대의 수준을 헤아리며 내려가 보았다. 나는 교우분들을 사랑했고 청소년들을 사랑해 보았다. 그들과 함께한 덕분에 예수님을 만났고 하느님을 뵈오며 ‘구원’을 향해 살아도 보았다. 마음을 드높여 주려고 작은 십자가를 져도 보았다. 오늘 나는 하느님께서 감사를 드리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불림받아 권한을 부여받고 사명에 충실하며 책임을 지며 살았다. 나는 마음의 부자가 되어있다. 이제와 생각하니 교우분들이 고맙고 학생들이 고맙다. ‘그분의 별’이 되어 나를 주님께로 이끌어 준 분들의 고마움 덕택이다. 출신 본당, 첫미사를 봉헌하고 사목선교지로 떠나살다 은퇴하고 오늘 나는 본당신부님의 호출을 받았다. 첫미사를 드리고 파견받은 곳으로 떠났다 다시 출신본당으로 돌아가서 잘 마쳤다고 전역신고를 하러 가야겠다.
“네, 신부님, 잘 마추고 돌아가 전역 신고식 하겠습니다. 덕분에 잘 살았다고 말입니다.” 나는 본당신부님에게 받은 부탁의 답을 했다. “네, 갈게요! 출신 본당 설정 60주년을 축하드리러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목요일>(2020. 2. 6. 목)(마르 6,7-13)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신 이야기가 있는데,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마르 6,1).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신 일을 직접 생생하게 목격했을 텐데, 그때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분이 그런 일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기가 꺾였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대한 각오와 결심을 더욱 새롭게 했을까?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의 기가 꺾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든 나자렛에서 겪은 일은,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예방주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가 아니라 고위층 사람이었다면, 또는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었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바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세속에서 높이 떠받드는 어떤 학위나 지위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정치적인 배경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박해를 안 받았을 것이고, 시련과 고난을 덜 겪었을 것이고, 선교활동을 편안하고 쉽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빈손’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이 명령은 세속에 속한 것들을 욕심내지도 말고 갖지도 말라는 명령이고, 오직 믿음의 힘으로만, 또 ‘하느님 안에서만’ 선교활동을 하라는 훈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세속의 그런 것들은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마르 4,19).
“그래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다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선교활동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과 방법이 중요한 활동입니다.(“복음을 ‘얼마나’ 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돈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전하는 활동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권력의 힘’이나 ‘정치적인 배경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 그냥 세속의 정치활동입니다.
세속의 학위나 지위 같은 것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활동이 아니라,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활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 으로 말할 수 있는가? 꼭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따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이 지난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그런 것들을 얻기를 바라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선교활동은 세속적 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얻으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의 봉사활동’입니다.
<‘빈손’으로 떠난 사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또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인도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고, 나누어 주는 사람 자신도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사도들이 ‘빈손’으로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믿음과 열정으로 가득 차서 떠났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가득 차서 돌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떠날 때에도, 또 돌아올 때에도 영적으로 풍요로운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세속 회사들의 영업활동처럼 한다면, 신자 수를 늘려서 교세를 확장하고,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형 교회가 되고, 재산을 축적하고 증식해서 점점 더 부유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러면 그 종교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선교활동의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 그것만이 선교활동의 목표입니다.(교회를 운영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의 교회는 ‘돈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운영합니다. 혹시라도 이 말에 대해서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고, 믿음이 없다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곧 ‘삶’입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생활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신앙인들이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재산을 낭비하는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참 생명, 사랑, 평화, 기쁨을 누리고 있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세속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고,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 뜻 맞게 진화해가며 사는 신앙인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빵 보따리 돈 신발 옷 등 더 이상 가져가지 말고 선교 떠나라는 지시!
참 어이없는 지시? 예수님이나 제자들 참 단순? 사는 게 그게 아니다?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어떤 고장의 어떤 집에 의지하라는 걸로 봅니다.
내 실력 재물 접고 부족함 해결은 들어갈 그 집에 의지하란 거 같아요.
그냥 단순하게 하늘나라 알리란 지시에서 민주주의의 뜻을 새겨봅니다.
정치인들의 주인은 국민이고 그저 단순히 정치라는 맡은 일 하란 거죠.
물욕 정권욕 이라는 그 욕심 때문에 사람들이 속되게 변질해 가잖아요,
욕심없이 하늘 뜻 맞게 진화해가며 사는 게 신앙인들의 삶 방향이겠죠.
떠남의 여정 -‘꼰대’가 되지 맙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일본의 순교 성인들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지금부터 423년전 1597년 2월 5일, 성 바오로 미키 예수회 사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에 순교한 바오로 미키의 처형장에서의 설교 마지막 부분이 감동적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복종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나는 나의 박해자들을 용서합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청하며, 나의 피가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비처럼 나의 동포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전사’로서 살다가 장엄한 순교의 전사戰死를 한 바오로 미키입니다. 잘 살았기에 거룩한 떠남의 순교의 죽음입니다.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결같이 기쁘게 분투奮鬪하시는 모습도 그대로 주님의 사랑의 전사로서의 모습입니다.
떠날 때 잘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날마다 깨어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지막 죽음의 떠남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읽은 ‘꼰대’에 관한 글이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떠나지 않고 남으면 ‘꼰대’가 된다. 세대 간의 소통은 어느 지점에 가서 불통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불통의 지점에서 이전 세대는 자리를 비우고 떠나야 한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어람靑於藍(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이나 은퇴가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부모의 시대가 끝나야 자식의 시대가 온다. 선배가 떠나야 후배가 일을 맡을 수 있다.”-
그러니 날마다 새롭게 떠나야 합니다. 밖으로는 정주定住의 산山, 안으로는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떠나는 맑게 흐르는 강江으로 살아야 합니다. 떠나기를 멈추어 웅덩이에 고인 물이 되는 순간, 본의 아니게 꼰대가 됩니다. 사전에서 찾아 본 꼰대의 뜻 풀이입니다.
‘꼰대 또는 꼰데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이다.’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마지막 떠남의 임종장면이 감동적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맞이하는 마지막 죽음의 떠남입니다.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이야 말로 참으로 복된 떠남입니다. 솔로몬에게 주는 마지막 유언의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유언후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히니 해피엔딩의 복된 죽음입니다. 과연 이런 삶의 지침이 될만한 유언을 남기고 떠나는 어른들은 몇이나 될까요? 아마 이보다 결정적 도움을 주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떠나기전 남은 공동체 형제들 모두에게 유언과 더불어 강복을 주고 또 공동체의 강복을 받고 떠나는 거룩한 죽음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하겠지요. 평상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이런 죽음이겠습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충고하십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가장 설레었던 순간은 아침마다 새로운 떠남과 출발의 시간이었습니다. 참으로 설렘의 기쁨으로 떠나는 날마다의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떠나야 할 때 미련없이 기쁘게 잘 떠날 때, 늘 새롭고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를 아는 지혜요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받아 무소유로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소유물이라곤 최소한의 지팡이와 신발이지만 무엇보다 주님을 모시고 있으니 전부를 소유한 것이고, 어디를 가나 환대처가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홀가분한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 선포의 여정입니다.
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하느님 나라와 더불어 회개를 선포하며,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줍니다. 예나 이제나 참 다양하고 많은 더러운 영의 마귀들이요 병들입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회개할 때 축출되는 마귀들이요 치유되는 병자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이요 영육의 건강입니다. 저절로 꼰대가 되지 않습니다. 누가 85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꼰대라 하겠는지요. 누구보다 살아있는, 깨어있는 영혼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요 날마다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떠남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순도 백프로'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더러운 영을 쫓는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마르코 6장 7~13)
파견하는 이가 파견받은 이에게 권한을 줄때 그 권한의 종류가 있고 어느 선까지 부여하는지 잘 인식해야 수행도 잘하게 됩니다.
둘씩 파견될때 필수품은 꼭 챙기고 편리한 것들에 대해서는 취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처음 해외로 피정 파견을 갈때 짐가방이 차고 넘칠 정도였지만 그후 어디를 가게되든 최소의 물품으로 살아내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지요.
겪어봐야 알고 부딪쳐봐야 깨닫는 우리.
'명하신대로 순도 백프로의 맘 갖고 따르면 안되는게 없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함승수 신부님
오늘의 제1독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른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삶을 어떤 식으로 살라는 마지막 권고, 즉 ‘유언’을 남기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대왕’으로서 사람들이 꿈꾸는 온갖 부귀와 영화를 다 누려보았지만, 막상 겪어보니 그런 것들이 주는 기쁨은 금방 사라지고 다 부질없더라. 그러니 너는 다른 데에 한 눈 팔지 말고, 쓸데 없는 것들을 갖고자 욕심내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데에만 온 힘을 기울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언제나 너와 함께 하실 것이고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이 될 것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만은 자신처럼 쓸데 없는 욕심으로 인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길을 걷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참된 행복의 길만 걷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이 말 마디 하나 하나에서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충고도 어찌보면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신앙의 길을 떠날 때, 쓸 데 없이 욕심부려서 이것저것 많이 들고가지 마라. 우리 삶에 꼭 필요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사실 두 가지 정도 뿐이다. 하나는 나와 함께 길을 걷는 ‘동반자’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지탱해주고 지켜주는 ‘지팡이’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고, 그런 것들을 많이 지니면 지닐수록 하느님을 따라 걷는데에 방해만 될 뿐이다. 살면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실테니 오직 그분만 믿고 의지하면서 이 길을 끝까지 걸어라. 그러면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참된 행복’을 얻는데에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힘든 인생길을 나와 함께 걸으며 위로와 힘이 되어줄 ‘동반자’인 친구와 가족, 그리고 언제나 나를 지켜주고 지탱해줄 든든한 ‘지원군’인 하느님만 계시면 어떤 시련과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들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의존하고 집착하기 시작하면 내 영혼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구원의 여정을 걷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렇기에 내 삶에 꼭 필요하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발 밑의 먼지를 털듯 단호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부르심을 사는 이들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사명’이라고 하는 말은 마땅한 목적지와 그곳에 이르는 충실한 내용 두 가지 모두 충족해야만 완성됩니다. 여기에 하느님 파견의 의미가 더해지면 사명은 ‘소명’이 됩니다. 사명을 사는 사람은 많지만 소명을 이루는 이는 적습니다. 나의 목적과 구별되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부르심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서 식사당번을 맡아 장을 보러 나갔습니다. 추운 겨울철 식욕을 돋우는 식재료들을 찾는데 길모퉁이에 좌판을 펴고 앉아 계신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얇은 외투 한 장을 겨우 걸치고 야윈 얼굴로 칼바람을 맞으며 묵을 팔고 계시는 모습에 마음이 울컥하여 고기를 사려던 부식비를 몽땅 소진하고 말았습니다. 벌써 저녁 어스름인데 삐뚤빼뚤 쌓아올려진 많은 묵들이 주인을 만날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묵밥과 묵사발, 묵무침, 묵국수 등 수도원에 때 아닌 묵잔치가 벌어지는 가운데 식사당번의 사명은 아름다운 소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곳곳에 회개를 선포합니다. 이들의 선포는 ‘회개하라’는 날카로운 외침이기보다는 분명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따뜻한 초대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소명’임을 기억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아무 것도 소지하지 말고 떠나라고 하신다. 이 말을 들으면 청빈이 떠오른다. 청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무엇에 대한 수단인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에 군더더기가 없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영혼의 군더더기 없는 청명하고 순수한 영혼을 말하고 있다. 이런 영혼을 가지면 물질적인 가난은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가난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가난하게 살면 이런 순수한 영혼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를 대면하고 직관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들릴 수 있는 그런 가난을 말한다. 그런 영혼을 희망하며 오늘도 매서운 추위의 아침을 연다.
이틀 전에 내린 눈을 어제 치웠다. 세 시간 정도 눈을 치우며 이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 영혼을 일깨우고 있음을 본다!
예, 결산서의 깨끗한 마무리< 마르코, 6/7-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매년 마지막과 시작을 잘 운영 하려고 어떤 단체든지 에산과 결산을 하면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합니다. 저는 여려 본당을 부임하고 떠나게 되어 마무리와 시작을 잘하도록 늘 긴장과 정의롭게 결산을 하고 잘 시작하려고 예산에 정성을 들립니다. 특별이 교회의 예산은 신자들의 봉헌물로 운영되기 때문에 정성것 들이는 봉헌 재산을 한부로 사용할 수없기 때문입니다. 본당에 어떤 사업을 하였으면 일의 결산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어는 동내에 들어가 마물다가 떠나게 되면 “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 하신 이유는 부정을 하지 말고 깨끗한 정산을 하고 떠나라는 말입니다.
저는 새로 부임하는 본당에 가서 당장 저녁거리가 없어 불편하여 이런결심을 하고 실천했습니다. 오시는 분이 일주일을 사장을 보지 않아도 될 만금 음식 준비와 보임하여 오실 때 맞일 할 손님 것 까지 생각해서 마련해놓고 떠납나다. 교회의 돈은 정성 것 봉헌한 것이어서 정성 것 시용하면서 본당 사목에 필요한 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 본당에서 성당 앞 땅을 판다고 하기에 1억 원이 필요한데 은행에 신용거래를 하는 신자 한분이 대출을 받아 따을 구입하고 2년만에 은해대출을 갚게 되었는데 6000만원은 신자들의 모금이고 4000만원은 예산에서 절약하여 갚았으며 이자는 대출해주신 분이 대납해주어 해결해서 마무리를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홈푸러스 매장에 안에 식당 하는 청년이 찾아와서 사업상 상담을 청해서 장부상에 100원도 틀림이 없어야 하고 100원을 소중하게 다르고 100원이라도 저축하는 습관을 기루고 100원이 틀이면 사업은 망하게 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예 결산의 정확한 처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 건강 생명 자연의 힘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함을 깨닫고 정학한 햄을 받쳐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머리털하나도 헤아리며 정확이 아시는 신판관이십니다.
예 결산을 검토하듯이 한 잎도 틀리지 않도록 바로 개산하고 받은 것을 돌려 들이고 특별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한 잎도 틀이지 않도록 바르게 개산하고 원칙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깊이 의식하고 작은 것을 바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팔요한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일에 정의와 공정 과 사랑이 정확한가를 헤아려 보며 살아가기를 기도합시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요즘 선교하기가 예전보다 힘들어졌다고 하는 중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겹쳐서 여러 가지 장애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가 하면, 1월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선종소식이 들리더니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여러모로 다방면으로 조심하는가 봅니다. 아무튼 따지고 보면, 언제 선교가 편안하고 쉬운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라고 합니다. 왜 둘씩 파견하셨을까? 선교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수일까? 레지오 마리에 교본에는 “한 명은 말로 선교하고, 한 명은 옆에서 주님께서 그 말을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주십사 하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어쩌면 둘이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다른 한 사람이 그 옆에서 지지해주는 모습도 보기 좋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라고 합니다. 아마도 복음을 전하는 일 이외의 일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니, 그런 것들에 신경쓰느라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감소시키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어서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0-11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 이외에 다른 어떠한 목적이나 동기를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12-13절)고 합니다.
선교를 향한 우리의 열정이 이 새로운 시기에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지역 환경에 걸맞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파트는 아파트 주거 환경에 맞춰서, 주택은 주택의 환경에 맞추어, 연령별, 성별로 적절한 선교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실현하여 우리 성당을 동네 샘으로, 복음의 주님 나라로 변화시키기로 합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다.
최민석 신부님
어제 나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한 동안 가지 않던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 이 화려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먹었다.
역시나 몸은 즉각 배출 작업을 시작하기 시작하더니 저녁 내내 수도 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각오하며 나누었던 거라 속수무책이었다. 어제 밤을 거쳐 새벽까지 한마디로 내가 생각해도 너무할 정도로 엉망진창의 몸이 되었다.
밤새도록 충분히 경험한 후에 비로소 몸님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항암 중 미각을 사라지고 오심과 구토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때를 기억하면 지금 이대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잠시 잊어버린 것이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이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말씀으로 생겨났고 그 분의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1-5)
하느님 말씀이 자신을 보여주고자 사람의 몸으로 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 사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이다. 속에서 발산하는 빛 곧 ‘영광’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영광이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아들의 무조건적 순종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영광’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 31-32)
하느님의 곧 주시리라고 하신 그 ‘영광’이란 다름 아닌 십자가 수난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실천하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난이 승리로, 절망이 희망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어둠이 밝음으로 바뀐다. 아니 예수님에게서 수난이 곧 승리요, 절망이 곧 희망이며, 죽음이 곧 생명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 되는 경계가 사라진 ‘진리’가 확인된 것이다.
거꾸로 저 무한한 광명을 가려 어둠을 보게 하고, 삶의 길을 등져 파멸을 향하게 하는 것이 사탄이다. 악마는 생명에서 죽음을 보게 하고 예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보게 한다. 동일한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젊고, 건강하고, 돈이 많은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젊을 때는 행복한 순간은 아주 짧고, 후회되는 시간은 아주 길게 느껴진다. 어쩌면 세상을 오래 살아본 분들이 행복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세상 경험이 많은 분들은 삶의 사소한 행복을 누구보다 많이 아는 분들이다.
행복의 기회는 언제나 바로 지금 속에 있다. 그렇다. 삶의 사소한 행복이란 지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 지금 보는 경치를 보는 순간, 상쾌한 바람과 서늘한 물을 느끼는 순간, 만나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바로 그 현존하는 순간이 주는 자유와 평화 기쁨이 참 행복이다.
내 영혼의 행복은 미래를 향한 자신의 어떤 노력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이루고 얻으려는 그 마음과 노력들이 ‘정지’할 때 비로소 오는 것이다. 현존의 행복을 잊으면 자꾸 과거의 행복을 회상하고 미래에서 행복을 구하게 된다.
세상에서 치를 건 치르고 아플 건 아프고, 볼 것은 봐야 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 달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게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열린다. 지금 이대로 몸을 아끼고 사랑하기로 한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동시대의 저자가 쓴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기’에서(Cap. 14,109-110: Acta Sanctorum Febr. 1,769)
그들이 못박혀 있던 십자가들이 땅 위에 세워졌을 때 놀라웁게도 모든 이들은 파시오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가 준 격려의 말에 응하여 견고한 자세를 취했다. 원장 신부는 거의 부동 자세로 시선을 하늘에다 못박아 놓고 있었다. 마르티노 수사는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라는 시편을 외웠다. 프란치스코 블랑코 수사도 낭랑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감사 드렸고 한편 곤살보 수사는 목소리를 좀더 높여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낭송했다.
우리 형제인 바오로 미키는 자신이 이제까지 서 보았던 강단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강론대 위에 서 있다고 느끼고서 우선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는 일본인이자 예수회원이라고 밝히고, 자기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그 위대한 특전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강론을 마쳤다. “이제 이 순간을 맞아 내가 진리를 배반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여러분 중에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국왕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려 이 마지막 고뇌의 순간에 동료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모든 동료들의 얼굴에 커다란 기쁨의 표정이 나타났고 특히 루도비코에게서 그러했다. 군중 가운데서 한 교우가 루도비코에게 “당신은 조금 있으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외치자, 그는 기쁨에 넘친 동작으로 손과 온 몸을 위로 뻗쳐 모든 군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루도비코 곁에 있던 안토니오는 하늘에다 시선을 못박고는 예수와 마리아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 나서 나가사키의 주일 학교에서 배운 “찬양하라, 주님을 섬기는 아이들아.”라는 시편을 노래했다. 그 곳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과제 가운데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시편의 학습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평온한 얼굴로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구경꾼에게 참된 그리스도교 생활을 영위하라고 격려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행위들로써 그들은 기꺼이 죽는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네 명의 회자수들이 칼집에서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장검을 꺼냈다. 모든 신자들은 이 무서운 장검을 보자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외치고 슬피 울면서 탄식하여 그 울음 소리는 하늘까지 치솟았다. 회자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두 차례 칼을 휘둘러 그들을 쳐죽였다.
길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에 비춰볼 때 인생을 참 잘못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고도 하시고 머물라고도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떠나서 가라고 하시고, 복음 선포를 하러 가서는 한 집에 머물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날 줄 알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런데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로 합니다.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는 떠나지 못하고 안주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지 못하고 역마살이 낀 사람 마냥 떠나려고 합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경우 선교하러 가라, 복음 선포를 하러 가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면 옴짝달싹하지 않고 들러붙어 앉아 있고, 고통이 조금만 닥치거나 누구 때문에 조금만 불편하게 되면 같이 살 수 없으니 떠나겠다고, 공동체를 바꿔 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지요.
그런데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겠지만 그중에서도 떠남과 머묾에 있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다 할 것입니다.
있던 곳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하고, 떠나는 동시에 모든 것이 다 바뀌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복종 또는 굴종이고 기꺼이 할 때만 순종이라고 할 때 순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특히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라고 하시는 그 길이 지금 머무는 곳보다 다 나은 곳이기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그곳으로 보내시는 거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뒤집어 얘기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지로 밀어 넣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시지 않고, 생명과 행복의 땅으로 보내시는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선교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는 한 수녀님의 파견 미사를 제가 주례하기 때문인데 그곳에 가면 엄청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이 불을 보듯 뻔해도 그곳이 나에게는 더 나은 미래이고 행복이라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니 그 믿음이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길을 더 힘차게 가기 위해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새로운 길을 흔들림 없이 가게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행복하고 열정적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누누이 하는 얘기지만 사랑할 때에야 고통스러워도 그 길이 행복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행복하기에 그 길을 열정적으로 갈 수 있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되지요.
오늘 저는 길 묵상을 마치면서 다윗의 마지막 길을 묵상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제 이 세상 삶을 마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길이 끝나면 천국의 나그네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나그네 길은 평안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길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걸어온 나라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시므온처럼 두려움 없이 평안히 떠나는 것이 이제 마지막 길의 관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6, 7-13(연중 4 목)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립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어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신 것은 선포에는 증거가 동반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들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다.”(6,13)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는데,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제자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 곧 증거가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선포자는 곧 증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지요? 진정, 이 말씀의 지팡이의 권능에만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이지만,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아 가서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 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음의 기쁨은
제자들의
파견으로 다시
뜨거워집니다.
파견의 체험은
성장하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파견으로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하는지를
깨닫습니다.
파견은 진리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파견은
둘씩 짝지어
보내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파견은 가장
직접적인
주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파견은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을 향하는
파견의 본질입니다.
파견은 날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파견의 소명에
충실한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파견의 삶입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사제서품식에 참석하면서 내 자신이 사제서품 받은 것이 엊그제만 같은데 신부가 된 지 벌써 20년 차에 접어들었더군요.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아무튼 20년째 사제로 살다보니 또 인터넷이나 방송 등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종종 저를 알아보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자유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어떤 신부님의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나를 알아보는 분들이 많아서 함부로 살 수가 없어. 그래서 감사해.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잖아.”
남들의 시선에 집중하면서 사는 것이 피곤한 것 같지만, 오히려 죄를 멀리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누군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공짜로 무엇인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사랑에 대해 부담감을 갖게 되는 것은 여기에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내가 받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 관심과 사랑은 조만간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외면 받고 있음에 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집중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당연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할 정도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이렇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세상에 파견되는 것에 대해 제자들은 철저하게 따릅니다. 분명히 고생길이 훤하게 열린 것 같은데도 제자들은 그 어떤 불평 없이 주님의 뜻대로 선교 활동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명령이라도 기꺼이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의 명령을 받아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온갖 불평불만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또한 어렵고 힘든 이유만을 찾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내 자신을 사랑하시는지를 그래야 주님의 뜻을 더욱 더 충실히 실천하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은 아니다. 이는 곧 두려움이 없어야 성공이라는 것이다.
열심히 만으로는 안 됩니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한 어부는 대구 잡이로 부모를 봉양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대구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그 지역 어종이 바뀌었고 이제는 대구는 없고 청어가 나타난 것이었지요. 이에 어부들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청어가 대구보다 작아서 그물 사이로 다 빠져나가기 때문에 더 촘촘한 그물이 필요했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촘촘한 그물을 짜고 있을 때, 이 어부는 말합니다.
“나는 내 그물이 손에 익어서 좋아. 그래서 새 그물을 짜지 않고 그냥 이 그물을 사용할거야.”
어떻게 되었을까요? 항상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심히 바다에 나갔지만 아무 것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그물은 촘촘하지 않아서 청어들이 그냥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합니다.
나쁜 남자가 되어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에 한 여자 청년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너무 착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 이해해주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주는 것이 못마땅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청년은 남자가 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내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만나지 마라, 응? 오빠가 전화하면 재깍 재깍 받고!”
“오늘은 오빠가 먹자는 거 먹고, 오빠가 보고 싶은 영화 보자.”
“내일 시간 좀 내라, 바다나 보러가자.”
이런 남자를 소위 나쁜 남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아보면 후회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항상 저자세로 다 이해만 해 주고 상대의 편의만 봐주려고 하는 남자는 왠지 매력이 떨어지게 되고, 나쁜 남자는 언제라도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지니고 있기에 무언가 내가 모르는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거미는 이미 자신의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거미줄을 쳐서 더 큰 잠자리를 잡을지가 관심사입니다. 착한남자는 이미 걸려든 하루살이와 같고 나쁜 남자는 걸려들지 않는 잠자리와 같습니다. 이미 잡힌 하루살이에게는 관심이 줄어들고 잡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일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왠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나쁜 남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자신을 받아들이는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은 제자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대주어야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 고을을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중의 보잘 것 없는 것의 표징입니다. 창세기 3,14절에서는 뱀이 벌을 받아 평생 기어 다니며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먼지이고, 3,19절에서는 죄를 지은 인간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30:10 “제 피가, 제가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됩니까? 먼지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으며 당신의 진실을 알릴 수 있습니까?
따라서 발이나 몸에서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지금까지 나는 먼지와 같은 당신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럽혀진 내 자신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먼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에는 더 이상 내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교를 하다가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툭툭 털고 나와 버리십시오. 그들은 저자세로 계속 자신을 대해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하고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나를 통해서 저들이 어떤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할 만큼 하시고 유다에게 “이제는 네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를 놓아버리십니다. 그를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나의 경고요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그리스도께 후회하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기쁜 마음으로 유다를 맞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은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고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서 파견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는 사람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33명의 사제와 21명의 부제가 탄생합니다. 새 사제와 부제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오늘 서품을 받는 분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 같습니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의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한 유언이지만, 오늘 서품을 받는 새 사제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 교구장님께서는 새 사제들에게 서품을 주십니다. 그리고 교구 사제들의 권한이 담긴 임명장을 주십니다. 새 사제들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어진 직무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름을 대면 금세 알 수 있는 가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히트 곡을 낸 가수가 처음에는 음반사의 심부름꾼이었다고 합니다. 성실하게 일을 하는 젊은이를 눈여겨 본 사장님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는 노래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장님은 젊은이에게 노래를 한 곡 주었습니다. 젊은이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를 아주 잘 불렀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끄러움에 몸을 감춘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아담에게 낙원은 이미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밝은 태양도, 싱그러운 바람도, 들의 꽃도 아담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아담은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의정부 어머님께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시청 역에서 내렸습니다. 늦은 밤, 역에서 내려 명동까지 걸어오는데 잠시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걷다보니 광화문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청계천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명동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길에는 이정표가 있기에 방향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몇 번씩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도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생각이 하나의 흐름으로 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맡겨 드리지 못하고, 나의 생각을 짜 내려고 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한 순간 하나의 주제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생각이 정리되고 글이 써지곤 합니다.
정말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출세, 성공, 권력, 재물의 변두리를 맴돌면 나의 마음도 그곳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 가치, 목표는 철저하게 경쟁과 성공의 신기루를 행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탐욕의 독버섯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성공과 출세의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의 덫에서 방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서품을 받는 젊은이들에게 물어 보실 것 같습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 또 저에게도 물어 보실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너 어디에 있느냐?’
내 삶의 성경책, -한결같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강론 제목은 전혀 뜻밖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윗의 파란만장했던 삶에 마침표를 찍는 임종장면입니다. 아, 이렇게 한 인생이 끝납니다. 순간 다윗의 삶이 한 권의 성경책처럼 느껴졌고 즉시 택한 “내 삶의 성경책-한결같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삶-”이란 강론 제목입니다.
한 평생 믿음으로 살았던 지인들의 임종장면을 볼 때 마다 와닿는 느낌은 각자 고유의 인생이 그대로 한 권의 성경책 같다는 것입니다. 죄와 은총이 점철된 하느님의 성경책입니다. 사실 무수한 성인전들을 읽으면 그대로 각자 고유의 성경책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독서, 거룩한 독서로 일컬어지는 라틴어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용어가 바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입니다. 요즘 많이 소개되고 있는 영성생활의 필수 수행입니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수행은 세 대상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1차 대상은 신구약성경책, 2차 대상은 자연성경책, 3차 대상은 내 삶의 성경책이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들음-묵상-기도-관상-실천’으로 이뤄지는 신구약성경의 렉시오 디비나가 전 삶으로 확장된 형태요 이런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로 비로소 관상적 삶의 실현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의 도달 지점은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과 함께 써내려가야하는 죽어야 끝나는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내 산 햇수 곱하기 365일 하면 현재 대략의 쪽수가 나올 것입니다. 과연 내 삶의 성경책 남은 쪽수는 얼마나 될까요?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현재 내 삶은 오전 또는 오후 몇 시지점에 와있겠는지요? 인생사계로 압축하면 현재 내 삶은 어느 계절쯤 위치해 있겠는지요? 자주 피정지도시 던지는 물음입니다. 이런 성찰이 내 삶의 성경책을 살펴보며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삶을 추스르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께 드릴 유일한 선물은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다윗의 임종장면이 참 장엄합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그의 삶입니다. 참으로 치열했던 다윗의 삶처럼 죽음도 참으로 장엄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내리는 유언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에 이어지는 구구절절 애정이 가득 담긴 충고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임종한다면 어떤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임종어를 남길 수 있을런지요.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혔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
다윗의 평생 치열하고 항구한 삶이 감동적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준비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런지요. 두루두루 생각하게 하는 다윗의 임종장면입니다. 가끔 지금까지 살아 온 내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또 새롭게 오늘 내 삶의 성경책 한 쪽을 쓰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남은 인생, 내 삶의 성경책을 잘 써갈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몇가지 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1.생생한 하느님 나라 비전을 지니고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 비전이 우리 삶의 꼴을 잡아주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이렇게 늘 빛나는 하느님 나라 비전을 지녀야 내 삶의 성경책 잘 써갈 수 있습니다.
2.부르심과 응답의 삶의 리듬에 충실하며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우리의 필수적 응답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활짝 마음을 열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구체적으로 회개는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으로 이뤄집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부르심에 회개로 응답함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유일무이한 오늘 하루입니다. 평생이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뤄지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내 삶의 성경책 잘 써 갈 수 있습니다.
3.소유가 아닌 존재에 삶의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상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이어 파견하십니다. 역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당부 말씀은 소유가 아닌 존재에, 사명 수행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당시 제자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신도들의 환대에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어 이런 무소유의 삶이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최소한의 소유에 만족하고 존재의 본질적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자가 아니라 필요로 하는 것이 적어 존재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들입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했던 옛 선비들의 삶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렇게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아름다운 내 삶의 성경책을 잘 쓸 수 있습니다.
4.치유와 자유의 전인적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기쁨과 평화의 선물에 치유와 온전한 삶의 구원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 즉 치유에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입니다. 발음도 같아 더욱 깊이 마음에 각인되는 느낌입니다. 주님께 치유 받아 온전해 질 때 바로 거룩한 삶, 아름다운 삶,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니 수도원의 ‘기도와 일과 성독Lectio Divina’의 세요소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일과표보다 더 좋은 치유 시스템도 없습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치유 시스템과도 같은 나름대로의 일과표를 만들고 실천하기 바랍니다. 이래야 치유와 구원의 자유로운 삶이요, 주님을 중심으로 질서 잡힌 삶에 내 삶의 성경책도 잘 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선포하며,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는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 주었다 합니다. 제자들을 통해 파스카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치유해 주시고 당신 능력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당신 평화와 치유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6,7-13(연중 4 목)
우리 모두는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합니다. 곧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음으로부터 그 신원과 사명이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은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직전의 장면과,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은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먼저 사랑으로 부르시어 선택하시고, 성령의 선물을 주셔서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어 파견하십니다.
<둘째 장면>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6,7).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한편으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파견된 자 사이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먼저 파견 받은 자 안에 선포되어져야 할 일입니다. 곧 파견 받은 자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할 일입니다. 복음 선포는 다름 아닌 자신 안에 이미 선포되고 실현된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곧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곧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 무엇일런지요?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 아니고 무엇일런지요? 쌍날칼의 말씀이 아니고 무엇일런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지요? 이 지팡이, 곧 복음 말고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로 여기지 않고 있는지요? 진정, 이 말씀의 지팡이의 권능에만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6,10-11 참조). 이는 자신을 잘 대접해 주는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며, 동시에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파견 받은 자들은 자신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자신들을 받아주거나 받아주지 않거나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들이 파견 받아 가서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사도직의 완성을 “사랑”으로 마무리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복음 선포는 다름 아닌 사랑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늘나라를 증거 하는 것이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할 일입니다. 당신 사랑을 이루는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 말입니다. 아멘.
성공한 인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제 사무엘기가 끝나고 열왕기가 시작됩니다.
다윗도 이제 생을 마감하고 솔로몬이 왕위를 잇습니다.
다윗은 생을 마치면서 아들 솔론에게 유언을 남기는데 솔직히 저는 이 유언에 대해 한 편으로는 감탄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왕이 왕에게 하는 유언인데 정치를 어떻게 하라는 훈수는 두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라는 얘기를 하는 면에서는 훌륭하지만 하느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뭘 하든 성공할 거라는 말은 거부감이 듭니다.
우선 훌륭한 점을 보겠습니다.
전에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자녀에게 유산을 남겨 준다면 뭘 남겨주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돈이나 재산일까요?
건강과 건강 DNA일까요?
아니면 가문의 훌륭한 전통일까요?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것이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래서 죽을 때 내 인생은 행복했노라고 자녀들에게 얘기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그 행복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이 제일 중요하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하느님을 유산과 유언으로 남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자녀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보다 건강이 안 좋은 것을 더 걱정하고 그래서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그 건강이 영적인 건강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건강을 주시는 것도 하느님이라는 것을 뼛속깊이 모르는 것이고,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자녀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이 성공 운운한 것은 거부감이 듭니다.
그래 하느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성공을 위해서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얘기한 것이 세속적인 성공일까요?
다윗이 자신이 왕으로서 세속적으로 성공한 것은 바로 자신이 하느님의 계명을 잘 따랐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걸까요?
그런 거라면 제가 거부감이 드는 것이 마땅한데 제 생각에 그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인생의 성공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사업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성공을 했어도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 아니라면 성공했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무엇이 인생의 성공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얘기한대로 행복한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 되려면 그 목표가 행복이어야 하고 그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우선 자신부터 뼛속깊이 깨달아 알고, 그런 다음 그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제일 값진 유산이요, 그것을 말이나 글로 남기는 것이 제일 훌륭한 유언임을 우리는 오늘 다윗의 일생과 유언을 보면서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가난으로 선포하는 기쁜 소식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6,7).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며, 많은 병자를 고쳐줍니다(6,12-13).
이렇듯 제자들은 누구든지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주님의 자비를 전하고 선포할 소명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삶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선포하고 고백하도록 불렸습니다. 어떻게 이 사명을 실행해나가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 지팡이는 야수와 강도들의 습격을 막는데, 신발은 돌이나 뜨거운 지열(地熱)로부터 발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옷을 두 벌 껴입는 것은 부유한 이들의 행동이었기에 금하셨습니다. 이는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아우구스티누스)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복음선포에 필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입니다. 철저한 가난이야말로 하느님의 풍요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가난이야말로 복음선포의 신빙성을 보장해주는 살아있는 표지이지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비우신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기쁨은 가난이 아니고서는 선포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되어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증거하는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하지 못한 듯합니다. 정치권력과 부당하게 결탁하고 사업을 벌여 재력을 키우며, 선교도 교회 유지도 돈을 앞세웁니다. 빈부격차에 따른 신자들 사이의 소외와 위화감 형성, 교회 세습화 등으로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터'로 바뀌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에 파견된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인정받기를 바라거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라 하십니다(6,11). 가난한 자로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관상하고, 내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이지요(6,12). 사랑이신 주님과의 뗄 수 없는 견고한 관계에 있을 때 사랑이 전파될 것입니다.
물론 복음선포가 늘 순조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6,11) 이는 누구에게나 주님의 진리와 자비를 선포해야 하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이들과는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 기쁨과 평화를 선포하는 주님의 참 제자로 살았으면 합니다. 교회 또한 재물과 권력에서 해방되어 가난한 이의 참벗이 되도록 회개해야겠습니다.
먼저 하느님께 의탁하십시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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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가난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수도자의 삶이라고 한들, 길을 나설 때 옷 한 벌 달랑 입고 길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 복음 구절에는 깊고도 간단명료한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청빈의 정신으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말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디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은 이차적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마음이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그분의 도구로 쓰여지겠다는 마음입니다.
“나머지 일들은 그분께서 다 알아서 채워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의 성서 구절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기로 하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이 역시 우리의 상식으로는 극단적으로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부모나 아내나 자녀를 버리라는 말씀이실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 사랑하는 가족을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좋으신 분께서 가족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가족에게 우리가 줄 수 없는 더 좋고 큰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 복음이 너무 좋아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이들은 먼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자세부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부자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 신부님
까미노 순례할 때가 생각납니다. 정말 최소한의 짐만 지고 갔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만 짊어졌습니다. 순례를 준비하며 숙고에 숙고를 했습니다. 이게 꼭 필요한 것인가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까미노를 시작하니 필요하지 않은 것을 들고 가는 나를 보았습니다. 까미노에서 그 사실은 즉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당장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압니다.
오늘 주님은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하러 길을 떠납니다. 거의 빈털터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 6,8-9).
까미노 순례를 마친 후 깨달은 것은, 우리 인생 순례에서도 꼭 필요한 것만 짊어지고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외 나머지 것들은 사실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우리는 빈털털이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부자입니다.
제자들이 주님만 바라보며 복음을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만 의지한 채 그리스도를 우리 삶을 통해서 전합니다. 나머지는 그분이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당신을 위해 사는 우리를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스페인 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마르 6, 11)
한상우바오로 신부님
열심히 걸어온
사람만이
발 밑의 먼지를
털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은총의 힘으로
걸어왔기에
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쪽으로만
치우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는 기쁨이란
털어버려야 할 것을
털어버리는
기쁨입니다.
털어버리는
이 일이 우리를
살리는 일이 됩니다.
모든 차별과
거부를 털어버립시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감정의
잡동사니 안에
갇혀 이 순간을
놓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먼지를 털어버리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주목받으려 했던
제 욕심의 먼지를
발견합니다.
발 밑의 먼지는
제 마음의
먼지였습니다.
털어버리는
이 실천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오늘입니다.
여기까지 힘껏
걸어올 힘을
주신 주님께
비로소 감사드립니다.
멈출 수 없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멋진
2월 되십시오.
털어버려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지금 현재 사제관 일을 해주시는 식복사 분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성지사정이 좋지 않아서 인건비를 줄이려고 쓰지 않는 것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검소하게 살아보려는 마음이 더 큽니다. 하긴 예전에도 식복사 없이 생활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습니다. 요리도 웬만큼은 하고 빨래나 청소를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성지에서의 일이 많아지면서 요즘에는 사제관 일을 해주시는 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생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성지에서 할 일이 늘어나면서 저 혼자만의 공간인 사제관 일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설거지 할 그릇들이 있는데도 지금 피곤하니까 나중에 하자면서 뒤로 미룹니다. 새벽에 빨래를 세탁기 안에 집어넣고는 자기 직전에 생각나서 빨래를 널어놓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매일매일 청소를 했었지만 이제는 이틀에 한 번씩 하겠다고 다짐하고는 일주일에 한 번도 겨우 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사제관 일을 전혀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도 아닙니다. 이것저것 신경 쓰면서 뒤로 미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로 미뤄서 한꺼번에 하면 효율적이고 편할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곧바로 하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런 성과 없는 후회만 생길 뿐입니다. 즉,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해야 할 것을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행할 때, 자신이 원하는 성과를 얻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할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일도 그렇지 않을까요? 세상의 일들을 모두 다 한 뒤에야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어제도 우연히 어떤 형제님을 만났는데 지금은 돈을 벌어야 할 때라고 하면서, 60이 되면 성당에 나가겠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지금 40대이니 아직도 십 몇 년을 주님께 나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이 예순이 되면 없었던 믿음이 갑자기 생기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 라는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소유하는 것이 없을 때 주님께서 파견하신 그 목적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방해하는 것들을 간직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생활하는 데는 불편할 수 있지만 온전히 주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런 묵상을 하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으로 판단하면서 주님의 자리를 만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바쁘다는 말만 외치면서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오늘 제1독서의 열왕기 상권 2장 3절의 말씀에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오늘의 명언: 나는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충실함을 위해 기도한다(복녀 마더 데레사).
어차피 할 일이라면 빨리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일본의 경영 컨설턴트이자 머니 트레이너인 혼다 켄이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설문지에 대한 응답 속도가 빠른 사람들은 소위 사회에서 잘 나가간다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회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설문조사에 응답을 늦게 했을 것 같지만, 예상과 달리 빨리 응답을 해왔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빨리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면서 미룰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 해버리면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수도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첫서원식 미사를 다녀왔습니다. 파릇파릇한 청춘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젊은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고맙고 대견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제단 위에서 수녀님들을 내려다보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며 하찮은 존재인 내가 봐도 이토록 어여쁘고 아리따우며 사랑스러운데...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더 어여쁘고 아리따우며 사랑스러울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성소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교회와 수녀회의 미래를 책임질 후배 수녀님들이 가뭄에 콩 나듯 이라도 계속 탄생한다는 것, 얼마나 다행스럽고 마음 든든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사제, 수도자 후보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많은 젊은이들이 다들 기를 쓰고 편한 길, 넓은 길을 찾아가는데, 한 젊은이가 좁고 가파른 십자가의 길,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세상을 등집니다.
한 젊은이가 그 좋아 보이는 세상의 가치관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주님의 복음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억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으로, 좋아죽겠다는 얼굴로 그 좁은 길을 선택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점점 팍팍해지는 세상살이입니다. 다들 내 한 몸 챙기기에 이웃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더 많은 성소자가 생겨나야 합니다. 자기보다 하느님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봉헌생활자들이 넘쳐날 때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변화되리라 확신합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 중에 하나가, 보다 큰 선을 위해, 보다 큰 가치관을 위해 때로 목숨까지 바친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에게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최우선적 관심사는 오로지 육에 관련된 것입니다. 잘 먹는 것, 잘 마시는 것, 편안히 드러눕는 것, 잘 자는 것, 권력자 앞에 잘 보이는 것...
그러나 한결 품격이 높은 인간이기에 때로 불의 앞에 목숨을 내던지며 대항하기도 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민주화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집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곳으로 떠나갑니다.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스스로 단두대에 목을 들이댑니다.
결혼까지 포기하면서 선택하는 봉헌생활의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분 상승의 길도 아닙니다. ‘때깔 나는’ 길은 더욱 아닙니다.
가치관 중에 가장 큰 가치관이신 하느님, 의미 중의 가장 큰 의미이신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걷는 위대한 길인 것입니다. 하느님만은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육의 기능들을 정지시키려는 사람들이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기 위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으려는 사람들이 봉헌생활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만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을 거슬러, 본성을 거슬러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수도자, 사제, 봉헌생활자들의 어려움 속에서도 환한 미소 잃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손에서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만을 담기 위한 빈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부르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기억하길 바랍니다. 부르시는 하느님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감사하는 일임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감사하면서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나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응답임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과 내일은 교구 서품식이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성소국이 가장 바쁜 날입니다. 장소 대관, 무대 디자인, 서품식 초대장, 유인물, 봉사자 모임, 전례 준비, 성가 연습, 물품 운반, 공문 작성, 서품 대상자 면담, 서품 전 독신서약 미사 등이 있습니다. 매년 서품식 준비를 하지만 늘 긴장되는 업무입니다.
서품식에서 가장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장면은 ‘성인 호칭기도’입니다. 서품 대상자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겸손한 자세를 취합니다. 바닥에 엎드려 있으면서 신자들이 함께 드리는 성인 호칭 기도를 들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학생으로서 지냈던 모든 일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 앞으로의 다짐, 고마웠던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지만 그 순간에 서품 받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며 그 많은 신자들이 함께 기도 해 주셨던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사목의 결실을 맺어서 칭찬을 받을 때는 그 모든 일의 성과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생각하며 좀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다. 나의 아픔과 좌절, 나의 실패와 고난까지도 모두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임을 믿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돌아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 호칭 기도’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사제가 되면 매일 ‘성체성사’를 거행합니다. 사제의 축성과 기도로 제병은 성체가 되고, 포도주는 성혈이 됩니다. 그리고 성체와 성혈은 주님의 몸과 피가 되어서 사람들과 하나가 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는 이들은 이제 곧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제에게 주어진 커다란 은총이며 사명입니다.
올해로 사제 서품 25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줄까 생각해 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몸이 불편하셔서 일을 많이 못하시면 할 일이 많아진 것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엄격하셔서 생활이 불편하면 사목을 제대로 배우는 것으로 여기며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자유로우셔서 모든 것을 맡기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음에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주어진 모든 일들에서 감사할 것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드리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주어진 사목에 성실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아침 지하철에 몸을 맡기며 출근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물건을 파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족들 생각에 모욕을 참아내며, 다시 한 번 신발 끈을 매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고민하고, 세상 사람들이 연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것 이상으로 사목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면 감동하고, 감동하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마음을 움직이게 되고, 마음을 움직이면 사목의 결실이 맺어지기 마련입니다. 태산이 높아도 오르면 못 오를 것이 없습니다.
겸손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에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에게서 배울 것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익히면 좋겠습니다. 특히 어른들에게 예의를 다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겸손한 사제는 부족한 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신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함께 기도 합니다. 낮에도 양심성찰 시간을 갖습니다. 저녁에는 묵주기도를 하고, 저녁기도를 함께 합니다. 성체조배를 하고, 영성훈화를 듣습니다. 이제 본당에 가면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제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고난의 바람이 불어도, 시련의 아픔이 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신자 분들에게 깊은 영성의 물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25년 동안 제가 제대로 못한 것을 이야기 하려니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남은 날들을 저부터 그렇게 살고 싶어서 후배들에게 하는 덕담을 빌어서 다짐해 봅니다.
떠남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꽃피고 연두잎 돋아나는 봄의 때가 있는가 하면 열매 익어가고 단풍물드는 가을의 때도 있습니다. 시작할 때가 있으면 끝날 때가 있고 청춘의 때가 있으면 노년의 때도 있습니다. 머무를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습니다.
때에 대비하며 때에 따라 맞게 처신함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머무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떠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 떠날 때 아름답고,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끊임없이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맑은 삶입니다.
생각하면 잘 떠나는 것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원장직을 물러난 후 서품 은경축 때의 미사강론중 들었던 예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트랙을 돌다보니 이젠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아마 몇바퀴 더 돌면 쓰러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다음 잘 준비된 주자走者에게 바톤 텃취를 잘 하게 되어 참 기쁩니다.”
요지의 강론 서두였습니다. 사실 혼자 계속 트랙을 돌 수는 없고 적절한 때 다음 주자에게 바튼을 전달할 수 있다면 본인은 물론 공동체를 위해서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형제의 ‘소원이 무엇이냐?’에 대한 저의 명쾌한 대답도 잊지 못합니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말을 바꿔 ‘잘 살다가 잘 떠나는 것입니다.’로 말해도 좋습니다. 떠날 때 떠나지 못해 집착하여 추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자기 연출이, 역할이 끝났으면 무대에서 떠나줘야 하는데 계속 무대에서 얼쩡대며 머무는 것도 참 보기 민망스러운 것입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시인의 낙화라는 시의 첫 구절이 생각납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뒷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 독서의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를 통해 떠남의 모범을 봅니다. 예수님의 일을 그대로 전달받아 떠나는 열두 제자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참 홀가분한 무소유의 떠남이요 물처럼 흐르는 떠남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며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니 그대로 제자들을 통해 계속되는 스승 예수님의 일들입니다.
다윗의 마지막 떠남의 죽음은 얼마나 장엄한지요. 참으로 치열하고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삶에 죽음 역시 참 아름답습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한지만 잘 죽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로 시작되는 다윗의 유언은 참 적절하고 감동적입니다.
과연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될런지요. 하느님의 전사戰士답게 살다가 아름다운 전사戰死로 끝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어느 자매가 전해준 남편 임종시의 유언도 생각납니다. 세상을 떠나기전 자기 손을 붙잡고 한 세마디의 유언이 자기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참 따뜻한 사랑이 담긴 진정성 넘치는 유언으로 평생 배우자는 물론 하느님께도 이런 유언을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갑자기 아름다운 떠남은 없습니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며 깨어 사는 것이지요.
소임所任에서의 떠남은 물론 삶에서의 마지막 떠남인 죽음의 귀가준비가 정말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가 죽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가난으로 선포되는 복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3,14-15)과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6,7). 곧 제자들의 소명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자유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야수와 강도들의 습격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지팡이와 돌이나 사막의 뜨거운 지열(地熱)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신발은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물질이 아닌 하느님을, 소유가 아닌 가난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토록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신 까닭은 복음선포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자비와 생명과 해방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선포를 빌미로 세상 권력과 재물로 나 자신을 선전하거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쇠외시킨다면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매이거나 머물지 않고, 이미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께 의탁하여 복음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세상 모든 것에서 떠나 온전히 자유롭고 가난한 상태가 되어 그분과 일치하지 않고서는 결코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하느님을 채우기 위한 빈그릇이며 하느님의 힘이 샘솟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복음 선포에 불린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현세의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하거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거절당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6,11). 내 뜻과 애착, 고집과 이기심을 철저히 버리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오신 가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여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꿋꿋이 전해야 합니다.
나의 일상의 삶과 세상이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각자 있는 자리에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어주는 복음이 되어 걸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기대어 인간의 힘이나 돈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선교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큰 착각입니다. 애착을 지니고 있는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떠나는 길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미래로 나를 내몰지만 하느님 때문에 더불어 행복한 축제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마저도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가난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가난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모습은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역사상 부유하고 세상 권력과 타협하는 교회,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멀리 한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걸었음을 상기할 때입니다.
오늘도 세상 것으로부터 떠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자 되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풍요로운 축제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일렀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1열왕 2,1-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인생을 다 살고나서 자식들에게 어떤 권고를 해주고 싶나요?
오늘 다윗왕도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권고를 하네요.
요약하면,
"결국 살아보니 별것 없더라.
하느님 명령만 잘 지켜라.
그러면 만사형통 하리라."
그러네요.
예수님도 오늘 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권고를 하시네요.
"여행할 때 많은 것 들고 가지마라.
다 쓰잘데 없더라.
최대한 짐을 줄이고
현지조달해라~~" ㅎㅎ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고나면 별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하고 너무 고민하며 아귀다툼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죽고마는 인생인 것을...
오늘은 좀더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말하고 단순하게 행동합시다.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테니 그저 단순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가난한 파견자 <마르코 6, 7-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길을 떠나는 사람은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가진 것에 애착을 느끼거나 간 곳에 애착을 느껴 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으면 주님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합니다. 착한 품성을 가지고 성인이라고 칭송을 받고 사목하던 신부가 본당에서 가진 것, 누리는 것에 애착을 느끼고 살다가 인사 발령이 나니 자기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주교에게 항의하고, 신자들을 동원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문을 봉쇄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고 불순종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제는 진정한 선교사가 못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집과 가족을 다 버리고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어디나 매여 있으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고 가진 것이 있으며 능력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자리를 탐하거나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가지려 하거나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하려 하면 언제나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떠날 때 발밑의 먼지까지 떨고 떠나라는 말씀은 있던 자리에 매여 있지 말고 가난한 마음으로 떠나며 떠날 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첫 사제품을 받을 때처럼 살면 일생 행복할 것이지만 이것저것 쓸모없는 것들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으면 주님의 사도로 순수성을 잃고 권력의 노예, 재물의 노예, 명예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며 주님이 주신 능력을 발휘하려면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주님의 것이며 무엇을 이룬 것 같아도 한 일에 애착을 버리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선교적 사명을 지니고 사는 이들이 더 겸손하고, 온유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모든 벗들에게 드리는 편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당신과 나는 함께
주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당신과 나는 함께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지나온 날 감상에 젖어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할 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신의 희망은
나를 이끌어주었습니다.
하나 둘 쌓여가는 인간적 지식으로
교만해지려 할 때,
주님을 향한 당신의 순수한 믿음은
내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나의 일, 나의 삶을 핑계로
차갑게 마음의 문을 닫으려 할 때,
벗들을 향한 당신의 따스한 사랑은
나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에
내 몸 맡기려 할 때,
당신의 가난한 빈손은
나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입으로 터져 나오는
내 공허한 목소리에 취하려 할 때,
당신의 자그마한 강렬한 몸짓은
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세상을 거스르는 주님의 길 위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언제나 당신은 해맑은 웃음으로
함께 있었습니다.
삶의 십자가가 무거워
탄식하고 있을 때,
당신의 십자가 위에 기꺼이
내 십자가를 얹어주었습니다.
걸어가야 할 주님의 길이
점점 희미하게 보이고
정녕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지
의심이 들 때,
당신은 또 다른 예수님으로서
내 곁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 따라
쉼 없이 걸어가야 할
기나긴 여정 안에서
당신이 나의 소중한 벗이듯이,
내가 당신의 소중한 벗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길로
함께 불러주신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사명 심으시어
함께 보내신 우리,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소중한 벗이기를 희망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가슴 벅찬 여정이 끝나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는 날
주님께서 맺어주신 우리의 우정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리라 믿으며,
자그마한 사랑 당신께 드립니다.
<여러 길 중에서 우리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윗의 얘기는 사무엘기로 끝나고 이제 솔로몬부터 이후 왕들에 대한 얘기인 열왕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사무엘기와 여러 왕들의 열왕기인 셈인데 다윗이 그만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는 중요한 존재라는 얘기이지요.
이런 다윗이 생을 마치며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임금이 대를 이을 임금에게 남기는 그 중요한 유언에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고 그저 하느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얘기를 합니다.
정치적 유산이나 인간적 유산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심지어 형제들 간에 왕권다툼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말조차도 없이 오직 신앙의 유산만 남기고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지만 하느님께 해야 할 것을 충실히 하기만 하면 다른 것은 하느님께서 다 이뤄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이지요.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잘 되려면, 성공하려면 “-면”자 조건이 붙습니다.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성실히 걸으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다윗이 얘기하는 성공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채워야 할 조건이 많고 그 조건은 채우기가 힘든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채워야 할 조건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 조건이 까다롭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 조건은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모세 법에 기록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의 증언을 지키는” 것, 곧 십계명을 지키는 것, 계명의 길을 가는 것인데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까?
싫은데도 계명이니까 억지로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이 길을 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들 겁니다.
특히 세상에서 살다보면 하느님의 계명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계명대로 살려고 해도 계명을 거스를 것을 요구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즐겁고, 그래야지만 하느님 계명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예 길을 달리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길이 있지요.
정치가의 길,
교육자의 길,
과학자의 길,
그리고 이런 길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사제와 수도자의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계명의 길을 잘 가기 위해 길을 달리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또는 교육자의 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가야만 하나요?
그렇게 길을 아예 달리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윗은 임금이면서도 훌륭한 신앙인의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탈선을 한 적도 있지만 하느님의 길을 끝까지 간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 장면 총리 기념사업회 이사가 되었습니다.
장면 총리가 그저 정치가의 길만 갔으면 제가 이사가 될 이유가 없는데 그 기념사업회에서는 신앙인이요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장면 총리의 삶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기에 저를 이사로 선임한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신앙인이요,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정치를 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끝까지 가신 분인데 장면 총리나 다윗 왕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의 길을 가야 할 사람들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비법은 모자람 부족함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명품에 얼굴에 몸짱에 스타일에 뭐 신경쓸게 엄청 많은 우리지요.
하고 싶은게 사람마다 중구난방아라서 마음의 일치가 참 어렵고요.
있다고 보여주고 싶고 가졌다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이잖아요.
모자라고 부족하면 정신과 마음은 에너지가 더 활발해 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답니다.
모자라고 부족해야 사람들께 겸손해질 것이며 환영받을 거래요.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6,8~9)"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시 태어나는 시간은
예수님을 통해
파견되는 떠남의
시간입니다.
떠남을 통해
비로소 알게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떠남을 통해
새롭게 만나게 되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사랑은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붙잡거나
묶어두지 않습니다.
떠남을 통해
우리가 찾으려 했던 것이
사랑과 자유임을
깨닫게됩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기만하는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언제나 회개가
필요합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회개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회개야말로
삶의 기쁨을
껴안는 가장 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를 내려놓고
오늘을 사는 힘입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살아가는 힘을
매순간 하느님으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떠남은 회개를 통해
만나게 되는
참기쁨입니다.
떠남과 회개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은총과 축복의 시대, 제2의 프란치스코 시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도원 들어와서 참으로 멋있는 선배 회원을 봤습니다. 당신께 들어오는 좋은 선물들은 모조리 후배들이나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주십니다. 당신은 늘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 선배 신부님이 인사발령이 나서 떠나실 때였습니다. 다들 수도원 마당에 모여서 인사를 드리는데 이삿짐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짐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달랑 손가방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걸 손수 양손에 들고 버스로 그렇게 떠나가셨습니다.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홀연히 떠나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청빈을 약속한 수도자라 할지라도 살다보면 이것저것 물건들이 쌓이게 되더군요. 당연히 쌓아놓은 물건에 마음이 쓰이기 되고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실상을 잘 알고 있기에 저도 한번 노력해봤습니다.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할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갖고 있던 재산목록 1호는 큼지막한 노트북이었습니다. 아까웠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온 신학생에게 과감하게 선물로 줘버렸습니다. 2호는 용돈 아끼고 아껴서 산 CD 플레이어였습니다. 제방에 올 때 마다 호시탐탐 군침을 흘리던 남미 친구에게 줘버렸습니다. 3호는 한국에서 가져간 장백의(수녀님들이 한 땀 한 땀 기도로 만든)였는데, 좋아보였던지 졸라대는 친구 신부에게 줘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가지 한 가지 생필품들을 정리하다보니 결국 완전 정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권만 달랑 가지고 그냥 홀몸으로 공항으로 가는데...지금도 그때의 그 홀가분한 느낌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뿌듯하던지요. 또 얼마나 상쾌하던지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 마음 깊숙한 곳에서 딴 생각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열정이 마구 샘솟아 올랐습니다.
전도 여행길을 떠나가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왜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 것이며,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을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뒷주머니 지갑에 지폐가 두둑할수록 하느님 섭리를 향한 믿음은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늘 비우는 노력, 버리는 노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제2의 프란치스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님의 등장으로 800년 만에 제2의 청빈 운동, 제2의 교회 쇄신 운동을 우리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 은총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황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모범 이제 우리 각자가 생활 가운데서 구체화시킬 순간입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천박한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 지상주의로 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으며 큰 고통을 겪어왔습니까?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앞에 보여줘야 할 순간입니다. 청빈한 삶도 중요하지만 청빈하게 산 결실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과 아낌없이 나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홀로 쓸쓸이 죽어가던 이웃들이 “아, 그래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함께 걸어가려는 노력이 정말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고 명령하시고, 어떤 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마르 6,7-11).
제자들이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은(마르 6,12) 복음을 선포했다는 뜻이고, 그들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는 것은(마르 6,13) 복음 선포 과정에서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도 전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입니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는 명령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심판을 경고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복음이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명령은 '삶'에 관한 지침이기도 하고, 선교활동에 관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삶'에 관한 지침으로 읽으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만 믿어야 한다는 명령이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믿고, 그런 것에 더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은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느님을 모셔야 할 자리에 물질적인 것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무소유'에 관한 명령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소유'와는 개념이 다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0-11)."
그러나 이 말씀은 하느님께, 또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고, 구걸을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민폐를 끼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시는 분이니 그분만 믿으면 된다는 뜻인데, 하느님의 도움은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오게 됩니다. '마땅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천사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여자들의 후원을 받아들이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루카 8,1-3).(지금 이 말을 자신이 이것저것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후원을 받았어도 예수님은 물질적으로는 항상 가난하셨던 분입니다. 사도들도 사유 재산 없이 온전히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선교활동에 관한 지침으로 읽으면, 이 명령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복음만 가져가야 하고, 사람들에게 복음만 전해 주어야 한다는 명령이 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가서 그것을 나누어 주게 되면 복음을 제대로 전해 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반대쪽에서 생각하면, 사도들에게 청해서 얻을 것은 복음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뿐이라는 뜻이 됩니다. 세속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달라고 해도 사도들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줄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어떤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선을(몇 푼의 돈을)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사도 3,3). 베드로 사도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그리고 그의 장애를 고쳐 주었습니다(사도 3,7).
"나는 은도 금도 없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사도들이 '복음적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 라는 말은 선교활동에 관한 명령을 실천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복음, 하느님의 은총,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만일에 아주 많은 돈을 나누어 주시면서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분이시니, 기적을 행하셔서 아주 많은 돈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사도들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했을까? 아마도 분명히 사도들은 마귀들을 쫓아내기는 커녕 '돈'이라는 이름의 마귀들에게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의 교회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때는 돈이 많았을 때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해서 돈이 많아진 것일 수도 있고, 돈이 많았기 때문에 부패하고 타락했던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돈이 문제입니다.)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떤 태도로 하느님을
만나야 할는 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사랑만이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발밑의 먼지를 보아야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리고 내려놓는 법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워 질 수 있고
자유로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생동감은
집착이 아니라
내려놓고 맡기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충실하셨던 아가타 성녀의
삶을 다시금 반가이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충실함이야말로
가장 확실히
하느님 앞에서 작아지는
하느님 체험의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충실하셨기에
자신의 삶 속에
하느님을 잘 모실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충실함과 이어져 있습니다.
충실함은
물질을 넘어선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물질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충실함으로 바로 서는 것이
가장 큰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함이
동정이며 순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선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발밑의 먼지를 통해
우리 존재의 가벼움을 만납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지나가는 먼지일 뿐입니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제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청해봅니다.
때론 가벼움과 때론 무거움으로
주님 앞에 우리는 서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결코 우리 것이 아니듯
어쩔 수 없는 오늘의 먼지 또한
우리 것일 수 없습니다.
다 내려놓으면 가볍습니다.
다 맡기면 미련해지지 않습니다.
먼지를 통해
드러나는 제 바닥을 보게 됩니다.
바닥을 체험하면
가라앉은 제 먼지가 보입니다.
수많은 먼지를 본 사람은
주님을 더욱 신뢰할 것입니다.
수많은 내면의 먼지는
언제나 이곳에 존재합니다.
먼지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아야 가벼워집니다.
내려놓아야 비워집니다.
무거우면 떠날 수 없습니다.
단단해지면 비울 수 없습니다.
먼지는 우리를
단순하게 합니다.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더 내려갈 수 없는
거기에서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간다는 것은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하늘 같은 마음입니다.
주님의 빛 앞에
모든 것은 빛이며
은총이 될 것입니다.
털어내린 먼지들조차
주님을 향합니다.
많은 것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먼지처럼 향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회개는 잘 자라고 있는지요?
살아있음의 징표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현존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이와같이 하느님과 우리자신을
다시 맺어주는 은총이 됩니다.
떨어져있던
우리가 하느님과 합하여지면
우리의 삶은 분명코 은총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그것은 회개뿐입니다.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삶을 짓누르는
모든 것이 비우고 내려놓지 못한
우리의 욕심이었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입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빼앗길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행복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서
하느님 자신으로
삶의 시각이 바뀌어야합니다.
진실된 삶을
이제부터 사는 것입니다.
사랑에 매정하고
인색했던 우리들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사랑의 선포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회개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빛깔대로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에 충실하며
자신의 몫을 다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지극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욕심에 목말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루어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회개는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듯
가벼워지고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가벼워지고 단순해질수록
사랑이신 주님께 가까워집니다.
가장 본질적인 하느님 사랑을 통해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매순간처럼
예수님께로 모여들고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디어 새로운 삶을 시도하게됩니다.
서투르지만 조금씩 깨닫게 되는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가게됩니다.
우리의 슬픔과 고통이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게하는
회개는 분명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의 회개
또한 매순간 성장해야함을
알게됩니다.
우리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회개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가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온전한 나를 찾고
온전한 하느님을 만나게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바로 지금이 가장 좋은
회개의 순간임을 잊지 않고
실천하십시오.
결과까지도 하느님의 몫
이진원 신부님
세상에서는 일의 결과를 보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과정 안에서 개개인의 성실함이나 원의, 노력 등은 제대로 볼 수 없기에 과정이나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평가되지 못한다. 그래서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일의 성공 여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신감을 갖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인간적 측면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신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 장점이나 단점과 관계없이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해 사명을 수행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에 대한 성공 여부까지 하느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떠날 때는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일의 성공 여부가 우리 인생의 성공 여부와 별개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의 결과까지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일을 할 때 그 결과까지 하느님께 맡긴다면, 이제 우리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의 자세다.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했는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하느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바로 내가 알고 있다.
이 말씀 때문에 사제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인간적인 부족함에도 결과를 하느님 몫으로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한 경비원이 화학공장 입구를 지키면서 13년 동안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13년 동안 아무도 화학 공장에 침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비원은 텔레비전을 보고, 책이나 잡지도 읽고 음료수를 마시고 마당을 거닐기도 했습니다. 졸며 시간을 보내는 때도 자주 있었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요. 처음에는 늘 자기 자리를 지켰고 신속하게 순찰을 끝마쳤습니다. 그는 공장의 보안을 철저히 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습니다. 판에 박힌 것 같은 지루한 일과 오랜 근무시간이 힘겨웠던 것이지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비원의 열정도 식어갔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 경비원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세 남자가 공장에 침입하여 귀중한 화학 약품을 가지고 달아난 것입니다. 그 경비원은 중요한 순간에 부주의했던 탓으로 일순간에 일자리를 잃고 말았지요.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해성사를 본 뒤에는 정말로 열심히 살겠다고, 이제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반복과 함께 안일한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다음에 열심히 하지 뭐 라는 생각으로 뒤로 미룰 때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으므로 모든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을 파견하셨을까요? 그냥 전처럼 당신이 직접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시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하셨을까요?
어쩌면 안일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들은 능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냥 쉽게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큰 자극을 위해 넉넉하게 해서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이 가득한 상태에서 파견하십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사람들이 하면 되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정작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면서 선교를 하기 보다는 불평불만만을 내 던지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나의 역할에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더 이상의 불평불만보다도, 지금의 상황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에 대한 주님의 파견을 성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인생이 주는 최고의 상은 가치 있는 일에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프랭클린 루즈벨트)
절망은 없다
골드스미스가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늘 이런 잔소리를 해댔다.
“얘야, 넌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을 거니?”
그는 분명 똑똑하거나 남다른 데라곤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골드스미스 좀 봐요. 저 앤 늘 멍청해 보이지 않아요?”
자신을 두고 쑥덕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맞서기보다는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저런 책들을 골라 읽으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골드스미스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지니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모자라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난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글을 쓰는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있었다. 청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매일 혼자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자기 글을 신문사 잡지사에 보냈지만 원고들은 매번 반송되었다.
‘매번 퇴짜맞는 걸 보면 내 글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다시 고쳐나갔다. 그것은 제 살을 깎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묵묵히 견디며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기나긴 고통의 마침표가 날아들었다. 모 잡지사에서 글을 싣겠다는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전보를 받아든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뒤 계속 글을 발표하여 유명해진 골드스미스는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명성은 실패했을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소.”
좋은 결과
김효준 신부님
미래의 일을 앞당겨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을까, 남편 일이 잘못되지 않을까, 자식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까 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나간 학창 시절을 아쉬워하고, 떠나간 연인에게 집착하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합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후회합니까? 그것은 결과를 알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이고, 결과를 바꿀 수 없는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좋은 결과’이지만 안타깝게도 미래의 일을 미리 앞당겨볼 수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밑의 먼지를 훌훌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좋은 결과는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매달리고 집착하면 하느님의 자리가 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좋은 결과를 위해 우리는 묵묵히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주님의 파견을 받아 갈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사업을 위해서 갈 때는 나의 자본과 나의 능력이 필수적이지만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갈 때는 초기 자본이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사업을 할 때는 인간적인 수단들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수단들에 의지할 때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워질 뿐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떠날 때 주님의 말씀대로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음은 하느님께만 의지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입니다.
셋째로 하느님의 사업을 하도록 하느님께서 파견하실 때는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다 알아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업을 하는데 하느님께서 아니 주신다면 당신이 당신 사업 망치는 것이니 우리가 안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맡기면서 그냥 보낼 리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권한”을 주어서 보내십니다.
루카복음에서는 “능력”과 “권한”을 주어서 보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권한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오늘의 우리 여정을 떠납시다.
<내면을 먼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캠프에 참가해보면 뭔가 특별한 것을 느낍니다. 저희 캠프장 시설을 보면 사실 별것도 없습니다. 캠프 프로그램 역시 다른 곳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공되는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캠프를 끝내고 돌아가는 많은 아이들이 그곳에서 받았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짧게나마 그곳에서 쌓은 추억을 두고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우리 젊은 수사님들 아이들을 위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수사님들 거의 목숨바쳐가며 아이들 위해 연구합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준비합니다. 지니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아이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결국 순수한 열정과 열렬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이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기에 앞서 단단히 정신교육을 시키십니다. 정신교육의 요지는 ‘내공’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내면을 먼저 갈고 닦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형적인 것들, 부차적인 것들에 신경 쓰지 말고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부분, 실질적인 준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열정, 사랑, 마음, 정성이 중요하니 그런 것들부터 먼저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외적인 것도 중요하지요. 자기 관리도 필요합니다. 옷이 날개라고 품위 있고 맵시 있게 입는 교육도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면이나 본질적인 면은 뒷전이고 오로지 외형적인 것에만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머리는 텅 비어 있고 정신자세는 엉망인데 유명 메이커 신발에 외투에 가방에... 그게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각종 첨단 기기와 값진 음향 및 영상 설비로 완벽한 시스템을 갖췄다 할지라도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 없다면, 열정이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결국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내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운 상태에서 복음 선포 여행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형제들과 하나 된 마음, 공동체 영성으로 무장한 채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를 향한 전적인 투신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순도 높은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전적인 자기 해방과 초탈한 마음을 덤으로 주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죽을 각오로 뛰어드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맡기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대자유와 완벽한 평화란 선물을 무상으로 건네주십니다
치유의 능력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창 믿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씀을 묵상하던 중 어떤 자매님이 다음날 큰 수술을 들어간다고 안수를 청하러 성당에 오셨습니다. 저는 이 때다 싶어 “믿기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으실 거예요.”하며 ‘주님 믿습니다. 당장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안수를 주고 나서는, 그 분을 보내면서 “내일 수술 잘 되길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결국 나조차도 지금 당장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지 못하며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에 스스로 부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짧은 사제로서의 시간에도 저에게 많은 안수와 기도를 청해왔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해 드렸지만 결국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들도 몇 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는 정말 안타까워서 치유의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수없이 갖게 됩니다.
한번은 로마에 굉장히 유명한 한 목사님이 오셨었습니다. 온 유럽의 한인들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 주신 분의 말로는 5만 명 이상이 모였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천주교 신자셨지만 직업상 그 집회를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회 중에 목사님이 치유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온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그것을 서로 짜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다 사제들인데다가 당신도 천주교 신자셨기에 천주교에서만 기적이 일어나야 옳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그런 목사님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만 실제로 우리들은 눈에 띄는 치유의 기적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찌 보면 우리 사제들이 그 목사님보다 부여받은 능력이 적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고 “병자를 기름 부어 치유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 선포와 더불어 악한 영과 병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여 많은 병자들을 고쳐줍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들이 이런 치유의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많은 신부님들이 ‘우리가 개신교 목사들보다 믿음이 약하다는 말이냐?’고 하시며 화를 내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기적을 행하고 우리는 못한다면 믿음 면에서는 그 목사님들에 비해 약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치유의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병을 고치는 것이야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믿는 대로 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되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진리 안에 있거나 혹은 거룩하다는 말과 같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저희가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치유하지 않았습니까?” 하더라도 예수님은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라고 대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론이고 인간 중에 가장 거룩하셨던 성모님도 누구 한 명 치유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렇다고 이분들이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보다 믿음이 약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김재중 목사님의 테이프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너무 말씀을 재밌게 하셔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이 분은 삼십대 초반에 이미, 우리로 이야기하면, 주교님의 자리에 최연소로 오르셨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나서 죽은 사람도 삼십 분 동안 기도해서 살려내기도 하였고 집회 때는 수많은 치유기적을 행했다고 스스로 증언합니다. 아마 거짓은 아닌 듯 들립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가톨릭에 대해선 마귀 취급을 하며 집회 때에도 가톨릭에 대한 많은 안 좋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그렇게 성모님을 안 좋게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성모님을 알게 되고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결심하고 잘나가던 목사직을 버리고 가난뱅이 천주교 평신도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올바로 진리를 깨닫고 있지 못하더라도 굳은 믿음만 지니고 있으면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적이 줄어드는 세대는 동시에 믿음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진리를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치유의 기도를 하기조차 겁이 납니다. 치유기도를 해서 낫지 않으면 더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를 못하는 것은 나의 탓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지니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복음 선포와 더불어 병자 치유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믿음을 키워가야겠습니다.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로 춥게만 지내다가 지난해 겨울, 형제들과 등산 갔다가 방바닥이 ‘설설 끓는’ 민박집에서 자본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방이 따뜻하고 포근하던지 방에서 나와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분위기 좋은 곳, 따뜻한 곳, 안락한 곳, 어릴 적 고향 같은 곳을 보게 되면 그곳에 평생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 근원적 동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행을 하다가 천국같이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여기 그냥 아담한 집 한 채 짓고 평생 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우리 인간 모두는 이 세상에 영원히 정착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자 방랑객입니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합니다. 순간, 순간 가방을 싸야 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 친히 뽑으신 제자들을 잘 교육시키시고, 권한을 부여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품에 안고만 있지 않고 떠나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물설고 낫선 땅으로 떠난다는 것 많은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그간 길들어왔던 주변 환경들과 결별해야함에서 오는 아쉬움도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희로애락을 나누며 깊은 정이 들었던 친숙했던 사람들과의 작별도 참으로 큰 서운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이정표를 따라 길을 계속 걸어가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천막을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과거라는 옛 천막은 철수해야 마땅합니다.
옛것을 정리하지 못할 때 삶은 늘 지지부진합니다. 머뭇머뭇 빨리 떠나지 못할 때 삶은 어정쩡해지기 마련입니다.
새것, 새로운 가능성, 신선한 바람이 우리 삶 안으로 불어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은 삶의 틀이 제거되어야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본성상 떠나보내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하느님, 빨리 약속의 땅으로 걸어가라고 재촉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파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잘 양성된 제자들을 당신 가까이 끼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험난한 세상, 갖은 위험요소가 득실거리는 세상 한 가운데로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오늘 아침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새롭게 출발할 것을 권고하고 계십니다.
떠난다는 것, 순례를 계속한다는 것, 참으로 부담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능력의 하느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자비의 예수님께서 그대 곁에 계십니다. 모든 근심 걱정은 홍해바다에 던져버리십시오. 그대 안에 깊이 자리 잡은 갖은 고정관념들과 경직된 우상들을 과감하게 부숴버리십시오.
새 삶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묵상을 하고 새벽 묵상 글을 쓰고 나니 시간이 꽤 남았습니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서인지 배가 많이 출출하더군요. 그래서 배를 채울만한 것이 있나 하고 냉장고를 뒤졌더니, 냉동실 안에 얼려놓은 약밥이 있네요. 그 약밥을 꺼내놓고 이것저것 하면서 녹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요? 약밥이 약간 말랑말랑해졌습니다. 새벽 미사가 있기 때문에 얼른 먹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로서 저 역시 공복재를 지켜야 하니까요. 한 입을 딱 무는 순간, 이빨이 시릴 정도더군요. 맞습니다. 아직 다 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도 먹지 않습니까? 약밥이 아이스크림이려니 하고 생각하면서 그냥 녹지 않은, 그래서 하얀 얼음까지도 보이는 약밥을 다 먹었습니다.
새벽 미사를 시작하고 얼마 뒤,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하네요. 강론이 끝난 뒤에는 가슴에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듯이 미사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머리까지도 아프더라고요. 미사는 어떻게 끝났지만, 저는 하루 종일 많이 힘들었습니다.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마치 몸살 걸린 것처럼 안 아픈 데가 없더군요. 더군다나 이 날은 보좌신부가 아이들 캠프를 쫓아간 날이라 제가 새벽부터 저녁미사까지 그리고 여기에 구역미사까지 모두 5대의 미사를 해야 하는 날이었거든요.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습니다. 꼼짝도 못하겠고, 괜히 짜증만 날 뿐 내 뜻대로 잘 되지도 않습니다. 그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더군요.
‘이 몸이 내 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병이 들어 앓아 보니 내 몸이 아니구나. 내 몸이 아닌 이 몸. 이 몸을 우리는 잠시 주님으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 아닌가?’
내 몸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도 잘난 체하고 살았으며, 왜 이렇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살았는지……. 아프고 나서야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 열둘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파견할 때의 조건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팡이와 신발은 그 지역을 돌아다니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지팡이는 몸을 보호하는데 거의 필수적인 것이며, 신발은 그 지역의 돌 많은 땅을 걷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모두 버리라는 ‘단순하고 검소한 정신’을 강조하십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조건들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지요? 내가 안고 있는 이 몸을 가장 큰 선물로 주님으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까지도 주님께 요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으로부터 이미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단순하고 검소한 정신’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 뜻에 맡게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할 만큼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새뮤얼 존슨)
두려움을 모를 때(‘행복한 동행’ 중에서)
2008년 9월, 월터 마리노는 자폐증을 가진 아들 크리스와 함께 해변에 나갔다가 엄청난 일을 겪었다.
마리노는 수영을 하던 아들이 육지에서 멀어지자 황급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들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어느새 육지도 보이지 않자 공포가 밀려왔다. 주위는 말 그래도 망망대해. 마리노는 어린 아들이 겁먹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크리스는 천진하게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아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마리노는 평소 둘이서 자주 하던 놀이를 시작했다. 마리노가 영화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즐겨 하는 대사 “무한히!”를 외치면 크리스는 다음 구절인 “그리고 그 너머!”라고 답하는 단순한 놀이였다. 놀이는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지만 파도가 거세 둘의 사이는 오히려 벌어지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들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아들이 사라지자 마리노는 절망했다. 그 역시 장장 5시간이나 헤엄친 터라 탈진 상태였지만, 크리스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을 거라 믿으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바다에 뛰어든 지 12시간 만에 어선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다. 해안 경비대 선박에 옮겨 탄 마리노는 후송을 거부하고 서둘러 아들을 구조해 달라고 애원했다. 수색 헬기는 2시간 동안 바다를 수색했고 놀랍게도 여전히 수영을 하고 있는 크리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리노는 가족과 함께 미국 NBC 투데이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들 덕에 12시간을 버틸 수 있었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는 크리스는 표류하면서도 마치 바다 위로 모험을 떠난 듯 계속 웃고 있었지요. 덕분에 나 역시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들에 대한 기대도 잃지 않았죠.”
두려움을 모를 때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놀라운 기적을 부르기도 한다.
‘가난’이 가장 쉽다는데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신학생이 저에게 해 준 이야기입니다.
그 신학생의 본당 신부님은 매우 짠돌이라고 합니다. 신학생들에게 모처럼 마음먹고 사 준 가장 좋은 식사가 자장면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신부님이 은퇴 신부님을 찾아뵙는다고 가시는데 함께 따라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방에서 은퇴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신학생은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본당 신부님은 수백만 원은 될 듯한 두터운 돈 봉투를 은퇴 신부님에게 주시고 계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사실 자신이 절약한 것으로 많은 분들을 돕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 보내시면서 사도들에게 가장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 ‘가난’입니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가난을 강조한 이유는 여라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주님의 일을 하는데 돈이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러니 부족한 것이 있으면 주님께서 알아서 다 채워 줄 것이니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성적으로 가난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신 것에는 더 큰 뜻이 들어있습니다.
죄의 뿌리는 세 가지입니다. 삼구(三仇), 즉 ‘세 가지 원수’라고 하는데 마귀, 육신, 세상입니다.
마귀는 곧 교만으로 뱀의 모양으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 교만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어서 죽기까지 온전히 제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한 번 뛰어내려보라고 한 것도 바로 예수님께 교만함의 죄를 짓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성경에 천사들이 와서 발을 받쳐 준다고 쓰여 있느니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 안에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랑해보고 하느님을 시험해보라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예수님을 의심하여 물에 가라앉았던 것처럼 믿음을 깨뜨리는 가장 큰 적이 교만입니다. 베드로는 밀려오는 큰 파도를 보면서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에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시며 하느님을 의심하여 시험하지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이 교만을 이기는 것이 순명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순명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지만 똑같은 신적 위치를 보존하려하지 않으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십니다. 이로써 첫 조상의 교만의 죄를 기워 갚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원수는 육신, 즉 성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의 성적인 부위를 가리게 됩니다. 이는 참 사랑을 하지 못하고 이제 성욕이 생겨 자신을 주는 사랑이 아닌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랑으로 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고 한 것은 기적을 통하여 육체를 만족시켜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뉴스에서도 수 없이 그 결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키면서 결국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며 육체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추구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육체적 욕망을 죽여 가는 것이 정결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통제할 수 없으면 육체의 노예가 되고 스스로 자신의 영을 죽이게 됩니다.
세 번째 죄의 뿌리는 세상, 즉 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이 카인과 아벨이었습니다. 이미 사회가 형성 된 것입니다. 사회가 형성되다보니 서로를 비교하게 되고 자신에 비해서 너무 잘 살게 되는 동생이 싫어졌습니다. 결국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마귀는 예수님께도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보여주며 자신에게 절만하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돈으로 얼마나 사람들을 휘두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이 아닌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며 마귀를 물리칩니다.
이는 하느님께 가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의 집착을 끊는 것이 가난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난을 우선적으로 살라고 하시는 이유는 가난하지 못하면 다른 정결이나 순명은 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 가지 원수, 즉 교만, 성욕, 돈 중에서 가장 이기기 쉬운 것이 돈입니다. 왜냐하면 성욕이나 교만은 인간의 내면 더 깊숙한 곳까지 뿌리박혀 있는 것이지만 소유욕은 더 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유욕을 이기지 못하면 성욕이나 또 더 나아가 교만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가난조차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정결이나 겸손은 더 증거하기 힘든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가장 구체적인 가난한 삶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닮도록 노력해야하겠습니다. ‘자신, 자신의 가정, 내가 먼저 잘 살아야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할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나눌 줄 아는 삶, 이것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시작입니다
빼앗길 수 없는 가치, 무소유
이은주 수녀님
“수녀님, 옷이 몇 벌이에요?”, “수녀님, 한 달 용돈이 얼마예요?” 궁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들은 자주 묻는다. “옷은 두 벌, 용돈은 ○만 원.” 하고 대답하면 설마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이” 하고는 말문을 닫아버린다. 그럴 만도 하다. 사실 아이들이 수도자의 삶의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더욱이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하고, 돈버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세상이니 왜 안 그렇겠나.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법정 스님이 「무소유」에서 언급한 삶의 방식과도 통하는 수도 생활의 가치는 누구에게도 침해받을 수 없는 가치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에 곡을 붙인 노래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만을 품으라는 의미이며, 그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당신이 홀로 하느님과 함께 가시니 우리도 그리 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저것 갖춰져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무소유의 길을 살아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의 수도 생활은 쌓았다 무너뜨리는 여정의 반복이다. 마더 데레사의 어머니가 수녀원에 들어가는 딸에게 “예수님의 손에 네 손을 맡기고 단둘이 걸어라!” 하는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씀은 나한테도 큰 힘이 된다.
정연동 신부님
+ 찬미예수님
빈 마음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법정 스님이 ‘빈 마음’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 신학교 입학해서는 이부자리 책 몇 권 이었는데도 마음만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풍요롭고 싱싱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저것 갖추게 되고, 하나씩 갖추는 즉시 그것에 마음을 하나씩 빼앗기는 저를 보게 됩니다.
버려야지. 버려야지. 아무리 되뇌이고 다짐해도, 손을 펼치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무릇.
신앙인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의지하는 것이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만 믿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이것저것 물질의 노예가 되는 듯하여, 과연 나는 신앙인인가 돌아보게 됩니다.
지팡이 하나 들고, 이리저리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그 지팡이로 하느님 가리키며, 사랑이 무엇인지 지팡이로 사람들 가슴에 사랑 하나 새기며, 힘들 때는 지팡이에 기대고 등 가려울 때는 지팡이로 등 긁어가며, 그렇게 가볍게 자유롭게 그러나 힘차게 살라시는데.
오늘. 지팡이 하나 든 자유로운 사제를 다시금 다짐합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떤 남자가 대형 할인 슈퍼마켓에서 강아지 먹이를 샀습니다. 그런데 점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에요.
"손님. 강아지가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셔야만 먹이를 사실 수 있습니다."
"뭐요? 그런 게 어디 있소?"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증거를 보여 주셔야 합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번거롭게 집까지 강아지를 가지러 갔다가 들고 와서 보여 주고 난 후에 먹이를 살 수가 있었지요. 며칠 후 이번에는 고양이 먹이를 사러 그 가게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먹이 두개 주세요."
"죄송합니다만 고양이가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셔야만 고양이 먹이를 사실 수 있습니다."
남자는 황당해서 종업원에게 따져 들었지만 결국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서 고양이를 붙들고 와서야 겨우 고양이 먹이를 살 수 있었지요.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남자는 웬 가운데 구멍이 뚫린 상자를 갖고 가게에 들렀습니다. 점원이 이렇게 말했지요.
"뭘 사시러 오셨죠?"
"이 상자 구멍에 손을 넣어 보면 알아요."
점원은 상자에 손을 넣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상자 안에는 뜻밖에도 "똥"이 들어있는 것이었어요. 점원이 화가 나서 말했지요.
"아니! 손님. 무슨 짓이십니까? "똥"이잖아요!"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알았으면 두루마리 화장지 두 개 가져와!"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을 꼬집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무조건 보고 만져봐야 믿는 모습,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가 점점 없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먹을 것 그리고 자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전대에 돈을 넣고 다니지 말고, 신발은 신고 있는 것 만으로만, 더구나 속옷은 두벌씩 껴입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이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정말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파견하신 것이 조금 이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지요. 배우지 못한 어부들과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던 세리, 기껏 조금 나은 사람이 혁명 당원이었지요.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아주 열악한 환경을 제공하고서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라는 엄청난 사명을 주시고 파견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속담처럼,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파견하신 것일까요? 과연 제자들의 어떤 면을 보고서 이런 상태로 파견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모조건 믿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것저것 재고서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무조건 믿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무조건 믿고 이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그 사명을 지켜나가고 있었을까요? ‘나는 기도도 할 줄 몰라요’, ‘나는 능력이 안돼요’라는 핑계만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정말로 부족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도 멋지게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곁에는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이지요.
앞선 이야기에서 그 슈퍼마켓의 영업방침은 직접 봐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에 반해서 예수님의 영업방침은 믿음입니다. 우리 역시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선교사명을 멋지게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무조건 믿어 봅시다. 예수님처럼....
감나무(박성철, '행복한 아침을 여는 101가지 이야기' 중에서)
감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는 수확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다른 나무들은 열매만 따면 되지만 감나무는 가지째 꺾어야만 열매가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가지를 꺾인 뒤에 겪는 감나무의 아픔은 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빛을 받고 영양이 공급되어 차차 아물고 상처 난 가지에는 다른 가지보다 더 예쁜 줄무늬가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감나무와 유사하다는 생각이듭니다.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몸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큰 아픔과 상처를 입는 일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픔과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아물기 시작하고 상처가 아물고 나면 오히려 더 견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니까요.
파견
이정호 신부님
가끔 아는 분들의 자녀들 혼배를 주례하기도 합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젊은이들이 평생을 함께 살겠노라는 약속을 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각자 다른 환경과 생활 습관 속에서 살다가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서로를 받아들이겠노라고 세상 앞에서 선언합니다. 부부는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과 서로의 배우자에게 파견된 예수님의 사도들과 같습니다. 사랑의 사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보내시면서 스스로를 의지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빵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버리고 떠나기를 요구하십니다. 가정 생활은 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의지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사랑을 채우기 위해 서로에게 파견된 것입니다.
때로는 더 많이 사랑받기를 바라는 우리 마음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벽을 둘러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이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내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서로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도입니다. 우리를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떤 사랑의 증거를 보이길 원하실까요.
짐
윤인규 신부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소명은 짐을 버림으로 시작하여 버림으로 끝난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하느님께 믿음을 인정받은 분이다. 소명뿐 아니라 신앙에도 짐은 걸림돌이 된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창세 22,6). 이사악은 장작만 지고, 아브라함은 손에 불과 칼만 들고 함께 걸어갔다. 하느님을 향해서 가는 이는 아내도 집도, 짐이 되는 것을 놓을 줄 안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창세 22,5). 아브라함은 종과 나귀와도 헤어진다. 하느님을 향해서 가는 이는 도움이 되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질 줄 안다.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7) 하고 묻는다. 양은 어디에…? 하느님을 향해서 가는 이는 양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서 걷는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있기에….
원장스님께
귀의 삼보하옵고,
조계사 대웅전에서 철야 정진 기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 나간 탕자처럼 떠돌던 마음을 거두어 주시니
오히려 몸과 마음을 내릴 곳이 없습니다.
티끌처럼 낮아지고 가벼워져야 제 원력도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바라건데 천성산과 함께 한 모든 인연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거두어 주소서.
2005년 2월 1일 지율 합장 삼배
이 글은 천성산 터널공사를 반대하며, 단식 98일째에 접어든 지율스님께서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제 오늘로써 정확하게 100일째 단식에 들어섰지요. 말이 100일이지, 10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지율 스님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입니다.
지율 스님께서 그동안 주장하신 내용은 이렇지요. 천상산 구간의 토목공사는 계속하더라도 우선 적어도 발파작업을 3개월 이상 보류하자는 것과, 이 기간에 천성산의 습지와 도롱뇽 등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 전문가를 참여시켜 투명한 환경영향평가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공사중단은 있을 수 없다’며 확고한 입장을 밝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스님께서는 단식을 선택하셨고, 오늘로써 100일째의 단식에 접어들었습니다.
개발 논리만을 앞세워 환경파괴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정부, 또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오신 스님에 대해 무관심했던 우리들의 모습들. 만약 스님께서 잘못되신다면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없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것도 간직하지 말고 떠나라고 합니다. 유일하게 허용한 것이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 도저히 제자들의 전교 여행은 성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그렇게 특출한 사람이 없었지요. 그러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이 세상에 나간다는 것.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는 등,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속적인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으로써,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빽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발논리가 정말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지를 우리는 따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개발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율 스님 단식 100일째. 제발 단식을 푸시고, 우리들 곁에서 환경을 계속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버리고 함께 어울려 살기를 바라는 하느님 뜻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을 간직함으로써 회개하길 기도합니다.
지율스님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내가 좋아하는 이(용혜원)
이 지상에 함께 살고 있음은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남은 서로의 만남을 위함입니다
삶이
외로울 때
허전할 때
지쳐 있을 때
오랜 동안 함께 있어도 편안하고 힘이 솟기에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이 있음은 신나는 일입니다
온종일 떠올려도 기분이 좋고
늘 사랑의 줄로 동여 매 놓고 싶어
내 마음에 가득 차 오르는 이
내가 좋아하는 이
이 지상에 함께 살고 있음은 기쁜 일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이 있음은 두 팔로 가슴을 안고
환호하고 싶을 정도로 감동스러운 일입니다
차성현 신부님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권한을 행사 할려면 어떤 수단과 도구들이 필요하였을 터인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먹을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일체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가지는 꼭 챙겨서 가져가라고 한 것이 있는데 지팡이 입니다.
'지팡이' 하니까 갑자기 모세의 지팡이가 생각납니다. 어릴 적 읽었던 그림성서에서 모세 할아버지가 두 팔을 펴서 바닷물을 힘차게 가를 때 그 손에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파라오 왕 앞에서는 그 지팡이가 이집트 마술사들의 지팡이를 다 삼켜 버리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말라 할 때면 바위를 내리쳐서 물을 나오게 했던 것도 그 지팡이 입니다. 지팡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지팡이는 빼먹지 말고 꼭 챙겨가라고 하셨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느님만 의지하며 제자로서 살아가라는 말씀이겠죠.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온전히 거짓은 아니지만, 그러나 저는 다른 것에도 많이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우선 사람에게 많이 의지합니다. 기쁜 일이나 힘든 일에 언제나 사람들의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하고 또 만족해 합니다. 때론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위로를 받고 싶기도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할 때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좋아도 행복하고 힘들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축복은 언제나 멀리 있는 것 같고 사람들의 관심과 위로는 항상 가까이에서 저를 만족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돈에도 많이 의지합니다. 한번도 돈에 대하여 부족하거나 아쉬워해본 적은 없지만, 돈의 위력과 편리함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결코 그것의 노예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무슨 일을 할 때면 돈을 걱정하게 되기도 하고 또 세밀히 계획하곤 합니다. 이 외에도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이 많습니다. 부끄러워서 다 말을 하지 못할 뿐 입니다. 이런 저에게 요한 복음의 이 구절은 참 많은 위로가 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15,16) 모든 부족함을 다 아시고도 우리를 택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불러주신 제자의 삶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으셨던 주님. 그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셨던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는 그분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나머지 부족한 것은 그분께서 다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자신이 받은 소명에 오늘도 부끄럽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갑니다.
언젠가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 학교의 스쿨버스가 사고가 났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많은 학생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마침 그 날엔 학생수와 같은 수의 선생님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학생들이 더 많이 다쳤을 것 같은데 오히려 몸이 성한 선생님들이 더 많은 부상과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고가 나자 선생님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장애아인 자신들의 제자들을 자신들의 몸으로 감싸 안았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보호를 받은 아이들은 약간의 상처만 입었을 뿐입니다. 갑자기 그 학생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몸이 불편한 장애가 더 이상 불행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애가 그 아이들을 불행하게 했다기보다 선생님들이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건강한 우리 안에도 많은 장애들이 있습니다. 8년동안이나 장애아들과 함께 사셨던 수녀님이 피정 중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의 장애를 다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행히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만큼 크지 않기에 장애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뿐이라고 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모두 감추어진 장애인들입니다. 사고가 난 버스에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들이 타고 있었듯이, 우리들의 삶에도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못났지만 그러나 그런 우리들의 장애를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잊지 말라고 하셨던 그 지팡이만 잃어버리지 않아야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궁금해서 그 수녀님에게 한번 물었습니다. 저에게 감추어진 장애는 어떤 종류인 것 같습니까? 진단 결과가 나오는데 단 1초도 안걸렸습니다. '다운 증후군 같은데요' 아멘.
우리의 모두인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청명(淸明한) 겨울
하얀 잔설(殘雪)
눈부신 천상(天上)의 빛
순결(純潔)한 영혼
아, 그립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고 환상의 거품 속에 살아갑니다.
며칠 전 밤 시간을 이용해 DVD를 통해 본 카르투시안 수도생활의 감명이 새롭습니다.
“삶에 환상의 거품이 완전히 걷힌, 너무나 평범한 수도원의 일상이었습니다.
삶이 시(詩)이고 기도(祈禱)이고 예술(藝術)인 듯 참 아름답다 느껴졌습니다.
하느님만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삶 안에서 평범의 깊이와 맛을 알고 사는 수도승들 같았습니다.
사실 하느님 맛은 별난 맛이 아닌 맹물 같은 평범한 맛입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 삶도 죽음도 별것이 아닌, 지금 여기서 영원을 사는 수도승들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구름이 걷히면 청명하게 빛나는 태양이듯이, 환상의 거품이 걷히면 지금 여기가 천상의 예루살렘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앞당겨 체험하는 천상의 예루살렘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히브리서가 적절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와있는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거기에는 새 계약의 중재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의 피가 있는 곳입니다.”
참 고맙게도 이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감지되는 현실입니다.
이런 천상의 예루살렘의 체험이 있어, 세상 것들에 초연함이요 자발적 가난에 단순한 삶입니다.
하느님 맛을 본이들, 더 이상 세상맛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제자들, 하느님만으로 충만 되어 있으니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만한 이들, 지극히 단순한 삶에 내적부요의 삶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시는 이르셨다.”
부수적인 모든 것들은 떨쳐버리고 하느님 능력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한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만이 모두가 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며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최고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을 드러냄으로 회개를 촉발시키고 마귀와 병의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어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회개한 우리들을 치유해주시고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어 우리 삶의 현장으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김인한 신부님
제가 처음 신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중학교 2학년때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께서는 원대한 포부와 아니면 남다른 부르심의 체험을 하셨을 테지만, 저는 신부님이 되면 그저 기쁘게 살 것 같아 보여서 신부가 되고싶었습니다. 제게 비친 신부님의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것이 저의 부르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길이 신부가 되기까지 대략 15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단지 신부가 되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그 어린 시간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단지 신부가 되었을 때의 행복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부가 아니 사제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 그리고 사제가 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제 자신이 무엇이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되어감으로 인해서 행복함을 말입니다. 제가 무엇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제가 그 무언을 위해서 살아가는 가에 의해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자신이 정말 주님으로 인해서 행복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제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시간이 다하고 나서도 제게는 기쁨이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말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있음으로 인해서 행복함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틀어놓은 티비에서 말하는 광고는 제게 무엇이 있음으로 인해서 행복해 짐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있음으로 인해서 행복함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많은 것을 가지지도 그리고 많은 것을 얻지도 못했지만 작은 어떤 것으로도 저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있음으로 인해서 저는 빈약하고, 그리고 보잘 것 없어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누구도 있음으로 인해서 행복함을 진정으로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는 많은 경우 행복해 질거라고 속단하고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UN에서 조사한 이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아마 방글라데시라는 기사를 보면서 역시 우리는 어리석은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행복하셨던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있음으로 인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안에서 살아감으로 인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置?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쫓아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성서 말씀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복음을 전하러 보내시면서 당부말씀을 하십니다. 어느 것 하나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무엇이 있음으로 인해서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면, 물질에서 그리고 집착에서 벗어나고 행복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부족한 삶이 행복할 수 있음을 말입니다.
12제자의 말아톤
이현철 신부님
오늘 복음 (마르 6, 7- 12)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최대한 간단한 복장(?)을 강조하시는 것을 묵상하면서 저는 며칠 전에 본 ‘말아톤’이란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겉보기엔 또래 아이들과 다른 것 하나 없는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 초원. 어느 날 초원이는 자폐증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게 되고, 엄마 경숙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한다. 그러나 경숙은 초원이가 달리기에만큼은 정상인보다도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달릴 때만큼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희망을 갖고 꾸준히 훈련시킨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20살 청년이 된 초원. 그러나 지능은 여전히 5살 수준에 머물고 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귀를 뀌어대고, 동생에겐 마치 선생님 대하듯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음악만 나오면 아무데서나 특유의 막춤을 선보이기 일쑤이니, 어딜 가든 초원이가 있는 곳은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하는 짓이나 말투는 영락없는 5살 어린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달리기 실력만큼은 여전히 최고인 초원. 경숙은 자신의 목표를 ‘초원의 마라톤 서브쓰리 달성’으로 정하고 아들의 훈련에만 매달린다.
어느 날 세계대회에서 1등을 한 전력도 있는 전직 유명 마라토너 정욱이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 200시간 명령을 받고 초원의 학교로 오게 된다. 경숙은 애원하다시피해서 기어이 정욱에게 아들의 마라톤 코치 역할을 떠맡긴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초원을 성가시게만 생각했던 정욱. 하지만 초원과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그는 아이같이 순수하고 솔직한 초원에게 조금씩 동화되어 가고, 초원도 정욱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정욱은 매번 속도조절에 실패해 지쳐 쓰러지기는 하지만 지구력이 남다른 초원에게서 마라톤 서브쓰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간다. 한편 불성실하게만 보이는 코치 정욱이 도통 미덥지 않은 학부형 경숙은 어느 날 정욱과 심한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자식 사랑과 집착을 착각하지 말라”는 정욱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경숙. 경숙은 정욱의 말대로 이제껏 ’좋다’, ‘싫다’는 의사 표현도 할 줄 모르는 아이를 자신의 욕심 때문에 혹사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듯한 기분의 경숙. 그녀는 이제 마라톤도, 서브쓰리도 모두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또 혹시 아들 초원이 마라톤을 하다가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아들의 마라톤을 극구 말리는데 초원이는 가족몰래 춘천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여 마침내 성공한다...
아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식량자루나 전대에 돈, 여벌 옷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복음선포라는 마라톤(영적 자폐증이 있는 우리는 이를 말아톤이라고 하기도 함)에 있어 그것들이 하나의 짐(집착,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노파심에서가 아닐까요? 그리고 마라톤이나 등산도 본인이 원해서 해야지 엄마가 늘 초코파이로 아이를 유혹하며 그것을 강요할 수 없듯이, 초코파이처럼 달콤한 물질주의의 유혹을 제자들이 잘 극복하게 예수님은 엄격한 코치로서 제자들에게 극기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참고로 이에 관한 도반신부님의 강론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이현철신부)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마태 10, 5~15)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낯선 곳으로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냉정하다싶은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인가를 챙겨가라’, ‘걱정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능하면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매정한 말씀을 하신 것인가?
우리말에 응석받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냐오냐’ 하고 키워서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응석받이들은 여러 가지 단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가장 큰 단점은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은 결국 자신의 내적 상태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아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며 보호막이 망가졌을 경우에 피폐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편한 삶, 어려운 삶을 살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적인 성숙함은 편안한 가운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교육문제를 논할 때 교육 분위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토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민주적인 것을 주창하는 서구사회에서도 귀족계층이 다니는 학교는 대개가 다 엄격한 규율 안에서 힘든 생활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하고픈 대로 하게 되면 내적인 힘이 생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관점에서 파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고생할 것을 각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산에 오르는 아이가 셋이 있습니다. 한 아이는 씩씩하게 자기 부모를 따라서 산을 오릅니다. 다른 아이는 힘들다고 울며불며 하면서도 어기적어기적 산을 오릅니다. 다른 한 아이는 자기를 업어주지 않으면 산을 오르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세 아이 중에서 어떤 아이가 제일 사랑을 많이 받을까요? 하느님이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을 사랑하실 지도 아시겠지요. 대나무는 일정한 길이마다 매듭이 있습니다. 성장의 표시란 것이지요. 사람 역시 인생의 고비마다 마음 안에 매듭이 지어집니다. 그리고 그 매듭이 그 다음 성장을 하게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몸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매일 뒤집어져 자는 것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힘겨움 무거운 역기를 드는 고행 길에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용상, 인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살다가 힘겨움이 왔을 때 하느님이 나를 키우시려고 이렇게 힘겨움을 주시는 구나 생각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홀로>와 <함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홀로> 하느님과 맞대면할 때가 있었는가 하면 끊임없이 제자들과 <함께>, 그리고 군중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둘씩 짝지워> 파견하셨다. 그리고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
오늘 말씀에서 특히 <둘씩 짝지워> 파견하시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가끔 참 좋은 분인데 함께 일하기는 어렵고 독불장군처럼 홀로 일하는 성향이 강한 분들을 보게 된다.
어떤이들은 별 능력은 없어도 함께 일하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보게 된다.
수련 때 농장일을 시켜보면 남들은 함께 담소도 하면서 밭을 메는데 꼭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풀을 뽑는 형제도 있더라. 어떻게 보면 능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홀로> 하기를 즐기는 지도 모르겠다.
예수님도 분명 홀로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홀로하심은 거의 항상 아버지와 단둘이 있고 싶어함의 결과일 뿐이었다. 아버지와 대화하고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위해 <홀로>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홀로>의 시간은 <함께>를 위해 있는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파견받은 자>로서 이 <함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 <함께>를 원칙으로 내세우신 것은 아닐까? <홀로> 따로 파견하시지 않고 <둘씩 짝지워> 파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가끔 교구 신부님들을 바라보면서 <홀로>여서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으니까???(사실은 그럴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보면 <홀로>이기에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수도자들은 늘 <함께>를 살아가기에 때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 <함께> 때문에 늘 든든할 수 있다. 언제나 형제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웬수>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이 형제들이 없으면 홀로 이 멀고도 험난한 영적여정을 어떻게 걸어나갈 수 있을까 끔찍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드시면서도 <홀로>가 보기가 안스러워 <함께>하도록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하지 않는가?
때로 <함께>의 대상인 가족이나 형제가 웬수로 보일 때도 있지만 이 <함께>에 대한 감사가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파견받은 제자의 신분을 살 수 있게 된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가?
그래야 한다.
하느님과는 가능하면 <홀로>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동료 인간들과는 늘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다운 제자는 될 수 없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간에 이 <홀로>와 <함께>에 충실해야만 한다.
나의 <홀로> 있음과 나의 <함께> 있음이 참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꾸려나가자. 그럴 때 나의 약점과 부족함도 문제가 되지 않고 다른 이웃의 다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니시, 좋더라!> 하신 창조주의 기쁨을 우리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과 <홀로>가 좋더라!
이웃과 <함께>가 좋더라!
아, 이 기쁨이여!
사심(私心)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모처럼 찾아간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하여 기(氣)가 꺾으실 예수님이 아니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고향방문과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不信)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오늘도 계속된다. 오늘은 예수께서 친히 뽑아 내세우시고 가르치시고 돌보아오신 12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우신 것은 그들로 학교나 수도원을 꾸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선포하고 더러운 악령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며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다.
이에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에 마땅한 능력을 주신 것과 그들에게 훈시한 여장규칙과 선교방법을 전해주고 있으며, 마지막에 가서 파견된 제자들의 활동상을 들려준다.
12제자의 파견사실과 여장규칙 및 선교방법에 대해서는 공관복음 모두가 전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마태 10,1.5-10; 루가 9,1-6) 마태오는 따로 편집한 파견설교(10장)를 조직적으로 꾸미기 위해 파견사실과 12제자의 명단을 서두에 배치하였다.
루가복음의 여장규칙과 오늘 마르코복음의 여장규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차이점이 발견된다. 마르코는 전교여행 중에 지팡이와 신발을 허용하고 있는 반면, 루가는 이를 금하고 있다. 루가는 마르코의 원전을 옮겨 쓰면서 지팡이의 휴대를 금하고 있으며, 신발 이야기는 아예 삭제해 버렸다. 마르코와 루가는 둘 다 자루, 먹을 것, 돈, 그리고 두 벌의 속옷 휴대를 금하고 있다.
선교사의 생명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런 것들을 휴대하지 말라니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는가?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즉 있는 그대로 가라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보살핌과 안배에 의탁하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여행을 다닐 때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자. 사람들은 키톤(chiton)이라는 속옷(루가 3,11)을 입었는데, 이는 머리와 양팔만 들어가는 긴 부대와 같은 옷으로서 한 장의 천을 접어 한쪽만을 바늘로 꿰맨 것도 있고, 혼솔 없이 통으로 짠(요한 19,23) 것도 있었다. 그 위에 히마티온(himation)을 입었다. 이는 상의의 겉옷(루가 6,29)으로 보통 두 장의 천으로 체격보다 크게 만들어 머리 위에 올려 입기도 하고 어깨에 걸쳐 입기도 하였다. 밤에는 이 겉옷이 바로 모포가 된다. 허리춤에는 띠를 매는데 이는 체격보다 큰 겉옷이 끌리지 않게 하여 행동을 용이하게 한다. 그 띠에 전대를 매달아 돈이나 귀중품을 넣었다. 머리에는 강한 햇빛에 머리와 얼굴을 보호해 줄 수건을 둘렀고, 발에는 돌길과 험한 길로부터 발을 보호해 줄 신발을 신었다. 이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카르파티나(carpatina)라는 것인데 신발바닥 양쪽에 가죽끈을 달아 발목에 매어 신고 다녔다. 어깨에는 주머니를 매고, 손에는 통상 지팡이를 짚고 있다. 주머니에는 하루나 이틀의 양식이 될 빵과 건포도, 올리브와 치즈 등이 들어있을 것이고, 지팡이는 맹수나, 뱀,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였다. 물론 이런 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때에 따라 더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덜 가지고 다닐 수도 있다.
먹을 것도 자루도 돈도 속옷 두벌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제자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야 한다. 선교는 여행이 아니다. 물론 다시 돌아와 스승이신 예수께 활동보고를 드려야겠지만, 언젠가는 돌아와도 그분이 계시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의 훈시에 따라 그분이 명하시는 대로, 지금껏 스승의 동반자와 증인으로 보고들은 것을 세상에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런 사심(私心)없는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말이다.
살기도 좋고 죽음 이후까지도 성공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시간 따라 사는 세상살이 준비를 저마다 합니다. 배움 자격증 몸매 건강 이웃 사랑 지위 취직 등등 무척이나 다양합니다. 그래도 슬픔 욕심 부족 불균형 미달 투쟁 등의 고해를 헤쳐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맨몸에 옷 한 벌로, 대신 더러운 영들을 제압토록 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소박하게 만들 사명감을 힘으로 주시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나눔 봉사 도움이 피어나 살기 좋고 죽음 이후까지도 성공하겠지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코 6,7)”
떠남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강론을 쓰기 시작한 시간은 미국시간 2.4일 오전 12:30분입니다.
떠나는 설렘에 눈뜨니 아직도 한 밤중이지만 창밖 주님의 달빛이 방안을 환히 밝힙니다.
지금 심정은 42년전 34개월의 충실했던 군복무 후, 만기제대할 때의 서운함과 설렘이 교차했을 때와 흡사합니다.
아마 형제자매님들이 이 강론을 읽으실 2.5일(오 02:00-오후4:25분), 저는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을 것입니다.
출국 준비에 다른 때보다 5시간 일찍 올리는 강론입니다.
문득 홈페이지에서 읽은 '나르다' 자매의 글이 생각납니다.
-저는 오렌지 카운티에 거주하는 오은정 레오나르다입니다.
보통 주변 분들은 저를 그냥 '나르다'라고 부릅니다.
세례명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에 급한 성격으로 인해서 ‘날라 다닌다’ 고 해 ‘하늘을 나르다’라는 뜻이 더 강하답니다.
그냥 '나르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있는, 사랑스런 '나르다'라는 세례명인지요.
'하늘을 나르다'라는 자유인의 뜻도 있지만 '사랑을 나르다'라는 천사의 역할도 있습니다.
저는 태평양 하늘을 날라 한국에 가고, 강론은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날라다 줄 것이니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떠남의 여정입니다.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날도 어제에 이은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떠남의 여정'이자 '탈출의 여정'입니다.
막연한 떠남이, 탈출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떠나 주님을 향한 여정이자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입니다.
저에겐 '떠남의 여정'이지만 그동안 저를 기다렸던 분들에겐 '기다림의 여정'이기도 하겠습니다.
뉴튼수도원에서 마지막 떠나기 전 날인 어제도 행복했습니다.
주님이 마련해 주신 파란 하늘에 순백(純白)의 흰눈 은총으로 빛나는 대지(大地)가 그대로 환송(歡送)의 축제날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순백의 은총으로 빛나는 눈길을, 묵주기도를 바치며 걸어 호수에 갔다가 수도원 묘지를 다녀 오면서 약 1시간 동안 수도원 경내를 순례했습니다.
다녀 온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짐을 싸고 정리하면서 오늘 복음의 파견 받아 떠나는 주님의 제자들을 묵상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이보다는 훨씬 못 미치지만 뉴튼수도원에 올 때도 제 짐은 간편했습니다.
바로 내 집과 같은 뉴튼수도원의 환대(歡待)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주님의 '환대의 집'이라 일컬을 만큼 '환대의 영성'이 뛰어난 곳입니다.
여기서 받은 수도형제들의 사랑의 환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정말 아쉬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이 저토록 무소유로 파견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곳곳에 산재해 있는 신도들의 헌신적 사랑의 환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불필요한 옷가지등 덜어낸 짐이 한 보따리 가득입니다.
늘어난 것은 수도영성에 관한 여기 성물방에서 구입한 여러 권의 책들인데 복음의 제자들은 이런 책들도 없었을 것이니 최대한 가볍고 자유로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소유한 최고 무형(無形)의 자산은 말그대로 함께 했던 주님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 주님의 나라에 갈 때는 책들도 필요없을 것이고 주님과 사랑의 우정관계 하나뿐이겠지요.
서운함도 있지만 설레는 마음 가득 안고 떠납니다.
-프란치스코 신부님! "감사합니다."-
극구 사양했지만 인정(人情) 많은 사무엘 원장이 꼭 필요한 곳에 쓰라고 용돈도 두둑히 주니 힘이 솟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환대 받다 떠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환대의 자리'가 오늘 1독서에 장엄하게 묘사되는 시온산이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이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그분의 피가 있는 곳입니다.'
환대의 자리, 바로 여기가 '꽃자리'이고 위에서 말하는 모두가 해당되는 곳입니다.
이런 모두를 감지할 수 있는 주님의 환대의 절정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이 주님의 빛나는 천상 예루살렘 환대의 자리를 지금 여기서 미리 맛보게 합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의 시편 한 구절도 참 흥겨웠습니다.
"내 마음 다하여 야훼님 기리오리다. 천사들 앞에서 당신께 노래하오리다."(시편138,1).
공동 시편성무일도 전례시간을 통해서도 천상 예루살렘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수도자들입니다.
한국에서의 예상되는 환대가 또 저를 설레는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立春大吉, 2월4일은 매서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시작되는 입춘입니다.
따뜻한 봄기운의 시작과 함께 가정에도 늘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강론 쓰는 도중 도착한 카톡메시지입니다.
봄 같은 환대를 받다가 한겨울 입춘날, '봄이 되어'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국을 향해 떠납니다.
제 모원인 요셉수도원의 빠코미오 원장수사의 이메일 편지 역시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페북 사진에서 수사님께서 행복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이제 곧 다시 뵙겠군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 다 수사님의 귀국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저의 귀국을 열렬히 기다리며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아마 충실히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성인들, 천사들 역시 우리를 열렬히 환영, 환대해 주겠지요.
복음의 환대 받은 제자들은 공짜로 환대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즉시 복음을 선포하며 축복의 주님을 나눴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바로 이렇게 환대에 보답했던 제자들입니다.
이보다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지요.
이런 제자들이 머무는 자리는 그대로 시온산이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저 또한 안식년이라 하지만 밥값(?)하는 마음으로 매일 충실히 강론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서의 환대에 응답하여 매일 산책하며 수도원을 위해 기도했고 모든 전례에 충실했으며 인터넷 강론을 통해, 또 카톡을 통해 주님의 집인 뉴튼수도원이 얼마나 놀랍고 좋은 곳인지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정말 제 강론을 통해 회개의 복음이 선포되고 마귀가 쫓겨나며 많은 병자가 말씀의 기름으로 치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리 되리라 믿고 또 믿습니다.
아, 깨닫습니다.
알게 모르게 무수한 거룩한 형제자매들의 사랑과 기도 덕분에 뉴튼수도원에서의 성공적 내적순례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내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특히 아가타 영명축일을 맞는 모든 자매님들께 주님의 한량없는 축복을 빕니다.
"어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우리를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 주시리라."(묵시7,17참조).
아멘.
더 가치있고 더 아름다운 것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집중적인 교육을 수료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제 막 복음 선포를 위한 사도직 실습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기대 반 걱정 반 속에 제자들은 이 것 저 것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꽤 시간이 걸리는 전도여행이었고, 더불어 전도 여행 중에 머물 수 있는 숙소가 미리 예약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경우에 따라서 노숙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짐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식량으로 사용할 빵도 잔뜩, 노숙시를 대비해서 담요도 한 장, 여벌옷도 잔뜩, 신발도 몇 컬레, 만일의 사태에 대비에 비상금도 넉넉하게...그러다보니 출발 전 이고지고 갈 짐이 다들 한 짐이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복음 선포보다도 그것들 지고 갈 생각하니 까마득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정말이지 기가 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약간을 실망도 하시고 분노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소유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쳤건만 다 허사였다는 생각에 허탈하셨을 것입니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기에 예수님께서 출발 직전 제자들을 집합시키십니다. 그리고는 속된 표현으로 ‘한따가리 ㅋ’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마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은 너무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장거리 도보여행 하다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생길 텐데, 적어도 비상금이라든지 비상식량은 챙겨서 떠나야 되는데, 한 마디로 ‘몸만 가라’, ‘맨땅에 헤딩’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는 왜 들고 가라고 하시는가 봤더니 당시 여행객들에게 지팡이는 필수 품목이었답니다. 광야나 들길을 걷다보면 뱀이라든지 전갈이라든지, 들짐승을 만나곤 했는데 비상시 호신용으로 다들 지팡이 하나씩을 들고 다녔답니다. 그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더 묵상해보니 예수님 말씀이 백번 천 번 지당합니다. 수도자로 살아보니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수가 있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마트나 시장 한번 안가고 살수도 있었습니다. 더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고, 더 영적인 삶을 갈구하다보면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초월할 힘이 본인도 모르게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앞에서 수도자들의 증거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돈 없이도, 최첨단 문명의 이기 없이도,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것을 수도자들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몸에 지닌 것이 많을수록, 통장에 잔고가 많을수록 거기에 신경 쓰이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서로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분노하고 실망하게 되고, 점점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이 쏠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물질이, 돈이, 명예가, 건강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대조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오고가는 끈끈한 우정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우리 눈은 흐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녀 아가타 축일입니다. ‘아가타’라는 이름의 뜻은 ‘착하다. 선하다.’라고 합니다. 착하고 선한 아가타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다가 천국의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 신앙의 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소국에 새로 오신 수녀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수녀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른다섯 전에 만나는 그녀의 10가지 얼굴’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 매일 매일이 그저 단조롭고, 괴롭다면
- 평소 싫어하는 사람을 닮아간다면
- 다른 사람들은 완벽해 보인다면
- 내 방이 엉망인데도 치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면
- 점쟁이와 인생의 중대사를 의논한다면.
책에서는 이와 같은 증상이 3개 이상이면 문제가 있는 여성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신앙상태를 점검하는 질문도 몇 가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면
- 하루에 30분 이상 침묵 중에 기도할 수 있다면
-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고, 평일 미사에도 참석하려고 한다면
- 신앙서적을 읽고, 교회에서 행하는 피정과 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 본당의 주보를 유심히 보고, 교회 소식에 관심을 갖는다면
- 본당의 신심단체에 가입해서 활동을 한 가지 정도 한다면
- 가족과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면
-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 칭찬과 감사의 말이 자주 나오고, 자주 웃는다면
이런 항목에 3가지 이상 적용된다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도성’에 이미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끄러움에 몸을 감춘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아담에게 낙원은 이미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밝은 태양도, 싱그러운 바람도, 들의 꽃도 아담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아담은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의정부 어머님께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시청 역에서 내렸습니다. 늦은 밤, 역에서 내려 명동까지 걸어오는데 잠시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걷다보니 광화문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청계천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명동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길에는 이정표가 있기에 방향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몇 번씩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도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생각이 하나의 흐름으로 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갈팡질팡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맡겨 드리지 못하고, 나의 생각을 짜 내려고 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한 순간 하나의 주제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생각이 정리되고 글이 써지곤 합니다.
정말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출세, 성공, 권력, 재물의 변두리를 맴돌면 나의 마음도 그곳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 가치, 목표는 철저하게 경쟁과 성공의 신기루를 행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탐욕의 독버섯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성공과 출세의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의 덫에서 방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서품을 받는 젊은이들에게 물어 보실 것 같습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 또 저에게도 물어 보실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너 어디에 있느냐?’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여행을 하기위해 짐을 챙길 때에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돌아다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를 해야만 안심이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6,8-9)
이말씀은 한마디로 ‘한눈 팔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 해야지 인간적인 그럴 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결국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처음여행을 떠날 때에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자주 여행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임의 뜻이
님이 나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나를 부르시니 기뻐 따르오리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나를 보내시니 뜻이 이루어지소서.
님이 나를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지만
님이 나를 부르시니 기쁘게 따르오리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 주옵소서.
주여 내게 말씀하소서. 말씀전하오리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나를 보내시는 뜻이 이루어지소서.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 주옵소서.
주여 내게 말씀하소서. 그 말씀 전하오리다. -임석수-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 6,7)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더러운 영들이 우글거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일을 하도록 세상에 파견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정화시키는 역할을 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맑고 고운 영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의와 평화로 무장된 강력한 영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의 힘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둘이서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요 도반이 중요합니다.
자, 오늘 우리가 가는 곳곳이 더러운 영들이 사라지고 맑고 깨끗한 영이 자리하는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곳이 되도록 나가 봅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뒷배를 봐주고 계시니 겁낼 것 없습니다.
그분이 협조자로 다른 형제나 자매를 보내 주실 것이니 더더욱 두려울 것 없습니다.
오늘도 힘차게 화이팅합시다!
정주(定住)는 Yes, 안주(安住)는 No.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디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여행을 할 때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받아들이면 그곳에 머물되 한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련두지 말고 깔끔하게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중에 환영치 않거든 깔끔하게 떠나라는 것도 이해되고, 환영을 하면 그곳에 머물라는 것도 이해가 되는데 한 집에 머물라는 말씀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저의 과도한 해석인지 모르지만 정주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영성에 있어서 중요한 영성 중의 하나가 정주영성입니다. 유럽이 민족의 대이동으로 매우 혼란스러울 때 하느님께서는 베네딕도 성인의 정주영성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셨지요. 정주영성은 본래 여기저기 떠돌지 말고 하느님 안에 정주하는 거지만 구체적으로는 한 공동체에 진득하니 머물라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한 곳에 머물지라도 싫증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한 공동체에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많았지만 오늘날은 더더욱 많습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영혼 말입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은 행복하지만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은 불쌍하지요. 우리 수도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봅니다. 누구 때문에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단체들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봅니다. 누구와는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주란 누구와 살아도 자유로운 사람, 누구와 살아도 하느님 안에 정주하는 행복한 사람, 누구와 살아도 하느님 때문에 평안한 사람의 <여기 머묾>입니다. 그런데 정주영성에서 정주란 꼭 장소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정주(定住)의 정定은 정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해진 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혼인의 짝을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내가 좋아 택했다가 싫어지면 헤어져도 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생각하여 정해진 시간표를 내 입맛대로 바꾸려들지 않고, 정해진 소임을 싫으니 바꿔달라고 하지 않으며, 정해진 규칙, 곧 규정을 맘대로 흔들어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순례의 삶도 잘 살아야 합니다. 어디서나 정주하여 안정되게 살 수 있어야겠지만 정주가 안주가 되어 떠나야 함에도 못 떠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주(定住)는 좋지만 안주(安住)는 안 되겠지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누구도 애착치 말 것이며 하느님의 뜻이라면 어는 곳도, 무슨 일도 집착치 말아야 합니다. 애착이나 집착을 발의 먼지로 여기며 탁탁 털고 떠나 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빌고 비는 오늘입니다.
가난한 순례자로서 걸어가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의 제1독서는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니라 시온 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히브 12,18-22)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시나이 계약 때의 장면과 종말에 나타날 시온 산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큰 소명과 은총을 받았음을 알린다. 우리가 받은 이 소명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 해방과 자유, 곧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태도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하는지 가르치신다. 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는가? 그 으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불림 받았다. 우리가 어떤 목적에서든 무엇을 하는 것 이전에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차적인 존재이유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채 하느님 나라는 선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있느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어떤 상황에서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내 뜻을 앞세우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복음화에 앞서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3,14-15)과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다(6,7).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었다(6,12-13). 말하자면 제자들의 소명은 하느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각자의 처지에서 삶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선포하고 고백하도록 불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철저한 가난을 요구하신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고 하신다.
지팡이는 야수와 강도들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발은 팔레스티나에 돌이 많고, 사막이나 광야를 횡단할 때 뜨거운 지열(地熱)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모나 아마포로 된 속옷을 두 벌 껴입는 것은 부유한 이들이 하는 것이었기에 금하셨다. 이처럼 가난이야말로 복음선포의 신빙성을 보장해주는 살아있는 표지이다. 따라서 파견된 이들은 현세적인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인정받기를 바라거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거절당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6,11). 또한 가난한 자로서 내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하며’(6,12) 감화를 주는 것, 그리고 따뜻한 말을 통하여 생기를 주는 자체가 생생한 복음선포이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한 복음화의 일꾼이요 천상 본향을 향한 지상의 순례자로서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한 자로서 삶과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이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인 소명을 깊이 깨달아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예루살렘을 향한 복음화의 순례길을 떠나기로 하자.
소명의 삶 살 때 은총 커진다
배광하 신부님
거룩한 부르심
▤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 가운데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수도원이나 신학교에서 성소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 사연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트럭 행상을 하다가 문득 사제가 되고 싶어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성소에 발을 들여놓은 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실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 여자들만 있는 집안에서, 여자들만 있는 대학, 회사를 거쳐 사제가 된 이, 실로 아주 다양한 부르심으로 성소를 택한 이들이 많습니다.
세속적으로 잘 나가던 길을 버리고 사제 성소를 택한 이들까지 모두가 어느 날 주님께 붙잡힌 이들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참으로 오묘하시어 놀랍기만 합니다. 그 옛날 아모스 예언자도 자신의 부르심 받은 이야기를 아주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그렇습니다. 구약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오늘도 부르심을 받는 이들의 대부분 공통점은 그들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이며, 우연한 기회에, 특별할 것 없는 방법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점지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필연적인 관계에서 그리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 성 바오로는 오늘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 4-5).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부르심을 받은 그분의 자녀인 것입니다. 실로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지존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참된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넘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힘 있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부르심 받은 이들의 사명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문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우둔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하루에 한 자씩 한문을 읽히도록 종이 위에 한 일자(一)를 쓰셨습니다.
“이것이 한 일 자이니라, 이제부터는 매일 매일 한 자씩 한문을 배우도록 하여라.”
아버지께 종이를 건네받은 아들은 밤새도록 읽고 또 썼습니다. 아침에 마당을 쓰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큰 지게 작대기로 땅 바닥에 한 일자를 크게 쓰시며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자이냐?” 아들이 도무지 무슨 글인지 몰라 계속 머리를 갸우뚱거리자,답답한 아버지는 아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밤새 외웠는데 그래 한 일자 하나 모른다는 말이냐?”하며 호통을 치시자, 깜짝 놀란 아들이 대답합니다. “그렇습니까? 한 일자가 밤새 그렇게 커졌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움 받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듣고 또 들었습니다. 그러나 듣고도 이내 잊어버리고 삽니다. 기억은 해도 믿음이 없어 세상 것에 더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일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매한 아들처럼 세상 것을 끝내 끊어 버리지 못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파견의 소명을 내리신 주님께서는 오늘 다시금 믿음을 깨우쳐 주시고 계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이면 족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동행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예전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쓴 글을 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 안에 살기로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항구히 소명의 삶을 살 때, 은총은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
구요비 신부님
내가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본당에서 세례를 받으신 불문학 교수님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조르쥬 베르나노스 저 / 정영란 역)를 최근에 선물로 받았다.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이 책을 밤을 꼬박 새워 읽으며 심오한 영적독서를 접하는 심정이다. 조르쥬 베르나노스는 불란서의 가톨릭 작가인데 인간의 내면에서 해파리처럼 입 벌리고 있는 권태와 허위, 공허와 위선 안에 짙게 드리워진 악의 세력과 싸우며 살아가는 사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젊은 사제의 모습 안에는 아르스 본당의 요한 비안네 성인의 삶과 영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자주‘범용(凡庸)한 사제는 추하다’라고 가혹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이 작품 안에서는 범용한 사제에게까지도 따뜻한 시선과 연민의 정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사제는 위암의 병고를 늘 짊어지고 신음하며 살고 있는데 내성적 성격으로 유약하고 서툴며 비효율적인 사목으로 자주 실수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우직하게 사랑하며 그 영혼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는다. 약점투성이의 무능해 보이는 이 젊은 사제의 순수한 마음 안에 깃들어 있는 영적 감수성이 병들어 있는 영혼들의 내면세계를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번득인다.
이 마을의 유지인 백작 부인과의 우연한 만남과 긴 영적 대화 중에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증오하고 거부해 온 이 귀부인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평안히 있을지어다.’하고 나는 부인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평화를 무릎 꿇고 받았었다…. 내가 그 평화를 부인에게 주었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렇게 줄 수 있다는 것은 이 얼마나 신묘한 일인가! 아아 우리들 두 빈손의 그윽한 기적이여!”(252쪽)
죽기 전의 편지에서 이 귀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조그만 아기에 대한 절망적 추억이 저를 모든 것에서 별리하여 무서운 고독 속에 몰아넣어 두고 있었는데 이제 다른 어린 아이 하나가 이 고독에서 저를 끌어내 준 것 같이 생각됩니다…. 신부님은 정녕 어린이시니까요. 좋으신 주님께서 신부님을 그대로, 또 영원히 지켜주시기를!(244쪽)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며 요청하시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어린이의 마음이다(마태 18,3-4):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8절)“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의 부르심은 파견을 위해서이다. 즉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따르는 참다운 제자로 살아갈 때 또한 부활하신 주님(kyrios)의 사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in persona Christi) 일할 수 있다. 여기에 제자들이 지녀야 할 마음의 가난, 어린이의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어린이는 바로 자신의 무력감에서 제 기쁨의 근본 원리를 겸허하게 이끌어 낸다. 어린이는 모든 것을 제 어미에게 맡긴다. 제 온 목숨, 인생 전체가 어머니의 시선 속에 있는데, 그 시선은 바로 미소이다.’(베르나노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全無)’안에서 주님이 모든 것(全部)을 채워주시고 사도들 안에서 함께 일하신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12-13절)
"무소유를 넘어선 소유"
이기양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상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모자랄 텐데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제자들이 그처럼 준비없이 세상에 나가면 이틀도 안돼 노숙자 신세가 돼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끼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왜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 말씀을 철저히 따랐던 제자들은 노숙자가 되기는커녕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육신의 힘에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의지했기 때문에 영적인 힘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이 말씀은 신부인 저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신부들이 부임지를 옮겨갈때 보면 '지팡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짐 때문에 난감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저런 이유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과는 상반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는 예수님 말씀을 삶에서 체험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어떤 행사를 하게 되면 열심히 준비합니다. 몇 달 혹은 몇 주일씩 준비하고 점검하고 또 점검합니다. 행사가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준비했던 사람이 다시는 성당 일을 하지 않겠다고 두문불출합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상처도 많이 받았고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빼앗겨 이제는 자기 할 일에만 전념해야겠다고 감정을 드러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동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준비보다도 하느님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 힘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기도는 빼놓고 예산이며 일정, 옷이며 먹을 것 등을 챙기는 데만 골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전 준비는 말할 것도 없고 돌발 상황까지 예측해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무엇보다도 행사 준비에 앞서 기도하며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에 생긴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 뜻을 헤아리는 데 중심을 두었다면 상처 받는 일도, 사람들 평가에 그렇게 민감해질 이유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세상살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세상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는 많이 다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재산에 의지하게 되면서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재산보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한 직장인의 퇴근길 골목 어귀에 호떡을 구워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9시 정도가 되면 호떡을 굽는 것을 끝마쳐야 될 것 같은데, 호떡 장수는 늘 늦은 시간까지 호떡을 구웠습니다. 호떡이 옆에 잔뜩 쌓여 있는데도 싱글벙글거리며 계속 호떡을 굽는 호떡 장수를 보고 하루는 그 직장인이 물어보았습니다.
"장사를 끝낼 시간에 무슨 호떡을 그렇게 싱글벙글하며 열심히 굽고 계십니까?"
그러자 호떡 장수가 대답했습니다.
"잘 팔려도 즐겁고 안 팔려도 즐겁습니다."
"아니, 안 팔리면 다 버릴텐데 즐겁다니요?"
"어차피 재료는 다음 날 쓰기 어려우니 다 구워 갖고 집에 가는 길에 고아원에 나눠주고 가는데 거기에 있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참 재미있고 하루를 정리하는 기쁨으로 아주 그만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있어서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돈도 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중심에 모시고 살라는 말씀을 삶에서 실천한다면 오늘 제자들처럼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영적 능력을 받게 되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행자의 준비물
부산 선교사목국
정해진 것도 아니지만 어떤 이는 여행의 정의를 ‘내가 사는 집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 곳인지를 알기위해서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행은 모르는 곳을 가보고 참 좋은 면도 있지만 여러 가지 불편 또한 분명한 사실이고 그래서 내가 사는 집만큼 좋고 편한 곳은 없습니다.
여행을 해보면 자주 다녀본 사람의 가방은 비교적 간편한데, 그 반대의 경우 가방은 상대적으로 크다는 생각입니다. 이유는 짐을 챙기다보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감히 필요한 짐을 두고 간편하게 떠나는 것이 즐거운 여행의 첫째 조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면 여행에 가방이 무거우면 그 여행은 즐거움이 아닌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인사이동을 하고 이사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너무 많은 짐은 우리 인생의 또 다른 짐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지팡이 이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거지로 살라는 말씀이라기보다 복음 선포자가 현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지나친 짐은 여러 가지 삶의 무게로 다가올 수 있지만 특히 복음 선포자인 사제에게 있어서 많은 짐은 분명코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짐, 부가 영원한 생명에 절대적 가치가 아님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우리에게 적당한 짐의 양과 부의 척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나치게 집착하고 쌓아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라 생각됩니다. 복음말씀을 통해 내가 영원히 거쳐할 곳에 있을 짐과 양식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한 하느님의 사람
나기정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도 잘하기 위한 ‘조건’을 따지고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주님의 당부 말씀은 전혀 필요치 않음을 강조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무슨 힘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에게는 언제나 하느님의 능력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이 들려준다. 사도직 사명은 이렇게 긴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세속적 집착을 떠나야 한다.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과 주님께 대한 신뢰심을 가져야 한다. 오로지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할 때 구원은총의 협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복음 내용을, 조건을 따지고 상황을 들먹이며 비판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한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사회적 이익 앞에서 항상 자유로워야 한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그리고 또한 인간적 지식이나 재물이나 명예의 능력보다는 주님의 능력에 더 의존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먼저 가져야 할 첫째 자세이다.
소유’와 ‘무소유’
이상록 신부님
여름이 길어지고 봄가을겨울이 짧아지는 오늘이다.
무더위가 폭염으로 이어지는 오늘, 너무 더워 열대야까지 발생하는 오늘이다.
비가와도 폭우로 이어지는 오늘이다.
100년 전 여름과 10년 전 여름이 그리고 오늘의 여름이 다르다.
이렇게 매일매일 같은 오늘이지만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고 오늘이 바뀌는 만큼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인 우리도 바뀌어 간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교회인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생활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오늘이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파견’하여 함께 일하기를 당부하셨다.
둘 이상을 공동체로 본다면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함께 살고 함께 나누고 함께 봉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떠나는 사람은 봉사자로서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소유하지 않음=무소유’의 삶을 살라고 당부하신다.
‘무소유’는 떠나보내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떠나는 열두 제자들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할 것이다.
성직자, 수도자(의 청빈은 당연하리라)와 일반신자들이 열두 제자처럼 ‘무소유’의 삶을 당부 받은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복음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아마도 ‘무소유’로 인한 답답함보다 차라리 ‘소유’함으로써 얻는 편리와 자유로움이 더 좋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넉넉함이 여유로 이어지고 여유가 있다면 신앙에 그 만큼 더 투신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뒤집어보면 신앙에 투신할 수 없는 것이 넉넉한 ‘소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 우리는 ‘소유’에 대해 알아보자.
무엇을 ‘소유’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내가 ‘소유’인지 ‘무소유’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팡이와 신 그리고 옷은 가지되 여분은 가지지 말고 빵과 여행보따리 그리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다.
곧 움직이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가지되 나머지는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주님께서 지니라고 말씀하신 지팡이와 신 그리고 옷을 가지는 것이고 빵과 여행보따리, 전대의 돈은 가지지 않으려 하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소유’로 인한 답답함보다 차라리 ‘소유’함으로써 얻는 편리와 자유로움을 가지고 싶다고 할 것이다.
‘소유’한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려한다면 ‘소유’가 ‘무소유’로 이어질 것이고, ‘무소유’한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다시 말해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것이다.
결국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가지지 않느냐보다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아들이느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유’와 ‘무소유’는 재물의 유무가 아닌 예수님 말씀을 가지고 세상논리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세상논리 속에 파묻혀 예수님 말씀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들어 따르려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하루였으면 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애경 수녀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특별한 훈련이나 목적을 위해 잠시 동안이라면 모를까 인생 자체를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 최초의 인간 아담도 하느님의 눈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 창세 2, 18)주셨고 예수님께서는 “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마태 18,20)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동안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시범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하느님 나라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실습을 통해 미래의 ‘복음 전파자’ 로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현장에서 배운 복음을 직접 전하라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마르 6,7) 하셨습니다. 둘은 인간관계의 기본이며 최소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협력하는 것도 다투는 것도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공동체가 어떻게 될지는 두 사람에 의해 결정됩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의 성향을 보면 베드로는 어부인데다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며 나서길 좋아하고 큰소리치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했고, 마태오는 제자이기 전에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소외 받던 사람입니다.시몬은 열혈당원이라는 과격한 성향의 정치 집단의 일원이었기에 사람들이 상당히 싫어했을 것입니다. 토마스는 동료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제자입니다.(요한 20,24 .25 참조) 이렇듯 몇몇 형제만 빼고 남남에 출신·성장·믿음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예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마르6,7) 하실 때 어떤 기준으로 보내셨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맞는 두사람이 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짝이 되고, 야고보와 요한이 짝이 되었다면 죽이 잘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혈당원 시몬과 세리였던 마태오가 짝이 되었다면 관계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는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고,특히 유다 이스카리옷과 함께 짝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 짝을 맺어주시면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
이 맞아야만 영적 성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야 전교가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함께 일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기에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 파견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한 작업이며 동시에 제자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함께 계시겠지만 제자들은 앞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며 주님 외에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의존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의지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머리를 의지합니다. 부모가 잘사는 사람은 부모를 의지하고 권력 가진 사람은 권력에 의지합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주님을 의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파견받은 자는 주님이면 족하지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목적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고 아픈 이들의 병을 고쳐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주인이시기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 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관심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그동안 가르쳤던 것을 실제로 확인하시고자 선교의 원칙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교여행을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단 제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신고 있는 신발과 한 벌의 옷과 지팡이뿐입니다.(8-9절 참조)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지팡이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는 들짐승을 쫓고 수풀을 헤쳐 길을 내고 또 몸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행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제자들이 인간적인 수단, 곧 양식이나 돈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주님의 일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자의 길을 열어주시고 친히 돌보아 주
시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가뭄을 선언한 후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을 때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과 저녁에 빵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1열왕 17,5 -6 참조)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나리꽃도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주시는데(루카 12,24-27 참조) 하물며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주님의 자녀들을 친히 돌봐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간편한 차림으로 전도 여행을 나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파견받은 사람들이 마음 써야 할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한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에 온 힘을 기울인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먹이실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영원한 상급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파견받은 이의 또 다른 준비일 것입니다.
그림 감상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형제님께서 그림 전시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림 중에서도 특히 폭풍우 치는 바다를 그린 그림 한 점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마치 자신이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듯 생생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거든요. 그래서 화가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어떻게 이런 훌륭한 그림을 그렸습니까?”
그러자 화가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오랫동안 폭풍우 치는 바다를 그렸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폭풍우가 사납게 몰려오는 어느 날 어부에게 배를 빌려 바다로 나갔습니다. 폭풍우는 거세게 몰아쳤고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았어요. 나는 내 몸을 배 기둥에 묶었답니다. 너무나 두려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뱃머리를 돌려 육지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지요. 결국 나는 배 기둥에 묶인 채 그 사나운 폭풍우를 견뎌냈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요.”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생생한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그러한 작품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요. 이렇게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제자들에게 체험시키시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전교여행을 하시다가, 오늘 복음과 같이 제자들만을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즉, 자기들의 몸으로 직접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데도 어떤 원칙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개인적으로 한사람씩 만나서 그들을 따로 부르셨지요. 그런데 세상에 파견할 때는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바로 가장 작은 공동체를 구성하신 것이지요. 사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다니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마음 맞지 않는 사람끼리 다니는 것은 어떨까요? 최악입니다. 그렇다면 둘씩 짝지어 파견될 때 마음 맞는 사람끼리 묶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누가 되든 상관없이 내가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맞추어 나감으로 인해 더 큰 영적 성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성숙과 함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교의 두 번째 원칙은 주님의 능력을 철저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여행을 하는데 최소한의 것만을 가지고 다니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같으면 이렇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거지 행색을 하고 돌아다니라는 것인데, 사회적 체면이 있지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전교의 원칙은 환영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환영도 받을 수 있고, 핍박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환영을 하면 그 집에 그냥 머무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하고 말씀하시지요.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죄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이 됩니다. 즉, 그들이 나를 핍박한다고 그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 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을 직접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그냥 저절로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로 와서 함께 주님을 찬미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세 가지 전교의 원칙, 공동체 구성, 주님께 신뢰 그리고 환영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기쁜 소식이 이 세상 구석구석에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집 앞마당만 쓸어도 온 세상이 완전히 깨끗해질 것이다.(괴테)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오직 한 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 같았으면 한 몇 달 사목실습지로 파견되는 제자들을 위해 몇 가지 챙겨줬을 것입니다. 우선 안쓰러운 마음에 일인당 교통비 20만원씩, 식비 30만원씩, 또 혹시 모르니까 비상시 쓰라고 체크카드 하나씩, 또 연락이 되어야 하니까, 휴대폰 하나씩...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일일이 챙겨주지 않아도 각자가 다 알아서 챙겼겠죠.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자동면도기, 편안한 신발, 우산, 갈아입을 속옷 10벌, 혹시 모르니까 밑반찬, 고추장, 읽을 책 몇 권...
그러다보면 큰 배낭 하나로 모자랄 것입니다. 끌고 다니는 초대형 여행가방도 안 되겠지요. 아마도 작은 승용차 한 대가 필요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이것 저 것 챙기다보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거리 여행 다니다 보면 가방 때문에 힘들어 죽습니다. 때로 가방에 든 소지품, 귀중품, 달러나 유로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여행도 제대로 못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복음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결국 예수님의 지론은 간단합니다. 청빈한 삶을 기반으로 한 강렬한 하느님 체험, 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 그것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그토록 어려운 요구를 던지신 스승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보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일정한 거처 없이 이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시던 노숙인이셨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자신을 향해 ‘이 세상 어디에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이방인’이라고 자처하셨습니다.
찢어질 듯 가난한 분들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 가운데, 철저하게도 혼자인 이웃들 가운데 신앙이 아주 돈독한 분들이 많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할 곳 없다보니 오로지 마음 둘 곳은 단 한군데, 하느님 뿐, 하느님만이 모든 것,하느님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 자신이 지닌 에너지 가운데 100% 전체를 아버지 하느님께로만 향하기 위해 다른 방향의 통로들을 모두 차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아버지만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가난을 솔선수범해서 실천하셨기에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쏠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힘과 능력 전부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 선포만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셨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잦았던 시절,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하셨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평균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선교지의 상황이 열악했고,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있었다는 표시겠지요.
우리나라로 건너오셨던 선교사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한국으로 선교를 떠납니다.”라는 인사말은 “나 죽으러 갑니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떠나오시기 전, 부모님이나 동료들에게 미리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멋진 유서도 써놓고 선교지로 출발했습니다.
오직 하느님 한분만이 전부였던 그들이었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등 뒤로 내던진 그들이었기에,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이훈 신부님
오늘 말씀에서 많은 이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위의 어떤 이가 예수님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일상에 너무도 평범하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너무 가까이 계시기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병자 몇몇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과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실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기적이 되며,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것에 놀라고 계십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하루하루 기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을 행하지 않는 우리 삶에 대해 예수님도 놀라고 계실지 모릅니다. 반면에 많은 이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자 듣고서 놀랐다고 전합니다. 진정 무엇에 놀라고 그 놀라움에 대한 반응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지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하루이면 좋겠습니다.
행복을 주는 사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의 모토는 행복이었습니다. 조부모님의 죽음이 제 인생의 첫 기억이라 어차피 죽는 인생 행복하게 살아야한다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의 첫 목표였고 이것은 사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행복해지는 방법입니다.
처음엔 돈도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공부했고 기도했고 운동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사회 구조상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운전기사 일을 하는데 한 번은 공장 봉고차의 범퍼를 약간 찌그러뜨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혼나지 않기 위해 밤새 범퍼를 뜯어 찌그러진 것을 폈습니다. 한 번은 펑크 난 차를 계속 몰아서 타이어 자체를 갈아야 했습니다. 펑크만 때우면 얼마 안 되지만 타이어 자체를 갈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사장님께 혼이 났습니다.
또 한 번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호 위반을 하여 경찰에게 걸렸는데 벌금을 지불하기가 너무 아까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군에서 제대할 때 함께 맞춘 반지를 보여주며 결혼한 사람인데 벌써 벌점이 15점이 있어서 이번에 또 벌점을 맞으면 한 달 면허 정지가 되기 때문에 회사도 잘리고 가족도 굶어야 한다고 말하자 경찰은 저를 잡고 있는 것이 미안했는지 가정도 있으시니 앞으로는 조심해서 운전하시라고 하며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십분 동안 한 거짓말이 제 평생 한 거짓말보다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짧은 직장 아르바이트 생활이었지만 사회생활이 참 어렵다는 것을 조금은 맞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사제들의 삶은 참 자유로웠습니다. 돈 걱정도 안 하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또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도 좋았습니다. 결혼을 못 하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을 매일의 십자가로 생각하기로 하고 인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솔직한 성소 동기는 저의 행복을 위한 어찌 보면 매우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행복을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가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진리였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잘 사는 사람일지라도 자녀가 잘못 되는 것을 보면 혼자만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어차피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제가 되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지 않을 수 없고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행복하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랑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나는 물이 지나가는 파이프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해주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물탱크에 닿아있어야 합니다. 내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교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만 사랑이 가능했다면 사람은 혼자 그리스도 없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맞닿아 있지 않다면 우리 안에 사랑의 물이 흘러들어올 수 없습니다.
흐리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사랑의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공기와 같아서 멈추어계신 분이 아니고 끊임없이 흐르는 분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는 사람에겐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물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물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는 내 자신도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깨달은 행복론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려 할 때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고 내가 이웃에게 안 좋은 것을 주려고 할 때는 내 안이 안 좋은 것으로 가득 찹니다. 왜냐하면 나는 파이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지팡이 외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김없이 주라는 뜻입니다. 주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은 남김없이 베풉니다.
사랑할수록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미운 놈은 아무것도 주기 싫지만 아니, 오히려 나쁜 것만 주고 싶지만, 사랑스런 사람에게는 눈까지 빼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난함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난해지니까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줄 줄 아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으로 그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다 나누어주고 얻어먹으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집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며 그 집 신세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얻어먹는다는 것 또한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다 나누어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도 버려야합니다. 자신까지 버리는 사람만이 자기 것을 챙기지 않고 거침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쏟아 부어 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잘 주는 사람은 잘 받을 줄도 압니다.
미사 시간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빌어주면서 내 자신이 평화로 가득 차고 또 내가 빌어준 평화들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겹으로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시간에 한 번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줘 보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한 번 느껴보십시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더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내가 다른 사람을 축복해주는 만큼 내 안은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축복은 주님으로부터 와서 나를 통하여 다른 이에게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를 축복하는 것이 내가 축복 받는 것이고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이고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어른 미사에서도 물론 느끼지만 어린이 미사에서 이것을 훨씬 많이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보통 미사시간에도 목이 찢어져라 성가를 부르지만 평화의 인사 후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할 때는 다른 때의 두 배의 목소리가 납니다. 그런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목소리, 그것은 행복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가 당연히 드려야하는 예배입니다. 이 ‘감사(Eucaristia)’가 바로 ‘미사’입니다. 이웃사랑의 계명을 통해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곧 미사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주어야 받는다는 진리는 이렇게 축복을 빌어주는 작은 것 안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이 바로 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 즉 생명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오히려 당신 안에 생명과 사랑이 가득 차게 되신 것입니다.
흐리지 않으면 비어있거나 썩어버립니다. 사해가 그것이고 그 반대의 예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예수님은 받은 대로 베푸는, 아니 베푸는 대로 받아서 생명이 풍성한 갈릴래아 호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갈릴래아로 가라고 이르시는 것도 이 이유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사랑이고 부활이지만 주지 않는 것은 썩는 것이고 죽음입니다.
이 진리만 깨닫는다면 우리는 주는 것 안에서 참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인천교구 사제서품 동기는 총 11명입니다. 이 11명은 본당, 교구청, 특수사목에서, 그리고 유학 생활이라는 공간 안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지요. 그런데 본당신부를 하고 있는 4명 중에서도 3명이 현재 신설본당을 맡고 있으면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설 본당이라고 해서 뭐가 어렵겠냐고 말씀하시겠지만, 본당이라는 건물조차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모아야 하고, 조직을 구성해야 하고, 더군다나 가장 큰 일인 본당이라는 건물까지 지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저 역시 2004년에 아무 것도 없는 성지에 와서 생활해 보았기 때문에, 신설본당 신부가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노력을 하게 되네요. 그런데 만약 제가 이곳 성지를 오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무것도 갖추어있지 않은 이곳 성지의 체험이 없었다면, 신설본당을 맡은 동기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누구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이 ‘나만 힘들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 같네요.
같은 병 또는 같은 처지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끼리 서로 고통을 헤아리고 동정하는 마음이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 저에게 생긴 것이지요. 즉, 제가 나름대로 어려운 생활을 해 봤기 때문에,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기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저의 경험을 보면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어려움을 체험해보았던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려움 안에서 사랑의 부족함을 더욱 더 많이 느꼈고, 그래서 사랑의 부족함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왜 필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그 파견 전에 하시는 말씀을 보면, 조금 치사하기도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사랑한다면 더욱 더 많이 챙겨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어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제자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고생 좀 하라고 이렇게 파견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의 나눔을 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신이 직접 어려움을 겪어야 남의 아픔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을 더욱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한탄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하지만 이는 그런 체험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주님의 특별한 보살핌이 아닐까요?
모든 것이 넉넉할 때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부족할 때 제대로 된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오늘을 만드세요.
어려움 속에 있는 분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도를 전합시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백남국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방으로 파견하고 계십니다. 또한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엄격한 여행 규칙을 제시하시면서 어느 것보다도 복음선포가 우선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물론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복음 선포자의 여행 규칙은 교회 초창기의 특수한 상황에서 요구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완전한 무소유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청빈의 정신만은 지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을 넘어 더 나은 안락한 생활, 더 나은 생활환경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복음선포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신자분들에게 어떤 봉사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드리면 거부하는 가장 첫번째 이유가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 맡을 수 없다고 핑계를 대거나, 조금 생활이 안정되면 열심히하겠다며 기다려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도 못하겠다고 딱 거절하지 않고, 먹고살 만하면 이것저것 다 하겠다니 고마울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우리는 하느님께 파견받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쁜 가운데서, 다 갖추지 못한 가운데서, 모자라는 가운데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사실 다 갖추고 나면 더 바빠지는 것이 그때부터는 가진 것을 잃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니까요.
거센 풍랑에 맞서는 신앙인
홍승모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런 충고를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8-10). 이 말씀에 따르면 복음 선포자들은 의식주에 관해서 어떤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늘 누군가의 도움으로 먹고 살라는 뜻일까요? 우리는 이 궁금증을 아모스 예언서(제1독서)에서 풀 수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자신의 처지가 양 떼를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나 가꾸던 별 볼일 없던 농부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아모 7,15)고 명령하셨기에 예언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모스는 자신의 소유나 능력 때문에 하느님의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모스의 고백을 제자들의 파견과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팡이나 여행 보따리나 돈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오늘 제2독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 보따리나 전대에 있는 돈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넘치도록 받는다는 것입니다(에페 1,8). 우리가 이런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뜻을 지혜롭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에페 1,9).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통찰력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기쁜 소식은 자신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고 파견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주님의 백성을 위해 사명을 위탁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점점 꺼져가는 촛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촛불의 기름은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은총은 무한합니다.
문제는 믿음 속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거센 풍랑입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 우리의 내면은 불안에 요동칩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가진 지팡이나 여행 보따리나 전대의 돈, 그 어떤 것도 소용없습니다. 사실 불안은 그것을 해소하고 의지할 만한 방법이나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유혹에서 옵니다. 이런 불안을 떨쳐 버리고 신뢰심을 키워 주는 분은 늘 함께 계시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러기에 시편은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듣고자 하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정녕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가까우니 우리 땅에 영광이 머무르리라”(시편 85,9-10). 오직 주님만이 평화와 영적인 복을 베푸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든지 언젠가는 거쳐야 할 내면의 거센 풍랑과 맞서야 합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서공석 신부님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에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배워 실천하려 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은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는 과정에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서는 기원 후 70년경,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초창기 교회 상황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말씀 안에는 예수님이 과거에 실제로 하신 말씀도 있고, 또한 초기 교회의 활동 상황과 제자들의 마음다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여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겪었고, 그분이 죽음 후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사실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실천을 역사 안에 지속시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이나 신분을 받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제관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권한과 신분을 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권한과 신분을 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과 제도는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경직성이 없고 하느님의 일만 보이는 하느님 자녀의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섬김이 있고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는 유연한 공동체입니다. 남의 발을 씻어 주는 종과 같이 겸손한 자세로 서로를 섬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는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 자신도 실천하고 사람들도 실천하도록 권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인간 안에 무질서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은 쉽게 ‘더러운 영’ 혹은 ‘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사회적 모든 무질서는 이 ‘더러운 영’의 조화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그런 무질서의 해악(害惡)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회당에서 정신병자를 고친 이야기를 전하면서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1,27)라는 사람들의 반응도 함께 전합니다. 결국 제자들이 받았다는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들도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벼운 몸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은 여행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가벼운 차림으로 다니라는 말씀입니다. 가진 것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으로,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것을 갖추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강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답게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얼마든지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교회는 가정 교회였습니다. 신자들 중 넓은 가옥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을 공동체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이런 집을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가 발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집 하나가 집회 장소로 정해지면, 그 집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그 지역 신앙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로 사도의 편지들을 보면, 제자들이 선교 여행 중 거점으로 정한 곳은 항상 가정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집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안의 특수 계층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신앙인들은 선교를 어느 신분과 관련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충실히 살아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권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과 옷차림에 구애받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신체적, 사회적 무질서의 해악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도록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건강, 상호간의 신뢰와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오늘의 인류 사회는 조직에 있어서 유연함을 추구합니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 유연한 것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오늘 민주주의 사회는 자발적 시민운동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더 큰 유연함을 향한 행보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는, 더 유연한 조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 매체들은 모두가 정보를 쉽게 공유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한 다원(多元)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경직된 개인과 집단은 고립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경직된 중세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신앙인들의 삶 안에 되살려내는 데 실효성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교회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관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인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복음선포의 사명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가지 기본적 사상을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셨다”(에페 1,4)는 것과, 이 구원계획은 제자들의 복음선포를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이다(마르 6,7-13 참조). 오늘의 중심 주제는 복음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7,12-15: 나의 백성에게 가서 말을 전하여라
제1독서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신 것을 전혀 뜻밖의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택하실 때 하신 것같이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적 소명이 절대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고 한다. 왕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말하는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만일에 왕의 마음에 드는 말만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배반할 수 있다. 예언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유로운 예언사상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고(마르 1,14참조) 세상이 심판 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충실성과 진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8-9절). 즉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10절). 그러나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인 경우에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제2독서: 에페 1,3-14: 하느님의 구원계획-그리스도 안에 완성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10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 anakefalaiosasthai, recapitolare’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지배권을 다시 인식시키고자 하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는 것이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 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신앙생활을 머리로만 할 수 없다 | 구슬이 서말이라도…
김영수 신부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도 신앙이 여물지 않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워 보내신 주님의 파견은 제자들에게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한 훈련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놓으신 능력-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주님께서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신 권한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 안에 오그라들게 하는 이기심과, 자신의 평안만을 위해서 스스로 쌓은 담 속에 갇혀 지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힘입니다.
세상에 나아가 신앙의 기쁨을 선포하는 신앙만이 우리를 참된 신앙인으로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내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지 않다면, 내 용서와 위로와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흩어진 구슬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난 5월 25일 통계청에서는 작년도에 실시한 ‘인구주택총조사 전수집계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에 종교인구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2005년 11월 1일 현재 우리나라의 천주교 인구는 514만6천명으로 10년 전인 지난 1995년의 295만 1천명보다 74.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10년간 국내 천주교 신자만 219만5천명이 늘었다는 보고입니다. 이 기간에 전체 종교 인구가 237만3천명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증가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 천주교 신자 수효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발표한 신자 수보다 약 48만 명이나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비해 다른 종교들의 신자 수는 감소한 반면 가톨릭 신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결과와 교회가 파악한 신자 수보다도 스스로 천주교 신자라고 응답한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보고를 접하면서 한편으로는 천주교 신앙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결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을 천주교 신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파악한 숫자보다도 48만 명이나 많은 514만 명에 이른다는 것은 아직도 천주교회가 사람들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러한 면에서 신앙을 선포해야 하는 신앙인의 사명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치가 곧 우리 교회의 신앙생활 국면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 수효가 10년 만에 74.4%나 증가했다는 것이 한국천주교회의 성장추세를 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신앙생활을 쉬는 신자 수가 전체 신자의 35%를 넘을 뿐 아니라 매년 영세자의 80%이상이 1년 이내에 냉담을 하고 있으며, 주일미사 참례자 비율도 계속 감소하여 이제는 26%선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신자통계에 따른다면, 주일미사 참례자의 비율은 20%선에 불과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비신자 숫자도 1999년을 정점으로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514만 명에 이르면서도 신자 의무의 하나인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사람들은 120만 명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간의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실천하며 세상에 신앙을 증거하는 신앙생활 보다는 신앙을 자신의 생활 범위 안에서만 영위하려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의 경향이 깊어지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결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선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동기를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은 관념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폐쇄적이고 미성숙한 영적퇴행의 결과를 가져올 위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 기쁜 소식에 대한 심오한 신앙고백은 머리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에페 1, 12) 신앙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힘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새롭게 변화시키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써 선전되는 구호나 광고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 되고 선포될 때에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둘씩 짝 지워 보내신 예수님은 우리들을 짝 지워 파견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사람들을 참된 가치와 진실한 삶으로부터 갈라놓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앙하게 합니다.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회가 한국 땅에 진출한 지 벌써 50년이 됐습니다. 50년을 넘어서면서 아쉽게도 몇몇 선배님들께서는 먼저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한 평생 수도생활을 해오시면서 인간적 나약함이나 부족함이 없지 않으셨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수도자로 삶을 잘 마무리 지으셨다는 것 자체로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저희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던 할아버지 수사님의 장례식 때가 생각납니다. 돌아보니 수사님은 젊은이들로만 이뤄진 저희 공동체에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기나긴 투병생활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늘 장난스런 얼굴로, 손을 꽉 쥐시며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던 재미있던 어르신이셨습니다.
수사님을 땅에 묻고 돌아와 수사님께서 머무셨던 방에 들어갔는데, 어찌 그리 황망하던지요. 수사님께서 남기신 소지품을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사님의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고 떠나신 것은 겨우 낡은 옷가지 몇 벌, 이젠 구식이 된 라디오 하나, 쓰시던 안경, 틀니, 다 합해서 한 상자도 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당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 않으셨던 분, 거의 외출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시며 공동체에서 머무르시던 분, 단 한번도 공동기도에 빠지지 않으셨던 분, 언제나 먼저 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삽을 드시던 분, 참으로 좋은 모범을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건강문제로, 또 성소문제로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결국 '떠나기로' 거의 마음의 결정을 짓고 수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수사님께서는 길게도 아니고 딱 한 말씀만 해주시더군요.
"서원한 수도자가 가긴 어딜 가! 그냥 계속 가! 가다보면 길이 생겨!"
단 한마디 말씀, 단순한 말씀, 투박한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선배로서 방황하는 후배에게 건네주신 참으로 값진 말씀이었습니다. 수사님께서 제게 건네주셨던 그 말씀을 이제 저는 후배들에게 다시 건네주고 있습니다.
지난달 저희들은 또 다른 선배 수사님 한분과 작별했는데, 수사님께서는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회원이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에서 궂은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무척이나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이셨습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것 미사 도구를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덩치가 산 만한 후배들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그런 수사님 영정 앞에 저희 후배 100여명이 모였지요. 한 목소리로 크게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가 제 귓전을 울리더군요.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수사님께서는 수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저희 후배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켜주고 가시더군요. 떠나시기 오래 전에 장기 및 시신 기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말씀이 이랬습니다.
"어디든 흔적 남기지 말고 내리(살레시오 캠프장이 있는 서해 바닷가, 수사님의 노고와 진한 애정이 깃든 곳) 앞바다에 뿌려줘!"
장례미사가 끝난 후 장지나 화장터가 아니라 병원으로 떠나시는 수사님을 배웅하던 저희 후배들은 다시 한번 수도자로서 봉헌생활을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한가지 당부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한평생,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도자로서 삶에 충실하셨던 선배님들, 그분들이 오랜 풍랑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이유, 한결같이 든든한 바위 같던 이유, 그리고 영예롭게도 수도자 신분을 간직한 채 삶을 잘 마무리한 배경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주님 말씀 따라 한평생 청빈지도를 생명처럼 지켜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외에 비본질적이고 부차적 요소들로부터 끊임없이 이탈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총의 저녁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갔던 수사님들의 영혼, 그리고 먼저 떠나가신 모든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쁘게 당신 나라에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무얼 그리 재십니까?
최용혁 신부님
신학생 시절, 복지시설에 봉사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버려진 아기들을 맡아서 돌보다가 입양시키는 기관이었는데 처음 봉사를 나가던 날 엄청나게 긴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혹시나 잘못해서 아기를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기저귀 채우는 법도 모르는데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나 있을까? 아기가 자꾸 보채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온갖 걱정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처음 봉사 나간 저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기를 보는 일이 아니라 방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방바닥을 걸레질하면서 다른 봉사자가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잠을 재우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봉사 나갔을 때에는 어깨 너머로 배운 걸 그대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첫 아기를 가진 엄마가 아기를 낳자마자 완벽한 엄마일 수는 없습니다. 밤에 징징대는 아기와 씨름을 하고, 목욕시키는 법을 몰라 허둥대면서 서서히 엄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교편을 잡은 선생님이 첫 수업부터 완벽한 교사일 수는 없습니다. 학생들과 여러 가지 일들을 헤쳐나가면서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심지어 돈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떠나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주님이 채워주신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은 준비 없이 떠났고 훌륭히 복음 선포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가끔 신자들을 보면 봉사라는 단어에 기겁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시작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과연 그분 생각대로 때가 되려면, 준비를 다 갖추려면 언제여야 할까요?
며칠 전 의정부교구에서 처음으로 사제가 되신 새 신부님들을 바라보며 몇 년 전에 있었던 제 자신의 서품식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이제 신부가 되었으니 다 이룬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발령받은 본당에서부터 제 자신의 미흡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원로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제는 수단을 입고 관에 들어가야 비로소 사제인 거야.” 평생을 살면서 사제가 ‘되어가는’ 것인데 벌써 ‘되었다’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었지요.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와 함께 걸으시며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시는 주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시간도 없고, 능력도 부족하고, 믿음도 미약하고, 봉사하라는 말에 눈치만 보고, 잘 사랑하지 못하고, 잘 용서하지도 못하는 그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로 더 채우려 해 봤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냥 시작합시다. 우리가 시작하면 이미 반은 간 것이니, 나머지 반은 주님이 함께 가주실 것입니다.
존재의 이유
김성남 신부님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4-5)
이러한 하느님의 심오한 세상 구원 계획이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은 12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세상 끝날까지 실현 된다는 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주제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 즉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모스는 목자요, 돌 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이다. 그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께 선택되어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게 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경우에도 아모스 예언자와 같은 상황이 적용된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을 부르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며 세상에 파견한다. 복음 선포 사명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다. 복음 선포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큰 은총이요 하느님의 축복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의 사명은 하늘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팡이 이외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은, 무엇은 가져가고 무엇은 가져가지 말고 가 아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무한한 신뢰심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고 해서 복음 선포 사명의 모든 상황과 조건이 만사형통 탄탄대로를 걸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미친 사람이란 소리도 듣고 내어 쫓기고 거절당하며,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이 복음 선포를 그 누구보다 죽기까지 충성스럽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부귀영화를 주고,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편안하게 신자 생활 접어두고 어렵게 복음 선포해야 하는가? 복음 선포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이자,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예수님 존재 이유의 처음과 끝이다.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고 우리 삶이 지속되는 한 절대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신자생활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다. 아모스도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살아가는 존재 이유를 따라갔을 뿐이다. 요즈음 신자들의 생활을 보면 복음 선포의 사명감이 점점 희박해 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절대적 존재 이유를 잊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이기양 신부님
제 1독서 : 아모 7,12-15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제 2독서 : 에페 1,3-14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복 음 : 마르 6,7-1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상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모자랄 텐데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으로는 이런 조건으로 제자들이 세상에 파견되어서는 이틀도 안되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하나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끼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예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라는 가르치심입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고 정신은 해이해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십상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이 말씀은 신부인 저에게나 수도자인 수녀님에게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부들이 부임지를 옮겨갈 때 보면 ??지팡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짐이 몇 트럭씩 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가끔씩 경험합니다. 다른 것들이 많으면 거기에 의지하게 됩니다. 본당 신부가 복음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본당 공동체는 복음적으로 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사람들이 앞장서서 본당을 이끌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속된 사람들이 감히 공동체를 흠집 내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도 차츰 차츰 복음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본당 신부가 돈에 대한 편리에 익숙해 있다면 돈 있는 사람들과 비복음적인 사람들이 공동체의 물을 흐리기 십상이고, 또 음식이나 취미 생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몰려다니게 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파견 나가는 제자들에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다시 한번 귀담아 듣고 실천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사제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데 과연 24시간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신자들을 통해서 성직자의 삶이 더 의미 있고 깊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몇 해 전, 구정 전 날쯤으로 기억됩니다. 누가 찾아오셨다고 해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보니까 80세가 넘은 할머니 한 분과 60세가 다 되어 보이는 자매님 두 분이 선물을 하나 들고 오신 것입니다. 얼굴은 낯이 좀 익는데 잘 아는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구정이 되어 본당 신부에게 인사를 와야 하는데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아내 되시는 분과 따님을 대신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사 대신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찾아뵙지 못하고 처자를 대신 보냅니다. 조그만 선물을 보내니 성의로 알고 받아주십시오."
얼마나 큰 정성입니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보이는 본당 신부에게로 드러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본당 신부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느끼듯이, 신부도 역시 신자들의 복음적인 삶을 통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이 지팡이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서로 간에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나누며 풍요롭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복음적인 삶입니까?
그런데 이렇지 않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살면 힘들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갈 것을 당부하십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가정 안에서 부모, 자식간에 또 형제간에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에 기대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은 이끌어져야 하고, 사랑이 중심이 되어 자녀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이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과 출세를 중심으로 가정과 사회가 움직이고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돈의 유혹에 너무나도 많은 가정들이 빠져 있고, 단지 사회적인 출세를 위해서 자녀를 교육시키는 부모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가정의 풍파는 끊이지가 않습니다. 그 결과도 나쁠 수밖에 없지요.
어떤 형제가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건설업종의 사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사업이 잘 되는 겁니다. 1년도 되지 않아서 매출이 100억 이상씩 올라가고 급성장을 하니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 밖에요. 이렇게 남편은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새벽 1시, 2시까지 어울려 지내고, 자녀들은 조기 유학을 다 시켰으니 아내는 할 일이 없는 겁니다. 매일 골프를 치러 다니거나 노래방에 다니고, 그러다가 그것도 성에 안차니까 백화점에 레스토랑을 열었습니다. 이제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각자 바쁘게 된 겁니다. 이렇게 각자 놀아도 재미있는 것이 나가면 돈이 있으니 주변에서 모두 이 부부를 잘 대우해 주는 것이지요. 무슨 말이건 다 들어주고 서로 만나 달라고 줄을 서는 형편인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쉬는 날 부부가 만나면 서로가 너무 불편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무슨 이야기이건 다 들어주고 굽신거리며 듣기 좋은 말들만 하는데 남편은 일만 시키고 또 아내는 싫은 소리만 해대니 이제 제일 재미없고 제일 싫은 사람이 남편과 아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됩니다. 어제 왜 늦게 들어왔냐고 싸우고, 나 늦게 들어온 것을 왜 참견하느냐고 싸우고 이렇게 맨날 싸우다가 결국 어느 한쪽에서 이혼 소리가 나오고 법원에 가서는 이혼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은 그래도 이혼만은 꺼리는데 아내는 남편 없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 상황인데 장사가 잘 되겠습니까?
레스토랑이 망하고, 바로 I.M.F 가 터지면서 건설업계 사업을 했던 형제의 재산은 한 순간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버리고 만나자는 사람 하나가 없는 겁니다. 이쪽에서 만나자고 그러면 돈 이야기가 나올 것이 뻔하니까 모두들 슬슬 도망가고 피하기만 할 뿐 안 만나 줍니다. 이렇게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부부는 각자 너무나 허탈해 하다가 결국 둘이 다시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할 것도 없으니 갈 데도 없게 된 이 부부는 지금까지 헤어지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돈이 가정을 해체시켰다가 돈이 없어지자 다시 가정이 회복된 것이지요.
이렇게 삶의 중심이 돈이 되면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해 집니다. 그렇다고 돈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중심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가족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지, 돈이나 출세가 중심이 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사람은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부자로 뽑히는 워렌 버핏이 자기 재산의 85%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370억 달러, 우리 돈으로 35조원에 이르는 금액입니다.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 혹은 Sage of Omaha)으로 불리는 그가 후진국 교육사업과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퇴치 등을 위해서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검소함으로 유명합니다. 운전사나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며 살고 있는 집 역시 1958년에 3만 1500달러, 우리 돈으로 2970만원에 구입한 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버핏은 '많은 돈은 자식을 망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재산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는 세계 제일의 부자인 빌 게이츠 역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많은 돈은 자식을 망친다.‘는 신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듯 돈에서 자유로운 그들의 기부가 본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을 행복하게 함을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반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돈이나 재산은 내가 편리하고 좋은 데에 쓸 때 그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지 돈이 중심이 되어버리면 결국 사람을 망가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상 가장 큰 유혹이 돈에 관한 유혹입니다.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직장인이 있었는데 그가 매일 집에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호떡을 구워서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9시 정도가 되면 호떡을 굽는 것을 끝마쳐야 될 것 같은데 항상 늦게까지 호떡을 굽고 있는 것입니다. 호떡이 옆에 쌓여 있는데도 계속 호떡을 구우면서 싱글벙글 하는 호떡 장사의 모습을 보고 하루는 그 직장인이 물어보았습니다.
"장사를 끝낼 시간에 무슨 호떡을 그렇게 싱글벙글 하며 열심히 굽고 계십니까?“
그러자 호떡 장사가 대답했습니다.
"잘 팔려도 즐겁고 안 팔려도 즐겁습니다.“
"아니 안 팔리면 다 버릴텐데 즐겁다니요?“
"어차피 재료는 다음 날 쓰기 어려우니 다 구워 가지고 집에 가는 길에 고아원에 나눠주고 가는데 거기에 있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참 재미있고 하루를 정리하는 기쁨으로 아주 그만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삶의 질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것을 움켜쥐고는 나는 이것 밖에 없는데 왜 있는 놈들은 안 내놓느냐고 불평불만 하며 살아가면 삶은 늘 힘겨워지는 겁니다. 사랑은커녕 욕심만 부리면 부릴수록 점점 더 살아가기가 각박해지고 힘겨워지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돈에 가치를 두면 우리의 삶은 불행해지고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허덕이게 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할 때만이 삶의 가치가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겁니다. 부모 자식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사소한 문제는 그 안에서 다 해결이 되고 어려움은 있지만 언제나 평화와 희망이 넘치는 기쁜 공동체가 됩니다. 요즈음 보는 것처럼 돈이 그 중심에 오면 그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다투고 왕래도 없는 비참하고 불행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돈이 아니라, 출세가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가족 간에 서로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나치게 출세와 돈에 치중하고 있습니까? 출세와 돈 쪽으로 중심이 가 있다면 그 비중을 반으로 줄이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배 이상 올리십시오. 그러면 풍요로워집니다. 가족 간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고, 가정 안에서 서로가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역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며, 신자들 역시 세상의 불순물들을 버려 버리고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늘 소망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건설될 것입니다.
무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소유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언제 어느 곳에라도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소유입니다.
무소유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인에게 있어 무소유란 단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분명 자유를 위한 무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신앙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믿음의 벗'이 바로 신앙인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바로 이것 때문에 다른 무엇을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복음 선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곧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은 곧 험난한 복음 선포의 길을 홀로 걷게 하시지 않고 서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줄 동반자를 항상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지만 오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때때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의 길이 더욱 힘겹게 다가오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힘겨움에서 벗어나고자 여러가지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하려고 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져야 안전하게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할수록 점점 더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의식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지면 더욱 불안해지고 이제 더 많은 가져야만 합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단지 당신의 권세만을 주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믿음의 동반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감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벗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결코 외롭지 않은 길, 그러나 인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외롭고 고통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 복음 선포의 길에 벗들이 함께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벗들을 알아보는 순간, 앞으로 걸어가야 할 주님의 길을 걷는 우리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혼자 걸어온 길은 아닙니다. 힘겹게 느껴졌던 순간,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도 분명 누군가 우리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믿음의 벗들이 말입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 이 순간 함께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앞으로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장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항상 옆에서 함께 걸어왔습니다. 앞으로 지금까지 보다 더 힘겨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겠지만, 분명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값진 선물입니다.
주님의 길을 걸어오면서 함께 했던 많은 벗들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이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주님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또 다른 벗들과 함께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그들 역시 이제는 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길을 걸어갈 때, 예수님의 권세가 내적인 힘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짝지어 주신 믿음의 벗들은 외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세와 믿음의 벗들에 힘입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함께 걸어가고 있는 벗들을 소중하게 맞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이 벗들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역시 예수님의 선물로서 다른 믿음의 벗들에게 주어져, 그들의 지친 발걸음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내가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마르코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12명을 뽑아 사도로 선발한 내용(3,13-19)과 12제자를 실제로 파견하는 내용(6,7-13)을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도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마태오복음사가는 마르코의 떨어져 보도된 두 내용을 함께 엮어10장에 보도하고 있는 있으며, 그 구조가 훨씬 더 논리적이고 내용도 풍부하다. 우리는 지나간 주간, 즉 연중 14주간 수(10,1-7), 목(10,7-15), 금(10,16-23), 토요일(10,24-33)에 그 내용을 평일복음으로 묵상하였다. 마태오가 전하는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10,34-11,1)은 연중 15주간 월요일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고 싶다면 지난주간의 수, 목, 금, 토요일 복음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지배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 그 권력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보다 더 강해야 한다.세상의 권력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모양도 다양하다. 힘, 돈, 지식, 관계, 조직, 무기 등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노력에는 온갖 부정한 방법들이 동원됨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세상 한 가운데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파견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내세우도록 불림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하도록 불림 받은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지키기도 어려운 여장규칙을 제시하시고 때로는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복음을 증거해야 함을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선교방법은 초기 그리스도교를 형성하고 이를 반석 위에 세우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2000년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교회는 안팎으로 많이 변했다. 교회는 초기의 선교방법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이 고민은 오늘날 바로 우리의 고민이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잠시 서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나의 삶 속에 진정 메아리치고 있는 지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내 삶 속에 얼마만큼 하느님의 힘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진정한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 숨쉬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