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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구하는 아비가일
삼상 25:23-31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삼상 25:23-31 / 그런데 아비가일과 다윗이 산모퉁이를 돌면서 갑자기 서로 마주치자, 아비가일이 즉시 나귀에서 내려 다윗에게 절하였다. 24) 그리고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애원하였다. `내 주여, 이번 일은 모두 저의 불찰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우선 이 여종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25) 내 주께서는 나의 어리석은 남편 나발에게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셨더라도 개의치 마십시오! 그는 ㄴ) 나발이란 이름 그대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입니다! 불행하게도 내 주의 부하들이 왔을 때에 이 여종이 그곳에 없어서 만나 뵙지를 못하였습니다. (ㄴ. `미련한, 눈치 없는, 무식한, 천한'이라는 뜻이다) 26) 그러나 이렇게 늦게라도 이 여종이 내 주께 나아와 만나게 된 것을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여겨 주십시오! 내 주께서 오늘 원수를 갚느라고 피 흘리지 못하게 막아주신 분은 분명히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발은 이제 중한 죄를 벗지 못하여 곧 죽을 것이고, 내 주를 해치려고 하는 모든 원수도 나발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27) 이제 비오니, 이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선물을 받으시고, 내 주를 따르는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28) 제가 감히 이렇게 내 주의 길을 막고 서서 간청을 드리니, 부디 내 주께 순종하는 이 전심을 보시고 그 허물을 용서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전쟁하실 때에는 언제나 내 주를 들어 쓰셨습니다. 이제 주께서는 틀림없이 왕이 되셔서 영구한 왕가를 이루실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주께 불의나 죄악이 있다고 평생토록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29) 어느 누가 내 주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더라도, 내 주께서는 아무 해도 입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보석을 주머니에 잘 보관하는 슬기로운 부자처럼 내 주의 생명을 그토록 귀중하게 보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주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원수들의 생명을 여호와께서 물매주머니에 담아 팽개쳐 버리듯이 던지실 것입니다. 30) 이리하여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내 주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되시면, 31) 공연히 피흘리거나 손수 원수 갚으신 일로 후회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를 그토록 좋은 자리로 인도해 주실 때에 부디, 이 여종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보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발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세울 다윗에게 축복을 고백합니다.
나발에 대하여(23-26) 아비가일은 다윗을 보자마자 재빨리 나귀에서 내려 그의 앞에 엎드렸습니다. 얼굴을 땅에 댔습니다. 아비가일은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한편 나발의 이름과 같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개의치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개의치 말라”는 말은 ‘마음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하찮은 사람에 대한 복수심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아비가일 자신은 다윗이 보낸 종들을 보지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이 부분에서 다윗이 혹시 잊고 있을지도 모를 아주 중요한 내용을 말합니다.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다윗의 실수를 막게 한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칫 이 일로 슬퍼하거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예방한 것입니다(31). 이미 24장에서 다윗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게 했으며 나아가 26장에서 또 다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살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현명한 아내였으며 동시에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다윗에 대하여(27-31) 이 부분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점은 매절 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 대한 호칭을 “내 주여”라고 하는 것과 자기를 “내 주의 여종”이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상대방은 아주 극진히 높이고 자신은 아주 낮추는 표현을 함으로써 듣고 있는 다윗의 상처 난 마음을 최대한 위로하고 가라앉히려는 적극적인 의도가 엿보입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든든한 집이란 하나님이 배후에서 도와주사 인간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가문으로 세워주신다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그 근거로 다윗이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악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다윗이 누리게 될 복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한 복(blessing)도 있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행위를 하게 됨으로써 누리게 되는 복(happiness)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편 1편의 악인의 꾀를 좇지 않기 때문에, 죄인의 길에 서지 않기 때문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기 때문에 누리게 될 복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 용 : 우리 주변에 악한 자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감정적 대응을 하지 않고 신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할 수 있는 부분을 나누어 봅시다.
사람의 감정과 말의 힘을 알기 위해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봉지에 입을 대고 많이 웃고 감사하는 느낌과 마음으로 말하고 그 봉지 안에 모기를 집어넣으면 아주 오래 사는데, 화를 냈던 입김과 그 공기가 들어갔던 봉지에는 모기를 넣자마자 곧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말에는 분명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입의 말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흙이 생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자녀를 살리고, 남편과 아내를 살리며, 이웃을 살리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어떤 말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까?
호크마 주석
=====25:23
아비가일...다윗의 앞에 엎드려 - 이러한 태도와 자세는 자신을 낮추는 반면 상대는 높이는 초상의 예우이다. 아비가일이 이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한 까닭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분노를 완하시키기 위함이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Smith, Fay). 즉 당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은 백성들에 의하여 이미 보편적으로 예측되고 있었다(18:7, 30). 따라서, 특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을 소유했던 `총명한'(3절) 여인 아비가일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25:24
내 주여...여종으로 - 아비가일은 행동 뿐만 아니라, 언사(言辭)에 있었서도 이처럼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죄악을...내게로 돌리시고 - 아비가일의 의생 정신이 돋보이는 말이다. 즉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과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불사하고 다윗이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 여기서 `귀에 말하다'라는 표현은 반드시 필요한 내용을 상대에게 은밀하면서도 진지하게 전달.호소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22:8; 신 31:1 1; 룻 4:4).
=====25:25
본절에서 아비가일은 나발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상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불량한 사람(* , 아쉬 하벧리야알) - 문자적으로는 `무익한 남자', `쓸모없는 남자', `무가치한 남자'란 뜻이다. 17절 주석 참조.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 `어리석은', `미련한'이란 의미를 갖는 `나발'(* , Nabal)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나발이라는 인물이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했음을 가리킨다. 즉, 나발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바로 보지 못한 채 (1) 오히려 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떠돌이 종으로 몰아세웠으며(10절), (2) 다윗에게 주어져야 할 마땅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기 거절한 것(11절)등은 분명히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었다. 그는 미련한 자 -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어리석음이 있다'이다. 따라서 여기의 `미련한'(* , 네발라)은 `어리석은'(나발)의 명사형이다. 여종은...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 이것은 나발의 허물을 아비가일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이유이다. 즉 아비가일은 어리석은 나발을 제대로 감독치 못하였기 때문에, 나발이 다윗을 진토케 하는 큰 잘못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일 아비가일이 자신의 남편 나발을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주의깊게 지켜봐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는,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나발이 어리석은 짓을 하였는데, 그 모든 일에 대하여 다윗이 어리석은 나발을 상대로 복수할 일이 못되니 제발 마음을 도리시고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25:26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 이 표현은 맹세 또는 어떤 말의 신실성을 확증.강조하려고 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14:45; 17:55; 19:6; 20:21; 26:10; 삼하 2;27). 즉 이는 `여호와께서살아계신 것이 확실하듯이 ~도 확실하다'란 뜻이다.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 아비강리의 이 말은, 그녀가 자신을 다윗의 유혈 보복을중지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진 사자(使者)로 자임(自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당시 다윗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어리석은 나발로 인해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피흘리는 복수의 범죄를 저지를 뻔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해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될 다윗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셨던 것이다(Klein, Fay). 나발과 같이 되기를 - 즉 나발과 같이 어리석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성경은 `어리석음'을 필연적으로 벌을 받게 되는 `불경건'과 항상 연결시키고 있음에 주목해야할 것이다(26:21; 시 14:1; 잠 14:17; 사 32:6; 렘 10:8). 따라서`나발과 같이'(어리석게)된다는 것은, 곧 그 어리석은 행위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243;Schmidt).
=====25:27
예물(* , 베라카) -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복',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비가일은 여기서 바로 이같은 단어를 자신이 가져온 음식에 적용시킴으로써, 자신의 남편 나발의 모욕적인 언사(10,11절)와 상쇄시키려고 한다. 즉 나발은 심부름왔던 다윗의 사환들에게 저주스러운 말을 퍼부었지만,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여기서 그 사환들에게 축복된 `예물'을 갖고 온 것인 양 표현함으로써, 남편의 악한 행위를 보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 나발의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은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에, 아비가일은 `예물'을 다윗이 아닌 `소년'들에게 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물론 그 음식은 다윗의 요청에 따라, 그리고 다윗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가져온 것이다.
=====25:28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 여기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의 불미스런 행동이 자신 때문임을 재차 언급한다(24, 25절). 여호와께서 반드시...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권( 王權)을 굳건하게 하실 것을 가리킨다(삼하 7:11, 26, 27; 왕상 2;24; 11:38). 그런데 여기의 `집'(* , 바이트)은 `가문', `일족'이란 의미이다(창 12:1; 삼하 3;6; 7:16). 그리고 `든든한'(* , 네에만)은 `신뢰하다', `믿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만'(* )의 수동형 분사이다. 특히 이 단어는 신적(神的)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시 89:28, 29; 사 55:3). 따라서 여기의 `든든한 집을 세우리니'라는 말은 (1)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며 (2) 다윗의 후손 중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 2:10)를 통하여(마 1:1)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실 것(고전 15:25; 빌 2:11)이라는 `다윗 언약'을 예시하는 말임이 분명하다(삼하 7:11).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은 예언적 영안(霙眼)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한편 이같은 예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의하여 이미 언급된 바 있었다(2:10). 이는(* , 키) - 이 단어는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성전(聖戰)을 가리킨다(18:17; 삼하 5:19-23). 아비가일은 이처럼 다윗이 `성전(聖戰)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임을 강력히 시사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나발을 죽여 손에 피를 흘리는 사사로운 보복을 중지토록 하려고 한다. 아무튼 아비가일이 여기서 `성전 수행(修行)'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한 조건처럼 언급한 까닭은, `성전수행'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그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다윗도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비가일은 `성전'(聖戰)과 `왕권'(王權)을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즉 그 두 가지 해석은 (1)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른 다윗의 형통(Smith, Lagne, Keil), (2) 다윗
=====25:29
본절은 28절의 끝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일어나서 - 여기서 `사람'(* , 아담)은 단수라는 점에서, 다윗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했던 한 인물 `사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아비가일은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 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울처럼 다윗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Fay).
내 주의 생명은...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 이 은유적 표현은 값진 보화나 귀중한 물건의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그것을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서 유래했다(Abarbanel, Targum, Talmud). 한편 여기서 `싸개'(* , 체로르)는 `주머니' 또는 `보자기'(bundle, KJV)를 가리킨다(욥 14:17; 잠 7:20). 아무튼 본 문구는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하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여호와의 불꽃같은 눈이 다윗의 생명을 항상 지켜 보호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매로 던지듯...던지시리이다 - 오랫동안 물매를 사용했으며 심지어는 그것으롭 가레셋의 용장 골리앗을 죽이기가지 했던(17:49) 다윗은, 한 번 던져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물맷돌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원수의 생명을 물맷돌에 비유함으로써, 원수의 회복 불가능한 완전한 멸망을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아비가일은 `생명싸개'(* , 체로르 하하임;the bundle of life) 속에 곱게 싸여 여호와의 품속에 간직되어 있는 다윗의 생명과, `물매 속의 물매돌'처럼 획획 돌려져 멀리 날려 버려질 원수의 생명을 대조시킴으로써,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기원하고 또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25:30
여호와께서...하신 말슴 - 이것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16:13)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약속받은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별도의 게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에도 별도의 계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이썽아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총명하고 신앙적인 여인 아비가일은 다윗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말씀을 아마도 선지 생도들과의 교제 등을 통하여 알고, 오늘날 이처럼 성숙한 예언적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Keil, Fay). 모든 선을...행하사 - 구체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왕위에 올리는 일일 것이다 지도자(* , 나기드) - 엄밀히 말하여 이 말은 `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9 :16; 10:1).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왕'을 의미하는 `멜렉'(* )대신에 이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그 당시 사울이라는 `왕'(멜렉)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이 `나기드'는 왕에 대한 조심스러운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5:31
본절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나발을 죽이지 않을 경우, 다윗은 후일 왕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슬퍼하실 것도 없고 - 여기서 `슬퍼하실 것'(* , 레푸카)은 `거침돌이 될 것'이란 뜻이다. 순간의 격분과 분노로 사람을 죽인 후 자신의 잘못을 나중에 개달았을 때, 그 사람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즉 두고 두고 양심의 거침돌이 되어 괴롭힐 것이다. 바로 그같은 예 중의 하나가 바로 밧세바 여인과의 간통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남편 우리아를 죽였다가 다윗이 겪어야 했던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겠는가(삼하 11:14-21; 시편 51편)!. 마음에 걸리는 것 - 여기서 `걸리는 것'(* , 레미크숄)도 앞의 `슬프게 하는 것'처럼 `걸림이 되다'란 의미이다(렘 50:32). 후대하신 때 -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올리실 때'를 가리킨다.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 아비가일의 이 청원은 나발을 죽이지 말아달라는 자신의 청원을 들음으로써, 다윗이 후일 왕이 된 후에 마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공로임을 은연 중에 내세우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가일의 이말은 자신의 공치사(功致辭) 자체에 핵심이 있지는 않다. 다만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아비가일은 어떻게 하든지 다윗이 자신의 간청을 듣게끔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 설 교 >
아비가일의 신앙
삼상 25:23-35
지난 시간에 원수인 사울은 살려준 다윗이 요구한 것을 주지 않고 다윗을 무시하는 나발에 대해서는 복수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신앙은 실력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울을 살려준 것이 다윗의 실력이었다면 나발에 대해서도 같은 행동이 나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제의 신앙이 오늘 여러분에게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과거의 신앙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현재를 돌아보면서 과거에 나를 다스리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다스리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실력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 덕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록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어져 갈 뿐입니다. 신자란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고 내속에서 나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드러낼 그릇이며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수시로 잊어버리고 삽니다. 설교를 듣고 배운 바대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몰라서도 아닙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맞다’고 하면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야지’하면서 단단히 결심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내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이 앞서게 되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탐욕만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본문에 등장하는 아비가일은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바칠 많은 것을 준비하여 다윗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을 만나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는 반면 상대를 높이는 태도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단순히 남편인 나발을 살리기 위해서, 즉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취한 가식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에 대한 태도가 나발과 아비가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발은 다윗을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왕인 사울을 배반하고 도망쳐 다니는 반역자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요구를 묵살해 버린 것이고, 그런 다윗이 자신의 담이 되어서 소유가 지켜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힘있는 자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함께 하고 계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무시하고 분노케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어리석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나발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할 뿐이라고 하면서 나발을 무시하고 있는 듯한 말을 합니다. 이 역시 나발을 낮추고 욕함으로서 상대적으로 다윗의 분노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로 하는 말로 이해하기 보다는 진심으로 나발을 어리석은 자로 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나발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함께하고 계시는 다윗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발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지 못한 것 자체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불량하다는 것 또한 행실이 나쁘다는 표현이기보다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무시하는 행위 자체를 불량한 것으로 여기는 말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다윗에 대한 아비가일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26절을 보면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 역시도 아비가일이 철저히 다윗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래도 그렇지 아비가일이 나발의 아내인데 어떻게 나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마치 부부의 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한 모습을 아비가일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이 나발을 사랑하였다면 나발에 대해 변명을 해주면서 어쨌든 나발을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비가일은 나발을 무시하고, 나발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아비가일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비가일이 나발을 욕하고 결점을 드러내는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칭찬합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칭찬했다는 것은 하나님 역시 아비가일의 행동을 기쁘게 여기셨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아비가일이 과연 칭찬을 들을 만한 말과 행동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아비가일의 말과 행동을 칭찬 받을만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결국 아내들이 여기저기서 남편의 결점을 드러내고 험담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의문은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아내가 남편의 허물을 감싸주고 그냥 넘어가는 부부의 정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즉 나발과 아비가일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가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편에 대한 아비가일의 태도에 대해 의아심을 가지기 보다는 하나님이 결국 나발을 치시고 아비가일이 칭찬을 받고 다윗의 아내가 되는 일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발이 다윗의 분노를 사고 결국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게 되는 것은, 다윗이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소유가 보존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나발은 자신의 힘을 믿었고 다윗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스스로를 유지하고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함께 해준 것을 이유 삼아 뭔가를 요구하는 것을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을 인정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에 다윗이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며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거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발을 이름 그대로 어리석은 자로 말하는 것이고, 다윗을 무시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량한 행위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비록 나발을 불량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말하였지만, 나발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그의 결점만 드러내고 죽어도 싸다는 식으로 대한 것이 아닙니다. 28절을 보면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아비가일에게는 다윗에 대한 허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다윗이 소년들을 나발에게 보내었을 때 그것을 보지 못하고 나발이 다윗을 무시하게 된 것을 자신의 허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발에게 충고하여 그런 일이 없게 하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발의 불량한 행위와 어리석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비가일의 모습입니다.
우린 이러한 아비가일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과 허물을 드러내는 일에는 부지런 하지만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과 신앙 없음이 내 탓이라는 생각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할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지적하고 잘못됨을 드러내는 것은 하면서도 그 사람의 잘못됨이 바르게 알고 있는 내가 그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제대로 아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점과 허물을 드러내고 책망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형제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나 때문으로 여기면서 내게 허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은 운명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38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발을 쳐서 죽게 합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나발이 죽은 뒤에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윤리적으로 본다면 남편이 죽은 뒤에 곧 바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는가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성경은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세상의 윤리적 시각은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는 것은 과연 어떤 사람이 다윗과 함께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은 남편이 죽은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아 버리는 모습으로만 비춰질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을 다윗의 현재 처지만을 바라보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윗을 평가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싸개라는 것은 값진 물건이나 금은보화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의 풍습에 따른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의 말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던져 버리신다는 말로서 다윗의 생명과 원수들의 생명을 대조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승리하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심을 알았고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그 생명이 보존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을 선대하는 것이 곧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이고 다윗과 함께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에 거하는 것임을 아비가일이 알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볼 때 다윗의 가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다윗의 초라한 처지만을 봤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발을 쳐서 죽이시고 아비가일은 칭찬을 듣고 다윗의 아내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나발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택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선대하는 그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함을 입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누구든 ‘나는 예수님을 선대하고 높인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과 세상에서의 약자로서의 삶까지 선대하고 높이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 될 것을 바라보고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신자는 약자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달라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극히 현실적인 판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를 대할 때는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시각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자신을 절대로 강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물론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을 강자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판단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나보다 덜 가지고 부족하게 보인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강자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약자가 내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세워서 나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신다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원년 아비가일
강문호목사(갈보리교회) / 삼상 25:23-35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그 사람된 원년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날이 원년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 원년입니다. 모세의 원년은 가시떨기 앞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요나의 원년은 고래 뱃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삼미 그룹이 있었습니다.
야심으로 가득 찬 김현철 회장이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입을 꾹 다물고 세운 그룹입니다. 눈에 보이게 성장하였습니다. 멋진 재벌이 되어 가고 있을 때 직장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경을 헤메고 있었습니다. 그는 삭개오처럼 모든 것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시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드리기> <나누기>로 모든 재산을 다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중앙일보 기자가 인터뷰하면서 물었습니다.
“삼미 그룹 회장 시절과 선교사 지금과 어느 쪽이 더 행복하나요?”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행복하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가 세계 제일의 재벌이 될 것이다라는 꿈을 가지고 죽을 둥 살 둥 일할 때 행복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습닏다. 스트레스와 고민과 걱정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고 나니 더 없이 행복히합니다. 모든 것을 드리고, 모든 것을 나누어 주며 사는 지금은 항상 행복합니다.”
김현철 회장에게 진정한 원년은 삼미 그룹 회장되는 순간이 아니라 선교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부회장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난 글입니다.
삼미 그룹 부회장에서 웨이터로 변신한 서 상록씨가 자서전적인 에세이 집을 발간하였습니다.
“내 인생 내가 살지.”
이런 흥미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336페이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역설하고 있습니다.
“새로 일자리를 구하는 분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눈높이를 조금만 낮춰 보세요. 남 눈치 보지 않고 내 인생 내가 산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는 사업가로 미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었습니다. 그는 대 그룹에서 부회장까지 올라 큰 회사를 잘 경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IMF로 직장생활이 어려워지자 그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롯데 프랑스 식당 웨이터로 취직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2시간 일찍 출근합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객들을 위해 바이올린 연습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웨이터 분야에서 최고 프로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부끄러움이나 과거의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를 섬기던 자들을 식당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보통 사람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뒤집어 놓고 내 인생 내가 산다고 하는 철저한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부회장님이라고 부르던 그의 이름이 웨이터라고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면서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름이 바뀌기를 원합니다. 그의 원년은 삼미 부회장이 되는 순간이 아니라 웨이터로 일하기 시작한 순간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살지.”
멋진 원년의 출발 언어입니다.
오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아비가일 여인 이야기입니다. 크린턴 대통령 아내 힐러리 에피소드입니다. 크린턴이 대통령에 당선 된 후 아내 힐러리와 시카코를 방문하였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게 되었습니다. 힐러리가 말했습니다.
“주유소 주인이 나를 좋아하였지요.”
크린턴이 말했습니다.
“저 남자와 결혼하였으면 당신은 주유소 주인 부인이 되었지요.”
힐러리가 말했습니다.
“저 남자가 나와 결혼하였으면 저 남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크린턴은 대통령이 된 것이 그가 그된 원년이 된 것이 아니라 힐러리와 결혼하는 순간 이미 원년이 시작된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특이하게 죽을 남편을 살려낸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아비가일(Abigal)은 <내 아버지가 기뻐하심>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이름 그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마은 사람 나발의 아내였습니다. 나발은 큰 부자였습니다. 갈멜에서 목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총명한 여자였습니다. 아비가일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당시 400명 정도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삼상 25;5-8)
다윗의 소년들이 나발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10-11)
다윗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같이 있는 사람들 400명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발을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아비가일이 알았습니다. 아비가일은 서둘렀습니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송이와 무화과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18-19)
아비가일은 다윗과 마주쳤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23-24)
그리고 아비가일은 계속 말했습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25-31)
이 말을 듣고 다윗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32-34)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35)
아비가일은 밝는 아침까지 이런 사실을 나발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37-38)
결론입니다.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사환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일러 가로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39-42)
아비가일은 좋지 않은 나발의 아내에서 그렇게 유명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원년은 다윗의 아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원년은 특이하게 시작되었습니다.
1. 빨리 결단하고 원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결단에서 중요한 것은 기회를 놓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 결단하는 것입니다.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이 있고 미루어도 되는 결단이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속히 결단하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400명을 데리고 남편 나발을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머믓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송이와 무화과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18-19)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23-24)
“급히”
두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아비가일의 신속한 결단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시간을 놓지면 안 됩니다.
미국 40대 대통령 레이건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였습니다. 구둣방에 가서 새 구두를 맞추었습니다. 구둣방 주인이 물었습니다.
“끝을 어떻게 할가요? 뾰족하게 할가요? 둥글게 할가요?”
레이건이 말을 하지 못 하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일까지 알려 주세요.”
다음 날까지도 레이건은 대답하지 못 하였습니다. 며칠 지났습니다. 구둣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구두 찾아 가세요.”
레이건이 가보니 구두 한 짝은 둥글게 한 짝은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구둣방 주인이 말했습니다.
“내 결정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없습니다.”
이 말이 레이건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결정은 내가 하여야 합니다. 결정은 신속히 하여야 합니다. 아비가일은 여자이지만 멋 진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여야 할 일이라면 지체하면 안 됩니다. “급히” 하여야 합니다.
뽕나무위에 있는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눅 19;5)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눅 19;6)
해야할 일은 급히 하여야 합니다. 아비가일은 신속히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원년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의논없이 결단하고 원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남편의 일이지만 남편 나발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남편의 생사가 걸린 일입니다. 급히 결단하여야 합니다. 남편과 의논하다가는 시간을 놓지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은 변명하거나 급한 성격의 사람이라 대들면 전쟁입니다. 지혜롭게 혼자 결정하고 혼자 행동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혼자 결정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100살에 난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후부터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데리고 오기까지 사라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한 마디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단독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였습니다. 중대한 것인 데 의논하여 보아야 하나가 되지 못 할 것은 의논하지 않고 혼자 저지르는 것이 용기입니다. 지혜입니다. 물론 책임도 혼자 지는 것입니다. 영웅의 특징이 이런 것입니다.
나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논없이 어려운 일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은 의논 없이 하여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자녀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족들을 모아 놓고 노아가 의논하였다고 하면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을 지도 모릅니다. 노아는 의논없이 무조건 밀고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나 독불장군처럼, 독재자처럼 혼자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중대한 일이고 시간이 촉박할 경우에는 혼자 처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아비가일이 그런 여자였습니다.
3. 확실하게 결단하고 원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비가일은 무엇을 하여도 확실하게 하는 여자였습니다. 남편을 죽이러 오는 400명과 먹고 마실 것을 가지고 가는 아비가일과 마주쳤습니다. 마치 연극같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그 때 아비가일의 행동은 정말 돋보이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23-25)
아비가일은 얼굴을 땅에 댔습니다. 다윗의 발앞에 엎드렸습니다. 행동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로 설득을 시켰습니다. 자기 남편에 대하여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불량한 사람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개의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나발은 미련한 사람이라고 깍아 내렸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순식간에 풀렸습니다.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사형당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행차가 있었습니다. 딸은 왕에게 무례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왕의 행차가 순식간에 머믈렀습니다. 모두 무례하다고 끌어 내려고 할 때 왕이 물었습니다.
“가만 두어라. 무슨 사연이냐?”
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
신하에게 왕이 물었습니다.
“저 아이의 아버지 죄가 무엇이냐?”
“반역죄입니다. 살릴 수 없습니다.”
왕이 딸에게 말했습니다.
“네 아버지는 살릴 수 없는 반역죄다. 법대로 죽여야 한다.”
딸이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는 법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아버지를 살려 주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자세는 너무나 확끈하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반응은 우리에게 신앙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아비가일이 자기에게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비가일을 자기에게 보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바람도, 해도, 비도 모든 것을 하나님은 주장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자세의 모델입니다.
2. 아비가일을 칭찬하였습니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3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아비가일을 칭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나중입니다.
3. 자기 이야기는 나중에 하였습니다.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32-34)
그 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발이 죽었습니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37-38)
다윗은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였습니다. 아비가일은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아름다운 사람들끼리 만났습니다. 목자의 아내에서 왕의 아내로 새로운 생을 시작한 아비가일의 원년을 살펴 보았습니다. 금년 2017년이 여러분에게 원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다윗과 아비가일의 지혜와 신앙
삼상 25장 23~42절 / 계강현목사
삼상 25장은 제사장 “사무엘이 죽었다.”로 시작한다. 한 시대를 이끌던 걸출한 한 사람의 죽음은 때로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게 다윗에게는 무슨 의미였을까? 다윗을 기름 부어 왕의 길을 걷게 한 제사장이요, 늘 의지하던 영적 아버지, 큰 기둥이 무너졌음을 뜻한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집으로 급습했을 때, 아내 미갈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피신한 다윗은 바로 사무엘에게로 도망갔다. 삼상 19:18, “다윗은 그렇게 달아나서 살아난 다음에,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서, 그 동안 사울이 자기에게 한 일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 곧 다윗을 데리고 나욧으로 가서 살았다.” 그만큼 의지했단 얘기다. 아마 다윗이 물었을 것 같다. “왕으로 기름 부어주셨는데, 저에게 왜 이런 고난이 찾아올까요?” 사무엘은 “하나님이 크게 쓰시려고 훈련시키시는 거란다.” 대답해줬을 거다. 그렇게 피난생활의 어려움 가운데 위로와 의지가 되었던 영적 멘토가 죽은 것이다. 사울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다윗은 얼마나 상심이 되었을까? 그래서인지 사무엘이 죽은 다음에, 다윗은 유대 땅에서 멀리 떨어진 바란 광야로 피해서 머물게 된다.
이 때 다윗의 일행은 육백 명 가량이었다. 다윗이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 사울 왕의 통치 아래 감시받던 가족들과, 압제당하고 빚에 시달리고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도망쳐 다윗과 함께 아둘람 굴에서 사는 공동체가 생겼다. 게릴라 군대 수준이다. 이렇게 다윗의 군대가 바란 광야에서 생활할 때, 먹을 식량이 문제가 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 가까운 유대 땅 마온까지 오가게 되었다. 그 마온에는 본문에 나온 ‘나발(어리석은)’이라는 포악한 거부와 아비가일이라는 지혜로운 아내가 살았다. vv2-3, “그 무렵에 마온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갈멜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고, 아주 잘 사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가축은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였다. 그는 마침 갈멜에 와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며,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다. 이 여인은 이해심도 많고 용모도 아름다웠으나, 그 남편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하였다. 그는 갈렙 족속이었다.” 다윗의 군대는 나발의 목자들이 양을 칠 때, 광야의 약탈자들로부터 밤낮으로 성벽같이 지켜줬다. 어느 날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는단 소식을 들었다. 양털 깎는 날은 가을 추수와 같은 잔칫날이다. 소양을 잡고 빵과 음식을 하고 포도주도 마시며 잔치한다. 그런 날에는 음식을 많이 해서 동네사람들과 나누며, 걸인과 나그네들에게 대접을 하는 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율법적 관례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위해 나발에게 먹거리를 좀 나눠달라고 소년 열 명을 보냈다.
하지만 악한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25:10-11,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 말은 다윗의 자존심을 꽤 깎아내리는 뼈아픈 말이다. 나발이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는 사울이 다윗에게 사용하던 경멸조의 말이다. 나발이 다윗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개 무시한 거다. 이 말에 다윗은 상처를 입고 실망하여 크게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당장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발의 집을 치려고 떠났다. 그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하인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아주 급히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을 영접하러 나간다. 빵과 포도주와 양 요리와 볶은 곡식과 건포도 와 무화과 뭉치를 나귀에 실어 일꾼들에게 앞서 보내고, 자신도 뒤따라 다윗을 맞으러 나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발의 온 가족을 치러 떠났던 다윗은 지혜로운 아비가일의 행동과 지혜의 말로 인해 분노를 가라앉히게 된다. 또한 그녀를 칭찬하고 축복하며 결국 양식은 받고 복수를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남편 나발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열흘 후 죽는다. 그리고 남편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나타난 다윗과 아비가일의 신앙과 지혜를 배우자.
1. 다윗의 분노, 정당한가?
v22, “내가 내일 아침까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들을 하나라도 남겨 둔다면, 나 다윗은 하나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겠다.” 다윗이 평소답지 않게 왜 이렇게 크게 분노하고 있을까? 그것은 비록 선한 의도에서 나발의 양떼들을 보호해줬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600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피난살이 하는 다윗이니 군대의 식량에 대한 염려가 다윗에게 늘 있었을 것 같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식량이 필요한지만, 양떼 주위에 주둔하면서도 다윗의 군대는 일절 해하거나 약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호해주었다. 나발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고, 다윗이 그저 선한 의도에서 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알아주길 바란다.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 다윗은 후한 대접을 기대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나발의 반응에 실망하고 지극히 분노하게 되었다.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이 선한 호의를 베풀었으니, 상대방도 선한 반응을 해주길 기대한다. 그런데 그런 기대하는 마음이 있으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이뤄질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기대하고 기도하지만, 그만큼 변화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목장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목자 목녀에게 꼭 필요한 자세다.
삼상 23장에 보면, 자기 동족 그일라 주민이 블레셋에게 침략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들을 구해주고 싶었다. 하나님에게 물어보니 허락하시는 거다. 그런데 다윗 자신도 지금 피신 중이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을 도와준다는 거다. 그래서 부하들이 극구 반대했다. 숨어있기도 두려운데,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 주민을 구해주면 사울에게 “나 여기 있소”하고 광고하는 꼴이 아니냔 얘기다. 다윗은 한 번 더 하나님에게 묻자, 또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주민들을 구했다. 그러면 아마도 그일라 주민이 다윗의 군대의 식량을 지원해 줬을 것 같다. 다 빼앗겼던 전리품도 찾아줬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 식으로 다윗 공동체는 근근이 살고 있었을 게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소식을 들은 사울 왕은 즉시 다윗을 잡기 위해 그일라 성을 에워쌀 계획을 세우고 모든 군대를 소집했다. 이때 여러분이 그일라 주민이라면 누구 편을 들어야겠나? 당연히 구해준 다윗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러질 않는다. 에봇을 갖고 묻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그일라 주민은 다윗이 아니라 사울 왕을 도와 다윗을 넘겨줄 거라고 일러주셨다. 아! 배신감~, 다윗 일행은 눈물을 머금고 그일라를 떠나야만 했다.
여러분, 이게 인간의 연약함과 간사함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뭘 더 기대할 수 있겠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사 2:22,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그의 숨이 코에 달려 있으니, 수에 셈할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도, 요 2:23b-25,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그저 사랑할 대상이다. 너무 많이 기대하면 너무 많이 실망하게 되고 결국 분노하는 죄의 자리에 빠지기 쉽다. 그저 덮고 사랑하며 살자.
다윗은 사울왕의 집요한 살해 추격에도 원수를 직접 갚지 않았다.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원수 갚는 최종 재판관은 하나님이라는 주권신앙 때문이다. 바로 앞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 표시로 겉옷자락만 살짝 자르곤 이내 양심의 가책이 되었다. 사울 왕에게, 삼상 24:14-15,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누구를 잡으려고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임금님이 누구를 잡으려고 쫓아다니십니까? 한 마리 죽은 개를 쫓아다니십니까? 한 마리 벼룩을 쫓아다니십니까? 15 그러므로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셔서, 나와 임금님 사이를 판결하여 주시기를 빌겠습니다. 주님께서 굽어보시고 나의 억울함을 판결하여 주시며, 나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를 빌겠습니다.” 이랬던 다윗이다.
그런데 왜 나발에 대해서는 직접 원수를 자기 손으로 갚으려는지 모르겠다. 다윗도 인간인지라, 사무엘의 죽음과 긴 도피생활에 실망과 분노로 이성을 잃고 신앙심마저 잃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우리도 신앙 좋고 기도생활 잘하고 그래도 이런 위기에 얼마든지 처할 수 있다. 교회의 중직이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절대로 안 그럴 거다!” 호언장담하지 마라. 그저 겸손하게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
2. 다윗과 아비가일의 지혜와 신앙을 배우자.
나발의 가문이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히 나섰다. 아비가일과 관련하여 이 ‘급히’(‘서둘러’)란 단어가 네 번이나 언급된다.(v18, v23, v34, v42) 그는 상황을 신속히 판단했고, 신속한 대책을 세워 음식을 준비하고 행동한다. 신속하지 않으면 큰 비극과 불행이 닥칠 것이다. 신속함이란 평소에 내재된 사고와 인품과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가장 분명하고 가장 적확한 신속함이란 기질에서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아비가일은 그 순간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라 순종했다.
이것은 단지 미화된 추측이 아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급히 만나 취한 말과 행동들은 나발에게서 볼 수 없는 판단력과 담대함이 분명히 있지만 그걸 훨씬 넘어선다. 다윗이 화를 가라앉히고 보복의 출정을 멈추게 하고, 실책과 범죄를 중단하게 만든 것은 과연 그녀의 그 무엇이었을까? 1) 보자마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다윗의 발 앞에 애원한 일도 해당된다. 겸손 앞에 버틸 장사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될까? 2) 급히 준비해온 식량 때문일까? 이미 칼은 뽑혔고 식량에 중지하긴 늦었다. 3) 아름다운 외모일까? 결코 아니다. 그러면 뭘까? 4) 이 절박한 순간에 다윗을 멈추게 했던 것은 그녀의 지혜로운 말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관계, 이웃 관계다. 이웃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말이 곧 사람이요 그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아비가일로부터 말의 지혜를 배우자.
아비가일이 무슨 말을 했나? ⓵ 그는 남편의 죄를 자기 죄로 돌리며 용서를 빌었다. 그는 잘못을 범한 남편을 다윗 앞에 서슴없이 비난했다. 남편의 죄가 자기 죄이므로 남편에 대한 비난은 곧 자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이것으로 다윗의 마음이 조금 풀렸을 것 같다. 나발 본인에게 사과를 받지 못했지만 그의 현명한 아내가 나발 이상의 사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후 아비가일은 ⓶ 변명했다. v25b, “그런데다가 장군께서 보내신 젊은이들이 왔을 때에는,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아서, 그들을 만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말은 꼭 필요하지만 순서가 중요하다. 사죄가 먼저고 변명이 나중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될 일도 안 된다. 아비가일은 그런 면에서 지혜롭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그쳤다면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을 거다. 아비가일은 이어서 ⓷ 다윗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덕담을 했다.(vv28-29) 그것도 참 좋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도 그런 처세술에 능하다. 결정적인 한 방은 그녀가 ⓸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마치 예언자의 말처럼 다윗의 마음을 방망이처럼 강타하여 깨닫게 했다. vv30-31, “이제 곧 주님께서 장군께 약속하신 대로, 온갖 좋은 일을 모두 베푸셔서, 장군님을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 주실 터인데, 31 지금 공연히 사람을 죽이신다든지, 몸소 원수를 갚으신다든지 하여, 왕이 되실 때에 후회하시거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처럼 좋은 일을 장군께 베풀어 주시는 날, 이 종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이 직접 들었던 계획인데, 그 순간 놓쳤던 바로 그 말씀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실’ 것이란 말씀이다. 왕이 될 분이 자존심 상할 봉변 좀 당했다고 ‘공연히 사람을 죽인다든지’, ‘몸소 원수를 갚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왕위다툼을 통해서 쟁취하는 군사적, 정치적 승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고, 그것은 왕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나라로 회복하는 걸 의미한다. 만일 나달의 남자들을 다 살육한다면 다윗이나 사울이나 다른 게 무엇이겠나! 이 본질, 이 핵심을 아비가일이 지금 다윗에게 들려준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의 망치를 맞았다. 바로 그 시점에 다윗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말씀이었다. 다윗은 하염없는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심을 입은 자다. 그것을 위해 지금 훈련받고 있는 거다. 아비가일의 입을 통해 들려진 이 말씀이 다윗에게 분노의 감정에서 말씀의 이성으로 돌아서도록 만들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영도자로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자기 백성의 피를 흘려 복수하는 게 마땅한 일인가! 다윗이 사울 왕에게 하소연했던 말,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셔서, 나와 임금님 사이를 판결하여 주시기를 빌겠습니다.”(24:15) 그 말이 다윗과 사울 사이에만 적용되겠나? 나발과 백성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여 실천할 자가 다윗 아닌가!
아비가일은 지혜롭게 하나님 말씀을 충실히 전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지혜롭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자,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자를 쓰신다. 아!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부족하다. 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기고 지혜로운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약 1:5,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자기 손으로 복수하지 않도록 막아준 아비가엘의 지혜를 칭찬했다. 그리고 예물은 받고 그녀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분노로 살육의 죄를 지을 뻔했던 다윗이지만, 지혜로운 조언에 빨리 깨닫고 칼을 거두어 들였다. 하나님이 은혜로 막아주신 것이지만, 다윗도 지혜자이기에 자존심을 접고 뺐던 칼을 접을 줄 알았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두부라도 잘라야지!’ 그런 말하지 마라. “총 나와라, 칼 나와라.”하는 식으로 파수꾼 없이 말을 내뱉다가는 서로 망한다. 부부가 싸움만 했다 하면 “이혼해! 이혼하자! 더 이상 못살겠다!” 그러면서 싸우는 부부들이 있다. 아무리 싸워도 부부는 절대 이 말만은 꺼내지 말아야 한다. 농담으로도 하지 마라! 극한 분노로 치닫다가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순간, 단호하게 자존심의 칼을 접고 말씀 앞에서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다윗의 지혜를 배우자.
아비가일은 집에 돌아와 술에 취해 있는 나발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잤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모든 정황을 일려주자, 나발은 충격을 받아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지더니 열흘쯤 뒤에 죽었다. 하나님이 심판을 직접 내리신 것이다.(뇌졸증, 심장마비)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찬송했다. v39, “주님을 찬양하여라! 나발이 나를 모욕하였으나, 주님께서 그 원수를 갚아 주시고, 이 종이 직접 무슨 악을 행하지 않게 막아 주셨다. 주님께서는 나발이 저지른 죄악을 나발의 머리로 돌려보내 주셨다.” 원수를 직접 갚으려고 하지 말고 최종 재판관이신 심판주 하나님에게 맡기라.
3. 예수님을 영접하면 신부가 된다.
그래도 그렇지, 다윗이 나발이 죽자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은 것은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떤 성경학자는 다윗이 갈렙족속을 회유하려고 아비가일과 정략결혼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 모형이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해석될 때 더 빛난다고 생각한다.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이듯, 오늘 등장한 다윗 역시 예수님의 모형이다. 결국 나발과 아비가일 이야기도 예수님과 관련한 영적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 성경에 기록한 것이다. 나발은 그 이름의 뜻대로 ‘어리석은’ 비신자의 모형이다. 반면 다윗을 영접하여 다윗의 아내가 된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교회와 성도의 모형이다. 그런 차원에서 아비가일의 지혜는 바로 오늘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지혜로운 신앙의 모습이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신앙의 모습 중 중요한 것은 바로 다윗을 알아보고, 다윗을 영접했다는 것이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영접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신앙의 모형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은혜를 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며 훗날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것까지 확신하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오늘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모형이다.
미련한 나발은 다윗을 영접하지 않은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된다. 반면 다윗을 영접한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된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영접하여 다윗의 아내가 된 것은,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과 같다. 마귀의 자녀로 살던 우리가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혼녀로 이 땅에서 종말을 준비하며 의롭게 산다. 고후 11:2,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참석하게 된다. 계 19:6b-8,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곧 영접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결국 나발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에 들어감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에 나와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은 동일한 심판에 처한다. 그러나 구원의 기회는 활짝 열려있다. 예수영접모임에 들어와 그 구원을 누려라.
아비가일 이름의 뜻은 ‘기쁨의 근원’, 또는 ‘나의 아버지는 기쁘다’란 뜻이다. 아비가일이 어리석은 남편 나발의 아내로 있을 때는 참된 기쁨이 없었다. 그러나 새 남편 다윗을 만난 후에는 그 이름대로 기쁨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모든 인생이 죄악 세상에서 마귀라는 옛 남편에게서 벗어나 새 남편 예수님을 만날 때만 참된 기쁨을 얻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아비가일처럼 지혜로운 신부의 말과 신앙으로 준비하여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모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참여하는 복된 성도이길 축원한다. 아멘.
하나님의 생명 싸개
삼상 25:23-31 / 김정호목사
우리가 맞는 상황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긍정적 상황과 평범한 상황과 그리고 부정적 상황입니다. 긍정적 상황에서 감사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나 이제 평범한 상황에서도 감사거리를 찾아내고 더 나아가 부정적 상황에서도 감사거리를 찾아내는 연습을 꾸준히 하여 마침내 <감사의 달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의 달인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며 누구라도 되겠다는 의도를 세우면 그리고 틈틈이 연습을 하여 습관이 되면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믿음을 갖고서 마음에 그리는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11:23b-24)
성경에는 신앙적으로 귀감이 되는 여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선명하게 빛나는 별처럼 이스라엘의 종교적 도덕적 암흑기에 한 줄기 희망과 위로를 선물하는 자들입니다. 그같은 인물로 우리는 룻과 라합과 에스더와 한나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에 가려서 자칫하면 무심코 보아 넘길 한 여인이 있었으니 곧 본문에 나타나는 아비가일입니다. 그녀의 남편인 나발은 불량하고 미련한 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만 아는 배은망덕한 자였습니다. 이러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비가일은 어찌보면 매우 불행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악한 남편 나발과는 달리 그녀는 매우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미련한 남편의 악행과 불신앙을 닮거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배은망덕한 나발을 복수하려는 다윗의 칼날로부터 그녀는 자기의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악하고 미련한 한 사람의 죄악으로 온 집이 멸망당할 뻔한 위기에서 지혜롭고 선한 한 여인의 신앙과 용기가 구원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녀가 급히 자기의 집을 공격해 오는 다윗 앞에 엎드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분노가 가득한 다윗을 진정시키는 결정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비록 나약한 여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지혜로써 자신 뿐 아니라 온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갖은 고생과 수모를 당하고 있었지만 결코 자제력을 잃어버린적은 없었습니다. 강한 자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도 나발로부터 모욕적인 거절을 당하자 그의 인내력은 무너져 살인적인 분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삼상25:10-11). 이 말을 들은 다윗이 칼을 차고 400명을 데리고 갔을 때에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다윗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29절에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생명 싸개는 생명 주머니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 가운데 있어 절대 안전한 것을 뜻합니다. “물매로 던지듯”은 생명 싸개와는 대조되는 것으로 다윗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던지움을 받아 곧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을 비롯한 누구도 하나님의 생명 싸개 안에 있는 다윗의 생명을 죽일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 싸개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미련한 자와 상대하지 마세요
본문 25절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아비가일은 남편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것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남편 나발은 미련하니 그의 이름과 인간됨이 적합하다는 뜻입니다. 불량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소년 10명을 보냈을(5절) 때에 아비가일은 그 소년들을 보지 못해 그때 시행치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싸개인 다윗이 미련한 나발과 상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해 봐야 깨닫지도 못하고 아무 유익이 없으니 시간과 힘의 낭비를 하지 말고 무시하라는 뜻입니다.
돼지들이 뭐든지 잘 먹는 이유는 보이는 것이 모두 꿀인줄 알고 "꿀꿀꿀~ 꿀꿀~" 하면서 잘 먹는다고 합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동물은 세상에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감사를 표현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감사함과 은혜를 모르면 돼지와 같습니다. 불량하고 미련한 자입니다. 돼지와는 무슨 대화도 되지 않습니다. 시간과 힘만 낭비할 뿐입니다. 아비가일은 생명 싸개 되시는 다윗이 미련하고 불량한 돼지와 같은 나발과 상대하여 살인하여 피를 흘리거나 흠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불량한 나발로 인하여 분노하거나 죄를 짓는 일이 없는 고귀한 생명 싸개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미련한 자를 보복하지 마세요
본문 26절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는 맹세의 형식으로 그녀의 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녀가 다윗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의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보내사 그날 다윗이 사람을 죽여 피 흘리는 일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날 다윗이 나발과 그 가족을 죽였다면 다윗 일생에 살인자라는 큰 오점을 남길 뻔 하였습니다. 당시 다윗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어리석은 나발로 인해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피 흘리는 복수의 범죄를 저지를 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해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될 다윗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행위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련하면 살인하게 되고 살인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없습니다. 나발로 인하여 왕이 되는 장애물을 만들지 말라는 미래적인 충고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교만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내가 똑똑해서 장사 잘 된다” 그러고 자식들 건강히 잘 크면 “내가 잘 먹여줘서 그렇다” 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내가 잘나서 잘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겐 감사가 없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냥 말로 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내가 잘해서 장사도 잘되고 집안도 잘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소중한 감사를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기를 내 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늘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하기를 힘써야만 마음과 삶 속에 감사가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분노와 미련과 보복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보복은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더 크고 잔인한 악순환이 계속 됩니다. 여기에서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살아날 사람은 없습니다. 미움은 더 큰 미움을 가져오고 살인은 더 큰 살인을 가져옵니다. 나발을 다윗이 살인하면 누군가 다윗을 살인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싸개는 결코 보복을 하지 않습니다. 보복의 악순환이 아닌 사랑과 감사의 선순환이 계속되는 생명 싸개의 성도와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미련한 자로 인하여 피를 흘리지 마세요
본문 29-31절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아비가일은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든든히 번창시키실 것이고 골리앗을 죽임같이 여호와를 위한 싸움을 하였고 지금까지 일생에 악을 행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기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사울 왕이 군림하고 있었으므로 모두가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장차 왕이 되실 다윗이 어리석고 불량한 나발을 죽여 피를 흘리거나 복수했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은혜를 기대하기 보다 나발을 죽이지 않는 것이 다윗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공기 물 나무들 모두 흔하지만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살 수가 없는 가장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범한 것에서 비범한 소중성을 발견해야하며 우리 주변의 흔한 것들로부터 감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 불감증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는 평범한 일에도 감사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평범한 일이란 당연한 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란 말씀은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서도 감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 때 항상 기쁘게 살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아들아! 아빠가 없는 그 불쌍한 애한테 네 축구공을 주렴.” 아들이 대꾸합니다. “축구공 대신에 아빠를 주면 안 될까요?” 어리석은 자녀들은 부모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짐승들도 자기 새끼를 위해서 희생을 하는데 사람이 자식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하고 피를 흘리고 살인하여 자기 자신도 피를 흘리고 죽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죽음의 길을 막아주는 지혜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승리와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한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예언적 통찰력을 볼 수 있습니다. 순간의 분노로 피를 흘리는 살인을 막아 주었고 후회할 일을 방지하였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피를 흘리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 싸개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생명 싸개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최고의 축복자입니다. 미련한 나발과 같은 자를 상대하지 말고 보복하지 말고 피를 흘리지 않는 이 시대의 생명 싸개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생명을 낳는 여성
삼상 25장 26~29절 / 이성희목사
요즘은 바야흐로 ‘아름다운 남자’와 ‘강한 여자’가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지난 연말 어느 기획사에서 ‘2004년 우리 시대 남녀의 조용한 혁명’이란 보고서를 냈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젊은 남녀 절반 이상이 양성성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남녀의 벽이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남성의 66.7%, 여성의 57.3%가 ‘양성형’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여자가 남자처럼 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 젊은 남성들은 여성적 외모를 적극적으로 가꾸는 데 관심을 가집니다. 여성들은 자의식과 리더십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성이 지닌 강점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스터 뷰티(Mr. Beauty)’, ‘미즈 스트롱(Ms. Strong)’이라고 합니다. 여성은 자기관리에 노력하고 커리어 우먼이 되기 위해 집념과 추진력을 갖추려 하고 있습니다. 남성은 부드럽고 섬세한 남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 남성이 가정에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입니다. 시사 문제를 많이 아는 여성이 매력이 있다고 합니다. 여성 대통령도 얼마든지 가하다고 합니다. 여성이 가냘픈 몸매보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를 선호합니다. 여자도 가급적 힘이 센 것이 좋다고 합니다. 여성이 큰 차를 운전하는 것이 멋있다고 합니다. 남녀 구분 없이 돈 있는 사람이 데이트 비용을 낸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여성들이 강해진다는데 사실은 여성들이 원래 강합니다. 남자들 보다 더 강합니다. 여자가 오래 사는 이유가 강심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70세가 되어도 20세 못지않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심장 펌프질은 남성은 70세가 되면 20세보다 20-25%정도 떨어지는 반면, 여성은 나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벌레보면 무서워하는 것도 내숭이 많고, 괜히 여자니까 무서워해야 한다는 심리적 작용이 더 많은 것입니다. 이제 남성들은 벌레보고 무서워하는 여성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오늘 신약성경의 본문은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곧 잡히시고 죽으셔야 했고, 제자들을 보실 때 안스러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간다고 하시니 근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안심시키십니다.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눈앞에 닥친 십자가를 극복하게 하시고 영광의 부활을 설명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앞두신 예수님은 여인의 해산으로 이 사실을 설명하십니다.
해산할 그 때를 십자가의 때에 비유하십니다. 아이가 탄생할 때의 기쁨을 부활의 기쁨에 비유하십니다. 해산할 때가 되면 근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으면 사람이 태어난 기쁨으로 고통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근심이 기쁨이 됩니다. 오늘 여전도회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연동의 여성들, 여전도회원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 부활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성에게는 생명을 낳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여성의 해산입니다. 해산은 여성에게 주신 생명의 은혜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낳을 생명을 이 땅에 낳는 일을 여성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외에 직접 만드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실 그 일을 부모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성들이 해산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지요?
인간이 타락한 다음에 하와에게 주신 벌은 하와에게 주신 은혜였습니다. 창세기 3:16에는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4:1에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합니다. 누가 낳았어요? 하와가 낳았습니다. 창세기 4:2에는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라고 합니다. 또 하와가 낳았다고 합니다.
예례미야 30:6에는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고 합니다. 어디 아기 낳는 남자가 있습디까? 남자들은 해산도 안하고 아이를 얻잖아요? 내가 해산하지 않았지만 내 아들, 내 딸이라 하지 않습니까? 남자들 복 받은 줄 아세요. 남자들이 아기 낳으면 하나 이상은 절대로 못 낳을겁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낳은 적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시조에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낳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낳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모생육(父母生育)이란 한자말을 직역해서 아버지가 낳았다고 하는 말이랍니다.
사무엘상 25:29에는 “생명싸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생명 주머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는 절대로 안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뱃속이야 말로 절대 안전한 생명싸개입니다. 아기들이 어머니 배에서 나오면 그 때부터 고생입니다. 그래서 나오자마자 울기 시작합니다.
아기 키울 때 보면 어머니는 밤새 아픈 아이를 간호합니다.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입니다. 아무 때나 몸을 닦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남자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어머니에게 가능한 것은 아기가 생명이기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항의 한번 안하고 이삭을 드립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라 같으면 “하나님,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적어도 어머니 같으면 한번쯤은 이렇게 해야 인간적이 아닙니까? 생명의 가치를 아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낳는 은혜는 생명을 바치는 희생 때문에 가능합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한번 죽다 사는 것 아닙니까? 생명을 낳은 은혜는 생명의 가치를 아는 은혜를 누립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보니 여성 34%가 결혼 안 해도 좋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앞으로 남자들은 이래저래 힘들어요. 이제 사정사정해야 장가가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그만큼 혼자 살아도 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강인해요.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생명을 낳은 여전도회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영적인 생명을 많이 낳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성에게는 근심이 기쁨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의 근심은 컸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에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근심 말라”는 소극적 가르침에서 “근심이 기쁨이 되리라”는 적극적 삶을 주십니다.
자녀가 있는 어머니에게는 자녀가 세상입디다. 자녀가 잘 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자녀가 잘 안 되면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이 삽니다. 어떤 초보 어머니는 아이가 아프다고 울어요. 아이가 아프면 세상이 노랗게 보인답니다.
각 나라의 말에 보면 근심이란 말은 독일어에는 ‘질식시키다’, 영어에서는 ‘기진맥진하게 경주하다’, 헬라어에서는 ‘마음이 분리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기쁨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근심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미국 신문에 난 이야기입니다. 지난해 가을 줄리아나라는 여자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기는 태어날 때 얼굴뼈의 30-40%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사진에 난 아기의 얼굴은 짐승 같았습니다. 보기에도 민망했습니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14번 수술하였습니다. 앞으로도 30번 정도는 더 수술을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아기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극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주시지 않는다. 나는 아기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보여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참 대단한 믿음이지요. 하나님께서 생명에 대한 은혜를 주셨고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부활의 장면을 보세요. 28:8에는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라고 합니다. 여인들에게는 무서움과 기쁨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 때에 남자 제자들은 다 숨어 있을 때 여자들은 무덤에 갔습니다. 무식해서 용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서 용감한 것입니다. 이 여인들에게는 무서움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근심이 기쁨이 되리라”는 말씀은 근심은 기쁨의 전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근심을 그 자체로 남지 않게 하십니다. 근심 자체가 기쁨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근심은 사라지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라는 영화를 보신 분 계시지요? 이 영화는 올림픽 챔피언 에릭 리델의 삶을 증언한 이야기입니다. 에릭의 누이 제니는 늘 불평이 많습니다. 에릭이 달리기에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입니다. 제니는 에릭의 달리기를 시간 낭비로 보았습니다. 달리기하는 대신 그 시간에 기독교 사역에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것이 제니의 뜻이었습니다. 그 때 에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달리는 능력을 주셨고 달림으로써 나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다”. “제니, 나는 달릴 때 그분의 기쁨을 느껴.” 달리기가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고린도후서 6:10에는 바울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라고 합니다. 근심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는 삶이야말로 멋있는 삶입니다.
행복지수, 기쁨지수가 남녀 가운데 누가 더 높을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여자가 높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들만 모인데 가서 강의하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어지간히 잘 해서는 감동을 받지 않아요. 그런데 여성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어지간히만 하면 감동을 받습니다. 감동을 많이 받는 사람이 기쁨지수가 높지 않겠습니까? 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여성에게는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고통이 있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고통이 아닙니다. 고통이 있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고통이 아닙니다. 아무리 문제라도 문제라고 보지 않으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특별하신 은혜가 이렇습니다. 해산하는 고통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이사야 65:17에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새 것이 오면 이전 것은 기억도 아니 하게 하십니다. 마음에 생각도 아니 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내 고통이 제일 큰 고통입니다. 우리에게는 현재적 고통이 제일 큰 고통입니다. 오래 전 전도사 시절에 맹장 수술한 권사님을 병원에 심방을 하였습니다. 권사님이 너무 아파하시길래 물었습니다. “권사님, 아기 낳을 때가 아픕니까, 맹장 수술한 다음이 아픕니까?” 그 권사님은 아기 낳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맹장이 훨씬 더 아프다고 하십디다. 아기라는 생명의 대가가 해산의 고통을 덜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은총입니다. 한센 병 같은 병은 전혀 고통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초기에는 모른다고 합니다.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몸이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1896년 미국 남부 앨러버마주는 비통한 슬픔에 잠겼습니다. 목화재배로 유명한 이곳에 갑자기 목화바구미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목화수확은 절반으로 줄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나돌았습니다. 도시는 삽시간에 실직자와 결식자의 탄식소리로 뒤덮였습니다. 그때 일단의 농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밭에서 목화를 뽑아내고 그곳에 땅콩을 심었습니다. 절망의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20년 후, 이곳은 ‘땅콩의 수도’로 불릴 만큼 풍요로운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마을 입구에 세워진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목화바구미에 감사한다. 그 날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풍요는 없었을 것이다. 목화벌레여, 그대들이 준 고난에 감사하노라.” 야고보서 1:2에는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고난에 빠지게 하십니다. 고통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미덕을 줍니다. 고통당하는 것은 더 고통당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의 위인들 가운데는 평생 큰 고통과 함께 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 되었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청교도 신앙의 아버지인 리처드 백스터는 큰 종양을 몸에 달고 살았습니다. 평신도 수도사로서 부엌의 수도사로 추앙을 받았던 로랜스 형제는 통풍을 앓으며 평생을 절룩거리며 다녔습니다.
저의 딸이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되게 해 줘서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아들 둘을 낳고도 힘들다 그러지 않고 딸 낳을 자신만 있으면 하나 더 낳겠대요. 저에게는 어리고 약해보이기만 한 딸인데 어느새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독한 엄마가 됐어요.
결론
유대인들 가운데는 ‘슬픔의 나무’라고 하는 슬프지 않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고통은 누구나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현재적 고통은 지긋지긋하리만큼 누구에게나 힘들고 벅찹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 고통을 벗을 수 있는 한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보따리에 싸서, 숲 속에 있는 슬픔의 나무들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그 보따리를 슬픔의 나무 가지에 걸어 놓는 순간 보따리 안에 있는 자신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의 보따리 대신 다른 사람이 걸어 놓은 보따리를 하나씩 가지고 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숲에 찾아와 자신의 보따리를 슬픔의 나무에 걸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숲을 샅샅이 뒤지며 대신 가져가야 할 보따리를 찾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온 보따리보다 작은 보따리들을 찾습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로 가져간 보따리는, 이전에 자기가 걸어 놓은 그 보따리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는 고통을 면하게 하시고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15에는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여성의 해산은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고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해산에는 갖가지 은혜를 주십니다. 생명을 낳으므로 근심이 변하여 기쁨도 크게 누리는 여전도회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적 생명도 많이 낳는 여전도회원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비가일에게 배우기
박형근목사 / 삼상 25:27-31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기도하는 중에, 브라이언 맥클라렌 목사님이 쓴‘예수에게서 답을 찾다’를 보면서, 마음에 닿은 것을 먼저 나눕니다. 이 목사님이 아프리카 르완다에 갔을 때 겪은 일입니다. 그 주위의 나라들이, 부족 간의 갈등으로 백만 명 이상이 학살당하고, 내전으로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는 데, 정부도 속수무책이라 합니다.
해결에 도움을 주려고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이고, 맥클라렌 목사님이 합석하여 대책을 논의하던 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빈민 지역에서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한 젊은이가 나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저희지역에 목사님들이 오셔서 매주 예배드림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몇 년간 다음 세 가지 외에, 강단에서 전해지는 것을 듣지 못했지요.
첫째, 예수 잘 믿으면 에이즈가 낫는다. 그 말씀에, 환자들이 약을 끊고 기도하며 나으려다가, 오히려 병이 더 깊어져 죽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둘째, 예수 잘 믿으면 죽은 후 천국 간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어찌 살아야 할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죄를 안 지어야 천국 가는데, 죄로 인해 에이즈에 걸리니, 정욕을 물리치라고만 하지, 빈민 지역의 실정이, 아무 할 일도, 소망도 없기에, 육체의 욕망이라도 좇는 것에는 무심하지요. 셋째로, 십일조를 잘 하면 복 받는다 합니다. 치유, 천국, 십일조 외의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그가 열변을 토한 후에, 참여한 목사님들의 질타를 받았지요.
‘이단이다. 믿음이 없어서 저런다.’등 등. 이것을 읽으며, 한국 교회도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아니, 세계 교회가 그럴 겁니다. 기독 교세가 약화 되는 중에, 그나마 활발한 곳이 순복음교인데, 그들이 이런 주장을 많이 하지요. 그 젊은이가 하고 싶은 말은‘그곳에서는 예배드리면서, 직업훈련을 시키고 일터를 마련해주는 일이 시급하고, 예수를 믿어서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 나갈지 알려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인데, 동감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삶에 밀착하지요.
설교하면서, 성경 말씀 안에만 머물지 말고, 성도들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길을 알려줘야지요. 오늘은, 사무엘상 25장을 살피며, 여인 아비가일의 믿음과 지혜를 배우면서, 관여된 다윗, 사울,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에 대해 나누며, 우리가 갈 길을 함께 살핍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질투와 두려움으로 도망 다닐 때입니다. 도망 다니는 다윗을, 세상에서 살기 힘든 이, 빚진 자, 약한 자들 600여 명이 따르지요. 혼자도 힘들 때, 그들을 먹이고 돌봐야 하지만, 다윗은 잘 감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그 정도 많은 무리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완력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곤 했지만, 다윗은 엄히 단속하여 약탈은커녕, 오히려 주민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지요. 우리에게, 내가 살기 힘들 때, 거기에만 매달리지 말고, 어려운 남들을 힘써 도우라 합니다. 돈이 없으면, 마음으로 기도로 함께 함으로 도울 수 있지요. 또한, 내가 어려우니 어떤 방법을 써도 되겠지? 자신이 그러지 말고, 주위나 자녀들도 그러지 않도록 챙기라 하지요.
그때, 나발이란 부자가 양털을 깎는데, 일 년 애써 지은 곡식을 추수하는 것과 같은지라,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음식을 넉넉히 마련하여, 이웃과 잔치하며 베풀었습니다. 다윗은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보내 잔치 음식을 얻어 오라 했지요. 부하들이 가서 다윗의 말을 전하자, 나발은‘다윗이 누구냐? 요사이 주인을 떠나 떠도는 종이 많다던데, 그런 자에게, 내 귀한 음식을 줄 수 없다.’한마디로 거절할 뿐 아니라, 망신을 주었습니다.
나발이, 백성들에게 널리 유명한 다윗을 몰랐을 리 없음에도, 그리한 것은, 자기 음식이 아깝기도 했지만, 살던 지역이 사울 왕의 인기가 높던 곳이고, 도망 다니는 다윗에게 음식을 줬다가 경을 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지요. 삼상 22장에 있는, 다윗을 도와줬던 제사장 일가를, 사울 왕이 다 죽인 것을 나발도 들어서 알았을 겁니다. 부하가 돌아와서 나발의 말을 보고하자, 다윗은 화가 치솟았지요. 배가 고파도, 그들에게 힘껏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보다도,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워 승리한 것 외에, 아무 죄가 없는데, 사울 왕이 죽이려 해서, 억울하게 도망 다니는데, 주인집에서 도망친 종이라 하니, 참을 수가 없지요. 부하들을 무장시켜 치러나갑니다. 그때, 나발의 종이, 아내 아비가일에게 달려와 일어난 일을 알리면서‘큰일났습니다. 주인 나발이, 다윗이 보낸 이들을 모욕해서 보냈어요. 우리가 들에서 양을 칠 때, 다윗의 사람들은 우리를 매우 선대해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의 담이 되었지요. 이제 당신이 어떻게 할지, 속히 생각해야 합니다. 늦으면 다 죽습니다. 다윗이 우리 주인과 온 집을 해치기로 결정했는데,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습니다.’나발이 어떤 사람인지 종의 입으로 알 수 있고, 반면에, 아내 아비가일은 종들에게 신망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평소, 우리 언행이 어떠한지 중요합니다. 저 사람은 이기적이라 자신만 알고 욕심쟁이야, 누구도 와서 도와 달라 안 합니다.
그리 사는 것이 편하다는 이도 적지 않으나, 믿는 이가 그러면 안 되지요. 아비가일처럼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 관심갖고, 따뜻이 대해야 합니다. 누구나 찾도록 해야지요. 내가 힘든데 어떻게 그래요? 그리들 생각하니, 세상이 더 힘들어집니다. 믿는 이가 먼저 다가가 돌보라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명하십니다. 성도가 먼저 그리할 때, 세상이 살맛 나게 변해 가지요. 내 성격이 원래 그래요. 신앙 생활하며 믿음으로 고쳐가라 합니다.
아비가일이 하인의 말을 듣고, 급히 넉넉한 음식을 준비해서 나귀에 실으라 합니다. 18절에 보면, 떡 이백 덩이, 포도주 두 가죽 부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백 송이, 무화과 뭉치 이백 개, 엄청나지요. 아비가일의 손이 큽니다. 다윗을 따르는 이들이 육백 명임을 알았지요. 종들에게 앞서가라 하며 뒤따르는데,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발에게 말하면, 욕이나 먹고, 일을 망칠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부부간에 이러면 안 되겠지요?
음식을 앞서 보낸 것은, 다윗이 그걸 보며 마음이 누그러지길 바란 것입니다. 야곱이 집에 돌아올 때, 형 에서가 부하를 이끌고 맞으러 나옴을 알고, 많은 선물을 먼저 보냈지요. 선물을 보고 에서가 맺힌 마음을 풀라는 것인데, 아비가일도 같은 마음입니다. 나발의 집을 치러오는 다윗 일행을 만나자, 아비가일은 급히 나귀에서 내려 절하며‘내 주여 이 죄를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소서.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 나발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는 미련한 자입니다. 여종은 주께서 보낸 소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나발이란 이름의 뜻이 미련한 자라 했는데, 유대인도 우리처럼 자식을 낳으면, 좋은 의미의 이름을 지어주기에, 본명은 아닐 거라 합니다. 평소 소행에 따라, 지어진 별명이지요. 그래도 어찌 자기 남편을 그리 말할 수 있나?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겁니다. 이어,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이 듣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저‘용서해주세요.’만 아닙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 한 말은, 먼저, 자신이 다윗을 막아섰지만, 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의 손으로 피를 흘려 보복하는 것을, 친히 막으신 것이라 합니다. 다윗이 화가 나서 나발의 집안을 다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으면, 다윗의 앞길에 큰 장애가 되겠지요. 다윗은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집안 살림하는 여인 아비가일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3천 년 전, 여인들의 위치가 지금과 전혀 다름을 감안 해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여호와 믿음이 있고 세상에 대해서도 잘 알았기에 가능합니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판을 쳐서 기독교가 흔들릴 때, 기독교 중심을 잡아준 칼 바르트 교수는‘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 외쳤습니다. 성도는, 성경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알라는 것인데, 그 원조가 아비가일 같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계속 일어나는 어려움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귀한 일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가져온 음식을 부하들에게 주라 한 후에, 둘째로 한 말이‘여호와께서는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습니다.’우리 말로‘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너무 아부하는 말을 한다.’고 느껴지나요?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아비가일이 평소에 다윗에 관해 많이 들어서 하는 말이지요. 남편 나발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화가 난 사람의 장점을 치켜주는 것 좋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말에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화난 사람의 잘못을 계속 지적하며 화를 돋우는데, 아니지요.
셋째로, 아비가일은 여호와를 의지하며 순종한 다윗을, 여호와께서 생명 싸게 속에 싸아 보호해줄 것이라 합니다. 여호와의 생명 싸게에 싸였다는 표현이 멋집니다. 다윗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리란 말이지요. 훗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생각합니다. 베들레헴에 호적 하러 온,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의 방이 없어, 짐승의 우리에서 아기를 낳아 구유에 뉘었습니다.
비록, 더러운 짐승 먹이통인 구유에 뉘었으나, 부모가 강보에 싼 아기 예수는, 여호와의 생명 싸개에 싸여,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거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음으로, 여호와의 그 생명 싸개에 싸여, 이 땅을 살 뿐 아니라, 죽은 후 들려서 천국에 올라가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 귀한 생명 싸개가 여러분을 항상 싸고 있음을 믿고, 세상을 담대히 헤쳐 나가세요. 심히 아프거나 힘들 때에‘난 여호와의 생명 싸개에 싸인 성도입니다.’큰 힘과 소망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여종을 생각하소서.’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시면, 자신을 생각해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아비가일은 훗날, 다윗 왕의 왕비가 되고, 아들을 낳았지요. 이 말을 할 때, 아비가일은 다시 한번, 오늘 나발의 집을 치지 않음으로, 왕이 될 때 마음의 부담이 없을 거라 하니, 다윗이 어찌 그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알아듣고‘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할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네가 급히 와서 막지 않았다면 밝은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라도 남아 있지 아니하였으리라.’다윗이 아비가일이 가져온 음식을 받은 후‘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이제, 사울 왕을 살핍니다. 원래 보잘것없는 가문의 사람이고, 겸손했지요. 사무엘선지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제비를 뽑아, 왕으로 뽑혔으나, 찾으니 없습니다. 사울이 부끄러워 짐 보따리 뒤에 숨은 것이지요. 그리 겸손했으나, 많은 신하가 따르고 힘이 생기니 교만해집니다. 사울 왕은, 인기가 높아가는 다윗을 두고 볼 수 없어, 여러 차례나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때마다 다윗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나, 마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사울은, 우리에게 탐욕의 무서움을 알려줍니다.
삼삼 25:36 이하에 보니,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 위험을 잘 해결하고 오니, 남편 나발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잔치를 벌여 즐기며 술에 취해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말해도 의미 없다 여기고 밤을 지난 후, 아침에 나발에게 어제 일을 말하니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지요. 뇌출혈입니다. 교만하며 큰소리치며 다윗을 모욕하였지만, 부인이 나서서 그리 무마하지 않았다면 죽었구나 생각하니, 그리된 것이지요. 미련한 나발입니다. 우리에게 그리 미련 떨지 말고, 아내처럼 지혜로우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삶에 적용할 것들을 정리합니다. 먼저,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났을 때, 한 말 중에‘제 잘못을 용서해주세요.’사실 아비가일의 잘못은 없지요. 교인들이 흔히 범하는‘누구 때문이야.’를 내려놓고 ‘나라가 어려운 것이 제 잘못입니다. 가족들이 예수 안 믿는 것이 제 잘못입니다.’그리 고백하고 기도하며, 사는 자리에서 성도답게 살기 힘쓰면, 주위가 달라집니다. 둘째, 다윗은 자신이 어렵고 위험해도,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돌봤습니다. 우리도 따라야지요.
셋째, 칼 들고 죽이러 오는 많은 무리에게, 한 여인이 막아선다는 것은 웬만큼 담대해도 거의 불가능합니다.‘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세상이 온통 그리 흘러가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아비가일이 아니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아비가일의 지혜와 용기를 배워야지요. 거기에,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것은 여호와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비가일도 그렇고, 다윗도 동의한 것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막아선 것이, 여호와가 하신 일이라 합니다.
성도들의 삶에 적용해야지요. 누군가 내 화를 돋운다, 어렵게 만든다, 그를 맞상대해 다투지 말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일깨워 주시는구나, 그러면 내 삶이 달라집니다. 서로 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화목과 평안을 누립니다. 성도는 그리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넷째, 아비가일은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이를, 여호와의 생명 싸개로 보호하심을 알았지요. 겪는 현실에 너무 두려워할 것도 초조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부정과 혼란이 도도히 흐르지만, 주님의 때에 모든 것이 회복되고 바로 잡힐 줄 믿습니다. 물론, 그것이 손 놓고 가만히 있어서 되는 일이 아니니, 우리 성도들은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으며, 아비가일처럼 담대히 맞서야지요. 그러면서, 항상 마음에‘내가 무엇을 한다.’아니고‘하나님이 다 이루신다.’를 간직해야 합니다. 아비가일의 이름 뜻은‘아버지의 기쁨이다.’인데, 여러분 모두 아비가일처럼 살면,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생명 싸개속의 생명
삼상 25장 28절 ~ 절 / 이성희목사
‘발자국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환경지수를 측정하는 도구인데 한 사람이 차지하는 땅이 얼마인가에 따라 측정합니다. 우리나라는 발자국 지수가 아주 낮은 편입니다. 발자국지수는 낮을수록 환경파괴도 적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침대는 항상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불은 자고나면 개켜서 장롱 속에 넣으면 공간을 본래대로 환원합니다. 가방은 항상 부피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자기는 다시 접어 넣으면 공간을 환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색종이를 가지고 전부 뜯어 모자이크처럼 펼쳐놓습니다. 그리나 우리나라는 종이접기를 하여 너비를 아주 작게 줄여놓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공간을 환원하고 발자국지수가 낮다는 말입니다.
보자기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다 싸는 한국의 포용력과 슬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양사람들은 ‘나’라고 하여 개인주의적인 말을 하지만 우리는 ‘우리’라고 하여 집합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는 포용적 용어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편 가르기, 끼리 문화 등이 발달하여 우리 전통사회의 관습과 맞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발달했다는 포장문화와 외형문화를 보세요. 우리는 싸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싸서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한복을 입을 때는 두루마기를 마지막에 입고 두루마기는 절대로 벗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속에 입은 모든 것을 감추는 것입니다. 두루마기의 기능은 싸개입니다. 오래 전 여인들은 두루마기뿐만 아니라 얼굴을 감추는 싸개가 있었습니다. 감추는 것과 포용하는 것이 동시에 발달한 싸개는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합니다. 이런 우리의 의식 때문에 발달하는 것이 쌈밥이고 또 내숭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나발이란 사람은 갈멜족속이며 마온사람이며 부자였고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부인은 잘 얻었습니다.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고생할 때에 다윗이 보낸 용사 10명이 나발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발은 “다윗이 누구길래 나에게 달라고 하는가”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군사를 보냅니다. 나발 대신 아비가일은 다윗을 접대하며 남편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정성을 봐서 용서합니다. 아비가일이 베푼 잔치 후에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그 모든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발은 낙담하여 돌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내 주의 생명은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다윗의 생명은 생명싸개 속에 있다고 합니다. 다윗의 생명이 안전할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새 것은 생명, 사랑, 치유, 회개 그리고 창조입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의 심장에 큰 결함이 생겼습니다. 의사는 이 아이가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이 아이가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이 아이의 절망적 상태를 본 한 간호사가 쌍둥이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에 넣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인큐베이터 속에 나란히 눕혔습니다. 얼마 후에 보니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던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두 아이는 정상으로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신문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서로 포옹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의 제목을 “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라고 하였습니다.
아기의 팔이 생명싸개입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싸개는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팔에 안기는 것은 생명을 보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히는 것은 생명싸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 손 안에서 생명을 보존 받고 살아갑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 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팔을 의지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우리 팔이 하나님의 팔을 대신하는 생명싸개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생명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생명싸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생명싸개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사무엘상 25:29에는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입니다.
생명싸개 속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생명의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태초에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이십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큰 군대가 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빼앗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생명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살은 절대로 불가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싸개의 유일한 주인입니다.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 폐지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1997년에 23명이 사형 당한 것을 끝으로 10년 동안 사형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134번째 사형폐지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야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 안 죽을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는 죽을 사람입니까? 누구는 안 죽을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생명은 다 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하지 않은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보호 장치는 인간에게 극진합니다. 낮의 해가 우리를 상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밤의 달도 해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정말 좋은 찬양입니다.
생명싸개는 생명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은 눈동자와 같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생명을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꺼”라고 하실 것입니다. 다른 것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생명 주머니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절대로 안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두 종류의 희귀한 동물이 있습니다. 캥거루와 코알라입니다. 캥거루는 47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캥거루는 새끼를 보호하는 주머니를 배에 가지고 있는 유대류(有袋類)입니다. 말하자면 육아주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키우는 생명싸개입니다.
몇 주 전 미국에서는 이집트 출신인 미국인이 두 딸을 살해하고 잠적하였습니다. 둘째 딸이 비무슬림과 교제한다고 하여 아버지가 두 딸을 총으로 쏴 죽인 것입니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명예 살인’(Honour killing)을 한 것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고 하면서 죽인 것입니다. 딸의 생명이 아버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딸의 생명까지 빼앗는 것이 종교적 신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바른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버지는 생명싸개 역할을 못하고 생명을 버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문화 활동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종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감싸다’란 말이 있습니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휘감아 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기를 포대기로 감싸다’라는 말을 합니다. 둘째는 허물이나 약점을 덮어 주거나 두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막내라고 감싸주다’는 말을 합니다. 그 외의 의미가 있지만 이 말은 한 결 같이 보호와 도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는 감싸주고, 덮어주고,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시편 40:2에는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장치는 생명연장 장치 정도가 아니라 생명싸개입니다.
둘째, 생명싸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29절 하반절입니다. “내 주의 원수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원수의 생명은 하나님이 던지고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싸시면 안전하게 보호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면 누구도 돌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말라기 4:1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원수와 악인의 생명은 지푸라기같이 쉽게 타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은 절대로 안전합니다. 생명싸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을 보세요. 자궁(子宮)은 문자 그대로 생명싸개입니다. ‘아들의 궁’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궁에서 태어나니 누구나 공주요 왕자입니다. 자궁은 하나님의 신비가 숨어 있는 생명주머니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입니다. 아기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완벽한 생명보호 장치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싸개는 도처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도피성이란 것이 있습니다. 요단강을 기점으로 48개 성읍 중 6곳이 도피성입니다. 요단강 동편 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이 세 곳이 도피성입니다. 요단강 서편 게데스, 세겜, 헤브론, 이 세 곳이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은 문자 그대로 도피하는 성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입니다. 과실 살인이나 누명에 의한 살인을 막기 위하여 만드신 생명싸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보호 장치입니다.
마태복음 18:4에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이 만드신 귀한 것들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요나가 햇볕을 가리고 있는 박 넝쿨이 시들게 하십니다. 요나는 넝쿨이 시드는 것을 보고 불평하였습니다. 박 넝쿨이 시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보이신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시드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의 홍콩 무술영화를 보세요. 대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악당이 주인공의 집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다 죽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일 때 충신이나 유모가 아기를 안고 피신합니다. 장면이 바뀌고 아이가 청년이 되어 무술을 연마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내려가서 원수들을 찾아 복수합니다. 악당 두목이 훨씬 무술이 월등합니다. 주인공은 실컷 맞다가 막판에 극적으로 승리하고 등에 칼을 차고 주인공은 유유히 길을 떠납니다. 옛날 미국의 서부영화도 보시면 보복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피의 보복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율법이 이를 증명합니다. 율법에는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자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마치 보복법이 우선적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생명보존법이 우선입니다. 이슬람의 코란을 보세요. 구약의 보복법과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복수하느라 절대로 전쟁이 끝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생명을 빼앗게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을 보존하십니다.
마태복음 10:29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드신 어떤 생명도 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사야 31:5에는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보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사람을 그냥 버려두어 생명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십니다.
시편 18:2에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합니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보호하십니까? 생명을 사랑하시니까 그렇습니다. 한 생명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매라고 합니다. 진리는 속임수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합니다. 의는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신발을 신으라고 합니다. 평안은 사탄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합니다. 믿음은 의심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합니다.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 의, 평안, 믿음, 구원, 이 모두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보호를 위한 하나님의 생명싸개가 전신갑주입니다. 이렇게 전신갑주를 입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원수가 침범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요한복음 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십니까? 보호하고, 풍성하게 하고, 생존하게 하고, 그 안에서 공급하기 위하여 문입니다. 그 문 안에 생명과 구원이 있습니다. 그 문 밖에는 생명과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는 온 세계, 온 인류를 다 싸고 있습니다. 생명보자기는 온 세계를 다 싸기에 충분한 큰 싸개입니다. 우리교회가 생명을 보존하고 함께 하는 생명싸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은 생명이 흐르는 곳이 돼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생명싸개 안에서 구원받으세요! 우리 모두 생명싸개로 구원하세요!
생명과 구원이 보장된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삼상 25장 28~35절 / 김형준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에게 손자인 아룬 간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아룬간디는 할아버지 간디로부터 자제하는 법, 평화롭게 힘을 사용하는 법, 그리고 겸손함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할아버지의 깊은 지혜와 사랑 속에서 자란 아룬간디는 그의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생의 교훈을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룬의 아버지는 회의 참석하기위해서 자기아들에게 15km 떨어진 사무실에 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차를 수리해야하므로 정비소에 맡기고 늦어도 오후 5시까지 다시 사무실에 돌아오라고 합니다. 아룬은 차를 정비소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아룬이 점심을 먹고 온 사이에 생각보다 빨리 차는 이미 다 수리가 되었습니다. 아룬이 시계를 보니 이제 12시였습니다.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화려한 극장간판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편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었습니다. 그는 한 편만 봐도 시간이 넉넉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게 보다보니 자막이 올라갈 때야 자신이 두 편을 다 본 것과 시간이 6시 5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허겁지겁 운전해서 아버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아 네게 무슨 사고가 생기지 않았는지 무척 걱정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때 아룬은 갑자기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리석은 정비사들 때문에 이렇게 늦었어요. 그 사람들이 고장의 원인을 좀처럼 찾지 못하다가 겨우 발견해서 수리했는데 끝나자마자 왔는데도 많이 늦었네요” 아버지는 당황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다시 침착한 얼굴을 하였습니다. 아룬이 운전석에 올라서 아버지에게 타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차를 타지 않습니다.그리고 아버지는 아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차를 몰고 집으로 가거라. 나는 걸어가겠다.” 아룬은 당황해 하며 “아버지! 집까지는 무려 15km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위엄과 침착함이 가득담긴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지난 17년 동안 너를 올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했단다. 그런데 너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구나. 나는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다. 어떻게 해야 더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집까지 걸어가야겠다. 그리고 네가 거짓말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나쁜 아버지였다면 부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서 정비소에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걷기 시작했고 이 두 사람은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아룬간디는 어떤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해 본적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춘기 때는 자기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서 속일 수 있는 분기점 속에 놓여 질 때가 많습니다. 그 아버지가 주신 좋은 교훈은 일평생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사는 사람으로 그의 일평생을 풍요롭게 한 것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피할 수는 없을 거예요. 우리가 그 일들을 일어나지 않게 조정할 수 없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에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개인과 공동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 세 사람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각기 나타태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 가운데 세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나발이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발은 팔레스틴 광야에서 많은 가축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양이 삼천이고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 소유가 넉넉함이 틀림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일꾼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조상은 갈렙으로 믿음의 아름다운 유산이 간직되어 내려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인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할 정도로 그는 매력과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능력 있고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리석은 자라는 의미로 저능하거나 단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런 인생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삼상25:3에 그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mean and dishonest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도량이 좁다, 인색하다, 이기적이다 라는 의미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일하는 일꾼들의 눈에 비친 그는 17절에 불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어성경에 ill-tempered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뜻은 성미가 까다로운, 화 잘 내는, 심술궂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심술 맞고 인색하며 그리고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으로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고집 세고 까다롭고 그리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말하기를 시편 14편은 다윗이 나발을 보며 내린 최종적인 판단이라고 했습니다. 시편14:1,3 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발은 자기의 시기를 조절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나발과 그 집안의 모든 남자를 섬멸하러 올 때에 아무런 상황도 알지 못한 채 잔치를 크게 열고 술에 몹시 취하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빠져서 마음이 기뻐했다고 삼상 25장 36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양털 깍는 축제 때에 곤고함 속에 있는 다윗과 그 병사들이 나발에게서 약간의 양식을 겸손하게 구합니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양털 깎는 축제 때에는 이웃들에게도 풍족하게 나누었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광야에서 나발의 양떼를 맹수와 도적으로부터 지켜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나발에게 구할 때 나발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10-11절에 ‘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내가, 내 떡, 내 양털 깍는자 라는 단어가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즉 자기중심적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소유는 내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나발은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기회에 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곤고하고 어려울 때 나발이 가진 것을 조금만 다윗에게 나눠준다면 다윗은 일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며 나발의 든든한 후견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발은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발에게 왜 이런 삶의 모습이 형성되었을까요? 그는 성공과 부는 자기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아니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베푸는 삶의 모습이 없었고 헌신도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도움 받지 않으면 살아 갈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나발의 삶속에는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관점이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많은 소출을 보며 내 영혼아 내가 먹고 편히 쉬자고 외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밤 너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도로 찾으시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라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자기인생의 영혼과 미래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발에게는 가까이 하는 좋은 친구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그의 종들도 이미 나발의 삶의 태도와 모습을 보며 더 이상 바른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교만을 의미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이 교만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심판이 없다는 것, 내 인생은 내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25장 38절에서 나발의 마지막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의 삶의 모습은 그가 이미 멸망을 예고하고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결정적으로 인생의 원리인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저는 풀의 꽃같이 쉬이 살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도 하나님이 계신 자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양극단의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성공했을 때 너무나 교만합니다. 그리고 실패 할 때는 처절하게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어려움 앞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좌절 앞에서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성공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둘째로 우리는 다윗이라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화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에게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별로 나누어진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울의 죽음 앞에 슬피 울며 애도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다윗을 존경하고 진정한 이스라엘 왕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분열과 갈등, 다툼과 나눔을 온유함으로 하나로 만든 화해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긍휼의 사람입니다. 사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을 선대하여 자기의 식탁에 함께 앉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적장 아브넬의 죽음까지도 애도하는 사랑과 긍휼이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온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나발로 부터 거절과 모욕을 듣게 됩니다. 다윗은 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고통당하고 닮지 않으려고 하는 사울의 분노와 행동이 그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지금 그는 쫓기는 몸입니다.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함께 하는 600명의 군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나발로 인한 다윗의 분노는 나발의 집에 거하는 모든 남자를 다 죽이겠다고 맹세하게 합니다.
이제 다윗의 분노는 광야에서 배운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의 정체성도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모욕과 멸시 그리고 피곤함과 분노만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거룩한 영성은 이제 나발과 싸우는 타락한 영성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내는 다윗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화해와 긍휼, 그리고 축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오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분노에 사로잡혀있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나타나서 다윗의 발걸음을 돌이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다윗의 일이 아니며, 하나님이 지금껏 다윗을 인도함은 나발 같은 어리석은 인간에게 더 이상 다윗의 관심과 영성과 분노가 머물러 있게 하기위해서가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본래 모습과 해야 할 일로 돌아가게 합니다. 다윗이 잘못된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버릴 뻔한 일에서 돌이키게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의 삶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귀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복수를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서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에 관심을 모으고, 잘못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 분노할 일이 많지만 내가 해야 할 것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일들과 물질에 온갖 신경과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단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사단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장애물은 치워나가면 됩니다. 여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관심을 모으고 있을 때에 사단의 전략에 말리게 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며 가나안입니다.
여러분 오늘본문 사무엘상 25장 처음에 ‘사무엘이 죽으매’ 라고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아는 사무엘이기에 다윗을 위해 날마다 간절히 부르짖으며 중보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의 중보기도가 끝나고 난 지금 다윗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이구나 하는 것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떠나 갈수 있는 사람, 그 자리를 돌아 설 수 있는 사람, 바로 이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계속 사랑하시며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 저주하기 위해서 가야하는데 나귀가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안 가느냐! 채찍을 꺼내자 나귀가 입을 엽니다. “너 지금 천사가 칼 들고 있는 것 보이지 않니?” 하나님이 이미 막아버려 짐승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 길을 걸어가는 그 인생에는 멸망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잘못된 것 인줄 알면서도 자기의 분노대로 그 인생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그 길로 계속 나갔다면 주의 온전한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수 하게 하도록 우리를 지금까지 살려 두신 것 아닙니다. 주께서 나에게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내 인생의 잘못된 선택을 내려놓고 바른길로 걸어갈 때 다윗을 하나님께서 정말 아름답고 존귀하게 쓰신 것처럼 여러분을 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산발랏과 도비야는 느헤미야가 성 쌓는 것을 방해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 쌓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쟁기를 들고 성 쌓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내 삶의 길을 다시금 찾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돌이켜 회개와 결단하시는 삶의 모습이 있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십니다.
셋째,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발에게 바른말을 하지 못하는 종들도 이 아비가일에게 와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종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방법과 시기를 잘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준비합니다. 잠언 21:14절에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뇌물이 아닙니다. 이 선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이 여인은 자기남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들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선물을 들고 달려갑니다. 이 여인은 다윗 앞에 코를 땅에 대며 간청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분노를 그 어떤 것으로도 중단시킬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다윗을 향한 인도하심과 계획을 다윗에게 이야기합니다. 다윗을 인도하신 하나님! 그리고 다윗을 존귀하게 세울 것도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다윗이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겠지만, 이들을 죽일 때에 하나님의 일의 오점을 남기는 일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즉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며 화해와 긍휼 그리고 축복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알고계신 하나님께 맡기라고 간청합니다. 남편대신 속죄하며 다윗이 다윗다운 행동과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일깨워줍니다. 다윗의 잠자는 영성을 다시 일깨웠을 뿐더러 분노에 가려진 영성과 자존심에 상한 마음을 일깨웠습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파멸이 길로 갈 때에 그에게 나서서 겸비하고 진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줄 줄 아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 이 아비가일! 바로 이 여인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영적인 충고에 눈을 뜨며 비로소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삼상 25: 32-3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여호와를 찬송할 찌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하며 또 네게 복이 있을 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은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 하였으니라’
아비가일은 자기남편과 집안을 구한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행동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사람의 일과 생각에 동의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하는 일과 생활 속에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인가를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 상대방의 분노에 충동질하고 책임지지 않을 말들로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당신의 삶은 새롭게 선택되어야 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당신의 발걸음을 돌이키십시오. 당신의 선택을 취소하십시오. 당신의 삶속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이 뭔지 그것을 깨달으십시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비가일 같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교회의 모습과 나가야 할 방향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지금까지, 오늘 날까지 살려두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한국교회에 아비가일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동안교회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위에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자기 목적과 자기 생각과 자기 마음대로 정욕대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정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좌절하고 절망하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하나님은 당신이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그 길을 찾아 함께하자고 이렇게 얘기해 줄 수 있는 영적으로 깨인 사람이 있다면 그 교회는 풍성한 교회일 것입니다. 그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 죄를 충동질 했다면 오늘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룰 수 있는 모습은 없습니다. 이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바라보면서 영적인 충고와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아비가일과 같은 삶이 오늘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동원 목사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설교시간 혹은 대화할 때에도 유머를 즐겨하신 답니다. 그런데 한참 하고 있다 보면 사모님이 한 쪽 눈을 가리고 이 목사님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두 눈뜨고 못 봐 주겠다는 경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목사님은 즉각 깨닫고 화제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미있게 말씀하시려고 했지만 자신을 순간순간 깨닫게 하고,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깨워주는 영적인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충고가 없었다면 그는 죄를 짓는 자리에까지 나아갔고, 무고한 피를 흘리는 사람으로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적 지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앞으로 주께서 주신 귀한 사역을 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어렵게 되는 상황을 막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39절에 다윗이 나발이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 찌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한 가지 사건을 보면서 세 가지 다른 모습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세 가지 속성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발을 통해서는 어리석은 인생이 무엇인가? 그러한 삶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삶의 모습을 만드는가를 보았습니다. 다윗을 통해서는 우리가 원만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만 다윗 속에 있는 사울의 모습을 나타낼 때를 경계하며 재빨리 돌이킬 줄 아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아비가일을 통해서는 그 당시 영향력 없는 여성이었지만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일을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게 주어진 일이나 사건 앞에 어떤 모습으로 늘 서오셨습니까?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를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말씀을 맺겠습니다.
남아프리카 미개부족의 하나인 바벰바족사회에는 지극히 범죄행위가 드물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는데 놀라운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범죄한 사람이 나오면 그를 마을 한복판 광장에 세웁니다. 그리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와서 그를 중심으로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죄지은 사람이 과거에 했던 일이나 칭찬을 하게 됩니다. 즉 죄지은 사람의 장점, 선행, 감사, 미담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게 만듭니다. ‘넌 원래 착한 아이였어 ’, ‘작년에 비가 많이 왔을 때 떠내려가는 돼지를 건져 주었어’ 등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물론 의도된 과장이나 농담은 금지됩니다. 칭찬이 한 바퀴돌기시작하면 어느새 이 죄를 지은 사람은 흐느끼기 시작한답니다. 그때 그 마을 사람들이 다가가서 같이 울면서 껴안아 주고 위로하고 용서하는 이것이 이 예식에 절정이라고 합니다. 위로와 격려로 그의 죄를 용서해줍니다. 이 행사가 끝나고 나면 죄를 지었던 사람은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일을 우리 성령께서 지금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 나발과 같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나 중심적으로 나만의 이익을 위해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들, 그때 성령께서는 아비가일처럼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며 우리의 허물을 대신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그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며 돌이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선택하는 대로 결정됩니다. 여러분이 선택하는 모든 일에 주의 성령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아비가일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 받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여러분 자신들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비가일처럼 주의 뜻을 증거하고 죄로 가는 그 영혼을 돌이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아비가일 같은 귀한 사람을 늘 붙여 주셔서 우리 일거수일투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며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처럼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돌이킬 수 있는 영성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교회가 이 민족이 가지 말아야 될 길을 분명히 지적하며 진정 교회가 가야 될 길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아비가일과 같은 그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심령이 그런 심령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선택 속에 성령님 항상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윗의 분노
이익환 목사 / 삼상 25:30-31
분노(憤怒)는 우리가 살면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분노를 자주 폭발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노를 안으로 쌓아 놓는 사람이 있다. 표현되지 않는 분노는 우울증이 된다. 그래서 우울증을 ‘응고된 분노’라고 한다. 그러나 분노를 함부로 쏟아놓는 사람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온다. 지나치게 화를 낸 것에 대한 후회 때문에, 또한 화를 내도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하나님도 분노하신다. 시편 7편11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의 분노는 공의를 행하고, 인생을 바로 건설하기 위한 분노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분노는 옳은 것 같지만 너무도 자주 충동적이고 파괴적으로 흐른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분노하는 사건이 나온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뚜껑이 열린 날이 아닐까 싶다. 다윗의 분노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분노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삼상 25: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오늘 본문 25장은 사무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었던 사무엘이 죽었다. 다윗도 라마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바란 광야로 도망간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다윗은 왕이 되기는 커녕 도망자로 피해 다니고 있다. 사무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희미해지고 왕이 된다는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을 것이다.
삼상 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한 부자가 나온다. 그의 이름보다도 그가 가진 재산이 먼저 소개된다. 이어서 그의 이름이 소개된다. 삼상 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나발은 ‘바보’,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보요”라는 소개에서 우리는 그의 캐릭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삼상 25:3,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나발이 부자이고 갈렙 족속이라는 소개는 그가 유대지파의 재력가임을 보여준다. 한편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소개된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러한 소개를 통해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삼상 25: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양의 털을 깎는 것은 보통 5~6월 여름 전에 벌어지는 연례 행사였다. 삼천 마리 양의 털을 깎는 큰 행사가 나발 집안에서 벌어진다. 양 주인은 양털을 통해 큰 소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양털 깎는 행사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먹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된다. 다윗은 이 때 자신의 부하 10명을 나발에게 보내 떡과 고기를 달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매몰차게 답변한다. 삼상 25:10-11,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 말이 고스란히 다윗에게 전달된다. 다윗의 뚜껑이 열린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 앞에서도 침착했던 그였다. 쫒기던 아둘람굴 속에서도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하며 평정심을 지켰던 그였다. 그러나 자신을 모욕한 나발의 말에 다윗은 이성을 잃는다. 그는 복수의 칼을 빼어 든다. 400명의 부하를 무장시켜 나발을 죽이기 위해 출발한다. 삼상 25: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자, 이 소식을 하인에게서 들은 아비가일이 급해진다.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등의 음식을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에게로 달려간다. 아비가일은 총명했다. 다윗을 만나자 그녀는 훌륭한 분노 상담가 역할을 한다. 먼저 그녀는 화로 가득한 다윗의 마음을 공감해준다. 삼상 25:25,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 유발자인 자기 남편을 깎아 내린다. 그는 불량하고 미련하기 때문에 다윗이 분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분노에서 벗어나는 첫번째 스텝은 나를 화나게 하는 그 사람이 정말 내가 화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평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과 행위 때문에 화가 났지만 그 화가 나를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아비가일이 말한다. 삼상 25: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게 했다. 그동안 다윗은 자신의 원수에게 피 흘려 스스로 보복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잘 지켜왔다. 그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비가일은 29절에서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고 말한다. 아비가일은 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임을 다윗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분노에서 벗어나는 두번째 스텝은 내가 분노하며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또 말한다. 삼상 25:28,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한다. 다윗이 나발에게 격노하게 된 이유는 그의 어리석은 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다윗은 자신이 누구이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잊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이고 장차 왕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사람이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일깨워주며 다윗의 정체성과 부르심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든든한 집, 다윗 왕조를 세우실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도망다니며 고단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여호와를 위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당신의 삶속에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잘 해왔습니다.’ 이런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마음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벗어나는 세번째 스텝 나의 부르심과 정체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직장에서 상사가 나를 화나게 해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사명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여집사님들이 자녀와 씨름하며 지지부진한 싸움을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위한 싸움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를 키우면서 분노는 여전히 힘든 싸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힘들어서 지쳐갈 때 우리는 우리를 어미로, 아비로 부르셔서 자녀를 맡겨주신 사명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필요 이상의 분노를 쏟지 않고 사명자로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 말한다. 삼상 25:30-31,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다윗은 지금 분노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잊고 있었다. 만약 다윗이 나발 집안의 사람을 다 죽였다면 어떤 결과가 따랐을까? 나발은 유다지파의 세력가 였다. 후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대지파의 왕이 된다. 만약 다윗이 나발과 그 집안 남자들을 다 죽였다면 그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되더라도 그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분노를 느끼는 현재의 상황을 미래와 연결해서 판단하도록 도운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했기에 다윗은 지금 코 앞에 있는 상황과 분노를 유발하는 사람 때문에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다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벗어나는 네 번째 스텝은 현재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노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위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며 결정하라는 것이다. 내 안에 분노가 가득할 때에 우리는 잠시 스스로 ‘타임 아웃’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분노가 미칠 미래의 결과를 한번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다윗은 그의 분노를 파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된다. 아비가일은 잔치로 취한 나발을 깨우지 않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그간에 벌어진 일을 보고한다. 나발은 그것을 듣고 낙담하여 몸이 돌같이 된다. 그리고 열 흘 뒤에 죽게 된다. 하나님이 나발을 치신 것이다.
우리는 평생 분노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틀려서 또 화가 나게 될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은 나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나의 분노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요나는 자기를 시원하게 해주던 박넝쿨이 없어져서 화를 낸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질문한다.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가 대답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사실 요나는 적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다. 도망가다 잡혀서 결국 마지못해 가서 전했는데, 니느웨 백성들이 정말 회개하자 더 화가 났던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행을 저질렀던 원수도 사랑하시고 그들을 아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고서 요나는 더이상 분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엡4:31-32절은 우리에게 도전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점점 더 쉽게 분노하는 사회에 살면서 적용하기 힘든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왕같은 제사장이 되라고 부름 받았다. 쉽지 않겠지만 분노할 수 있는 권리를 내려 놓고 친절과 긍휼과 용서를 심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다윗처럼 우리를 왕으로 세워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경건의 능력
삼상 25:23-31 / by skd1
😨 숨 막히는 만남! 불타는 다윗 앞에 선 그녀 (기)
급히 예물을 준비하고 길을 나선 아비가일. 마침내 그녀는 복수심에 불타 칼을 차고 내려오는 다윗과 그의 군사들과 마주칩니다 (삼상 25:20). 성경은 바로 직전, 다윗이 얼마나 격분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지켜 그 모든 것을 잃지 않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아침까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21-22절). 살기등등한 맹세까지 하며 나발의 집을 향해 진격하던 다윗. 그 앞을 막아선 아비가일의 등장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고요함, 혹은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아비가일의 입술에 달려 있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수많은 생명의 운명을 가를 것입니다. 과연 그녀는 어떤 말로 이 위기를 넘기고, 다윗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까요? 그녀에게서 발휘될 '경건의 능력'은 어떤 모습일까요?
💧 분노의 불길에 뿌려진 겸손의 이슬 (승 - 1: 격노를 쉬게 하였다)
다윗을 보자마자 아비가일은 급히 나귀에서 내려 그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23절). 땅에 얼굴을 댈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극진한 예의와 겸손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열어 말합니다.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4절). 놀랍게도 그녀는 남편 나발의 잘못을 변명하거나 축소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죄악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는 단순히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분노가 향할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려 남편과 집안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용기 있는 행동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진심 어린 자기희생의 자세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다윗을 "내 주(my lord)"라고 부르며 극존칭을 사용하고, 자신은 "여종(your maidservant)"이라고 낮춥니다. 이러한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 그리고 남편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이미 분노로 이성을 잃어가던 다윗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듯, 그녀의 겸손과 지혜로운 첫마디는 다윗의 격렬한 감정을 진정시키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황을 압도하는 부드러움, 경건한 성품에서 나오는 능력의 첫 번째 발현입니다. 그녀는 소리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깊은 겸손과 자기희생적인 태도로 분노의 핵심을 파고들었습니다.
👑 "왕이 되실 분이잖아요!" 아비가일의 통찰력 있는 설득 (전 - 1: 바른 판단을 하게 했다)
아비가일은 단순히 감정에 호소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이 왜 지금의 분노를 멈추고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하는지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지혜가 빛나는 부분이며, 다윗이 바른 판단을 하도록 이끄는 핵심입니다.
먼저, 그녀는 남편 나발에 대해 솔직하게 평가합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25절). 남편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사실 나발의 어리석음 때문에 다윗 같은 위대한 인물이 손에 피를 묻힐 가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윗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의도가 담긴 현명한 발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다윗의 미래와 하나님의 계획을 상기시킵니다.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나이다" (26절),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8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0절). 아비가일은 다윗이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특별한 인물임을 일깨워줍니다. 지금 개인적인 모욕감 때문에 피를 흘린다면, 훗날 왕이 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오점과 후회가 될지를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31절).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이처럼 아비가일은 다윗의 시선을 현재의 분노에서 미래의 영광으로, 개인적인 감정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으로 옮겨가도록 돕습니다. 그녀는 다윗이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스스로를 해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그의 정체성과 소명을 일깨워주며 '바른 판단'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는 단순한 임기응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 즉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힘이었습니다.
🙏 "덕분에 살았어요!" 그녀의 지혜가 만든 기적 (전 - 2: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과 겸손한 태도가 가져온 가장 직접적이고 극적인 결과는 바로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22절). 이는 나발뿐 아니라 그의 집안에 속한 모든 남자 종들까지 포함하는 무서운 복수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아비가일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날 밤 갈멜 지역은 끔찍한 피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 앞에 엎드려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24절),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바치며(27절), 다윗의 명예와 미래를 생각하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함으로써(28-31절) 이 끔찍한 비극을 막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분노에 사로잡혔던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의 칼날을 거두게 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나발 한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 속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까지 구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녀는 다윗 자신도 구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그날 피를 흘렸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스스로 복수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훗날 그의 왕권에 큰 걸림돌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영적인 삶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그러한 죄악과 후회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왔습니다. 즉, 그녀는 육체적인 생명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까지 구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경건한 삶의 태도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파멸 직전의 상황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아비가일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 이것이 바로 '경건의 능력'! 우리 삶에 적용하기 (결)
사무엘상 25장 23절부터 31절까지 펼쳐진 아비가일의 모습은 '경건의 능력'이 무엇인지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그녀의 능력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지혜, 겸손, 용기, 그리고 통찰력이었습니다.
격노를 쉬게 한 능력: 그녀의 깊은 겸손과 자기희생적인 태도는 불같이 타오르던 다윗의 분노를 잠재웠습니다. 경건한 성품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평화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바른 판단을 이끈 능력: 그녀는 다윗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계획을 일깨워주며, 순간적인 감정을 넘어선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경건한 지혜는 위기의 순간에 명확한 길을 제시하는 등대가 됩니다.
생명을 구한 능력: 그녀의 용기 있는 중재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다윗 자신도 죄악과 후회로부터 건져냈습니다. 경건한 삶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됩니다.
아비가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는 얼마나 경건의 능력이 담겨 있을까요?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나 갈등 속에서 아비가일처럼 겸손과 지혜로 평화를 만들어가고 있나요? 아니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지는 않나요? 아비가일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혜와 용기를 구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역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생명을 살리는 '경건의 능력'으로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마저 감탄하게 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과 행동을 본받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혜로운 여인
삼상 25장 23-31 / 신인훈 목사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때에 엔게디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이기 때문에 자기는 사울 왕을 해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6장에 보면 다윗이 다시 십 황무지에 있었습니다.(26:2) 그러므로 사무엘상 25장도 엔게디에서 다시 전에 있었던 십 황무지 지역인 십 광야로 돌아갔습니다.(25:1) 십 황무지와 25장에 나오는 나발이 산 마온은 다 바란 광야에 있는 성으로서 매우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나발이라는 사람은 큰 부자로서 마온 사람인데 갈멜에서 가축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마온에서 갈멜은 1.6km 이므로 1mile 거리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사울 왕을 피하여 다니는 사람이었으나 사울 왕이 지키지 못한 유다 남방지역인 그일라와 십과 마온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보호하여 주므로(삼상23:5) 그 지역 사람들은 다윗으로부터 모두가 다 은혜를 입고 평안하게 자신의 산업을 경영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은 군사가 600명가량이었으므로(삼상25:13) 여자와 노인들과 아이까지 합치면 아마 2000명은 더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음식문제로 부자인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 하였으나 나발은 다윗을 욕하고 요청을 거절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나발을 해치려 갈려고 할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찾아 왔으므로 다윗이 직접 보복 하지 아니 하였으나 하나님이 치시므로 나발은 죽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대한 보복은 하나님께 맡겼으나 나발에 대한 보복은 자신이 직접 하여 그 후에 보복 하였다는 말을 들을 번 하였으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시므로 아비가일을 보내어 다윗의 실수까지도 미연에 방지 하여 주셨습니다.
I. 다윗이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습니다.(삼상25:2-11)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사울 왕으로 부터 쫓겨 다니므로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있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습니다. 사울왕의 눈을 피하여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하여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을 아니었습니다. 또 사울왕은 누구든지 다윗을 보면 그 있는 곳을 고발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다윗이 있는 곳을 알고 고발 하지 아니하든지 그에게 음식을 주든지 하면 그 사람은 85명의 제사장의 죽음과 같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 나발은 큰 부자였습니다.(2-3)
마온에 사는 나발이라는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성격은 완고하고 행실은 악한 사람이었으며 불량한 사람이었으나(25)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로운(3,33) 여자였습니다.
2. 다윗은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습니다.(4-8)
다윗은 광야에서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의 음식물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근에 부자로 사는 나발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 하였습니다. 나발은 목축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윗의 일행이 갈멜 부근에 있으므로 블레셋 사람들과 도적들이 와서 나발의 가축을 훔쳐갈 수가 없었습니다.(7,15-16,21) 다윗은 그일라와 십과 마온과 갈멜 지역의 보호자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은혜를 입은 나발이 기쁜 마음으로 다윗의 요구를 응하여 줄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3.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9-11)
다윗은 좋은 말로 얼마의 음식물을 도와 줄 것을 요청 하였으나(6)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거절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면서 다윗에게 모욕 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신15:7-11; 잠11;24-25;14:31;19:17)
나발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사울 왕이 무서워 거절하였습니다. 나발은 하나님보다 사울 왕을 더 무서워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 사람을 무서워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무서워합니까? “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은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예수님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II.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행동을 하였습니다.(삼상25:14-27)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 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나발이 도움을 거절한 것과 다윗을 모독한 것을 다윗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매우 화가 나서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 중에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고 사백 명은 칼을 준비하여 나발에 속한 모든 남자는 다 죽이려고 떠났습니다.(12-13; 21-22)
1. 아비가일은 목자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14-17)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목자로부터 다윗의 사람들이 찾아온 것과 나발이 다윗의 요청을 거절한 것과 또 다윗을 모독한 말을 한 것을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일행이 자기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나발의 가축이 안전 하였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윗이 화가 나서 나발을 해하기로 결심한 것 까지도 아비가일은 들었습니다.
2.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날 준비를 하였습니다.(18-19)
목자의 보고를 들은 아비가일은 급히 일어나 다윗에게 줄 음식물들을 준비하여 나귀에 싣고 목자들을 앞서 보낸 후 아비가일은 나발에 말을 하지 않고 다윗에게 찾아 갔습니다.
3.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났습니다.(20-27)
다윗은 나발을 해치러 가고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러 가다가 중간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절하며 나발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자기는 다윗의 사람들이 찾아 온 것을 알지 못해서 돕지 못한 것은 대단히 죄송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직접 나발에게 보복 하시는 것을 막으시려고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셨다 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비갈일은 가져온 예물을 다윗에게 주면서 내가 잘못 했사오니 허물을 용서하여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과 나발의 중보의 사역으로 다윗이 나발에게 보복을 하지 아니한 것은 죄인인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중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이 된 것의 모형이며 그림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III. 아비가일의 믿음(삼상25:28-35)
아비가일은 매우 지혜로운 여자요 용모가 아름답고 또한 믿음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1. 아비가일은 다윗의 잘못이 없음을 알았습니다.(28)
사울왕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다윗이 모반하여 자기를 해치려한다고 말하였으나(삼상22:8) 아비가일은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인 것과 지금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것도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이 다윗을 통하여 든든히 세우기 위한 한 과정으로 알았습니다. 또 다윗의 지나간 과거에 한 번도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으나 억울하게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심을 믿었습니다.(29)
아비가일은 지금 현재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므로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 시리이다.”고 말하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안전 할 것이며 옛 날 다윗이 던진 물매에 맞아 쓰러진 골리앗과 같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물매에 맞아 사울 왕이 쓰러져 죽을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3.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도 믿었습니다.(28,30-31)
아비가일은 다윗이 멀지 아니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도 믿고 왕이 되시면 그때 자기를 생각 하여 달라는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28) “ 여호와께서---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30) “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 하소서”(31) 이 말은 모두 다 다윗이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번 3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면서 대단한 세 여자의 믿음 곧 릇의 믿음과 한나의 믿음과 아비가일의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용모도 아름답고 지혜도 있고 믿음도 있어서 나발에게는 더 없는 좋은 아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웃에 가난한 자나 나그네가 있으면 그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부자가 아니라도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부자였던 나발은 다윗이 나발의 가축을 지켜준 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발은 하나님의 말씀과 다윗에 대한 은혜를 저버리고 사울 왕을 두려워하여 다윗을 돕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보복 할러고 하였으나 다윗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보내어 죄를 범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아비가일은 지혜도 있었고 믿음도 있어서 다윗이 보복하는 것을 막는 하나님의 도구로 예수님의 모형과 그림자로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도 믿음과 지혜로 준비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도 귀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실 것입니다.
